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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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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2,61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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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차가운 달빛을 길잡이 삼아 우리 세 사람은 캄캄한 밤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여보시욧!》 별안간 어둠속 저쪽에서 불 같은 호령 소리가 들렸다.

《지금 몇신 줄 아시욧! 당신 통행 금지도 몰랏? 좀 가야겠소.》 어디로? 꼼짝없이 하룻밤 감방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할말이 없는 아버지가 주춤하고 있는데 순경 아저씨는 이 통행 금지 위반자들을 다시 살펴보니 두 어린 것이 아빠 손목을 잡고 오들오들 떨고 있지 않는가. 《에잇 참! 앞으로 주의하시욧!》 훈시 석방인가 보다. 그후 단 한 번도 효도해 보지 못한 우리 두 남매로부터 아버지가 자식덕(?)을 본 건 오직 그 시절 몇 번인가 있었던 이런 일을 당할 때 뿐이었으리라. 그 당시엔 극장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극장에선 베짱이었고 제멋대로였다. 상영 시간에 맞춰가도 소용 없는 것이 아무 때나 시작하고 아무 때나 끝냈다. 딱딱한 벤취 같은 의자에 앉아서 이제나 저제나 어서 화면에 무엇이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그 무한정의 시간, 평생을 두고 그 시간처럼 지루하던 시간을 다시 체험하지 못했다. 그 시절엔 아직 흑백 영화에서 총천연색 영화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나 보다.
한해에 단 몇 편 정도 총천연색 연화가 오면 극장이 초만원을 이루곤 했다. 그리고 인질로 붙들려있던 아릿다운 공주를 구출해 내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기사님께서 말을 타고 달려오기 시작하면 장내에 우레 같은 박수의 물결이 와 하고 터져났다. 그리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극장문을 나서면 《엥》하고 울리던 사이렌 소리, 비비안리의 영화 《애수(Waterloo Bridge)》에선 그것이 오히려 낭만적인 소리로 들리던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가 그 시절 어린 소녀였던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나는 그 소리만 나면 전신에 소름이 끼쳐와 울곤 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아버지는 어딘가 피카소를 닮은 천재형 괴짜 아버지라고. 또 누구는 말했다. 평소 멋쟁이로 불리는 아버지가 선글라스를 걸고 명동 거리에 나타나면 《방금 김포공항에 도착한 헐리웃 스타 같다》라고. 나는 말하리라. 아버지는 개화기에 희생자이며, 증인이라고. 일제 말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수입된 서양의 무성 영화는 선천적으로 예술적 천재형인 아버지를 완전 매료, 황홀케 했다. 그러나 《집안 망할 서구 문화》가 문중에 들어오는 것을 죽기로 배격하고 가문을 사수하고자 하셨던 나의 조부와 아버지 사이의 갈등과 싸움은 아버지의 전인생을 지배케 한 운명에 치명적이었다.
그레타 가르보, 바렌티노에 현혹되어 밤마다 무성 영화를 보고 온 죄과로 집에서 쫓겨나 차거운 이슬을 맞으며 공원 벤취에서 날을 새기 일쑤였다. 푼푼이 돈을 모아 사들인 값진 서양 악기 바이올린을 조부께서는 그 무슨 흉물인양 도끼로 깨부수고 두 부자가 함께 통곡을 하며 울었다 한다. 하필이면 신동이라 하여 가장 편애하던 그 자식이 서양 귀신에 붙들린 게 너무도 절통하셔서, 마냥 신기롭고 황홀한 서구 문명에 비교할 때 우리의 후진성이 너무도 역겹고 슬퍼서….
젊은 날 아버지의 꿈은 영화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무참히 좌절되고 남은 건 만 가지 상처뿐…. 그 아버지의 교육 지론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새 시대가 온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 대비할 새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가 우리 두 남매를 두고 택한 대표적 교과 과목이 고전 음악 감상과 영화 예술이었다. 그는 또 말했다. 《영화속에는 모든 것이 포함돼 있다. 거기엔 역사, 지리, 음악, 미술, 문화 그리고 어학까지. 그러면 없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산수뿐이다. 그러니 그 과목 하나만 가정 교사를 두어 가르치면 그만이다》라고. 아버지의 이런 새 시대 새 교육론(?)은 일반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아 원만한 인격으로서 평범속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어머니의 주장과 때때로 마찰을 일으켰는데 그 또한 지금은 아련한 옛 추억이 되었다.
결국 우리의 교실은 영화관과 고전 음악 감상실이었다. 아버지는 영화 《라프소듸》를 보여 주며 동생에게 장래 음악가의 꿈을, 화가 로트랙의 생애를 그린 영화 《무랭루쥬》를 보여 주며 나에게 화가의 꿈을 심어 주려 하셨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그림첩 표지엔 파리의 화가촌 몽마르트 거리 풍경을 잡지에서 오려 L여주셨다. 사람은 교육받고 길들여진 대로 형성되기 마련. 그 아버지의 그 자식이 어찌 영화 애호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화를 애호하다 못해 나는 때때로 영화와 현실을 혼돈할 때마저 있는 모양이다. 살면서 현실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럴 때 내 사이에 펼쳐진 아름다움은 언제나 곧 영화 화면으로 변하고, 살면서 내 인생이 너무도 슬프고 괴롭게 느껴질 때 나는 잠시 내 생을 극장 화면에 옮겨 놓고 나는 빠져나와 관객이 되고 싶을 때가 있으니….

그런데 우리는 오래 전부터 풍문으로 들었던 말이 있다. 거기가 사람 사는 데가 아닌 그 어떤 암흑의 세계이며 불모의 땅인 양 들어왔고 그렇게 믿어 왔던 그 땅에도 영화 예술이 있다는 얘기를. 그리고 그 나라 높은 위치에 있는 그는 열광적인 영화 애호가일 뿐 아니라 그 나라 최고의 영화 이론가이며 지도자라는 것을. 또한 세계 제1위인 프랑스 다음으로 큰 영화 문헌고가 그 땅에 있고 세계 영화의 멕카라 헐리웃 못잖은 거대한 촬영소와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고. 그러나 또 한편 사람들은 말해 왔다. 사회주의 공산 진영의 여러 나라들이 영화 제작을 활발히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산당의 사상 교육을 위한 선전 매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따라서 그와 같은 영화 예술이라면 그것은 영화라 하지만 영화가 아니고 그런 영화에 종사하는 영화인 또한 영화 예술인 아닌 다만 선전 매체의 소도구에 불과할 것이라는 등 이런저런 떠돌아 다니는 소리와 나의 갖가지 상상이 범벅되어 내 의구심은 더해만 갔다.
지난해 1988년 11월 5일, 마침내 나에게도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촬영소에 들어서자 먼저 바른쪽 본관에 그 나라 대표들로 둘러싸인 김 주석의 동상이 힘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느 두메산골 풍경 같은 야외 촬영소의 툭트인 전망이 시원스러웠다. 그 나라의 대표적 남우 김준식 씨와 여우 김옥씨 씨가 나를 반겨 주었다. 그들의 해설을 들으며 그 어느 촌락같기도 하고 그 어느 이국의 거리같기도 하며 또는 그 어느 도시같기도 한 야외 촬영소를 둘러보았다.
1947년 2월에 창건, 1,500명의 종업원을 두었다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는 과연 듣던대로 그 규모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한쪽에 중국 거리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곳엔 구한말 서울 거리 그리고 일본 동네 그리해서 한옥이 있는가 하면 양옥이 지어져 있고 가정집이 있는가 하면 거리에 상점, 음식점, 이발관, 파출소 그리고 교회까지 서 있었다. 그리고 또 인상적인 것은 언덕 저 너머에 고려대학과 연세대학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있는 것이고 또 하나 시간 관계로 실물을 보지는 못했으나 촬영소 내에 기관차가 들어올 수 있어서 촬영진들이 교외로 나갈 때엔 그것을 직접 이용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재밌고 이색적인 발상이었다.
그외 최신 시설이 갖춰져 있는 대형 실내 촬영장, 녹음실 등 두루 참관한 뒤 촬영소 내 접대시에서 나는 몇몇 영화인들을 접견, 대화의 새간을 가질 수 있었다. 거기엔 황송하게도 그 나라 최고 명예직인 인민공훈의 칭호를 받은 영화인들 몇 분이 와 계셨는데 특별히 왕년의 명배우 문예봉 선생, 절세 미모의 여우 김정화, 어딘가 매력적인 문제아 제임스딘을 느끼게 하는 귀국 재일 동포 김윤홍 그외 김룡린, 김선영 희극 배우 김세용씨 그리고 연출가 김덕규 씨 등 여러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런데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우선 북한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도 꼭같이 느끼는 바이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먼저 그들의 겸손함과 소탈한 인간미에 감동을 받았다. 더욱이 그 누군가 풍자했듯 《20세기의 영웅은 영화배우》라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자본주의 서방 세계에서의 영화인의 위치란 돈과 인기가 먼저 문제가 되고 세속적인 화려함을 누리며 턱없이 오만하기가 이를데 없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내가 북한의 스타들을 대했을 때 그들에게서 전혀 그와 같은 번들거리는 허세나 오만 같은 걸 읽어 낼 수가 없었다는 거다. 그것은 그들과의 대화에서 더욱더 그와 같은 첫인상이 감상적 판단이 아님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영화사에 길이 빛나며 여왕처럼 군림할 문예봉 여사, 그 자신의 생애 자체가 바로 드라마로써 한많은 우리나라의 수난사를 대변하는 것 같은 그분께서 이렇게 위엄있게 말씀해 주셨다.
《칼은 육체를 죽이고 돈은 정신을 죽인다. 이런말이 있지요. 참 자유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남는 것은 재물이 아니고 어떻게 인간답게 살았느냐 입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자기 민족과 나라 위해 얼마나 봉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녀는 다만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연기인의 위치에 머무는 것 같지 않고 그 어떤 지성의 높은 고지에 도달하여 고고히 서 있는 것 같은 박력과 고상함이 느껴져 왔다. 마치 세기의 거장 조각가 로뎅의 손을 빌어 하이얀 대리석으로 쪼아낸 듯한 우아한 미녀, 그러면서도 학같이 고아하고 덕스런 우리 조선의 고유한 미인상이 바로 그런 것일까 생각케 하는 절세 미녀 김정화, 내가 왕년의 명우 그레타 갈보에게서 느낀 바와 같은 무언가 저 세속적 욕망이나 저속한 감정에서 전혀 초월해 있는 것 같은 체념과 무관심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녀, 그래서 해외 영화제에 나갈 때마다 인기를 한몸에 모은다는 그녀, 김정화에게 나는 무엇인가 듣고자 했다.
그런데 잠시 나는 또 뭔가 잘못된 듯한 감이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한 나라의 대스타로서의 거동이라니. 그 어느 봉건 시대 규방 속에 숨어 있던 여인네가 마지못해 끌려나와 앉은 듯 그 다소곳하게 수줍어하는 태도라니…. 그녀는 속삭이듯 차분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상품화하는 걸 가장 나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흥미거리로 만들지 않고 교양자적 입장에서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구경한다 하지 않고 영화를 학습한다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해답을 주고 방향 제시를 해주고 삶에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는 영화가 되도록 노력합니다. 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감화를 줄 수 있고 우리 연기인들 또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또 물었다. 소재 선택의 자유가 있는가. 그리고 공산당 나라에도 사랑 영화를 만드는가. 우리가 북한의 제임스딘이라 별명을 붙여 주었던 김윤홍 씨가 약간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듣자니 바깥에서 우리더러 자유가 없다란 말을 자주하는 모양인데 정의와 진실에 복종하는 것을 자유가 없다 할 수 있습니까?!》
나는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다시 소재 선택과 사랑 영화에 대한 물음에 연출가 김덕규 씨가 답했다.
《소재 선택에 대하여 우린 전혀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드는 영화치고 근본 사랑이 주제가 되지 않는 영화란 없습니다. 거기에 먼저 나라 사랑도 있고 부모자식간에 사랑도 있으며 친구와 친구 사이의 사랑 그리고 물론 남녀간의 사랑도 있고 결국은 모두가 사랑이 주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왜냐하면 사랑이야말로 모든 인간사의 근본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나는 그들에게 외화를 접할 기회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우선 세계적 수상작품은 무엇이나 다 보고 있으며 흘러간 명화 또한 얼마든지 영화문헌고에서 뽑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굳이 그 제목들을 들어 보자고 했다. 모두들 한두 개씩 말했다. 《무도회의 수첩》, 《자전거 도적》, 《외인부대》, 《피와 모래》, 《마음의 행로》, 《십계》, 《가스등》, 《안나 카레리나》 등등 얼마든지, 그리고 근자의 것으로는 《미션》, 《간디》, 《마지막 황재》 등이라 했다. 연출가 김덕규 씨가 한마디 덧붙혔다.
《영화는 대체로 이태리 것이 우수하고 진지하기는 불란서의 것이며 소련 영화도 우수하게 본다. 그러나 요즘의 외화에서는 별로 내용적으로 배울 것이 없다고 본다. 다만 기술적인 문제에서 더러 참고할 뿐이다.》라고.
나는 또 물었다. 해외 영화제에 참가한 북한 영화들에 대해서. 1972년 체코 까르로비바리 영화제에 출품, 격찬을 받아 이례적인 특등 제도까지 만들도록 하여 최고 특등상을 수여한 《꽃파는 처녀》는 이제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한다. 그외 《피바다》, 《샛별》, 《또다시 전선으로》, 《소년 빨치산》, 《봄날의 눈석이》, 《도라지》 등등이 소련 타스켄영화에 축전, 인도 국제영화 축전, 신생 제3세계 영화 축전 등등에서 다수의 수상 경력을 들려주었다. 다시금 회중의 누군가 들려주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평론가 삐에로메씨엥이 최근에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방문, 극찬해 주었던 일을. 그는 대표작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을 감상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인간을 진지하게 그리고자 했다는 점, 그리고 여러분들이 예술 앞에 진지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관객들의 순간적 자극이나 말초적 쾌감을 노린 흥행 위주의 폭력이나 벗기는 영화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방황하는 현대인의 잃어버린 도덕과 인간성을 되찾고 퇴폐일로를 달리는 세기말적 사회를 정화해 줄 수 있고 방향 제시를 해줄 수 있는 차원 높은 영화가 요구되는 시대가 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북한 영화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이런 것을 왜 세계 앞에 소개하지 않았는가. 내가 소개 하갰다》라고.
끝으로 나는 여기에 내가 만난 북의 영화인들 모두의 가슴에 그에 대한 감사와 존경으로 가득차 있는 그 나라 김 주석과 김정일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옮기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두 사람은 평양 교외의 100만 명의 땅덩어리를 내어 거대한 촬영소를 건립케 한 후 1947년 창립이래 김 주석은 20여 차례, 김정일은 320차례 촬영소를 찾아 현지 지도를 했다 한다. 특별히 영화 예술론을 한권의 책 (김정일 저, 《영화예술론》)으로 묶어낼 만큼 전문가 이상의 영화에 대한 사랑과 천재적 재능 그리고 식견의 소유자인 김정일은 매 영화 제작 때마다 친히 나와서 일일이 자상한 지도와 함께 영화인들의 온갖 편의와 고무를 위해 최선의 후언을 아끼지 않는다 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맘껏 제작에 전념할 수 있는 우리는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겠냐고 그들은 입을 모아 합창을 하듯 말했다. 그 중 누구는 이런 얘기도 들려주었다.
그는 《좋은 영화만 만드시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내가 세상 끝에라도 가서 그덩이 안아다 드리겠소》 이렇게 고무해 주십니다.
또 어느때는 한참 영화 제작 중에 그 중 누군가가 병상에 눕게 되면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고수하면서도 작업을 중단케 하고 다만 그가 쾌차하도록 언제까지나 배려해 준다 했다. 또한 노장 연기인들에겐 정규적으로 보약을 보내 주기도 하고 친히 환갑, 진갑 잔치까지 베풀어 준다 했다. 그들간의 이런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했다. 듣자니 그들의 관계는 높은 권좌에 있는 그들과의 그 어떤 상하 관계가 아닌 한가족이나 혹은 동지간의 끈끈한 인정의 관계로 느껴졌다.
우리는 이런저런 영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했다. 헤어지는 시간이 그렇듯 아쉬울 수가 없다. 그 어느 옛 친구, 동지들이 수년만에 만난들 이같이 기쁘고 훈훈한 인정의 꽃을 피울 수 있으랴. 북의 사람들, 그들은 한 번 만나면 우리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인정의 화인을 찍어주는 이상한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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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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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북한영화에 나온 미녀여배우들 자본주의국가의 사람들기준으로 보자면 그저 평범한 이웃집누이같은 용모를 지닌 사람들이 주류다!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특히 1960년대~1970년대 북녘영화를 유쿠나 토도우에서 중국어더빙으로 많이보는데 미녀여배우? 단한명도 없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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