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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청년 첼리스트 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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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5-18 00:00 조회14,505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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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 나뭇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조롱길을 덮고 있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쓸쓸하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석양의 낙엽 모습은 쓸쓸하다.
바람에 불릴적마다 낙엽은 상냥스레 외친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올,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리라.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다.
바람이 몸에 스민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첼로 소리는 저 낙엽진 숲으로 우리를 유인하는 소리, 사색의 호숫가로, 환상의 안개 속으로 그리고 저 장미빛 불타는 노을진 언덕으로 우리를 소리, 그 아름다움은 저 《좁은문》의 알리사처럼 고고하고 정숙한 여인네의 우아한 자태같고 그의 언어는 시를 穗 소리, 그 빛깔은 저 옛성터를 뒤덮은 담쟁이와 그리고 전설을 머금고 있는 이끼 같은 것 그것은 결코 금강석의 휘황한 빛이 아니라 비 내리는 밤거리 졸고 있는 가로등처럼 몽롱한 진주빛을 피고 있다. 첼로의 정열은 차라리 붉다 못해 검게 질리고 뜨겁다 못해 매운 저 으스스한 가을날 한 움큼의 빨간 고추 같은 것. 그러나 그의 울음은 과묵한 사나이의 눈물, 천 년의 침묵을 깨트리는 바위의 절규 때문에 그가 흐느끼면 우리는 견딜 수 없다. 첼로는 자랑하기 좋아하는 종달새가 아니요, 겸손하고 다소곳한 비둘기, 그의 맛은 찬란한 크리스탈의 포도주 같지 않고 해묵은 골동 그릇에 정좌하고 마시는 동양차의 그윽한 맛, 첼로의 기쁨은 축제의 환희가 아니라 저 심산유곡 수도자가 마침내 도를 터득했을 때 그가 받아 누리는 남모르는 희열 같은 것, 언제라도 그에게 돌아가면 청춘의 어리석은 정열과 방랑의 길에서 만신창이로 돌아온 우리를 그처럼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그리고 조용히 타일러 주는 속삭임 같은 것,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때 불꽃 튀는 벽난로 곁에서…. 음악을 연연할 때 그것은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 지금도 첼로만 보면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옛 연인이라도 만난 듯 가슴 설레임을 가누지 못한다.

1989년 4월 나는 제3차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그것은 로스엔젤레스의 두 음악인을 인솔하여 제7차 4월의 봄 예술 축전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2인의 음악인을 대동하여 참가했던 예술 축전이었지만 그것은 상당히 의미 깊은 일이었고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해마다 평양에서 열리는 《4월의 봄 예술 축전》은 이미 7회에 이르렀고 그러는 동안 미국과 구라파를 제외한 재중, 재소, 재일 우리 동포들을 포함하여 세계 60여 개의 나라들이 서로 다투어 이 축전에 참가해 온 데 반해 남한 출신의 우리 재미 동포 음악인들로서는 그것이 최초의 축전 참가였기 때문이다. 실은 철두철미 반공 사회인 우리 사회에서 당시 4월의 봄 예술 축전에 대한 정보조차 아는 이는 한두 사람 통일 운동권의 극소수 인사들에 한한 것이었고 북한에 대한 그 엄청난 공포와 선입견 또는 편견으로 하여 그 누구도 선뜻 나서고자 하는 예술인을 찾기란 그리고 또 그들을 설득하는 직업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악인 김동석 씨와 성악가 이길주 씨가 큰 결심과 각오(?)를 다지고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과 동행, 인솔자가 된 것은 지나간 10년 세월 북한과의 통일 대화를 나누어 온 홍동근 목사의 아내이며 그들에 앞서 이미 두 차례의 방북 경험자라는 경력(?)에 의한 것이었던가. 통일 운동 조직체인 조국통일북미주협회로부터 그들 일행의 단장이 되어 주도록 위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굳이 인솔자가 있어야 하고 《단장》이라 칭함은 단 한 사람의 음악인이 참가하더라도 《단장 제도》가 엄수되어야 한다는 주최측의 요구도 요구였고 두 음악인 또한 당시만 하더라도 공포 사회로 알고 있던 북한 초행길에 그들의 공포를 덜어주고 안보를 도와줄 그 누군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앞서 여행길의 피로도 풀 사이도 없이 또다시 부랴부랴 여장을 꾸려야 했다.
그런데 후에 안 일이지만 세 번째 평양길에 오르는 나와는 달리 2인의 음악인이 떠나는 데는 그 준비 수속 절차에 있어서 그리 간단치 않은 뭔가 심각(?)한 바가 많았던 것 같다. 불과 한두 해 사이 성큼 전진된 통일 운동과 이제는 그 누구도 막을 수도 걷잡을 수도 없이 번져가는 통일 열풍, 그리고 그 사이 북한을 오고간 숱한 방문자들로 해서 지금은 그것들이 즐거운 화제거리이며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고 한갖 우스게 소리가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여기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적어 둔다.
국안인 김동석 씨는 북한으로 가기 전에 심각한 가족 회의를 열고 유언에 가까운 마지막 메시지를 가족들에게 남겼다 한다. 즉 현지에 가서 어쩜 그가 당하게 될런지도 모르는 비상 사태 혹은 마지막 길에 대한 대비 혹은 사후 대책인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가족과 사업상의 문제 그리고 재산 정리 따위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하여…. 그 가족 회의의 풍경이란 마치 초상집을 연상케 하는 비장하고도 심각했다 한다. 성악가 이길주 씨의 경우, 한마디로 《테러의 나라》로 《납치의 나라》로 알고 있는 그 땅에 가서 만에 하나라도 닥칠 사태에 대한 대비로써 그녀는 두 가지의 대책을 준비했다. 그 하나가 탈출시의 자금 마련책으로써 가지고 있는 패물 중 가장 값진 것을 택하여 몸에 지니고 떠났다. 다음으로 유사시 미국의 남편과 통하기로 한 SOS(비상신호) 암호다. 《이웃집 중국 사람 내가 떠날 때 위독했는데 괜찮은가?》 그것을 풀이하면 《지금 내가 위기에 처해 있다. 즉시 FBI에 신고, 조치해 달라! OVER!》인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은 현재 북한의 문턱이라 할 북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입국 수속을 밟기 위해 북경에서 하루 이틀 묵어야 했다. 그사이 우리의 모든 편의를 보아주고 안내를 맡아준 박한 대사관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탁트인 그의 자유로운 몸가짐하며 대화 중 간간이 섞어 나오는 유창한 영어하며 한점의 티도 구김도 없는 그 밝은 표정 그리고 미남형의 용모라니, 그는 우리가 이 미국 땅 캘리포니아에서 항시 대하는 우리 주변의 청년이나 조금도 다른 바가 없었다.
두 음악인은 우선 이 청년을 대하는 탄성을 울리며 제1차적으로 그들의 동결된 마음과 초긴장 상태가 어느 정도 풀리고 안심된다는 듯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3인의 결사대(?)가 마침내 평양에 입성(?)했다. 평양 고려호텔로 인도된 우리는 도착하던 그날 저녁 축전 관계 당국 간부들의 저녁 만찬에 초대되어 갔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의 연회석의 그 화기애애함이라니. 그들의 겸손, 소박한 손님 접대의 예절과 함께 시종일관 뜻밖에도 그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재기에 넘치는 세련된 유머에 우리가 심중에 품고 간 그 절대 무장, 초긴장이 너무도 쉬이 거세당하고 맥없이 녹아지는 것 같아 섭섭할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너무 고단하여 더는 공포의 의구심도 지닐 힘을 잃고 물에 빠진 솜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평양의 새 아침이 밝았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우리가 기대(?)했던 암흑 사회, 공포의 도시는 어디로 가고 이것은 웬 꽃천지란 말인가. 4월의 평양은 온통 꽃동네였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연분홍 살구꽃으로 휩쓸고 개나리로 줄짓고 진달래로 뒤덮힌 그것은 바로 꽃의 교향악이었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무대 뒤에는 각 나라에서 모여든 각색 인종의 음악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과 협연 또는 반주를 맡아 주는 북한의 젊은 음악인들도 거기서 만나볼 수 있었다. 그렇찮아도 그 나라 젊은이들을 만나 어찌나 기쁘고 반갑던지…. 그리고 그 순박한 청년들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그들 또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환영해 마지않는 것 같았고 진정으로 나와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고 그리고 공연 사이사이 갖게 되는 대화의 시간을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듯 싶었다. 그들은 주로 기악을 연주하는 음악인들이었다.
한데 그 가운데서 유별히 마음이 가고 시선이 가지는 한 청년이 있었다. 어쩜 엄밀히 말하면 처음엔 그 청년보다는 그가 품에 안고 있는 첼로라는 악기에 먼저 시선이 가고 관심이 갔는지도 모른다. 평소 내가 그처럼 동경한 곳을 찾아가며 그처럼 열심히 첼로를 그어대는 그 청년에게 시선이 갔다. 그리고 관심이 가고 말을 건네보고 싶어졌다. 늘씬한 키에 가느다란 체형 그리고 약간 곱슬머리에 미남형이라 할까. 나는 문득 저 흘러간 명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주인공 청년이 떠올랐다. 어딘가 사슴을 닮은 듯 고독해 보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러나 그가 품에 안고 있는 첼로는 곧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듯 악기와 연주자가 하나의 생명체인 양 그렇게 조화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치도 그는 첼로를 위해 태어난 사람인양…. 그는 그 나라의 대표적 악단의 하나인 평양 《피바다 악단》의 한 단원이며 《조광》이라고 하는 약간 특이한 외자 이름을 가진 청년이었다. 26세라는 그의 나이에 비해 그 나라 태반의 청년들이 그러하듯 그도 또한 아주 애띤 인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쉬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내가 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듯이 그 또한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퍽이나 많은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바쁜 스케줄 때문에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 수월하지 못했다. 국가적 큰 행사에 그도 나도 참여해야 하므로 따로 만남의 시간을 만들어 내기도 어려운 형편이고 그리고 나의 평양 체류 기한은 한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잠시잠시 만날 때마다 다음 번 만남에 대해서는 언제나 막연한 약속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내가 그에게 몇 번이나 바람을 맞혔는지, 후에 그가 얼마나 애절히(?) 나를 기다렸던가 하는 불평어린 하소연을 들어보면 가슴이 찡해 올 정도로 눈물겨웠다.
북한의 청년 첼리스트 조광 씨. 그는 먼저 자기 집안은 《예술가 가정》임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과연 그럴 만했다. 그는 민족 악기 《아쟁》 주자인 부친 조진동 씨, 국가적 명성을 지니신 무용가 어머니 김수경 여사 사이에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약 2년 전 남북 어느 곳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진 첼리스트 겸 지휘자 김기덕 씨를 장인 어른으로 그리고 피아니스트인 일본인 여성을 장모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인 김향이 씨는 콘트라바스 주자로서 현재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를 지내고 있다. 그는 온 가정의 예술적 분위기와 고무 속에 그리고 국가적 큰 배경과 절대적 지원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구김없이 예술가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뜻이 높으면 높을수록 재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예술가의 길은 극기를 요구해 오는 험한 준령이 아니겠는가.
그는 소년 시절부터 이미 예술가의 고뇌와 시련 같은 것을 겪고 맛보아야 했다. 그가 14세 나던 해, 전국음악경연대회가 있었다. 출전하기 위해 맹연습을 했는데 그만 뜻밖에도 함께 연습하던 13세 친구에게 출전 자격을 빼앗기고 말았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는 어린 마음에 스승께서 위로해 주고 동정해 줄줄 알았다. 한데 그와는 정반대로 스승의 꾸지람은 오히려 아주 호된 것이었다.
《남자가 한 번 먹은 마음에 이제 신발도 신기 전인데 길이 멀다고 벗어던지는가. 싫으면 그만둬라. 억지로 시키지 않겠다. 그러나 네가 후회할 날이 꼭 있을 게다. 네가 고작 콩쿨 때문에 첼로를 한단 말이냐?》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더욱 엄격해지셨다.
《자기 과제를 다 했느냐, 네 과제 다 못했으면 잠을 자도 밖에서 자라.》
군복무 중이던 누님께서 또 편지가 왔다.
《네가 왜 첼로를 하는지, 음악 공부를 하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산이 커야 그늘이 크다고 목적이 숭고해야 거두는 것도 크다. 무엇을 하든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해야 한다!》
소년 조광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처럼 쉬이 낙심한 자신이 죄스럽고 부끄러워졌다. 그는 분발하기로 했다. 한 가정의 부인인 스승 함경희 선생님께서도 밤 12시가 넘도록 그래서 그녀의 남편이 아내를 데리러 올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레슨을 해주셨다. 그 다음 해 콩쿨 출전 때까지 거의 매일 밤을 학교 연습실에서 밤을 새우며 맹훈련을 쌓았다. 밤을 새워 공부하는 아들에게 아침이면 아버지가 밥을 날라다 주셨다. 마침내 콩쿨 출전을 위해 스승과 함께 함흥으로 떠나게 된 아침이다. 그런데 그처럼 아들의 수업을 위해 지성을 다해 주시던 어머님께서 이 특별한 날 아침 차려주신 아침상이 예상외로 너무도 초라하지 않은가. 그리고 역에 바래다 주시지도 않고 별 특별한 당부의 말씀도 없으셨다. 다만 《몸조심하라》는 그 한 말씀뿐. 아들은 내심 무언가 의아하고 섭섭한 마음을 안은 채 떠나야 했다.
15세의 조광은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 마침내 당당 1위를 차지했다. 기쁨에 넘쳐 상장을 받아들고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님은 저만치 방 한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계셨다. 제자를 위해 함흥까지 동행해 온 스승님은 실은 산후 며칠도 되지 않은 때 였기에 부풀대로 부푼 젓을 짜고 계셨다. 조광이 승리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 역두엔 온 가족이 환영을 나왔다. 한아름 꽃다발을 안고서 그리고 수줍어 하는 아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식당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지 않은가. 아들이 비로소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어찌해서 떠날 땐 아무렇게나 해서 보냈는가》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떠날 때 너무 잘 해주면 긴장감을 더해 줄 것 같고 네 마음에 부담이 될까 봐서 그랬다.》
그후 조광은 고향 원산을 떠나 평양으로 유학을 오게 된다. 때때로 어머님께서 글월을 보내 주셨다.
《네가 보고 싶다. 키 큰 청년만 봐도… 그러나 보고 싶은 것 참는다. 왜, 너는 보람 있는 일을 하려하니… 성공해서 기쁘게 만날 그날만을 기다린다. 너도 우리 보고 싶겠지만…?
공부가 힘들고 벅찰 때 그리고 때로 낙심될 때 조광은 어머님의 편지를 읽곤 한다. 그리고 항시 품고 다니는 어머님 사진을 꺼내어 보곤 했다. 그러면 어디선가 힘이 솟곤하니까…. 언젠가는 연습을 하다가 너무도 뜻대로 되지 않아 혼자서 《야!》하고 온천지에다 대고 악을 써 봤는데 때마침 그순간 스승님께서 사과를 깎아 가지고 들어오시지 않는가. 그만 무안하고 죄스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제자에게 스승님은 사과를 권하면서 이렇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예술가가 되려면 의지가 강해야 된다》라고.
그리고 그것은 스승님의 그 어느때의 호된 질책보다도 그의 마음에 아프게 와닿는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훈시로 오래오래 감슴에 새겨지게 되었다. 그 스승님의 지성어린 가르침 덕분인가, 어머님의 희생적 사랑 덕분인가. 조광은 20세가 되던 해 또다시 전국음악경연에서 1위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후 평양음악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지금의 장인 어른이 되신 김기덕 교수님께 지도를 받게 된다. 김 교수님은 항상 이렇게 역설하신다.
《음악을 하려면 먼저 민족을 알아야 하고 그 얼을 깨우쳐야 하며 궁극엔 자기 음악을 민족에게 바쳐야 한다. 또한 인민에게 맞는 주법, 동양인에게 맞는 주법을 개발 터득해야 한다. 참으로 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면 첼로에만 신경쓰지 말고 문학, 피아노, 편곡, 작곡 등등 자매 예술 과목도 중시해야 한다. 그렇찮으면 절름발이 예술가가 되고 만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북한에서의 서양 음악 또는 고전 음악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인가를.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서 항상 말씀하십니다. 서양 음악 열심히 공부해서 국제 콩쿨에 나아가 국위선양 하라구요. 그리고 궁극에는 우리 민족 음악이 동양의 음악이 목적이지만 공부 과정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서양 고전 음악을 연구합니다. 때로 연주도 하고요. 제가 드보르작, 쌩쌩, 랄로 등 모두 공부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고요.》
나는 또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러면 현대 세계적 연주가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정보와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인지. 그는 현대의 세계적 음악인들을 거침없이 나열했다. 로스트로포비치, 삐엘후르니에, 야노스스타커근자에 요요마 등등…. 나는 그 중 요요마를 들어 그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세상에 떠드는 그의 명성만큼은 대단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는 약간 냉소적인 빛을 보였다. 이어서 해외 유학을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더러 흥미는 있습니다만 별것 아닌 것 같습니다. 어딘가 자존심 상하는 그런 기분입니다. 구태여 남의 나라 가서 그럴 필요 있겠는가. 우리 조국에 얼마든지 좋은 시설 제도 풍부한데… 유학을 하면 배우는 것도 많겠으나 놓치는 것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 준수한 청년으로 한 사람의 기성 음악인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사이 한 가정의 가장이며 어여쁜 아가의 아빠가 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우리는 처음 그를 대했을 때 그가 기혼자라는 사실이 도시 믿기지 않았다. 그의 외모는 아직도 너무나 소년같이 애띤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사랑한 얘기 말입니까? 소설 한 권 쓰지요.》
그는 농담조로 답했다. 그러자 곁에 동료들이 그를 거들었다.
《부인이 아주 미인이랍니다.》 그러자 그가 말을 슬쩍 돌린다.
《우리 아가가 미인이죠. 고거 벌써 해죽해죽 웃는 답니다.》
아기 생각만 해도 그렇게 행복한가, 어느 사이 그의 얼굴 하나 가득히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아기 이름은?》
《저희 아버님의 조언을 주로 참고해 가지고 제가 이름을 지어 줬지요. 눈《설》자, 꽃《화》자 조설화라고 합니다. 눈꽃처럼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이라라고요.》
《그래 그 미녀 아내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수?》
《우린 둘이 다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이고 졸업 후 평양음악대학 관현악단에 함께 단원으로 일했습니다. 우린 사실 음악 때문에 만난 사이라고나 할까요. 함께 단원으로 있을 때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우린 종종 음악 해석 문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하고 그러다보면 다투기도 잘했습니다. 그러다가 끝장이 나지 않을 땐 지금의 가시아버지(장인 어른)에게 그 문제를 들고 가서 단판을 짓기 일쑤였죠. 그러면서 어느 사이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조광이 이 같은 시를 지어 향이에게 전했다.

저녁 노을이 물들 때는 세상 만물을 유혹하듯이 자기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나는 석양보다 달이 마음에 든다. 석양, 너는 모른다. 너 뒤에 너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올런지, 석양 뒤에 달이야말로 새벽 동이 틀때까지 날을 비쳐 준다. 언제나 말없이 내 빈 공간 채워 주고 내 괴로울 때 달래 주는 너의 빛, 너의 그 빛을 내 활력으로 받아 더 분발 더 분발하리니 나의 님이여 영원히 그 빛을 뿌려다오. 영원히 그 빛을…

또 어느 날 사랑하는 향이를 위해 이런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꿈에 네 모습이 나타나 깨다.
밤이면 꿈마다 만나는 우리님 《야합수》
낮에는 열리고 밤에 접는 야합수같이 밤마다 우린 만난다.
내가 만일 민들레 꽃씨 된다면 님의 창가에 날아가 땀방울 닦아 주련만
우리님이 내 마음 헤아려 더 분발하기를….

광이와 향이는 팔짱을 끼고 극장으로 식당으로 산책길로 끝없이 헤메이곤 했다. 음악대학에서 대동강까지 보통강에서 음악대학까지 라일락 꽃길을, 낙엽진 숲속을 둘이는 끝없이 거닐곤 했다. 그런데 그 어느해인가 첫 눈이 내리던 그날만큼은 견딜 수 없어 첼로도 콘트라바스도 다 팽개치고 뛰쳐나가 온종일을 헤매였는데 그날 둘이는 돌아와 약속을 했다. 우리는 음악을 위해 만난 사이, 남들보다 산보 시간 줄여야 한다. 앞으로 그 시간을 공부하는 데 도 돌려야 한다고. 걸핏하면 학교에서 밤을 새면서 연습하는 광이를 혼자 두고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밤잠을 이룰 수 없는 향이는 기어이 먹을 것을 싸가지고 한방중에 학교로 달려가곤 했다. 둘이는 이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상, 조광은 결심을 다졌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어머님께 결혼 허가 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어머님의 회신을 기다린다는 건 여간 두려운 일이 아니다. 왜, 평소 어머님은 이런 내용의 편지를 심심찮게 보내 오셨기 때문이다.
《이성 관계가 중요하지만 너는 이성 관계 일찍이 제기되지 않으면 좋겠다. 서두르지 마라. 이성보다 먼저 첼로에 전심전력하라….》
그런데 가슴을 조이며 기다렸던 회신은 의외로 호의적이고 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 같은 아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신 게 아닐런지.
《어머님 저희 두 사람은 오로지 음악과 조국의 위해 만난 사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또한 운명적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제 생일 날짜가 10월 11일로 바로 《당》창건 다음날입니다. 향이의 생일 날짜가 8월 16일 바로 《조국》해방 다음날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당》과 《조국》을 위해 일하도록 만난 사이이며 그야말로 숙명적 연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침내 양가의 부모님들은 두 가정의 배경과 교육 방침이 일치하다는 것, 피차 연구 생활에 아주 적합한 상대라는 결론에 도달, 합의를 보았다.
나는 이제 북한의 젊은 예술가의 예술론을 듣기 원했다.
《노래와 함께 인생을 걷는 자 행복을 찾으리, 왜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 인간이 있는 곳에 노래가 있고 인간의 노동생활을 통해서 노래가 생겨났을 겁니다. 때문에 음악은 무엇을 사명으로 해야 되는가. 지금 일부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위 추상적 순수 예술이어야 하겠는가, 예술을 위한 예술이어야 하겠는가. 예술이 인간을 복무할 수 있을 때만이 예술로써 그 및을 다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기 때문에 예술은 온갖 인간사를 승화, 반영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예술이 인간을 아름다운 세계로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기 때문에 수령님께서 항상 말씀하십니다. 음악가가 되기 전에 애국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를 알아야 하고 고상한 풍모의 인간이 먼저 돼야 한다고.》
끝으로 그의 종교관을 들어보기로 했다.
《책에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꽤 읽어보긴 했습니다만…. 사람이 옛날에 과학이 발전하지 못하고 자기를 의탁할 데가 없어서 미신 또는 종교라는 걸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생각될 때가 있고 그 다음엔 또 사회가 발전 돼 오면서 계급 사회가 형성되고 그러고 보니 착취 계급이 생기면서 종교가 착취 도구로 이용되지 않았는가 그렇게도 여겨집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 운명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고 사람의 행동, 노력에 따라 거짓 없이 그 결산이 나오게 마련인데….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솔직히 종교에 대해 깊이 연구해 본 일도 흥미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연구 과제라고 생각하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처럼 통일 문제에 몸바쳐 떨쳐나선 문익환, 문귀현, 홍동근 목사님 같은 애국적 종교 인사들 그리고 임수경 양 같은 그런 분들에 대해서는 최대의 존경심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와 헤어진 후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또다시 남편과 함께 《세계청년평양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 중에 있었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호텔 주변을 산책하던 중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말끔한 청년이 저마치서 나를 주시해 오는 듯한 감을 느꼈다. 친구와 동행인 그는 와이셔츠 팔을 걷어붙이고 선글라스를 걸친 아주 자연스럽고 경쾌한 차림이었는데 그 모습은 어느 서방 사회에서 보아 온 그런 청년 같았다. 그의 선글라스 때문인지 우리는 피차 확일할 때까지 꽤 어줍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가 나를 확인하자 선글라스를 확 벗어 제끼며 그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야! 선생님을 여기서 또 뵙다니! 이건 정말 하늘이 베푸신 기적입니다!》
그가 어쩔 바를 모르고 반가워하며 들려주는 말.
《선생님 그때 저와 헤어질 때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다며 떠나가셨죠. 그때 제 마음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아셔요? 그래도 혹시나 한 번 더 뵐까 하고 제가 집사람하고 대성산 흙을 퍼다가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얼마나 선생님을 기다렸는지 아셔요? 《조국의 흙》을 선생님께 선물로 드릴려구요. 그런데 선생님은 끝내 오시지 않아서 얼마나 서운했던지. 야! 그때 심정 정말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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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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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첼리스트 조광의 아내가 대한미국 남녘에서도 알려진 연극배우 백승란이라는 사람으로 소개편집물에서 예술인가정을 찾아서 코너에 나온적이 있었더군요? 참고로 백승란은 SBS평화통일음악회에서 MC김승현이랑 사회를 본적이 있었고 KBS교향악단과 조선국립교향악단 합동연주회때에도 현재는 사표쓴 황수경 전 KBS방송원이랑 공동진행을 한적이 있었을정도로 실력파였더군요?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더군다나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국회의원인 임수경과 직접 만난적이 있었으니...!!!!!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아차 조광이 그 조광이 아니었구나~!!!! 실수했다~!!!! 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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