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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예술

2009년 제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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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4-25 17:00 조회6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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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운전사가 차를 세우고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깜박 잠들었던 지은희는 놀라서 깨여났다.

운전사는 정 졸려서 차를 몰지 못하겠다며 바깥바람을 쏘이려고 차에서 내렸다. 사람이 제일 졸릴 때가 새벽 2시다.

지은희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아들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초저녁에 어머니를 찾아온 권혁은 어머니가 수술중이였으므로 쪽지편지를 써놓고 돌아갔다.

수술을 끝내고는 인차 평양으로 약품을 실으러 떠나다나니 미처 읽어보지 못한 편지였다.

희천발전소건설자들에 대한 의약품보장은 철저히 전진공급이다. 하지만 특수약품에 한하여서는 직접 평양에서 날라온다.

이번에 지은희가 의약품접수차로 떠나게 된것은 홀아버지를 모시고있는 그가 오래동안 집을 떠나있다는 사정을 고려한 지휘부의 조치인것 같았다.

아무리 기관이나 이웃들이 잘 도와준다고 해도 가정에는 주부의 손이 가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지은희는 운전사가 켜놓고 내린 실내등에 비추어 편지를 읽어보았다.

《어머니.

어머니도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축가신 영상을 뵈웠지요?

우리 병사들은 막 가슴을 쳤습니다. 그리고 분발했습니다.

새로운 대고조의 속도, 희천속도를 창조하여 기어이 최고사령관동지의 구상을 결사관철하자고 말입니다.

한초, 또한초…

시간은 쉼없이 흐릅니다.

시간이 앞으로만 나가는 화살과 같은것이라면 우리 조국의 순간순간은 무엇을 위해 흐르고있습니까. 시간이 열정에 불타는 위훈의 선률이라면 그 선률에 실리는 심장의 박동은 무엇입니까.

승리의 광장을 향해 흐른 이 땅의 날과 달, 값높은 애국의 박동을 안고 힘차게 고동쳐온 병사의 분과 초, 그것은 강성국가건설의 최전선을 종횡무진하시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애국헌신의 발자욱소리를 따라 흐른 선군조선의 불덩이같은 위훈의 시간, 전선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시간에 시계의 초침을 맞추며 살고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의 소대가 ××구간 돌파전을 진행할것을 지휘부에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어머니에게 들리지 못할것 같아 몇자 적어놓고 갑니다.

××구간을 성과적으로 돌파했다는 기쁜 소식을 안고 어머니를 찾아오겠습니다.

집에 가면 할아버지에게 나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노래에도 있듯이 빛난 훈장 가슴팍에 내 집으로 돌아가면 그리운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리겠다고 말입니다.

아들 권혁.》

《원, 녀석두.》

지은희는 얼굴에 대견한 미소를 그렸다.

어렵고 힘든 일에 언제나 앞장서는 아들이였다.

가끔 현장치료차로 아들이 일하는 작업장을 찾을 때마다 아들의 위훈이 나붙은 속보판앞에서 좀처럼 발길을 떼기 아쉬워하군 하는 지은희였다.

어머니들치고 아들의 장한 위훈을 두고 기뻐하지 않을 어머니가 있으랴만 군복입은 아들의 장한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보는 행운도 쉽지 않게 차례진다.

장군님께서 불러주신 희천발전소건설장에서만이 맛볼수 있는 긍지이며 기쁨이였다. 한편 슬그머니 갈마드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현장걸음을 많이 한 지은희는 권혁이네 소대가 돌파해야 할 ××구간이 어떤 구간인지 잘 알고있었다.

때없이 무너져내리는 붕락으로 하여 벌써 며칠째나 전진을 가로막고있는 마지막관통구간이였다. 중앙병원에 후송된 소대장이 중상을 당한곳도 바로 그 구간이였다. 이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어찌 알랴.

지은희는 새망스러운 생각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머리를 저었다.

이때 멀리서 류달리 밝은 전조등빛이 비쳐오고있었다. 지은희네들이 다시 떠나려고 서두르는데 승용차가 눈앞까지 다가와 속도를 좀 늦추어 지나치려고 하다가 멈춰서는것이였다.

그 차의 뒤좌석의 차창이 내리워지더니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희천에서 옵니까?》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예, 김만유병원 차입니다.》

지은희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데 왜 섰습니까, 고장입니까?》

《아아니예요.》

이렇게 대답하는 지은희의 목소리는 좀 덤비는듯 했다.

귀에 익은 상대방의 목소리는 선경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눈을 상한 선경의 소식을 전해주던 그 목소리, 딱 두번 들었지만 그 목소리를 기억 못할 지은희가 아니였다.

상대방이 차에서 내려 이리로 오고있었다.

지은희도 차에서 내렸다.

《혹시 지은희선생이 아닙니까?》

그의 앞에 다가와 선 상대방이 물었다.

《예, 부총리동지가

《옳습니다. 선경이 아버지입니다.》

선경의 아버지인 부총리를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대면하게 된 지은희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자세를 바로하고 허리를 굽혀 례의를 표시하였다.

강민혁은 고개를 숙여 맞인사를 하였다.

강민혁의 운전사가 차안에 조명등을 켜놓고 두사람을 그리로 안내하였다.

그들은 차의 뒤좌석에 나란히 앉아 짤막짤막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두사람 다 용무가 급했고 로상에서 긴 이야기판을 펴놓을수 없었던것이다.

선경이때문에 마음쓰는 지은희의 심정을 헤아려서인지 강민혁은 이번에 평양에 들려보니 선경의 눈수술이 잘되여 차도가 있다는것과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실명으로 이어질것 같지는 않다는것을 간단히 알려준 다음 기본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태천발전소에 일이 생겨 가는 길이였습니다. 시간을 따로 낼수 없어 오는 길에 잠간 들려보려고 알아봤더니 평양으로 떠났다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거 미리 찾아뵙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죄송스럽긴 제가 더합니다. 제가 미리 찾아뵙는게 인사가 옳지요.》

《허허, 다같이 바쁜데 이렇게 만난김에 애들문제를 락착지읍시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어떻습니까?》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애들의 요구가 희천발전소건설이 끝난 다음에 보자니 그렇게 하는것이 어떻습니까?》

《예, 부총리동지 좋으시도록…》

《부총리가 아니라 처녀의 아버지입니다. 거긴 총각의 어머니고… 혼사란 처녀집에서 총각집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법이 아닙니까?》

《호호호!》

《하하하!》

사돈될 두사람은 흥겹게 웃었다.

두집의 인륜대사가 로상에서 이처럼 간단히 락착된것은 두사람의 잠재의식속에 애들문제를 김정일동지께서 관심하고계신다는 사실이 놓여있기때문이였다.

날이 밝을무렵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그때까지 잠들지 않고 딸을 기다리고있었다.

희천에서 떠날 때 전화를 했더니 밤을 새운것 같았다.

외딸인 지은희는 희천으로 떠나면서 같은 과의 합숙생활을 하는 착실한 간호원을 자기 집에 와있게 했다.

지은희는 오래간만에 자기 손으로 밥을 지어 아침상을 받쳐올린 후 병원으로 가서 필요한 약품명세를 제출한 다음 안과담당의사를 만났다.

선경이가 마지막수술을 하고 붕대를 풀지 않은채 최대의 안정상태를 유지해야 하므로 흥분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절대로 없게 하여야 했던것이다.

지은희는 그대로 돌아설가 했으나 한번 얼굴을 본적 없는 며느리의 자태라도 보지 않고 돌아설수 없었다.

그의 심정을 리해한 안과의사는 자기가 회진할 때 따라들어와서 조용히 지켜보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지은희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안과의사의 뒤를 따라 선경의 입원실로 들어갔다. 그의 입원실은 독방이였다.

두눈에 안대를 대고 하얀 붕대로 처맨 얼굴에서 모습이 드러나있는 부분이란 입과 코, 턱뿐이였다. 그리고 환자복소매자락에 나와있는 두손…

그는 조용히 누워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선생님이세요?》라고 물었다. 그지없이 상냥한 목소리였다. 처음 보는 며느리감이지만 마음을 본지는 오래인 지은희에게 있어서 그 목소리는 천하에 없이 곱게 울렸다.

가슴우에 놓인 두손 또한 얼마나 희고 고운가! 더구나 저 손으로 콤퓨터를 다루어 전국경연에 입선했다고 하니!

그러한 그가 눈을 상했으니 편지에 자기를 잊어달라고 쓸만 했다고 생각하며 고운 목소리와 고운 입, 고운 손에 넋을 뽑히운채 서있던 지은희는 두눈에 뜨거운것이 용솟음치듯 솟아올라 더 서있을수 없어 끝내 입을 싸쥐고 호실을 뛰쳐나왔다.

필요한 약품을 명세대로 다 선별포장하느라고 지은희는 평양에서 며칠 더 지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기술부원장이 찾더니 빨리 희천으로 떠나라고하는것이였다. 발전소건설장 현장지휘부에서 부른다는것이다.

지은희는 의아해졌다. 늦어지는 사유를 알고있는 현장지휘부에서 갑자기 부른다는것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의사의 직업적본능은 벌써 그 무엇인가를 계시하고있었다.

생각은 어쩐지 자꾸 불안만을 몰아왔다. 별예측이 다 들었다. 그중에서도 먼저 마음에 짚이는것은 권혁의 일이였다. 공사장적으로 제일 어렵고 위험한 모퉁이를 맡아나선 아들이였다. 그러면서도 마치 들놀이라도 가듯 버룩대며 웃던 아들의 모습이 눈부리를 지졌다.

이 순간 지은희는 꽃같은 청춘들의 생명을 때없이 위협하는 뿌죽뿌죽한 돌덩이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설사 안다고 한들 군인인 아들이 하는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지은희는 자기의 불안이 모성으로서의 육체적본능으로부터 오는것이라고 스스로 위안도 해보았고 그런 생각을 뿌리쳐보려고 애도 써보았다. 하지만 일단 집착된 생각은 다시 모질게 덮쳐들군 했다.

희천에 가서 지은희는 말로만 듣던 장군님전사들의 영웅적위훈을 직접 목격할수 있었다.

그들에게도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이 있을것이다. 그들도 자식들의 위훈앞에서는 기뻐하지만 희생앞에서는 가슴저미는 아픔을 느낄것이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부모가 죽으면 앞산이 보이지만 자식을 잃으면 앞산이 안 보인다는 말이 우연히 나온 말이 아닐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또 하나의 본능, 사회정치적본능이 있다는것을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감정은 좀처럼 리성적인 결심에 자리를 내주려 하지않았다.

지은희는 이 모든 생각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금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이 나라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영웅적위훈에로 떠밀어주면서도 미소짓는 장한 모습을 보며 그들곁에 자신을 세워보기도 한 지은희였다.

그 길에 어찌 희생이 없다고 말할수 있으랴.

하지만 자신이 직접 그 일을 당할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도 자식을 낳아 키운 어머니였다. 피로 이어지고 젖줄기로 인연을 맺은 자식의 생사를 놓고 마음쓰지 않는 어머니가 있다면 그자체가 거짓이며 위선일것이다. 마음같아서는 차라리 속시원히 현장지휘부에 알아보았으면 좋으련만 불안을 재촉하는것 같아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은희는 갑자기 고독해졌다. 이럴 때 흔들리는 마음을 부축해줄 손길이라도 있으면 이다지 마음 산란할것 같지 않았다.

먼저 떠오른것이 아버지였다. 마주앉아 속을 털어놓으면 마음속 안정이라도 찾을것 같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보니 뜻밖에도 아버지가 려장을 갖추고 아빠트 아래에서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의아해하는 딸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차에 오르며 《나도 함께 가자, 박천까지만…》라고 했다.

아버지도 무슨 사연인가 짐작하는것 같았다.

박천은 지은희의 고향이였다.

아버지는 왜서 고향으로 가려고 하는가?

무슨 일인가 알고있으면서도 일부러 화제를 피하는듯 한 아버지의 행동이 지은희의 불안을 더 부채질했다.

박천을 향해 고속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그들은 줄곧 침묵만 지켰다.

누구도 속을 터놓기 저어하는것 같았다.

박천읍을 얼마 앞두고 차를 한옆에 멈춰세웠다.

아버지의 요구도 요구지만 찌는듯 한 날씨에 만짐을 싣고 고속으로 달리다나니 차의 기판을 식혀야 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길섶을 내려서더니 어느 한 골안에 접어들었다. 지은희도 알고있는 도라지골이였다. 량쪽의 밋밋한 둔덕에 흰색, 보라색의 도라지꽃이 너무도 고와서 박천사람들이 도라지골이라고 부르며 사랑하는 박천의 제일경이였다. 때는 마침 꽃철이여서 골짜기는 짙은 꽃향기와 춤추는 벌과 나비, 졸졸 흐르는 골개물의 맑은 흐름과 산새들의 지저귐으로 하여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걷는 지은희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으며 마음이 설레였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비애와 슬픔의 설레임이였다.

도라지골은 지은희가 어린시절을 보낸 잊을수 없는 고장이였다. 지금은 인가가 없지만 전후시기만 해도 형형색색의 토굴집들이 촘촘히 들어앉은 골안이였다. 기복이 묘하게 생겨 적기의 폭격을 덜 받는 곳이므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림을 펴놓았던것이다.

지은희는 이 골안에서 동네아이로 자랐다.

전쟁시기 고아로 된 그는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모르고 자랐다. 동네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지나가던 인민군대가 이 마을에 맡겨놓았는데 그대로 집이 되고 고향이 돼버렸다. 림시로 운영하는 리합숙에 들어있었지만 때식만은 고마운 이웃들이 이끄는 자리에 앉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겨울이면 리당사무실의 처마밑에 주렴처럼 매달린 하얀 고드름이 그의 장난감이였고 내가의 하얀 조약돌들이 즐거운 놀이감이 되여 그와 동네아이들을 얽혀놓군 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리당위원장(당시)아저씨의 누비솜옷을 덮고 사무실책상에 누워 잠들군 했다. 누구나 그를 귀애하고 쓰다듬어주었다.

그는 부모없는 설음을 모르고 자랐다. 세월은 자기를 위해서만 흘러가는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났다. 언제부터였던지.

어느해인가 한여름의 무더운 저녁이였다. 지은희는 동네아이들을 따라 고개너머 이웃마을로 가끔 마을돌이를 하며 상영하군 하는 영화를 보러 갔다. 초저녁부터 부실대며 내리던 비는 어둠이 깃들자부터 대줄기같은 소낙비로 변했다.

돌아올 때는 고개밑의 골개물이 엄청나게 불어났다. 한물에 불고주는 산골물이다.

아이들은 골개물 한가운데 있는 뚝섬까지는 이르렀으나 물이 불어 어쩔줄 몰라했다. 이럴 때 마을쪽에서 동네어른들이 광솔불을 밝혀들고 달려왔다.

《복동아 》, 《인남아.》, 《쌍가매야.》

아이들을 부르는 동네어른들의 목소리가 골안에 메아리쳤다.

《엄마.》, 《아버지.》

아이들은 소리나는쪽을 향해 서슴없이 물속에 뛰여들었다. 잠시후 뚝섬은 텅 비고 지은희만 홀로 남았다.

누구도 그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아이들을 따라갔다는 사실조차도 모를것이다. 골개물은 점점 더 크게 불어나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지은희는 뚝섬 한가운데 있는 찔레꽃덤불속에 기여들었다. 번개불이 번쩍일 때마다 파아란 찔레꽃열매가 눈부리를 지졌다. 그것을 한꼭지 따든 지은희의 눈가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다. 마당가에 하얗게 피여난 찔레꽃 한송이를 따들고 방그레 웃던 녀인의 모습이 망각의 숲을 헤치며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머니의 모습이였다. 두살때 이 마을에 왔다니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모습일것이다. 형체도 표상도 그려볼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이였다.

《어머니!》

그는 입속으로 가만히 불러보았다. 그러자 부모없는 고아라는 설음이 불쑥 치밀었다. 그는 처음으로 실컷 소리내여 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아슴푸레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지은희는 혹시 자기를 찾는게 아닐가 하는 생각에 귀를 강구었다. 비는 멎고 쪼각구름사이로 달빛이 흘렀다.

《은희야!》, 《은희야!》

소연한 물소리를 누르며 누구인가 그를 찾는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왔다. 물소리에 섞여 목소리가 분명치 않았다.

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웬일인지 다른 아이를 찾는 소리처럼 들렸다.

《은희야-》

가까이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왔다.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자기와 제일 가까운 소꿉동무 명숙의 아버지인 리당위원장아저씨의 목소리였다.

《여기 있었구나, 이 불쌍한것아. 왜 대답을 안하는거냐, 응? 아니, 내가 잘못했다. 날 용서해라. 무슨 정신에 회의를 벌려놓고 널 잊었댔구나. 이 못난 날 욕해다오.》

지은희를 부둥켜안은 그는 무슨 말인가 계속 중얼거리며 헉헉 숨을 들이켰다. 어디에서 긁혔는지 물에 젖은 그의 이마에는 피물이 배여있었다.

뒤늦게야 그가 없어진것을 안 마을사람들이 강기슭에 하얗게 덮여있었다.

《내가 잘못했다. 전재고아들때문에 마음쓰시는 우리 수령님께서 이러한 너를 본다면 얼마나 가슴아파하시겠니. 이제부터는 나와 함께 살자. 우리 명숙이랑 같이. 아니, 온 마을애들과 같이 말이다.》

그때부터 지은희는 리당위원장네 집식솔이 되였다. 그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지은희는 《호-》하고 숨을 내그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 한숨소리가 밖으로 새여나와 아버지의 귀에 흘러들것을 두려워하며 지은희는 가슴을 옥죄인채 한발자욱, 한발자욱 힘들게 걸어갔다.

그러는 그의 눈앞에 유정하던 골물이 사납게 범람하며 용트림친다.

하늘에서는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운다.

지은희의 귀에 《아버지-》, 《리당위원장아저씨-》하는 두 소녀애의 비명이 들린다.

그 비명을 향해 울려가는 또 다른 목소리.

《은희야-》

《명숙아-》

두 소녀애가 사나운 골개물에 자갈돌처럼 굴러내려간다.

그리로 뛰여가며 어쩔줄 몰라하는 리당위원장!

얼마간 떨어져있는 두 소녀애는 《아버지-》, 《리당위원장아저씨-》하며 저마끔 구원을 청한다.

폭격에 수난당한 대지는 번번이 이런 재난을 몰아왔다.

리당위원장은 반정신이 나간듯 이 애쪽을 향했다가 저 애쪽을 향하며 갈팡질팡하던 끝에 《리당위원장아저씨-》라고 부르는 애쪽에 마음을 정하고 물속에 뛰여든다.

리당위원장이 한 애를 들어안아 기슭에 던져놓고 돌아섰으나 이미 늦은 때였다. 물에 삼키운 다른 애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이 마지막웨침만이 메아리처럼 공명되여 울려왔다.

그들은 도라지골 막바지에 있는 자그마한 애기무덤앞에 나란히 서있었다.

자그마한 봉분은 금잔디를 입고있었으며 무덤주변은 잡풀이 하나도 없이 산꽃들로 장식되여있었다.

아버지는 큰 입을 꾹 다물고 바위처럼 서있었고 지은희는 어깨를 떨며 흐느끼고있었다.

세상사와는 관계가 없는듯 자연은 더욱 짙은 향기와 갖가지 고운 색갈을 뿌리고 온갖 산새들이 고운 청을 돋구어 합창하고있었다. 한여름이지만 산골의 서늘한 공기는 선풍기로는 낼수 없는 서느러움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도 큰 슬픔이 있었으며 조금만 건드리면 산천을 뒤흔들어놓을수 있는 곡성을 터칠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가 딸의 손목을 이끌었다. 무덤에서 좀 떨어진 풀밭에 지은희를 앉히고 평양을 떠나면서 지금껏 열지 않았던 입을 열었다.

《애에미야, 어련하련만 마음을 다잡거라. 네가 아침에 병원에 나간 다음 권혁이 부대에서 전화가 왔다.》

《예?!》

지은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들었다.

《자상한건 모르겠지만 마지막돌격전을 벌리다가 권혁이가 상한것 같더라.》

《아!》

몇시간사이에 10년은 겉늙은것 같은 아버지의 꽉 잠긴 목소리에 지은희는 지탱점을 잃은 기둥처럼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그렇게도 속을 조이던 위구가 결국 현실로 되였다.

지은희는 가물대는 의식속에 아득한 높이에서 울려오는듯 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가려듣고있었다.

《애에미야, 네 심정을 내 모르는바 아니다. 더구나 너야 남편때문에 마음속 아픔을 당해본 사람이 아니냐. 하지만 생각해봐라, 너도 어렸을 때 보았겠지만 지난 조국해방전쟁때 이 아근에서만도 숱한 남정네들이 싸움터로 떠나갔다. 그중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녀인들은 울지 않았다. 보탑을 잡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나라를 위하여 한목숨바친 장한 사람들의 피가 스민 이 땅을 가꾸기 위해서였지. 그 싸움은 오늘도 끝나지 않았다.

그 싸움의 앞장에는 예이제나 변함없이 군대들이 서있고. 그러니 어찌 권혁이가 험한 일을 맡아나서지 않을수 있겠냐. 우리 권혁이가 장해. 암, 장하구말구. 장군님 키워주신 군대인데 어련할라구.》

《아버님!》

지은희는 그만 아버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오열을 터뜨렸다.

《그만하거라, 너야 군인의 어머니가 아니냐. 네가 이러면 권혁이도 좋아 안해. 지금 이 시각도 우리 장군님께서 희천발전소건설장을 지켜보고계신다는것을 잊지 말거라. 의사인 너까지 손맥을 놓으면 안돼.》

지은희는 머리를 들었다.

의외에도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아버님, 아버님은 명숙이대신 저를 구원했고 친딸로 키워오셨어요. 저는 권혁이를 낳아키우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아버님앞에 비추어보았어요. 그리고 아버님의 슬픔과 고통을 생각해보았어요. 저는 그럴 때마다 눈물을 흘렸어요. 하지만 저 역시 모성이고 인간이 아니겠나요.》

아버지는 큰 손으로 딸의 자그마한 두손을 꼭 감싸쥐고 말했다.

《저 만주광야에는 장가도 못 가본 우리 권혁이 나이또래의 투사들의 붉은 피가 스며있다. 사회주의선경으로 꽃펴나는 오늘 우리 강토에 조국해방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1950년대의 영웅렬사들의 유골이 묻혀있다. 60년대, 70년대 사회주의애국렬사들의 붉은 피도 스며있다. 이러한 희생성의 전통이 대를 두고 이어지면서 우리 나라를 오늘에로 떠밀어왔다. 오늘은 권혁이네들이 바로 이 전통을 이어가고있다. 얼마나 장하고 대견한 세대냐. 난 권혁이가 그렇게 홀홀히 갈 애라고 믿지 않는다. 권혁이에게야 우리 장군님을 따라 세대의 전통을 이어갈 사명이 있지 않느냐.》

《아버님, 저도 권혁이가 잘못된다고 믿지 않아요. 력사의 온갖 풍파를 헤쳐오시며 이 모든 상실의 아픔을 아물수 없는 상처로 간직하고계시면서도 더 밝고 창창한 앞날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가시는 장군님의 높으신 뜻을 앞장서 관철해가는 우리 권혁이가 도중에서 걸음을 멈출수 없다고 봐요.…》

《용타! 내 딸아.…》

아버지는 참을수 없는 격정을 안고 딸의 어깨를 어루쓸었다.

지은희도 철부지애들처럼 아버지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윽고 지은희는 화닥닥 놀란 사람처럼 뛰쳐일어서더니 명숙의 묘앞에 가서 쓰러지듯 엎디며 길게 부르짖었다.

《명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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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노길남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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