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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미술 기지 《만수대창작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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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1,1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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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대창작사는 1937년 6월에 조형 미술 창작의 능률화와 융성을 위해 통일적이고 종합적인 미술 창작 기지의 필요성을 김정일이 제안한 것으로 착공되어 대형 미술 종합 기지로써 건립.


내가 만수대 창작사를 처음 방문한 것은 지난해 11월.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춥지는 않았으나 제법 쌀쌀한 겨울 바람이 일기 시작하던 그런 날이었다. 짧은 체류 기간에 쫓기는 일정 가운데서도 나는 줄곧 만수대창작사에 대한 크나큰 기대와 호기심에 차 있었다. 그것은 우선 내 자신이 평생 화도의 길을 걷고 싶은 한 사람의 미술 학도라는 것이 이유가 되겠지만 또한 나는 그런 특수한 명칭의 미술 집단에 대해 일찍이 그 어디서도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술 학교도 아니며 또한 미술 연구소도 미술 박물관도 아니며 더욱이 미술 공장(?)이랄 수도 없겠다. 아무튼 세계 그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대형 미술 집단 정도로 들어왔다. 나는 그 규모라든지 내용 그리고 거기에서 창작을 해내고 있을 미지의 작가들에 대해 제멋대로 상상에 상상을 해보았다.

지난 40여 년 우리에겐 다만 문화 예술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는 《공포의 나라》로만 부가돼 왔던 그 나라에 예술이 있고 미술이 있으며 작가들이 있다면 과연 그 어떤 것들이겠는가. 그들이 지향하는 예술관은 어떠한 것이며 작가들의 창작 생활은 어떠하며 그들의 창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형식은 또 어떠한 것인지….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만수대창작사의 문을 두드렸다. 어디를 가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던 평양시 거리거리를 이리저리 돌아 마침내 만수대창작사 앞에 당도했을 때 마저 내 시선을 끌며 나타난 것은 인상적인 큰 철책 대문이었고 한편에 보초병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엔 왠만한 대학 캠퍼스가 아니면 그 어느 정부의 청사로 보일 만큼 큰 건물들이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사이사이엔 화단과 수목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무거운 철책 문이 서서히 열리고 우리 차가 창작사 안에 들어서자 사장인 리처흡 선생께서 벌써부터 나와 계시다가 손님을 환대해 주셨다. 먼저 차 대접을 받으며 나는 리 사장님으로부터 만수대창작사에 대한 개괄적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만수대창작사는 1973년 6월 김정일이 조형 미술 창작의 보다 능률화와 융성을 위해 통일적이고 종합적인 미술 창작 기지의 필요성을 역성, 제안하면서 착공, 그의 절대적 지원과 지도하에 마침내 세계 앞에 자랑할 만한 대형 미술 종합기지로써 건립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만수대창작사의 연륜으로 말하면 내년도(1989)면 그 30돐을 맞게 되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녔다고 한다. 만수대창작사엔 ①조선화 ②유화 ③벽화 ④조각 ⑤도자기 ⑥수예 ⑦공예 ⑧출판화 ⑨도안, 이렇게 9개의 창작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록 재직자의 수는 순수 작가 400인 그리고 종업원이 2,000명이라 했다.
엄청난 숫자의 미술 집단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종합 《미술 기지》라 했는데 그러면 이들은 《미술 대군》이라 해둘까. 다시금 《우리는 집단 생명체입니다》 그나라 어디에서나 곧잘 듣게 되던 이 말이 실감이 간다. 때때로 이 만수대창작사를 찾는 외국인들이 이 거대한 창작 기지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특별히 프랑스의 저명한 여류화가 밀로크리스티는 이와 같은 말을 남기고 갔다 했다.
《만수대창작사는 대단히 훌륭한 집단이다. 창작 수준이 세계적 수준이다. 프랑스에서 조선미술전시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돌아가면 이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
먼저 안내 받은 곳은 조각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것은 조각 스튜디오라기보다 천정이 까맣게 높은 실내 체육장 만하지 않은가. 그들은 마치 금년도(1989) 7월에 있게 될 13차 세계청년 평화대회에 임하여 거대한 군상들을 제작 중에 있었다. 어린 소녀를 모델로 세워 놓고 오뉴월 풋과일처럼 건강하고 청순한 소녀들의 집단 체조 광경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풍만하고 청순한 지중해 여성들을 주로 표현해 낸 불란서 조각가 마이욜(Maillol)을 연상케 했다. 장, 청년 작가들이 한데 어울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제작에 열중하고들 있었다. 나는 잠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내 신분도 잊고 그 창작의 열기, 작업의 희열 속에 그리고 같은 길을 걷는 그 동지애 속에 하나가 되어 보고 싶었다. 지나간 40여 년, 그 누가 만들어 칭칭 감아 주었던가. 이데올로기니, 반공이니 분계선이니 하는 이 천근만근 무거운 옷일랑 넝마조가인 양 훨훨 벗어 던지고….
내가 궁금해하던 미술대학 이야기를 나눈 것은 여류 조각가 정윤애(32세)씨의 개인 스튜디오에서였다. 한 나라의 대표적 여류 작가로 보기엔 그녀는 너무도 겸손했고 검박한 차림이었다. 그 어느 산간벽지에 수줍고 이름 없는 한 여교사라도 대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미술대학의 교과 과정을 물었다.
우선 미술대학은 전문부 3년 본과 4년으로 분류돼 있는데 성적이 우수한 경우 중학 3년부터 전문부에 입학, 수학할 수 있다 한다. 미대 학부로는 ①조선미술학부 ②민족미술학부 ③회화학부 ④출판화학부 ⑤산업미술학부 ⑥공예학부 ⑦조각학부 ⑧기초교육학부 등으로 나뉘고 교과목으로는 ①조선미술사 ②주체미술사 ③문예사상 ④세계미술사 ⑤미학개론 ⑥도학(투시법) ⑦소묘 ⑧채색 ⑨해부학 ⑩화평회 ⑪미술개론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이 배당되는 실기 그 외 년 2회 갖게 되는 현지 실습 등이라 했다.
나는 결례를 무릅쓰고 북한 미술대학에서도 데생력을 키우기 위해 누드 모델을 세우는지 물어 보았다. 그들은 《물론이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해 주었다. 또 하나 내 학창 시절에 그랬듯 데생 시간이면 희랍, 로마 시대 사람들 즉 쥴리앙이니 아그리빠니 비너스 따위의 서양 조각들을 가져다 놓고 피사체로 사용하는지 질문해 보았다. 그들도 한가지였으나 그것을 폐지하고 우리 조선인 석고상을 만들어 대치한 것이 최근 3년 전 일이라 했다.
조선화, 서양화, 도예, 자수의 순서로 각기 개인 스튜디오를 잠시잠시 방문하면서 나는 조선화의 김병희, 서양화의 김덕조, 도예의 임사준, 자수의 리원인 등 그 나라의 최고명예칭호(인민 또는 공훈예술가라 칭함)를 받고 온나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몇 분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엔 모스크바, 스웨덴, 폴란드 등지의 해외 유학 경력을 가진 분도 있었고 그들은 모두가 국내외에서 빛나는 수상 경력의 소유자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겸손했고 예술가다운 자유인의 푸근한 인간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불시에 나타나 그들이 정숙해야 할 작업 시간을 깨뜨리고 번거로움을 끼치는 이방인인 나에게 그들은 옛 친구라도 대하듯 극히 자연스런 거동으로 스스럼없이 반겨 주었다.
나는 그 나라에서의 예술가들에 대한 처우에 대해 또 물어 보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부러울 정도였다. 작가들에겐 우선 기본적인 봉급이 기계적으로 지급될 뿐아니라 창작을 위한 과외 비용에 대해서도 일체 국가에서 부담해 주며 작품을 창작했을 때 국가에서 고가로 매입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평양 한복판에 그처럼 위세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 만수대창작사만 보더라도 그것을 증명해 준다. 평양 땅에 떨어지면 그 시각부터 가는 곳마다 부닥치는 도처에 거대한 조각상들, 대형벽화 모자이크, 김일성 주석의 전기적 그림, 풍경화, 궁전 같은 대리석 건축물들 그리고 휘황찬란한 샨데리야들, 곳곳에 기념탑 그리고 원색의 눈부신 무대 미술 등등. 그 나라는 참으로 미술이 판치는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랴. 생각컨데 이 지구상 그 어느 나라에도 이같이 미술에 힘을 모으는 나라도 드물 것이리라. 뜻밖의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 나라의 미술을 어느 만큼 대해 본 셈이다. 성실을 다하고 애정을 다한 사실주의에 무르익은 경지를 보았다. 노대가님의 절묘하고도 우아한 우리의 고려청자를 거기에서 보았고 다수의 청년 작가들 작품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부르짖는 남한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이 소재로 담긴 것을 보고 우리가 하나임을 재확인했고 광명한 미래의 조국을 향해 사회주의 낙원을 구현하기 위해 너도 나도 건설에 떨쳐나선 인민들이 대형 모자이크에 담긴 것을 보았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관공소에서 가는 곳마다 우뚝우뚝 서 있는 대리석 혹은 화강암의 힘찬 조각상을 대하여 그 나라의 저력을 감지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무언가 하나 내게 짚히는 것이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들 미술 가운데서 20세기에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추상 미술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거리낌없이 몇몇 미술인들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해외의 근대 혹은 현대 미술을 접할 기회는 없겠는가?》 《추상 미술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청년 화가는 이렇게 답변해 주었다. 자기는 모스크바에 유학했었기 때문에 해외 현대 미술을 얼마든지 대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작가 내면의 독자성과 진실을 표현해 내자면 사실주의에 먼저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어느 중년의 여류 미술인은 단호히 이렇게 잘라 말했다.

《우리는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합니다. 즉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주의적 내용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창조하는 투쟁, 착취 계급과 착취 사회 반대 투쟁, 근로 인민의 이익 옹호, 모든 사람이 다같이 잘 살도록 하는 투쟁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선 다시는 예술이 유산 계급, 착취 계급 같은 특수층의 전유물이나 그들의 권력과 향락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예술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참 예술의 창조자도 향유자도 인민 대중이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러자면 모든 인민 대중의 심리와 정서 생활 감정에 맞아 그들의 절대적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나아가서 그들을 고무해 줄 수 있는 예술이어야겠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예술을 구현해 내는 데는 오로지 민족적 형식에 의한 우리 조상들이 남겨 놓은 찬란한 미술 유산을 보다 계승 발전시키는 일반이 필요합니다.》

자유라는 미영 하에 단연 개인주의가 우세했고 특별히 서구 사회에 대산 사대주의 세상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나에게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아주 새롭게 들렸고 생각할 것을 안겨 주었다.
이제 끝으로 이번 전시회를 마련하기까지 내 나름의 적잖은 애로들이 있었던 것을 여기에 적고자 한다. 우선 이번 전시회에 선을 보이게 될 소수의 작품들이 전시회를 위해 따로 준비되었던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만수대창작사 참관 시 즉흥적으로 현지에서 몇 점을 청구하여 받아온 것임에 대해 그곳 작가들에게나 이제 관람해 주실 여러분들에게 죄스럽게 생각하면서 먼저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또한 연약한 한 여자의 손짐으로 꾸려와야 했기에 양적으로도 너무나 빈약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너무도 오랜 세월 피차의 얼굴을 대해 보지 못한 데 대한 목마름과 그리고 오해와 의구심을 푸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성급한 마음에 나는 앞뒤를 가릴 여유 같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수송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렇찮아도 몇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고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므로 진땀이 흐르는데 북경에서 비행기가 연발하는 바람에 다음 비행기에 오르는 것이 여간 급하지 않았다. 헐레벌레 다음 비행기에 오르려는 출발 5분 전에 그만 나의 소중한 짐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거리의 천사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이렇게도 생면부지의 이국인 아저씨들은 나를 도와주고 우리 민족의 화해를 위해 도와주었는데 막상 이 소중한 것을 안고 내 동포들에게 돌아와 이것을 내놓았을 때 나는 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거부당하는 설움을 맛보아야 했다.
전시회를 위해 이곳 저곳 화랑들을 찾아 다녔나 북한의 작품들이라 하여 그 어디서도 꺼리는 눈치였고 결국은 매번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마지막 찾아간 곳이 전시 시설이 전혀 돼 있지 않는 화랑 아닌 《선한사마라아인》 교회다. 나는 북한 작가들의 작품을 안고 왔지만 그들의 미술 작품만 안고 온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뜨거운 동포애와 절절한 통일 염원을 안고 온 것이다. 삼척동자도 일어나 노래를 부르라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지만 통일은 아직도 이렇게 멀기만 한 것인가. 깊은 탄식의 숨이 절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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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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