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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인물]정명 선생이 돌아본 역사</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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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01-24 00:00 조회1,4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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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3일 평남 안주군 태양산 마을에서 태어난 정명 선생. 5남 4녀의 9 남매 중 차남으로 성장했다. 그는 지나 간 82년의 세월을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김구 선생과 여운형 선생의 비서로 활약했으나 두분 모두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며 지금도 한탄하고 있다.

chungmyung.jpg고향에 있는 립석보통학교, 개성의 송도 중학교, 일본의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정 선생은 유학시절 <청청강회>를 조직하여 "일본은 망한다", "조선은 독립한다"라는 구호를 일본 땅에서 선전하며 비밀로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하다가 1943년 12월 귀국하자 일본군에 잡혀 강제징병으로 끌려갔다. 그후 한 달도 못돼 중국 땅 당산을 경유해 숙현에 있는 일군 북지파견군에 편입되어 5개월을 보낸 후 다른 3명과 함께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해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군 부대에서의 탈출은 성공했으나 주변에 산재한 일본군들의 방위망과 함께 팔로군(모택동 군), 중앙군(장개석 군), 그리고 비적(산적) 등을 피하여 조선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O아 간다는 것은 너무나 막막했다. 정 선생은 다행히 일본중대에서 일하던 통역관 허씨의 도움으로 입수한 지형지물과 각 군부대 배치지도를 갖고 나와 탈출 망을 선택할 수 있었다. 농군으로 가장하고 산 넘고 물 건너가면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중앙군(장개석 군) 부대가 있는 곳에서 한 중국 청년의 도움으로 중앙군관학교 도움으로 만들어 진 <한광반>으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중경의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두고 군무부장에 이청천 총사령관, 이 산하에 제1지대(김약산 대장)와 제2지대(이범석 대장), 그리고 제3지대(김학규 대장)을 두고 있었다.

정 선생은 30여명의 학병일행과 함께 김학규 대장의 권유로 44년 가을 중경 임시정부로 가게 되었다. 제3지대가 있던 림천에서 중경까지 도보로 가는데 무려 75일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중경에 도착하자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영국과 미국 보도진들은 정 선생과 그 일행 대표들과 대담을 요청했다. 그 때 임시정부 기관지는 표지에 정 선생을 크게 소개하고 그 동안의 보고용 자료들을 게재하기도 했다.

chungmyung-1.jpg[사진은 정 선생이 옛날 지도를 펴놓고 중국 땅에서 일본군에 끌려가 5개월만에 탈출하던 곳들을 가리키며 설명하면서 임정을 O아가기 위해 75일간의 도보행진을 하던 길들을 설명해 주고 있는 모습]

그는 45년 1월부터 오전에는 김구 선생의 비서실에서 서기로, 오후에는 광복군 사령부 참모처에서, 그리고 저녁에는 엄항섭 선생이 관장하던 선전부 산하 방송국에서 번역과 함께 보도자료들을 정리하여 밤 9시 중앙광퍼 디엔타이(방송국)에서 보도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정 선생은 당시에도 일본 당국은 연일 거짓과 허위보도를 하며 매일 승리했다는 소식들만 소개해 이것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보도와 함께 조국광복을 위한 소식, 국제정세 등을 매일 30분 가량 방송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당시를 돌이키며 일제의 잔학무도한 행위에 분개하며 방송중에 열을 올릴 때 도 많았지만 비통한 소식들을 전할 때는 방송을 잇지 못하고 중단하는 때들도 여러 번 있었다고 설명하며 지난날들의 비통한 역사를 아직도 참지 못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기도 한다.

정 선생은 특히 우리 민족이 일제 36년의 암흑시대를 거처 1945년 8.15를 맞았으나 그것이 해방이 아니라 곧바로 미국의 신식민지로 전변된 남한의 사정에 대하여 비통해 하면서 "미국은 우리 나라를 분단시키고 그것을 고정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분개하는 표정이다.

그는 45년 10월 상해에 있을 때 김구 선생의 귀국을 환송하러 비행장에 나갔는데 그 때 김구 선생은 "미 당국자들이 임시 정부나 어떤 단체의 조직 이름들을 절대 쓸 수 없다고 한다면서 침통해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설명하는 순간에 그의 표정에는 비통한 민족사의 한 부분을 말해주는 듯 쓸쓸한 모습을 보인다.

"내가 모시던 김구 선생님, 여운형 선생님 두분 모두 암살 당했지..."라고 한숨을 쉬다가 "결국 매국 놈이 정권을 잡았지"라며 갑자기 분노하는 표정을 짓는다. 여운형 선생이 1947년에 암살 당했고 그후 1948년 봄에 평양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김일성 주석과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의논하고 돌아온 이듬 해인 1949년에 김구 선생이 암살 당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가 미국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왔다.

정 선생은 귀국해서도 여운형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여 노력하던 시기에도 임시정부 비서실에서 일한 경력으로 이들의 업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운형, 김구 선생 모두 암살 당하고 일제 대신 미군이 점령하여 나라가 둘로 나눠지고 분단의 세월이 반세기가 넘어선 우리의 비참한 역사를 되돌아 보다가 "어떻게 친일앞잡이 하던 사람의 자식이 대통령에 나올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오늘의 비뚤어 진 역사를 조명하다가 분개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는 이어 "이회창의 아버지가 일제 당시 검찰의 서기를 한 것은 친일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직책이지, 일제가 제 정신 가진 사람들을 중요직책에 앉히지 않았지..."라며 그 직책이 바로 친일매국적 자리라고 설명해 준다.

그는 남북이 갈라지고 전쟁이 끝나던 1953년부터 26년 동안은 남한에서 목재상을 경영했다. 그러던 중 지난 1979년 9월 형제들의 초청으로 이민의 길을 택했다. 도미하자 말자 가판 대에 있던 <신한민보>를 발견하고 통일운동에 가담했다. 양은식 박사 중심으로 활약하던 조국통일북미주협회(재미동포서부연합회의 전신)에 참가해 오면서 이곳 로스엔젤레스 지역에 있는 민족민주운동 단체들을 지원해 왔다. 그는 말수가 적으면서도 언제나 청년같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분으로 주위에서는 그를 겸손한 어른으로 모신다. 언론들에 대담을 요청받아도 잘 응하지 않는 조용한 분이기도 하다. 지금은 발목을 다쳐 3년째 나들이가 불편한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아픈 발을 참으며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후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민족혼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민족이 서로 단합하고 단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전재하면서 (1)해 내외 운동성원들이 무엇보다 분산 고립적인 운동자세들을 극복하고 모두가 힘을 모아서 큰 힘으로 투쟁해야 하고, (2)해외 운동이 남북한 운동과 밀접하게 연대 연합하여 투쟁해야 하고 , (3)6.15 정신을 대중화 시켜야 하고, (4)특히 미주 젊은 층은 미국주류사회 양심세력과 연대 연합할 것을 권유했다.(끝)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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