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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학예술

2009년 제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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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4-20 23:13 조회9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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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대흥두령》 김일환이 김정일동지를 안내해드리였다.

미국인이 달아놓은 그의 별칭은 그이에 의해 지금 온 골안에서 애칭으로 불리우고있었다.

미국인의 출발을 저지시킨 사건이 있은 직후 김일환은 여기저기 불리워다니며 시달림깨나 받았다.

법규가 어떻소, 절차가 어떻소, 무엇이 어떻소… 걸리지 않는것이 없었다.

문제가 점점 커지자 당중앙위원회에서 료해조가 내려왔다.

그에 대한 료해가 깐깐히 진행되였다.

대흥청년광산은 제대군인들에 의해 개척되였다. 김일환은 첫 개척자인 제대군인의 한사람이였다.

워낙 일욕심이 많고 손탁이 센 그는 돌우에서 생활을 꾸리고 광산을 개척해야 하는 자연정복의 어려운 전투에서 자기의 능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군사체계로 유지되고있던 첫 개척집단은 소대, 중대, 대대로 이루어졌다. 김일환은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으로 대오의 앞장에 서서 드센 손탁으로 제대군인들을 이끌었으며 광산개발의 첫 발파를 진행하였다.

생긴것은 광석덩이처럼 막 생겼고 억센 기질이였으나 그는 인정에는 매우 무른 사람이였고 동무들과 대원들을 친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하였다.

세월이 흘러가고 광산이 정식 국가기업소로서의 인가를 받게 되였을 때 그는 당비서로 되였다.

광산의 전체 종업원들이 일이 잘되였다고 좋아하였다.

이렇게 군중의 신임을 받고있는 당비서인 그에게는 자기딴의 하나의 지론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의 신임을 얻는것은 쉽지만 아래신임을 얻는다는것은 쉽지 않다는것이였다.

우리 나라에 층층만층의 직종을 가진 로동자들이 있지만 광부들처럼 억세고 굳으며 움직여내기 힘든 로동자들은 없을것이다.

그들을 따뜻한 말 몇마디로나 잔정으로는 절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을 끌고 신임을 얻자면 목숨을 내대야 한다.

김일환이 총각제대군인으로 여기에 와서 예순을 바라보고있는 지금까지 근 30년간, 그중 15년간은 당비서로 있으면서 광부들사이에 맺어진 인연과 갖가지 뜨거운 사연을 렬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와 같이 배치되여왔던 첫 세대 제대군인들 대부분이 광산의 책임일군들과 초급일군들로 제발되였는데 거기에는 그의 동지적사랑과 뜨거운 관심이 깔려있다.

그와 함께 등용된 일군들은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바 그것은 누구도 광부들의 미움을 받지 않으며 하나같이 조동되여갈가봐 광부들이 걱정하는 대상이 되였다는 사실이다.

간혹 웃사람들의 눈밖에 나는 경우에도 군중의 여론이 두려워 다치지 못하는 대상이 되였다고 한다.

그들의 이러한 군중신망은 다 목숨으로 보증된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얼마전에 광산지배인이 새로 임명되였다.

물론 제대군인 첫 세대는 아니지만 광산에서 10여년 일해온 광부출신이였다.

하루는 조구통에 반톤짜리 막돌이 걸려 작업이 중지되는 사고가 생겼다.

사고를 퇴치하자면 쇠장대를 가지고 들어가 막돌을 떨구어야 했다.

이 일이야말로 목숨을 내대야 하는 일이였다.

여느때처럼 당비서와 지배인이 앞장에 나섰다.

그런데 쇠장대를 먼저 잡은 사람이 당비서였다. 지배인이 쇠장대를 앗아내려고 별도섭을 다 부렸으나 다른 일에서는 지배인에게 다 양보하던 당비서가 꿈쩍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싱갱이는 퍽 오랜 시간 계속되였다.

나중에 지배인이 성이 독같이 나서 당비서에게 소리쳤다.

나도 광부들의 신망을 얻어야 지배인노릇을 해먹을게 아닌가, 쇠장대를 안줘도 좋다, 지배인감투를 벗어던지고말테다.

일은 당비서의 양보로 끝났다

김일환에 대한 료해자료에는 이런것도 있었다.

대흥은 검덕골의 제일 막바지이다.

초입에 룡양광산, 다음 검덕광산, 검덕광산에서 60리 올라가서 대흥청년광산이다. 개발년대로 봐도 제일 젊고 또 청년제대군인들로 꾸려졌다고 해서 청년광산이라고 이름 붙였다던가.

대흥은 본래 지명도 없는 바위고장이였다. 여기 특징은 흙이 없는것이다.

황금덩이를 가진 지주가 강낭떡을 가진 농군과 바꿈질을 하려다 실패했다는 옛말과 같이 황금보다 흙이 귀한 고장이였다. 흙이 좀 있는 홈타기에는 많지 않은 토착주민들이 보리와 감자, 강냉이를 심어먹었다.

제대군인들이 많이 들어오고 식량사정이 긴장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멀리에서 흙을 실어다가 북두봉 안침진 골짜기에 다락을 만들고 흙을 채워 화분농사를 지으며 생활을 꾸려나갔다.

바둑무늬같은 이런 화분밭이 북두봉골짜기에 다닥다닥했다. 사람이 이악하면 돌꼭대기에서도 살아간다는 말이 그른데 없었다. 어느해 봄에 원래부터 그곳에 살고있던 주민들속에서 식량이 부족하여 가을에 제대군인들의 가산까지 들어내게 될것이라는 말이 돌고있다는 반영이 김일환의 귀에 들어왔다. 부업밭이 없는 제대군인들이 가산을 들고나가 먹을것과 바꾼다는것이였다.

노발대발한 김일환이 대흥골안의 토지(사실은 흙)를 다 모아 제대군인을 포함한 전체 주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였다.

당중앙에서 료해한 이러한 자료를 친히 검토하시던 김정일동지께서는 이 대목에서 크게 웃으시였다. 사실 대흥골안에서 두령소리가 들려오기는 이때부터였다고 할수 있었다.

그런데 대양건너 미국인의 입에서 뜻밖에도 같은 두령소리, 그것도 앞에 《대흥》이라는 지대명까지 붙인 두령소리가 나왔다는 사실에 접하신 김정일동지께서는 더욱 크게 웃으시였다.

그 미국인이 신통하게 표현하였다.

우리 나라에 미국사람을 굽혀놓는 두령이 많으면 좋았지 나쁠게 있는가 하는것이 그이의 결론이시였다.

배짱 세고 손탁 세고 미국사람쯤은 우습게 여기는 《두령》이 지금 기적같은 일을 해놓고 그이를 안내해드리고있었다.

이곳 로동자, 기술자들이 마그네샤크링카공업의 주체화를 실현하였던것이다.

김정일동지께서 흥분을 누르고 공장전경도와 생산공정도가 그려진 직관도앞에 서계시였다.

김일환은 지배인을 내세워 그이께 해설해드리도록 하였다.

젊은 지배인의 쟁쟁한 목소리가 그이의 기분을 더욱 북돋아주는듯했다.

그이께서는 시종 미동도 없이 서계시였다. 시선 한번 움직이지 않으시는듯 하였다.

수행원들조차 이상할 정도였다.

했건만 젊은 지배인은 그이의 표정도, 숨을 죽인듯 한 주위의 분위기도 아랑곳없이 자신만만하게 거침없이 설명을 계속하였다. 지배인은 직관도에 대한 설명을 거의 30분나마 하고 끝마쳤다.

그러나 김정일동지께서 고개를 한두번 끄덕여보이시였다.

그러시더니 갑자기 거센 음성으로 《광부들이 어데 있소? 로동자들이…》하고 물으시였다. 그이의 음성은 지금까지 사람들을 긴장시킨 침묵과 정적의 폭발처럼 여겨졌다.

《저희들이 미처…》

미처 조직사업을 하지 못한 김일환이 자책어린 목소리로 말씀올렸다.

《왜 알리지 않았는가. 내가 산천구경이나 하자고 여기 왔는가?》

그이의 음성은 여전히 거세게 울리시였다. 그이께서는 그 어떤 내심의 충동을 누를길 없는듯 두어걸음 앞으로 다가가 직관도앞에 바로서시더니 《이 자리에 로동자들이 없으니 직관도에 경의를 드려야겠소.》하고 몸소 허리를 굽히시였다.

너무도 놀라운 뜻밖의 광경이여서 둘러선 사람들은 북받치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였다.

그이께서는 깊이 숙이신 허리를 퍼그나 오래도록 펴지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손수건을 꺼내드시여 조용히 눈굽을 누르시였다.

한평생 경제문제때문에 마음써오신 수령님의 모습이 눈물속에 어려오시였다. 생애의 마지막나날까지 경제부문일군협의회를 소집하신 수령님이시였다.

그 어려운 경제전역의 중요전선에서 돌파구가 열렸다. 소리치며 자랑할만 한 사변적인 성과였다.

오랜 세월 연료(콕스)에 목이 메여 세계최대의 마그네사이트매장지를 깔고앉아있으면서도 그 덕을 마음껏 향유하지 못한 우리 인민이였다.

이제는 수령님께서 몸소 백금이라고 이름지어주신 마그네사이트가 소리치며 제 값을 부를것이다.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어려운 나날을 헤쳐오면서 시련의 고비를 수없이 겪어온 우리 인민이였다. 그것을 어찌 고생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할수 있으랴.

이러한 인민들에게 하루빨리 덕을 주고 기쁨을 안겨주고싶으신것이 그이의 절박한 심정이시였다. 그래서 더더욱 오늘의 기쁨을 안아온 이곳 로동계급에게 깊이 허리굽혀 경의를 표하시는 그이이시였다.

한참만에 허리를 펴신 김정일동지께서는 갈리신 음성으로 《수령님께서 계셨더라면당장 당전원회의를 열자고 하시였을겁니다.》라고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사변적인 일이 생겼을 때마다 당전원회의를 열어 그 의의를 당력사에 남기고 인민들에게 알리였으며 일반화하는 사업을 전개하시였다. 마그네샤크링카공업의 주체화는 수령님께서 주체철과 함께 최대로 소원하시던 분야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전원회의를 열지 않으시였다. 그이의 현지지도자체가 현지에서 직접 진행되는 당, 국가활동이며 정책적결론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해당 부문을 찾으실 때 그 부문에 대한 사전파악을 깊이있게 하실뿐만아니라 담당책임일군들과 함께 가시여 구체적으로 실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강구하신다.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현지에 내려가 대책하는것처럼 기동적이고 명백한 결정은 없을것이다. 이것은 김정일동지께서 일관하게 틀어쥐고나가시는 정치방식이였다. 이것은 또한 우리 혁명이 처한 특수한 환경의 요구이기도 했다. 적들의 악랄한 경제봉쇄속에서 시시각각 류동적으로 변하는 나라의 정세는 우리 식의 특수한 해결책을 필요로 하고있었다.

우리 출판보도물에서 김정일동지의 불철주야의 현지지도를 《빨찌산식강행군》으로 묘사하고있는것처럼 그이의 당, 국가활동 역시 독특한 우리 식이였다.

그 독특한 우리 식에서 터져나온 사변들앞에서 적들이 기절초풍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참으로 김정일동지께서는 변화무쌍한 정치방식으로 우리 혁명을 승리의 한길로 이끄시는 탁월한 령도자이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이날 해빛찬란한 북두봉에 오르시였다.

그이께서는 아아하게 뻗어내린 산발들을 오래도록 대견하신 시선으로 바라보시였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는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불리워왔으며 평방으로가 아니라 립방으로 재야 할 풍요한 나라라고 했다.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첫손가락에 꼽히우는 마그네사이트, 흑연, 우라니움매장량과 철광석매장량을 자랑하고있다.

하지만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날로 악랄해지는 경제봉쇄책동으로 하여 이 거대한 재보가 응당한 빛을 보지 못하고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아주 유리한 지리적위치에 놓여있다.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시대이다.

아시아태평양시대라고 할 때 그것을 동아시아시대로 압축할수 있으며 지금 많은 나라들이 동아시아지역의 발전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경제발전전략들을 작성, 추진하고있다.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동아시아중심에 있는 우리 나라에 미국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쳐오는 나라들도 많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우리 인민, 우수한 과학기술력량, 수십년동안 다져진 자립적민족경제의 토대는 선군으로 확고히 담보되였으며 우리 조국은 머지않은 앞날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로 될것이다.

세계여, 조선을 부러워하라!

김정일동지께서 강민혁을 가까이 부르시였다.

《렬차에서 하던 이야기의 계속인데 내각이 할일이 많소. 여기 높은데 올라서니 창작가들의 말처럼 환상이 막 나래치고있소.》

《말씀하십시오. 장군님, 장군님께서 오늘 류달리 기뻐하시니 저희들도 마음이 뜹니다.》

《핫하하!》

김정일동지께서는 통쾌하게 웃으시고나서 두손을 허리에 얹으시고 멀리 동해쪽을 바라보시며 생각을 더듬으시다가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방직을 예술이라고 하시였다. 나는 얼마전에 축포야회를 보면서 불보라의 오색령롱한 색갈과 같이 인민생활을 화려하게 꾸릴수 없겠는가고 가슴을 끓이였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보라. 10여만이 하나로 조화되여 화려한 무대를 펼친다. 수십수백가지의 창작과 창조의 복합체이다. 그것은 단순한 복합체가 아니라 유기적복합체이다.

유기체에서 어느 장기가 없든가 병이 들면 유기체자체가 생존할수 없는것처럼 《아리랑》을 이루는 문학, 음악, 무용, 체조, 조명, 분장, 의상, 그것을 담당한 창작가들과 제작자들, 출연자들, 거기에 동원되는 과학기술집단들, 외국인들이 콤퓨터에 의해 조종된다고 착각할 정도의 배경대꼬마들의 한순간의 하나같은 동작과 조화, 10여만 출연자중에 단 한사람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초긴장의 출연, 이것을 지휘하는것이 총연출가이다.

그는 출연자들의 단순한 동작뿐아니라 그들의 호흡, 감정까지도 계산하고 살피며 무대에 구현한다. 지어는 관람자들의 감정과 정서상태까지를 계산한다. 사람의 사상과 감정, 정서를 틀어잡아야 하는 예술의 본성이 그것을 요구한다.

총연출가와 부문연출가들의 지휘에 모든것이 달려있다. 내각사업이 그렇게 되지 못하겠는가.

나는 경제예술이란 말이 나왔으면 한다. 군사예술이란 말이 있는것처럼 경제예술이란 말이 있었으면 한다.

우리의 경제일군들이 그 지휘자가 되였으면 한다.

이것이 경제사업에 대한 나의 리상이다.

이것은 발은 우리 땅에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는 폭넓은 안목을 지니신 그이의 경제철학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자본주의자유시장경제는 딸라위기로 하여 시련을 겪으며 전망이 없는것으로 자본주의경제리론을 헝클어뜨리고있었다. 오죽 바빠났으면 맑스의 《자본론》을 뒤지고있겠는가. 이러한 때에 사회주의경제건설의 모범으로 세계경제를 주도할수 있는 리론실천적기치를 든다면 세계자주화위업수행에 크게 이바지할수 있을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강민혁에게 문뜩 물으시였다.

《지금 우리 나라에 몇가지 소유형태가 있소?》

전인민적소유와 협동적소유, 그 두가지 말고 또 있는가?

《두가지, 옳소?》

강민혁이 어리둥절해서 뭐라고 대답올려야 할지 몰라하는데 그이께서 칼로 자르듯 날카롭게 말씀하시였다.

《아니, 한가지요! 전인민적소유밖에 더 있는가? 어디!》

그러자 강민혁은 그이께서 농촌사업을 비판하신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보건대도 지금 농업을 전인민적소유처럼 다루고있었고 농업생산이 올라가지 않는 주요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북만 친다고 정신력이 높아지는가?》

짧은 한마디이시였지만 얼마나 신랄하고 예리하신 비판인가.

강민혁은 격동속에 호응하였다.

《옳습니다. 장군님! 농업생산을 높이자면 비료와 기계도 있어야 하지만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결정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분조관리제마저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있습니다.》

《왜, 왜서 말이요?》

김정일동지께서는 의문속에 거듭 뇌이시다가 스스로 결론하시였다.

《동무의 자료를 묶은 책상주의자들때문이겠지. 그런 사람들의 굳어진 사고관점부터 깨뜨려버려야 하오. 그들을 현실에 내다 정신들게 해야 하오! 그래야 대고조를 일으킬수 있는거요.》

강민혁은 그이의 말씀을 심각하게 새겨듣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러는 강민혁의 어깨를 툭 치며 신심에 넘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걱정할것은 없소. 농촌테제대로 하면 되는거요. 그리고 내각사업을 잘 짜고들면 되는거고.

수령님께서는 벌써 1960년대에 국가, 경제관리를 정규화, 규범화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단 말이요! 그러시면서 젊고 쟁쟁한 수재들로 국가, 경제일군들을 키울데 대한 선견지명의 조치를 취해주셨단 말이요. 강동무도 그 세대지?》

《예.》

강민혁이야말로 수령님께서 예견성있게 키워내신 일군중의 한사람이였다.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할바를 못하고있는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그였다.

김정일동지께서 잠시 상념에 잠기시였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내각에는 나의 어린시절의 추억이 깃들어있소. 어머님을 잃은 다음부터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동생의 손목을 잡고 수령님께서 계시는 내각으로 가군 했소. 내각에 가서는 밤늦게까지 도서실에 있었지. 그때 숱한 책을 보았소. 그때 보던 책들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소.》

《그때 보시던 책들이 내각에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내가 내각을 많이 비판하는데 우리 경제가 풀리자면 내각이 제구실을 해야 하기때문이요. 수령님께서 일하시던 곳이여서 나는 언제나 내각을 잊지 않고있소. 나는 1960년대부터 내각사업에 관심을 돌려왔소. 김일동지와 리종옥동지들이 있을 때인데 그들의 청탁으로 내각에 많이 나가군 했소. 1970년대 70일전투와 1980년대의 200일전투는 내각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당에서 직접 지휘한 전투라고 할수 있는거요.》

《장군님, 그 믿음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강민혁이 달아오른 심정으로 결의를 다지였다.

이날 김정일동지께서는 대흥땅을 떠나시기에 앞서 지배인과 김일환의 손을 굳게 잡아주시며 말씀하시였다.

《보물산을 타고앉은 동무들이 부럽소.》

《다 장군님덕입니다.》

대흥광산개발에 깃든 장군님의 로고가 사무치게 안겨와 김일환이 목메여 말씀드리자 그이께서는 손을 저으시며 《아니야, 인사야 이 산천에 대고 해야지. 얼마나 보배로운 산이요. 오늘뿐만아니라 후대들도 대를 이어가며 덕을 볼 보배산에야 인사를 할만도 하지.》라고 하시며 파도쳐간 산발들에서 오래도록 대견하신 시선을 떼지 못하시였다.

그러자 김일환이 《장군님, 지금까지 파먹은것이 축구공에 바늘자리만큼입니다.》하고 가슴을 쭉 펴고 말씀올렸다.

그이께서 호탕하게 웃으시며 《하여튼 대단하오. 축구공을 다 파먹을 때까지 당비서를 하시오!》라고 고무해주시였다.

김정일동지를 모시고 렬차를 타고 밤새 달려온 강민혁은 아침에 평양에서 내리고 그이께서는 계속 현지지도길을 이어가시였다.

강민혁이 곧장 내각청사로 가니 내각성원들이 총리의 방에 모여있었다.

이미 대흥소식을 들은 총리가 조직사업을 하였다.

총리가 한 조직사업의 주요내용은 첫째로 마그네샤크링카생산의 주체화의 성과를 공고히 하면서 그 생산을 늘일데 대한 문제, 둘째로 무역성에서 판로를 개척할데 대한 문제, 김책항으로 멀리 운반해다 뽑던 물동들을 앉은자리에서 뽑기 위해 륙해운성에서 단천항을 대형짐배들을 받을수 있도록 건설할데 대한 문제들이였다.

총리가 제안한 모든 문제들은 내각성원들의 일치한 지지찬동을 받았다.

단천항건설은 수령님의 유훈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검덕지구의 보물을 실어내다 팔면 인민생활을 위한 많은 자금이 생긴다고 하시면서 단천항을 훌륭히 꾸릴데 대하여 여러차례 교시하시였다. 내각성원들은 이제 단천항을 건설함으로써 인민생활을 높이기 위해 애써오신 수령님의 유훈을 실현할수 있게 된데 대하여 기쁨을 표시하였다.

차철군의 종군기중에서

오늘은 민족최대의 추모의 날이다.

대회장은 짙은 비감에 서려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 주석단에 나오시였다.

전체 참가자들이 일어서서 그이를 조용히 맞이하였다.

그이께서 자리잡고 앉으신 후 한순간이 지나자 장내에는 깊은 밀림이 설레이는 소리와도 같은 이상한 소음이 일어났다.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하신 축가신 그이의 모습에 놀랐던 수만명 사람들이 그때보다 더욱 못하신 그이의 건강에 거의 동시에 낸 소리이다보니 장내를 울린것 같다.

우리 인민이 언제 그토록 상하신 영상을 뵈온적이 있었던가.

나도 놀라왔다. 노상 곁에서 뵈옵다보니 느끼지 못했을뿐이지 그이의 피로가 한계를 넘어선것이 확실했다.

정초부터 줄곧 현지지도길에서 날과 달을 맞이하신 그이이시였다. 드틸수도 어길수도 없는 시간들이였다. 그이의 시간은 조선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축으로 행성이 돌고 조국이 전진한다. 그것을 아시기에 그이께서는 시간을 아끼신다. 그리고 당기신다.

최근에만 하여도 그이께서는 더 자주 왜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르는지 모르겠다고 초조하신듯 말씀하신다.

그이께서 서두르실수록 시간은 사정없이 흐르기만 한다.

무정한 시간, 무정한 세월이다.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시간개념을 초인간적능력으로 당겨가시니 어찌 건강이 따라설수 있겠는가.

어버이수령님을 추모하여 비애에 잠겼던 사람들이 그이의 놀라운 모습으로 하여 더욱 가슴을 부여잡았다.

주석단에 나오실 때 그이께서는 한손으로 주석단책상을 짚으시며 걸어나오시였다. 그 모습을 뵙는 순간 인민들은 터지는 오열을 누르기 위하여 모지름을 썼다.

이 순간 전국의 수백, 수천만시청자들의 심정도 같았으리라.

사람들은 추도사를 들으면서도 그이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자그마한 미동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의 눈에 옆에 앉은 총리에게 말을 건네시는 그이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몇마디 주고받으신 짧은 한순간이였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그들의 비상한 심리가 불러일으킨 정도이상의 반응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일군들의 경우도 례외가 아니였다.

근래에 들어와 여느때없이 격동하는 시대의 숨결은 일군들의 자각성도 최대로 분발시킬것을 요구하고있었다.

그이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내포하고있는 거대한 실천적의의를 늘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그 관철에 시간을 재여가며 자신들을 따라세우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이의 의도, 그이의 구상은 곧 자각성의 기초이며 출발점이기때문이였다.

추모대회가 끝난 후 강부총리가 하는 말이 단천항건설문제였다고 한다. 짐작대로 역시 인민생활문제였다.

요새 그이의 심중에는 오직 인민생활밖에 없다. 가까운 몇해안에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튼튼한 경제적토대를 구축해놓으시려는것은 그이의 확고한 결심이시였다.

그 하나의 생각으로 잠도 때식도 휴식도 잊고계시였다.

추모대회가 있은 다음날부터 편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중앙위원회로, 국방위원회로, 당중앙군사위원회로, 그이를 모시고있다고 생각되는 기관들과 개별적일군들앞으로 수천수만통의 편지가 들어오고있다.

그이를 잘 모셔달라는 청원과 부탁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이의 건강을 상하게 한데 대한 비판과 항의였다. 문책의 감정이였다.

식자가 있고 체면을 생각하며 쓴 편지들에조차 그 감정이 주도적이였다. 그중에는 로동자들, 군인들, 농민들, 가두의 녀성들이 쓴 편지도 있었다.

이런 편지일수록 에돌지 않고 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있다. 인민은 자기들을 위해 바치시는 그이의 로고를 알고있었다. 인민은 자기의 감정을 숨길줄 모른다.

지금 내앞에는 성강의 리대원로인이 보내온 편지가 놓여있다.

강민혁부총리가 보라고 준 편지였다.

그 한 대목을 기록해둔다.

《부총리어른, 그이의 안녕과 건강에 각별히 관심해주시오. 멀리 떨어져있는 우리는 그저 마음뿐이요. 가까이 있는분네들이 책임이 중하오. 생활이 어려워도 일없고 부귀영화는 더 바라지도 않소. 그이께서 건강하셔야 오늘도 있고 래일도 있는거요. 자손만대의 번영이 담보될수 있는거요. 그저 우리가 일구월심 바라는것은 그이의 안녕일뿐이요.…》

어버이수령님을 잃고 비애에 떨던 그날 비내리는 소로길에서 퍼렇게 언 입술을 간신히 놀리며 나에게 터뜨리던 기자의 지탄이 다시금 돌이켜진다.

이 편지야말로 남다른 신임에 울고 행운에 웃기만 해온 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두번다시 받아서는 안될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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