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반전대표단 현지 소식</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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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3-31 00:00 조회1,5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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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바그다드 현지에 남아있는 한상진, 유은하. 배상현씨의 소식을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에서 계속 전해주고 있으며, 요르단 암만에서 민주노총 전쟁반대 대표단이 민주노총에 소식을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긴박한 현장 소식을 그대로 전제하며 소제목은 편의상 조정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3월 22일 오전 10시]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과 민주노총 파견단 공동기자회견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과 민주노총 파견단은 22일 오전 10시(요르단 시각) 요르단 주재 한국대사관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이들은 공동성명서에서 "지금 바그다드에, 48시간의 공습 속에는 한국 이라크 평화팀 3명이 이라크 민중과 함께 있다. 방독면 하나 없이 이 전쟁을 맞이해야 하는 이라크 사람들과 전쟁을 겪어내기 위해 우리는 바그다드와 암만에 서 있는 것이다"며 "한국군이 이 더러운 침략의 전쟁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향한 미군의 범죄와 더불어 그들과 공범이 될 한국군의 부도덕한 참전을 함께 증언할 것이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전쟁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가 기록할 이 전쟁의 진실을 막지 못할 것이다"고 주장하고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대 이라크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결정을 즉각 철회"할 것과 "노무현 정부는 제 2의 베트남전이 될 미국의 대 이라크전쟁 지지입장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암만에서 보내는 편지 7 -3월 22일 새벽 2시] 21일 두 차례 반전시위에 참여
오늘이 벌써 서울을 떠나온 지 일주일째이군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숙소의 CNN에서는 미국 전투기가 바그다드에 폭격을 가했다는 소식으로 가득합니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바그다드 폭격 소식을 전하는 저들에게 그 폭격에 의해 희생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존재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암만에서는 두 개의 반전시위가 있었습니다. 물론 둘 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시위`였습니다. 사실 요르단에서 시위 허가를 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표단과 같은 외부인이 허가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시위에 참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결국 오늘 두 개의 시위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3월 21일 오전 11시 30분. 우리는 암만 시내 중심가의 알 후세인 모스크(이슬람 교회)에서 기도가 끝난 다음, 시위가 전개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호텔(압자르 호텔)을 나섰습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국(異國)에서 불법 시위를 하는 게 우리들에게 상당한 긴장과 흥분을 가져다 준 모양입니다. 도착하니 벌써 시위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약 400여명 정도입니다. 그들은 이라크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위 대열은 약 15분 정도 견디나 싶더니 곧바로 경찰의 강경 진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시내 중심가여서 그런지 경찰은 시위대에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고, 최루탄을 쏘아서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요르단 경찰의 최루가스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가볍게 코만 간지러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더군요. 준비해간 피켓과 플래카드, 몸 벽보를 써보지도 못하고, 해산당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후 1시 30분경. 와히다드(Wehdat)라는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역에서 전개될 시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이번만은 허무하게 끝내지 않으리라는 불 같은 의지가 샘솟더군요. 저 말고도 다른 두 분(김형탁 부위원장, 김정욱 부장)도 마찬가지였는지, 택시 안에서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와히다드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우리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졌습니다. 시위대가 우리의 시야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감각적으로 `저곳이다`라는 느낌이 온 것입니다. 가투 문화에 단련된 한국 활동가의 동물적 감각이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우리는 그곳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체격이 좋은 김정욱 부장이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제가 중간, 역시 `연로`한 김형탁 부위원장은 마지막을 차지했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오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13,00여명 규모의 거대한 시위대가 와히다드 중심거리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김정욱 부장은 기민하게도 우리가 준비해 간 플래카드, 피켓, 몸 벽보를 팔레스타인 시위대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시위대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습니다. 사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삶은 곧 격렬한 투쟁의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위 참가는 대단히 자발적이지만, 반면 조직적인 준비와 진행은 조금 미약한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피켓, 플래카드 등을 거의 준비하지 않았던 거죠.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대표단이 준비해간 몸 벽보와 피켓은 순식간에 동나고, 플래카드는 우리의 손에서 떠나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 따로 보낸 사진 파일을 보시면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
김형탁 부위원장, 김정욱 부장은 평소에 갈고 닦은 가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시위대와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결합하였습니다.(저는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시위대는 큰 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곤봉을 든 경찰이 지켜서 있었고, 그들은 최루탄을 쏘아댔습니다. 최루탄의 성분은 한국에 비해 농도가 턱없이 약했지만, 오랜만에 맡아 보아서인지 눈물이 나더군요. 살상용 한국 최루탄에 단련된 사람으로서 조금 창피했습니다.(이곳 사람들은 최루가스 대응책으로 치약 대신 양파를 쓰더군요. 한국 이라크평화팀의 한 분은 팔레스타인인이 양파를 줬는데, 용도를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먹어버렸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쫓아오자 우리는 시위대와 함께 도망갔고, 그 과정에서 가투 과정에서 항상 생기는 문제 중 하나가 발생한 것입니다. 일행이 흩어지고 만 것입니다. 가투에 나가기 전에 `흩어지면 호텔로 돌아오고, 경찰에 잡히면 절대 저항하지 말고 곧바로 대사관으로 연락할 것`이란 얘기를 나누고 나갔지만, 막상 세 명이 흩어지니 다른 두 분이 걱정이 되더군요.
다행히 김형탁 부위원장은 핸드폰이 있어서, 연락이 되어 다시 만났지만, 결국 김정욱 부장과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디에 잘 있겠지`라고 자위하면서, 김형탁 부위원장과 저는 한국이라크평화팀과 함께 다시 시위대에 결합했습니다. "No War, Yes Peace"를 외치며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경찰 저지선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경찰도 시위대를 향해 거의 직격탄 수준으로 최루탄을 쏘아댔습니다.
`평화와 폭력`은 분명 모순적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역사와 삶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들이 왜 돌을 집어 던지는가도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결코 준비되지 않은 시위를 했지만, 그 어떤 시위보다 생명력 있고 활력이 있었습니다. 그건 말 그대로 `삶이 곧 투쟁`인 역사를 온 몸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줄 수 있는 느낌일 것입니다.
시위는 약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민주노총 대표단과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철수하고 내일 투쟁을 준비하기로 하고, 각각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우리는 시위 사진을 시내 사진관에서 그림 파일로 전환한 후, 한국 이라크 평화팀이 묵고 있는 아미라 호텔로 이동하였습니다. 오후 5시 민주노총 대표단과 한국 이라크 평화팀 간에 간담회를 갖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간담회에서 민주노총과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각각 암만과 이라크에 온 문제의식을 서로 나누고, 암만에 있는 동안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일단 긴급한 사안으로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전쟁 지지와 파병 방침의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현지 시간으로 3월 22일 오전 10시 한국 대사관 앞에서 하기로 했습니다.(기자회견문은 별도자료로 올립니다-교육선전실)
비슷한 시간(3월 22일 오후 4시)에 한국에서도 반전 집회가 열리겠지요. 함께 연결시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집회에서 외국인 참가자는 한국 활동가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팔레스타인인들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꼬레, 꼬레"를 외치면서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심지어 철수하기 위해 택시 타러 가는 데도 우리를 따라와서 곤혹스럽게 하더군요. 마치 가투하다가 중간에 집에 들어가는 기분을 들게 만들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다. 결국 그들의 해방은 그들의 힘에 의해서
쟁취되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의 몫은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연대의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이러한 `불법 시위`가 자생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요르단 정부도 시위를 철저하게 통제하지만, 현재 미국의 이라크 공습이 전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 자체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전면적인 반란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당분간 이러한 시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나아가 암만에 들어와 있는 국제평화활동가들과의 연대 시위의 조직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3월 22일 새벽 2시, 암만에서
민주노총 전쟁반대 대표단 이창근(민주노총 국제부장)
[요르단 통신 3월 22일] 바리케이트를 넘다
48시간의 집중폭격을 견뎌내고 있는 이라크
군인이 아니라 기자에게도 항복의 깃발을 들고 나오고 있는 이라크
우리는 지금 전쟁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이라크
국경너머에서 그 폭음속에 휩싸여 있을 그들의 삶에 함께 마음 모두려
`시위`라는 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이 혹독한 진압을 한다는
암만 시내에 시위를 하러 나갔습니다 .
시위피켓이며 현수막을 들고 숙소를 나서는데
팔레스타인 출신인 건물 관리인 아저씨가 유심히 바라봅니다.
지금 시위에 가는 길이라고 혹시 들은 바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도 지금 시위에 가는 길이라고
아내와 함꼐 팔레스타인 인들이 만든
반전 시위에 가는 길이라며 자세히 길안내를 해 줍니다.
이미 두세 곳 팔레스타인 인들이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 이미 사람들은 흩어지고 경찰과 페퍼포그 차만이 남아있습니다 .
삼삼오오 모여있는 이들에게 물었더니 경찰이 강경진압을 해 와
불과 십여분 만에 모두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으려 하면 저들이 발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일인시위조차 허용이 안되는
강력히 시위를 통제하는 이곳 암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여명의 팔레스타인 청년과 아이들이
wehdat 캠프에 모여있습니다.
요르단 인구의 70-80%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팔레스타인의 영역인지라 경찰은 큰 길가에만 바리케이트를 친 채
시위대가 해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찰, 아니 무장을 한 군인들이 퍼부어된 최루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걸어나오고 있는 무리를 헤치며 우리는 시위대의 중앙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다해야 너뎃명, 작은 피켓 두서너개를 든 우리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NO WAR, YES PEACE"
"NO WAR"를 외치면 사람들이 합창처럼 "YES PEACE"를 외치기 시작하며
다시 큰 무리의 그룹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뒤로 따라오기 시작한 수백명의 군중들,
잠시 대열을 가다듬기 위해 멈추어 선 우리에게 경찰은 다시 직격탄을 쏩니다.
박기범씨의 북장단, 민주노총 이창근 씨의 대오정비,
우리들의 챈트소리, 그 속으로 터져들어오는 최루탄들
수 차례, 나아감과 물러섬을 반복하며
끝내 우리는 군인들의 저지선에 다다렀습니다.
그때 갑자기 청년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지선을 향해 전진하던 우리는
뒤를 돌아 돌을 던지지 말아달라고
우리는 평화를 위해 평화의 시위를 만들고 싶다고
외치며 그들 손의 돌을 풀어냈습니다.
우리의 북소리가 그 돌들을 대신해 그들 머리 위로 날아가고
어디선가 나타난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까지 우리의 걸음에 함께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에 거의 이르러
저 선을 넘을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는 우리에게
팔레스타인계 요르단 사람들, 몇몇 이라크 청년들은
저 저지선을 넘어 줄 것을
저 군인들의 총과 방패를 뚫고 저 도로를 향해
자신들과 함꼐 나가 줄 것을 요청해옵니다.
그들만의 시위가 아니라는 것,
그들만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외국인들을 향해 그들의 군대가 발포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그것이 담긴 눈빛이
우리 속에 위험에 대한 부담감을 넘어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
몇번이고 흩어진 대오를 정비해
앞으로, 또 골목으로 오가며
우리는 결국 군인들의 바리케이트를
넘어 도로에 이르렀습니다.
차를 막고 도로에 서자
함께 걸어오던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서로 무등을 태우고,
자신들만의 리듬을 지닌 챈트를 외치며
축제를 벌이듯 시위의 난장을 펼칩니다.
그 때 한 청년이 오더니 저희에게 말합니다.
"It`s a victory"
우리의 작은 용기가 그들에게 승리가 되었다 합니다.
최루가스를 무장한 군인들의 바리케이트를 함께 맞선
우리들의 외침이 그들에게 승리를 주었다 합니다.
손에 양파를 든 친구들이 몰려와 서로 건넵니다.
왜 양파를 주는지도 모른채 받아쥐고 시위를 끝내며 돌아오는 길
우리 중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한국에선 최루탄 터지면 치약 바르는데, 여긴 양파를 쓰나봐요"
그들이 나누어준 양파 향이
오래도록 손에서 가시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했던 거리의 시위가
우리 속에도 승리의 깃발이 되어 펄럭이기 시작합니다 .
이곳에 있는 동안
우리의 힘으로 저 엄혹한 진압을 피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함께 함으로 저 총이 발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시위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 전쟁의 포성이 그치기까지....
암만에서의 시위를 마치고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 임영신
[출처; 통일뉴스 2003-03-22 ]
긴박한 현장 소식을 그대로 전제하며 소제목은 편의상 조정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3월 22일 오전 10시]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과 민주노총 파견단 공동기자회견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과 민주노총 파견단은 22일 오전 10시(요르단 시각) 요르단 주재 한국대사관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이들은 공동성명서에서 "지금 바그다드에, 48시간의 공습 속에는 한국 이라크 평화팀 3명이 이라크 민중과 함께 있다. 방독면 하나 없이 이 전쟁을 맞이해야 하는 이라크 사람들과 전쟁을 겪어내기 위해 우리는 바그다드와 암만에 서 있는 것이다"며 "한국군이 이 더러운 침략의 전쟁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향한 미군의 범죄와 더불어 그들과 공범이 될 한국군의 부도덕한 참전을 함께 증언할 것이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전쟁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가 기록할 이 전쟁의 진실을 막지 못할 것이다"고 주장하고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대 이라크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결정을 즉각 철회"할 것과 "노무현 정부는 제 2의 베트남전이 될 미국의 대 이라크전쟁 지지입장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암만에서 보내는 편지 7 -3월 22일 새벽 2시] 21일 두 차례 반전시위에 참여
오늘이 벌써 서울을 떠나온 지 일주일째이군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숙소의 CNN에서는 미국 전투기가 바그다드에 폭격을 가했다는 소식으로 가득합니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바그다드 폭격 소식을 전하는 저들에게 그 폭격에 의해 희생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존재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암만에서는 두 개의 반전시위가 있었습니다. 물론 둘 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시위`였습니다. 사실 요르단에서 시위 허가를 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표단과 같은 외부인이 허가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시위에 참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결국 오늘 두 개의 시위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3월 21일 오전 11시 30분. 우리는 암만 시내 중심가의 알 후세인 모스크(이슬람 교회)에서 기도가 끝난 다음, 시위가 전개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호텔(압자르 호텔)을 나섰습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국(異國)에서 불법 시위를 하는 게 우리들에게 상당한 긴장과 흥분을 가져다 준 모양입니다. 도착하니 벌써 시위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약 400여명 정도입니다. 그들은 이라크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위 대열은 약 15분 정도 견디나 싶더니 곧바로 경찰의 강경 진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시내 중심가여서 그런지 경찰은 시위대에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고, 최루탄을 쏘아서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요르단 경찰의 최루가스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가볍게 코만 간지러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더군요. 준비해간 피켓과 플래카드, 몸 벽보를 써보지도 못하고, 해산당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후 1시 30분경. 와히다드(Wehdat)라는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역에서 전개될 시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이번만은 허무하게 끝내지 않으리라는 불 같은 의지가 샘솟더군요. 저 말고도 다른 두 분(김형탁 부위원장, 김정욱 부장)도 마찬가지였는지, 택시 안에서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와히다드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우리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졌습니다. 시위대가 우리의 시야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감각적으로 `저곳이다`라는 느낌이 온 것입니다. 가투 문화에 단련된 한국 활동가의 동물적 감각이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우리는 그곳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체격이 좋은 김정욱 부장이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제가 중간, 역시 `연로`한 김형탁 부위원장은 마지막을 차지했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오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13,00여명 규모의 거대한 시위대가 와히다드 중심거리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김정욱 부장은 기민하게도 우리가 준비해 간 플래카드, 피켓, 몸 벽보를 팔레스타인 시위대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시위대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습니다. 사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삶은 곧 격렬한 투쟁의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위 참가는 대단히 자발적이지만, 반면 조직적인 준비와 진행은 조금 미약한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피켓, 플래카드 등을 거의 준비하지 않았던 거죠.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대표단이 준비해간 몸 벽보와 피켓은 순식간에 동나고, 플래카드는 우리의 손에서 떠나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 따로 보낸 사진 파일을 보시면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
김형탁 부위원장, 김정욱 부장은 평소에 갈고 닦은 가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시위대와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결합하였습니다.(저는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시위대는 큰 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곤봉을 든 경찰이 지켜서 있었고, 그들은 최루탄을 쏘아댔습니다. 최루탄의 성분은 한국에 비해 농도가 턱없이 약했지만, 오랜만에 맡아 보아서인지 눈물이 나더군요. 살상용 한국 최루탄에 단련된 사람으로서 조금 창피했습니다.(이곳 사람들은 최루가스 대응책으로 치약 대신 양파를 쓰더군요. 한국 이라크평화팀의 한 분은 팔레스타인인이 양파를 줬는데, 용도를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먹어버렸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쫓아오자 우리는 시위대와 함께 도망갔고, 그 과정에서 가투 과정에서 항상 생기는 문제 중 하나가 발생한 것입니다. 일행이 흩어지고 만 것입니다. 가투에 나가기 전에 `흩어지면 호텔로 돌아오고, 경찰에 잡히면 절대 저항하지 말고 곧바로 대사관으로 연락할 것`이란 얘기를 나누고 나갔지만, 막상 세 명이 흩어지니 다른 두 분이 걱정이 되더군요.
다행히 김형탁 부위원장은 핸드폰이 있어서, 연락이 되어 다시 만났지만, 결국 김정욱 부장과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디에 잘 있겠지`라고 자위하면서, 김형탁 부위원장과 저는 한국이라크평화팀과 함께 다시 시위대에 결합했습니다. "No War, Yes Peace"를 외치며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경찰 저지선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경찰도 시위대를 향해 거의 직격탄 수준으로 최루탄을 쏘아댔습니다.
`평화와 폭력`은 분명 모순적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역사와 삶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들이 왜 돌을 집어 던지는가도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결코 준비되지 않은 시위를 했지만, 그 어떤 시위보다 생명력 있고 활력이 있었습니다. 그건 말 그대로 `삶이 곧 투쟁`인 역사를 온 몸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줄 수 있는 느낌일 것입니다.
시위는 약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민주노총 대표단과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철수하고 내일 투쟁을 준비하기로 하고, 각각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우리는 시위 사진을 시내 사진관에서 그림 파일로 전환한 후, 한국 이라크 평화팀이 묵고 있는 아미라 호텔로 이동하였습니다. 오후 5시 민주노총 대표단과 한국 이라크 평화팀 간에 간담회를 갖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간담회에서 민주노총과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각각 암만과 이라크에 온 문제의식을 서로 나누고, 암만에 있는 동안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일단 긴급한 사안으로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전쟁 지지와 파병 방침의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현지 시간으로 3월 22일 오전 10시 한국 대사관 앞에서 하기로 했습니다.(기자회견문은 별도자료로 올립니다-교육선전실)
비슷한 시간(3월 22일 오후 4시)에 한국에서도 반전 집회가 열리겠지요. 함께 연결시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집회에서 외국인 참가자는 한국 활동가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팔레스타인인들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꼬레, 꼬레"를 외치면서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심지어 철수하기 위해 택시 타러 가는 데도 우리를 따라와서 곤혹스럽게 하더군요. 마치 가투하다가 중간에 집에 들어가는 기분을 들게 만들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다. 결국 그들의 해방은 그들의 힘에 의해서
쟁취되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의 몫은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연대의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이러한 `불법 시위`가 자생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요르단 정부도 시위를 철저하게 통제하지만, 현재 미국의 이라크 공습이 전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 자체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전면적인 반란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당분간 이러한 시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나아가 암만에 들어와 있는 국제평화활동가들과의 연대 시위의 조직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3월 22일 새벽 2시, 암만에서
민주노총 전쟁반대 대표단 이창근(민주노총 국제부장)
[요르단 통신 3월 22일] 바리케이트를 넘다
48시간의 집중폭격을 견뎌내고 있는 이라크
군인이 아니라 기자에게도 항복의 깃발을 들고 나오고 있는 이라크
우리는 지금 전쟁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이라크
국경너머에서 그 폭음속에 휩싸여 있을 그들의 삶에 함께 마음 모두려
`시위`라는 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이 혹독한 진압을 한다는
암만 시내에 시위를 하러 나갔습니다 .
시위피켓이며 현수막을 들고 숙소를 나서는데
팔레스타인 출신인 건물 관리인 아저씨가 유심히 바라봅니다.
지금 시위에 가는 길이라고 혹시 들은 바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도 지금 시위에 가는 길이라고
아내와 함꼐 팔레스타인 인들이 만든
반전 시위에 가는 길이라며 자세히 길안내를 해 줍니다.
이미 두세 곳 팔레스타인 인들이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 이미 사람들은 흩어지고 경찰과 페퍼포그 차만이 남아있습니다 .
삼삼오오 모여있는 이들에게 물었더니 경찰이 강경진압을 해 와
불과 십여분 만에 모두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으려 하면 저들이 발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일인시위조차 허용이 안되는
강력히 시위를 통제하는 이곳 암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여명의 팔레스타인 청년과 아이들이
wehdat 캠프에 모여있습니다.
요르단 인구의 70-80%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팔레스타인의 영역인지라 경찰은 큰 길가에만 바리케이트를 친 채
시위대가 해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찰, 아니 무장을 한 군인들이 퍼부어된 최루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걸어나오고 있는 무리를 헤치며 우리는 시위대의 중앙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다해야 너뎃명, 작은 피켓 두서너개를 든 우리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NO WAR, YES PEACE"
"NO WAR"를 외치면 사람들이 합창처럼 "YES PEACE"를 외치기 시작하며
다시 큰 무리의 그룹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뒤로 따라오기 시작한 수백명의 군중들,
잠시 대열을 가다듬기 위해 멈추어 선 우리에게 경찰은 다시 직격탄을 쏩니다.
박기범씨의 북장단, 민주노총 이창근 씨의 대오정비,
우리들의 챈트소리, 그 속으로 터져들어오는 최루탄들
수 차례, 나아감과 물러섬을 반복하며
끝내 우리는 군인들의 저지선에 다다렀습니다.
그때 갑자기 청년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지선을 향해 전진하던 우리는
뒤를 돌아 돌을 던지지 말아달라고
우리는 평화를 위해 평화의 시위를 만들고 싶다고
외치며 그들 손의 돌을 풀어냈습니다.
우리의 북소리가 그 돌들을 대신해 그들 머리 위로 날아가고
어디선가 나타난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까지 우리의 걸음에 함께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에 거의 이르러
저 선을 넘을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는 우리에게
팔레스타인계 요르단 사람들, 몇몇 이라크 청년들은
저 저지선을 넘어 줄 것을
저 군인들의 총과 방패를 뚫고 저 도로를 향해
자신들과 함꼐 나가 줄 것을 요청해옵니다.
그들만의 시위가 아니라는 것,
그들만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외국인들을 향해 그들의 군대가 발포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그것이 담긴 눈빛이
우리 속에 위험에 대한 부담감을 넘어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
몇번이고 흩어진 대오를 정비해
앞으로, 또 골목으로 오가며
우리는 결국 군인들의 바리케이트를
넘어 도로에 이르렀습니다.
차를 막고 도로에 서자
함께 걸어오던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서로 무등을 태우고,
자신들만의 리듬을 지닌 챈트를 외치며
축제를 벌이듯 시위의 난장을 펼칩니다.
그 때 한 청년이 오더니 저희에게 말합니다.
"It`s a victory"
우리의 작은 용기가 그들에게 승리가 되었다 합니다.
최루가스를 무장한 군인들의 바리케이트를 함께 맞선
우리들의 외침이 그들에게 승리를 주었다 합니다.
손에 양파를 든 친구들이 몰려와 서로 건넵니다.
왜 양파를 주는지도 모른채 받아쥐고 시위를 끝내며 돌아오는 길
우리 중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한국에선 최루탄 터지면 치약 바르는데, 여긴 양파를 쓰나봐요"
그들이 나누어준 양파 향이
오래도록 손에서 가시지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했던 거리의 시위가
우리 속에도 승리의 깃발이 되어 펄럭이기 시작합니다 .
이곳에 있는 동안
우리의 힘으로 저 엄혹한 진압을 피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함께 함으로 저 총이 발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시위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 전쟁의 포성이 그치기까지....
암만에서의 시위를 마치고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 임영신
[출처; 통일뉴스 2003-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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