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정치수배 한총련 유영업씨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영 작성일03-02-14 00:00 조회1,56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기사돌려보기
이젠, 제 자신의 삶을 되찾고 싶습니다
<양심수를 석방하라⑥> 기사돌려보기
이젠, 제 자신의 삶을 되찾고 싶습니다
"가족들이 명절다운 명절을 보낸 적이 없어요. 가장 즐거워 할 때 가장 우울하게 보냈지요. 지금은 가슴 아프게 보내지만 다음 명절엔 가족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97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 권한대행 유영업. 당시 강위원 한총련 의장이 6월경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이 되고 목포대학교 총학생회장인 유영업씨(29세)가 한총련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수배생활이 올해로 벌써 7년째다.
민족의 명절이라는 설. 그는 7년 동안 고향인 영광에 가보지 못하고 또 다시 명절을 맞이한다.
정지되어 있는 삶, 이젠 되찾아야겠다
2000년 615 정상회담의 결과에도 국가보안법 철폐와 수배 해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영업씨는 학교로 내려갔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최장기 수배자로.
"작년 3월에 내려갔어요. 97년에 광주를 떠난지 6년 5개월만의 일이지요. 그런데 복적을 하려는데 주민등록이 말소가 된거예요. 군대 영장이 계속 나오니까 행방불명으로 처리해 아예 말소시킨거예요."
그는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광주지역의 사회단체 사람들과 어렵사리 직접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발부받았다. 유영업이라는 이름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 바로 휴학을 했지요. 그리고 학교에서 10개월간 있었어요. 6년 만에 그나마 정상적인 생활을 한거지요. 그 동안 꿈꿔왔던 것들을 현실적으로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자유롭게 걸어다니고 "유영업"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수배생활동안 다른 이에게 내 이름을 말할 수도 없고 소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절실하게 하고 싶었던 게 그리운 사람들 만나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 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보냈어요. 수배생활의 가장 큰 피해는 육체적 어려움이 아니라 정신적 피해가 더 큽니다. 사회적 고립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캠퍼스를 거니는 학우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그리고 정겹게 다니는 연인들의 모습...이런 것들이 저에게는 너무 행복한 한폭의 그림 같아요. 지나가는 사람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너무너무 사람들이 그리워서...그리고 집과 학교가 37분거리 거든요... 그나마 집과 가까운 거리에서라도 있고 싶어요. 그 37분 거리를 아직도 건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안정적인(?) 학교에서의 생활을 다시금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정치수배해제 문제를 공론화시켜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다시 서울에 올라 오려고 하는데 반나절동안 짐을 못 꾸렸습니다. 7년 동안 늘 짐을 쌌지만 이번엔 그리 쉽게 안되더군요. 다른 사람이 꾸려야 하는 짐처럼 모른 척하면서 사람들과 떠들고 컴퓨터도 하고 그랬는어요. 결국엔 내가 꾸려야 하는 짐이다 마음 먹고 꾸렸지요... 이런 상황이 너무 버겁습니다."
이내 눈가가 빨개지더니 고개를 숙인다. 학교를 떠나는 날 부모님이 많이 우실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맛난 음식을 장만해 오셨다. 자식이 어디서 먹고 자는지 모르지만 7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자식을 보내주었다.
그는 서울에 와서 "정치수배해제 모임"을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창살"이라는 까페를 다음(cafe.daum.net/nofree2003)에 개설하고 한총련 정치 수배문제를 직접적으로 풀것을 고민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그는 "전체 수배자 총회"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고 정치 수배 해제 탄원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20대는 수배로 보냈지만 30대는 밝은 희망으로
"한명은 97년도 수배 생활 중 김영삼 정권에 의해 살해, 다른 한명은 97년도 한총련 의장 권한대행이었고 현재까지 수배 7년째.
국가 보안법은 아직도 유효하고...정치수배자는 아직 거리를 헤매고 한총련은 여전히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바뀐게 무엇이란 말인가..."
한총련 정치수배자들은 2월 4일(立春)에 "한총련 관련 수배해제를 위한" 사무실을 개소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솔직히 이번 대통령 특별사면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정치권에서 말하는 "대통령 특사 사면 반대"는 부정부패 비리사범들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감에서 출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복되지 않은 사면의 차원에서 사면반대를 말하는 것이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고 사회적 이슈로 감옥에 들어간 양심수를 뜻하는게 아닙니다."
"사실 수배해제가 되면 실감이 안 날것 같아요. 자신을 감추는데 익숙해져버렸는데 나를 드러내고 산다는게 약간은 어색함이 느껴질 것 같은데요. 학과 공부도 다시 하고 싶고 사회에 나갈 준비도 해야 하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는 거잖아요. 남은 학점이 있어 학교도 더 다녀야 하고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남들 20대에 할 것을 전 30대에나 하겠네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하게 되는 자유의 몸...
"집에서 밥을 직접 해서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고향집도 고향집이지만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은 망월동에 가고 싶거든요. 모두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는 준배형을 만나러 갈꺼예요."
유영업씨는 여유가 생기면 지리산 천왕봉에 가고 싶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 어렵다는 일출을 예전에 두번이나 봤다고 말하는 그는 밝은 일출을 다시 보고 싶다고 힘주어 말한다.
관련사이트 http://cafe.daum.net/nofree2003
[출처;2003년01월30일 ⓒ민중의 소리]
이젠, 제 자신의 삶을 되찾고 싶습니다
<양심수를 석방하라⑥> 기사돌려보기
이젠, 제 자신의 삶을 되찾고 싶습니다

97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 권한대행 유영업. 당시 강위원 한총련 의장이 6월경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이 되고 목포대학교 총학생회장인 유영업씨(29세)가 한총련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수배생활이 올해로 벌써 7년째다.
민족의 명절이라는 설. 그는 7년 동안 고향인 영광에 가보지 못하고 또 다시 명절을 맞이한다.
정지되어 있는 삶, 이젠 되찾아야겠다
2000년 615 정상회담의 결과에도 국가보안법 철폐와 수배 해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영업씨는 학교로 내려갔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최장기 수배자로.
"작년 3월에 내려갔어요. 97년에 광주를 떠난지 6년 5개월만의 일이지요. 그런데 복적을 하려는데 주민등록이 말소가 된거예요. 군대 영장이 계속 나오니까 행방불명으로 처리해 아예 말소시킨거예요."
그는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광주지역의 사회단체 사람들과 어렵사리 직접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발부받았다. 유영업이라는 이름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 바로 휴학을 했지요. 그리고 학교에서 10개월간 있었어요. 6년 만에 그나마 정상적인 생활을 한거지요. 그 동안 꿈꿔왔던 것들을 현실적으로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자유롭게 걸어다니고 "유영업"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수배생활동안 다른 이에게 내 이름을 말할 수도 없고 소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절실하게 하고 싶었던 게 그리운 사람들 만나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 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보냈어요. 수배생활의 가장 큰 피해는 육체적 어려움이 아니라 정신적 피해가 더 큽니다. 사회적 고립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캠퍼스를 거니는 학우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그리고 정겹게 다니는 연인들의 모습...이런 것들이 저에게는 너무 행복한 한폭의 그림 같아요. 지나가는 사람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너무너무 사람들이 그리워서...그리고 집과 학교가 37분거리 거든요... 그나마 집과 가까운 거리에서라도 있고 싶어요. 그 37분 거리를 아직도 건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안정적인(?) 학교에서의 생활을 다시금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정치수배해제 문제를 공론화시켜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다시 서울에 올라 오려고 하는데 반나절동안 짐을 못 꾸렸습니다. 7년 동안 늘 짐을 쌌지만 이번엔 그리 쉽게 안되더군요. 다른 사람이 꾸려야 하는 짐처럼 모른 척하면서 사람들과 떠들고 컴퓨터도 하고 그랬는어요. 결국엔 내가 꾸려야 하는 짐이다 마음 먹고 꾸렸지요... 이런 상황이 너무 버겁습니다."
이내 눈가가 빨개지더니 고개를 숙인다. 학교를 떠나는 날 부모님이 많이 우실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맛난 음식을 장만해 오셨다. 자식이 어디서 먹고 자는지 모르지만 7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자식을 보내주었다.
그는 서울에 와서 "정치수배해제 모임"을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창살"이라는 까페를 다음(cafe.daum.net/nofree2003)에 개설하고 한총련 정치 수배문제를 직접적으로 풀것을 고민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그는 "전체 수배자 총회"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고 정치 수배 해제 탄원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20대는 수배로 보냈지만 30대는 밝은 희망으로
"한명은 97년도 수배 생활 중 김영삼 정권에 의해 살해, 다른 한명은 97년도 한총련 의장 권한대행이었고 현재까지 수배 7년째.
국가 보안법은 아직도 유효하고...정치수배자는 아직 거리를 헤매고 한총련은 여전히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바뀐게 무엇이란 말인가..."
한총련 정치수배자들은 2월 4일(立春)에 "한총련 관련 수배해제를 위한" 사무실을 개소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솔직히 이번 대통령 특별사면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정치권에서 말하는 "대통령 특사 사면 반대"는 부정부패 비리사범들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감에서 출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복되지 않은 사면의 차원에서 사면반대를 말하는 것이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고 사회적 이슈로 감옥에 들어간 양심수를 뜻하는게 아닙니다."
"사실 수배해제가 되면 실감이 안 날것 같아요. 자신을 감추는데 익숙해져버렸는데 나를 드러내고 산다는게 약간은 어색함이 느껴질 것 같은데요. 학과 공부도 다시 하고 싶고 사회에 나갈 준비도 해야 하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는 거잖아요. 남은 학점이 있어 학교도 더 다녀야 하고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남들 20대에 할 것을 전 30대에나 하겠네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하게 되는 자유의 몸...
"집에서 밥을 직접 해서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고향집도 고향집이지만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은 망월동에 가고 싶거든요. 모두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는 준배형을 만나러 갈꺼예요."
유영업씨는 여유가 생기면 지리산 천왕봉에 가고 싶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 어렵다는 일출을 예전에 두번이나 봤다고 말하는 그는 밝은 일출을 다시 보고 싶다고 힘주어 말한다.
관련사이트 http://cafe.daum.net/nofree2003
[출처;2003년01월30일 ⓒ민중의 소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