<font color=green>[대담]빨치산 출신 박선애씨</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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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11-16 00:00 조회1,5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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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의해 갈라진 분단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어 살아온지 80여년이 넘은 여성 빨치찬 박선애씨. 그는 비전향장기수인 남편 윤희보씨를 평양에 보내고 자신은 돌봐야 하는 여동생 때문에 함께 가지 못했다. 그의 삶은 어떨까. 월간 <우리>11월호는 특별대담으로 다뤘다. 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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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인터뷰] 사형장 미루나무는 알고 있다
[삶·을·배·우·며]
비전향 여성 빨치산 박선애 선생과 함께 간 서대문형무소
[가족사진:왼쪽부터 박선애, 박순애 선생. 남편 윤희보 선생, 딸 윤봉혁씨]
팔순을 넘기신 나이인데도 머리만 반백으로 물들어갈 뿐 그이의 얼굴은 점점 더 해맑아져 간다. 얼굴마다 피어오르는 미소에는 그 어떤 꾸밈도 없고 사람들을 걱정해주는 떨리듯 들려오는 음성에는 더 없는 따뜻함이 묻어있다.
나이가 들수록 소녀가 되어가는 그이가 바로 여성으로는 마지막까지 전향을 하지 않고 감옥에서 나왔던 박선애 선생이다.
그 박선애 선생과 함께 노란 은행잎 하나둘씩 나풀거리는 청명한 가을날에 5년 동안 수형생활을 했던 서대문형무소로 나들이를 갔다. 15년의 긴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 여전히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를 간직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문인들 오죽이나 잔인했으며 마음고생인들 얼마나 심했을까. 그런데도 얼굴에는 수심 한 줄 그늘 한 조각 어려있지 않다.
처음으로 보았던 찌푸린 얼굴
서대문형무소 앞에 서자 제일 먼저 숨을 컥 막히게 한 것은 아주 높다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벽이었다. ‘얼마나 저 벽을 뚫고 탈출하고 싶었을까.’허나 너무나 견고해 보였다. 절망의 벽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전시관들을 둘러 보았다. 두 눈 부릅뜨고 구식 장총을 잡고 있는 의병들, 머리가 잘린 독립운동가, 줄로 목을 매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독립군들의 시신 사진들을 박선애 선생은 꼼꼼히 보고 읽고 하였다. 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한 사람들의 이름도 한명한명 읽어갔다. 여운형, 홍명희와같은 이름을 발견하고 기쁜 빛이 얼굴에 역력하다.
“예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추가되었어.”
하지만 곧 얼굴은 어두워진다.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 둔갑해 놓은 것은 아직도 여전허구먼,
쯔쯧.”
거대한 서대문형무소 담벽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쉬고 있는 유치원생들. 아직은 모를 것이다. 이 미소를 위해 죽어간 열사가 얼마나 많은지를...
1층과 2층의 사진을 보고 지하실로 내려가서 인형으로 만든 모형 고문실을 둘러보았다. 관람하는사람이 지나가자 자동센서가 인형들을 작동시킨다.
묶인 여성의 손가락에 전기를 연결시키고 돌리자 여성은 비명을 지른다.
“어서 말을 하란 말이야. 조직원이 누구야?”일제 경찰의 독살스런 녹음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든다. 전기고문을당하는 여성 옆에는 또 다른 여성의 벌려진 양팔이 천정에 묶여있다. 머리와 저고리는 풀어헤쳐져 젖가슴마저 드러나고 온몸이 피투성이다. 옆방 동지들의 비명소리를 들은 한 애국자가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하고 있고 옆에 있는 사람은 분노로 핏발선 눈을 번뜩이고 있다. 다른 한 독방에서는 고문으로 다친 팔뚝을 입과 다른 손을 이용해서 천으로 묶고 있다. 기어이 이겨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지하실을 나올 때까지 박선애 선생은 질문을 해도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정말로 저렇게 잔인한 고문을 했나요?”
“…했으니깐 만들어 놓았겠지….”몇 마디를 하더니 더 이상 말이 없다.
박선애 선생은 잠깐 쉬었다가 가자면서 잔디밭에 앉았다.
“어이구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허네.”
선생의 혈색이 좋지 않다. ‘괜히 형무소에 오자고 했던가, 건강이 나빠지면 어쩌나’걱정이 들었다. 선생을 몇 번 만났었지만 이렇게 찡그린 표정을 본적이 없었다. 나는 분노만 했을 뿐인데 선생은 속이 메스껍다고 했다. 이는 겪은 사람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이야기마다 깃든 혁명가의 낭만
“자 여기서 사진을 한 장 찍어요, 어머니 참 곱네요”
서서히 선생의 얼굴이 펴지기 시작한다.
“찰칵.”
“어머님께서도 저렇게 고문을 당했겠네요.”
“어이구 말로는 다 못하지.”
대전형무소에 있을 때였다. 감옥에서도 학습을 하기 위해 몽당연필로 쪽지에 빽빽하게 적어서 교재를 만들고 돌려가며 학습을 했는데 전달해 주던 동지가 실수하여 그만 발각되었다.
“끌려가서 지하실 방에 들어갔는데 웬 각목이 가득 쌓여 있는 거야, 나는 저게 뭣이다냐 했어, 어디 수리 공사를 하려고 저렇게 각목을 갖다 놓았는갑다했는데 쪽지를 만든 사람과 본 사람들 다 말하라고 그 각목으로 온몸을 패는 거야, 각목이 숱하게 부러져도 절대 말하지않았지, 어차피 이미 죽을 각오는 되어 있었으니까. 무서운것이 없었어. 그러자 이놈들이 나를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때리는 거야.”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감방에 돌아왔다가 다음날 또 불려가서 맞았다. 터진 상처에 또 매가 가해질 때는 정말 살점을 날카로운 칼로 저미는 것처럼 아팠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글쎄 우리들에게 벌을 준다고 모두 한 방에 가두는 거야. 이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 이제는 마음놓고 함께 공부도 하고 즐겁게 지냈지.”
그 가혹한 이야기를 이렇듯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선생의 낙천적 기질이 놀랍다.
지하감옥을 구경하고 나와 마음을 가다듬는 박선애 선생
특별3사 20방에서의 추억
우리는 다음 관람을 위해 박선애 선생이 생활했던 감옥 안을 들어가 보았다. 특별3사 20방. 대전형무소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습사건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사건이어서 징벌도 더욱 가혹했다.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방에 선생 혼자 갇혔다. 1월의 혹한이라 엉덩이 주변만 빼고는 바닥에는 하얀 성에가 가득 끼어 있었고 천장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밤에는 발이 시려워 새벽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찬물로 발을 씻고 수건으로 한참을 벅벅 문질러 발을 후끈후끈하게 해야 잠이 들었다.
1월부터 3월까지 혹한의 3개월 간 선생은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벌렸다.
“며칠동안 추위에 떨며 있다 보니까 잡생각도 들고 안 되겠는 거야. 그래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어. 박선애 너는 왜 미제에 대항하여 총을 들었는가, 먼저 죽어간 동지들을 잊었는가, 왜 감옥에 갇혔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을 큰소리로 묻고 또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마음을 잡았어”.
인천 앞바다가 얼었다던 그해 겨울, 이 20방에서 3개월 간 수갑을 차고 징벌을 받았었다
그리고는 노래부르기, 유격훈련하기, 군중연설하기, 우리 민족의 역사 공부하기, 젓가락에 물을 찍어 글쓰는 연습하기 등으로 일과표를 짜고 엄격하게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자유시간은밥 먹고 난 후 30분. 그때는 그리운 사람도 생각하는 등 자유롭게 보냈다. 그러자 자꾸 이 자유시간이 길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일과표를 잘 지키도록 강제해 내었다. 그러다 보니 3개월의 긴 징벌기간이 바쁘게 지나가 버렸다.
특히 유격훈련시간에는 수갑(구식수갑은 머리를 잘 쓰면 손이 빠졌단다)에서 손을 슬그머니 빼내어 총을 잡은 시늉을 하고 앞으로 굴렀다, 옆으로 굴렀다, 폴짝폴짝 뛰었다가 거꾸로 섰다가 하면서 유격대시절 산에서 배웠던 훈련과 똑같이 훈련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 징벌방을 감시하던 간수가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남편이 의용군으로 입대해서 북으로 들어가자 그 여자는 교도관 시험을 치러서 간수가 된 거야. 남편 경력 때문에 힘들어질까봐‘내 남편은 납치된 것이다’고 박박 우겨서 일부러 교도관 시험을 친 것 같애. 그이가 나를 말없이 도와주었어. 한 번은 따끈한 찐빵 다섯 개를 식구통에 넣어주고 휙 가버리는 거야. 단팥 앙금이 들어있는 그걸 먹는데 어찌 맛있던지 이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없을거야.”
아무리 가혹한 시련도 선생에게는 항상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기회일 뿐이다. 들려주는 이야기마다 낙천적 기백이 넘쳐 흐른다.
‘이렇게 옆에 있는 동지들과 통방을 하는 거야’, 어떻게 저런 해맑은 미소로 옥중생활을 추억할 수 있을까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니 무서울 게 없어
반일독립운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한 부모는 어린 자녀들에게 호랑이를 때려잡고 귀신을 쫓는 동화는 많이 들려 주었어도 무서운 이야기는 절대 해주지 않았다. 별거 아닌 옛날 이야기 하나도 교훈적이고 낭만적인 것들로 들려준 것은 아이들을 두려움이 없고 구김이 없이 발랄하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부모와 오빠가 보여준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일제에 대항하여 거침없이 싸우는 부모와 동네의 젊은이들을 모아 미군정에 반대하여 싸우는 오빠의 모습을 통해 당당한 삶이 무엇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특히 나이 차이가 꽤 났던 오빠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선생과 동생들을 끔찍하게 사랑해 주었다. 학교숙제도 챙겨주고 하다 못해 귓밥까지 파 줄 정도였다.
그런 오빠가 인근 청년들을 모두 모아서 미군정에 반대해 싸우다가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구두와 지갑만 돌아오고 시신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재판도 없이 학살된 것이다. 그때 22살의 박선애 선생은 원수를 갚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였다. 그러자 두려운 일이 없었다.
사형장 입구 길목에서 있는 미루나무. 수많은 애국자들이 저 미루나무의 옹이를 매만지고서 당당하게 사형장으로 들어갔다
[미루나무를 매만지고 일곱 발짝을 떼면 사형장 입구가 나온다.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원한의 사형장 입구]
중학생시절에 산에 올라가서 연락병으로 싸우던 남동생마저 희생되자 더욱 생에 대한 집착은 없어졌다.
그러니 고문실에 끌려가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고 놈들이 가슴팍에 권총을 들이대어도 눈 하나 깜짝할 필요가 없었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죄행을 서릿발같이 규탄했고 감방에 돌아와서도 선생은 혁명가를 부르며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은 동지복이 많았다.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주던 동지들은 시련을 이겨내는 큰 힘이었다. 또한 간수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사람들의 진심을 알아주면 친구가 될 수 있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아주고 믿어주는 것이 중요해.”
목숨을 걸었던 각오와 동지애, 이를 통해 선생은 그 고난의 길을 웃음으로 헤쳐왔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추억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흔들림 그리고 떳떳함
이런 박선애 선생이 전향의 유혹을 받았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따님 때문이었다. 비전향장기수 윤희보 선생과 결혼하여 얻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남편은 반공법에 걸려 이미 감옥에 가 있었는데 박정희가 만든 사회안전법으로 선생마저 잡아간 것이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여섯 살 난 딸을 길거리에 버려둔 채 경찰들은 선생을 대전형무소에 재구속시켰다가 2년 후에 그 악명높은 청송 보호감호소로 보냈다.
어린 딸이 어디로 갔는지, 누가 챙기는지 그것만 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알 길이 없었던 그때. 혹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가 해외입양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도 수백 번.
어린 딸을 생각하니 전향할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향서를 쓰고 그것을 교도소 방송실에서 읽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듣게 해야 하는데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이제는 교도소측에서 급해졌다. 단 한 명 남은 여성 비전향장기수 때문에 교도관이 몇 사람이나 고생을 해야했다. 매일같이 교도관들이 전향서를 쓰라고 애걸복걸하더니 통하지 않자 결국 그냥 풀어주게 되었다. 사회안전법이 폐지되기 전에 나왔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은 전향한 것으로 알고 있기도 하지만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판단은 조직이하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건 조직 앞에 떳떳하면 그만이야.”
독립투사들은 저 올가미가 목에 내려올 때도 ‘조국의 광복이 보인다’라며 당당한 미소를 지어 교형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고 한다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송될 때도 실무자들이 명단에 넣겠다고 했던 것을 돌봐야 하는 여동생 때문에 넣지 말라고 했다. 대신 남쪽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하며 망설이는 남편을 설득해서 북에 보냈다.
“나야 남에서 혁명을 배웠지만 당신은 북에서 조국통일사업 임무를 받고 오지 않았소. 조직이 부르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어요. 조직 앞에 가서 잘하고 잘못한 것을 총화해야지요”
영생
어느덧 선생의 낭만에 넘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앞에 서 있었다. 그 유명한 미루나무도 한층 더 커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정말 얼마나 많은 애국자들이 저 사형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미루나무 옹이턱을 어루만지며 형장으로 들어갔으랴.
그이들은 이 미루나무 옹이에 손을 짚고서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걸음으로 당당하게 저 형장으로 들어섰으리라. 평소 선생이 지었던 미소와 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교형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서 그렇게 저 형장으로 들어섰으리라.
선생이 조용히 그 미루나무 옹이턱을 매만지고 있다.
사형장 지하에서 올려다본 원한의 사형장 바닥. ‘쿵’하고 열리면 발이 허공에 매달리게 된다
“권영벽, 이제순 동지도 여기를 매만지며 저 형장으로 들어갔겠지.”
“그때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입니까?”
“아니지. 그 사람들이 여기서 처형되었을 때 나는 어린 사람이어서 알 수가 없었지.”
그러고는 미루나무만 쳐다볼 뿐 말이 없다. 박선애 선생은 사형장 안에 들어가서는 말이 없다. 침울한 표정은 더욱 아니다. 그저 사형장 외벽을 타고 오르는 저 붉은 담쟁이 단풍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너무나도 붉은 선홍색.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6·15남북공동선언도 나오고 통일의 희망이 가득차게 된 것이야, 나도 먼저 간 선배들처럼 남은 여생을 더욱 참되게 살아야지.”
우리는 여기서 죽어간 그 수많은 애국자들을 다는 모른다. 그러나역사의 증견자, 미루나무는똑똑히 알고 있다. 누가 떳떳하게 죽어 갔는지, 그리고 누가 변절로 얼룩진 구차한 생을 마감했는지….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고결한 삶을 살고 깨끗하게 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은 과연 죽었는가.
미루나무를 만지며 서 있는 박선애 선생. 먼저 간선배들의 낭만에 넘치는 웃음소리와 승리를 확신하는 눈빛이 보이는지 어느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글.사진 이창기 발행인
[출처:월간 <우리> 2002년 11월호]...여기를 짤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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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인터뷰] 사형장 미루나무는 알고 있다
[삶·을·배·우·며]
비전향 여성 빨치산 박선애 선생과 함께 간 서대문형무소

팔순을 넘기신 나이인데도 머리만 반백으로 물들어갈 뿐 그이의 얼굴은 점점 더 해맑아져 간다. 얼굴마다 피어오르는 미소에는 그 어떤 꾸밈도 없고 사람들을 걱정해주는 떨리듯 들려오는 음성에는 더 없는 따뜻함이 묻어있다.
나이가 들수록 소녀가 되어가는 그이가 바로 여성으로는 마지막까지 전향을 하지 않고 감옥에서 나왔던 박선애 선생이다.
그 박선애 선생과 함께 노란 은행잎 하나둘씩 나풀거리는 청명한 가을날에 5년 동안 수형생활을 했던 서대문형무소로 나들이를 갔다. 15년의 긴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 여전히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를 간직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문인들 오죽이나 잔인했으며 마음고생인들 얼마나 심했을까. 그런데도 얼굴에는 수심 한 줄 그늘 한 조각 어려있지 않다.
처음으로 보았던 찌푸린 얼굴
서대문형무소 앞에 서자 제일 먼저 숨을 컥 막히게 한 것은 아주 높다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벽이었다. ‘얼마나 저 벽을 뚫고 탈출하고 싶었을까.’허나 너무나 견고해 보였다. 절망의 벽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전시관들을 둘러 보았다. 두 눈 부릅뜨고 구식 장총을 잡고 있는 의병들, 머리가 잘린 독립운동가, 줄로 목을 매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독립군들의 시신 사진들을 박선애 선생은 꼼꼼히 보고 읽고 하였다. 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한 사람들의 이름도 한명한명 읽어갔다. 여운형, 홍명희와같은 이름을 발견하고 기쁜 빛이 얼굴에 역력하다.
“예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추가되었어.”
하지만 곧 얼굴은 어두워진다.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 둔갑해 놓은 것은 아직도 여전허구먼,
쯔쯧.”

1층과 2층의 사진을 보고 지하실로 내려가서 인형으로 만든 모형 고문실을 둘러보았다. 관람하는사람이 지나가자 자동센서가 인형들을 작동시킨다.
묶인 여성의 손가락에 전기를 연결시키고 돌리자 여성은 비명을 지른다.
“어서 말을 하란 말이야. 조직원이 누구야?”일제 경찰의 독살스런 녹음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든다. 전기고문을당하는 여성 옆에는 또 다른 여성의 벌려진 양팔이 천정에 묶여있다. 머리와 저고리는 풀어헤쳐져 젖가슴마저 드러나고 온몸이 피투성이다. 옆방 동지들의 비명소리를 들은 한 애국자가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하고 있고 옆에 있는 사람은 분노로 핏발선 눈을 번뜩이고 있다. 다른 한 독방에서는 고문으로 다친 팔뚝을 입과 다른 손을 이용해서 천으로 묶고 있다. 기어이 이겨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지하실을 나올 때까지 박선애 선생은 질문을 해도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정말로 저렇게 잔인한 고문을 했나요?”
“…했으니깐 만들어 놓았겠지….”몇 마디를 하더니 더 이상 말이 없다.
박선애 선생은 잠깐 쉬었다가 가자면서 잔디밭에 앉았다.
“어이구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허네.”
선생의 혈색이 좋지 않다. ‘괜히 형무소에 오자고 했던가, 건강이 나빠지면 어쩌나’걱정이 들었다. 선생을 몇 번 만났었지만 이렇게 찡그린 표정을 본적이 없었다. 나는 분노만 했을 뿐인데 선생은 속이 메스껍다고 했다. 이는 겪은 사람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이야기마다 깃든 혁명가의 낭만
“자 여기서 사진을 한 장 찍어요, 어머니 참 곱네요”
서서히 선생의 얼굴이 펴지기 시작한다.
“찰칵.”
“어머님께서도 저렇게 고문을 당했겠네요.”
“어이구 말로는 다 못하지.”
대전형무소에 있을 때였다. 감옥에서도 학습을 하기 위해 몽당연필로 쪽지에 빽빽하게 적어서 교재를 만들고 돌려가며 학습을 했는데 전달해 주던 동지가 실수하여 그만 발각되었다.
“끌려가서 지하실 방에 들어갔는데 웬 각목이 가득 쌓여 있는 거야, 나는 저게 뭣이다냐 했어, 어디 수리 공사를 하려고 저렇게 각목을 갖다 놓았는갑다했는데 쪽지를 만든 사람과 본 사람들 다 말하라고 그 각목으로 온몸을 패는 거야, 각목이 숱하게 부러져도 절대 말하지않았지, 어차피 이미 죽을 각오는 되어 있었으니까. 무서운것이 없었어. 그러자 이놈들이 나를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때리는 거야.”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감방에 돌아왔다가 다음날 또 불려가서 맞았다. 터진 상처에 또 매가 가해질 때는 정말 살점을 날카로운 칼로 저미는 것처럼 아팠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글쎄 우리들에게 벌을 준다고 모두 한 방에 가두는 거야. 이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 이제는 마음놓고 함께 공부도 하고 즐겁게 지냈지.”
그 가혹한 이야기를 이렇듯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선생의 낙천적 기질이 놀랍다.

특별3사 20방에서의 추억
우리는 다음 관람을 위해 박선애 선생이 생활했던 감옥 안을 들어가 보았다. 특별3사 20방. 대전형무소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습사건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사건이어서 징벌도 더욱 가혹했다.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방에 선생 혼자 갇혔다. 1월의 혹한이라 엉덩이 주변만 빼고는 바닥에는 하얀 성에가 가득 끼어 있었고 천장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밤에는 발이 시려워 새벽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찬물로 발을 씻고 수건으로 한참을 벅벅 문질러 발을 후끈후끈하게 해야 잠이 들었다.
1월부터 3월까지 혹한의 3개월 간 선생은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벌렸다.
“며칠동안 추위에 떨며 있다 보니까 잡생각도 들고 안 되겠는 거야. 그래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어. 박선애 너는 왜 미제에 대항하여 총을 들었는가, 먼저 죽어간 동지들을 잊었는가, 왜 감옥에 갇혔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을 큰소리로 묻고 또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마음을 잡았어”.
인천 앞바다가 얼었다던 그해 겨울, 이 20방에서 3개월 간 수갑을 차고 징벌을 받았었다
그리고는 노래부르기, 유격훈련하기, 군중연설하기, 우리 민족의 역사 공부하기, 젓가락에 물을 찍어 글쓰는 연습하기 등으로 일과표를 짜고 엄격하게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자유시간은밥 먹고 난 후 30분. 그때는 그리운 사람도 생각하는 등 자유롭게 보냈다. 그러자 자꾸 이 자유시간이 길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일과표를 잘 지키도록 강제해 내었다. 그러다 보니 3개월의 긴 징벌기간이 바쁘게 지나가 버렸다.
특히 유격훈련시간에는 수갑(구식수갑은 머리를 잘 쓰면 손이 빠졌단다)에서 손을 슬그머니 빼내어 총을 잡은 시늉을 하고 앞으로 굴렀다, 옆으로 굴렀다, 폴짝폴짝 뛰었다가 거꾸로 섰다가 하면서 유격대시절 산에서 배웠던 훈련과 똑같이 훈련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 징벌방을 감시하던 간수가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남편이 의용군으로 입대해서 북으로 들어가자 그 여자는 교도관 시험을 치러서 간수가 된 거야. 남편 경력 때문에 힘들어질까봐‘내 남편은 납치된 것이다’고 박박 우겨서 일부러 교도관 시험을 친 것 같애. 그이가 나를 말없이 도와주었어. 한 번은 따끈한 찐빵 다섯 개를 식구통에 넣어주고 휙 가버리는 거야. 단팥 앙금이 들어있는 그걸 먹는데 어찌 맛있던지 이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없을거야.”
아무리 가혹한 시련도 선생에게는 항상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기회일 뿐이다. 들려주는 이야기마다 낙천적 기백이 넘쳐 흐른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니 무서울 게 없어
반일독립운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한 부모는 어린 자녀들에게 호랑이를 때려잡고 귀신을 쫓는 동화는 많이 들려 주었어도 무서운 이야기는 절대 해주지 않았다. 별거 아닌 옛날 이야기 하나도 교훈적이고 낭만적인 것들로 들려준 것은 아이들을 두려움이 없고 구김이 없이 발랄하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부모와 오빠가 보여준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일제에 대항하여 거침없이 싸우는 부모와 동네의 젊은이들을 모아 미군정에 반대하여 싸우는 오빠의 모습을 통해 당당한 삶이 무엇인지 직접 보고 느꼈다. 특히 나이 차이가 꽤 났던 오빠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선생과 동생들을 끔찍하게 사랑해 주었다. 학교숙제도 챙겨주고 하다 못해 귓밥까지 파 줄 정도였다.
그런 오빠가 인근 청년들을 모두 모아서 미군정에 반대해 싸우다가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구두와 지갑만 돌아오고 시신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재판도 없이 학살된 것이다. 그때 22살의 박선애 선생은 원수를 갚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였다. 그러자 두려운 일이 없었다.

[미루나무를 매만지고 일곱 발짝을 떼면 사형장 입구가 나온다.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원한의 사형장 입구]
중학생시절에 산에 올라가서 연락병으로 싸우던 남동생마저 희생되자 더욱 생에 대한 집착은 없어졌다.
그러니 고문실에 끌려가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고 놈들이 가슴팍에 권총을 들이대어도 눈 하나 깜짝할 필요가 없었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죄행을 서릿발같이 규탄했고 감방에 돌아와서도 선생은 혁명가를 부르며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은 동지복이 많았다.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주던 동지들은 시련을 이겨내는 큰 힘이었다. 또한 간수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사람들의 진심을 알아주면 친구가 될 수 있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아주고 믿어주는 것이 중요해.”
목숨을 걸었던 각오와 동지애, 이를 통해 선생은 그 고난의 길을 웃음으로 헤쳐왔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추억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흔들림 그리고 떳떳함
이런 박선애 선생이 전향의 유혹을 받았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따님 때문이었다. 비전향장기수 윤희보 선생과 결혼하여 얻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남편은 반공법에 걸려 이미 감옥에 가 있었는데 박정희가 만든 사회안전법으로 선생마저 잡아간 것이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여섯 살 난 딸을 길거리에 버려둔 채 경찰들은 선생을 대전형무소에 재구속시켰다가 2년 후에 그 악명높은 청송 보호감호소로 보냈다.
어린 딸이 어디로 갔는지, 누가 챙기는지 그것만 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알 길이 없었던 그때. 혹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가 해외입양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도 수백 번.
어린 딸을 생각하니 전향할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향서를 쓰고 그것을 교도소 방송실에서 읽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듣게 해야 하는데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이제는 교도소측에서 급해졌다. 단 한 명 남은 여성 비전향장기수 때문에 교도관이 몇 사람이나 고생을 해야했다. 매일같이 교도관들이 전향서를 쓰라고 애걸복걸하더니 통하지 않자 결국 그냥 풀어주게 되었다. 사회안전법이 폐지되기 전에 나왔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은 전향한 것으로 알고 있기도 하지만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판단은 조직이하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건 조직 앞에 떳떳하면 그만이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송될 때도 실무자들이 명단에 넣겠다고 했던 것을 돌봐야 하는 여동생 때문에 넣지 말라고 했다. 대신 남쪽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하며 망설이는 남편을 설득해서 북에 보냈다.
“나야 남에서 혁명을 배웠지만 당신은 북에서 조국통일사업 임무를 받고 오지 않았소. 조직이 부르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어요. 조직 앞에 가서 잘하고 잘못한 것을 총화해야지요”
영생
어느덧 선생의 낭만에 넘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앞에 서 있었다. 그 유명한 미루나무도 한층 더 커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정말 얼마나 많은 애국자들이 저 사형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미루나무 옹이턱을 어루만지며 형장으로 들어갔으랴.
그이들은 이 미루나무 옹이에 손을 짚고서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걸음으로 당당하게 저 형장으로 들어섰으리라. 평소 선생이 지었던 미소와 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교형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서 그렇게 저 형장으로 들어섰으리라.
선생이 조용히 그 미루나무 옹이턱을 매만지고 있다.

“권영벽, 이제순 동지도 여기를 매만지며 저 형장으로 들어갔겠지.”
“그때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입니까?”
“아니지. 그 사람들이 여기서 처형되었을 때 나는 어린 사람이어서 알 수가 없었지.”
그러고는 미루나무만 쳐다볼 뿐 말이 없다. 박선애 선생은 사형장 안에 들어가서는 말이 없다. 침울한 표정은 더욱 아니다. 그저 사형장 외벽을 타고 오르는 저 붉은 담쟁이 단풍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너무나도 붉은 선홍색.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6·15남북공동선언도 나오고 통일의 희망이 가득차게 된 것이야, 나도 먼저 간 선배들처럼 남은 여생을 더욱 참되게 살아야지.”
우리는 여기서 죽어간 그 수많은 애국자들을 다는 모른다. 그러나역사의 증견자, 미루나무는똑똑히 알고 있다. 누가 떳떳하게 죽어 갔는지, 그리고 누가 변절로 얼룩진 구차한 생을 마감했는지….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고결한 삶을 살고 깨끗하게 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은 과연 죽었는가.
미루나무를 만지며 서 있는 박선애 선생. 먼저 간선배들의 낭만에 넘치는 웃음소리와 승리를 확신하는 눈빛이 보이는지 어느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글.사진 이창기 발행인
[출처:월간 <우리> 2002년 11월호]...여기를 짤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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