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인물]부산 재야인사 서상권님</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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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02-03 00:00 조회1,70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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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우리>> 신년호는 초청대담 인물로 부산의 재야인사 서상권님(범민련 부산경남연합 회장)을 다뤘다. 이 보도전문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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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인터뷰] 파란만장한 민족사의 굽이굽이를 헤쳐 오면서
[삶을 배우며]범민련 부산경남연합 서상권 의장 - 2003/01 32호
“동학농민혁명은 농민들이 압제받고 수탈당하는 것에 항거해서 일어났어. 광화문에서 농민들이 연좌데모를 하자, 왕은 모든 것을 수렴하겠다며 해산을 요구했지. 그때 혁명군은 관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혁명군을 구슬리고 한편으로 왜군을 끌어 들였지. 왜군이 들어오자 혁명군은 관군과의 싸움부리를 왜군에게 돌렸어. 싸움 끝에 전봉준은 왜군에게 잡혀 관군에게 넘겨지고 참살당했지. 전봉준은 철저히 자주노선을 견지했던거야. 그런데 왕이란 작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고, 결국나라는 왜놈들에게 뺏기고….”
잔가지에 내려앉은 눈꽃처럼 백발이 성성한 서상권 의장과 나들이 간 경복궁. 그 으리으리한 궁궐숲에서 그는 자기 계급의 이익보다도 민족의 자주를 우선시 했던 민중과 민족의 자주보다 자기 이익을 중시했던 권력자들을 떠올렸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자주야. 그걸 잃으면 권력도 명예도 목숨도 부지할 수 없는거야.”
애국심 키운 어린 시절
서 의장은 1927년에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기를 일제의 압제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솥단지, 숟가락 등 쇠붙이에서부터 심지어 집에서 키우던 개까지 잡아가던 암흑의 그 시절, 어린 서상권은 반일감정과 자주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12살 여름 어느 날 집 근처 골목길에서 아낙네들이 모여 나누던 이야기는 어린 그에게 민족의식을 싹틔워 주었다.
“만주에 있는 김일성 장군이 곧 들어와서 일본놈 들을 멸종시키고 해방시켜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긴가 민가 하면서도 큰 감동을 받았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서 일본 학생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닐곱의 일본학생들이 그를 향해 ‘불련선인’이라고 했다. 불련선인이란 불순한 조선사람이라는 말로 조선인을 비하하는 소리였다.
이에 분개한 그는 ‘너희들은 내선일체를 이야기하면서 조선인을 왜 차별하냐’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 ‘내선일체’의 의미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평등하다는 뜻으로 다가왔기에 일본 학생들의 태도는 차별과 비하로 들렸던 것이다.
결국 싸움이 났고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은 그는 피멍이 들어 집으로 왔다. 그러나‘긴 칼의 일본 경찰이 그를 잡겠다’고 집으로 들이닥쳤고 이를 피해 창고에 숨은 어린 가슴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이 사건은 어린 서상권에게 반일의식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압제와 차별이 팽배한 일제하에서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진 그는 만주로 떠날 생각도 여러번 했다. 이렇듯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보내다 청년 서상권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약탈자 미군과 기어이 터진 전쟁
해방이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 일본군이 나가자 곧바로 찾아온 것은 더 악랄한 미군들이었다.
“하루는 집에서 홀로 자고 있는데 미군들이 군화발로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권총을 가슴팍에 들이대고는 여자를 내놓으라고 하는거야. 정말 파렴치하고 안하무인의 점령군이었어. 친누이도 당할 뻔하다가 급하게 피해서 위기를 모면했지. 당시 미군들이 마을에 나타나면 여성들은 모두 숨어야했어. 아마 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일거야.”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천부적 소질을 보여 당연히 ‘미술가’로서의 삶만을 생각하며 커온 그는 남조선대학교 미술대학(현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부터 키워온 반일의식과 자주의식은 일제를 뛰어넘는 악랄한 미군의 작태를 그대로 둘수 없게 했다.
결국 그는 애국단체에 가입해 열성적인 활동을 벌여갔다. 그러다 과로와 영양실조가 겹쳐 폐질환에 걸리게 되고 집에서 요양을 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53년 7·27 휴전이 선포되고 전쟁의 포성은 씻은 듯이 멎었다. 서상권 의장은 가정형편상 대학을 그만두어야 했고 단체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조봉암의 진보당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다.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내걸며 학정을 일삼았지. 그런데 당시 조봉암 선생은 평화통일론을 천명하셨어. 난 ‘평화통일’ 주장에 완전히 매료되었지. 그래서 진보당에 가입했어.”
30대의 혈기넘친 서상권은 1956년 5월15일 대통령선거 창녕지구 진보당 선거책임자를 맡아 온갖 부정선거에 맞서 과감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개표날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개표장의 전기불이 갑자기 꺼지기가 일쑤였고 군수며 경찰서장이며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부정을 저질렀다. 표바꿔치기에다가 조봉암 표 앞뒤로 이승만 표 붙이기등 그 수법도 다양했다.
보다 못한 그는 창녕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위원장님 나는 젊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오고 옆구리에 권총이 들어와도 못 참습니다. 제대로 해주십시오.”
투표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기어이 표를 지켜냈다. 개표가 끝났다. 조봉암 2만8천여 표, 이승만 1만6천여 표. 결과는 조봉암의 압승이었다.
그때부터 청년 서상권에게 ‘지조의 인간’ ‘용감한청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고 한다.
노동운동에 뛰어들어서 회사를 굴복시키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대통령 권좌에서 물러나고 남녘 사회에는 자주 민주 통일의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부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위 ‘혁신세력’이라는 인사들이 부산 초량동 모중국집에 모여 ‘혁신세력집결촉진회’를 만들었어. 서울로 대표를 파견했는데 나도 포함됐지.”
이들의 노력이 불씨가 되어 사회대중당이 만들어졌고, 7·29 총선에 대거 입후보하게 되었다. 물론 서상권 의장에게도 출마 권유가 들어왔지만 재산도 조직도 없던 그는 출마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에도 서상권 의장은 사회대중당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사회대중당은 대중적 당 활동을 펼치기위해 통일사회당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박정희는 통일사회당 최건호 당수를 사형에 처하고 당을 해산시켰다. 다행히 서 의장은 구속을 면하기는 했지만 3년간 숨어 지내야 했다.
공소시효가 끝나자 그는 재래식 화장실을 비워주는 부산위생주식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어용노조가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노동자들을 일 대 일로 만나면서 교양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난 후 노동자들 속에서 그는 튼튼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노조대의원대회에서노동자들이 나를 위원장으로 추대했어. 어용노조쪽에서도상대가 나왔지. 그 상황이 싫었던 나는 사퇴해버렸어. 그런데 시간이 갈 수록 안 되겠는거야. 그래서 임시대의원대회를 소집했지. 압도적으로 당선이 됐어.”
서상권 의장은 두 번의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다보니 회사에서나 공안기관에서는 그를 주시했다. 결국 공안기관에 끌려가 수없는 구타와 위협을 당해야 했다.
“중앙정보부, 시경, 회사, 경찰서에서매일같이 압력이 들어왔어.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에이 내가 그만두면 될 거 아니냐는 생각에 사표를 던졌지.”
그는 이 일을 평생의 과오라고 말했다. “그때 압력과 건강 때문에 중도에 노조일을 포기한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지만 그래도 중요한 교훈은 얻었어.
잘 모르는 노동자라 하더라도 깨우치기만 하면 얼마든지 진보적인 일을 함께 할 동지가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민주노총이 한국노총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한국노총에 있으면서도 충분히 노조를 좋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것을 경험했거든.”
청년들이 민족의식을 가져야 한다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온몸으로 안고 몸부림치며 살아온 서상권 의장. 그는 마지막까지 민족의 소중함을 피력했다.
“민족이 힘이 없으니 일본 깡패들이 왕궁에 침입하여 국모를 죽여버렸어. 진보운동을 해도 무엇보다민족의 자주가 중요한 거야. 민족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자주권이 없는데 어떻게 역사발전의 높은 단계를 향해 가는 진보의 길을 갈 수 있겠나.”
서상권 의장이 인생에서 깨달은 중요한 진리가 있다면 무엇일까.
“조봉암의 진보당이나 통일사회당은 진보정당이지만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아주 중시했어. 또 그런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서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청년학생과 양심적인 지식인, 민족적인 중소 상공업자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지. 깡패 김두환도 진보당에서 당원으로 받아주어 당 대회 때 나와서 연설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도 받았지. 진보정당은 이렇듯 품이 넓어야해.”
서상권 의장은 청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을 마지막으로 경복궁을 떠났다. “청년의 역할이 중요해. 청년이 왜 민족이 중요한지 먼저 각성하고 나라를 살리는 일에 나서야 해.”
[글.사진 이창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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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인터뷰] 파란만장한 민족사의 굽이굽이를 헤쳐 오면서
[삶을 배우며]범민련 부산경남연합 서상권 의장 - 2003/01 32호

잔가지에 내려앉은 눈꽃처럼 백발이 성성한 서상권 의장과 나들이 간 경복궁. 그 으리으리한 궁궐숲에서 그는 자기 계급의 이익보다도 민족의 자주를 우선시 했던 민중과 민족의 자주보다 자기 이익을 중시했던 권력자들을 떠올렸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자주야. 그걸 잃으면 권력도 명예도 목숨도 부지할 수 없는거야.”
애국심 키운 어린 시절
서 의장은 1927년에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기를 일제의 압제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솥단지, 숟가락 등 쇠붙이에서부터 심지어 집에서 키우던 개까지 잡아가던 암흑의 그 시절, 어린 서상권은 반일감정과 자주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12살 여름 어느 날 집 근처 골목길에서 아낙네들이 모여 나누던 이야기는 어린 그에게 민족의식을 싹틔워 주었다.
“만주에 있는 김일성 장군이 곧 들어와서 일본놈 들을 멸종시키고 해방시켜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긴가 민가 하면서도 큰 감동을 받았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서 일본 학생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닐곱의 일본학생들이 그를 향해 ‘불련선인’이라고 했다. 불련선인이란 불순한 조선사람이라는 말로 조선인을 비하하는 소리였다.
이에 분개한 그는 ‘너희들은 내선일체를 이야기하면서 조선인을 왜 차별하냐’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 ‘내선일체’의 의미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평등하다는 뜻으로 다가왔기에 일본 학생들의 태도는 차별과 비하로 들렸던 것이다.
결국 싸움이 났고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은 그는 피멍이 들어 집으로 왔다. 그러나‘긴 칼의 일본 경찰이 그를 잡겠다’고 집으로 들이닥쳤고 이를 피해 창고에 숨은 어린 가슴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이 사건은 어린 서상권에게 반일의식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압제와 차별이 팽배한 일제하에서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진 그는 만주로 떠날 생각도 여러번 했다. 이렇듯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보내다 청년 서상권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약탈자 미군과 기어이 터진 전쟁
해방이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 일본군이 나가자 곧바로 찾아온 것은 더 악랄한 미군들이었다.
“하루는 집에서 홀로 자고 있는데 미군들이 군화발로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권총을 가슴팍에 들이대고는 여자를 내놓으라고 하는거야. 정말 파렴치하고 안하무인의 점령군이었어. 친누이도 당할 뻔하다가 급하게 피해서 위기를 모면했지. 당시 미군들이 마을에 나타나면 여성들은 모두 숨어야했어. 아마 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일거야.”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천부적 소질을 보여 당연히 ‘미술가’로서의 삶만을 생각하며 커온 그는 남조선대학교 미술대학(현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부터 키워온 반일의식과 자주의식은 일제를 뛰어넘는 악랄한 미군의 작태를 그대로 둘수 없게 했다.
결국 그는 애국단체에 가입해 열성적인 활동을 벌여갔다. 그러다 과로와 영양실조가 겹쳐 폐질환에 걸리게 되고 집에서 요양을 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53년 7·27 휴전이 선포되고 전쟁의 포성은 씻은 듯이 멎었다. 서상권 의장은 가정형편상 대학을 그만두어야 했고 단체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조봉암의 진보당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다.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내걸며 학정을 일삼았지. 그런데 당시 조봉암 선생은 평화통일론을 천명하셨어. 난 ‘평화통일’ 주장에 완전히 매료되었지. 그래서 진보당에 가입했어.”
30대의 혈기넘친 서상권은 1956년 5월15일 대통령선거 창녕지구 진보당 선거책임자를 맡아 온갖 부정선거에 맞서 과감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개표날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개표장의 전기불이 갑자기 꺼지기가 일쑤였고 군수며 경찰서장이며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부정을 저질렀다. 표바꿔치기에다가 조봉암 표 앞뒤로 이승만 표 붙이기등 그 수법도 다양했다.
보다 못한 그는 창녕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위원장님 나는 젊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오고 옆구리에 권총이 들어와도 못 참습니다. 제대로 해주십시오.”
투표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기어이 표를 지켜냈다. 개표가 끝났다. 조봉암 2만8천여 표, 이승만 1만6천여 표. 결과는 조봉암의 압승이었다.
그때부터 청년 서상권에게 ‘지조의 인간’ ‘용감한청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고 한다.
노동운동에 뛰어들어서 회사를 굴복시키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대통령 권좌에서 물러나고 남녘 사회에는 자주 민주 통일의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부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위 ‘혁신세력’이라는 인사들이 부산 초량동 모중국집에 모여 ‘혁신세력집결촉진회’를 만들었어. 서울로 대표를 파견했는데 나도 포함됐지.”
이들의 노력이 불씨가 되어 사회대중당이 만들어졌고, 7·29 총선에 대거 입후보하게 되었다. 물론 서상권 의장에게도 출마 권유가 들어왔지만 재산도 조직도 없던 그는 출마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에도 서상권 의장은 사회대중당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사회대중당은 대중적 당 활동을 펼치기위해 통일사회당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박정희는 통일사회당 최건호 당수를 사형에 처하고 당을 해산시켰다. 다행히 서 의장은 구속을 면하기는 했지만 3년간 숨어 지내야 했다.
공소시효가 끝나자 그는 재래식 화장실을 비워주는 부산위생주식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어용노조가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노동자들을 일 대 일로 만나면서 교양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난 후 노동자들 속에서 그는 튼튼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노조대의원대회에서노동자들이 나를 위원장으로 추대했어. 어용노조쪽에서도상대가 나왔지. 그 상황이 싫었던 나는 사퇴해버렸어. 그런데 시간이 갈 수록 안 되겠는거야. 그래서 임시대의원대회를 소집했지. 압도적으로 당선이 됐어.”
서상권 의장은 두 번의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다보니 회사에서나 공안기관에서는 그를 주시했다. 결국 공안기관에 끌려가 수없는 구타와 위협을 당해야 했다.
“중앙정보부, 시경, 회사, 경찰서에서매일같이 압력이 들어왔어.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에이 내가 그만두면 될 거 아니냐는 생각에 사표를 던졌지.”
그는 이 일을 평생의 과오라고 말했다. “그때 압력과 건강 때문에 중도에 노조일을 포기한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지만 그래도 중요한 교훈은 얻었어.
잘 모르는 노동자라 하더라도 깨우치기만 하면 얼마든지 진보적인 일을 함께 할 동지가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민주노총이 한국노총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한국노총에 있으면서도 충분히 노조를 좋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것을 경험했거든.”
청년들이 민족의식을 가져야 한다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온몸으로 안고 몸부림치며 살아온 서상권 의장. 그는 마지막까지 민족의 소중함을 피력했다.
“민족이 힘이 없으니 일본 깡패들이 왕궁에 침입하여 국모를 죽여버렸어. 진보운동을 해도 무엇보다민족의 자주가 중요한 거야. 민족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자주권이 없는데 어떻게 역사발전의 높은 단계를 향해 가는 진보의 길을 갈 수 있겠나.”
서상권 의장이 인생에서 깨달은 중요한 진리가 있다면 무엇일까.
“조봉암의 진보당이나 통일사회당은 진보정당이지만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아주 중시했어. 또 그런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서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청년학생과 양심적인 지식인, 민족적인 중소 상공업자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지. 깡패 김두환도 진보당에서 당원으로 받아주어 당 대회 때 나와서 연설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도 받았지. 진보정당은 이렇듯 품이 넓어야해.”
서상권 의장은 청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을 마지막으로 경복궁을 떠났다. “청년의 역할이 중요해. 청년이 왜 민족이 중요한지 먼저 각성하고 나라를 살리는 일에 나서야 해.”
[글.사진 이창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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