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이민100주년 일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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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04-24 00:00 조회1,8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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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한 102명의 한인들은 일본 고베에서 미국상선 갤릭호(Gaelic)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새벽 하와이 호놀룰루 제2부두에 도착했다. 그래서 지난 2003년 1월 13일은 미주이민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하와이 이민을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수민원」이라는 담당기관을 설립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송출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1903년을 미주이민 시작일이라고 보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미국에서 1885년부터 장기체류를 한 서재필이나 1902년 전에 온 인삼장수, 정치망명자, 유학생들을 고려하면 1900년 이전에 미주이민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1903년 102명에 앞서 이민한 174명이 하와이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최초로 하와이로 이민한 한인은 1901년 1월 9일에 호롤룰루에 도착한 피터루라는 기록이 있다.
▲ 하와이로 처음 한인 이민자들을 실어나른 미국 상선 갤릭호
한국인의 미주이민은 구한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가난과 일제 침략으로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 왕조 말기의 혼란과 1901년 함경도 지역을 휩쓴 가뭄과 홍수는 많은 사람들을 식량과 일거리를 찾아 멀리 시베리아나 만주 혹은 서울, 인천, 원산 등 대도시로 내몰았다. 고종때 미국 공사인 알렌은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협회의 요청으로 한국인의 미주이민사업을 진행시켰다. 이미 1830년대부터 노동집약적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한 하와이에서도 이 무렵 노동인력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미 받아들인 중국인, 일본인 노동자들의 규모가 커지고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그 대안으로 한국, 필리핀, 포르투갈에서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민1세대, 조국독립과 후세교육 위한 헌신적 노력 보여
이민 1세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저임금으로 시작한 농장의 노동자 생활이었지만 조국의 독립과 2세 교육을 위해 노력을 다했다. 첫해의 1133명을 시작으로 1904년에 3434명, 1905년에 2659명 등 모두 7226명으로 늘어난 이민자들은 낯선 이국 땅의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고단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에 저임금으로 시작한 농장 노동자 생활이었지만 이민 1세대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조국의 독립과 2세의 교육이었다. 그 예로 국민회(1907∼1913)는 국권광복, 동포의 안녕보장, 교육사업 증진을 위해 헌신을 다하였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까지 전개하였다.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1910년 이후 해방되던 1945년까지 재미 한인사회에서 보낸 독립운동 자금이 무려 300만 달러가 넘었으며 오늘날 미화로 환산한다면 7000만 달러(한화 850억여원)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볼 때 상해 임시정부도 미국동포들의 지원과 노력이 없었다면 유지될 수 없었으며, 당시의 인적 자원이었던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도 재미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이민 초창기 대한인 동지회 북미총회 회원들
미 전역에서 기반을 다진 1세대들은 많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놀라운 교육열을 발휘해 후손들이 미국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조국 독립운동의 온상이었던 한인들의 이민역사는 1960년대 유학생들의 진출, 1970년대 맨손의 도미행렬, 1980년대 이후 투자 이민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인사회를 급격히 팽창시켰다.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연표>
1903. 1. 13 - 첫 한인 이민자 102명 호놀룰루 도착.
1905. 4. 30 - 미국 최초의 한인예배당, 오하우섬의 에와농장에서 헌당식 거행.
1908. 3. 23 - 장인환, 전명운 의사 워싱턴 DC에서 스티븐스 저격.
1913. 5. 13 - 안창호,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에서 흥사단 창립.
1919. 7. 17 - 이승만,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1920. 2. 20 - 노백린 등이 한인 비행학교 설립.
1921. 7. 7 - 이승만, 민찬호, 안현경 등이 호놀룰루 동지회 창립.
1925. 5. 9 - 로스앤젤레스 동포, 한국의 기근에 구호금 1천400달러 송금.
1932. 5. 22 - 오하우섬 와이하와 지역 동포들, 임시정부후원회 결성.
1941. 4. 19 -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 개막.
1942. 8. 29 - "미국의 소리" 방송 첫 한국어 방송 개시.
1946. 8. 4 - 동포 다이빙 선수 새미 리, 전미 다이빙선수권대회 우승.
1948. 11. 21 - 로스앤젤레스 대한민국 총영사관 개설, 총영사에 민희식 임명.
1949. 1. 5 - 초대 주미대사에 장면 임명.
1952. 12. 24 - 미국 신이민법 발효로 아시아계 이민자 미국 귀화 허용.
1953. 11. 15 - 호놀룰루에서 한인 이민 50주년 행사 개최.
1972. 8. 7 - 재미동포 제1차 모국방문단 결성.
1977. 1. 7 - 미 동부지역 전 현직 한인회장 친목회 결성.(미주총연의 전신)
1982. 5. 3 - 유병현 주미 한국대사,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재미장학재단 설립.
1984. 12 13 - "제1차 해외한민족회의", 뉴욕에서 개막.
1985. 2. 5 - 한인 최초 설립 정규학교인 로스앤젤레스 한국아카데미 개교.
1992. 4. 29 -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 발생.
1995. 5. 10 - 미국수학능력시험(SATⅡ)에 한국어 공식과목 채택.
1999. 12. 3 - 한국,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 시행.
2002. 10. 9 - "제1차 세계한상대회", 서울에서 개최.
2002. 11. 27 -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전국대회 개최.
2003. 1. 13 - 호놀룰루에서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식 거행.
미 전역에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기반을 다진 한인들은 놀라운 교육열을 발휘해 후손들이 미국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으며, 연방의원이나 주상원의원, 주 대법원장, 의사, 기업인 등 미국에서도 저명한 인사들로 성장했다. 또한 미 경제 센서스에 따르면 이미 1997년 미국 내 한인업체들의 매출규모는 연간 460억 달러를 초과했으며, 이는 한국의 1999년 국내총생산(GDP)의 9분의1에 이르는 규모이며 고용 인구도 33만4천명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주류사회 진출한 한인들의 면모
이민 초기에 미 주류사회에서 성공한 한인 1세대 1.5세대 2세대는 대개 한국계와 단절하고 살았거나 한국계와의 인연이 깊지는 않다. 오늘의 한국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시기다. 따라서 철저하게 미국에 동화했다. 정체성의 위기도 이에 비례했다. 하지만 1990년대를 거치면서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비례해 한국에 대한 1.5세 2세의 관심도 늘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도 생겨났다.
오늘날 미국에서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한국인의 예는 많다. 올림픽 수영선수로 금메달을 수상한 새미 리, 캘리포니아 상원법사위원장을 지낸 알프레드 송, 하와이주 대법원장을 역임한 로널드 문, 미국 병리학계의 권위자 헨리 문박사, 암벡스 그룹의 이종문 회장, 엡실론시스템스의 민병익 회장, 전 국무부 인권담당차관보 해럴드 고, 노동부 차관보 전신애,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김은국씨, 피플지 편집장 지니 박, 최연소 환경운동가로 피플지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된 대니 서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계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미국내 한국계 주요 인사
정부와 정치권 / 신호범(미상원 부의장·워싱턴주 상원의원), 존유(법무부 부차관보), 전신애(노동부 여성국장), 진교륜(평화봉사단 기획실장), 고홍주(전 국무부 인권차관보), 정동수(전 상무부부차관보), 장은정(전 하와이주 하원 부의장), 김창준(전 연방 하원의원), 문대주(하와이주 대법원장)
언론계 / 한인섭(미국의 소리방송 국장), 안재훈(자유아시아방송 국장), 지니박(피플지 편집장), 소피아 최(CNN 앵커)
문화예술계 / 김은국(작가), 이창래(작가), 홍혜경(소프라노), 장영주(바이올리니스트), 조수미(소프라노), 백남준(비디오아티스트),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음악가), 강익중(조각가)
하지만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언론인은 220명 정도다. 유력지 혹은 전국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한국계는 손꼽을 정도다.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정서를 소개할 수 있는 문학가는 극소수다. 2만여명의 의회 보좌진중 한국계는 20여명이 안된다. 백악관과 행정부처에는 극소수가 근무한다. 상대적으로 혜택이 많은 육해공군 사관학교에는 한국계가 100∼200명씩 재학하고 있지만 아직 장성 등 고위직 장교가 된 인물은 거의 없다. 월가의 정상에 진출해 있는 한국계는 미국 웰스파고은행 손성원 수석부행장 등 몇명 되지 않는다. 법조계에서도 정상에 오른 인물은 애킨 컴프의 김석한 변호사 등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계가 처한 이같은 현실은 실제 이민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탓도 있다.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된 1970년대부터 계산하면 불과 한세대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하버드대학 등 미국 명문대학에 한국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1∼2%에 달하고 이들이 미국 사회 주류 진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의 상징이다. 또 워싱턴에서 정동수 전 상무부 차관보등이 주축이 된 한국계 미국인회(KAC)등 젊은 세대의 네트워크들이 가동되어 활발히 움직이는 것도 한국계의 미래를 밝게 한다.
세대 갈등 속 정체성 위기 여전
하와이 한인들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게 되자, 일본에 대한 반대로 단결했으며 때때로 하와이의 일본인을 향해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은 어렵게 번 돈을 독립운동 기부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이러한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한인사회 발전에서 교회는 구심점이 됐다.
한인 1세대 이민자들이 중국·일본인들보다 훨씬 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도시 출신인데다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수적으로 열악한 한인들은 여러 민족의 틈바구니에서 남보다 빨리 영어를 익히면서 생존법을 터득해갔다. 또 조국에서 신랑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찾아온 "사진신부"들을 맞아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급속한 환경 적응은 한인사회의 해체현상을 불러왔다. 국제결혼 비중이 중국·일본은 물론 하와이 원주민들보다도 더 높았으며, 결혼 실패율 또한 한때 60%에 이르는 등 이혼율도 최고를 기록했다. 2·3세는 중국·일본인들보다 훨씬 개방적이어서 부모와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경제와 언론 등 미국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철저한 2세 교육으로 주류사회 진입에 성공한 것과 달리 한인들은 피부색 등 인종적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문화계승에 소홀해 중국 등 다른 아시아계 이민과 달리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도 한인사회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부모들의 교육열 덕분에 잘 준비된 1.5세, 2세들이 공무원은 물론 변호사, 의사, 정보통신(IT) 등 전문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일부 부적응 그룹은 마약에 물들거나 불량조직에 빠져 한인사회에서도 외면 당하고 있다.
LA총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미국에 살면서도 늘 과거에 사로잡혀 있거나 오늘을 살기에 급급, 주류사회 진입은 엄두도 못 내는 현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미국의 한민족 네트워크도 대체로 내부지향적이어서 주류사회로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주한인동포 사회는 100년의 역사를 맞으면서 새로운 변혁기를 맞고 있다. 미주 한인이민 100년의 역사는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가?
100년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벌써 이민 1세대는 수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가면서 이민 2, 3, 4세가 주류사회에 진출하고 심지어 이민 5세까지 배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주동포 사회만 해도 200만에 달하는 Korean American Community가 형성되어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600만 한민족의 글로벌 네트워크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이러한 양적 측면에서의 이민 100년사의 의미 외에도 미주한인들은 미국내 주류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경제, 문화, 학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은 한국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한국민에게 준 시사점은 각별하다. 가까운 예로 IMF 당시 세계 각국의 재외동포가 ‘금 모으기 운동’에 헌신적으로 동참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한민족으로서의 애국심과 자긍심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으며 모국에 있는 국민보다 더욱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에 보여준 재외동포의 애국심, 특히 1.5세대의 조국사랑은 모국의 신세대들이 태극기와 애국가를 향해 흘린 뜨거운 눈물과 어우러져 위대한 한민족 시대를 예고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용호 기자
[출처:오마이뉴스 2003/01/27]
![sysweb_96457_1[1].jpg](http://www.ohmynews.com/down/images/1/sysweb_96457_1%5B1%5D.jpg)
한국인의 미주이민은 구한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가난과 일제 침략으로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 왕조 말기의 혼란과 1901년 함경도 지역을 휩쓴 가뭄과 홍수는 많은 사람들을 식량과 일거리를 찾아 멀리 시베리아나 만주 혹은 서울, 인천, 원산 등 대도시로 내몰았다. 고종때 미국 공사인 알렌은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협회의 요청으로 한국인의 미주이민사업을 진행시켰다. 이미 1830년대부터 노동집약적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한 하와이에서도 이 무렵 노동인력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미 받아들인 중국인, 일본인 노동자들의 규모가 커지고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그 대안으로 한국, 필리핀, 포르투갈에서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민1세대, 조국독립과 후세교육 위한 헌신적 노력 보여
이민 1세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저임금으로 시작한 농장의 노동자 생활이었지만 조국의 독립과 2세 교육을 위해 노력을 다했다. 첫해의 1133명을 시작으로 1904년에 3434명, 1905년에 2659명 등 모두 7226명으로 늘어난 이민자들은 낯선 이국 땅의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고단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에 저임금으로 시작한 농장 노동자 생활이었지만 이민 1세대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조국의 독립과 2세의 교육이었다. 그 예로 국민회(1907∼1913)는 국권광복, 동포의 안녕보장, 교육사업 증진을 위해 헌신을 다하였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까지 전개하였다.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1910년 이후 해방되던 1945년까지 재미 한인사회에서 보낸 독립운동 자금이 무려 300만 달러가 넘었으며 오늘날 미화로 환산한다면 7000만 달러(한화 850억여원)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볼 때 상해 임시정부도 미국동포들의 지원과 노력이 없었다면 유지될 수 없었으며, 당시의 인적 자원이었던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도 재미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sysweb_96457_1[2].jpg](http://www.ohmynews.com/down/images/1/sysweb_96457_1%5B2%5D.jpg)
미 전역에서 기반을 다진 1세대들은 많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놀라운 교육열을 발휘해 후손들이 미국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조국 독립운동의 온상이었던 한인들의 이민역사는 1960년대 유학생들의 진출, 1970년대 맨손의 도미행렬, 1980년대 이후 투자 이민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인사회를 급격히 팽창시켰다.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연표>
1903. 1. 13 - 첫 한인 이민자 102명 호놀룰루 도착.
1905. 4. 30 - 미국 최초의 한인예배당, 오하우섬의 에와농장에서 헌당식 거행.
1908. 3. 23 - 장인환, 전명운 의사 워싱턴 DC에서 스티븐스 저격.
1913. 5. 13 - 안창호,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에서 흥사단 창립.
1919. 7. 17 - 이승만,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1920. 2. 20 - 노백린 등이 한인 비행학교 설립.
1921. 7. 7 - 이승만, 민찬호, 안현경 등이 호놀룰루 동지회 창립.
1925. 5. 9 - 로스앤젤레스 동포, 한국의 기근에 구호금 1천400달러 송금.
1932. 5. 22 - 오하우섬 와이하와 지역 동포들, 임시정부후원회 결성.
1941. 4. 19 -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 개막.
1942. 8. 29 - "미국의 소리" 방송 첫 한국어 방송 개시.
1946. 8. 4 - 동포 다이빙 선수 새미 리, 전미 다이빙선수권대회 우승.
1948. 11. 21 - 로스앤젤레스 대한민국 총영사관 개설, 총영사에 민희식 임명.
1949. 1. 5 - 초대 주미대사에 장면 임명.
1952. 12. 24 - 미국 신이민법 발효로 아시아계 이민자 미국 귀화 허용.
1953. 11. 15 - 호놀룰루에서 한인 이민 50주년 행사 개최.
1972. 8. 7 - 재미동포 제1차 모국방문단 결성.
1977. 1. 7 - 미 동부지역 전 현직 한인회장 친목회 결성.(미주총연의 전신)
1982. 5. 3 - 유병현 주미 한국대사,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재미장학재단 설립.
1984. 12 13 - "제1차 해외한민족회의", 뉴욕에서 개막.
1985. 2. 5 - 한인 최초 설립 정규학교인 로스앤젤레스 한국아카데미 개교.
1992. 4. 29 -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 발생.
1995. 5. 10 - 미국수학능력시험(SATⅡ)에 한국어 공식과목 채택.
1999. 12. 3 - 한국,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 시행.
2002. 10. 9 - "제1차 세계한상대회", 서울에서 개최.
2002. 11. 27 -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전국대회 개최.
2003. 1. 13 - 호놀룰루에서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식 거행.
미 전역에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기반을 다진 한인들은 놀라운 교육열을 발휘해 후손들이 미국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으며, 연방의원이나 주상원의원, 주 대법원장, 의사, 기업인 등 미국에서도 저명한 인사들로 성장했다. 또한 미 경제 센서스에 따르면 이미 1997년 미국 내 한인업체들의 매출규모는 연간 460억 달러를 초과했으며, 이는 한국의 1999년 국내총생산(GDP)의 9분의1에 이르는 규모이며 고용 인구도 33만4천명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주류사회 진출한 한인들의 면모
이민 초기에 미 주류사회에서 성공한 한인 1세대 1.5세대 2세대는 대개 한국계와 단절하고 살았거나 한국계와의 인연이 깊지는 않다. 오늘의 한국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시기다. 따라서 철저하게 미국에 동화했다. 정체성의 위기도 이에 비례했다. 하지만 1990년대를 거치면서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비례해 한국에 대한 1.5세 2세의 관심도 늘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도 생겨났다.
오늘날 미국에서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한국인의 예는 많다. 올림픽 수영선수로 금메달을 수상한 새미 리, 캘리포니아 상원법사위원장을 지낸 알프레드 송, 하와이주 대법원장을 역임한 로널드 문, 미국 병리학계의 권위자 헨리 문박사, 암벡스 그룹의 이종문 회장, 엡실론시스템스의 민병익 회장, 전 국무부 인권담당차관보 해럴드 고, 노동부 차관보 전신애,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김은국씨, 피플지 편집장 지니 박, 최연소 환경운동가로 피플지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된 대니 서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계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미국내 한국계 주요 인사
정부와 정치권 / 신호범(미상원 부의장·워싱턴주 상원의원), 존유(법무부 부차관보), 전신애(노동부 여성국장), 진교륜(평화봉사단 기획실장), 고홍주(전 국무부 인권차관보), 정동수(전 상무부부차관보), 장은정(전 하와이주 하원 부의장), 김창준(전 연방 하원의원), 문대주(하와이주 대법원장)
언론계 / 한인섭(미국의 소리방송 국장), 안재훈(자유아시아방송 국장), 지니박(피플지 편집장), 소피아 최(CNN 앵커)
문화예술계 / 김은국(작가), 이창래(작가), 홍혜경(소프라노), 장영주(바이올리니스트), 조수미(소프라노), 백남준(비디오아티스트),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음악가), 강익중(조각가)
하지만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언론인은 220명 정도다. 유력지 혹은 전국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한국계는 손꼽을 정도다.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정서를 소개할 수 있는 문학가는 극소수다. 2만여명의 의회 보좌진중 한국계는 20여명이 안된다. 백악관과 행정부처에는 극소수가 근무한다. 상대적으로 혜택이 많은 육해공군 사관학교에는 한국계가 100∼200명씩 재학하고 있지만 아직 장성 등 고위직 장교가 된 인물은 거의 없다. 월가의 정상에 진출해 있는 한국계는 미국 웰스파고은행 손성원 수석부행장 등 몇명 되지 않는다. 법조계에서도 정상에 오른 인물은 애킨 컴프의 김석한 변호사 등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계가 처한 이같은 현실은 실제 이민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탓도 있다.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된 1970년대부터 계산하면 불과 한세대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하버드대학 등 미국 명문대학에 한국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1∼2%에 달하고 이들이 미국 사회 주류 진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의 상징이다. 또 워싱턴에서 정동수 전 상무부 차관보등이 주축이 된 한국계 미국인회(KAC)등 젊은 세대의 네트워크들이 가동되어 활발히 움직이는 것도 한국계의 미래를 밝게 한다.
세대 갈등 속 정체성 위기 여전
하와이 한인들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게 되자, 일본에 대한 반대로 단결했으며 때때로 하와이의 일본인을 향해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은 어렵게 번 돈을 독립운동 기부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이러한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와 한인사회 발전에서 교회는 구심점이 됐다.
한인 1세대 이민자들이 중국·일본인들보다 훨씬 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도시 출신인데다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수적으로 열악한 한인들은 여러 민족의 틈바구니에서 남보다 빨리 영어를 익히면서 생존법을 터득해갔다. 또 조국에서 신랑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찾아온 "사진신부"들을 맞아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급속한 환경 적응은 한인사회의 해체현상을 불러왔다. 국제결혼 비중이 중국·일본은 물론 하와이 원주민들보다도 더 높았으며, 결혼 실패율 또한 한때 60%에 이르는 등 이혼율도 최고를 기록했다. 2·3세는 중국·일본인들보다 훨씬 개방적이어서 부모와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경제와 언론 등 미국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철저한 2세 교육으로 주류사회 진입에 성공한 것과 달리 한인들은 피부색 등 인종적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문화계승에 소홀해 중국 등 다른 아시아계 이민과 달리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도 한인사회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부모들의 교육열 덕분에 잘 준비된 1.5세, 2세들이 공무원은 물론 변호사, 의사, 정보통신(IT) 등 전문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일부 부적응 그룹은 마약에 물들거나 불량조직에 빠져 한인사회에서도 외면 당하고 있다.
LA총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미국에 살면서도 늘 과거에 사로잡혀 있거나 오늘을 살기에 급급, 주류사회 진입은 엄두도 못 내는 현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미국의 한민족 네트워크도 대체로 내부지향적이어서 주류사회로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주한인동포 사회는 100년의 역사를 맞으면서 새로운 변혁기를 맞고 있다. 미주 한인이민 100년의 역사는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가?
100년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벌써 이민 1세대는 수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가면서 이민 2, 3, 4세가 주류사회에 진출하고 심지어 이민 5세까지 배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주동포 사회만 해도 200만에 달하는 Korean American Community가 형성되어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600만 한민족의 글로벌 네트워크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이러한 양적 측면에서의 이민 100년사의 의미 외에도 미주한인들은 미국내 주류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경제, 문화, 학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은 한국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한국민에게 준 시사점은 각별하다. 가까운 예로 IMF 당시 세계 각국의 재외동포가 ‘금 모으기 운동’에 헌신적으로 동참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한민족으로서의 애국심과 자긍심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으며 모국에 있는 국민보다 더욱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에 보여준 재외동포의 애국심, 특히 1.5세대의 조국사랑은 모국의 신세대들이 태극기와 애국가를 향해 흘린 뜨거운 눈물과 어우러져 위대한 한민족 시대를 예고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용호 기자
[출처:오마이뉴스 200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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