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red><양심수 순례단>28일째 광주</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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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4-25 00:00 조회1,50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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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전라남도 장성군 덕진리 마을회관입니다.
오늘이 "고난의 행진" 며칠 째인지도 이제는 한참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참 후에야 오늘이 28일째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흘러온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집니다. 서울구치소 앞에서의 발대식이 마치 몇 년 전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단장님은 "절대적 물리적 시간"이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철학적인 이야기라서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하루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싶다." 라는 뜻으로 멋대로 이해했습니다.
100날을 살아봐야 그날이 그날인 것과, 단 하루를 살아도 100날의 값어치를 하는 것과의 차이인 것이죠. 실지로 단장님같은 경우는 "고난의 행진" 단 하루동안 발생하는 일들이 2년 6개월의 수감생활동안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비중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군요. 한 개인에게도 정말 며칠이나 몇달의 시간과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하룻 동안의 순례인것 같습니다.
그날이 그날 같고, 몇 날을 살아도 정체와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은 이곳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 자리를 맴도는 분들, 몸이 바쁘다고 사업이 진척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오늘은 순례가 아니라 관광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정읍에서 광주로 가기 위해서는 내장산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내장산의 경관이 별천지였습니다. 산 초입에 큰 호수가 순례단을 반겨준 이후로 계속 아름다운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사진]△ 광주교도소 앞 집회에 참석한 정재욱 한총련 의장 ⓒ순례단
산을 넘어가다가 길에서 뱀을 발견했습니다. 제법 굵고 긴 뱀이었습니다.
갑자기 단장님이 "어!"하는 비명과 함께 거의 1미터를 뛰어오르며 "뱀이다"하고 소리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순례단원들은 모두 뱀에 놀란 것이 아니라 단장님의 놀란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단장님의 뒤에서 걷고있던 여학생이 10여분간 빈정거린 대로 참으로 의외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단장님 하면 그 험악한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강인한 표정 하나로 순례단원들을 호령하여 왔는데(뭘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한 카리스마라고도 합니다) 한순간에 그 공허한 카리스마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여학생 왈 "단장님 참 의외네요, 생긴 것과 다르게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요? 어쩌고저쩌고 쫑알쫑알..." 단장님은 유구무언, 할 말이 없었나 봅니다. 쪽팔림을 만회하려는 듯 단장님이 깃대로 뱀을 눌렀습니다. 정은님이 나무가지로 뱀의 목을 누르려고 했는데 나무가 "뚝"하고 부러졌습니다. 이때 명원님이 들고 있는 깃대로 뱀을 찍어버리려고 했는데 단장님이 "안돼!"하면서 말렸습니다. 뱀을 발견한 사람도 단장님이었고, 깃대로 고정시킨것도 단장님이었는데 갑자기 죽이지 말라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뱀을 길옆으로 치웠습니다. 모두들 단장님의 행동에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내장산은 그동안 순례단이 걸었던 고개중에 가장 높고 긴 고개였습니다. 정상에 도착하니 해발 350m라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가는 길은 도로였지만, 산을 하나 넘는 기분이었습니다. 정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을 때, 노점상을 하시는 어떤 아저씨가 순례단에게 수고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약수물을 먹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어제 100분 토론회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정태님이 순례단에 기여하는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제는 "쌍용사"에서 순례단의 점심을 해결해 주더니 오늘도 "대흥사"에서 점심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절에서 하는 음식이라서 고기나 생선따위는 없었지만, 고추장의 맛이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이러다가는 "교도소 순례단"이 아니라 "사찰 순례단"이 될 것 같습니다.
점심을 먹고 장성군으로 향하던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흰색 카니발이 순례단 곁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습니다. 잠시 후 똑같은 차로 보이는 차가 맞은 편에서 달려오더니, 중앙선을 넘어 순례단 곁에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안에는 어린아이들과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사진]△ 하영옥씨의 아내 김소중씨가 활짝 웃고 있다 ⓒ순례단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라면이라도 사 드십시오."
아마 지나가다가 순례단을 보고 뭐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다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보통 단장님이 나서서 후원자들을 상대하는데 오늘은 단장님이 쳐다도 안보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뒤에 남아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감사의 표시를 하고 그 차와 헤어졌습니다.
나중에 단장님에게 왜 그랬는지를 물으니까, "어떻게 라면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나? 막걸리 사먹으라고 하면 모를까...."라고 하는 겁니다. 단장님은 라면을 싫어하나 봅니다.
서울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지만, 여기는 오후가 되서야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비옷을 입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모두 속옷까지 다 젖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도중에 버스 정거장에서 휴식시간을 가졌습니다.
내리는 비를 처량하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번개가 번쩍하는 것이었습니다. 번개와 천둥이 거의 동시에 있었으니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천둥번개가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러다가 깃발들고 있는 사람 벼락 맞는거 아니야?"
"그런게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닌가요? 아마 그렇게 되면 언론사에서도 관심을 갖겠네요."
애당초 "고난의 행진"이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보니 행진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언론이 이목을 모을것인지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고 다닙니다.
"그러면 기사가 어떤식으로 나오게 되는 거지? "교도소 순례단 벼락맞아 일부 중태.........."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벼락맞는 건 별로 안좋겠네요......."
그때부터 깃발을 들고 있던 순례단원들은 모두 깃대 중간을 잡고 행진을 했습니다.
오늘은 용인대학교 부총학생회장님과 무용과 새내기가 순례에 동참했습니다. 오후에는 정은님의 친구가 지지방문을 오셨습니다. 집에서 아버지가 부업으로 양봉하는 꿀을 몰래 훔쳐서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비 맞고 추위에 떨어서 저녁 먹을 때 어한주로 소주를 한잔씩 했는데, 음주 후 꿀차까지 마시더니 모두들 더바랄 것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행복은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 것을 누리려 하지 않을 뿐....
행진거리 : 37Km(누계 : 722Km) - 고난의 행진 29일째
여기는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에 있는 한마음 자연학습 실습장입니다.
광주 양심수 후원회의 소개를 통해서 이곳에 여장을 풀게 되었습니다.
광주교도소는 18Km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광주교도소는 단장님에게 뜻깊은 곳입니다. 단장님이 수감되었던 교도소가 광주교도소이기 때문입니다. 교도관들 내에서는 아주 골치아픈 인사로 정평이 나있다고 합니다. 단장님이 청구한 정보공개와 행정소송만 수십 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공교롭게 순례단이 광주교도소로 가는 날이 일요일입니다. 광주 교도관들은 휴일을 반납하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광주 교도관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도 그러더니 밖으로 나와서도 우리를 고생시키는 구만."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맑게 게었습니다. 산 허리에는 솜사탕같은 구름이 걸쳐져 있었고, 하늘은 세수를 한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습니다.
요즘, 순례단원들 사이에 대화가 많아졌습니다. 반미청년회가 다녀간 이후부터인것 같습니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하루에 주고받는 대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쉽시다", "밥먹자", "차에서 반찬꺼내와라"
먹고, 쉬고, 자는데 필요한 대화 이외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단장님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와 흡사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종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있습니다.
"외계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동성애를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는가?",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성공할 수 있는가?",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떤 것인가?, "환경과의 공존없이 인류의 미래가 보장받을 수 있는가?"
현대문명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건강, 부부생활에 대한 이야기까지 소재를 넘나듭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보통 아주 사소한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옵니다. 농담처럼 주고받는 이야기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정신과 사고가 아주 넓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도 아침을 먹다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방면으로 가장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명원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명원님은 스스로는 "의리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군대를 안갔다고 이야기 하지만, 단장님으로부터는 "넌 비양심적인 병역거부자야"라는 지적을 받고 있었습니다.
"단장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대중운동을 발전시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까?"
"폭력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시도를 남이든 북이든 모두 포기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런 상황에서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이유로 병역거부 운동을 한다는 것은 좀 명분이 약하거릉"(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단장님은 가끔 문장의 마무리를 "--했거릉"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실망한 명원님이 "...에이...그냥 군대 가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성일님이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명원씨는 특기를 살려서 군대가면 좋을 것 같은데요."
"무슨 특기요?"
"보병으로 가요. 명원씨 걷는게 특기잖아요. 군대가면 사회에서 뭘 했는지, 특기가 뭔지 물어보거든요? 그때 걷는게 특기라고 이야기해요."
명원님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오늘은 아주 조금만 걸었습니다. 어제와 그제 지름길을 걸어서 갈 길을 많이 줄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덕진리 마을 회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부터 그동안 밀린 짐정리를 하느라 9시가 넘어서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걷기에 들어가기 전에 단장님께서 오늘의 숙제를 주셨습니다. 모든 순례단원이 순례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이를 선정하여 그 이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순례단 홈페이지에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순례단원들은 모두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순례단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말하기나 글쓰는데 자질이 없고, 주로는 몸으로 때우는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성역에 도착해서 모두들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모두들 머리를 쥐어뜯고 괴로워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정말 내세울 것이라고는 몸뚱아리밖에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래도 없는 재주에 꾸역꾸역 한 자 한 자 채워넣습니다.
주말이 되니까 많은 손님들이 숙소로 찾아왔습니다. 광주 양심수 후원회원들이 10명 가량 방문해 주셨고, 한총련 학자추장님과 조통위원장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공주에서 순례단과 함께 했던 조희님도 오셨습니다. 그래도 가장 반가운 손님은 김소중님이었습니다. 김소중님은 박용주님의 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7시간동안 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오는 길에 박용주님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운전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7시간동안 쉬지않고 자기자랑을 하는데 아주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김소중님은 처음에는 순례단의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셨습니다. 모두들 말이 없이 멀뚱멀뚱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분위기가 왜이렇게 칙칙하냐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게 원래 순례단의 분위기였습니다.
"내가 와서 분위기를 바꾸놔야 하는데........"
어쨌든 김소중님은 변함없이 밝고 쾌활한 모습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정태님이 한마디 끼어들었습니다.
"소중씨가 걸렸던 암이 혹시 "공주암" 아닌가? 우리 "공주"교대에서 오신 조희양에게 치료를 부탁해야겠는데?"
벗들이 있어 즐겁고, 뜻이 있어 가슴 충만한 밤이었습니다.
여기는 광주교도소앞입니다.
하룻동안 순례단과 함께했던 많은 참가자들은 지금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6명입니다. 밖에는 출소자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교도소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고, 교도소 옆에 있는 버스종점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천막 안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정은님과 단장님은 일찍 잠을 청했고, 성일님과 희인님은 오늘 찍은 사진을 올리기 위해서 인근에 있는 PC방에 갔습니다. 참 고요하고 고즈넉한 밤입니다...(이게 한 1시간 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민주노동당 경기도지부 간부님들이 오면서 조용한 분위기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분들은 도착하자마자 천막의 2/3가량 되는 공간을 차지하며 술판을 벌렸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예감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빨리 이 글을 올리고, 자리를 옮겨서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은 기세등등하게 시작했습니다. 어제와 오늘 아침 사이에 경향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숙소로 결합했습니다. 출정식을 할 때 얼추 인원을 세어보니 30명 가량 되었습니다. 한번 참가자들을 기억이 나는 데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광주 양심수 후원회, 한총련 상무집행위, 아줌마트리오(엄경희님, 황정주님, 최진미님), "고난의 행진" 상황실 및 실무지원단, 한양대 안산배움터 핵심간부(이렇게 불러주면 다음에 또 올 것 같아서...), 조희님 일행, 경기도지역 청년단체 회원들.........
광주까지 가야할 거리는 18Km입니다. 하루코스로는 별로 먼 거리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아지면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했습니다. 순례단은 평소의 속도로 걸었는데도 참가했던 사람들은 따라오기 힘들어했습니다. 특히 아줌마들이 힘들어했고, 이분들은 뒤에서 뛰다시피 하면서 따라왔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면 재미있는 간판을 많이 보게 됩니다. 며칠전 전주에 들어갈때는 "거시기 회관"이라는 고기집이 있어서 순례단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순례단은 이런 간판을 보면 눈길한번 주고 그냥 아무소리 없이 지나쳐 갑니다. 별로 새롭지도 않고, 걷느라 바빠서 그렇습니다.
오늘도 재미난 간판을 봤습니다. "유흥주점「소판돈」"이라는 간판이었습니다. 순례단중 평소와 마찬가지고 "저런 간판도 있나보다"하고 지나치려 했는데 맨 뒤에서 걷고 있는 "아줌마트리오"가 "저것좀 보라고" 하면서 깔깔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누군가가 자기는 구리시를 지나갈 때 "꽈베기 여관"을 봤다고 하면서 허리를 꺽으며 웃었습니다. "꽈베기 여관" 건물 꼭데기에는 실지로 꽈베기가 똘똘 말려서 있는 구조물이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용배님이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어릴적 놀던 나이트클럽 이름이 "몸부림"이었다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기전 시간이 남아서 오락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단장님이 한총련 학생들을 지목하며 좌중을 재미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학자추위원장님과 조통위원장님, 그리고 몇몇 관료(그렇게 소개를 하더군요)들이 나와서 어정쩡하게 좌중앞에 섰습니다.
앞으로 나온 학생들은 뭔가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영 재미가 없었습니다. 다들 예의상 박수를 쳐주며 끝까지 지켜봤는데 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단장님이 "밥먹으러 갑시다!"해서 괴로웠던 순간이 끝났습니다.
점심을 먹을때였습니다. 아줌마 트리오가 나란히 탁자에 앉았습니다. 이를 본 단장님이 앞에 있는 용진님에게 물었습니다. "야! 이 아줌마들은 왜 이렇게 붙어다니냐?" 이말을 들은 용진님이 대답했습니다. "아....그건요....혼자 다니면 왕따를 당하거든요...그래서 같이 다녀요." 단장님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해하는 눈치였습니다.
관료집단-특히 교도관-들의 더러운 근성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한가지가 사람의 "간"을 보는 것입니다. 간을 보는 것은 음식에나 해당되는 것인데 교도관들은 사람의 간도 봅니다.
당연히 응해주어야 하는 요구사항에도 일부러 "곤란하다",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억지부리지 마라"하면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한번 떠보는 것입니다. 오늘 광주교도소에서도 그랬습니다. 당연히 해줘야 하는 접견에 숫자 제한을 두고, 몇 명은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불법입니다.
단장님은 광주교도소 소장과 보안과장, 공안담당 교도관은 인간 말종들로 양아치만도 못한 놈들이라며 그들이 저지른 온갖 더러운 비행을 폭로 하셨습니다. 이런 쓰레기같은 자들이 교정직에있는한 교도소는 계속 범죄를 가르키는 학교로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사회변혁운동은 어쩌면 이런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한번 뚜껑이 열리니까 참가자들은 모두 숨겨진 자신의 기질을 드러냈습니다. 조희님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돌맹이를 가지고 오라 했는데 바위를 두 손에 들고 교도소앞 철문을 두드렸습니다. 단장님은 깃발을 뜯어 깃대를 한 손에 쥐고, 철문건너편 교도관들을 노려봤습니다. 이러다가 양심수 한 명 더 생길 것을 걱정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단장님의 손에 있는 깃대를 살며시 빼앗았습니다.
결국 교도측에선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정말 관료집단은 좋은 말로해서는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반가운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광주교도소 집회에는 한총련 의장님이 참가했습니다.
아마 몇 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집회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문화행사에는 특별히 노래패 "꽃다지"가 참가하여 집회참가자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이외에도 광주지역 민가협 어머님이 통닭과 생맥주를 사오셨고 기세문 선생님이 김소중님의 치료를 상담하러 천막까지 찾아주셨습니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장윤영 기자
[출처: 민중의 소리 2003년04월21일]
오늘이 "고난의 행진" 며칠 째인지도 이제는 한참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참 후에야 오늘이 28일째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흘러온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집니다. 서울구치소 앞에서의 발대식이 마치 몇 년 전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100날을 살아봐야 그날이 그날인 것과, 단 하루를 살아도 100날의 값어치를 하는 것과의 차이인 것이죠. 실지로 단장님같은 경우는 "고난의 행진" 단 하루동안 발생하는 일들이 2년 6개월의 수감생활동안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비중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군요. 한 개인에게도 정말 며칠이나 몇달의 시간과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하룻 동안의 순례인것 같습니다.
그날이 그날 같고, 몇 날을 살아도 정체와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은 이곳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 자리를 맴도는 분들, 몸이 바쁘다고 사업이 진척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오늘은 순례가 아니라 관광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정읍에서 광주로 가기 위해서는 내장산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내장산의 경관이 별천지였습니다. 산 초입에 큰 호수가 순례단을 반겨준 이후로 계속 아름다운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산을 넘어가다가 길에서 뱀을 발견했습니다. 제법 굵고 긴 뱀이었습니다.
갑자기 단장님이 "어!"하는 비명과 함께 거의 1미터를 뛰어오르며 "뱀이다"하고 소리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순례단원들은 모두 뱀에 놀란 것이 아니라 단장님의 놀란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단장님의 뒤에서 걷고있던 여학생이 10여분간 빈정거린 대로 참으로 의외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단장님 하면 그 험악한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강인한 표정 하나로 순례단원들을 호령하여 왔는데(뭘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한 카리스마라고도 합니다) 한순간에 그 공허한 카리스마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여학생 왈 "단장님 참 의외네요, 생긴 것과 다르게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요? 어쩌고저쩌고 쫑알쫑알..." 단장님은 유구무언, 할 말이 없었나 봅니다. 쪽팔림을 만회하려는 듯 단장님이 깃대로 뱀을 눌렀습니다. 정은님이 나무가지로 뱀의 목을 누르려고 했는데 나무가 "뚝"하고 부러졌습니다. 이때 명원님이 들고 있는 깃대로 뱀을 찍어버리려고 했는데 단장님이 "안돼!"하면서 말렸습니다. 뱀을 발견한 사람도 단장님이었고, 깃대로 고정시킨것도 단장님이었는데 갑자기 죽이지 말라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뱀을 길옆으로 치웠습니다. 모두들 단장님의 행동에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내장산은 그동안 순례단이 걸었던 고개중에 가장 높고 긴 고개였습니다. 정상에 도착하니 해발 350m라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가는 길은 도로였지만, 산을 하나 넘는 기분이었습니다. 정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을 때, 노점상을 하시는 어떤 아저씨가 순례단에게 수고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약수물을 먹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어제 100분 토론회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정태님이 순례단에 기여하는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제는 "쌍용사"에서 순례단의 점심을 해결해 주더니 오늘도 "대흥사"에서 점심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절에서 하는 음식이라서 고기나 생선따위는 없었지만, 고추장의 맛이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이러다가는 "교도소 순례단"이 아니라 "사찰 순례단"이 될 것 같습니다.
점심을 먹고 장성군으로 향하던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흰색 카니발이 순례단 곁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습니다. 잠시 후 똑같은 차로 보이는 차가 맞은 편에서 달려오더니, 중앙선을 넘어 순례단 곁에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안에는 어린아이들과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라면이라도 사 드십시오."
아마 지나가다가 순례단을 보고 뭐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다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보통 단장님이 나서서 후원자들을 상대하는데 오늘은 단장님이 쳐다도 안보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뒤에 남아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감사의 표시를 하고 그 차와 헤어졌습니다.
나중에 단장님에게 왜 그랬는지를 물으니까, "어떻게 라면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나? 막걸리 사먹으라고 하면 모를까...."라고 하는 겁니다. 단장님은 라면을 싫어하나 봅니다.
서울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지만, 여기는 오후가 되서야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비옷을 입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모두 속옷까지 다 젖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도중에 버스 정거장에서 휴식시간을 가졌습니다.
내리는 비를 처량하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번개가 번쩍하는 것이었습니다. 번개와 천둥이 거의 동시에 있었으니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천둥번개가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러다가 깃발들고 있는 사람 벼락 맞는거 아니야?"
"그런게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닌가요? 아마 그렇게 되면 언론사에서도 관심을 갖겠네요."
애당초 "고난의 행진"이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보니 행진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언론이 이목을 모을것인지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고 다닙니다.
"그러면 기사가 어떤식으로 나오게 되는 거지? "교도소 순례단 벼락맞아 일부 중태.........."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벼락맞는 건 별로 안좋겠네요......."
그때부터 깃발을 들고 있던 순례단원들은 모두 깃대 중간을 잡고 행진을 했습니다.
오늘은 용인대학교 부총학생회장님과 무용과 새내기가 순례에 동참했습니다. 오후에는 정은님의 친구가 지지방문을 오셨습니다. 집에서 아버지가 부업으로 양봉하는 꿀을 몰래 훔쳐서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비 맞고 추위에 떨어서 저녁 먹을 때 어한주로 소주를 한잔씩 했는데, 음주 후 꿀차까지 마시더니 모두들 더바랄 것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행복은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 것을 누리려 하지 않을 뿐....
행진거리 : 37Km(누계 : 722Km) - 고난의 행진 29일째
여기는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에 있는 한마음 자연학습 실습장입니다.
광주 양심수 후원회의 소개를 통해서 이곳에 여장을 풀게 되었습니다.
광주교도소는 18Km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광주교도소는 단장님에게 뜻깊은 곳입니다. 단장님이 수감되었던 교도소가 광주교도소이기 때문입니다. 교도관들 내에서는 아주 골치아픈 인사로 정평이 나있다고 합니다. 단장님이 청구한 정보공개와 행정소송만 수십 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공교롭게 순례단이 광주교도소로 가는 날이 일요일입니다. 광주 교도관들은 휴일을 반납하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광주 교도관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도 그러더니 밖으로 나와서도 우리를 고생시키는 구만."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맑게 게었습니다. 산 허리에는 솜사탕같은 구름이 걸쳐져 있었고, 하늘은 세수를 한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습니다.
요즘, 순례단원들 사이에 대화가 많아졌습니다. 반미청년회가 다녀간 이후부터인것 같습니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하루에 주고받는 대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쉽시다", "밥먹자", "차에서 반찬꺼내와라"
먹고, 쉬고, 자는데 필요한 대화 이외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단장님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와 흡사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종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있습니다.
"외계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동성애를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는가?",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성공할 수 있는가?",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떤 것인가?, "환경과의 공존없이 인류의 미래가 보장받을 수 있는가?"
현대문명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건강, 부부생활에 대한 이야기까지 소재를 넘나듭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보통 아주 사소한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옵니다. 농담처럼 주고받는 이야기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정신과 사고가 아주 넓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도 아침을 먹다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방면으로 가장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명원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명원님은 스스로는 "의리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군대를 안갔다고 이야기 하지만, 단장님으로부터는 "넌 비양심적인 병역거부자야"라는 지적을 받고 있었습니다.
"단장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대중운동을 발전시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까?"
"폭력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시도를 남이든 북이든 모두 포기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런 상황에서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이유로 병역거부 운동을 한다는 것은 좀 명분이 약하거릉"(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단장님은 가끔 문장의 마무리를 "--했거릉"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실망한 명원님이 "...에이...그냥 군대 가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성일님이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명원씨는 특기를 살려서 군대가면 좋을 것 같은데요."
"무슨 특기요?"
"보병으로 가요. 명원씨 걷는게 특기잖아요. 군대가면 사회에서 뭘 했는지, 특기가 뭔지 물어보거든요? 그때 걷는게 특기라고 이야기해요."
명원님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오늘은 아주 조금만 걸었습니다. 어제와 그제 지름길을 걸어서 갈 길을 많이 줄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덕진리 마을 회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부터 그동안 밀린 짐정리를 하느라 9시가 넘어서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걷기에 들어가기 전에 단장님께서 오늘의 숙제를 주셨습니다. 모든 순례단원이 순례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이를 선정하여 그 이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순례단 홈페이지에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순례단원들은 모두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순례단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말하기나 글쓰는데 자질이 없고, 주로는 몸으로 때우는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성역에 도착해서 모두들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모두들 머리를 쥐어뜯고 괴로워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정말 내세울 것이라고는 몸뚱아리밖에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래도 없는 재주에 꾸역꾸역 한 자 한 자 채워넣습니다.
주말이 되니까 많은 손님들이 숙소로 찾아왔습니다. 광주 양심수 후원회원들이 10명 가량 방문해 주셨고, 한총련 학자추장님과 조통위원장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공주에서 순례단과 함께 했던 조희님도 오셨습니다. 그래도 가장 반가운 손님은 김소중님이었습니다. 김소중님은 박용주님의 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7시간동안 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오는 길에 박용주님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운전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7시간동안 쉬지않고 자기자랑을 하는데 아주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김소중님은 처음에는 순례단의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셨습니다. 모두들 말이 없이 멀뚱멀뚱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분위기가 왜이렇게 칙칙하냐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게 원래 순례단의 분위기였습니다.
"내가 와서 분위기를 바꾸놔야 하는데........"
어쨌든 김소중님은 변함없이 밝고 쾌활한 모습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정태님이 한마디 끼어들었습니다.
"소중씨가 걸렸던 암이 혹시 "공주암" 아닌가? 우리 "공주"교대에서 오신 조희양에게 치료를 부탁해야겠는데?"
벗들이 있어 즐겁고, 뜻이 있어 가슴 충만한 밤이었습니다.
여기는 광주교도소앞입니다.
하룻동안 순례단과 함께했던 많은 참가자들은 지금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6명입니다. 밖에는 출소자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교도소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고, 교도소 옆에 있는 버스종점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천막 안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정은님과 단장님은 일찍 잠을 청했고, 성일님과 희인님은 오늘 찍은 사진을 올리기 위해서 인근에 있는 PC방에 갔습니다. 참 고요하고 고즈넉한 밤입니다...(이게 한 1시간 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민주노동당 경기도지부 간부님들이 오면서 조용한 분위기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분들은 도착하자마자 천막의 2/3가량 되는 공간을 차지하며 술판을 벌렸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예감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빨리 이 글을 올리고, 자리를 옮겨서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은 기세등등하게 시작했습니다. 어제와 오늘 아침 사이에 경향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숙소로 결합했습니다. 출정식을 할 때 얼추 인원을 세어보니 30명 가량 되었습니다. 한번 참가자들을 기억이 나는 데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광주 양심수 후원회, 한총련 상무집행위, 아줌마트리오(엄경희님, 황정주님, 최진미님), "고난의 행진" 상황실 및 실무지원단, 한양대 안산배움터 핵심간부(이렇게 불러주면 다음에 또 올 것 같아서...), 조희님 일행, 경기도지역 청년단체 회원들.........
광주까지 가야할 거리는 18Km입니다. 하루코스로는 별로 먼 거리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아지면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했습니다. 순례단은 평소의 속도로 걸었는데도 참가했던 사람들은 따라오기 힘들어했습니다. 특히 아줌마들이 힘들어했고, 이분들은 뒤에서 뛰다시피 하면서 따라왔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면 재미있는 간판을 많이 보게 됩니다. 며칠전 전주에 들어갈때는 "거시기 회관"이라는 고기집이 있어서 순례단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순례단은 이런 간판을 보면 눈길한번 주고 그냥 아무소리 없이 지나쳐 갑니다. 별로 새롭지도 않고, 걷느라 바빠서 그렇습니다.
오늘도 재미난 간판을 봤습니다. "유흥주점「소판돈」"이라는 간판이었습니다. 순례단중 평소와 마찬가지고 "저런 간판도 있나보다"하고 지나치려 했는데 맨 뒤에서 걷고 있는 "아줌마트리오"가 "저것좀 보라고" 하면서 깔깔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누군가가 자기는 구리시를 지나갈 때 "꽈베기 여관"을 봤다고 하면서 허리를 꺽으며 웃었습니다. "꽈베기 여관" 건물 꼭데기에는 실지로 꽈베기가 똘똘 말려서 있는 구조물이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용배님이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어릴적 놀던 나이트클럽 이름이 "몸부림"이었다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기전 시간이 남아서 오락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단장님이 한총련 학생들을 지목하며 좌중을 재미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학자추위원장님과 조통위원장님, 그리고 몇몇 관료(그렇게 소개를 하더군요)들이 나와서 어정쩡하게 좌중앞에 섰습니다.
앞으로 나온 학생들은 뭔가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영 재미가 없었습니다. 다들 예의상 박수를 쳐주며 끝까지 지켜봤는데 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단장님이 "밥먹으러 갑시다!"해서 괴로웠던 순간이 끝났습니다.
점심을 먹을때였습니다. 아줌마 트리오가 나란히 탁자에 앉았습니다. 이를 본 단장님이 앞에 있는 용진님에게 물었습니다. "야! 이 아줌마들은 왜 이렇게 붙어다니냐?" 이말을 들은 용진님이 대답했습니다. "아....그건요....혼자 다니면 왕따를 당하거든요...그래서 같이 다녀요." 단장님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해하는 눈치였습니다.
관료집단-특히 교도관-들의 더러운 근성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한가지가 사람의 "간"을 보는 것입니다. 간을 보는 것은 음식에나 해당되는 것인데 교도관들은 사람의 간도 봅니다.
당연히 응해주어야 하는 요구사항에도 일부러 "곤란하다",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억지부리지 마라"하면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한번 떠보는 것입니다. 오늘 광주교도소에서도 그랬습니다. 당연히 해줘야 하는 접견에 숫자 제한을 두고, 몇 명은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불법입니다.
단장님은 광주교도소 소장과 보안과장, 공안담당 교도관은 인간 말종들로 양아치만도 못한 놈들이라며 그들이 저지른 온갖 더러운 비행을 폭로 하셨습니다. 이런 쓰레기같은 자들이 교정직에있는한 교도소는 계속 범죄를 가르키는 학교로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사회변혁운동은 어쩌면 이런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한번 뚜껑이 열리니까 참가자들은 모두 숨겨진 자신의 기질을 드러냈습니다. 조희님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돌맹이를 가지고 오라 했는데 바위를 두 손에 들고 교도소앞 철문을 두드렸습니다. 단장님은 깃발을 뜯어 깃대를 한 손에 쥐고, 철문건너편 교도관들을 노려봤습니다. 이러다가 양심수 한 명 더 생길 것을 걱정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단장님의 손에 있는 깃대를 살며시 빼앗았습니다.
결국 교도측에선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정말 관료집단은 좋은 말로해서는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반가운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광주교도소 집회에는 한총련 의장님이 참가했습니다.
아마 몇 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집회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문화행사에는 특별히 노래패 "꽃다지"가 참가하여 집회참가자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이외에도 광주지역 민가협 어머님이 통닭과 생맥주를 사오셨고 기세문 선생님이 김소중님의 치료를 상담하러 천막까지 찾아주셨습니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장윤영 기자
[출처: 민중의 소리 2003년04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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