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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행운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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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08-21 14:15 조회5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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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고향길

7

정찰대는 남으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금강방어선에 대한 적정을 무선으로 부대에 알려준 다음부터 군산을 향해 밤낮을 가림없이 걸었다. 이때까지는 혼잡을 이룬 적들속을 뚫고 뻐젓이 행군했지만 전파를 날린 후부터는 놈들이 저들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인민군정찰대의 활동을 감촉하고 촉수를 곤두세울수 있었기때문에 각성해야 했다.

날씨는 몹시 무더웠다.

《이런 삼복엔 말이지, 단고기를 후더분하게 먹고 느티나무아래서 낮잠을 자야 해.》

김동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알기는 잘 안다, 복더위 단고기엔 낮잠이 아니라 강냉이밭김을 매야 돼. 그래야 땀발이 쭉 선다는걸 몰라?》

남보다 갑절이나 큰 배낭을 걸멘 김기전이 시까슬렀다. 그러자 동호는 킁 코김을 내불었다.

《허튼 소리 말라구요. 특무장은 거꾸로 말하는 재간이 있으니까 그렁하는걸 내 모를줄 아슈? 에, 에― 무슨 날씨가 이렇게 찌물쿤담! 이런 땐 단고기보담두 승용차생각이 나는구먼. 거 개성에서 뺏아탔던 차가 참 기맥혔지. 지금쯤 포병친구들이 그 차신셀 톡톡히 질테지.》

《그렇게 속이 알알하면 저 길가에 내려가서 기다렸다가 찾아타고오게나.》

《쳇, 누가 속이 아파서 그렁하나, 그저 그렇다는거지. 흐흐흐…》

《발바닥이 아파났겠지, 어허허…》

종대는 도로를 낀 수림속으로 흘러갔다. 가고가도 끝이 있을상싶지 않은 행군이였다. 목에서는 겨불내가 확확 풍기고 군복은 팥죽땀에 푹 젖었다. 뻣뻣한 괴뢰군 군복바지가랭이가 땀에 젖은 무릎에 걸려 거치장스러웠다. 이런 더위속에 벌써 백여리를 행군해오려니 자동차생각이 날만도 했다.

대렬을 이끌고 맨 앞에서 걸어가는 학문이도 발동기소리가 들리지 않나 해서 산아래쪽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것이였다. 무더위속에 힘겹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시간이 늦어지는것이 안타까왔다. 이제라도 자동차가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 빼앗아타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부채질하려는듯 우르릉, 쾅! 쾅! 포성이 들려왔다. 금강강행도하를 위한 준비타격을 시작한 사단의 포소리였다.

(잘 조겨대는군. 금강을 도하하면 인차 발뒤꿈치를 바싹 따르겠는데… 이렇게 도보로 가다간 느렁뱅이라고 보병친구들의 놀림이나 받기 좋겠는걸.)

눈앞에는 느물거리는 1련대장 한태설의 텁석부리얼굴이 떠올랐다.

전쟁 첫날에 만나보고는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번 금강도하에서 공주방면은 1련대가 맡게 되였다는것을 학문은 알고있었다. 그런즉 이제부터는 한태설의 련대가 정찰대와 한곬으로 남진해나가게 될테니 어느때든 만나게 될것이다. 이렇게 걸음을 늦잡다가는 래일이라도 당장 만나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면 한태설은 서글서글한 성미그대로 정찰병들이 거부기걸음을 한다고 씨까스르며 싱글거릴것이다.

(무슨 수가 있긴 있어야겠는데…)

오늘따라 지나다니는 자동차 한대 보이지 않는다.

산릉선을 타고 고개마루에 내려섰다. 고개길을 굽이굽이 돌아오른 차길이 그 고개마루에 뻗어올랐다. 어저귀며 속새풀이 무성한 속에 잘 자란 등나무가 돌배나무에 의지하고 렴치좋게 머리를 들었다. 길손들이 쉬여가기에 맞춤하도록 그늘이 드리워진 그 아래에 뜻밖에도 화물차 한대가 서있었다.

《여여, 자동차다!》

김동호의 큰 목소리에 이어 서뿔리 덤비지 말라고 여럿이 쉿! 하는 소리…

이런 산고개에서 자동차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학문은 기이한 생각마저 들었다.

옷차림을 바로하고 길가에 나선 그는 화물차쪽으로 곧장 다가갔다. 어찌된셈인지 인적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차번호를 보니
괴뢰군운수대의 차였다. 적재함도 운전칸도 비여있었다.

(운전사 이놈은 어디 갔나? 분명 이 근방에 있겠는데…)

사방을 둘러보던 리학문은 운전칸문을 열고 경적단추를 꾹꾹 눌렀다.

《빵! 빠방!》

《뉘기요?》

등나무덩굴에서 좀 떨어진 바위뒤에 괴뢰군사병의 헝클어진 머리가 불쑥 돋아나더니 기름때가 짜들짜들한 모자를 얹으며 황황히 이쪽으로 엎어질듯 달려왔다. 너무 더워서 그늘아래 땀들이던 참인지 아니면 상급의 시달림을 받지 않는 단독운행때 밀린 잠을 보충하느라 낮잠을 자고있었는지 눈이 게슴츠레한 그놈의 군복앞섶은 활 열려있었다. 기름에 고무가 녹아빠진 신발이나 소매끝이 너슬너슬한 군복만 보아도 고생살이가 막심하다는것이 첫눈에 알린다.

《시퍼런 대낮에 차를 세워놓구 뭘 하나?》

학문의 목소리는 스스럼없으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소령의 계급장을 힐끔 살펴본 운전사놈은 애된 얼굴에 해사한 아첨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너무 피곤해서… 좀 쉬여가려구…》

《자식! 인민군대가 코앞에 왔는데 낮잠을 자? 너 혹시 인민군대를 기다리는게 아냐?》

《예? 무슨 말씀을… 장교님, 하늘이 내려다봅니다요.》

그놈은 덴겁해서 기름때에 더러워진 두손을 활활 내흔들면서 뒤걸음쳤다.

학문은 아량이나 베푸는듯 말투를 푹 낮추어 소탈하게 물었다.

《어디루 가는 길인가?》

《군산 갑니더.》

《거 마침이군.》 그는 운전사의 어깨를 툭 쳐주고 정찰병들에게 꿱 소리쳤다. 《야! 이 차가 군산쪽으로 간다. 다들
차에 오르라!》

그리고는 장교다운 틀을 차리며 운전칸에 넌떡 올라앉아 차문을 후려닫았다.

《여, 속도를 좀 내라. 시간이 바빠서 그래.》

《알겠습니더.》

자동차는 떠났다.

차가 흔들리는대로 몸을 맡기고 한참 앉아있느라니 졸음이 왔다. 학문은 소리를 내여 긴 하품을 하며 말을 건넸다.

《군산까지 둬시간쯤 가나?》

《웬걸요. 밟으면 한시간안에 알도리가 있습니더.》

엄엄한 소령이 너나들이로 대해주는 바람에 사기가 오른 운전사는 자동차가 들추는대로 엉뎅이를 들썩거리며 주어섬겼다.

《그래? 헌데 거기엔 자주 가군 하나?》

《예, 군산비행장에 가서 후방물자를 실어오군 하는데 우리 운수대에선 이래뵈두 내 차가 그중 낫다구 뻔질나게 뛰웁니더.》

《자식, 이따위 너절한 털털이를 가지고서 자랑질이야?》

《헤헤… 그런 판입니더.》

군산가까이에 이를 때까지도 막아서는 적이 없었다.

시내로 들어설 때에야 차단초소에 맞다들었다. 시꺼먼 까마귀제복을 입은 경찰놈들이 뻗치고 서서 격발기를 절커덕거렸다.

《누구야? 어디서 오는가?》

자동차에서 내려선 학문은 태연히 보초앞으로 다가가 다짜고짜 한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이놈의 자식아! 사람을 보구도 몰라? 〈국군〉 일선부대다! 네놈들은 여기서 거들거리며 뭣들 하는거야?》

목대가 굵고 체격이 거쿨진 《국군》소령이 붉그락푸르락하며 펄펄 뛰는 서슬에 갱핏한 보초놈은 말뚝처럼 꼿꼿해졌다.

《소령님! 서울을 닁큼한 빨갱이들이 지금 금강을 도하하기때문에 군산에 있는 우리 경찰들은 당장이래도 퇴각할 준비가 되여있습니다.》

깍듯한 경례를 해보인다는것이 오히려 붙는 불더미를 쑤셔놓은 격이 되여버렸다. 격노한 소령이 권총을 뽑아들고 꿱꿱 소리질렀던것이다.

《뭐―야? 싸우지도 않고 내뺄 궁리를 했단 말―야? 비겁한 놈들! 여기 초소장이 누구야? 당장 불러와!》

초소뒤 골방에서 팔소매에 금줄을 늘인 뚱뚱보가 달려나왔다.

《네가 초소장이야? 전선에선 피흘리며 싸우는데 후방의 네놈들은 도망칠 생각부터 한단 말이냐? 이눔의 새끼들! 그런것 같애서 우리가 온거야! 도주하려는 놈들을 죄다 불러와! 경찰서장은 어디 있어? 비겁쟁이들을 쏴죽이고말테다!》

불호령에 기가 질린 초소장놈이 꽝맞은 메사구처럼 얼떨떨해있는 사이에 차용대와 김덕천이가 날쌔게 달려가 나머지놈들을 모두 불러냈다. 총을 멘 경찰놈들이 병실에서 줄레줄레 나왔다.

《이따위 비겁쟁이들한테 총은 해선 뭘해! 모두 걷어모으라!》

리학문의 명령대로 놈들의 무장을 족족 해제해버렸다.

총을 빼앗긴 놈들은 락심하여 퍼더버리고 주저앉았다.

군산시는 벌써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다. 놈들을 손쉽게 포로해버린 정찰병들은 경찰서장놈이 있다는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서장놈은 벌써 도망쳐버린 뒤였다.

감옥에 갇혀있던 애국자들을 구원한 뒤 군산시내의 패잔병들을 말끔히 처리하고나니 점심시간이 퍼그나 지났다. 오후에는 정찰대의 무선을 받은 아군부대들이 곧 시내로 들어올것이다. 사단지휘부가 도착할 때까지 휴식할것을 지시한 학문은 경찰서장방에서 필요한 문건들을 찾아들고 나섰다.

그때였다.

《부과장동지! 부과장동지! 굉장합니다.》

경찰서안에서 김동호가 달려나오며 벅적 소리쳤다.

《뭐요? 적이 있소?》

정황이 생긴줄 알고 권총부터 뽑아들던 학문은 동호의 다음말에 기가 막혀서 혀를 털었다.

《아닙니다. 잔치상입니다, 잔치상!》

《뭐? 잔치상?! 대체 뭔지 똑바로 말하시오!》

엄한 추궁을 받고서야 동호는 규정대로 보고했다. 경찰서의 뒤골방에 굉장한 음식상이 차려져있다는것이였다.

《정말이지 이―야! 그런 산해진미는 내 난생처음 봅니다.》

동호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대식가로 소문난 친구이니 어쩔수 없는 모양이군. 하긴 예까지 오느라 아침식사도 못했지. 모두들 배가 고플텐데 마침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다음순간에는 마음이 느긋해져서 학문은 웃고말았다.

《가보기요.》

김동호를 앞세우고 건물의 뒤에 따로 지은 골방에 들어서니 연회탁처럼 널직한 상우에 과연 갖가지 음식들이 풍성하게 차려져있었다. 돼지갈비찜에 통닭구이, 떡과 미국제고기통졸임은 물론 귤, 멜론과 같은 남방과일까지 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였는지 경찰놈들이 한바탕 먹자판을 벌리려다가 정찰대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냥 도망쳐버린것이였다.

《이거면 오늘 생일 쇠겠구만요. 오늘이 경찰서장놈의 생일이였는가?!》

김동호는 좋아서 입을 다물줄 몰랐다.

이런 때일수록 긴장성을 늦추면 안된다.

《가만! 놈들의 계략일수 있소. 특무장을 데려다 검식해보시오.》

먹을것이 있다는 말을 들은 김기전이 그제야 황새걸음으로 달려왔다. 문가에 들어서던 그는 너무도 기뻐서 두팔을 쩍 벌리고 환성부터 올렸다.

《이거 무슨 횡재야? 엉? 이거면 우리 정찰대의 열흘식량이 되고도 남겠습니다.》

《기뻐하기는 아직 이르오. 검식부터 해보시오.》

학문의 독촉을 받고서야 그는 은숟가락으로 음식들을 하나하나 찔러서 검사해보고 지나가는 개에게도 먹여보았다. 반시간쯤 기다려보았으나 아무런 탈도 생기지 않았다.

《자, 그럼 놈들이 한턱 내는걸로 알구 실컷 먹어줍시다.》

학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두팔걷고 나선 김동호가 제일먼저 돼지갈비찜부터 집어들었다. 그바람에 와하하― 웃음보가 터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두 량반두 먹어야 량반이라니…》

남들이 웃건말건 그는 고기점을 뭉청뭉청 뜯어먹기 시작했다.

즐거운 한때였다. 지휘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무전지시를 받은터여서 서두를것도 없었다. 모두 실컷 먹었다.

《어― 이젠 사흘을 굶어두 문제없겠어.》

《놈들이 제법 례의를 안단 말야. 승리자들한테 이렇게 한상 차려바칠줄을 아니까. 하하…》 부른 배를 슬슬 쓸어만지며 다음끼니감까지 꿍져들고 일어선 김기전이 너스레를 떨었다. 《헌데 우리두 인사가 있어야 할게 아닌가. 오늘 대접받은 인사로 놈들을 한번 더 혼뜨검 내주세.》

《아무렴! 인사를 톡톡히 해야지. 그럼 다음번엔 부산쯤에서 더 풍성하게 낼는지도 몰라, 어허허…》

김동호도 불룩 나온 배를 슬슬 어루쓸면서 맞장구쳤다.

오후 느지막에 보병들이 들어오고 지휘부도 도착하였다. 사단지휘부는 시청건물에 자리잡았다.

허찬정찰과장은 무선안테나가 수수대처럼 흔들거리는 윌리스차에서 날렵하게 뛰여내려 빠른 동작으로 리학문에게 다가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부과장동무이지요? 내 과장 허찬이요.》

《그렇습니까? 리학문입니다.》

서로 이름은 모르는바가 아니지만 직접 만나보기는 처음이여서 한동안 례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인사를 마친 다음에는 정찰대가 휴식하고있는 곳으로 함께 걸어갔다. 거쿨진 체격의 리학문과 달리 다부진 허찬은 퍽 대조되여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서로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보총을 멘 보병들의 대렬이 총창을 수풀처럼 솟구고 《가슴에 끓는 피를 조국에 바치니…》 하는 노래를 씩씩하게 합창하면서 지나가고 지나갔다.

정찰대의 활동에 불만을 표시했던 무선대화가 생각키워서 그 말을 꺼낼가말가 망설이던 학문은 거리에 떨쳐나와 환영하는 군중들의 환호소리에 이야기할 계제가 못되여서 입을 꾹 다물고말았다. 아니, 왜서인지 선듯 속을 털어놓고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착잡한 심정에 휩싸인 그는 허찬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정찰병들이 기다리는 소학교쪽으로 걸어갔다. 그럴수록 허찬에 대한 불가사의한 감정이 자꾸만 샘물처럼 솟아오르면서 마음을 불안케 했다.

사람의 진속을 순간에 다 파악한다는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과장과 부과장이라는 더없이 긴밀한 사업상관계에 있는 사이에 상대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사업을 두고 감정상 서로 엇갈릴듯 한 예감이 지꿎게 뇌리를 파고드는것이였다. 전쟁이 한창인 때 그런 감정상의 불일치는 예상치 못할 후과를 빚어낼수 있다.

학문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사로운 감정은 다 잊어버리자. 지금은 전쟁이 아닌가. 그 모든것은 내가 너무 예민해지고 원래 고집스러운 성미여서 생겨난 불필요한 감정일것이다. 옹졸한것은 정찰병의 성격이 아니야.)

혼잡스러운 골목길을 빠져 꽤 번화한 거리에 나섰을 때 허찬이 감정교제가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것이 어색했던지 아니면 지금 이때가 자기의 견해를 밝히는데 적합한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몸을 반쯤 돌리며 말을 걸었다.

《헌데 부과장동무, 이번에도 그 많은 인원을 다 데리고 가겠소?》

무슨 뜻으로 묻는 말인지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정찰중대를 통채로 끌고다니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암시였다. 상대의 속을 번연히 알면서도 학문은 고집스럽게 뇌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아무래도 인원을 더 보충해야 할것 같습니다.》

허찬은 놀라운듯 두눈동자를 가로세로 굴리더니 불퉁한 코망울을 쭝긋거렸다.

《보충?! 아니, 지금만 해도 스무명이 넘는데… 정찰원칙에 어긋나지 않소?》

이번에 놀란것은 학문이였다.

《원칙이라니요?》

허찬은 가볍게 뒤짐을 지고 걸음발을 더 늦추었다.

《솔직히 나는 우리의 정찰방식에 아연함을 금할수 없소. 세계적으로 보아도 강한 군대는 수준있는 정찰기관의 역할을 필수적으로 하지 않는가 말이요. 조르게, 마타하리… 세계 여러 대국들의 정탐사가 증명해준바와 같이 정찰사업의 성과는 머리수가 아니라 특정된 일군의 두뇌에 달려있는것이 아닌가 말이요.》

학문은 망연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허찬은 그런 력설이 공연한것임을 깨달은것인지 후― 맥없는 한숨을 내쉬며 부언했다.

《물론 우리한테는 경험이 부족하니 그런 높은 요구를 제기할수 없지만 말이요.》

《그렇다면?!》

《정찰이라는거야 적정을 알아내여 보고하는것인데 무슨 전투구분대처럼 와디디하게 많은 인원이 움직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거요. 좋기는 두세명, 많아서 일여덟이면 되지 않겠소. 그리고 말이요, 정찰조를 몇명씩 무어서 각처에 파견하면 오히려 정찰확률도 높일수 있지 않소. 동문 그저 치고답새기고 그러루한 전투정찰에만 매달리려고 하는데 내 보건대 그건 가장 기초적인 정찰전법에 불과한게요. 세상을 둘러봐두 빨찌산이나 습격구분대가 아니고선 정찰병들이 대부대로 행세하면서 정찰활동을 했다는 말은 들을수 없을게요.》

그제서야 학문은 무선지시를 받고 품었던 의견을 밝힐 기회가 온것을 인식했다. 이런 때 불만을 그냥 묻어두고있기 싫었다. 마음속에 끓기 시작한 흥분을 지나치지 않게 자제하려는듯 고개를 약간 숙인채 그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과장동무, 우린 정찰척후대입니다. 적의 배후를 혼란시켜야 할 사명도 지니고있는만큼 필요한 정도의 전투력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군사조법에도 분명히 밝혀져있는것이지만 그런건 더 론하지 않더래도 난 항일빨찌산이 종횡무진하면서 왜놈들을 답새기던 그런 전법으로 놈들을 제끼자는겁니다.》

그런 반박을 예상치 못했던듯 당황해난 허찬은 기분이 상해서 골살을 모으며 한손을 가볍게 쳐들어 제지했다.

《아, 됐소. 난 론쟁하자는게 아니요. 정찰문제에서야 누가 동무하구 다투자들겠소. 그러나 앞으론 정찰사업에 대한 바른 리해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우. 내 의견을 참작해서… 그럼 이번에도 본때를 보여주시오. 난 정찰병동무들이나 만나보곤 인츰 돌아서겠으니까.》

학문은 또다시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대체 뭘 말하자는것인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막상 터놓고 말해볼라치면 슬쩍 뒤걸음치는 그 리면을 가늠할수가 없었다.

(혹시 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것은 아닌지?!)

정말 그렇다면 더 난감한 문제였다. 개인적인 불만이라면 더구나 맞대들이로 빠개보기가 어려운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저벅저벅 걸어가던 그들은 별안간 터지는 만세소리에 놀라 걸음을 뚝 멈추었다. 군산소학교앞이였다. 초라한 건물에 비해서는 꽤 넓은 운동장이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이 두손을 허공에 쳐들어올리며 만세를 소리소리 불렀다.

환호가 좀 가라앉은 다음에 보니 운동장 한가운데에 나무널판자로 가설한 연단이 있는데 거기에 오른 보위색옷차림의 처녀가 연설하고있었다.

《여러분! 할아버지, 할머니들! 아버지, 어머니들!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미국놈들과 리승만괴뢰역도놈들의 학정속에서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습니까.》

(음, 정치공작대가 벌써 일을 시작한 모양이로군.)

정치공작대원들이 해방된 남반부지역의 각곳에서 선전사업을 벌리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민주개혁들을 속속 실시하는 사업을 한다는 말을 이미 들어서 알고있었다. 군산이 해방되자마자 이렇게 뒤따라온 그들을 보니 한시바삐 남진을 다그쳐야겠다는 분발심이 들었다.

(처녀들이 정말 날랜데… 자칫하다간 저 동무들한테서도 느렁망태란 소릴 듣겠군.)

환호에 묻혀 뭐라고 알아들을수는 없지만 간간이 울려오는 처녀의 목소리를 귀전으로 흘려들으며 운동장을 에돌아 학교건물옆에 있는 빈집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휴식하고있을 정찰병들을 데리고 지체없이 출발해야 하였다.

집앞에 이르니 라동수중대장이 저으기 난처한 기색을 지으며 얼버무리는것이였다.

《부과장동지, 저… 이렇게 빨리 돌아오실줄은 모르구…》

어색하게 두손을 마주 비비는 라동수를 민망스럽게 바라보며 학문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다 어데 갔소?》

라동수가 대꾸할 겨를도 없이 허찬이 넘겨짚고 신경을 도사리며 따져물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해이된건 아니요?》

동수는 넙죽한 턱이 가슴에 가붙도록 고개를 숙이며 중언부언했다.

《저―어기 연설 들으러들 갔습니다. 제 인차 데려오겠습니다. 정치공작대처녀가 굉장한 미인이라구들 하면서 왁작 몰려갔지요. 복남동무가 하는 말인데 연설을 아주 잘한다더군요.》

오새없는 말을 늘어놓는 그가 몹시 못마땅했으나 학문은 여전히 어성을 높이지 않고 분부했다.

《동무들을 다 모이게 하오. 빨리 떠나야겠소.》

운동장쪽으로 달려가려는 라동수를 뜻밖에도 허찬이 급히 만류했다.

《가만! 연설이 그렇게 들을만 하대?》

《예, 련락병동무가 통신중대에 갔다오던 길에 얼핏 듣구왔다면서 자랑하는 바람에 모두들 발작했는데… 기가 딱 막히답니다. 미인이구요.》

《쓸데없는 소릴…》

참다못해 핀잔하는 학문의 의사에는 아랑곳없이 허찬이 대단한 호기심을 부렸다.

《그렇다?! 거 구미가 동하는걸. 그럼 어디 가보기요. 대원들도 다 모아올겸.》

라동수에게 눈을 흘기고 서있는 학문의 팔굽을 가볍게 건드리고나서 허찬은 제먼저 앞서서 운동장쪽으로 걸어갔다.

연설하는 처녀는 군관복과 다름없는 옷을 입었는데 정열적으로 손짓하며 말하는 모습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에 익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조선인민군대는 이제 곧 남반부 전 지역을 해방합니다. 미제와 그 주구 리승만괴뢰역적놈들은 쫓겨가고 이제는 로동자, 농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된 내 나라, 우리의 세상이 왔습니다. 모두들 떨쳐나…》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목을 길게 뽑아들고 연단쪽을 바라보던 리학문은 입을 딱 벌렸다.

(엉? 저게 누구야?! 그 동무가 아닌가?)

분명 그였다! 권녕신이라는 그 처녀였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만났던 처녀! 언제든 다시한번 꼭 만나리라 벼르었던 그 처녀였다. 의심할바 없는 사실앞에서도 선듯 믿어지지 않아 두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으나 틀림이 없었다.

《저 동무가 어떻게 여기엘 나타났는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중얼하는 바람에 옆사람들이 흘끔흘끔 돌아보기까지 하는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는 사이요?》

사람들의 어깨사이로 목을 빼들고 넘보던 허찬도 이상한 기미를 알아챈듯 넌지시 캐물었다.

《아니, 그저 좀…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전에 만났댔지요.》

얼버무려넘기려고 웃어보인것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소? 그럼 사랑하는 처녀인게로군? 허허… 정말 기딱막힌 상봉이요. 정치공작대라면 분명 평양에서 파견됐겠는데 부과장동무도 사동에서 공부했지? 리해되오. 글쎄 로맨틱한 사연이 없을 부과장동무가 아니지. 그럼 연설이 끝난담에 만나보고 오우.》

(원, 사랑하는 처녀라구?)

모닥불을 들쓴듯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가슴이 널뛰듯 했다. 사랑한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지만 막상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되니 정말 저 처녀를 이미전부터 사랑해온듯 한 야릇한 감정이 샘솟아오르는것이였다.

(그래, 정말 사랑했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구야 왜 이렇게 마음이 들뛸텐가. …저런 처녀를 사랑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가. 고운 얼굴, 균형잡힌 몸매, 게다가 사근사근한 목소리…)

단 한번밖에 만나본 일이 없는 처녀에게 품어보는 자기의 생각이 너무 렴치없다고 느껴진것은 그 다음이였다. 그 생각은 산란해지는 마음을 비로소 가다듬을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무슨 쓸개빠진 생각을…)

그는 억지로 마음을 돌려세우고 허찬이보다 먼저 발길을 돌렸다. 연설이 끝나면 만날수 있겠건만 기다릴수 없었다.

때마침 달려와 보고하는 라동수가 그를 따분한 처지에서 구원해주었다.

《다들 모였습니다.》

정찰병들은 벌써 살림집앞에 정렬하여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출발해야 했다.

허찬과장이 인사차림의 발언을 마친 뒤에도 학교에서는 아직 연설이 끝나지 않은 모양 군중들이 여전히 모여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연설이 끝날텐데…)

리성의 문턱을 넘어 감성에 포로되는것을 제일 질색하는 학문이였건만 이 순간만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조금이라도 더 늦잡고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꾸짖듯 약간 성난 어조로 구령을 쳤다.

《출발!》

앙바틈한 어깨를 한껏 치켜올린 허찬이 한켠에 비켜서서 틀스러운 자세로 지나가는 정찰병들을 한사람한사람 손잡아주었다. 한껏 달아오른 손들을 힘껏 틀어잡아 흔드는 그의 마음속에는 무시할수 없는 자신의 존재감을 시위하려는듯 한 위세가 끓고있었다.

귀중한 그 무엇을 버리고 가는듯 마음이 허전했으나 군인의 굳어진 자각은 학문을 사정없이 남쪽으로 떠밀었다.

(지금은 전쟁이다. 명령받은 병사의 일분일초에는 고향과 우리 조국의 더없이 귀중한 운명이 달려있다. 대원들이 나를 지켜보지 않는가. 떠나야 한다, 어서 떠나야 해!)

학문은 허찬과 포옹하고는 곧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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