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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7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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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인물]임민식 범민련 사무총장</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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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3-17 00:00 조회1,8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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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범민족연합 공동사무국의 임민식 사무총장, 그는 해외에서 통일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토록 보고싶은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30년째 생이별한 상태이다. 인터넷 언론 <<유뉴스>>가 다룬 임총장의 사연과 그의 어머니 박경자 여사(80세)의 심정을 들어 본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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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minsik.jpg대표적인 민간통일운동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가 지도부를 교체하는 등 조직쇄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범민련은 오는 23일(일) 중앙위원회 총회를 개최하고 신임의장에 라창순(99년 방북대표)선생을, 신임 사무처장에 이경원(범민련 경인연합 사무국장)씨를 선출할 예정이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2월 개최된 범민련 임시 공동의장단회의 결정에 따라 6.15공동선언 3주기를 맞는 올해를 "반미반전과 민족공조"를 위한 사업과 활동을 펼칠 전망이다. 특히 냉전시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이적단체로 된 범민련 남측본부의 합법화에 총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한편, 범민련은 2001년, 강령과 규약을 6.15공동선언을 중심으로 전면 개정한 바 있다.

범민련 중앙위원회 총회를 맞아 유뉴스는 범민련 해외본부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임민식 총장의 편지글을 소개하고 임총장과 30여년 동안 생이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의 인터뷰기사를 게재한다.

자식의 말만 믿고 살아오신 어머님께!

저는 어머님께서 「민족의진로」와 인터뷰하신 글을 여러 번 읽어보았습니다. 일상적인 대화가 없는 나에게는 어머님의 낙관이 있는 대화가 못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숨죽이고 읽어보기도 하고, 큰 소리 내어 열변하듯 읽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동안 말못하고 묻어 두었던 과거사를 한 부분이나마 털어놓으심으로써 이 자식의 말만 믿고 사시는 어머님에 대한 불효를 다시 한번 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어찌 하겠습니까. 효도 드릴 날은 아직도 요원하오니 그저 어리석은 짓 안 하는 걸로 효도에 대신하고져 합니다.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사는 해외망명생활

일찍이 아버님께서 저에게 추천해 주신 세 권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같은 「어머니」입니다. 러시아의 막심 고리키, 미국의 펄 벅 여사 그리고 일본 저자의 책입니다. 일본 저자의 책은 아직도 읽지 못했습니다. 자식의 스승이자 제자인 동시에 동지인 모정, 특히 강철의 모정에 일찍이 너무도 감동되어 모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렸든 것 같습니다.

“착한 일을 한다고 의식하고 하는 착한 일은 착함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 자식이 어머님께 변명으로 대신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착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가문을 더럽힌 방탕의 길을 택했다고는 더더욱 생각지 않습니다.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민족의 양심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해외의 망명생활도 살기 나름이라고 봅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지 말고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아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며 일상의 작은 일들을 실천하며 살아가자.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나의 뿌리를 찾고 세계 속의 조국의 위치를 알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자. 좀 거창한 말로 표현해서 목적의식적으로 공부하고 해외의 삶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떳떳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전화위복의 기회

소위 ‘동백림 사건’의 연장에서 조작된 외삼촌 사건이 저를 망명과 생이별로 조국과 갈라놓고 낯선 이국땅을 배회하게 강요하였지만 나에게는 떳떳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고 위안도 합니다.
그 사건은 나에게 민족적 양심을 기조로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반면교사(反面敎師)하면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살아 남으려는 한 ‘외톨박이’의 처절한 투쟁은 분단국에서 굳어진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결국 불시에 불어닥친 사건은 분단에 안주하거나 자기 민족을 스스로 멸시하는 자기 비하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길들여진 분단사고를 깨우쳐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유럽문화에 동화하여 안주해 버릴 수 도 있었습니다만 사건에 연루된 외삼촌을 비롯한 선배들의 숭고한 민족적 양심의 행위를 뒤늦게나마 알게 되면서 그분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이념의 발상지라고 할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사상의 쇄국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고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배척하는 우리나라의 구태는 끝나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지구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아직도 남아 있는 냉전의식과 냉전의 가치기준을 청산하고 그 자리에 민족의식, 애국의식, 통일의식으로 자리매김 하여야 한다고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점은 이남이 이북보다 더욱 긴급하리라 봅니다.

민족사의 필연, 조국통일

조국통일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한참 지나면 저절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과거를 뼈아프게 반성하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에 낙관하면서 우리 민족끼리 공존, 공영을 모색하는 노력이 계속되는 중에 자아를 발견하고 민족공동체를 의식할 때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민족사의 필연의 문제라고 봅니다.

조국통일문제는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종식시키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완전히 실현하며 남과 북 사이의 불신과 대립을 없애고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는 민족문제입니다.

삶을 규정지은 조국통일운동, 성장의 몸부림 속에서 시작

저의 삶을 규정지은 조국통일운동은 한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는 성장의 몸부림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80년 광주민중항쟁은 국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간교한 외세의 지배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면 해외에서의 나는 사대매국의 망국적 행위를 청산하는 것으로부터 이남의 사회변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자주로 외세를 몰아내고 제 3세계 민중들이 연대, 단합하여 새 세계질서를 수립하는데 우리나라가 앞장서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80년대의 최고 현실주의자들인 청년학생들의 희생적인 투쟁을 통해 이남의 변혁운동이 민족, 민주, 통일운동으로 정식화되어 가는 과정을 해외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범민련 결성 당시의 시대적 요구는 누군가 앞서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남의 경우 청년학생들의 투쟁은 고조되었지만 민중의 호응은 미약했습니다.

군부독재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민중의 분노가 조직화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이남의 민족민주운동이 자기의 역할을 좀더 민족적 견지에서 개진하기 위해서 해외 동포들의 연대를 요구하게 되면서 명실공히 남북해외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동안 이남의 민족민주운동을 지원, 연대해 왔던 해외운동이 남북의 가교역할을 맡게 되면서 남북해외 3자연대운동이 자리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앞서 나가는 운동’에서 ‘끝까지 함께 가는 운동’으로

범민련의 결성은 해외동포들을 조국통일의 한 주체로 받아드림으로써 족적 긍지와 신심을 불어넣어 주어 조국통일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추동하였습니다. 범민련의 선봉적 조국통일운동은 희생도 많았고 아직도 ‘이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이 발표 된 후 민족통일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끌어 가야할 범민련은 ‘앞서 나가는 운동’에서 ‘끝까지 함께 가는 운동’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과거 55년 간 갈등과 대립의 분단관계에서 화해와 협력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에 혼란이 오고 있습니다. 바로 전환기적 상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냉전적인 요소와 탈냉전의 요소가 혼재하고 있는 상황, 기존의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서로 다투는 전환적 특징들이 변혁을 더욱더 추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끼리 오순도순 살기 위해

기대가 크면 그 만큼 실망도 크다고 하였습니다. 현 정부는 대북 정책의 성과를 국민들과 공유하지 않고, 자신의 업적으로 하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민적 합의 마련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민족끼리 화합하고 협력하여 통일에로 나가야 할 때입니다.

남북화해의 시대에 북은 더 이상 ‘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자존심으로 지켜온 북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은 나누면 그 만큼 커지고, 고통은 나누면 그 만큼 준다고 했습니다.

이제 서로 협력하고 단합하여 우리민족끼리 오순도순 살기 위해서 통일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겨야 합니다.
이렇게 나의 해외 망명생활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희망을 갖기 위해 양심에 호소했고, 그 양심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 낼 수 있었습니다.

신념과 양심을 지키는 것으로 효도를 대신하고자

어머님!
어리석은 자가 끝까지 어리석음을 고집하면 현명한 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꿈을 따라잡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신념과 양심을 지키며 살아온 지난 세월은 분단조국이 낳은 처절하고도 서글픈 기록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신념과 양심을 지키는 것이 착한 일이라고 믿고 효도에 대신하고자 합니다.부디 오래 사시어 통일조국은 못 보셔도 거기에 가까운 순간들을 접하시어 아버님께 전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추신: 이 글을 정리하는 동안에 남에서는 대선이 있었습니다. 김대중씨가 당선되었을 때 어머님께서 기뻐하시던 일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이회창씨는 절대 안된다고 하셨는데 노무현씨가 당선됨으로 어머님께서는 또 한번 마음에 가지고 있는 사람을 선출하신 것입니다. 김대중씨에게 실망하신 그 기억을 잊지 마시고 노무현씨에게도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노무현씨도 당면하게는 수구기득권 세력과 맞서야 하며, 민족공조와 외세지배 사이에서 힘겨운 공방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남의 정치가 좀더 성숙해지는데 협조한 대통령 정도로 기대해야겠지요. 광화문의 촛불시위는 아직도 민중의 몫이니까요. 또 한해를 보내면서 이국 땅에서 불효식이 설 새배를 드리옵니다.

2002년 12월 말 덴마크에서

[인터뷰] 범민련 후원의 밤’에 만난 임민식 사무총장님 어머니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해
6.15선언이 준 선물인가보다”

"30년 세월 한순간에 싹 가시는 듯하다"

9302_1045903935.jpg“눈으로 봐도 볼 수 없고, 귀로 들어도 들을 수 없었던 30년의 가슴에 맺혔던 것이 한 순간에 싹 가시는 것 같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해외통일인사들과 함께 하는 범민련 후원의 밤’이 열리던 지난 12월 13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의 연회장. 여든이 된 노모와 서울 반대편인 덴마크 헬싱거(수도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1시간 가량 떨어진 도시)에 사는 예순을 넘긴 아들의 눈물겨운 통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범민련 공동사무국 임민식 사무총장님(61)과 임 사무총장님의 어머니 박경자씨(80)의 전화통화가 이어졌다. “내일 광주에 내려가면 아버지 산소에 가서 다 고해드릴테니 걱정마. 뜻에 따라 열심히 싸워” 라며 아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어머님의 말씀에 아들은 “예예,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또 만나뵙게 되니까”라며 말을 이었다.

30여년 동안 죽은 듯이‘쉬쉬’하며 살아오다가 범민련이 주최한 후원의 밤 행사에 참가해 많은 통일운동인사들의 극진한 대접과 격려를 받고, 공개적으로 아들과 통화까지 했으니, 어머니 가슴이 얼마나 벅차랴.“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아마 6·15공동선언이 준 선물인가 봐요” 30년을 긴긴 한숨 속에서 살아온 어머니이기에 6·15공동선언이 가져다 준 선물이 무척 크게 느껴진다고 한다.

“아들의 삶을 지켜주고자 했던 남편이 병석에 있을 때 가장 슬펐다”

주위에서 후원을 받음직하나 어머니는 아들을 조국이 아닌 이국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꼭 2-3백만원에 이르는 항공료와 숙박료를 준비해야 한다. 범민련이 아직 ‘이적단체’로 찍혀 있기 때문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사람들이‘이적단체 후원’등의 이유로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염려로 어머님이 한사코 마다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년간 이러한 일들을 숱하게 겪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임 총장님의 아버지가 병환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적지 않은 병원비로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었을 때조차 주위 친지들에게 어떤 도움도 요청할 수 없었던 때라고 한다. 평생 아들을 가슴 속에서 지운 채 아들의 삶을 지켜주고자 했던 아버지였기에 그 슬픔은 더 컸다고 한다.

“조그만 일이라도 통일에 도움 된다면 최선을 다해 돕고 싶다”

어머니는 어느새‘통일운동’전문가가 다 되었다.‘통일운동’에 관한 한 어머니는 웬만한 통일운동단체 간부들보다 더 해박하다. 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임 사무총장이 꼬박꼬박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 결과는 물론이고, 각종 논평과 성명 등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준 덕택이다. 이 날 전화통화에서도 역시 임 총장은 어머니께 남한 통일운동과 관련한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임 총장이(어머니는 아들을 꼭‘임총장’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꼭 전해 달라고 했어요. 통일운동 진영이 단결해야 산다고, 단결을 꼭 이뤄달라고 말이에요”

어머니는 오는 1월 동경에서 아들을 만나기로 했다. 아들을 만날 그 날을 생각하면 힘든 것도‘싹’잊혀진다고 한다. 아울러 어머니는 범민련 행사가 있으면 꼭 참가하고 싶다고 한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만나면 구구절절 오늘 보고 듣고 한 것 다 전해 줄께”라며 통화를 마친 어머님은 1월 동경에서 아들의 손을 꼬옥 잡고 오순도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만남을 가로막은 채 30여년간 생이별을 강요했던 국가보안법 개정·폐지에 대해 2월에 출범할 새 정부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가 새로운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은 주지 못하더라도, 가족의 품만은 떠나지 않게 해 줬으면 합니다”
한옥주 기자 bum615@hanmail.net

[출처:유뉴스 2003년 2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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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2001년 11월27일 유뉴스가 임민식 총장과 대담한 보도를 추가로 소개합니다. 이 자료를 통해 범민련과 임총장 개인의 배경을 참조할 수 있어 함께 소개합니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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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동안 합법적인 활동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민간통일운동사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남측본부. 범민련이 민간통일운동진영의 중심축으로 위치하는 데는 "남북해외" 공동조직이라는 단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철저히 남북해외의 "만장일치제"에 의거한 합의로 조직이 운영된다.

남북해외의 "만장일치합의"를 이끌어내기위해서는 그만큼 잦은접촉과 긴 논의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남북해외의 토론과 회의에 대한 연락과 중개자 역할을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범민련 공동사무국이다. 범민련 남북해외 본부의 모든 사업과 모든 회합·통신은 공동사무국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 공동사무국은 해외본부에서 남과 북의 위임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공동사무국은 하루에도 수십통의 팩스와 수백통의 전화를 붙들고 일해야 한다. 그리고 전세계 7개 해외본부와 평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연락사업을 진행한다. 여기에다 전세계를 상대로 한 범민련 공식 대변실 역할과 각종 연대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의 책임자는 공동사무국 사무총장이다. 10여년 동안 해외에서 범민련 활동을 해 온 임민식(59세) 공동사무국 사무총장을 만났다.

임민식 사무총장은 헬싱거 최고의 "항공 이용객"

임민식 사무총장은 남측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20대 후반 경희대를 졸업하고 떠난 영국 유학길 이후 단한번도 한국을 방문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총장은 그래서 정통 "해외파" 통일운동가다. 그가 고국인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는 것은 박정희정권 말 외삼촌이 연루된 공안사건으로 인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임총장은 지금도 "귀국불허" 대상자다.

그는 현재 살고 있는 덴마크 헬싱거(덴마아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의 도시)에서 최고 항공 이용객으로 소문 날 정도로 전세계를 누비며 넘나들고 있지만, 고국인 한국만은 30여년 동안 한번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인 광주에 어머니를 두고 30년이 넘도록 생이별한 이산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현재 임총장이 살고 있는 헬싱거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 유학시절 박정희정권의 수배를 피해 옮긴 정치적 망명지였다. 이곳에서 덴마크 현지 여성과 결혼해 "정치경제학" 강사 생활을 해 오다 80년대초 부터 "해외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내란음모 산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때, 임민식총장도 해외운동조직과 함께 "김대중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서구 유럽 "사회민주주의" 나라들에서 임총장의 "김대중석방운동"은 해외여론을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외 민주화 운동… "김대중 구명운동" 적극 나서기도

가난한 유학생에서 저명한 정치경제학 박사로서 생활하던 임총장을 "통일운동"의 길로 이끌었던 계기는 70년대말 세계적 법학자였던 외삼촌의 억울한 죽음과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었다. 대학강단을 박차고 시작된 임총장의 "민주화· 통일운동"은 80년대를 거쳐 90년 범민련 결성을 주도한 이후 현재까지 20여년간 이어져 오고 있다. 10여년동안 범민련 해외본부 활동을 주도해 온 임총장은 공안당국이 "범민련의 실세"라고 평가할 정도로 범민련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해외에서 임총장을 만난 지인들은 "그사람만큼 실무능력과 외교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다. 성실하고 정직한 그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라며 임총장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임총장은 현재 살고 있는 덴마크 헬싱거에서 현지 주민들로 부터 수차례 시장출마 권고를 받을 정도로 주변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덴마크에서 공동사무국이 위치한 일본을 비롯해 북과 해외 곳곳을 넘나들며 범민련의 폭주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공동사무국의 임민식 사무총장과의 서면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다. 인터뷰내용은 임민식 사무총장이 범민련 남측본부를 통해서 본사로 보내온 것이다.

영국유학 이후 30여년째 어머니와의 생이별

범민련 결성 11돌을 맞는 소감은 먼저 범민련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주신 유뉴스에 감사 한다. 범민련이 결성 11돌을 맞이해 긍지와 자책이 동유시에 교차한다. 11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지만 동시에 씁슬한 감정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범민련에 대해 남측의 대학생에게 소개한다면 범민련의 결성배경은 70년대초 남북당국이 합의한 조국통일 3대원칙인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정신에서 출발한다. 범민련은 60년대 4.19학생투쟁, 70년대의 민주화운동, 80년대의 광주민중항쟁, 87년의 민중항쟁으로 표출된 민중들의 자주, 민주, 통일의 요구를 집약해 낸 결과이다. 또 냉전붕괴이후, 열강들의 실리주의 노선에 의해 한반도가 영구분단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 민족내부의 결집을 요구했다.

범민련은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했다. 이전의 의 냉전적 사고방식을 털어 버리고 민족의 이해와 요구에 맞게 통일을 이루어야한다는 절박한 요구가 범민련을 탄생시켰다. 다시 말해 우리 분단 민족사에 조국통일의 필연성이 범민련을 낳았다.


범민련의 존재의미는 "친남 친북" 이다

남측에서는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돼 있는데...
남과 북 사이에 쌓여 온 오해, 불신, 대립과 반목을 씻고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기위해 결성된 것이 범민련이다. 그래서 범민련은 친 남과 동시에 친 북을 통해 존재의 의의를 갖게 된다. 이 친북 자세가 남에서는 "이적"으로 규정되어 결성 첫 시기부터 지금까지 범민련의 활동에 족쇄를 채워놓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구태의연한 냉전적 사고의 고집으로 도저히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다.

공동사무국 활동에서 보람과 힘든점이 있다면
또 하나의 조국인 북에 대해서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접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북을 이해하는데는 만남과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북은 공동사무국에 신뢰와 열린 자세로 대하고 있다. 한가지 더 보람찬 일은 민족의 얼을 되찾고 간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힘들었던 일이라기 보다는 괴로웠던 일은 범민련 내부의 문제였다. 한때 제기된 범민련 해소론과 이에따른 혼란과 후유증이 계속되는 과정이 가장 괴웠다. 이로인해 범민련의 정당한 통일운동이 국민들에게 잘못 인식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범민련이 국민들에게 왜곡되게 인식되는 것이 가장 괴로워

해외 동포들에게 범민련은 어떻게 알려져 있는가
범민련은 해외 동포들에게 조국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 왔다. 통일의 일주체로 민족적 긍지를 갖게 한 것이다. 사실 해외동포들은 조국의 분단으로 이중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김종필 같은 사람은 일본을 방문해 "재일동포들이 빨리 일본에 귀화해야 한다"고 망발을 해 해외동포들의 가슴을 찢어놓기도 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정부의 간섭은 동포들의 민족애를 위협했다. "동백림사건", "유학생간첩단 사건", "고국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 해외 동포들이 분단으로 어이없는 희생을 많이 치뤄야 했다. 이러한 동포들에게 범민련 해외본부는 또하나의 조국으로 다가갔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친 북의 총련계와 친 남의 자주민단계가 범민련 결성에 함께 참여했다. 일본 총련계에 속한 동포의 거의 전부가 남쪽 출신이다. 그 동안 이들은 고향을 등지고 살 것을 강요당했다. 범민련 결성과 참여는 이들에게 고향을 다시 마음에 담게 했으며 고향방문의 꿈을 통일운동으로 담아 냈다. 또한 민단계 동포들에게는 맹목적인 반북 태도를 바꾸어 북도 통일의 한 주체로서 함께 동고동락해야 할 동족임을 확인시킬 수 있었다. 구쏘련 동포들과 중국 동포들이 범민련에 참여한 사실도 통일운동을 향한 큰 진전이었다.

유학후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해외에만 계셨는데...
해외의 이주민생활에서 어려운 점이야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분단민족의 서러움도 가슴 아픈데 타민족에게까지 분단민족이라는 조롱을 받는 것은 자존심을 상하는 일로 참기 어려웠다. 사실 내가 민족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도 해외에서 80년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미국의 오만 무례한 내정간섭을 목격하면서 받은 충격과 그 때의 맹목적인 분노로 시작됐다.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식민의 멍에를 벗어버릴 능력이 있는 우수한 민족이다. 제국주의 세력은 이를 잘 알기에 우리를 갈라서 지배, 예속하려는 것이다.
범민련 강규 수정은 통일운동의 업그래이드 판

범민련의 강령과 규약이 수정된 것으로 아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범민련의 강령과 규약을 수정한 것은 전적으로 변화된 정세와 상황에 따르기 위한 조국통일운동의 업그래이드판이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엄청난 통일정세의 변화를 맞이했다. 6.15 선언은 좁은 범위로 제한되어 있던 민족대단결 운동을 정부 당국을 포함한 전민족적인 운동으로 확고히 전환시켰다.
6.15 선언이 이행되기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해야 하며 힘있는 대중운동을 통해 수구세력의 준동을 제압해야 한다. 2001년 상반기와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이후 조성된 정세는 외세와 수구반통일세력과의 투쟁이 얼마나 간고하고 치열한 대결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재 조국통일운동의 핵심적인 과제는 6.15 선언의 기치 아래 모든 세력과 연대, 연합하여 6.15 선언을 대세로 정착시켜 조국통일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범민련은 각계각층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기반으로 민족대단결의 모체로서 발전해야 한다. 이것이 범민련의 새로운 진로와 사명이다.

자기의 위치에서 특색있게 통일에 기여하길

남측의 통일일꾼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신념이란 그것을 유지하는 것 보다 고수하기가 몇 곱절 어렵다고 한 선배들의 고백을 들은바 있다. 사실 신념이 흔들리면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자신을 믿지 못하면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신념에는 지나온 삶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결국 신념을 저버리면 미래의 희망을 저버리게 된다. 나는 조국통일의 전사들, 신념의 강자들인 장기수 선배님들에게서 모범을 배우고자 노력한다. 해외에서 망명생활로만 끝날지도 모르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나의 사치스런 고민이다.
불행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 편향적 우상숭배는 세계화라는 이름을 바꾼 미국화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자본주의 시장논리로 모든 관계가 규정 당하는 현실 앞에서 분단시대의 고정관념이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아가 민족대단결의 시대적 요구에 계속 장애로 될 조짐들이 걱정스럽다. 범민련의 임무는 더욱 막중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유뉴스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는 고통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억압의 역사를 해방의 역사로, 오욕의 역사를 민족긍지의 역사로 재창조하기 위해 조국이 하루라도 빨리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서 민중들이 주인 된 세상을 안아 오기 위해 선차적으로 대단결하여 민족의 무궁한 힘을 모아 통일을 앞당겨 오기 위해 자기의 위치에서 특색 있게 기여해 주길 바란다.

임민식 사무총장 약력

1943년 광주 출생
1961년 광주일고 졸업
1966년 경희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67- 영국유학(캠브리지대 정치경제학 박사)
덴마아크 망명. 코페하겐대학 강사
1980 - 해외민주화 통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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