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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분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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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11-30 00:00 조회12,6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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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이 민족통신 운동론에 올라가 수많은 독자들이 열람한 사실을 목격하면서 이북바로알기 운동을 더 열심히 벌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북은 통일의 대상입니다. 통일의 대상인 이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통일로 가는데 어려움에 부딪칩니다. 그래서 저는 이북의 사상철학과 함께 이 주체사회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번 <나는 왜 김일성 주석님을 존경하는가>에 이어 이번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보는 글을 써 여러분들에게 소개하여 드립니다. 편견없이 읽어보아 주기 바랍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어떤 분이기에
김일성주석의 후계자가 되었는가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42년 생으로 나보다 4살 위니까 나와 거의 동년배로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고 보겠다. 나는 종종 내가 살아온 지난 58년을 되돌아보면서 나와 동시대를 산 김정일위원장의 생애와 나의 그것을 비교해 보고 한 사람의 일생이 가정배경과 지향하는 사상, 교육, 그리고 나라의 체제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 지를 깊이 생각하곤 한다.

나는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황해도 연백평야에 태어나 평범하게 살다가 5살 때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모님을 따라 남으로 피난하여 경기도 김포군에 살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며 구호물자를 준다고 하여 장로교회에도 나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편 김정일위원장은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하여 생명을 내놓고 무장투쟁을 벌리고 있던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관인 김일성장군을 아버지로, 항일유격대원이었던 김정숙여사를 어머님으로 항일무장투쟁의 혈전장인 깊은 백두산 속에서 태어났다. 항일유격대원들의 축복을 받으며 또한 항일혈전의 총성을 자장가로 들으며 그는 유아시절을 보냈다. 말을 배우면서 그는 유격대원들의 노래를 따라 배우기 시작하였고 걷기 시작하면서 나무로 만든 총과 칼을 갖고 놀기 시작하였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유격대원들로부터 김형직 할아버지와 김철주 삼촌을 비롯한 애국적 가족에 대한 이야기, 혁명적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 일제의 잔악성, 산 속의 맹수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용맹하게 성장하였다. 백두산 밀영의 그의 생가에 가보면 나무로 만든 권총과 검, 쌍안경과 조선지도, 등이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다가 그가 겨우 만 3살을 넘겼을 때인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해방된 조국에 항일유격대와 함께 들어왔다. 내가 어린 시절에 벌거벗고 굴렁쇠를 굴리고 예성강변에 나가서 게나 잡고 있을 때 김위원장은 어린 시절이지만 일개인의 경험을 넘어 역사적인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새 조국건설에 여념이 없는 아버지를 자주 만나지 못하고 주로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다. 어린 그는 자주 항일전에서 어머니와 함께 싸웠던 여전사들이 방문와서 들려주는 유격대원들의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1946년 토지개혁과 새 노동법이 시행되자 아버지는 현지지도차 농촌에 자주 나가셨다. 그때 그는 아버지와 종종 동행하곤 했다. 어머니를 따라 보통강 개수공사에도 직접 참여하여 잔심부름도 해주고 어머니와 함께 공장과 여러 건설현장을 둘러보며 조선민중들의 혁명적 투쟁을 직접 목격하곤 했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겨우 7살 되던 1949년 어머니가 뜻하지 않게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잃은 크나 큰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엄혹한 전쟁의 시련 속에 빠져들었다. 해방 후 겨우 몇 년간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행복한 시절은 가고 아버지와도 헤어져 시련에 찬 전화의 나날을 어린 여동생과 함께 보내야 하였다. 그는 6.25전쟁시 압록강이 멀지 않은 장강군 썰매골에 피난 가서 2년 남짓 살았다. 이처럼 김위원장의 생의 초기에는 한 개인의 역사는 물론 한 민족의 긴 역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격렬한 동란과 변화와 비약의 나날이었다.

3년간 치른 전쟁의 후과는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북 민중은 거의 초토화된 조국땅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어섰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 투쟁보다도 더 간고하고 치열한 투쟁이었다. 미국은 100년 내에 이북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총 대신에 망치와 낫을 들고 건설과 생산을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어린 그는 이러한 조국의 끊임없는 투쟁과 험난한 노정 속에서 그 모든 고통과 재난을 몸소 온 몸으로 안고 성장했다. 그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의 어린 넋을 차지한 것은 역사의 격류, 시대의 폭풍을 헤치며 주체적으로 싸우는 조국의 용맹스런 민중이었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자신이 역사 그 자체인 아버지 김일성주석님의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어린 그 자신도 조국의 번영과 민중의 행복을 위해 끝까지 투쟁해야겠다는 강한 정신력과 투지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애국 애족적인 혁명적 인생관과 역사관을 형성하는데 근본 바탕이 되었다.

어린 김정일위원장이 역사의 한가운데서 폭탄을 수도 없이 쏟아 부은 미국에 증오심을 가지고 전후의 복구건설에 돌을 나르며 한창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나는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김포 어느 시골에 파묻혀 누님에게 옛날 이야기나 듣거나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거나 학교공부에 열중할 뿐이었다. 나는 왜 전쟁이 일어나 내가 고향을 떠나 타향인 김포에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순진하게 지냈다. 나는 때로 미군들이 지나가며 던져주는 빵이나 껌, 사탕을 받아 맛있게 먹었고 미국이란 훌륭한 우방국이고 이승만대통령은 국부로서 훌륭한 애국자로만 생각하였다.
한편 전후 복구건설을 거쳐 사회주의 건설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에 김정일위원장은 이미 어린 티를 벗어나 평양 제4인민학교와 제1중학교에서, 그 다음에는 남산고급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정신적 성장이 더욱 왕성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감수력과 탐구력이 가장 왕성한 이 시기에 학교 교과과정은 물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서적들을 많이 읽었으며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집의 서재에 진열되어 있던 김주석이 쓴 저서들과 맑스-레닌주의 고전들과 동서의 고전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었다.

초중고 시절에 그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철두철미한 주체의식과 창조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모친의 영향이 컸고 나이가 들면서 부친의 혁명적 실천을 몸소 옆에서 목격하고 배우게 되었고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민족자주를 지키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싸운 조선민중의 영향이 그의 어린 감수성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그였지만 언제나 민중의 지도자인 아버지를 단지 자신만의 사사로운 육친으로 대하지 않고 혁명의 수령으로, 조선의 최고지도자로 보고 그에 의하여 영도되고 있는 조선민중의 위대한 힘을 보면서 자신도 혁명적 주체의식을 키워나갔다. 사회주의 건설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고등학교시기에 민청조직원으로 봉사노동에 참가하여 항상 가장 힘든 일을 맡아 열심히 일하였다. 이처럼 그는 어려서부터 집단주의 사회의 조직 속에서 조직적인 실천활동을 통하여 지덕체를 겸비한 조직의 인물로, 투철한 혁명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김위원장이 중고시절에 이미 맑스-레닌주의 고전을 읽으면서 유물변증법에 바탕한 과학적인 세계관과 역사관을 연구하고 주석의 노작을 독파하면서 맑스-레닌주의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사람중심의 주체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형성하고 있을 때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나와 이남의 젊은 중고생들은 어떤 세계관과 역사관을 형성하며 성장했던가? 초강대국인 미제국주의와 맞서 용감히 민족해방전쟁을 치른 이북의 민중들과 더불어 어린 김위원장이 한편으로 공부하면서 또 한편으로 파괴된 땅을 복구하고 있었을 때 나를 포함한 동시대의 이남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남의 초중고 학교교육이라는 것이 주로 개인이기주의를 조장하는 경쟁위주의 교육으로 학교가 상급학교의 입시를 준비하기 위한 강습소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역사교육이라는 것이 이북처럼 과학적인 사관을 확립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주로 입시시험에 대비하여 연대나 외우고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이나 외우고 기껏해야 역사적 교훈을 암기하고 시험이 끝나면 잊어버리게 하는 교육이었다. 역사적 관점을 주는 사관을 처음부터 고의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식민지 교육이었다. 모든 교과내용 자체 속에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색체가 있는 내용들은 배제되었고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월북한 작가들의 글은 교과서에서 배제되었다. 친일, 친미 사대사관에 사로잡힌 역사가들이 사대사관에 입각하여 써놓은 교과서를 공부해야 하였다. 가치관이란 남을 누르고라도 공부를 잘하여 우수한 상급학교를 나와 출세하면 된다는 양육강식의 논리였다. 학교의 질이 이름있는 상급학교에 얼마나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순진한 학생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체 이웃들의 아픔에 무관심하여야 했고 조국애와 민족애를 키울 수가 없었으며 사회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하고 단지 일류학교의 진학과 개인출세에나 몰두해야만 하였다. 심지어 선거 때마다 선생들이 노골적으로 이승만의 삼선을 선전하면 그대로 믿고 부모들을 설득하곤 하였다.

이처럼 나와 나의 동시대 젊은 초중고등학생들은 이러한 경쟁위주의 개인주의 가치관 속에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입시위주의 기능적 학교교육에 만족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그래도 무엇인가 가치관을 주는 곳을 찾게 되었는데 그게 주로 관념론에 기초한 숙명론을 설교하는 종교단체들이었다. 나는 기독교회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나마 사랑과 희생의 가치관을 배웠고 구속사관을 배웠다. 지루한 학교교육을 참을 수 없어 하던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는 영원한 진리를 배우겠다고 학교수업이 끝나면 야간에 성경고등학교에 나가 1년간 성경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그것도 고교입시 준비로 중단되었다. 나의 진리에 대한 갈급한 욕구를 채워줄 곳은 이남에 없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세계사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를 깊이 하려고 했으나 대학입시 준비로 그것도 적당히 하다 그만두었다. 학교에서 가치관과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시간을 빼앗기다가는 상급학교 입시시험과 취업시험에 실패하게 되니 인생의 낙오자가 되기 쉽다.

나는 초중고 때 기독교에 몰두했고 대학에서는 실존주의에 빠져 니체, 키엘케골, 사르트르, 루이제 린저, 전혜린 등에 몰두하며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헤매었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말하는 존재는 사회역사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존재의 속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았자 허무할 뿐이었다. 나를 만족시켜줄 책들은 그 당시 모두 땅에 묻혀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특수한 극소수의 의식화 그룹의 운동권학생들을 제외한 일반 학생들의 의식세계라는 것이 뻔한 것이었다.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식으로는 사회와 역사를 과학적인 안목으로 볼 수 없었으며 왜 이남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왜 군사독재가 계속되는지, 왜 경상도 출신들만 대통령이 되는 지를 알 길이 없었으며 더구나 사회주의 집단주의 사회인 이북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반공을 국시로 삼고 북을 적으로 간주하는 정부의 시책대로 따르는 것이 일반 학생들의 생각이었다. 진보적인 강의를 학교에서 들을 수가 없었으며 맑스나 레닌의 서적들, 북에 대한 서적들, 사회주의에 관한 어떤 서적들을 나는 미국오기 전까지 이남에서 본적이 없었고 심지어 듣지도 못했다.

1975년 미국에 유학와서 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신학교에서 해방신학을 연구하다가 맑스주의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사회과학적인 안목이 너무 부족한 것을 알고 신학교를 마치자 시카고 대학의 사회과학부에 입학하여 박사과정을 하면서 주로 철학, 정치학, 사회학, 등 사회과학분야의 과목을 택하여 공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체철학을 비롯한 많은 북의 서적들을 접하고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카고 대학의 극동전문도서관의 코리아 부문에 들어가 보면 반은 남한 서적들이고 반은 북한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최소한도 미국은 형식적으로는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어 모든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고 맑스주의도 철학의 한 강좌로 들을 수 있었다. 피상적이나마 맑스-레닌주의에 한동안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교육도 역시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역시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교육내용과 방법론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학문의 자유란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였다. 내가 사회주의를 이해하고 이북을 올바로 보기 시작하게 되고 그것이 글 속에 나타나기 시작하자 여러 측면에서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미국대학의 현실이다.

나는 대학을 떠나 직장을 찾다보니 나를 받아주는 곳이 그래도 진보적인 미국교회였다. 나는 목회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통일운동에 열심히 참석하였고 유롭에서 개최되는 북과 해외학자들과의 대화 모임과 일본에서 시작된 통일심포지움에도 참여하여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체사상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삥삥 돌아 그제야 비로소 우리 민족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변혁사상인 주체사상을 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솔직히 말하여 그때서야 처음으로 이북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사상에는 공백이 있을 수 없다는 김위원장의 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된다. 내가 오래동안 나를 지배해온 관념론에서 탈피하여 맑스주의에 몰두하다 보니 그것이 전부인 줄로 생각되고 결국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교조주의적으로 이북사회주의를 보고 비판하게 되었고 맑스주의의 물질경제중심의 시각으로 보니 주체사상도 관념론처럼 여겨져 한동안 주체사상을 무시하고 지냈다. 모든 사상을 주체적 관점을 가지고 객관화해 볼 수 있는 능력있는 훌륭한 스승과 지도자를 옆에 모시지 못하면 누구나 나처럼 주관주의와 교조주의, 독단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김정일위원장은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옆에 사상의 대가이며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아버지 김주석이 있었고 유명한 맑스-레닌주의 학자들과 변혁이론가들이 항상 그의 옆에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석님의 노작을 독파하고 주체적 입장을 분명히 세운 후 맑스-레닌주의도 사회과학적으로 비판하며 받아들일 것은 받아드리고 버릴 것은 버리는 주체적 세계관을 확립했는데 나는 40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하고 에돌아 와서야 그러한 주체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참된 조국을 갖지 못하고 올바른 지도자와 스승을 만나지 못할 때 개인이 아무리 성실하게 진리를 찾고 가치를 추구하며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려고 해도 허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김위원장이 어린 시절부터 비범하고 뛰어난 인격을 형성할 수 있었고 고매한 주체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형성하게 된 것은 물론 뛰어난 자질도 타고 낳았지만 이북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사상이 정당하였고 그에 기초한 위대한 부모님의 가정교육과 교육제도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청년 지도자로 성장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김정일위원장은 모스크바대학에서 유학제의가 있었으나 그것을 포기하고 1960년 9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의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대학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61년 여름부터 대학 당세포의 당원명부에 등록하고 초급당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과정안에 따라 평양방직 기계제작소에 나가 생산실습을 비롯하여 여러 건설현장에 나가 직접 노동도 하였다. 그는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참여하여 얻은 경험에 기초하여 청년사업과 학교교육사업, 사회주의건설사업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발전시키는데 관심을 돌리었다.

60년대만 하여도 이북사회에서도 아직 대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 교조주의와 사대주의적인 학습기풍이 짙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나의 실례를 들면 조선역사 강의시간에 한 학생이 민족을 정의하는 데서 스딸린이 그의 저서 [맑스주의와 민족문제]에서 민족을 특징짓는 징표를 언어, 지역, 경제생활의 공통성, 그리고 문화생활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성격의 공통성을 들면서 그 중 어느 한 요소만 빠져도 한 민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민족을 자본주의의 산물로 본 스딸린의 견해에 따라 조선민족이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형성된 것처럼 주장했다. 주석님의 주체적 관점에 정통하였던 대학생 김위원장은 민족을 이루는 기본징표는 주석님의 가르침대로 핏줄과 언어, 지역의 공통성이며 이중에서 핏줄과 언어의 공통성은 민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로 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민족이란 "핏줄과 언어, 지역의 공통성으로 하여 결합된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이라고 명쾌하게 정의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중앙집권제가 강하였고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에서 이미 통일국가를 형성한 우리 민족은 이미 반만년의 유구한 기간 한 핏줄을 타고 같은 언어를 쓰면서 한 강토 안에 살아온 한 민족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그가 대학생이 되어 겨우 한 달이 되는 1960년 10월4일에 있은 일이다.

그는 그 당시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 속에 만연되어 있던 고전을 숭배하는 사상관점을 결정적으로 극복하고 주석님의 혁명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현실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믿었다. 혁명과 건설에 나서는 모든 이론 실천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맑스-레닌주의 고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조선혁명의 경험을 담은 주석님의 노작에서 찾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였다. 이후 그는 선행고전에만 매달리는 <고전병>을 극복하고 주체적 입장에 확고히 서도록 학생들을 교양하여 주석의 노작을 기본으로 책을 많이 읽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몸소 동료 학생들과 함께 사회주의 건설장에도 자주 나가 노동과 실천활동 속에서 자신을 단련시키면서 주석님의 노작을 재음미해 보곤 하였다.

그는 청년운동의 본질은 수령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계승하고 완성해나가기 위한 운동이라고 인식하고 청년운동의 중요한 임무는 청년들 속에 정치사상교양사업을 강화하여 청년들을 혁명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진 참다운 주체형의 혁명가로 키워 그들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선봉대, 돌격대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라고 믿고 자신이 그 선두에 서서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이미 고등중학생 때부터 그랬지만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자주 주석을 따라 현지지도에 동행하면서 주석께서 어떻게 민중을 대하며 민중을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를 배웠다. 그는 주석과 함께 농촌과 바다, 광산뿐 아니라 육해공군을 방문하여 군사에 대하여도 배웠다.

나는 1992년 어느 날 가족 방문차 나의 고모가 사는 황해도 배천에 내려가 며칠간 지낸 일이 있다. 하루는 리 당비서가 내가 심심할 터인데 배천읍에 있는 온천장에 가자고 하여 거기에 가서 뜨거운 온천물에 목욕을 하고 나와 옷을 입으면서 우연히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고 놀랐다. 어린 티가 나는 김정일 위원장이 대학생 때 이곳을 현지지도하기 위하여 내려온 주석과 함께 온천장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처럼 김위원장은 어려서부터 주석과 현지지도의 길에 자주 동행하면서 주석님식 사업방법을 직접 배웠다. 그는 "수령님식 사업방법은 인민대중의 이익을 첫 자리에 놓고 모든 것을 그에 맞게 처리해 나가며 언제나 인민들 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모든 문제를 그들의 지혜와 힘에 의거하여 풀어나가며 인민대중을 더욱 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로 키워나가는 참다운 공산주의적 사업방법"이라고 정식화하였다.

대학시절에 그는 많은 저작활동을 하였는데 이 시기 그가 공헌한 사상이론활동의 중요한 분야를 보면 역사발전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서 수령이 절대적 지위에 있으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수령론, 수령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발전시킬데 대한 이론, 과도기와 프로레타리아 독재론, 사회주의의 완전승리문제를 비롯한 공산주의 전략이론,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국방 등 사회주의 건설이론 등의 분야들이다. 대학시절에 그가 쓴 중요한 논문, 담화 등의 저서로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본노선을 이해하는 데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대안의 사업체계는 독창적인 사회주의 경제관리체계], [현대제국주의의 특징과 침략적 본성에 대하여], [우리당의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견결히 옹호하자], 그리고 그의 졸업논문인 [사회주의건설에서 군의 위치와 역할] 등이 있다. 그는 대학생활에서도 철저히 개인이 아니라 조직의 인간으로, 충실한 노동당원의 일원으로, 주석의 동행자로 성장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는 주체위업의 훌륭한 계승자로 성숙해 갔다.

후계자로 등장

1964년 봄 대학을 졸업하자 김위원장은 6월19일부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지도원으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여 과장, 부부장, 부장 등을 거쳐 체계적으로 직위 승진하여 마침내 1974년 2월13일 노선노동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항일혁명 노투사인 정치위원의 제안으로 마침내 김주석의 동의를 얻어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추대되어 명실상부 후계자로 되었다. 그는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기 전부터 주석께서 늘 염려하는 영화예술분야에 정력을 쏟아 문화혁명을 일으켰으며 사상이론활동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기었다. 김위원장의 사회주의 사상이론 활동사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그가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1950년대 후반기, 대학생이었던 6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사상이론 활동에서 기본은 사회주의 개척자들인 맑스, 레닌, 엥겔스, 등의 사상이론을 원리적으로 습득하고 해부학적으로 분석종합하여 모든 종래의 이론들을 주체적 입장에서 조선혁명을 중심에 놓고 조선혁명의 이익에 맞게 고찰하고 분석평가한 점이었다.

그는 1966년-1969년 기간에 그 당시 저명한 학자들과 함께 맑스, 레닌, 엥겔스가 저술한 주요 고전들을 이북의 구체적인 현 실정과 주석의 노작에 기초하여 자주적으로 하나하나 전면적으로 분석, 검토, 평가하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그에 기초한 유물사관의 제한성을 파헤쳐 내었다. 그들이 정립한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유물론의 원리와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는 변증법의 원리는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으며 물질세계의 일반적 특성을 밝히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그는 우선 그들의 공적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철학적 원리로서는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해명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음을 역시 지적하였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밝히고 그에 기초하여 인간이 세계에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세계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원리까지도 밝혔어야 했다고 그는 진단하였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를 사회역사에 구현한 유물사관은 물질적 부의 생산방식이 사람들의 사회생활을 규정하며 사회제도의 교체를 조건짓는 주된 힘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러한 사회역사원리도 한계성이 있음을 그는 지적하였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이 유물사관은 사회를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으로 갈라보고 사회적 존재에 생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생산방식 같은 물질적 조건이 들어가며 사회적 의식에 인간의 의식이 포함된다고 보았지만 사회적 의식을 사회적 존재의 반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인간을 사회생활의 물질적 여건을 규정하는 주인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물질적 조건이 인간을 규정하는 주인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유물사관에서는 사회적 운동이 일어나고 추진되는 원인과 동력이 생산력과 생산관계, 토대와 상부구조, 이 두 가지의 상호작용에서 찾았음을 그는 지적하였다. 이런 데로부터 사회의 발전과정을 생산력의 발전에 의하여 생산관계가 변하고 그에 상응하게 상부구조(의식형태와 정치구조)가 변하는 과정으로, 즉 낡은 생산방식이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교체되어 가는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았는데 여기에 유물사관의 한계점이 있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그는 위에 지적한 맑스-레닌주의의 물질경제관계중심의 제한성과 한계성을 깊이 분석한데 기초하여 모든 문제를 인간, 민중을 중심에 놓고 사상이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모든 사상이론 전개의 출발점과 기초를 인간의 본질적 속성 및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두고 모든 사상이론을 인간, 민중의 이익에 맞게 세계를 개조하는데 복무하도록 풀어나갔다. 그는 인간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지닌 것으로 하여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차지한다는 주체철학의 원리를 밝히고 민중을 사회역사운동의 주체로, 인류사를 자주성을 쟁취해 나가는 운동과정으로, 그 운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상의식이라는 주체의 사회역사원리를 체계화하였다.

1974년 2월 정식으로 김주석의 후계자가 되자 그는 우선적으로 선행한 기성이론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적 태도를 극복하고 주체적인 관점과 방법론을 가지고 주석의 변혁사상과 이론의 역사적 지위를 정립하고 그 과학적 당위성과 실천적 정당성을 새롭게 정식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물질중심,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원리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던 기성의 맑스-레닌주의 사회변혁이론과는 틀이 다른 민중중심의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새로운 주체의 사회변혁이론을 정식화하였다. 김위원장은 지금부터 30년 전인 1974년 2월 19일 전국 당선전일꾼들 강습회에 나가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기 위한 당사상사업의 당면한 과업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이 역사적인 토론에서 김일성주석의 혁명사상에 대한 과학적인 정식화가 비로소 이룩되었다. 그는 여기서 주석의 혁명사상이 주체시대를 반영하여 나온 새롭고 독창적인 사상으로 주체의 사상, 이론, 방법의 체계로 구성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주석의 혁명사상의 역사적 근원, 구성체계와 내용, 인류사상사적 지위을 밝히었다.

주석의 사상이 주체의 사상, 이론, 방법의 체계라는 정의에는 그것이 그 구성체계에 있어서 사람중심의 세계관인 주체사상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민중을 중심에 놓고 전개한 혁명이론과 민중의 역할에 기초한 전략전술, 그리고 민중을 혁명과 건설에 조직동원하는 영도방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이처럼 그는 주석의 사상을 심화발전시켜 그것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하여 주석의 혁명사상을 사상의 최고봉으로 올려 놓았다.

사회주의의 수호자

김위원장이 1974년 후계자가 된 후 이룩한 업적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은 이북의 민중중심의 우리 식 주체사회주의를 그 어떤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도 잘 막아낸 점이었다. 1980년대 중반기 이후 구 소련에서 수정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제국주의의 <평화적 이행전략>에 구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나라들이 연이어 붕괴되었다. 이미 국정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김위원장은 이러한 상황에 맞서 주체사회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북의 우리 식 사회주의를 철통같이 옹호보위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하였다. 그는 후계자로 된 후 광범위한 근로민중을 수령과 당의 두리에 한 사상,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친 일심단결의 사회주의로 강화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이북 사회주의의 주체인 수령, 당, 군대, 대중을 하나의 강력한 통일체,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조직하였으며 그 일심단결의 힘으로 핵문제를 걸고 이북 사회주의를 붕괴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를 제때에 파탄시키고 오히려 화를 복으로 바꾸어 상호 자주적 입장에서 외교관계를 맺는 방향으로 노력해 왔다.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붕괴된 1991년 12월 25일을 전후하여 김위원장은 이북의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저작활동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저작들은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 1991년 5월5일], [사회주의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노선, 1992년 1월3일], [혁명적 당건설의 근본문제에 대하여, 1992년 10월10일], [사회주의는 우리 인민의 생명이다., 1992년 11월14일], [우리 인민정권의 우월성을 더욱 높이 발양시키자., 1992년 12월21일],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 수 없다., 1993년 3월1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1994년 11월1일], 등이 있다. 동구와 소련의 사회주의가 붕괴되자 서방과 이남의 상당수의 학자들은 체제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종국적으로 패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미국무성 기획실 차장이었던 프란시스 후꾸야마를 비롯하여 여러 저명한 서방의 학자들은 소련과 동구의 붕괴는 사회주의 사상의 종말을 의미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고 쾌재를 불렀다.

한편 이러한 동구와 소련의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본 김정일위원장은 그 붕괴의 원인을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나누어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우선 그 붕괴는 "제국주의자들과 반혁명세력의 공모결탁의 산물이며 제국주의의 사상문화적 침투와 우경기회주의 사상의 부식작용의 결과"라고 지적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전체주의>요, <병영식>이요, <행정명령식>이요 궤변을 퍼뜨리며 사회주의 나라 인민들 속에서 사상적 혼란을 일으키게 하면서 침략과 압력, 봉쇄와 회유를 비롯한 갖은 파괴공작을 직접 감행하는 한편 혁명의 상층부에 나타난 타락분자들, 변절자들을 저들의 앞잡이로 이용하여 사회주의를 붕괴에로 이끌어갔다고 그는 진단하였다.

그러나 그 몰락의 근본적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부, 즉 주체적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였다. 그는 소련이 붕괴된 지 겨우 9일이 되는 1992년 1월 3일 [사회주의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로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위업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한 위업이며 인류가 사회주의에로 나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역사발전의 법칙"이라고 선언하였다. 왜냐면 "사적소유와 그에 의하여 산생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는 불피코 사회를 적대되는 계급으로 분열시키고 계급적 대립과 사회적 불평등을 가져오며 인민대중에 대한 소수 지배계급의 착취와 압박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에...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로부터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 사회주의, 공산주의에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인류사회발전의 역사적 총화"라고 그는 지적하였다[사회주의는 과학이다, 1944년]. 그러면서 그는 소련과 동구사회주의의 좌절의 내부적 원인 중 첫째는 "역사의 주체인 인민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이해하지 못한 데로부터 사회주의 건설에서 주체를 강화하고 주체의 역할을 높이는 문제를 기본으로 틀어쥐고 나가지 못한데" 근본원인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고 역사의 추동력이지만 민중을 자주적인 사상의식으로 끊임없이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여 수령과 당의 두리에 굳게 묶어 세워 수령, 당, 대중, 군대를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일심단결시켜야만, 즉 주체를 강화시켜야만 사회주의 건설을 성공시킬 수가 있었는데 동구와 소련식 사회주의는 그렇게 하지 못하여 붕괴되었다는 것이 김위원장의 분석이다. 두 번째 내부 원으로 그는 소련과 동구의 당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질적 차이를 보지 못하고 사회주의의 근본원칙을 일관성 있게 견지하지 못한데" 있다고 진단하였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허용하지 않고 사회적 소유를 고수하고 민중의 자주적 요구와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고 구현해 나가야 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동구와 소련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가 좌절된 세번째 내부 원인은 "사회주의나라 당들 사이의 관계에서 자주성에 기초한 국제적 연대성을 강화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고 그는 분석하였다. 각 나라의 당들 사이에는 큰 나라 당과 작은 나라 당, 역사가 오래된 당과 그렇지 못한 당이 있을 수 있으나 높은 당과 낮은 당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사회주의혁명이 나라와 민족을 단위로 하여 진행되는 상황에서 각 나라와 민족은 자기의 실정에 맞게 노선과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자주적으로 관철해 나가야 하는데 일부 큰 나라에서는 자기를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중앙>으로 자처하면서 다른 나라 당들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면서 자기의 그릇된 노선과 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압력을 가하고 내부문제에 까지 간섭을 하곤 하였는데 이것이 사회주의나라들 사이의 단합을 약화시켜 결국 단결된 힘으로 그들의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와 맞설 수 없게 되어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가 붕괴되었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이러한 소련과 동구사회주의의 몰락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에 기초하여 그는 사회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있을 수 있으나 역사발전의 방향이 달라질 수 없으며 과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고 국제적 판도에서 사회주의 재건을 위하여 각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1992년 4월 김주석의 80회 생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70 개의 세계 여러 나라 공산당, 노동당들과 진보적 정당들의 대표들이 평양에 모여들었다. 김위원장은 이러한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제2의 <공산당선언>이라고 일컬어지는 <평양선언>을 채택하도록 힘썼다. 1992년 4월20일 세계 70개 공산당, 노동당, 진보적 정당들의 48명의 당수들과 대표들이 <평양선언>의 첫 서명자로 되었다. 이 선언은 오늘의 시대가 "자주성의 시대"임을 천명하고 사회주의위업은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위업"이라는 것을 명시하면서 사회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민중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고 모든 것이 민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진정한 민중의 사회"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선언은 사회주의를 재건하여 발전시키기 위하여서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자체의 실정과 민중의 요구에 맞게 노선과 정책을 입안하고 그것을 민중의 힘에 의거해 실천해 가야한다는 것, 항상 혁명적 원칙을 견지하고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 세계의 모든 진보적 당들이 자주성과 평등의 원칙에서 친선, 단결, 협조,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 등을 명시하였다. 여기 평양선언에 명시된 내용들에는 바로 김위원장이 소련이 붕괴된 1991년을 전후하여 쓴 저서들에서 강조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그의 후원아래 채택된 평양선언으로 국제사회주의 재건운동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평양선언에 서명한 정당 수는 270여 개로 알려져 있다.

선군정치의 영도자

1994년 김주석 서거 후 몰아닥친 자연재해와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연합세력의 고립압살정책으로 이북은 참으로 어려운 위기상황에 봉착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한 몸에 안고 1994년도 다 저물어 가고 1995년이 밝아오는 그 시각 김위원장은 금수산기념궁전에 누워 계신 주석께 인사를 드리고 층계를 내려오는 그 길로 <다박솔 초소>라고 불리우는 조선인민군 한 구분대를 찾아갔다. 주석 서거 후 맞는 첫 해의 첫 혁명활동의 시작이였던 이 초소의 방문 길에서 바로 역사적인 주체사회주의 수호의 <선군혁명영도정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시각부터 늘 평양에 있는 당중앙위원회의 집무실이 아닌 최전선, 최전방에 사무실을 두고 김위원장은 주체사회주의를 지키고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혁명성과 조직성, 규율성이 가장 강한 집단으로서 사생결단의 무기인 총을 잡고 변혁의 제일선에 선 군대를 사상의지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임을 간파하고 군대를 변혁의 기둥, 주력군으로 내세워 정치를 하는 선군영도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혁명의 주력군으로 여겨져 왔던 노동계급의 선봉적 역할도 사회주의 혁명사상으로 무장된 군대의 강력한 후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동구와 소련의 붕괴의 예를 들어 강조하였다. 역사의 교훈은 군사력을 단지 국가의 방위력만이 아니라, 당과 수령의 유일적 영도밑에 당과 수령의 위업을 받들고 수행해 나가는 군사력으로, 제국주의, 지배주의 세력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침략책동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위업을 밀고 나가는 군사력으로 만들며 군사력에 대한 영도를 사회주의위업수행의 기본정치방식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그는 진단하였다. 사회주의위업수행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군사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분석을 한 김위원장은 획기적인 <선군영도정치방식>을 제창함으로서 사회주의위업의 궁극적 승리를 담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선군정치방식이란 간단히 말하면 혁명과 건설에 나서는 모든 문제를 군사선행의 원칙에서 풀어나가며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 기둥으로 내세워 사회주의위업 전반을 밀고 나가는 정치방식이라고 그는 정리하였다. 군사선행은 선군정치방식의 주되는 내용으로 군사를 국사중의 제일 국사로 내세우고 군사력 강화에 선차적인 힘을 넣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 땅에 제국주의가 남아 있고 침략책동이 계속되는 한 군사중시, 국방중시는 국사중의 국사로서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적 노선"이라고 지적하였다. 사회주의 위업은 제국주의와의 장기적인 대결 속에서 제국주의의 항시적인 침략위업 속에서 수행되며 제국주의의 침략책동을 제압하는 과정 속에서 승리적으로 전진하며 제국주의의 멸망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완성된다는 것을 그는 강조하였다. 예리한 정치감각과 비상한 군사적 예지, 전당, 전군, 전민을 단결시키는 조직적 수완을 지닌 김위원장에 의해 사회주의 위업수행의 독특한 정치방식인 선군정치방식이 제창됨으로서 제국주의의 멸망과 사회주의위업의 궁극적 승리의 확고한 담보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지도사상인 선군사상의 창시는 오랜 혁명투쟁의 경험과 혁명군대를 최전선에서 직접지휘하고 있는 최고사령관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이 90년대 초에 제기한 무모한 핵 소동도 , 제2의 조선침략전쟁 계획인 <5027작전계획>을 강행하려 했을 때에도, 1998년 지하 핵 시설 의혹소동, 광명성 1호 위성발사 후 일어난 미사일 소동, 월드컵 축구대회가 끝나자 곧 발생한 서해바다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도, 그리고 최근에 부쉬 행정부가 제기한 선 핵 포기를 위한 새로운 핵전쟁계획인 <신작전계획 5026>을 짜놓고 이남에 최첨단 군사장비들을 대량 끌어 드리고 계속 대규모 전쟁연습을 하고 있는 지금도 세계의 유일 초대국으로 자처하는 미국이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김위원장의 독특한 선군정치의 생활력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군정치로 이남을 포함한 전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억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반도에서 벌써 몇 차례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이북뿐 아니라 이남도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남도 이북의 선군정치의 덕을 보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강성대국건설의 설계자

이북을 방문하여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한결같이 이미 이북은 <군사의 강국>, <정치의 강국>, <문화의 강국>을 이룩했으나 조그마한 나라가 자체의 힘으로 <자주국방>을 이룩하려고 하다 보니 군사력 강화에 인적, 물적 자원을 너무 집중하게 되어 민중의 생활을 높일 수 있는 경공업이 뒤졌는데 곧 그것도 극복하고 경제강국이 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니라 90년대 후반의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이겨낸 이북 민중들의 신심에 찬 고백이다. 김위원장은 "이 하늘 아래 이 땅 위에 주체사상이 전면적으로 구현된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하여 민족의 존엄을 온 세상에 높이 떨치려는 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우리 군대와 인민의 한결같은 열망"이라고 말했다. 강성대국건설이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면에서 이북을 높은 경지에 올려 세우기 위한 역사적 과업으로서 이미 이북은 여러 획기적인 일들을 많이 하였다. 김위원장은 유일 초대국인 미국과 사생결단의 각오로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던 그 엄혹한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에 한숨만 쉬며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민군대를 앞장세우고 군대와 민중을 일심단결시켜 구월산, 칠보산, 용문대굴을 비롯한 많은 명승지들과 명소들을 민중의 휴식터로, 관광지로 새롭게 꾸리고 중소형발전소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전기문제를 일부 풀고, 토지정리사업을 대대적으로 벌려 강성대국건설의 기초를 다졌다.

결론

역사엔 우연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김위원장의 혁명위업의 계승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단지 우연하게 김주석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물론 위대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혁명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유리한 객관적 조건을 갖고 있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처음부터 초급당에서부터 중앙당에 이르기까지 조직의 한 성원으로 조직 속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면 그가 단지 주석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노동당에서 후계자로 추대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북은 사회주의 집단주의사회이고 제국주의연합세력과 첨예한 대결상태에 직면한 역사적 상황에서 후계자의 선택문제는 사회주의혁명이 계속 살아 남느냐, 말아 먹히느냐 하는 사활적인 첨예한 문제이기 때문에 후계자는 객관적으로 사상과 인품, 업적, 등 자격을 충실하게 갖추어야 하고 조직 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김위원장이 사회주의 집단주의 사회의 사회정치적 생명체인 주체의 최고뇌수, 중심으로 당에서 추대되었다는 그 사실자체가 무수한 혁명활동들을 통과하면서 후계자로서의 자질이 갖추어졌음을 당과 민중 앞에 검증과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집권당의 대표자를 교체하는 그런 계승이 결코 아니다.

조선혁명의 위대한 수령으로 조선혁명의 미래를 가장 염려하던 김주석도 생전에 김위원장이 혁명위업의 계승자로서 사업을 잘 영도하여 나가기 때문에 자신께서 조선혁명의 전도에 대하여 마음 든든히 생각하고 있으며 오래 동안 혁명을 해온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흐뭇해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김정일동지가 우리의 혁명위업을 훌륭히 계승해 나가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도 모든 일이 잘 되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잘 되어 나갈 것입니다. 김정일 시대는 오늘도 영광스러운 시대이지만 앞으로는 더욱 찬란하고 융성번영하는 시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 혁명의 전도는 참으로 양양합니다."

주석께서 이렇게 김위원장을 후계자로 신임할 때는 그를 민중의 걸출한 영도자로서 얼마나 굳게 믿었으며 얼마나 큰 긍지와 확신을 안고 사회주의 조국과 민족의 운명, 주체혁명위업의 장래를 그에게 전적으로 맡기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주석께서는 늘 불철주야로 밤잠을 못 자며 민중을 위하여 혼신을 바쳐 일하고 있는 김위원장을 옆에서 주시하면서 "그도 인간인데 휴식이 필요하다"고 그의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김위원장은 열심히 건설과 혁명활동을 하였다.

주석이 서거한 1994년에는 이미 김위원장은 1964년 6월19일 중앙당의 지도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만 30년 동안을 당에서 활동한 경험을 쌓았고 1974년부터 후계자가 되어서는 실제로 김주석의 일을 도맡아 국정전반의 일을 만 20년간 돌본 원로 정치인으로 성숙해 있었다. 올해 2004년 6월19일로 만 40년 동안 노동당을 지도해온 그는 오늘 이북을 "자주의 성새," "불패의 사회주의 보루"로 만들어 그 존엄과 권위와 위용을 세계에 높이 떨치게 하고 있으며 이북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을 날로 강화시키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주로 김위원장의 생애, 사상, 업적, 인품을 혁명위업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간단히 소개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늘 물질화폐관계로 사람을 대하며 항상 돈 돈하며 자본주의방식으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는 나와 재미동포들, 그리고 이남의 동포들은 이북의 수령론, 수령의 계승문제를 이해하기가 너무나 힘들다고 생각한다. 6.15공동선언이 선포되어 남북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나 이제 겨우 4년을 넘긴 상황에서 오래 동안 반공, 반북 교육을 받아왔고 지금도 계속 중요언론의 똑 같은 공세 속에서 살고 있고 우리 생활이 주로 핵가족 중심의 개인주의 생활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북의 집단주의 사회주의체제를 이해하기 힘들며 더구나 사회정치적 생명관에 입각한 이북의 후계자 계승문제를 이해하기 힘들다. 김위원장 자신도 그의 경험에 비추어 1987년 [주체의 혁명관을 튼튼히 세울데 대하여]에서 "부르죠야 민주주의적 견지에서는 혁명적 수령관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 자신도 처음에는 수령론과 계승론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김위원장이 1982년에 쓴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지적했듯이 인간의 "낡은 사상잔재는 매우 보수적이고 집요하다." 그래서 사상개조는 그가 강조하듯 "복잡하고 장기성을 띠는 사업이며 정력적으로 투쟁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으로 사상개조를 통한 인간개조는 결국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각한 혁명"인 것이다. 정권을 잡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여 생산력만 높이면 물건을 생산해 내듯 인간도 혁명적 인간으로 자동 생산해 낼 수 있었다면 동구와 소련의 사회주의가 붕괴되지 안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변혁운동은 한 세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변혁을 성공시키려면 물건을 생산해 내는 데(생산력의 증강)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변혁적 인간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데(혁명역량의 강화) 온갖 관심과 정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사실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일보다 변혁적 인간을 재생산해 내는 일이 더 힘든 일이다. 그러기에 변혁의 계승문제는 심각한 또 하나의 혁명인 것이다. 주체사상에서는 이것을 주체의 계속적인 강화와 그 역할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나 자신도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독교에 인류구원의 방법이 있는 것으로 믿고 미국에 와서 장로교신학교를 3년간 다니며 거기서 해방신학에 접하면서 처음으로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하여 알게되었고 차차 사회과학적인 안목이 생기면서 이북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분단의 원인을 남북의 이념차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세계지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조국통일운동에 뛰어 들어 이북을 드나들면서 조금씩 이북의 주체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금 나는 아직 주체의 사상, 수령론, 계승론, 집단경제체제, 등 주체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문턱에 도달하였다. 겨우 초보단계이지만 이 단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나는 내부적으로 많은 심각한 사상투쟁을 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이북 주체사회주의의 정당성에 대하여 초보적이나마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일본 총련동포들의 애국, 애족심 덕택이었다. 어찌하여 일부를 빼고 모두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출신인데 일본 총련동포들이 이남이 아니라 이북을 자기의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이북의 공민이 되어 인종차별이 극심한 일본 땅에 군대만 없는 나라를 건설하고 북의 주체사회주의를 지원하고 있는가. 나는 총련본부와 조선대학교와 여러 초중고등학교들, 지부들을 방문할 때마다 눈시울을 적시며 그들의 애국애족심에 감탄하곤 하였다. 일본 총련동포들의 존재 그 자체 하나로도 이북이 지향하는 주체사회주의가 민족사적인, 더 나아가 인류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1989년 이래로 수십 차례 이북을 드나들었다. 내가 이북을 드나들면서 무엇인가 배우려고 하고 좋은 점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 것은 단지 이북이 내 고향이고 이북에 무슨 이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북이 지향하는 주체사회주의가 내 개인의 인생관에도 맞고 민족사적으로도, 인류사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듯이 나는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나 나름대로의 예배를 보고 온다. 나는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이북사회 전체가 하나의 큰 교회처럼 느껴 졌다. 나는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변혁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래를 실컷 부르며 은혜를 받기도 하고 학자들과 대화를 하며 내 고루한 생각을 교정하기도 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감동을 받아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내가 자본주의 본산지인 미국에서 자본주의식으로 살면서 변혁의식이 약해진 것을 다시 북돋우는 시간을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가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북은 나에게 아직 신비한 나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지배층들이 자기들의 지배논리인 거짓의식을 부식시키기 위하여 국가의 모든 이념기구들(학교, 종교기관, 법률기관, 언론, 출판)을 총동원하고 있는데 이북에서는 국가의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집권당, 군대, 대중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제국주의의 지배논리와 자본주의의 모순, 종교의 숙명론과 식민지교육이론, 등 내가 비판하고 싶은 거짓의식의 총체를 앞장서서 비판하고 그 모순을 극복한 한 계단 높은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변혁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에 이러한 나라가 어디에 또 있는가? 나는 종종 나의 동료들로부터, 심지어 나의 일부 동지들로부터 너무 이북에 치우치지 말고 중립성과 객관성을 가지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글을 쓰라는 충고를 받곤 한다. 그러나 치열하게 피터지며 인류의 적인 제국주의와 대항하여 조그마한 나라가 자주성을 지키려고 싸우고 있고 인류의 희망인 사회주의를 지향해 나가면서 온갖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남이 포기한 조국통일을 위하여 온 힘을 쏟고 있는데 내가 어찌 중립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북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북이 완전한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북에서도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사회로 가는 과도기로서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차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 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일부 일꾼들의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 낡은 사상, 등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그리고 이북 사람들이라고 특별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조선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그들이 역사로부터 부여받은 인간, 민중, 인류가 나아갈 생명의 길인 자주의 길과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가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는 한 순진한 인간으로서, 종교인으로서, 철학자로서 <이북의 인간형>을 좋아한다. 나는 이북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것을 보기 전에 오염되지 않은 이북의 인간들을 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이북의 인간은 <원초적인 인간>으로 가는 과정의 순수한 인간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사유재산을 모르고 집단주의사회에서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살면 저런 <이북형 인간>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맑스는 <소외되지 않은 인간>을 원래의 <종으로서의 인간>(human being as species)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런 인간형을 나는 이북에서 발견한다. 그들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어 다시 물질화폐관계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역사의 발전일까. 나는 깊이깊이 이북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경이로움에 휩싸이곤 한다. 그러면서 그들처럼 나도 조선민족으로 태어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본다. 물질하나만으로 세상을 평가하는 것은 속은 보지 않고 겉만 보는 것과 같다. 이북사회를 여러 각도에서 심도 깊게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대국들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당당하게 자기의 할 소리를 하며 사는 자주의 나라 이북은 나에겐 경이로운 조국이다. 나는 이러한 경이로운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모든 능력을 다 바치려 한다.

나의 이 초보적인 이북에 대한 이해가 이남과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해외동포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끝]

2004년 6월26일
로스엔젤레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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