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인물]진관스님 25시의 현주소</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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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03-17 00:00 조회1,9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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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인터뷰] 마음먹기 따라 구더기를 혀로 씻어도 행복
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진관 스님의 삶과 보람을 찾아서 - 2003/02 33호
아침9시 불교인권위 사무실에 들어서자 진관 스님은 컴퓨터에 눈을 집중하고 열심히 논평을 쓰고 있었다. 밤새워 글을 쓰다 잠깐 쪽잠에 들었다가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상에 올라온 어떤 사건에 대한 논평을 쓰고 있는 참이다. 진관 스님이 쓰는 글의 양은 참으로 대단하다.
통일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진관합장’을 치면 수백 건의 글이 올라온다. 컴퓨터를 배운지 일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글은 일년동안 쓴 글이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있을 때는 한달만에 1천편의 시를 창작했던 적도 있다. 그중의 일부를 묶어 시집도 여러 권 출간하였다. 글의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성명, 논평, 칼럼, 전문 이론글, 시와 연극대본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정말 종횡무진, 불철주야이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하게 뛰어다니는 스님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어려있다
그런 정열적인 창작열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를 진관 스님과 하루 동안 함께 하면서 찾아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대승불교가 표방하는 살신성인의 정신과 왕성한 실천활동이 그 답이었다.
잠은 지하철에서 자도 충분한 사람
아침 글쓰기를 끝내고 기자를 만나서 1시간동안 대화를 나눈 후 곧바로 미대사관 앞에서 열린 여중생관련 반미시위 저지하려는 미국의 비밀작전문서 규탄 집회에 참석하였고 곧바로 점심식사 후에 지하철을 타고 과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법무부를 찾아가 광주교도소에 수감중인 최진수(민혁당 사건 관련)씨를 폭행한 교도관 처벌을 주장하는 면담을 진행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이북 국수공장을 지원하는 불교단체에 가서 몇 가지 사항을 논의하면서 기자와 못 다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인터뷰 도중 잠깐씩 의자에 머리를 젖히고 쪽잠을 자기도 하였다.
인터뷰가 끝나자 곧바로 저녁도 먹지 못하고 진관 스님은 촛불시위를 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나섰다.
중간중간 끊임없이 전화벨은 울려댄다. 인권과 관련된 문의 사항이나 새롭게 제기된 일감들에 대한 전화들이다. 반미운동, 통일운동, 민중운동, 종교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등 진관 스님의 활동폭에는 한계가 없다.
하루 일이 끝나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아직은 서투른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려 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이동하는 지하철이나 차 안이 좋은 침실이고 취침 시간이다.
‘현실에서 싸우는 이가 진정한 불자’
진관 스님은 66년 애젊은 시절에 불교계에 입문하여 깨끗한 종교인으로 살아왔다.
1월22일 미대사관앞에서 열린 여중생관련 반미시위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비밀작전 문서 규탄 집회에 참석한 스님. 왼쪽두번째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그동안 불교는 권력지향적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과거 호국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을 생각했던 우리 불교의 전통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보다는 영규 스님을 더 좋아하고 만해 한용운 스님을 존경한다. 임진왜란때 서산대사는 왕을 호위해서 의주까지 피난을 갔을 뿐이지 직접 싸우지 않았다. 사명대사도 싸움을 지도하기는 했지만 직접나서서 창칼을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규대사는 전장에서 일본 사무라이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셨다. 만해 한용운 스님도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본과 싸웠다. 을지문덕 장군도 승려였고 침략자 살례타를 처단한 고려의 김윤후 장군도 승려였다. 나는 이런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고민하였고 그 답은 바로 민중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관 스님은 그렇다. 사명대사처럼 지도하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실천가이다. 직접 창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참다운 불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극락왕생을 추구하는 소승불교가 아니라 만인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는 대승불교가 우리 불교의 주류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소승적으로 사는 불자들이 많았다고 지적하면서 대승불교의 정신은 바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민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살신성인의 정신이다. 그래서 수행도 수행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불교에서 민중불교로 환골하기까지
이런 종교적 신념을 가진 진관 스님이었기에 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불교계의 혁신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
시대의 추세에 맞게 운동하기 위해 1년전 컴퓨터를 배웠다는 스님.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광주항쟁이 일어났지만 불교종단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서 광주민중의 편에 나서지 못했다. 전두환과 같은 학살자를 추종하는 종단 상층의 흐름이 너무 강했다. 그 속에서도 불자 개개인들의 가슴에 조금씩 반항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81년에 청년승려들과 대학생불교연합 학생들과 함께 5·18전야제 행사를 가졌다. 그때 진관 스님은 80년 광주도청에서 전사한 김동수 조선대학교 불교학생회 회장을 추모하는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82년에도 추모행사를 가졌고 83년도에는 뜻있는 불교인들과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였다. 그는 8 4년에 ‘민족회의’라는 재야단체에 가입했고 85년에는 ‘민중불교운동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전에는 승려들이 개별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는데 이제는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이런 노력과 성과를 모아 90년 11월 20일 ‘불교인권위’를 결성하였다. 인권운동을 종교계에서 직접 표방하고 나선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기독교는 엔씨씨(NCC) 내에 인권사무실을 두고 있었지 직접 표방하지는 못하던 상황이었다. 하기에 종교계에서는 엄청난 일이었고 방송과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사건이었다.
“보수적인 스님들도 인권운동에는 관심을 많이 가졌다. 불교계에서 정신대 할머니 집짓기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해서 이를 사회적으로 부각시켰다. 특히 내가 85년 전민련에서 인권위원장을 맡아 일을 하고 감옥에도 잡혀가서 장기수 선생님들을 만나보니 청년학생과 장기수 석방운동을 해야 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스님의 일인시위용 목걸이선전물
이런 운동이 불자들의 많은 지지로 이어지고 결국 94년에 전체 불교도의 이름으로 광주항쟁 때 불교계가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앞으로 불교계를 혁신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권력불교를 완전히 청산 퇴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종교계에서 이렇게 완전히 개혁을 이룬 곳은 불교계가 처음이다. 조계종에서도 미군철수 주장을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못한다.”
구더기도 깨끗하다고 여기는 미륵보살의 정신
진관 스님은 이런 활동을 전개하면서 크게 세가지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의 바른 법을 알리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친일파, 민족반역의불교가 아니라 민족해방, 민중을 위한 불교, 평화, 자유 이런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또한 기존에는 불교계에서 인권을 위한 일을 하지 못했는데‘불교인권위’를 통해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다. 누구도 장기수 송환에 대해서 과감히 주장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인모 선생 송환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며,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선생의 송환 운동도 벌였다. 그래서인지 2001년 평양에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을 다시 만나 뵙게 되었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마지막으로는 박종철 열사에 대한 불교계의 노력에 부족함이 많았는데 박종철 열사 사건으로 감옥에 간 것이 큰 기쁨이자 보람이었다.”
진관 스님은 이렇게 감옥에 간 것을 열사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던 행복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어떤 어려움도 그를 만나면 맥을 못 추게 된다.
“불교에서 미륵보살은 다른 이의 육신의 곪은 살에 슬은 구더기를 혀로 닦아냈던 분이다. 구더기도 더럽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 정신을 조금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어려움도 즐거움이 된다.”
스님의 거처에 있는 법당
마음먹기에 따라 고난도 행복으로 여길 수 있는 진관 스님의 정신에서 사람에게 신념과 의지가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새삼 느껴 본다.
참 행복한 스님
“내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바로 실천이다. 남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지속적으로 민족과 민중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사의 다짐을 필요로 한다. 시류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실천가들은 좌절하는 법이 없다. 어려울 때는 독립운동가들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닦았으면 좋겠다. 개인의 안락과 영화는 허무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들과 열사들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눈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새 희망이 반드시 피어나게 된다. 그것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관 스님이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진관 스님이 그 어마어마한 시를 창작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바로 왕성한 실천가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 기자가 느낀 결론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라는 괴테의 말이 생각난다. 이론도 결국은 현실 속에서 나온다. 그 현실속으로 들어가서 정열적으로 실천하는 자가 바로 창조의 주인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진관 스님은 분신한 노동자 배달호 열사의 영정 앞이 아니면 미국대사관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영원히 푸르른 생명의 숲속에서 오늘도 내일도 생의 보람을 따고 있을 것이다. 진관 스님은 참 행복한 스님이다.
글.사진 이창기 발행인
[출처:월간 우리 2003년 2월호 대담특집]
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진관 스님의 삶과 보람을 찾아서 - 2003/02 33호
아침9시 불교인권위 사무실에 들어서자 진관 스님은 컴퓨터에 눈을 집중하고 열심히 논평을 쓰고 있었다. 밤새워 글을 쓰다 잠깐 쪽잠에 들었다가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상에 올라온 어떤 사건에 대한 논평을 쓰고 있는 참이다. 진관 스님이 쓰는 글의 양은 참으로 대단하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있을 때는 한달만에 1천편의 시를 창작했던 적도 있다. 그중의 일부를 묶어 시집도 여러 권 출간하였다. 글의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성명, 논평, 칼럼, 전문 이론글, 시와 연극대본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정말 종횡무진, 불철주야이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하게 뛰어다니는 스님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어려있다
그런 정열적인 창작열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를 진관 스님과 하루 동안 함께 하면서 찾아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대승불교가 표방하는 살신성인의 정신과 왕성한 실천활동이 그 답이었다.
잠은 지하철에서 자도 충분한 사람
아침 글쓰기를 끝내고 기자를 만나서 1시간동안 대화를 나눈 후 곧바로 미대사관 앞에서 열린 여중생관련 반미시위 저지하려는 미국의 비밀작전문서 규탄 집회에 참석하였고 곧바로 점심식사 후에 지하철을 타고 과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법무부를 찾아가 광주교도소에 수감중인 최진수(민혁당 사건 관련)씨를 폭행한 교도관 처벌을 주장하는 면담을 진행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이북 국수공장을 지원하는 불교단체에 가서 몇 가지 사항을 논의하면서 기자와 못 다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인터뷰 도중 잠깐씩 의자에 머리를 젖히고 쪽잠을 자기도 하였다.
인터뷰가 끝나자 곧바로 저녁도 먹지 못하고 진관 스님은 촛불시위를 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나섰다.
중간중간 끊임없이 전화벨은 울려댄다. 인권과 관련된 문의 사항이나 새롭게 제기된 일감들에 대한 전화들이다. 반미운동, 통일운동, 민중운동, 종교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등 진관 스님의 활동폭에는 한계가 없다.
하루 일이 끝나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아직은 서투른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려 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이동하는 지하철이나 차 안이 좋은 침실이고 취침 시간이다.
‘현실에서 싸우는 이가 진정한 불자’
진관 스님은 66년 애젊은 시절에 불교계에 입문하여 깨끗한 종교인으로 살아왔다.
1월22일 미대사관앞에서 열린 여중생관련 반미시위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비밀작전 문서 규탄 집회에 참석한 스님. 왼쪽두번째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그동안 불교는 권력지향적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과거 호국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을 생각했던 우리 불교의 전통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보다는 영규 스님을 더 좋아하고 만해 한용운 스님을 존경한다. 임진왜란때 서산대사는 왕을 호위해서 의주까지 피난을 갔을 뿐이지 직접 싸우지 않았다. 사명대사도 싸움을 지도하기는 했지만 직접나서서 창칼을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규대사는 전장에서 일본 사무라이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셨다. 만해 한용운 스님도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본과 싸웠다. 을지문덕 장군도 승려였고 침략자 살례타를 처단한 고려의 김윤후 장군도 승려였다. 나는 이런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고민하였고 그 답은 바로 민중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관 스님은 그렇다. 사명대사처럼 지도하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실천가이다. 직접 창칼을 들고 싸우는 것이 참다운 불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극락왕생을 추구하는 소승불교가 아니라 만인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는 대승불교가 우리 불교의 주류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소승적으로 사는 불자들이 많았다고 지적하면서 대승불교의 정신은 바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민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살신성인의 정신이다. 그래서 수행도 수행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불교에서 민중불교로 환골하기까지
이런 종교적 신념을 가진 진관 스님이었기에 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불교계의 혁신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
시대의 추세에 맞게 운동하기 위해 1년전 컴퓨터를 배웠다는 스님.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광주항쟁이 일어났지만 불교종단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서 광주민중의 편에 나서지 못했다. 전두환과 같은 학살자를 추종하는 종단 상층의 흐름이 너무 강했다. 그 속에서도 불자 개개인들의 가슴에 조금씩 반항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81년에 청년승려들과 대학생불교연합 학생들과 함께 5·18전야제 행사를 가졌다. 그때 진관 스님은 80년 광주도청에서 전사한 김동수 조선대학교 불교학생회 회장을 추모하는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82년에도 추모행사를 가졌고 83년도에는 뜻있는 불교인들과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였다. 그는 8 4년에 ‘민족회의’라는 재야단체에 가입했고 85년에는 ‘민중불교운동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전에는 승려들이 개별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는데 이제는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이런 노력과 성과를 모아 90년 11월 20일 ‘불교인권위’를 결성하였다. 인권운동을 종교계에서 직접 표방하고 나선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기독교는 엔씨씨(NCC) 내에 인권사무실을 두고 있었지 직접 표방하지는 못하던 상황이었다. 하기에 종교계에서는 엄청난 일이었고 방송과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사건이었다.
“보수적인 스님들도 인권운동에는 관심을 많이 가졌다. 불교계에서 정신대 할머니 집짓기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해서 이를 사회적으로 부각시켰다. 특히 내가 85년 전민련에서 인권위원장을 맡아 일을 하고 감옥에도 잡혀가서 장기수 선생님들을 만나보니 청년학생과 장기수 석방운동을 해야 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스님의 일인시위용 목걸이선전물
이런 운동이 불자들의 많은 지지로 이어지고 결국 94년에 전체 불교도의 이름으로 광주항쟁 때 불교계가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앞으로 불교계를 혁신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권력불교를 완전히 청산 퇴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종교계에서 이렇게 완전히 개혁을 이룬 곳은 불교계가 처음이다. 조계종에서도 미군철수 주장을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못한다.”
구더기도 깨끗하다고 여기는 미륵보살의 정신
진관 스님은 이런 활동을 전개하면서 크게 세가지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의 바른 법을 알리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친일파, 민족반역의불교가 아니라 민족해방, 민중을 위한 불교, 평화, 자유 이런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또한 기존에는 불교계에서 인권을 위한 일을 하지 못했는데‘불교인권위’를 통해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다. 누구도 장기수 송환에 대해서 과감히 주장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인모 선생 송환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며,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선생의 송환 운동도 벌였다. 그래서인지 2001년 평양에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을 다시 만나 뵙게 되었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마지막으로는 박종철 열사에 대한 불교계의 노력에 부족함이 많았는데 박종철 열사 사건으로 감옥에 간 것이 큰 기쁨이자 보람이었다.”
진관 스님은 이렇게 감옥에 간 것을 열사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던 행복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어떤 어려움도 그를 만나면 맥을 못 추게 된다.
“불교에서 미륵보살은 다른 이의 육신의 곪은 살에 슬은 구더기를 혀로 닦아냈던 분이다. 구더기도 더럽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 정신을 조금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어려움도 즐거움이 된다.”
스님의 거처에 있는 법당
마음먹기에 따라 고난도 행복으로 여길 수 있는 진관 스님의 정신에서 사람에게 신념과 의지가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새삼 느껴 본다.
참 행복한 스님
“내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바로 실천이다. 남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지속적으로 민족과 민중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사의 다짐을 필요로 한다. 시류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실천가들은 좌절하는 법이 없다. 어려울 때는 독립운동가들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닦았으면 좋겠다. 개인의 안락과 영화는 허무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들과 열사들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눈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새 희망이 반드시 피어나게 된다. 그것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관 스님이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진관 스님이 그 어마어마한 시를 창작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바로 왕성한 실천가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 기자가 느낀 결론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라는 괴테의 말이 생각난다. 이론도 결국은 현실 속에서 나온다. 그 현실속으로 들어가서 정열적으로 실천하는 자가 바로 창조의 주인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진관 스님은 분신한 노동자 배달호 열사의 영정 앞이 아니면 미국대사관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영원히 푸르른 생명의 숲속에서 오늘도 내일도 생의 보람을 따고 있을 것이다. 진관 스님은 참 행복한 스님이다.
글.사진 이창기 발행인
[출처:월간 우리 2003년 2월호 대담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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