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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여름 56 - 총서 [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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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08-07 01:55 조회6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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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9-U01.jpg

(제 56 회)

19 장

너는 무엇을 피하여 어데로 가느냐?

또다시 덜컹거리는 차우에 올라앉았다. 고달픈 행각, 비참한 도주다. 성송암은 두눈을 꾹 감고 낭떠러지로 낭떠러지로 줄기차게 내닫는 자신을 뜨겁게 돌이켜보고있었다. 이젠 사색도 상념도 죄다 버렸다. 의지와 신념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거니와 있었다 해도 그것은 집떠나는날 밤에 그 한강교의 폭발속에 다 재처럼 흩날려버렸다. 아무런 희망도 뜻도 없이 지어진 운명의 소로길로 끌려갈뿐이다.…

《채병덕이 그 사람 인물은 인물이야. 운수가 사나와 일시 고액을 겪긴 하지만… 하느님 굽어 감찰하옵소서.》

리윤병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였다. 보름전만도 채병덕이를 적색마귀에 홀려 얼뜨기가 된 천치라고 질곡을 퍼붓던 그는 다이야 한짝에 훌러덩 변심이 되여 칭찬의 꽃다발을 엮는다. 성송암은 치밀어오르는 역기를 느끼며 곱지 않게 눈을 치떴다. 제 로친네며 재산까지 강물에 처박히게 한 장본을 극찬하는데는 인간추물로 락인하여버린 리윤병이라지만 다시 보지 않을수 없었다.

리윤병은 창밖을 내다보며 쭈그렁박같은 얼굴에 웃음을 띠였다. 초가집마당에서 서너명의 애들이 돌차기를 하고 터밭에서 흰수건을 동인 아낙네가 김을 매다말고 달려가는 차를 물끄러미 보고있었다.

《여긴 치안이 잘돼가는군. 민심이 평온해.》

채병덕에게서 인민군대가 대전지경에까지 들어선것 같다는 말을 들은 뒤 한동안은 자라목이 되여 눈알이 뱅뱅 돌아가던 리윤병은 제법 《장관》의 직분을 상기했는지 좀상한 몸집을 잔뜩 뒤로 제끼고 고개까지 끄덕거렸다. 인민군대의 총알이 더는 따라오지 못할 곳에 이르렀다는 안도감이 그의 가벼운 체통을 훌 띄워놓은것 같았다.

《차 좀 세워줘요.》

꺼져드는 목소리에 송암은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렸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질린 계화의 얼굴에는 진땀이 한벌 덮이였다.

《또 멀미냐?》

《네. 못참겠어요.》

꼭 깨문 계화의 입술이 바들바들 떤다. 손목은 얼음장처럼 차겁다.

《아가, 조금만 참아라. 한시간이면 된다. 배에 힘을 주고 멀리 내다봐라. 멀리!》

리윤병이 안경알을 번쩍이며 뾰족한 입술을 나불거린다.

《세우오.》

송암은 윤병이를 찔 흘겨보며 운전수의 어깨를 잡았다. 차는 논벌가운데서 멈춰섰다. 송암은 헝겊막대처럼 가벼워진 계화를 부축하고 차에서 내렸다. 체면에 안됐는지 리윤병이도 계화의 한쪽손을 잡고 따랐다.

《그 멀미란건 입쓰리탓일게다. 입쓰리란것두 맘먹기에 달렸느니라. 그래 토할바치고는 콱 토해라.》

리윤병은 길가의 뽀뿌라나무밑에 옹크리고 앉은 계화의 등뒤에 딱 붙어서서 그 다사스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만 물러서구려.》

성송암은 보다 못해 한마디 하였다. 리윤병은 요즈음 점점 더 퉁명스럽게 나오는 송암의 태도에 늘 그러듯 가시돋힌 눈길을 한번 빨고는 《애햄, 애햄》 하는 기침소리로 며느리며 사돈에 대한 불감의 일부를 표시하고 돌아섰다. 송암은 그에는 아랑곳않고 토할듯토할듯 하면서도 어깨만 떨고있는 계화를 바라보았다.

(불쌍한것!)

가슴 한복판을 무딘 칼로 북-긁어내는 아픔이 치밀었다.

천안삼거리의 한 빈집에서 기총탄에 맞아죽은 소고기내포를 설 삶아먹은 뒤로부터 앓기 시작한 계화였다. 성송암이 차고있던 회중시계를 찔러주고 데려온 의사는 계화의 병이 식중독만이 아니라 입쓰리에 로독이 겹친것이라고 하였다. 입쓰리라는 소리에 너무 기가 막혀 성송암이 아무 말도 못할 때 리윤병은 바람벽을 마주 십자를 그었다.

《주님의 덕은 측량무진코나. 악운속에서도 복을 주심을 잊지 않으시니…》

코맹맹이 그 소리에 송암은 터져나오는 울기를 참지 못했다.

《여보, 그 망녕된 소리 작작하오. 이 란세에 복은 무슨 말라죽은 복이란 말이요?》

《사돈, 모르는 소리요. 이건 우리 가문에 재액이 끝났음을 말하는것이요.》

한강교폭발통에 잃어버린 안해와 재산을 두고 쩍하면 쥐오줌방울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던 리윤병은 실성한 놈처럼 웃기까지 하였다. 이 몰골앞에서 송암은 세상의 종말을 보는듯 했다. 그러나 우선은 계화를 살리고봐야 했다. 의사는 입맞는 음식과 보약제로 잘 구관하면 쉽게 회복될수 있다고 했으나 피난민과 패잔병무리가 황충이떼처럼 휩쓸고 지나간 땅에서 쌀 한줌 얻는것도 쉽잖은 일이였다. 하루밤 편히 안정할새도 없었다. 포소리만 울리면 리윤병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운전수를 두들겨 깨우고 계화를 끌고 내달았다. 송암은 계화때문에 리윤병의 낚시줄에 걸린 고기처럼 할수없이 따라갔다. 모든 체면과 량심을 하나하나 집어던지는 길이기도 하였다. 남의 집 처마전에서 감자와 오이를 훔쳐오기도 하였고 밥을 동냥하기도 하였다. 휘발유를 도적질하는 운전수를 지켜 감시보초가 되기도 하였다.

수치감과 부끄러움도 별반 없었다. 모두가 이렇게 하니 나도 한다는식이였다. 그리고 이 모든것은 어쩔수 없는 환경앞에 지어진 운명의 순종으로 보았다. 때로 반디불처럼 리성과 자존심이 살아오를 때도 있었다.

(네가 과연 청렴한 학자로 자처한 성송암이가 옳단 말이냐?)

이 질시어린 비난앞에서 그는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생을 길바닥에서 천한 개처럼 누워지낸 그와 자기에게는 공통의 분자는 있으나 공통의 분모는 없었다. 디오게네스는 가족도, 재산도, 명예도, 민족도 다 초월하고 버렸지만 송암은 력사속에 민족을 붙안고 우는 사람인때문이였고 혈붙이인 딸에 비끄러매여있는 사람이였다.

너는 무엇을 피해 어데로 가느냐?

이런 물음앞에 그는 대답이 막혀 당혹했고 종잡을길 없는 모순속의 자기와 자기의 래일을 물어보며 억이 막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계화는 겁먹은 눈길로 그를 보군 했다. 송암은 얼굴을 붉히며 그 눈길에서 외면하군 했다.

(내가 살아 움직이는것은 이 딸이라는 혈붙이때문이다. 대의를 잃은 사람에게서 유일한 일은 가족에 대한 자기 의무를 리행하는것뿐이다.)

이렇게 송암은 자기를 합리화하다가도 여기서도 엄청난 모순에 부딪치군 했다.

(아버지로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해주고있고 앞으로 무엇을 할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가혹한 깨달음이였다. 그러나 이 느낌이 강렬할수록 그는 자기가 딸을 위해 산다는 신념을 굳혔으며 사실 그렇게 돼갔다. 그는 이제껏 다 못준 아버지로서의 관심과 정을 봉창이나 하듯이 계화를 성심성의로 돌보았다. 대전에 와서는 그처럼 아끼던 5룡촉대를 《한국은행》에 저당잡혀 계화의 몸조리에 썼다. 《장관》구실을 하느라고 도청에 나가 박혀있는 리윤병이가 이따금 얻어오는 미군의 통졸임같은것보다 자기가 직접 지은 밥을 계화에게 먹일 때 그는 일종의 행복감까지 느꼈다. 리윤병이가 《정부》를 따라서 도망치고 계화와 단 둘이 남은 며칠은 악몽같은 현실마저 잊으리만치 눈물어린 정속에 보낸 달콤한 나날이기도 하였다.

캄캄한 밤에 문득 깨여나 계화의 숨소리를 듣고 가느다란 손목에서 맥박이 뛰는것을 감촉하느라면 죽은 처와 련화의 얼굴까지 떠오르며 슬픔어린 환희가 짜릿하게 가슴을 파고 지나갔다. 나한테 남은것은 계화밖에 없다. 계화야말로 나에게 남은 삶과 미래의 전부다. 이미 리윤병이를 통해 대전감옥에도 련화가 없음을 알고 죽은 자식으로 단념한 송암이였다. 그의 인생이 담겨진 서울에 두고온 유물들마저 이제는 다 없어져버렸으리라고 단정하는 송암이였다. 결국 그를 이 세상과 련결시키는것은 계화뿐이였고 그때문에 리윤병이와 결별하지 못하는것이였다. 그로 하여 리윤병이 대구로부터 미국놈의 양갈보로 섬겨바칠 《위문단》을 끌고나타났을 때도 침묵하고말았으며 대전에서 싸움이 붙기때문에 떠나자는 요구에도 순순히 응했던것이다.

그러나 어제저녁 영빈관인지 뭔지 하는데서 리윤병과 채병덕이 미군장교한테 놀아나는것을 먼발치에서 구경한 뒤로부터는 도대체 자기가 가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존재가치를 다 체념해버린 그였으나 자기가 추악과 혐오의 세계로 간다는 느낌은 시종 그를 괴롭히는것이였다.

《이젠 좀 일없느냐?》

송암은 계화가 논벌 한끝을 망연히 보는것에 시선이 미쳐 물었다. 계화는 얼굴을 돌려 방그레 웃었다. 검버섯이 핀 수척한 얼굴엔 피기란 찾아볼수조차 없다.

《아버지, 저걸 봐요.》

송암은 계화의 손끝이 가리키는 논뚝쪽을 보았다. 두마리의 학이 논뚝우에 서서 의좋게 거닐고있었다. 머리를 맞비비기도 하고 목을 빼들고 사위를 근엄히 둘러보기도 하였다.

《저들에게는 여기가 너희들이 말하는 에덴동산이다.》

송암은 롱말을 하였다. 물기가 가랑가랑한 눈이 송암이를 쑥스럽게 보고는 얼른 외면하였다. 송암은 부질없이 던진 자기의 말을 후회하였다. 염세적인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보였다고 생각한때문이였다. 푸른 논벌우에서 근심없이 노니는 학들은 어릴적 동심에 비껴들던 아름다운 꿈나라에 대한 동경처럼 그자신의 마음을 걷잡을길 없이 흔들었다.

《그만 가지 않으련?》

《아버지, 여기가 좋네요. 조금만 더 있어요.》

계화는 어리광치듯 말하였다.

《이게 무슨 소리요?》

논두렁쪽으로 나가 소변을 보고 돌아오던 리윤병이 깜짝 놀란 소리를 쳤다. 성송암은 폭음을 들었다. 뿌잇한 구름이 떠있는 하늘로 수십대의 비행기가 해빛을 반사하며 나타났다. 송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군.》

《이거 우리를 잘못 보고 폭탄을 떨구지 않을가. 이 허허벌판에서 피하지도 못하고.》

리윤병은 낯이 까매져서 뾰족한 수염을 떨었다.

《허허,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수제자를 몰라보겠소.》

《여보시오. 사둔, 당신은 어째 늘 비꼬임이시오?》

《비꼬임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 않소. 미국군대를 하느님의 천사들이라고 귀닳게 말한것이 누구시오?》

송암이 여전히 웃으며 말하자 라윤병은 며느리앞이여서인지 《령감은 참!-》 하고 억지웃음을 지었으나 눈길은 비행기에서 한초도 떠나지 않았다. 높이 뜬 비행기들은 구름장틈새마다에 허연 비행운을 남겨놓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북쪽으로 가는군. 우리 군벌 돕자는겁네다. 그럼 그럴테지.》

리윤병은 언제 빼들었는지 모를 꼬닥꼬닥 꾸겨진 성조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승용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만 가봅세다.》

운전수가 발동을 걸자 계화는 나직이 한숨을 짓고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논벌가운데 서있는 학들을 바라보다가 성송암의 그늘진 얼굴에 시선이 닿자 가냘핀 웃음을 지어보였다.

《여기 그냥 있음 좋겠네요.》

휘발유와 쩐 담배내가 뒤섞여 떠도는 차안에 들어섰을 때 계화는 사지판에 가는 사람처럼 얼굴빛이 어두워 입을 꼭 깨문채 눈을 내리깔았다. 차는 얼마 안가서부터 별스런 꾸르럭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운전수는 마을을 지날 때마다 쉬고가자고 했으나 리윤병은 밤중으로 《정부》가 있는 대구까지 가야 한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 해질녘에 이르러 차는 피난민과 부상병 달구지로 가득찬 길에 들어섰다.

내무부장관 조병옥의 포고령으로 집에서 쫓겨나 남하하는 사람들의 대렬이였다. 달구지 하나를 앞질러나가는데도 경적을 몇번씩 울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사민들은 그 소리에 놀라 황급히 뒤돌아보고는 길을 내주었으나 총대를 거꾸로 메고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괴뢰군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리윤병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이 몰상식한것들!》 하며 욕질을 하다가 하마트면 깜장콩알을 먹을번 하였다. 다짜고짜로 총대를 벗겨든 괴뢰군들이 격발기를 절컥거렸던것이다.

《이사람들… 이… 이게 무슨짓인가. 한나라 장관앞에, 엉?》

리윤병은 며느리와 성송암이 앞이라 열을 올리다가 정작 총구가 그를 겨누자 달팽이껍질속에 기여들듯 차문을 닫으며 몸을 옹송그렸다. 군인들은 짐승같이 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때면 《주여!》를 부르며 십자를 그렸을 리윤병은 이번에는 그럴념도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이마만 문질렀다. 그때부터 안절부절만 하였다. 길을 막는 달구지건 사람이건 탓할념을 못했다.

파국은 지진현상과 같은 땅울림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바람째는 소리를 내며 쌕쌔기들이 도로를 핥듯이 날아오며 기총탄을 쏘아대고 새된 부르짖음과 비명이 터져나올 때도 무엇이 닥쳐오는지 몰랐다. 그 모든 소음을 짓누르며 온 대지를 쪼개여놓을듯한 폭음이 승용차의 창문까지 드릉드릉 울릴 때도 몰랐다. 알았을 때는 늦었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아! 아!》하는 단말마의 포효성을 지르며 길가의 도랑과 밭에 뛰여들었다. 공기를 째는 예리한 기관총성과 더불어 소가 꺼꾸러지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시꺼먼 포신을 내뻗친 무수한 철갑괴물들이 끝없는 렬을 이루어 맹속으로 달려오고있었다.

단테의 《신곡》에도 없는 지옥의 한장면이 눈깜박할새 성송암의 앞에서 벌어졌다. 장갑차와 땅크들에서 발사하는 예광탄이 퍼런 불빛을 날리며 날고 무한궤도와 바퀴들에 소며 달구지들이 처참하게 무질러지였다. 운전수가 조향륜을 꺾어 길옆밭에 차를 들이몰 때 유리창이 박산나며 그 쪼박이 성송암의 뺨을 갈겼으나 그는 그것도 모르고 굳어진 동공으로 그 괴물들만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아버지!》

실날같은 부르짖음에 송암은 고개를 돌렸다. 계화가 한손으로 동가슴을 꼭 누르고있었다. 손가락짬으로는 빨간 피가 슴새여나와 하늘색 치마우에 똑똑 떨어졌다.

《아니!》

송암은 눈앞이 아찔해서 한동안 멍청하니 보기만 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리윤병은 《저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하더니 무슨 용기에서인지 차문을 열고 뛰여나갔다. 윤병은 두팔을 쳐들고 만세시늉을 하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땅크포탑뒤에 우뚝 서 무표정한 눈길로 파괴의 흔적을 바라보던 미국군인이 윤병이의 해괴한 움직임을 보다가 싱긋 웃으며 손을 저어주었다. 그러자 윤병은 승용차를 손짓하며 쏘지 말라는 시늉을 하고 주머니에 찔러두었던 《성조기》를 꺼내 열심히 흔들었다.

송암은 가슴속깊이에서 터져나오는 호곡을 참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화의 가슴을 헤쳤다. 자그마한 총알구멍에서는 피가 샘솟듯 솟구쳤다. 따뜻한 피는 전류처럼 손바닥을 지졌다.

《아버지!》

소리는 없고 계화의 입과 눈이 그것을 말하고있었다. 눈자위가 돌기 시작하였다. 송암은 《으흐흑》 흐느끼며 계화를 끌어안았다.

《안된다. 안돼, 이 못난 애비때문에 네가 죽다니. 안된다, 안돼!》

계화의 몸이 꿈틀했다. 눈이 한껏 커졌다. 바르르 떨던 입술이 옴죽거렸다.

《아버지, 련활 만남 나… 용서하라고…》

《빌어먹을-년》

송암은 그대로 울부짖었다. 눈물방울이 계화의 볼에 방울방울 떨어져내렸다. 계화는 그 눈물을 닦아주려는듯 손을 쳐들다가 맥없이 떨궈버렸다. 고개가 한쪽으로 떨어지고 눈까풀이 소르르 맞붙었다.

《계화야!》

송암은 정신없이 딸의 얼굴에 볼을 비였다. 모자가 벗겨져 날아나고 길게 자란 흰 머리칼이 계화의 이마를 덮었다.

《선생님, 정신차리십시오.》

운전수가 어깨를 흔들어 고개를 들었을 때 송암의 얼굴에서 초점잃은 두눈이 황황히 불렀다. 그는 어스름이 내리는 바깥에서 무언가 안고 들어오는 윤병이를 응시한채 미륵처럼 굳어있었다.

《그 사람들 참, 조포하면서도 어린애같은데가 있어. 이런걸 뿌리더라니-》

차문을 열고 들어서던 윤병은 의외의 사태에 깜짝 놀라며 가슴에 안고있던것들을 떨어뜨렸다. 마분지통이 열려지며 도로프스알들이 쫘르륵 흩어지였다. 송암은 눈을 감았다.

바로 이것이 지옥의 끝이다!

그는 배낭을 둘러메였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 축 늘어진 계화의 시신을 안아내렸다. 윤병이 코멘소리로 뭐라 부르짖는것도 아랑곳 않고 가을한 보리밭으로 비칠비칠 걸어갔다. 윤병이가 달려와 그의 배낭을 잡는바람에 하마트면 넘어질번 하였다. 송암은 딸의 시체를 보리그루에 찔릴세라 고랑에 조심히 눕히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윤병이의 뾰족한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쥔 손으로 뺨을 후려갈겼다.

《가라. 딸은 내것이다!》

축축한 바람이 불어왔다. 좀 있어 비방울이 가늘게 날렸다. 운전수의 도움으로 밭둔덕에 무덤을 팠다.

봉분도 묘비도 없는 무덤속에 계화를 잠재웠다. 윤병이가 곡을 했으나 송암은 울지도 않았다. 검은 하늘을 쳐다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내가 딸을 죽였다.》

이날밤 송암은 길녘에서 주어든 지팡막대에 의지하여 대전쪽으로 가는길로 돌아섰다. 대전쪽 하늘은 밤새 벌겋게 물들고 폭음이 련속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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