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red>전주형무소 집단학살 확인</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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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4-23 00:00 조회1,54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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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발굴] 한국전 당시 전주형무소 정치범 1,600명 학살 53년만에 최초 확인
월간 말 취재팀 5월호에서 최초 공개
4월 14일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희생자의 유골 발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던 1600여 명의 정치범을 군경이 집단 학살했다는 증언과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53년만에「월간 말」취재진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됐다(월간 말 5월호 전문 보도).
말지 취재팀은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 발굴을 통해 6·25전쟁 중 한국 군경이 벌인 좌익수 집단 처형 자료를 국내에 폭로해온 이도영(55·미국 뉴욕거주) 박사가 최근 월간 말에 제공한 미국 정부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한 사진 6장을 근거로 발굴탐사취재를 벌인 결과, 지난 4월 14일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유골을 발굴함으로써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이도영 박사가 최근 미국 정부문서보존소에서 비밀해제된 한국전 당시 전주에서 벌어진 학살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사진을 입수, 월간 말지에 제공했다. 이 사진에는 "30 SEPT 50. SOUTH KOREANS KILLED BY THE ENEMY AT CHONJU. THEY WERE STRUCT ABOUT THE HEAD WITH A SHARP OBJECT. U.S ARMY PHOTO BY E. FOX(MK)(1950년 9월 30일. 전주에서 적들에게 살해된 한국인들. 그들은 날카로운 둔기로 머리를 가격 당했다)"라고 씌어져 있다. 이 사진을 포함 6장의 사진이 53년전에 발생한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학살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는 단서가 됐다.<월간 말 제공>
월간 말 취재팀 등이 지난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전주시 황방산 기슭 납골당(기독교안식관) 뒤편에서 중장비를 동원해 파헤친 결과, 한국전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된 정치범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을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월간 말 제공>
말지 김재중 기자는 당시 학살된 희생자의 유가족, 전주형무소 형무관, 이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취재원 20여 명, 전주 시지와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 등의 관련 자료, 전쟁 당시 종군기자의 기록 등을 종합한 결과, 1950년 6월 말부터 20여 일 동안 전주형무소 인근에서 정치범 1천6백여 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학살은 총 4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며,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형무소에서 남쪽 방향인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동, 서, 북 방향의 옛 공동묘지, 건지산, 황방산, 소리개재 등에서 이뤄졌다.
"형무소 정문에서 본께, 군인들이 트럭에다 죄수들을 싣고 쩌어기 공동묘지 너머로 가더랑게요. 그리구 쬐끔 있다가 "우당탕탕" 총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올라오더랑게요." 희생자의 유가족인 김영금 할머니의 증언이다.
"내가 계호(戒護)과에서 일혀서 정확히 알어. 당시 형무소에 1천 9백명 정도의 죄수가 있었는디, 내가 아는 거슨 1천 2백명, 낭중에 들은 숫자가 4백명, 도합 1천 6백명이 처형 당했당께. 나머지는 경제범이여. 그 때 4·3이니 여순반란이니 해서 붙들려온 정치범들은 다 죽었다고 보면 되는 거시여." 당시 전주형무소 형무관을 지닌 이순기씨가 53년만에 증언한 내용이다.
말지 취재팀은 유가족, 당시 교도관 등과 함께 지난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전주시 황방산 기슭 납골당(기독교안식관) 뒤편에서 중장비를 동원해 파헤친 결과, 학살된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발굴 현장에 참여한 이순기 전 형무관은 "내가 알기론, 여기 묻힌 죄수들은 3년 이하의 단기범들로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인터넷 시민의신문 ngotimes.net은 「월간 말」로부터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학살 르포기사" 가운데 일부와 현장발굴 사진, 이도영 박사가 미국 정부문서보존소에서 최근 입수, 말지에 제공한 관련 사진 일부를 제공받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이준희 기자 peace@ngotimes.net
[월간 말] 5월호 특종보도
1950년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처형 / 김재중 기자
빛 바랜 흑백사진 속에 처참하게 늘어선 주검들.
사진 속 주인공들은 짚으로 짠 가마니에 덮이고 땅속에 파묻힌 채 얼굴만 내놓고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하복부에 한 삽의 모래만 얹혀진 채 땅위에 누워있다. 한 무리의 시신들은 깊게 판 구덩이에 가지런히 줄지어 누워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허연 모래 위에 핏줄기를 떨구며 힘없이 늘어져 엉켜있다.
"미국에서 찾은 사진입니다. 사진 설명에는 "인민군이 죽인 시신"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남측에 의한 학살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 발굴을 통해 6·25전쟁 중 한국 군경이 벌인 좌익수 집단 처형 자료를 국내에 폭로해온 이도영(55·미국 뉴욕거주) 박사는 최근 미국 정부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한 새로운 사진 6장을 월간 『말』 편집국에 제공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박사를 포함한 공동취재단이 꾸려졌다. 일단 사진설명이 사실인 경우와 그렇지 않을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진실에 접근하는 취재방향으로 설정됐다.
(중략)...
"30 SEPT 50. SOUTH KOREANS KILLED BY THE ENEMY AT CHONJU. THEY WERE STRUCT ABOUT THE HEAD WITH A SHARP OBJECT. U.S ARMY PHOTO BY E. FOX(MK)"
"1950년 9월 30일. 전주에서 적들에게 살해된 한국인들. 그들은 날카로운 둔기로 머리를 가격 당했다."
이와 같은 사진과 사진설명은 기자 일행에게 몇 가지 단서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사진속에 보이는 높고 긴 담장, 그 앞에 쌓여 있는 벽돌더미, 반팔과 긴팔이 혼용된 옷차림, 미군에 의해 "9월 30일 전주"라고 적혀진 사진 설명.
(중략)...
피로 얼룩진 진북동 322번지
4월 7일 오전, 기자 일행은 전주시 진북동 옛 형무소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지나는 노인들에게 두서없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 동네에 오래 사셨어요?"
실마리는 예상보다 쉽게 풀렸다. 동네 노인 몇 명을 만난 뒤에 정확한 옛 형무소 자리를 확인했고, 줄곧 이 동네에 살았다는 터줏대감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서노송동 새마을금고 전 이사장 노태석(84)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응 "반대미" 말하는구만, 바로 여그여"
노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옛 형무소 자리는 과거엔 소반처럼 펑퍼짐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반대미, 혹은 반촌(盤村)"이라고 불렸다. 그 자리엔 교회와 빌라 등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자리가 정문이 있던 자리여. 여그 이쪽으로 죽 담장이 있었지. 아마 한 30자 높이는 됐었재. 쩌 쪽은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고."
아귀가 하나둘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형무소 담장 중 15m 가량이 주택가 축대로 남아있는 것 이외엔 그 어디에서도 이 곳이 엄청난 참상의 무대였다는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그 축대가 사라져버린 형무소 담장의 일부라는 것도 몇몇 노인들만 알고 있을 사실일 뿐이었다.
"어르신, 혹시 전쟁 때 그 벽돌공장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데 혹시 직접 보지 못하셨어요"
"말두 마. 한 3백 명은 죽었드랬지. 아마 전쟁이 터지고 그해 가을 무렵이었는데. 증말 끔찍시려웠지"
조심스럽게 사진을 꺼내 보였다. 노인은 너무 오래 전 일이어서 인지 한참 동안이나 사진을 주시하며 기억을 더듬고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응 이랬구만. 전주형무소가 틀림없구만. 여그 담장하며…. 근디 이런 사진이 워디서 났댜? 참 들 많이 죽어 부렀어"
노인은 한 숨을 쏟아냈다.
"직접 보셨어요?"
"보든 못했지. 나두 잠시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이렇게 시체가 널려 있었당께"
(중략)...
김영금 할머니는 전재산과 다름없는 이 돈을 형무소 소장과 부장들에게 건넸다. 형무소에서 목회일을 보던 강 목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강 목사"라는 사람은 동네 터줏대감 노태석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노 노인을 비롯해 기자 일행이 만났던 다른 증언자들은 당시에는 여러 가지 편법으로 형무소를 출옥한 사례가 많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어쨌든 남편이 출옥할 것으로 믿고 완도로 내려가 모내기를 마친 김 할머니는 뜻밖에도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닥칠 비극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부랴부랴 전주로 다시 올라왔던 것이다.
"형무소 정문에서 본께, 군인들이 트럭에다 죄수들을 싣고 쩌어기 공동묘지 너머로 가더랑게요. 그리구 쬐끔 있다가 "우당탕탕" 총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올라오더랑게요"
할머니는 비극을 직감하고 문제의 장소로 찾아갔다. 비가 한차례 쏟아지고 난 뒤, 그 다음 날의 일이었다.
"구덩이에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져 있는디…."
할머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주름진 눈가엔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휴, 사람을 그 모양으로 맹그러 놓았는디, 흙은 덮다가 말구 기름을 찌그려 불을 꼬실렀는지 눈 뜨고는 못 보겠더랑게요. 며칠 지난 시체도 있는지 발싸 구데기가 꼬이기 시작했드라구요"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할머니는 끝내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겹겹이 쌓여있는 시신을 일일이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더구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그을린 시신을 보고는 남편을 찾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내 그날로 죽을라구 했지요. 시어무니가 보통분이 아닌게라 남편 빼내들 못하면 들어오지두 말라구 했응께요"
(중략)...
비극에 대한 종군기자의 기록
(중략)...
6월 27일과 28일 전주형무소 인근 공동묘지에서 1차, 7월 4일부터 14일 사이에 2차, 7월 20일경 솔개재와 황방산 부근에서 3차, 마지막 4차로 후퇴 직전 경찰과 헌병대 유치장에 구금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자일행이 추적한 내용은 신 교수의 연구기록과 정확히 괘를 같이 하고 있었다. 증언과 자료 등 입수된 작은 퍼즐 조각들이 신 교수가 그려놓은 밑그림 위에 정확하게 맞추어져 커다란 그림으로 완성되어 갔다.
53년만에 입을 연 형무관들의 증언
비극에 대한 믿을 만한 증언을 내놓은 사람들은 다름아니라 1950년 당시, 전주형무소에 근무했던 교도관들이었다. 교도소가 아닌 형무소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때인 만큼 형무관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들이다. 종전 반세기를 넘긴 지금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불과 몇 명만이 살아남아 그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오래된 이야그를 지금 혀서 무엇하나?"
나이 여든에 가까운 노인들은 말문을 쉽게 열려하지 않았다. 기자 일행이 추적해 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망각 저편으로 잊은 듯했던 껄끄러운 기억을 건드리지만 않았다 하더라도 그 해 여름의 기억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요량이었던 셈이다.
"맞어. 그랬드랬지. 바로 이 장면이여. 틀림없는 사실이랑께"
이 도영 박사가 입수해 폭로한 바 있었던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사진을 쓱 훑어본 이겸준(78) 전 형무관은 그 사진의 내용을 대전이 아닌 전주로 착각했다. 정치범 처형이 그 만큼 대전의 그것과 흡사하게 이뤄졌다는 방증이었다.
"하루는 헌병대 관계자가 와서는 교도관들도 와서 봐야 한다고 하길래 형무소 차를 타고 그곳에 따라 갔었지요. 두 눈뜨고 바라보지두 못할만큼 끔찍했습니다. 당시 교도소장은 죄수들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국이 어수선한지라…."
1946년 12월 17일, 전주형무소의 행정업무 담당인 서무계로 근무를 시작한 이 형무관은 전쟁발발 직후,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다짜고짜 형무소에 들이닥친 헌병대는 수형인 명단도 없이 중형자부터 불러내 트럭에 싣더니 어디론가 끌고 가곤 했다. 그리고 형무소로 돌아오는 건 항상 빈 트럭뿐이었다. 물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채지 못할 형무관들은 없었다.
"한 차에 20여 명씩 공동묘지 근처로 태우고가 말뚝을 세우고 붙들어 맺지요. 가슴엔 검정색 타게트를 붙이고 곧바로 총살했습니다."
군인들은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시신을 질질 끌고가 밀어넣고 휘발류를 뿌린 뒤 불을 붙였다고 한다. 완도에 살고있는 김영금 할머니의 남편이 이 형무관이 목격했던 살육의 현장에서 운명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시차를 둔 두 노인의 경험이 정확히 한 가지 사건의 현장으로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중략)...
사무친 원혼, 하늘을 보다
2003년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전주시 황방산 기슭
가장 많은 정치범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공동묘지 터는 이미 아스팔트가 깔리고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버렸다. 유골 발굴이 가능할 것으로 추측되는 다른 곳은 건지산, 소리개재, 황방산 등 개발이 덜 된 전주시 외곽 지역이다. 다행히도 형무관을 지냈던 이순기씨가 황방산의 학살 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14일 말지 취재팀 등이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월간 말 제공>
말지 취재팀에 의해 53년만에 발견된 한국전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정치범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월간 말 제공>
"바로 여긴데 건물이 들어서 버렸구만"
노인이 기억하고 있는 학살 터, 바로 그 지점 위에는 육중한 납골당이 들어서 있었다. 역사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 낙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납골당 뒤쪽 야산 기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 이 건물을 지으면서 뼈가 쏟아져 나왔다해도 그냥 묻어버리거나 모아서 어딘가에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여"
일행이 낙담에 빠져 납골당 건물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잡풀 속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하얗고 긴 물체가 언뜻 기자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략)...
* 기사 전문과 관련 기사와 사진 등은 18일 발행되는 월간 말 5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준희 기자 peace@ngotimes.net
[출처; 시민의 신문 4-17-03]
월간 말 취재팀 5월호에서 최초 공개
4월 14일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희생자의 유골 발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던 1600여 명의 정치범을 군경이 집단 학살했다는 증언과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53년만에「월간 말」취재진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됐다(월간 말 5월호 전문 보도).

이도영 박사가 최근 미국 정부문서보존소에서 비밀해제된 한국전 당시 전주에서 벌어진 학살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사진을 입수, 월간 말지에 제공했다. 이 사진에는 "30 SEPT 50. SOUTH KOREANS KILLED BY THE ENEMY AT CHONJU. THEY WERE STRUCT ABOUT THE HEAD WITH A SHARP OBJECT. U.S ARMY PHOTO BY E. FOX(MK)(1950년 9월 30일. 전주에서 적들에게 살해된 한국인들. 그들은 날카로운 둔기로 머리를 가격 당했다)"라고 씌어져 있다. 이 사진을 포함 6장의 사진이 53년전에 발생한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학살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는 단서가 됐다.<월간 말 제공>

말지 김재중 기자는 당시 학살된 희생자의 유가족, 전주형무소 형무관, 이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취재원 20여 명, 전주 시지와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 등의 관련 자료, 전쟁 당시 종군기자의 기록 등을 종합한 결과, 1950년 6월 말부터 20여 일 동안 전주형무소 인근에서 정치범 1천6백여 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학살은 총 4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며,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형무소에서 남쪽 방향인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동, 서, 북 방향의 옛 공동묘지, 건지산, 황방산, 소리개재 등에서 이뤄졌다.
"형무소 정문에서 본께, 군인들이 트럭에다 죄수들을 싣고 쩌어기 공동묘지 너머로 가더랑게요. 그리구 쬐끔 있다가 "우당탕탕" 총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올라오더랑게요." 희생자의 유가족인 김영금 할머니의 증언이다.
"내가 계호(戒護)과에서 일혀서 정확히 알어. 당시 형무소에 1천 9백명 정도의 죄수가 있었는디, 내가 아는 거슨 1천 2백명, 낭중에 들은 숫자가 4백명, 도합 1천 6백명이 처형 당했당께. 나머지는 경제범이여. 그 때 4·3이니 여순반란이니 해서 붙들려온 정치범들은 다 죽었다고 보면 되는 거시여." 당시 전주형무소 형무관을 지닌 이순기씨가 53년만에 증언한 내용이다.
말지 취재팀은 유가족, 당시 교도관 등과 함께 지난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전주시 황방산 기슭 납골당(기독교안식관) 뒤편에서 중장비를 동원해 파헤친 결과, 학살된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발굴 현장에 참여한 이순기 전 형무관은 "내가 알기론, 여기 묻힌 죄수들은 3년 이하의 단기범들로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인터넷 시민의신문 ngotimes.net은 「월간 말」로부터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학살 르포기사" 가운데 일부와 현장발굴 사진, 이도영 박사가 미국 정부문서보존소에서 최근 입수, 말지에 제공한 관련 사진 일부를 제공받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이준희 기자 peace@ngotimes.net
[월간 말] 5월호 특종보도
1950년 전주형무소 정치범 집단처형 / 김재중 기자
빛 바랜 흑백사진 속에 처참하게 늘어선 주검들.
사진 속 주인공들은 짚으로 짠 가마니에 덮이고 땅속에 파묻힌 채 얼굴만 내놓고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하복부에 한 삽의 모래만 얹혀진 채 땅위에 누워있다. 한 무리의 시신들은 깊게 판 구덩이에 가지런히 줄지어 누워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허연 모래 위에 핏줄기를 떨구며 힘없이 늘어져 엉켜있다.
"미국에서 찾은 사진입니다. 사진 설명에는 "인민군이 죽인 시신"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남측에 의한 학살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 발굴을 통해 6·25전쟁 중 한국 군경이 벌인 좌익수 집단 처형 자료를 국내에 폭로해온 이도영(55·미국 뉴욕거주) 박사는 최근 미국 정부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한 새로운 사진 6장을 월간 『말』 편집국에 제공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박사를 포함한 공동취재단이 꾸려졌다. 일단 사진설명이 사실인 경우와 그렇지 않을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진실에 접근하는 취재방향으로 설정됐다.
(중략)...
"30 SEPT 50. SOUTH KOREANS KILLED BY THE ENEMY AT CHONJU. THEY WERE STRUCT ABOUT THE HEAD WITH A SHARP OBJECT. U.S ARMY PHOTO BY E. FOX(MK)"
"1950년 9월 30일. 전주에서 적들에게 살해된 한국인들. 그들은 날카로운 둔기로 머리를 가격 당했다."
이와 같은 사진과 사진설명은 기자 일행에게 몇 가지 단서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사진속에 보이는 높고 긴 담장, 그 앞에 쌓여 있는 벽돌더미, 반팔과 긴팔이 혼용된 옷차림, 미군에 의해 "9월 30일 전주"라고 적혀진 사진 설명.
(중략)...
피로 얼룩진 진북동 322번지
4월 7일 오전, 기자 일행은 전주시 진북동 옛 형무소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지나는 노인들에게 두서없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 동네에 오래 사셨어요?"
실마리는 예상보다 쉽게 풀렸다. 동네 노인 몇 명을 만난 뒤에 정확한 옛 형무소 자리를 확인했고, 줄곧 이 동네에 살았다는 터줏대감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서노송동 새마을금고 전 이사장 노태석(84)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응 "반대미" 말하는구만, 바로 여그여"
노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옛 형무소 자리는 과거엔 소반처럼 펑퍼짐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반대미, 혹은 반촌(盤村)"이라고 불렸다. 그 자리엔 교회와 빌라 등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자리가 정문이 있던 자리여. 여그 이쪽으로 죽 담장이 있었지. 아마 한 30자 높이는 됐었재. 쩌 쪽은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고."
아귀가 하나둘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형무소 담장 중 15m 가량이 주택가 축대로 남아있는 것 이외엔 그 어디에서도 이 곳이 엄청난 참상의 무대였다는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그 축대가 사라져버린 형무소 담장의 일부라는 것도 몇몇 노인들만 알고 있을 사실일 뿐이었다.
"어르신, 혹시 전쟁 때 그 벽돌공장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데 혹시 직접 보지 못하셨어요"
"말두 마. 한 3백 명은 죽었드랬지. 아마 전쟁이 터지고 그해 가을 무렵이었는데. 증말 끔찍시려웠지"
조심스럽게 사진을 꺼내 보였다. 노인은 너무 오래 전 일이어서 인지 한참 동안이나 사진을 주시하며 기억을 더듬고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응 이랬구만. 전주형무소가 틀림없구만. 여그 담장하며…. 근디 이런 사진이 워디서 났댜? 참 들 많이 죽어 부렀어"
노인은 한 숨을 쏟아냈다.
"직접 보셨어요?"
"보든 못했지. 나두 잠시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이렇게 시체가 널려 있었당께"
(중략)...
김영금 할머니는 전재산과 다름없는 이 돈을 형무소 소장과 부장들에게 건넸다. 형무소에서 목회일을 보던 강 목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강 목사"라는 사람은 동네 터줏대감 노태석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노 노인을 비롯해 기자 일행이 만났던 다른 증언자들은 당시에는 여러 가지 편법으로 형무소를 출옥한 사례가 많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어쨌든 남편이 출옥할 것으로 믿고 완도로 내려가 모내기를 마친 김 할머니는 뜻밖에도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닥칠 비극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부랴부랴 전주로 다시 올라왔던 것이다.
"형무소 정문에서 본께, 군인들이 트럭에다 죄수들을 싣고 쩌어기 공동묘지 너머로 가더랑게요. 그리구 쬐끔 있다가 "우당탕탕" 총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올라오더랑게요"
할머니는 비극을 직감하고 문제의 장소로 찾아갔다. 비가 한차례 쏟아지고 난 뒤, 그 다음 날의 일이었다.
"구덩이에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져 있는디…."
할머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주름진 눈가엔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휴, 사람을 그 모양으로 맹그러 놓았는디, 흙은 덮다가 말구 기름을 찌그려 불을 꼬실렀는지 눈 뜨고는 못 보겠더랑게요. 며칠 지난 시체도 있는지 발싸 구데기가 꼬이기 시작했드라구요"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할머니는 끝내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겹겹이 쌓여있는 시신을 일일이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더구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그을린 시신을 보고는 남편을 찾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내 그날로 죽을라구 했지요. 시어무니가 보통분이 아닌게라 남편 빼내들 못하면 들어오지두 말라구 했응께요"
(중략)...
비극에 대한 종군기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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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과 28일 전주형무소 인근 공동묘지에서 1차, 7월 4일부터 14일 사이에 2차, 7월 20일경 솔개재와 황방산 부근에서 3차, 마지막 4차로 후퇴 직전 경찰과 헌병대 유치장에 구금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자일행이 추적한 내용은 신 교수의 연구기록과 정확히 괘를 같이 하고 있었다. 증언과 자료 등 입수된 작은 퍼즐 조각들이 신 교수가 그려놓은 밑그림 위에 정확하게 맞추어져 커다란 그림으로 완성되어 갔다.
53년만에 입을 연 형무관들의 증언
비극에 대한 믿을 만한 증언을 내놓은 사람들은 다름아니라 1950년 당시, 전주형무소에 근무했던 교도관들이었다. 교도소가 아닌 형무소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때인 만큼 형무관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들이다. 종전 반세기를 넘긴 지금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불과 몇 명만이 살아남아 그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오래된 이야그를 지금 혀서 무엇하나?"
나이 여든에 가까운 노인들은 말문을 쉽게 열려하지 않았다. 기자 일행이 추적해 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망각 저편으로 잊은 듯했던 껄끄러운 기억을 건드리지만 않았다 하더라도 그 해 여름의 기억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요량이었던 셈이다.
"맞어. 그랬드랬지. 바로 이 장면이여. 틀림없는 사실이랑께"
이 도영 박사가 입수해 폭로한 바 있었던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사진을 쓱 훑어본 이겸준(78) 전 형무관은 그 사진의 내용을 대전이 아닌 전주로 착각했다. 정치범 처형이 그 만큼 대전의 그것과 흡사하게 이뤄졌다는 방증이었다.
"하루는 헌병대 관계자가 와서는 교도관들도 와서 봐야 한다고 하길래 형무소 차를 타고 그곳에 따라 갔었지요. 두 눈뜨고 바라보지두 못할만큼 끔찍했습니다. 당시 교도소장은 죄수들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국이 어수선한지라…."
1946년 12월 17일, 전주형무소의 행정업무 담당인 서무계로 근무를 시작한 이 형무관은 전쟁발발 직후,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다짜고짜 형무소에 들이닥친 헌병대는 수형인 명단도 없이 중형자부터 불러내 트럭에 싣더니 어디론가 끌고 가곤 했다. 그리고 형무소로 돌아오는 건 항상 빈 트럭뿐이었다. 물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채지 못할 형무관들은 없었다.
"한 차에 20여 명씩 공동묘지 근처로 태우고가 말뚝을 세우고 붙들어 맺지요. 가슴엔 검정색 타게트를 붙이고 곧바로 총살했습니다."
군인들은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시신을 질질 끌고가 밀어넣고 휘발류를 뿌린 뒤 불을 붙였다고 한다. 완도에 살고있는 김영금 할머니의 남편이 이 형무관이 목격했던 살육의 현장에서 운명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시차를 둔 두 노인의 경험이 정확히 한 가지 사건의 현장으로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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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친 원혼, 하늘을 보다
2003년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전주시 황방산 기슭
가장 많은 정치범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공동묘지 터는 이미 아스팔트가 깔리고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버렸다. 유골 발굴이 가능할 것으로 추측되는 다른 곳은 건지산, 소리개재, 황방산 등 개발이 덜 된 전주시 외곽 지역이다. 다행히도 형무관을 지냈던 이순기씨가 황방산의 학살 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14일 말지 취재팀 등이 전주시 황방산 기슭에서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월간 말 제공>
말지 취재팀에 의해 53년만에 발견된 한국전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정치범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월간 말 제공>
"바로 여긴데 건물이 들어서 버렸구만"
노인이 기억하고 있는 학살 터, 바로 그 지점 위에는 육중한 납골당이 들어서 있었다. 역사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 낙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납골당 뒤쪽 야산 기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 이 건물을 지으면서 뼈가 쏟아져 나왔다해도 그냥 묻어버리거나 모아서 어딘가에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여"
일행이 낙담에 빠져 납골당 건물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잡풀 속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하얗고 긴 물체가 언뜻 기자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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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전문과 관련 기사와 사진 등은 18일 발행되는 월간 말 5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준희 기자 peace@ngotimes.net
[출처; 시민의 신문 4-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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