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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여름 55 - 총서 [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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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08-06 07:24 조회6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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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9-U01.jpg



(제 55 회)

19 장

7월 18일 저녁 여섯시에 론산군 련산리를 떠난 54사 18련대는 120리를 목표로 한 류례없는 강행군을 개시하였다. 그가 지휘관이든 전사는 매인당 제정된 장구외에 l. 5정량의 저격탄, 3주야분의 식량과 두발의 박격포탄을 의무적으로 휴대하였다. 합계 50∼60의 중량을 걸머진 그들은 초인간적의지로 달렸다.

그들이 걷는 앞길엔 태고의 수림과 산과 골짜기, 날벼랑과 장마로 범람한 탕수가 막아나섰다. 밤이 되자 캄캄한 어둠이 짙은 그 길에 또하나 장애로 덮씌웠다. 그러나 일분도 설수도 쉴수도 없었다.

걷자! 빨리 걷자! 미국놈들이 나타나기전에!

모든 삶의 목적과 의의가 이 하나에 집중된듯싶었다. 오직 이 땅, 이 자연, 이 산악의 아들들만이 할수 있는 행군이였다. 먼 후날 이 행군을 회상할 때 사람들은 인간의 승화된 감정과 의지가 어떠한 힘을 냈는가를 자랑스럽게 추억할것이다. 그들의 그 감정, 그 의지에는 하나같이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관철하겠다는 철석같은 신념, 그이의 믿음에 끝까지 따르겠다는 결사의 투지가 비껴있었다. 그 행군대오속에는 송기덕이도 있었고 서울계선에서부터 로무자격으로 억지다짐으로 따라오다가 끝내 입대한 전기회사 로동자 곽근철이며 오늘아침 퇴원해온 전호근이도 있었다. 전호근은 장군님을 만나뵈옵고 악수까지 나누었다는 사실로 온 중대와 대대에 파문을 일으켜놓고 이 대렬속에 들어섰다.

송기덕은 중대의 맨뒤끝에서 걸었다. 이따금 행군속도가 떠지면 앞으로 나가군 하였다. 넘어진 전사를 일으켜 그의 배낭을 메기도 하고 벼랑에 오르는 전사의 발밑에 어깨를 들이밀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중대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서있다가는 맨 마지막 병사의 옆에 붙어섰다. 그 병사는 호근이였다. 기덕은 좀전부터 호근이의 숨소리가 높아지는것을 들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젠 내가 좀 메자구.》

《또 깔보는군요.》

호근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대로 수걱수걱 걸었다. 여전히 부르터있는것이다. 허약자와 부상병들을 떨구라는 련대부의 지시에 따라 호근이도 떨어지게 되여있었다. 이때문에 호근은 기덕이한테 한바탕 쌈싸우듯 대들었다.

《중대장동진 나에게 무슨 원혐이 있어서 그러시오. 그래두 우리야 아는 사이가 아니시오. (그는 전쟁이 시작된 첫날 황주-중화길에서 만난것을 코에 건것이다.) 그렇다면 도와주는게 옳지 썩은 호박 따버리듯한단말이요. 그래 내 죄가 뭐이시오. 부상당한것이야 내 잘못입니까. 또 부상처가 나은지가 언젠데.》

기덕은 딱했다. 그는 이 호근이에 대해서 각별한 친근감을 느끼고있는것이였다. 로량진전투때 받은 인상도 인상이지만 이 호근이가 복심이의 소식을 가져왔기때문이였다. 호근은 장군님께서 한식경이나 계셨다는 한 녀성중상자의 방에 찾아까지 가서 복심이를 보았을뿐아니라 그 전투행적까지 상세히 알아와 한바탕 눈물이 글썽해 연설을 하였던것이다. 그때부터 기덕에게는 호근이가 남남같지 않았다. 하여 기덕은 호근이가 밸집을 드러내는데 조금도 성을 내지 않고 말했다.

《호근동무, 인정으로 봐서도 그래. 이번 행군은 특별하거던. 파악없는 적후의 길인데다가 잔뜩 짐을 지고 하루밤새 100리를 넘어달려야 하는데 갓 퇴원한 형편에 어림있나말이야.》

이 말에 호근은 받을 소상을 하고 팔소매까지 걷어붙였다.

《그럼 중대장동지 저하고 팔씨름을 해봅시다.》

《호근이, 생떼를 쓰지 말라니까. 동무가 쓰러지면 대신 업고 가야겠지. 그러면 어떻게 되나말이야.》

《중대장동지, 이거 정말 황주에서 첨 만날 때부터 우습게 알더니, 아 저야 로동계급이라고 몇번 말했습니까. 중대장동지도 말했지요. 이번 행군은 진짜배기 장군님 전사로 되느냐 마느냐 하는 엄숙한 길이라구… 신입병사래서 너무 깔보지 마십시오.》

호근은 눈물까지 글썽해서 소리치고는 가둑나무숲을 와작와작 헤치며 사라져버렸다. 기덕은 그래놓고 보내니 속이 좋지 않아 슬그머니 따라가보았다. 호근은 잔디뿌리가 꽉 엉킨 땅을 보병삽으로 쾅쾅 조겨대고있었다. 잠간새에 구뎅이를 판 그는 배낭을 거꾸로 들어 사품을 쓸어넣었다.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사품을 처리하라고 한 지시를 집행하는것이였다. 흰면내의에 싼 퉁구리가 나오자 호근은 잠시 추연한 표정으로 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 그마저 구뎅이에 처넣었다. 기덕은 호근이가 그자리를 뜬 다음 구뎅이를 파헤치고 내의에 싼 퉁구리를 꺼내였다. 그안에는 푸른 비단이 있었다. 기덕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전라도 어디엔가 산다는 제 누이에게 가져다주겠다고 하던 옷감이였다.

기덕이 그 천을 자기 배낭에 넣고 숲에서 나오니 호근이가 배낭 가득 탄약과 중기총차까지 메고 자기 분대대렬속에 버젓이 서있었다. 기덕은 자기가 업고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떼놓아서는 안된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호근이는 쓰러지지 않았고 여느 병사들 못지 않게 짐까지 그냥 지고가는것이다.

대렬이 불시에 멈춰섰다.

모두가 앉을념을 못하고 나무에 기대인채 서있었다. 이제 앉았다가는 다시 일어설 힘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기덕은 알싸한 냄새를 풍기는 나무기둥에 화끈한 얼굴을 대고 잠시 서있었다.

《이거 야단났소. 저 공병들이 바줄을 늘여보자는건데 두사람이 다 물에 들어갔다가 초주검이 돼 나왔소.》

대대장이 다가와 근심스럽게 말했다.

《에도는 길은 없답니까?》

《그러자면 20리를 에돌아야 되오. 날이 밝는데 야단났소. 동무네 수영명수가 없소?》

《제가 해보겠습니다.》

《동무솜씨는 내 잘 아오. 어림없소.》

《해볼판이지요.》

그는 대대장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공병들이 있는곳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사색이 된 공병 세명이 바줄을 버티여잡고 《악악》 소리치고있었다. 네굽을 쳐 노호하는 검붉은 흙탕물속에 팽팽히 헹기운 바줄끝에는 벌거숭이 군인이 매달려 물속에 잠겼다 솟았다 하다가 그대로 척 늘어진 상태에서 끌려나오고있었다. 기덕은 잽싸게 신발과 웃옷을 벗었다. 바줄에 동인채 끌려나온 공병의 어깨와 머리는 짓찢겨져 피가 흘렀다. 기덕은 그의 몸에서 풀어낸 바줄을 허리에 동이며 사품쳐흐르는 강을 으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급한 물살에 와당탕 퉁탕하며 바위돌까지 굴러내려왔다.

(돌탕에만 맞지 않으면 되는데.)

그는 한껏 공기를 들이키고 무슨 뾰족한 나무에 발을 찔리며 강물에 뛰여들었다. 그러나 더 나갈수 없었다. 바줄이 헤워들며 잡아끌었다.

《중대장동지!》

온 중대가 다 달려와있었다. 벌써 날쌘 전사들은 웃옷과 바지를 벗고있었다. 기덕은 껄껄 웃었다.

《허 기운들이 남아있구나. 이건 놔. 시간이 없다.》

그는 바줄을 감아쥔 손들을 잡아 뿌리치고 다시 물에 뛰여들었다. 강웃쪽으로 헤덤비며 뛰여올라가는 허우대 큰 몸집이 피끗 눈에 띄였다. 전호근이였다.

(저치는 왜 그래, 설사를 만난게 아니야.)

그런데 호근의 뒤로는 곽근철이까지 따랐다. 근철은 호근이가 신대원이라는것을 알고 어디서나 승벽내기로 그가 하는 일은 같이 하려고 하였다.

강물에 몸을 잠근 순간 세차게 들이치는 물바래에 하마트면 사래들릴번 한 기덕은 입과 코로 흘러든 물을 내뿜으며 도하훈련시에 배운대로 팔을 길게 뻗쳐 뺄헴을 쳐나갔다. 그러나 수십톤중량으로 내리쏟아지는 급류는 기덕이의 의도를 비웃듯 그를 풀잎처럼 가지고 놀았다.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진 이후부터 더욱 그랬다. 그럴수록 그는 굴러내리는 돌과 나무에 치이지 말자고 정신을 바싹 도사리고 손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몸은 아래로 떠밀려갈뿐 별로 전진하지 못했다. 문어다리처럼 가닥진 나무뿌리가 그를 떠밀치며 하류로 끌고내려갔다. 나무뿌리에서 벗어나려 하다가 물을 먹었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때 무언가 흰 물체가 그를 향해 돌진하였다. 기덕은 나무가지사이로 언뜻거리는 그 물체를 굴러내리는 바위로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빠져나려 했으나 그 물체는 지척에 다가왔다. 기덕이 다시한번 피하려는 순간 세찬 물결이 그를 후려갈겼다.

또다시 물을 먹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때 물큰한것이 그의 손을 잡았다.

《중…대장동지.》

전호근이 물귀신처럼 입으로 물을 뿜으며 한손으로는 그의 팔목을 다른 손으로는 얽힌 나무뿌리를 밀쳐내며 물에 잠겼다 솟았다 했다.

(이 친구 떼를 탔다고 했지.)

흐려진 머리속에도 이런 기억이 찾아들었다. 기덕은 물속에 머리마저 잠긴채 바줄을 풀려고 했다. 전호근이가 가지고 가게 하자는것이였다. 그러나 바줄을 어루더듬기만 했을뿐 매듭을 찾아 풀어내는 재주가 없었다. 몸이 둥 떴다. 시원한 공기와 훤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뿌리는 보이지 않고 흰내의바람의 전호근이 그를 떠받친채 한손으로 물을 헤가르며 헤염치고있었다.

기덕은 마지막 기력을 다 짜내여 소리쳤다.

《날 두고… 바줄을 풀어 건너라…》

《허릴! 내 허릴…》

우악진 손이 기덕의 팔목을 쥐며 빳빳한 허리띠로 이끌었다.

《잡으라니까.》

기덕은 한손으로 호근의 허리띠를 잡고 물을 헤갈랐다.

《좋수다!》

호근은 두팔을 일시에 내뻗치며 물고래처럼 헤여나갔다.

기덕은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물속에서 솟구치며 호근이의 머리를 향해 쏜살같이 내려오는것을 보았다. 검은 통나무의 터슬터슬한 껍질과 삐죽삐죽한 옹이들을 보며 기덕은 절망적으로 손을 뻗쳤다. 손에 마주친 통나무는 핑그르 돌며 사나운 짐승처럼 기덕이의 어깨에 부딪쳤다. 그 둔탁한 타격에 기덕은 물속에서 한고패 굴었다. 숨이 꽉 막혀들고 눈앞이 노랗게 안개가 끼였다.

그는 혼미한 의식속에서도 기계적으로 손을 저었다. 허리를 동인 바줄이 팽팽히 죄여들었다.

《바줄을 풀어… 가라… 풀어!…》

기덕은 물을 삼키며 소리쳤다. 무릎과 어깨를 무엇엔가 세차게 부딪치며 눈을 떴다. 꽉 막혔던 가슴이 시원히 열리며 훤한 빛이 안겨들었다. 다리는 아직 물속에 잠겨있었으나 온몸은 모래흙에 비물린 풀밭에 나와있었다. 그는 흙냄새를 느끼며 물을 토했다.

한바가지가량 토하고나니 정신이 건뜻해졌다. 코앞에 멍이 들고 찢겨진 시뻘건 종다리가 보였다. 두손으로 풀뿌리를 틀어쥔 호근은 땅에 얼굴을 박은채 어깨를 푸들푸들 떨고있었다. 기덕은 엉기적거리며 기여가 그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호근이, 살았어?》

호근은 푸-하고 숨을 내쉬고 일어나앉았다.

《그잘나게 헤염을 치면서 뛰여들건 뭡니까. 알리지도 않고…》

기덕이와 호근은 서로 부축한채 강웃쪽으로 올라가 짝지발이 진 구름나무에 바줄을 동여맸다. 기덕은 왼쪽팔을 도저히 쓸수 없어서 결국 호근이가 그 일을 끝내고 맞은편 강안에 대고 손짓했다. 그쪽에서는 두팔을 쳐들고 《만세》신호를 보냈다. 물우에 한m정도의 높이로 띄운 바줄을 타고 병사들이 건너오기 시작할 때 기덕이와 호근은 서로 약속이나 한듯 그자리에 쓰러졌다.

《중대장동지, 뭘 생각합니까?》

《엉?…》

기덕은 돌아누웠다. 호근의 크고 유유한 눈길에 마주치자 사무치는 애정이 솟구쳤다.

《처 생각을 했어. 후날 동무를 데리고 가면 어떻게 맞겠는가를 생각했어.》

《처가 있습니까?》

《있지, 눈이 동무비슷해.》

《허, 소문엔 총각이래서 우리 누이동생을 어찔가 했는데.》

기덕은 호근의 눈길을 피해서 얼굴을 돌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던것이다. 아침부터 내내 가슴속에 서려돌던 복심이의 모습이 이 순간 사무치는 그리움속에 떠올랐던것이다.

《…그 녀성동문 전선신문에까지 났대요. 부상병을 자기 몸으로 막아 구원한 녀자라는데 체네가 아니고 아주머니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군관가족이래요. 남편의 생활비를 꽁꽁 싸서 몸에 지니고있더라나요. 전쟁이 끝나면 살림을 잘해보려고 했겠는데…가망이 없다는것 같애요. 우리가 들어가도 모르더란 말입니다.》

호근이가 하던 말이 귀가를 쟁쟁히 울리며 그의 어깨를 떨게 했다. 지금까지 내처 참고있던 감정이 지금 호근이와 몸을 나란히 붙이고있으니 피였던 샘이 터져나오듯 온몸을 타고 흘렀다.

평천리에서 마지막으로 본 엿보자기를 자기에게 안겨주고 얼굴을 싸쥔채 돌아서던 모습은 그의 가슴을 북북 긁어댔다.

(복심이! 죽지 마오. 복심이! 내가 한심한 놈이였어. 한심한…)

기덕은 복심이가 앞에 있다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싶었다.

《중대장동지, 왜 그럽니까. 쥐가 오르는것이 아닙니까?》

호근이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엉?!… 아니 그저.》

기덕은 눈살을 찡그리고 호근이를 외면한채 있다가 더 참지 못하고말았다.

《이보게, 동무가 봤다는 그 복심이라는 녀자는 바로 내 처야.》

《네?-》

전호근의 눈이 화경처림 커졌다.

《그… 그랬댔군요. 야-》

강을 건너온 병사들은 사기들이 올라 호근이를 칭찬도 하고 익살어린 롱담까지 던졌다.

《여, 호근이, 동문 물고기가 되려다 사람된것 아니야.》

《저 친구 아까 옷을 벗을 때 보니 밑에것이 대왕님이더군. 그게 노질을 하니 여북 잘 뜨겠나.》

웃음이 터져 잔물결처럼 흘러갔다. 11호차라고 하는 보병, 이 보병의 행군에서 웃음어린 이야기는 휘발유와 같은것이다.

《우리 어머니 말씀으로 분석하면 내 헤염은 궁한 팔자탓에 배운것이구요, 계급적으로 분석하면 일제식민지통치때문이지요.》

총차는 누구에겐가 빼앗기고 배낭만 멘채 활개걸음을 치는 호근은 짐짓 시쁫한 기색으로 말을 꼬아 하며 전사들의 귀를 항아리처럼 만들었다.

본래 전라도 구례에서 살았던 전호근이네는 해방되기 몇해전에 빚값으로 땅과 누이마저 빼앗긴채 떠돌다가 림진강떼놀이장에서 보짐을 풀었다. 호근의 아버지는 딸의 빚값 80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호미를 잡던 손에 떼장대를 잡았다. 열다섯살소년의 호근이도 풀려진 통나무를 물에서 건져내는 살판띔에 들어섰다. 갈고랑이 하나를 쥐고 사나운 물속에 뛰여들어 죽음을 내대고 하는 격투였다. 그 한대, 한대의 통나무를 림업주의 도감독에게 넘기면 짤락거리는 엽전이 그의 손에 쥐인다. 그 돈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이제 얼마나 있으면 누이를 찾아오는가 묻고는 또다시 물바다로 나간다. 그렇게 물과 싸우며 살았으나 끝내 80원을 마련하지 못한채 비바람 세찬 폭우의 날 소용돌이치는 물속에 떼와 함께 아버지를 잃고 누이가 기다리는 고향으로가 아니라 먼 친척이 있는 북쪽으로 눈물어린 걸음을 걸었다.

숲을 꿰지른 새벽빛이 오솔길우에 그려내는 희미한 무늬를 밟으며 기덕은 이런 숲속, 이런 오솔길에서 당했던 옛일들을 돌아보았다.

나무지게를 진 소년이 걸어가고 그옆에 싸리나무단을 인 소녀가 총총히 따른다. 시뻘건 혀를 빼문 호개가 길목을 막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에 렵총을 멘 짝귀간수가 나타나 호통을 뺀다.

《요 도적놈들 잘 만났다. 뉘집 거지들이냐, 산림도벌죄로 징역을 살아봐야겠느냐.》

나무지게가 나동그라지고 회초리가 울고 발길에 채인 소녀의 애처로운 비명이 터진다.

《복심이 우지 마.》

소년은 날아드는 회초리와 발길속에서도 이웃집소녀가 팽이처럼 딩구는것이 가슴아파 목메여 웨친다. 다음 주재소에 끌려가고 무릎 꿇림을 당한채 류치장안에서 고달픈 하루밤을 밝힌다. 눈물에 싸인 어머니가 《나리님》을 웨치며 주재소에 와 사정사정하고 벌건 인즙을 손에 발라 《벌금통지서》에 지장을 찍은 아버지가 매질과 굶주림에 지친 소년을 집으로 데려간다. 그와 함께 찢겨진 저고리자락을 손으로 감싸쥔 소녀가 서럽게 울며 따르고…

(그런 일은 다시 없을것이다. 다시는. 복심이… 우리 이 모든 일을 옛말하며 살수 있을가.)

기덕이네 중대는 한시간후에 보문산기슭에서 다시 위장을 하고 대전-영동간 도로를 끼고앉은 삼정리에 도착하였다. 기덕이네는 도로와 직선거리로는 30∼40m, 경사거리로는 50∼60m 되는 둔덕에 자리를 잡았다.

누룽지로 아침요기를 하면서 전호를 팠다. 전호를 파고난뒤 휴식이 선포되였으나 잠에 곯아떨어지는 전사는 하나도 없었다. 온밤을 밝혀 100여리 넘는 길을 헤쳐온 사람들같지 않았다. 오전 11시경에 낡은 《시보레》승용차 한대가 기덕이네 매복한 앞도로로 지나가다가 수류탄 튀는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밀려드는 잠과 뙤약볕에 눈알이 무겁게 처져있던 기덕은 자동차의 한 바퀴가 물러앉는것과 동시에 뛰여내리는 도리우찌를 쓴 운전수의 황급한 기색을 보며 무슨 일인가 생각하였다. 다이야를 만져보던 운전수가 차안에 대고 뭐라 말하자 중절모와 맨머리바람의 두 령감쟁이가 나왔다. 이 삼복더위에 둘 다 두루마기차림인데 맨머리바람의 령감은 중절모의 어깨에나 와닿을 난쟁이였다. 그 맨머리가 운전수에게 삿대질을 하며 야단을 치자 중절모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잡읍시다. 고관놈들이야요.》

곽근철이가 눈을 번뜩이며 그에게 기여왔다. 다른 병사들도 그런 눈빛으로 보았으나 《안되오. 더 큰걸 먹어야지.》 하고 기덕은 엄하게 막았다. 쌍안경에 비치인 두 령감쟁이는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봐서 도망군떨거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운전수가 쟈끼로 차체를 뜨고 바퀴에 붙어 씨름하는사이 중절모는 길녘에 서서 막연히 사방을 살피고 맨머리는 길을 왔다갔다하며 서북쪽만 바라보았다. 마침 《엠블런스》(미군전용위생차)가 나타나자 맨머리는 멀리서부터 두팔을 휘저으며 《스톱! 스톱!》 하고 코맹맹이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엠블런스》는 그의 옷자락에 진창만 잔뜩 뿌려주고 바람처럼 지나갔다. 좀 있어 또 한대의 스리쿼타가 지나갔으나 그 령감쟁이나 빵크난 차에 대해서는 아랑곳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앞대가리에 흰 별을 새긴 군용짚차 한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다가 무작정 막아나서는 난쟁이령감의 앞을 스쳐 얼마 안가서 멈춰섰다. 난쟁이령감은 죽은 조상의 귀신마중이나 하듯 달려가 뒤좌석에 엇비스듬히 기대앉은 괴뢰군장교에게 손짓 몸짓 다 써가며 이야기했다. 기덕은 쌍안경을 쳐들어 살피다가 장교의 굉장한 몸집우에 붙어있는 계급장에서 두개의 큰 별을 알아보았다.

《대대장동무, 우리앞에 괴뢰장령과 교관놈들이 탄 차가 멎었습니다. 홀치겠습니다.》

《나도 보고있소. 움쩍말라는 명령이요.》

괴뢰장성이 탄 차는 뒤꽁무니에 매여단 예비다이야를 떼여놓고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기덕은 쌍안경렌즈속에 든 음울한 얼굴의 괴뢰장성이 자기쪽을 돌아보는것을 보고 쌍안경을 내렸다. 해빛반사로 그놈한테 발각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기덕이네가 잡을수 있었으나 보다 큰것을 위해 놓아보낸 장성은 채병덕이였다.

채병덕은 오늘아침 구봉산쪽으로 순회하던 순찰대로부터 2렬종대를 지은 인민군대가 산길을 타고 움직인다는 긴급보고를 받고 띤한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조선말과 영어 절반으로 황급히 웨쳐대는 채병덕의 보고에 대하여 띤은 야유어린 대답으로 면박해왔다.

《당신네 조선속담에 놀란 토끼 자라 보고도 호랑이님 한다고 했습니다. 공포에 눌려 요언을 돌리는자들은 처벌하시오. 새벽은 겁쟁이들에게서 유령을 보는 시간입니다.》

로골적인 멸시와 비양이 담긴 그 말에 채병덕은 아연격분하여 그렇지 않다고, 정 그러면 미군정찰대를 급파하여서라도 다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고집하였다. 띤은 이 말에 이제까지의 허식을 벗어버리였다.

《그만하오. 나에게는 수다스런 로파가 필요없소. 당신은 자기 사병들에게나 훈시하시오.》

채병덕은 자기의 모든 성의와 진심을 한꺼번에 묵살하고 짓밟는 이 모욕앞에서 더는 견딜수 없었다. 하여 그는 이 설분을 풀려고, 그리고 이 설분보다 더 크고 주요한 인민군으로부터의 대전사수를 위하여 대구의 워커사령부를 찾아가는 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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