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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인물]안이현 선생 87년 세월</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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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01-22 00:00 조회2,0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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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물같이 흘렀다. 초등학교 시절 태극기를 만들어 거리로 뛰쳐나갔다가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매맞던 때가 엇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는 안이현 선생이다.

anyeehyun.jpg1916년 5월30일 평양시에서 태어나 광성보통학교, 오산 중고등학교, 경성약전(9회졸업생)을 나와 평양 도립병원에서 일하다가 35살 되던 1951년 12월1일 월남했던 안 선생은 1990년 5월27일 도미했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 도미 1년만인 1991년 4월 월남 40년만에 그렇게 그리워 하던 고향, 평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 선생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월남하여 재혼 한 부인을 두고 고향의 자식들과 첫 부인을 만난다는 마음은 기쁨이전에 무거운 마음이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한다.

민족분단은 7천만겨레에게도 고통을 주었지만 개인 안 선생의 마음에도 상처를 남겼다. 94년 9월 세번째 방문때는 미국의 부인, 윤중실 여사(1913년 yoonjungsil.jpg1월17일 생)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지금의 부부가 함께 전처, 그리고 그녀의 자식들(2남2녀)과 함께 만나는 것이 어색하여 혼자 만나려고 했지만 지금의 부인은 "평양 자녀들도 우리 자녀들이 아니냐"며 분단이 비극이었지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함께 만나는 것을 주장하여 같이 만났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윤여사는 "나도 사람이지요. 그때 남편 왼쪽에는 전처, 오른쪽에는 제가 앉았는데 분단이 가져 온 비극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순간 순간 내 자신이 초라해 지는 기분도 느꼈습니다"라고 그때의 기분을 말해 준다. 윤여사는 안 선생과 같은 고향사람으로 서문여고(지금의 평양여고)를 나와 일본 도꾜 여자약전(약학대학)을 졸업하고 해방이후 서울 수도여자고등학교에서 물리화학 교사로 근무했었다. 안선생과는 전쟁시기 피난중 대전에서 만나 인연이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안 선생의 전처가 전쟁때문에 생이별 한줄 모르고 죽은 줄만 알고 결혼을 허락했다"고 말하며 "같은 시대에 전처와 재혼한 부인이 함께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민족분단의 비극이 만든 또하나의 개인적 비극"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안선생은 지금까지 9차례 평양방문을 하며 가족들을 만나왔다고 설명해 준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는 통일운동에 참가해 왔다. 1천만 이산가족들의 한을 푸는 문제도 결국에는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데에 그의 관심이 쏠려있다.

재미동포서부연합 회원으로 그리고 고문으로 활약하면서도 자주, 민주, 통일운동하는 단체들이 무슨 행사들을 할때 마다 그는 십시일반으로 지원해 왔다. 그는 단지 이산가족이라는 처지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겪은 일생을 돌아보면 일제 강점기에 겪었던 고통들을 비롯하여 분단 반세기의 세월을 통해 그의 일생은 고통의 나날들로 점철되어 왔다.

어린 시절 일제 경찰들에게 매맞던 것을 비롯하여 분단된 이후 겪었던 전쟁시기의 고통, 그리고 월남하여 분단시대를 살아 오면서도 그는 고통의 연속을 맛보아야 했다. 오산학교 시절에는 <계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끌려가 혼이 났고 보석으로 풀려나와 4년동안 피신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월남 전 평양시에서 대의원을 한 경력과 은사였던 함석헌 선생을 도왔다는 이유, 그리고 야당에 지원했다는 등의 이유들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하고 요시찰 인물명단에 들어가는 바람에 요시찰 인물로 찍혀왔었다는 것이다.

그는 남녘에 와서는 원단을 염색하는 신흥염색회사를 운영하며 살았지만 그가 겪은 고통들은 남모르게 싸여왔다고 되돌아 본다.

미국와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특히 평소에 홍동근 목사를 존경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작년에 홍목사님이 평양방문중 돌아가셔서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묻혔지만 이곳 로스엘젤레스에서 이승만 목사님의 주례로 첫 추모회 행사가 너무나 성황리에 잘되어 무척 기뻤었는데 금년 1주기 행사는 가족의 요구때문인지 너무나 조촐하게 치뤘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통일운동하시던 선배들을 기리는 합동추모행사 같은 것을 했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제언하기도 한다.

그는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미주통일운동에 대해 몇가지 충고들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슨 운동이든 정신이 살아야 하고, 노선을 똑바로 가져야 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 즉 동지애를 육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귀띔해 준다. 그는 또 올바른 노선을 갖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는 학습 또는 정기적인 교육활동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안 선생과 부인은 분단이 오래 지속되어 온 것은 외세(미국을 지칭)라고 지목하면서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결하여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일깨워 준다. 이들은 특히 남녘이 너무 식민지화되어 문제라고 말하면서 아직도 <국가보안법>같은 법이 존재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안 선생은 미국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서도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아무리 미국시민으로 이곳에 살고 있어도 자기 민족없이는 이 미국 사회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민족의 존엄성을 강화하고 단결하도록하는데 미주 청년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자기 뿌리가 강대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으면 이 사회에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됩니다."라고 힘주어 말해 준다.

그는 남북이 6.15시대를 맞아 화해하고 교류하며 통일로 향하고 있는 시기에 또다시 미국이 방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가슴아파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방도는 민족의 대단결 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해외동포들도 하나같이 단결단합하여 난국을 우리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 준다.

안선생은 연로하여 신체가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미주통일운동 행사들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어 젊은이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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