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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행운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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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08-22 22:30 조회5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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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고향길

8

남으로, 남으로!

자동차길을 따라 정찰병들은 패기만만하여 내달렸다.

보병이나 포병들이 자동차나 마차의 덕을 보는데 비하면 정찰병들은 공짜복이 적은 병종이다. 적후에서는 적의 운수기재를 빼앗아 리용할수 있으나 적아가 엉켜돌아가는 전선지역에서 행동하는 경우 그런 호사를 더 누리기 어렵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산발을 골라 행군해야 하고 큰길을 타는 경우에도 적아를 막론하여 누구도 기미를 알아차릴수 없게 행동해야 한다.

지금 그들은 군산시내를 빠져나와 보병들의 행렬을 쑥 앞서서 적후로 빠져나가고있었다. 걸죽한 익살을 던지는 보병친구들의 척후를 멀찍하게 뒤에 떨군 산굽인돌이길에서 《국군》복을 덧껴입어 위장을 끝낸 다음에는 급보행군으로 넘어갔다. 한여름의 군복을 두겹이나 입고 비지땀을 흘려야 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이런 행군에 습관이 되여서 차용대의 말을 빌면 시속 10㎞는 능히 보장할수 있다.

무더웠다. 김매기를 끝내고 호미를 씻는다는 소서무렵이였다. 짓이겨진 밭이랑에 용케도 남아있는 보리포기들도 한낮이 가까와오면서 쨍쨍 내리쪼이는 해볕에 시들해지고 화끈 달아오른 땅에서는 습한 열기가 무럭무럭 풍겨올랐다.

숨이 막히는 속에서도 방금전에 본 처녀에 대한 생각이 리학문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였다. 그 처녀의 모습이 왜서 그리도 가슴 설레이게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아군과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치는 적사이의 공간지대는 상당히 벌어졌다. 구례로 가는 고개길에 이르렀을 때에는 주력부대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도록 행군속도를 늦추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에야 정찰병들의 입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맨먼저 말꼭지를 뗀것은 물론 김동호였다.

《이런 땐 말야. 원두막에 올라앉아서 속통이 시뻘건 수박을 척 쪼개놓구서 말이지, 옛날 고을원이 쓰던 학령선으루 이렇게 부채질을 슬슬 하문사 먹지 않아두 더위란 놈이 감히 범접을 못한다네. 우리 마을에선 이런 날에 늘 그랬다네.》

《원두막이요? 저런거 말이예요?》

목이 타서 입술을 감빨던 하복남이가 안장코를 발름거리면서 둔덕우에 올라앉은 밭가운데를 한손으로 가리켰다. 타는 입술을 감빨던 대원들의 눈길이 일시에 그쪽으로 쏠렸다. 500평정도 되여보이는 비탈밭의 한가운데에 벋치고 선 뚝막이 벼짚으로 엮은 가리우개를 날개처럼 벌리였는데 밭에는 노오란 참외들이 잔뜩 널려있었다.

《저게 참외가 아냐?》 동호의 입이 금시 헤벌어졌다. 투박한 손은 제 무릎을 두드렸다. 갈증에 시달린 눈길은 능청스럽게도 김기전이한테로 돌아간다. 《옳구만, 특무장동무, 참외요!》

《참외면 참외지 어쨌다구 이 야단인가?》

능청스럽기는 김기전이도 짝지지 않아서 딴전을 피우며 모르쇠를 한다. 인민들의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자기가 앞장서서 어기고싶지 않다는 일종의 도피다.

《어, 정말 먹지 않아도 갈증이 쓱싹 없어지누만. 그놈들 잘은 익었다. 우리 마을에도 저런 참외밭이 있었다네. 전쟁이 끝나거들랑 모두들 오라구. 통통한 놈들을 샘물에 척 담그었다가 하나씩 먹으문사…》

김동호는 여전히 느물거린다. 그것이 참외밭을 일부러 외면하려는 대원들에게 화를 돋구어주었다.

《동무네 마을엔 아마 말참외가 많은게지?》

《말참외란건 무슨 새빠진건가, 뚱딴지같이… 그런건 없어. 노랑참외, 배꼽참외, 외참외, 병참외… 그렁한것들이 많지.》

《하하하…》

과연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참외밭이였다. 사래긴 이랑들이 일매지게 뻗었는데 원두막에서는 참외밭주인이 참외를 파는지 몇몇 사람에게 에워싸여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학문은 불쑥 고향생각이 났다. 꼴머슴을 살 때 패악한 지주의 아들인 배달환이가 리학문이앞에서 멀리까지 향내가 풍기는 참외를 먹어대며 《머슴놈아, 먹고싶지? 이건 배꼽참외야. 비싼거야. 머슴놈들은 먹지 못해! 너흰 돈이 없거덩, 잉!》하고 지껄여 약을 올리군 했었다. 오동통한 그 참외가 어이 그리도 구미를 당기던지…

그날 어머니한테 참외를 사달라고 철없이 조르다가 참외대신 욕을 실컷 먹었다.

《넌 무슨 억하심정으로 팔자에 없는거만 찾니? 이 에미 질거죽일 녀석아!》

철없는 아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녀인의 얼굴은 누렇게 떠있었다. 생활고의 아픔은 마음에 먼저 깃들기마련인것을 학문은 그때 알리 없었다.

어린시절의 쓸쓸한 추억이 갈마들자 왜 그런지 마음이 이상스러워졌다. 대원들에게 참외를 실컷 먹여주고싶은 욕심이 그를 사로잡는것이였다.

《특무장, 방법이 없을가?》

그는 참외밭쪽을 턱짓하며 시뭇이 웃었다.

《알았습니다. 이런 때 안쓰면 언제 쓰겠습니까?》

김기전이 제꺽 응수했다. 행주나루에서 로획했던 현금을 필요한만큼 건사한것이 있었던것이다. 그는 덕천이와 복남이를 불러가지고 원두막쪽으로 달려갔다.

그사이에 지형을 살펴보려고 군용지도를 펼쳐든 학문은 길옆의 오동나무그늘에 가앉았다. 둥글둥글한 잎새로 자글자글한 해볕이 호돗호돗 뛰여내린다. 그늘아래 들어앉아도 훅훅 밀려오는 열기에 땀발을 식힐수 없었다.

그런데 원두막쪽에서 흥정이 잘 안되는 모양이였다. 손채양하고 바라보니 김기전이 성이 나서 꿱꿱거리는데 원두막주인령감은 팔짱을 끼고 돌아앉았다. 덕천이와 복남이는 총까지 벗어들고 령감을 잡아먹을듯 노려보고있다.

《대체 왜들 저러는가?》

《령감쟁이가 말을 잘 듣지 않는 모양입니다.》

역시 손을 이마전에 붙이고 그쪽을 바라보던 라동수가 대답했다.

《가보기요.》

강파른 원두쟁이령감은 보통이 아니였다. 장교가 나타났는데도 소 닭보는 태도였다.

《아, 이 두상이 고약하다는건… 참외를 팔지 않겠다구 뻗치는데 소힘줄보다 더 질깁니다.》

덕천이가 하소연했다. 김기전은 자기 직분을 제대로 못해서 지휘관들까지 일부러 걸음하게 만든것이 민망스러워 화가 더 올랐다.

《령감, 사정을 좀 봐달라지 않소. 우리 아이들이 참외맛을 좀 보고싶다구 해서 그러는데… 누가 공짜로 달라오? 옛소, 돈을 받으라니까 그래.》

김기전이 꺼내든 돈뭉테기를 힐끗 돌아본 령감은 그냥 앉은채로 훌쭉 오그라든 볼을 실룩거리며 턱수염을 내흔들었다.

학문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덕천이나 복남이가 그런다면 몰라도 능구렝이 셋쯤은 밸을 따지 않고도 찜쪄먹는다는 특무장이 쩔쩔매는것이다. 괴뢰군행세가 몸에 푹 배이지 못한것이 이런 때 드러났다.

그는 김기전을 밀어세웠다.

《령감! 〈국군〉일선용사들을 뭘루 아는거야? 이 참외밭을 몽땅 결딴내놔야 알겠어? 공짜도 아니구 대금을 푼푼히 주겠다는데 왜 그래? 몽땅 털어먹기 전에 순순히 회계나 치러둬!》

사나운 말투에 원두쟁이가 주름투성이얼굴을 들었다. 밭고랑같은 주름이 무수히 건너간 얼굴, 우물처럼 우묵한 두볼, 감정의 굴곡을 내비칠줄 모르는 무표정한 그 얼굴은 고생많은 한생의 모습인듯싶었다.

생기없이 어웅한 그의 두눈을 그냥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학문은 두말없이 원두막옆에 무져있는 3개의 참외망태기를 한손으로 척 들어서 덕천이와 복남이의 어깨우에 메워주었다.

장사같은 그 힘꼴을 본 령감의 흐리멍텅하던 눈에 한줄기 영채가 지나갔다. 놀라움과 의문과 호기심이 뒤섞인 두눈동자는 학문의 거동을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였다. 김기전이 늙은이의 베적삼 엽낭에 돈을 쓸어넣어주었다.

원두막을 떠나자니 리학문 그자신도 좀 기이는데가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원두쟁이는 여전히 이쪽을 뻔히 바라보며 앉아있는데 가긍한 그 정상을 보고 선뜻 발걸음을 돌리기 어려웠다. 심한 원망을 남기고싶지는 않았다. 그래 일부러 누그러진 소리로 물었다.

《령감, 구례로 가자면 어느 길로 가야 하나?》

그제서야 원두쟁이는 가죽이 밀리는 두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서며 여윈 팔을 쳐들었다.

《저―기…》

하지만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원두막기둥에 기대여 서서 광경을 살피던 젊은이 하나가 성큼 나섰던것이다. 원두쟁이의 아들쯤으로 생각했던 젊은이였는데 주저하는 티도 없이 다가와 꾸벅 인사부터 하더니 시원시원하게 접어드는것이였다.

《장교님, 거기로 가는 길은 내가 잘 압니더. 내가 길안내를 해드립니더. 나도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입니더.》

(이자는 대체 누구야?!)

검청색의 광목바지에 때가 끼고 땀에 절어 얼룩덜룩한 토목샤쯔, 코숭이가 해여져 엄지발가락이 쑥 삐여져나온 지하족… 소지품이란 검은색보자기에 둘둘 말아 어깨에 걸머멘것뿐이였다.

몸집은 체소한편인데 다부졌다. 얼굴은 동그스름한편이나 입술이 도툼하고 굽실굽실한 반고수머리카락이 눈섭가까이까지 돋아있어서 이마가 별로 좁아보이는것이 특이하게 인상적인 청년이였다.

찬찬히 훑어보는 리학문의 눈길과 마주치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거짓이 없어보이는 순박한 눈빛에는 엷은 미소가 흘렀다. 남도사투리의 말씨는 종조리 열씨까듯 거침이 없었다.

《날 믿어두 랑패 없습니더. 내 집은 함흥에 있습니더. 원래의 고향은 부산이구요. 부산시 렴중정이라는데가 있습니더. 8. 15전에 돈벌이가 좋다길래 남들을 따라 고향떠나 성진제강소에 가서 전공으로 일했습니더. 장진강발전소공사판에다 문평전기공사장… 안 가본데가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전공질을 했구요. 왜놈들이 쫓겨간 후에는 함흥서 장갈 들었는데 첫아기가 생기니 고향생각이 나서 견디겠더라구요. 부산에 계시는 부모님생각으로 속태우던중 사륙년도 겨울에 고향엘 잠간 다녀올 궁냥으로 녀편네와 금방 낳은 아들녀석을 놔두고 부산엘 와보니 부모님들은 벌써 10월인민항쟁때 오라질 승만이놈들한테 다 학살당했습니더. 도루 함흥엘 가자고보니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겠구, 갈데올데 없는 비렁뱅이신세가 돼서 그날그날 막벌이로 연명해오던 참입니더. 헌데 동란이 일어나고 인민군대가 쳐나온다기에 북으로 들어가던 길이였습니더. 헌데 오늘 인민군대동지들을 만나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더. 나도 내 고향을 해방하는 싸움에 참가해서 부모님들의 원쑤를 갚고 고향도 해방시키고… 조국이 통일된 다음 함흥에 돌아갈 작정입니더. 날 받아주십시오. 6. 28때 서울선 모두가 의용군이 되였다는데 나도 잘 싸울수 있습니더.》

누가 말허리를 끊어버릴가봐 걱정인듯 청산류수로 쏟아내는 말솜씨가 여간이 아니였다.

(이―게?!)

학문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겉으로는 위혁적인 태도를 보였다. 괴뢰군복장을 한 사람들앞에서 꺼리낌없이 속마음을 터놓는것이 이상스러웠다. 인민군대인줄을 알아차린것인지 아니면 교활한 암해분자인지 가늠할수가 없었다.

청년은 오달져보여도 비위가 이만저만 아닌지 반죽좋게 헤벌쭉 웃었다.

《동지들, 그러지들 마십시오. 내 다 압니더.》

《뭘 안다는거야?》

《정 그럼 말하겠습니더. 나는 아까 동지들이 참외를 사자고 할 때 벌써 알았습니더. 백성들의걸 돈내고 먹겠다는 〈국군〉이 이 하늘아래 어데 있습니꺼? 아무리 지어먹은 행패를 부려도 내 눈은 못 속입니더. 그러지 말고 날 꼭 받아주십시오.》

남의 사정이나 애원에 쉽게 넘어갈줄 모르는 학문이였으나 이번에만은 사정이 달랐다. 명민한 눈빛과 조리있는 말솜씨가 곁들여지는 간청에 두손 들고야말았다. 별수가 없었다. 감동되기도 했고 이겨낼수 없는 호기심도 생겼다.

《전공노릇을 했다지?》

《감히 어디라고 거짓말 하겠습니꺼.》

동문서답이였다.

《그럼 무선기를 다룰수 있겠소?》

무거운 예비전원까지 메고다니느라 고생하는 차용대의 수고를 덜어주고싶은 생각이 학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있은것이였다.

《그쯤이야 아이들 장난 한가지입니더. 내 이름은 룡조입니더, 김룡조. 전주 김씨지요.》

다라진 겉모습과 달리 비위가 이만저만 아니였다. 그는 자기의 재간을 증명해보이려는듯 어깨에 메였던 검은색보짐을 풀었다. 그 보짐속에는 헌천으로 둘둘 감싼 전기부속품들이 많았다. 진공관에 납땜자리가 있는 알지 못할 부속들이 무둑했다.

《그 많은걸 그냥 메고 다녔소?》

《이게 없으면 험한 세상에서 굶어죽은지 오랠겁니더.》

《좋소, 함께 가면서 토의합시다.》

시원달큼한 참외로 갈증을 가시고난 정찰병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길을 떠났다.

천성적으로 사교솜씨를 타고난듯 김룡조는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쉽게 섭쓸렸다.

《내가 바로봤지요? 인민군대와 〈국군〉은 본태부터가 다르다니꺼니요.》

《이 친구 괴짜구만. 맘에 들어.》

제일 반가와한것은 차용대였다.

《이제부터 자넨 내 조수일세.》

《아무거래두 난 좋습니더. 인민군대이면 그만이니꺼니. 어― 〈국군〉놈들은 바지에 오줌을 싸갈개면서 도망가더군요. 얼마나 바빠났는지 참외밭에 들려볼 엄두도 못 내거던, 하하… 당해낼 재간이 있나, 제깟것들이!》

《그래? 허허허…》

《아마 구례에만 아니구 하동에두 놈들이 없을겁니더. 다 달아났을겁니더.》

《그걸 어떻게 장담해?》

《글쎄 두고보라니꺼니요.》

《부과장동지, 이 친구 추리판단력이 굉장합니다. 정찰병기질이 있는가 봅니다. 여보게, 어디 두고보자구, 동무말이 맞는가.》

차용대는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웃었다. 룡조는 끝까지 우겨댄다. 그들을 지켜보던 김동호가 슬며시 끼여든다.

《헌데 임자 아이아버지라며?》

룡조의 눈섭이 치켜올라간다.

《건 왜 물어요?》

《왜 묻긴, 실은 아이가진 사람이 중대에 나 혼자였는데 어깨동무가 생겼으니까 좋아서 그렁하지.》

《아하하…》

《어허허…》

대원들이 법석거리는 소리가 학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전쟁전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권녕신이라는 처녀대학생을 만나던 때를 회상하고있었다.

그날은 일요일, 해빛이 따사롭게 내리던 봄날이였다. 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는 중국인민해방전쟁이 끝난 후 조국에 돌아올 때 중국 단동에서 알게 된 민광덕이라는 교수를 만나려 김일성종합대학을 찾아갔다.

휴식일이여서 조용할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교내에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진달래가 만발한 룡남산기슭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휘넓은 대학에 들어선 학문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번듯한 3층교사가 민족보위성청사보다도 웅장해보였고 키높은 유리문으로 들여다보이는 중앙홀은 넋을 훌 뽑아내는듯싶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대리석란간들이 여기저기로 뻗어있어서 으리으리했고 지어 위압감까지 풍겼다. 군복입은 자기가 불청객처럼 어울리지 않아 어깨가 졸아드는듯 부자연스러워졌다.

(흠, 난 군인이다, 이 모든걸 지키는…)

마음을 도슬러먹고 도고히 목대를 쳐들었지만 당장 급한것은 어디로 가야 그 안경쟁이교수를 만날수 있겠는지 도무지 가늠할수 없는것이였다.

민광덕교수는 중국 동북에 널려져있는 혁명가유자녀들을 찾는 사업으로 중국땅을 편답하고 돌아오던 길이라는데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일여덟이나 거느리고 다니는 사나이의 행색에 호기심을 품은 리학문은 그에게 사연을 물었다.

교수는 조국에서 부모잃은 유자녀들에게 기울이는 애정과 배려에 대해 쉰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그때 감동이 너무도 컸던 학문은 교수를 도와 아이들의 편의를 보아주려고 애쓰게 되였었다. 만년필이며 전지같은것을 쥐여주기도 했다.

교수는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곱씹으면서 평양에 오거들랑 자기가 있는 종합대학에 꼭 찾아오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는 리학문에게 조국의 가슴뜨거운 현실을 알게 해준 첫 사람이였다.

학습과 훈련으로 드바쁜 학교생활속에서도 아무때건 짬을 내여 만나보리라 마음먹고있었으나 반드시 만나야 할 인연이 있는것은 아니여서 차일피일 미루던중 졸업이 눈앞에 박두한 이무렵에야 조바심이 생겨나서 이렇게 걸음한것이였다.

현관앞에서 되돌아나온 그는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이런 때는 면구스러움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정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마침 백양나무밑에 놓인 돌의자에 홀로 앉아 책읽는 처녀가 눈에 걸려들었다. 눈처럼 흰 옥양목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받쳐입은것이 멀리서 보기에도 무척 단정한 쌍태머리처녀였는데 무슨 책을 읽는지 발그스레한 얼굴에는 미소가 남실거렸다.

학문은 그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투박한 군화발소리에 처녀가 얼굴을 들었다. 자기에게로 곧추 다가오는 군관을 바라보는 포도알같은 두눈동자가 점점 우로 쳐들렸다.

《안녕합니까? 만날만 합니까?》

낯선 군관이 멋스럽게 거수경례까지 붙이는 바람에 저으기 놀란 처녀는 읽던 책을 한손에 접어들고 사뿐 일어서며 말을 더듬었다. 복스러운 얼굴에 떠돌던 미소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저… 저를요?!》

《예. 다른것은 아니고… 어디로 가야 민광덕교수를 만날수 있겠는지 알으켜줄수 없겠습니까?》

그제서야 의심이 풀린듯 처녀는 퍼그나 활기롭게 응대했다.

《민광덕선생님을 찾아오셨습니까? 그 선생님은 우리 학부 조선어문학강좌에 계십니다. 그 강좌는 2층에 있습니다.》

퍼그나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학문에게는 난처하기짝이 없는 안내말이였다. 방금 들여다본 황홀한 홀에서 그 강좌를 찾아낼수 있겠는지 도무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던것이다.

《2층이요? 2층이라…》

선듯 돌아서지 못하는 상대의 속을 넘겨짚어본 모양 처녀는 친절하게도 앞장에 섰다.

《저와 함께 가십시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으나 그 말이 쉽게 나가지 않아 그저 따라섰다. 큼직한 유리문을 지나 반들거리는 대리석층계를 오르면서도 처녀의 뒤모습을 걸탐스럽게 지켜보았다. 이상한 일이였다. 어디 가서나 처녀이야기만 나오면 화가 날 지경으로 질색이던 그가 유명짜한 대학에 온때문인지 아니면 한껏 우러러보이는 종합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여서인지 끌리는 마음을 주체할수 없는것이였다.

학문의 속마음을 짐작할수도 없는 처녀는 때각때각 구두소리를 내며 층계를 올라 대리석바닥이 알른거리는 복도를 한참이나 걸어갔다. 해빛이 명주필처럼 흘러드는 창문곁에 접이식의자들이 줄느런히 놓인 휴계홀에 학문을 세워둔 처녀는 강좌에 인츰 갔다오겠다면서 사라지더니 서분한 기색으로 되돌아왔다.

《참 안됐습니다. 민광덕선생님은 계시지 않는군요. 지방출장을 가셨다는데 한주일은 실히 걸려야 돌아오시게 된답니다.》

상대가 공걸음하게 된것이 자기 잘못이기나 한듯 미안스러워하는 처녀의 모색은 처음보다 더 아름다왔다. 튀여나올듯싶은 검은 눈동자에 넘치는 정기며 통통한 두볼에 패이는 작은 볼우물, 언제나 웃는것 같은 입술이며 륜곽이 선명한 두어깨… 그보다도 부드럽고 유연해서 친절감이 넘치는 처녀의 말씨가 마음을 끌어당기는것이였다. 학문은 민광덕교수를 만나려던 일이 허탕이 된데 대한 서운함은 전혀 없고 자기가 마치 이 처녀를 만나려고 걸음한듯싶은 착각까지 들었다.

《그럼… 돌아가야지요. 다음번에 오겠습니다.》

말을 끝낸 다음에야 혀를 깨물었다. 공연한 말을 한것이다. 만나려 했던 사람을 만날수 없게 된 형편에서 돌아가야 하는것은 당연한 일인데다가 다음번에 오겠다는것을 부디 생면부지의 이 처녀한테 말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처녀는 그런것엔 개의치 않았다.

《그러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허, 그참! 정말 인사성이 밝은걸. 겉볼안이라더니 인물이 고우니까 마음씨도 고운데…)

이름을 묻고싶었으나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서 거수경례를 붙이고 돌아섰다. 올라왔던 층계쪽으로 가면서 처녀가 자기를 지켜볼것을 생각하니 걸음새가 부자연스러워졌다.

《아니, 그쪽이 아니고 저쪽으로 내려가셔야 합니다.》

짐작했던대로 지켜보던 처녀가 고맙게 보내준 목소리였다.

학문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처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정찬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때각때각 경쾌한 발걸음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저와 함께 내려가십시다.》

다시 처녀의 뒤를 따라 현관밖으로 나서며 그는 점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제길, 이 못난이야. 연약한 처녀앞에서 뭘 그리 주접이 들어서 그래? 대담해라! 정찰병이 아니냐!)

거듭 자신을 타매하며 속으로 부르짖었어도 어쩐지 렬세감에 가슴이 공허해지는것을 다잡을수가 없는것이였다.

연푸른 하늘에서는 해가 재글재글 웃었다. 교사를 에워싼 교재림의 푸릿한 버드나무가지도 흐느적거리며 그를 비웃는듯싶었다.

학문은 까닭없이 솟구쳐오르는 분격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형편없이 덜퉁한 자신의 목소리를 가려들었을 때는 놀란 처녀가 두손을 가슴앞에 모두어쥔 때였다.

《알고 지냅시다. 동무 이름이 뭐요?》

몹시 성난듯싶은,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노여움도 표현되지 않는 처녀의 얼굴이 그를 외면하였다. 처녀를 달래줄 재간도 용기도 학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는 대단한것이라고 할수 있었지만 처녀의 이름을 함부로 묻는것이 큰 실례로 된다는것은 익살많은 동료들의 잡담을 들어서 터득한 《상식》이였다. 부지불식간에 그런 례의를 어긴것이였다.

《실례했소.》

당황한 그는 이 한마디만을 남기고 영춘화가 노오랗게 피여웃는 언덕길을 천방지축 내렸다. 그러느라니 또다시 자신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걷잡을수 없이 머리를 쳐들었다. 한참 걸어가다가 참아내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다. 처녀는 이미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례의 돌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들고있었다.

(이런 멍청이라구야. 이름도 알아내지 못하구 쫓겨가다니…)

그에게는 끈덕진데가 있었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은대로 안되면 기를 쓰고 접어드는것이 그의 성미였다.

곤경중에도 일이 될 조짐이 있었던 모양인지 한 남학생이 마주오고있었다. 길쑴한 얼굴에 하관이 둥실한것이 그리 여물어맺히지 않아보이는 젊은이였다.

학문은 피뜩 생각키우는것이 있어서 그를 불러세웠다. 군관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난 청년은 싱긋 웃으며 선듯 긍정의 뜻을 보였다.

《저 동무 말입니까? 예, 조선어문학부의 녕신동뭅니다. 정말 괜찮은 동무이지요.》

《녕신이라… 이름부터가 특이하구만. 성은 뭡니까?》

《권입니다. 권―녕―신. 그럼 전…》

남학생은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인상좋게 웃으며 가버렸다.

(젠장, 이렇게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정찰병이란게…)

정찰병이면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텐가. 처녀를 적의 《혀》사로잡듯 할수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오늘 당장 생나무꺾듯 할수는 없다. 다음번에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찾아와보자. 학부와 이름도 알아냈으니 빈탕이라고 할수는 없는게 아닌가.

다음번 일요일날에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먹고 돌아섰다. 허나 인차 부대로 배치되였고 그러다보니 처녀를 찾아갈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군인으로서, 정찰일군으로서 분망한 속에서 처녀를 만나려고 일부러 걸음할만큼 녀성에 대한 관심이 높은 리학문이 아니였다. 날이 갈수록 처녀에 대한 생각은 그의 마음속에 희미해져갔다. 다만 생김새도 마음도 고왔던 인상만이 진하게 새겨져있었을뿐이였다.

추억할것이란 이것이 전부였다. 별로 깊은 인연이라고 할수도 없는것이다. 아마 권녕신이라는 처녀에게는 문득 한번 만났던 그날의 소좌가 기억에 남아있지조차 않을것이다. 하지만 그 처녀를 머나먼 남진의 길에서 다시 만나고보니 학문에게는 새삼스럽게 그날의 인상이 강렬한것으로 안겨오는것이였다.

(녕신? 무슨 뜻일가?! 부모들이 무슨 깊은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일텐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더듬어보았다.

《부과장동지, 하동입니다.》

라동수가 귀띔해서야 학문은 펄쩍 제정신이 들었다. 살펴보니 그리 크지 않은 시가지가 앞에 있었다.

김룡조의 말대로 하동에도 적정이 없었다. 놈들은 방어에 불리한 이곳을 미련없이 포기하고 달아난것이였다.

룡조의 장담이 현실적으로 확인된셈이 되였다. 타고난 정찰병이 절로 굴러들었다면서 모두들 추어올리는 바람에 룡조의 어깨가 쑥 올라갔다.

하동에 도착하여 적정을 확인하고난 학문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너무 조용한게 이상하구만. 좀 더 나가봅시다.》

그는 진주방향으로 약 20~30리정도 더 나가보기로 했다. 때마침 놈들이 버리고간 낡은 스리쿼타가 한대 있어서 라동수와 차용대만을 태우고 차를 몰았다. 도로와 주변을 눈여겨 살펴보아도 적정은 없었다. 어디라없이 잠잠했다.

해는 이미 서산마루를 넘어가고 저녁노을이 엷게 비꼈다. 산천은 석양아래 시진하여 누워있었다. 이삭팬 벼포기들이며 수염을 빼문 강냉이이삭들이 목가적인 기분까지 자아냈다. 노르끼레한 조이삭이 고개숙인 밭머리에 서있는 허수아비도 뭇새들의 성화를 외면하고 한가롭게 산천구경만 하고있다.

《당장은 별일 없을것 같구만. 중대장동문 경계를 조직하시오. 용대! 무선을 결속하라구.》

차용대가 익숙한 동작으로 적정이 없다는 전파를 날렸다. 곧 답전이 왔다.

《부과장동지,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랍니다.》

《그래. 부대가 예까지 오자면 퍼그나 시간이 걸릴게요. 에― 오랜만에 발편잠을 자보게 됐군.》

그들은 다시 하동에 돌아왔다. 경계조직을 마친 라동수가 독립가옥 2층다락방에 거처지를 정했다고 알려왔다. 그곳은 사방 뻗어나간 도로가 손금처럼 내려다보이고 경계초들에서 보내오는 신호도 제때에 받을수 있는 곳이여서 나무랄것이 없었다.

정찰병들은 며칠째 밀린 잠을 봉창할 심산으로 닦은 보리쌀로 저녁을 에우고 일찌기 누웠다.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하자 찌륵 찌르륵 풀벌레들이 성수나서 울어댔다. 다락방의 어느 구석에서는 귀뚜라미가 씨륵거렸다. 모기들이 잉잉거리며 귀찮게 굴었다.

라동수와 함께 경계초들을 돌아보고 다락방에 돌아온 학문은 습관대로 지도를 펼치고 전지를 비쳐가며 지형을 확인해보았다.

하동은 구례와 순천, 진주로 통하는 갈림길들이 있는 삼각지점에 있었다.

(하동에서 진주로 통하는 도로가 중요해. 하동의 동쪽 두전골안으로 뻗어가는 이 도로를 통제하자면 바로 이 180. 7고지를 장악해야 할것이다. 이 고지를 놈들이 그냥 내버렸을수는 없을텐데… 이상한 일이다.)

《부과장동지, 이젠 좀 쉬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부시럭거리던 라동수가 일어나 앉았다.

《먼저 쉬오, 피곤할텐데. 중대장도 힘들지?》

《예, 헐치 않습니다. 매일 수백리씩 냅다 걷는다는게 헐한겁니까. 허…》

《그럼, 헐한게 아니지. 이 걸음이면 며칠안으로 부산까지 가닿겠는데…》

동수는 두손으로 자기 얼굴을 뻑 내리훑었다.

《첨엔 남해안까지 어느 세월에 가겠나 했는데 이렇게 빨리 와닿게 되니 더 신심이 생깁니다. 사실 개성서부터 난 부과장동지한테 의견이 있었지요. 아 이건 갈길은 멀고먼데 정찰대란게 전투판을 벌려야 한다니까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댔지요.》

과거형으로 하는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어둠속에서 고르롭지 않은 숨소리가 들렸다. 라동수는 아마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이미전부터 기다렸던것 같았다. 약간 흥분이 실린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어떤 땐 내가 어떻게 정찰병이 되였을가 하는 생각이 들군 합니다. 정찰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막벌이군이였던 내가 정찰군관이 됐다는게 꿈만 같아서지요. 그래 군복을 입은 다음부터 일을 잘해보자구 애를 박박 썼구요. 헌데 정찰이란게 참 힘든 노릇이더란 말입니다. 천성적인 자질, 뛰여난 능력이 없이는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게 정찰병의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구요. 과장동지의 요구에 따라 중대를 지휘하자니 얼마나 힘이 들던지. 우선 세계적인 판도에서 눈을 굴려야만 하겠더란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과장동지는 늘 정찰사업의 규범에 대해 말했는데 얼마나 엄격하던지… 그런데 부과장동지가 온담부터 가만 보니까 규범이란게 별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싸움에 필요한게 규범이겠는데 무슨 까다롭게 생각할게 있겠습니까. 부과장동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학문은 동수가 심중한 말을 꺼낸것이 마음에 들었다. 언제이건 한번 말해주자던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는 흔연한 어조로 마음속에 늘 지니고있는 자기의 신조를 밝히고싶었다.

《흠, 난 그 어떤 군사교범보다도 항일빨찌산식전법대로 싸워야 한다고 보오. 김일성장군님께서 놈들을 그저 밀고만 나가지 말고 철저히 소멸하라고 하시지 않았소. 그런데 우리가 일사천리로 내닫기만 한다고 어떻게 임무를 완수했다고 하겠나. 우리의 정찰전법은 명실공히 우리 식으로 되여야 하고 우리 식이란 곧 김일성장군님식이 아니겠나. 장군님께서 하라신대로 하면 그게 바루 우리의 규범이고 원칙인거지.》

《그렇군요. 하여간 빨리 부산까지 냅다 밀자면 우리가 더 빨리 적후에 진출해서 놈들을 더 큼직큼직하게 포위소멸해야지요. 그러면 부과장동지와 함께 남해도에도 가보게 되겠지요?》

《지금보니 중대장동문 랑만가로구만. 하긴 랑만적이라고만 볼수 없지. 부산해방이 이제는 현실적인거니까.》

《그렇구말구요. 하하하…》

《하하하…》

밤이 깊었다. 그들은 자리에 누웠다. 학문은 마음속으로 지형도를 더듬어보았다. 하동에서 지척인 곳에 고향 남해섬이 있다.
하루길도 채 안되는 곳이다.

그리도 그리웁던 고향섬! 뿌듯한 향수가 마음속에 가득 메여올랐다. 당장이라도 떠나면 새벽녘에 삼천포나루에 가닿을수 있고 몇번 노를 저으면 아니, 헤염을 쳐도 해뜨기 전에 고향집뜨락에 들어설수 있을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찌되였을가?! 누이와 동생들은?!… 일본으로 떠났던 형은?!…)

가고싶었다.

(그러나 부산이 앞에 있다. 이제 직선길로 삼백리만 더 가면 부산을 해방할수 있게 된다. 부산을 해방하고 가리라. 남해섬아! 이 아들을 기다려다오.)

사무쳐오는 충동을 끝내 이겨낼수 없어서 전투가방을 끄당겼다. 전지불로 비쳐가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보고싶은 아버지, 어머니! 당신들의 막내아들 리학문이 문안드리옵니다. 나는 어엿한 인민군대 군관이옵니다. 우리 부대는 지금 진주와 마산, 부산을 해방하는 결전을 벌리고있습니다. 이제 곧 남해섬도 해방될것이니 부모님들도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에 앞장서는것으로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어 잘 싸워주십시오. 며칠내로 고향에 갈것이니 그때 만납시다.…》

다 쓴 편지를 세번째로 읽어보고나서야 고이 접어서 안주머니에 간수한 다음 전투가방을 베고 누웠다. 가슴이 설레여 잠들지 못할것 같더니 쌓인 피로가 여간한것이 아니여서 곧 깊은 잠에 들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남해섬! 참대숲이 울창하고 하얀 파도가 쉬임없이 밀려오는 섬기슭 모래불로 새 군관복을 끼끗하게 차려입은 리학문이 달려간다. 그 뒤로 대학생복의 처녀가 따르고있다. 권녕신이라는 그 처녀다. 앞서 달리던 학문이 동백꽃을 꺾어든다. 처녀의 란만한 웃음소리… 그의 가슴에 안겨지는 진분홍의 아름다운 동백꽃송이!

《학문아!―》

저 멀리 마을쪽에서 흰옷입은 사람들이 달려나온다. 그리운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이다. 배나무집 막내가 온다는것을 어떻게들 알았는지 온 마을이 떨쳐나섰다.

《아버지! 어머니!》

목메여 불렀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제길! 다시 또다시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소리는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가?! 목이 쉬여버렸나? 아 그래, 짙은 포연을 많이 마신탓인게야.)

학문은 기침을 톺아올렸다. 페병환자처럼 자꾸만 쿨럭거리니 처녀가 아연실색하여 동백꽃을 든 손으로 얼굴을 가리운다.

(이런 망신이라구야. 처녀앞에서 이게 무슨 꼴이람!)

참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어도 야속하게도 줄기침은 멎지 않는다.

(이젠 그만, 그만 멎어라! 망할 놈의 기침! 내가 언제 이런 병신짝이 되였나?)

너무도 안타까와서 선자리에서 뱅뱅 돌아치던 끝에 그만 잠을 깨고말았다.

별이 총총한 밤이였다. 사위는 고즈넉한 정적에 묻혀있다.

(후― 별난 꿈을 다 꾸었군.)

허거픈 생각에 도리머리를 했지만 마음속에는 아수한 감정이 밀물쳐들었다. 고향으로 가는 꿈을 꾼적이 벌써 몇번째인지 모른다. 이제는 정말 당장 래일이라도 고향마을에 들어설것만 같은 감정이였다. 부산을 코앞에 둔 지금 그 감정은 더욱 강렬해진것이였다.

(아무렴, 전쟁을 이기구 고향에 떳떳이 가구말구. 그런데 헛참! 어떻게 되여 그 처녀와 함께 가는 꿈을 꾸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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