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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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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2-26 16:46 조회3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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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한창수는 차창을 들어올리였다. 순간 찬바람이 온몸에 들씌워졌다. 하지만 한창수의 몸은 난로통처럼 달아있었다. 그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휙휙 지나가는 전선주들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아득히 논벌이 펼쳐졌다.

한창수는 옷섶으로 바람을 막아대고 라이타를 켰다. 담배연기가 어깨를 날아넘으면서 붉은 줄무늬 넥타이를 잡아채군하였다. 그는 끝없이 뒤로 물러가고있는 들판정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채 이제 몇시간후에 있게 될 처녀와의 상봉장면을 그려보았다.

창유리에 언뜩 처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은 일순 떠오른 환각이였지만 급행렬차보다 훨씬 앞서 달리는 애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쩌릿하니 울려놓는다.

처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쌍까풀진 눈, 긴 살눈섭, 언제나 웃고있으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앵두알같은 입술…

한창수는 지금 작업반동무들의 성화때문에 년말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닷새동안 휴가를 받고 처녀와 《담판》을 하기 위해 급한 길을 떠났던것이다. 군대에 나가서부터 편지가 오가면서 은연중 맺어진 사랑을 더이상 끌수 없었다. 결판을 내야 한다. 장애물이 생기면 몇갑절 더 완강해져서 반항하게 되는 그의 성격이 또한 그를 못견디게 떠밀었던것이다. 그의 이번 걸음에는 다른 한가지 용무가 더 있었다. 그것은 중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있는 전상환을 만나는것이였다. 전상환을 한번 만나야 한다는것은 군대에 복무할 때부터, 사실은 썩 그전부터였는데 제대된후에는 생활상 변동으로 그것을 인차 실현해낼수 없었다. 그런것이 지난 여름 용광로앞에서 우연히 만나고난후에는 더이상 미룰수 없을만치 조급해났던것이다. 《아바이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는 자기 아버지의 군대생활, 더구나 최후순간의 아버지가 어떠했는지 무척 알고싶었다.

같이 싸웠고 같이 부상당했으며 아버지의 최후순간을 직접 목격한 전상환의 말을 들어보아야 하였다.

이래저래 들먹이는 가슴을 안고 한창수는 평양의 지하도를 빠져나가고있었다. 전보를 받았다면 이제 나들문앞에서 문득 《창수동무!》 하고 처녀가 나타날수도 있다.

천천히 걸으면서 행여나 해서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명옥이 비슷한 녀인은 눈에 띄지 않았고 어데서 부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짬을 빠져 고개를 숙일사 하고 서평양행 무궤도전차줄을 찾아가는데 앞에 웬 사람이 길을 막아서서 비켜주지 않는다. 이쪽으로 돌아가자면 그쪽에 막아서고 반대쪽으로 돌아가자니 또 그쪽에 막아선다. 화가 난 한창수는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명옥이가 땅에서 솟아오른것처럼 앞에 서있는것이 아닌가.

얼떠름해진 한창수는 이게 환각이 아닌가 해서 멍청히 서있기만 하였다.

한편 명옥이는 왜 자기를 모르는척하는가 해서 눈살이 꼿꼿해서 한창수를 지켜보고있었다.

정신이 든 한창수가 할싹거리는 처녀의 팔을 와락 붙잡으며

《이게 명옥이 아냐?》 하고 소리를 쳤다.

그렇게 되자 명옥이는 픽 돌아섰다.

《우정 못본척하면서…》

처녀는 토라졌다.

《역사앞에서 암만 둘러보아야 어데 있더라구.》

《거짓말! 앞에 막아섰는데두 못본척…》

《하긴 내가 왜 몰라봤을가.》

그때 문득 한창수는 전상환이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전화를 걸고 오겠으니 잠간 기다리라 하고는 오던길을 되잡아 급히 걸었다. 대합실 공중전화칸에 들어가 중앙당교환을 불러 이름을 댔더니 제꺽 《전상환이 전화받습니다.》라고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제철소의 한창수 전화합니다.》

《아, 그렇소? 지금 어데 있소?》

《평양역입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이야기를…》

《오! 그렇지. 그럼 그렇게 하기요. 오늘저녁 우리 집에서 만나기요.》

《그럼 몇시쯤…》

《저녘 9시 지나면 아무때나 좋소.》 이때 전상환은 제철소에서 돌아오면서 하신 김정일동지의 말씀이 떠올라 한창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창수동무! 그 처녀와 약혼문제가 어떻게 됐소? 올라온김에 아예 아퀴를 지어야지.》

《글쎄 어떻게 될는지…》

《알겠소. 만나서 이야기하기요. 기다리겠소.》

《알겠습니다.》

한 1년동안 처녀와 서로 만나보지 못했었다. 직장배치를 받고 올 때 모란봉에서 한시간정도 만난것이 마지막이였다. 아니 그전에 신의주에서 군대에 나갈 때 헤여진 때부터 계산하면 벌써 10년이 가까와온다.

그들은 역전거리를 지나 대극장앞으로 해서 대동교를 금방 앞둔 대목에서 유보도쪽으로 내려섰다.

쌀쌀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흰저고리에 깜장치마, 기다란 고름이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처녀의 가슴을 잡아당기는데 반반하게 빗어넘긴 머리카락 몇오리가 바람성화에 어쩔줄 모르고 하들하들 떨고있다. 그것은 가슴속깊이에 간직한 처녀의 마음을 나타내는것 같았다. 쌍까풀지고 살눈섭이 진 억실억실한 눈이 새별처럼 강한 빛을 내뿜고있다. 발걸음을 옮겨놓을적마다 치마자락이 부드럽게 감겨돌아간다.

한창수는 가슴이 찌르르해나며 온몸이 련정에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울가? 학교때 명옥이는 그닥치 않은 인물이였는데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번지였다. 년령과 도시풍이 주는 성숙과 세련미에 의해 한껏 무르익은것이다. 그리고 매미날개같은 옷으로 단장하고 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을 무대에서 본다면 어떠할가?

그래 그는 바투 따라오는 처녀를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가슴이 쿵쿵 울리는것을 겨우 참아내고있었다. 그런데… 가슴 한쪽구석에서는 바로 그 우아함과 고상한 품위때문에 불안한 생각이 드는것이였다. 대학을 나오고 매일이다싶이 박수갈채를 받는 가수가 고작해서 제대군인, 용해공사나이를 받아들일수 있을것인가? 비례가 맞는가?

이것으로 해서 한창수는 마치 잠자리를 붙잡으러 가는 어린애마냥 어찌보면 《잡았다!》 하고 쾌재를 올릴것도 같고 아니면 《놓쳤구나.》 하고 실망하게 될것 같기도 한 기분이였다. 기쁨과 실망이 한데 섞여돌아가는 가슴을 안고 한창수는 유보도를 걷고있었다.

한편 명옥이는 불안한 눈길로 어깨가 넙적하고 보기에도 듬직한 제대군인청년인 미남자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한줄기 바람이 휘익 불었다. 한창수의 가슴우에서는 붉은 줄무늬의 넥타이가 잉어뜀을 하고있다. 머리카락이 날리자 한창수는 손으로 몇번 쓸어넘기다가 염낭을 들추었다.

《무얼 찾지요? 수건? 빗?》 명옥이가 물었다.

《수건.》

명옥이가 들가방을 열더니 《여기 있어요.》 하며 수건을 내주었다.

《내게도 있었는데.》

그제서야 색이 다 날은 수건이 나졌다.

《그걸 주고 이걸 쓰세요.》

그것은 미리 준비라도 해두었던것처럼 하얗고 생신한데 향수내가 진하게 풍기였다. 얼결에 받아들었으나 한창수는 공연히 가슴이 후두두해났다. 난생처음 이성에게서 받은 물건인것이다. 그렇다 한들 이런것이 무엇이기에 바위벽같은 사나이의 가슴을 흔들어놓는지 자기로서도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공연히 머리와 이마전을 문대고나서 수건을 웃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롱삼아 한마디하게 되였다.

《처녀가 총각에게 수건을 선물하면 땀이나 눈물을 많이 흘리게 된다는 말이 있소.》

《네?》

처녀는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빤히 쳐다본다.

《그런 말은 우리에겐 해당 안돼!》

창수는 공연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은 용감해지고 또 때로는 형편없이 어리석어진다더니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대동문 아래켠에 있는 유람선부두에 이르렀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유보도의 외등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였다. 불이 켜진 무리등은 마치 잘 익은 청포도알같아 먹음직스럽기까지 하였다. 벌써 추위가 와서 그런지 부두에는 뽀트들을 다 강변에 들어올려놓았다. 한창수는 옥류관에 가서 저녘을 먹자고 하였다. 저녘을 먹고나서 컴컴해진 모란봉에 올라 최종적인 결판을 낼 작정을 하였다.

처녀는 긴 살눈섭을 들어올리더니 고개를 까닥까닥 하였다. 손수건때문에 얼마간 기분이 처진 처녀는 총각이 하자는대로 순응하기로 결심한것 같았다. 사실 명옥이는 명옥이대로 이번에 한창수를 만나기만 하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기의 의견에 따르도록 만들 작정이였다.

시간이 자꾸 흘러가기때문에 옥류관에도 오래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이윽고 처녀와 총각은 청년공원 뒤둔덕으로 올라갔다. 이제 을밀대까지 오르는 사이면 이른바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것이였다.

모란봉, 참으로 뜻깊은 봉우리인것이다. 그리고 또 그 생김새가 얼마나 기묘하고 아름다운것인가. 동쪽은 깎아지른듯한 절벽, 그런가 하면 그와 반대쪽은 유한 산발과 벌판이 활짝 펼쳐졌다. 한쪽은 물, 한쪽은 산… 여기서 수많은 청춘남녀의 운명이 맺어졌고 또 이 서정적인 길을 걸으며 얼마나 많이 사랑을 속삭이였겠는가.

한창수는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자기 또래의 쌍쌍이들이 드문드문 보일 때마다 공연히 시기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왜 가만있어요. 말할게 그렇게도 없으세요.》 명옥이는 한창수의 얼굴을 쳐다본다.

한창수는 제딴의 대담성을 발휘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생활이 재미있소?》

《생활이요?》 명옥은 잠간 생각하는듯하더니 계속하였다. 《재미 있어요. 나는 행복해요. 소원이 다 이루어졌거든요. 학교때 지망하던 음악대학을 나오고 무대에서 우리 제도와 우리 생활을 마음껏 노래 부르니까요. 그래 창수동무는…》

《나는 군대에서나 용광로앞에서나 조국을 지키는 하나의 전사거든… 나의 생은 어데 갖다놓아도 긍지롭고 떳떳하지.》

《참말 좋은데요. 그런데…》

처녀는 의미있게 말끄러미 쳐다보고있지만 한창수는 더 할말이 없었다.

그때 한창수는 사랑의 욕망이 불길같이 솟구쳐올랐다. 그것은 거의 무아몽중이고 의지만으로써는 감당해낼수 없는 일종의 도취였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되여버린 한창수는 두팔을 번쩍 들어올렸다가 처녀의 어깨를 잡아당기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두볼을 싸쥐고 자기 얼굴을 그쪽으로 가져다대였다.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있는 처녀의 뜨거운 입김이 얼굴에 확확 내불리였다.

《똑똑히 대답해. 나를 사랑하는가?》

《…》

《왜 대답이 없소. 왜 말 못해.》

《그건 작년에… 작년에 대답하잖았나요.》

《변치 않았다 그 소리지.》

한창수는 그제서야 처녀의 어깨를 부둥켜안았던 팔을 풀어주었다.

《됐소.그것이 변치 않았으면 이야기를 해보기요.》

갑작스레 《습격》을 당한 처녀는 활랑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한창수의 뒤를 무턱대고 따라가기만 하였다. 시간이 어지간히 흘렀고 을밀대가 저쯤 바라보이는데도 한창수는 아무말도 없었다. 말로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심정이였다.

기다리기에 지친 처녀는 머리칼 향기가 느껴질만치 한창수에게 바싹 다가서며 앞에 막아섰다.

《우리 아버님은요 제대군인이고 당원이면 본인맘대로 결심하래요. 지식도 직위도 모두 앞날에 있으니까 당자만 똑똑하면 상관 않겠다고 했어요.》

《일반적원칙은 옳은데 그게 그렇게 되는가… 네가 좋다면 무조건 찬성이다 이래도 모르겠는데 우리 어머니는 창수 네맘대로 해라, 내가 데리고 살것도 아닌데 이렇소.》

《어때요. 군사복무에 청춘을 바쳤으니 이제는 공부도 하고 앞날에 대한 생각도 해야죠?》

《물론, 그러니까 나도 명옥이와 함께 <1211고지>를 지키자는거지.》

《<1211고지>란 또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하아 이건 정말… 전선동부 최전방요충지 그것을 지켜 우리 청춘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그거야 알지요. 오늘에 와서 그건 왜.》

《오늘에 와서 왜<1211고지>를 찾는가?》

한창수는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렀다는것을 직감하였다. 이런 때 주저해서는 안되는것이다.

《오늘의 <1211고지>가 어데인가?》 하고 크게 웨치며 한창수는 바투 다가선 처녀의 어깨를 투박한 손으로 꽉 그러쥐고 어깨를 흔들어주고나서 계속하였다.

《그것은 내가 지금 서있는 제철소요. 무쇠기둥이 꿋꿋이 서있어야 나라경제가 건강하게 되오. 그 최전방초소에 이 한창수가 서있거든. 이래두 모르겠소? 내 마음을.》 그런데도 처녀는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무엇때문인지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는것이다.

《창수동무, 내 말을 똑똑히 들어주세요. <1211고지>가 어떤곳인가 하는것을 저도 모르지 않아요. 바로 그런 뜻깊은곳이기때문에 우리 인민군용사들이 피로써 지켜싸우지 않았나요. 조선청년으로서, 로동당원으로서 조국앞에서 해야할 의무를 1211고지에서 다했다고 보아요. 그렇지 않아요? 난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제는 자기 생활을 개척할수 있잖아요. 가정도 가지고 부모를 부양도 하고 그러자면 일생 해야 할 직업도 선택해야 하고요.》

《그말은 옳아. 그런데 내가 지금 잘못하는게 뭐가 있소, 도대체.》

《솔직히 말하겠어요. 왜 창수동무는 아직 병사시절의 꿈에서 깨여나지 못하는가요. 평양에 떨어져 공부도 하고 발전도 하고 그렇게 하는게 뭐가 나빠요. 도시에 사는 사람은 다 공장이나 광산, 어촌에 사는 사람만 못한 사람이다, 모두 당성이 모자란다, 이렇게 말할수 있어요? 어디 대답해보세요.》

머루알같은 눈을 깜박이면서 한걸음 다가서서 어깨를 달싹거린다. 그러나 한창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있다. 가슴속에서는 용암같은것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그것을 입으로는 내뱉을수 없었다. 다만 미간을 잔뜩 찌프리고있는 그의 뇌리에는 《아니다, 아니다.》 하는 강한 부정만이 감돌고있을뿐이였다.

《어서 말씀하세요.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렇다고 해서 이 명옥이가 땅에 주저앉아 엉엉 울지는 않을거예요. 내가 알아보니까 동무는 로동성에서 파견한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주장해서 3명의 제대군인이 짝을 무어 거기로 갔다는거예요. 사실인가요? 사실이 그렇다 해도 나는 그것을 탓하지 않겠어요. 자원해갔으니까 거기서 1년동안 곱배기로 일해서 혁신도 하겠지요. 내가 하고싶던 말은 다했어요. 이제는 내가 답변을 받아내야 할 차례예요. 내가 하자는대로 하지요? 그래서 이번에 올라왔지요? 그렇다고 대답만 하세요. 그러면 그후 처리는 내가 다 하겠어요. 제철소에다가 소환장 한장을 떨구기만 하면 되니까요. 어려울것도 없지요.》

《뭐? 제철소에 소환장?》

한창수는 별안간 적의에 가까운 눈길로 처녀를 쏘아보며 다그쳤다.

《그래요. 소환장을 보내지요.》

《소환장!》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종이장 한장으로 사람의 운명을 이리 휘딱 저리 휘딱 돌려놓겠다는건데 시시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어떤 권위나 직급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지금 애정문제를 저울질하고있는 상대자가 이렇게쯤 사람의 가치를 보고있다면 이것은 참을수 없는 멸시이며 희롱이다. 분기가 치미는대로 한다면 건방진 처녀의 따귀라도 후려칠것이였지만 그렇게는 할수 없었다. 애정이 증오로 돌변했는가, 그는 분노에 차서 사시나무떨듯하였다.

《명옥이! 난 학교시절에 동무가 솔직하고 순결한걸 좋아했길래 지금도 그런가 했는데 그때 그 깨끗한건 흔적도 찾아볼수 없이 사라졌소. 왜 이렇게 됐소?》

《학교시절? 순결?》

영문을 전혀 알수 없어 무의식적으로 받아외우기만 한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공격으로 쉽사리 물러서거나 주저앉을 명옥이가 아니였다.

《중학교때 생각 안나?》 하고 한창수는 고개를 높이 들고 처녀의 머리우로 시선을 날리며 말하였다.

《우리는 그때 발목을 묶고 두사람이 세발걸음으로 달리기를 했지. 그때 동무와 나는 맨선참으로 달려갔어. 그런데 동무가 그때 1등을 했다고 심판이 기발을 들어올렸는데도 <아닙니다. 결승선까지 오지 못하고 몇걸음앞에서 매끼가 풀어졌습니다. 우리는 꼴찌입니다.> 하고 끝내 상품타기를 거절했지. 난 그때 그 명옥이를 지금도 잊지 않고있소.》

《정말 동무는 어린 시절 그냥 그대로군요. 우리는 지금 다 자란 청년들이고 자기 앞길을 자기스스로 개척해야 할 중요한 시절에 살고있어요. 지금은 순진한것만 가지고는 살지 못해요.》

《그래 전날이나 오늘이나 뭐가 다르오.》

《그걸 몰라서 물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정 못보는척하는가요?》

《어서 말해보우. 그래 미국놈들이 우리 땅에서 한놈도 남지 않고 다 물러가기라도 했소? 또 남조선괴뢰들이 모두 손을 털고나앉아 우리가 하자는데로 하겠다고 통지해왔는가 말해보우. 뭣이 달라졌나. 저 윁남전쟁을 보지 못하오? 우리가 떨떨하면 아무때고 미국놈들이 우리를 한입에 먹어치운단 말이요. 어서 말해보우. 무엇이 달라졌나. 하긴 달라진것이 전혀 없는건 아니지. 명옥이는 대학을 나와 독창가수가 되고 이 한창수는 총을 벗어놓고 쇠물을 녹이고 있지. 바루 이 변화가 우리를 괴롭히고있는것 같은데 어때? 누가 말한것처럼 까치는 까치끼리 짝을 무어야 하는게 아닌가?》

너무나 흥분한 한창수는 잠시 숨을 돌리고나서야 뒤를 이어대였다.

《내가 솔직히 말해두지. 나는 명옥이를 사랑하오. 이전에도 사랑했고 지금도 계속 사랑하고있소. 그러나 나는 내가 가는 길에서 길을 바꾸거나 돌아설수가 없소!》

《그게 정말이예요?》

명옥은 촉촉히 젖은 눈을 올롱하게 뜨며 따지고들었다.

《그렇소! 진정이요.》

《어느 책에서 보니까 모든것을 초월한것이 사랑이라고 했던데.》

《그건 꺼꾸로 선 생각이요. 우리 아버지는 사랑, 가정, 인정을 다 버리고 조국을 지켜 생명을 바쳤소. 하긴 그것이 조국에 대한 사랑이였다고 볼수 있지.》

《이제라도 내 하자는대로 하겠다고 약속하세요. 그담엔 내가 다 처리하겠어요.》

《여기 평양에 올라온다는걸말이요?》

《그래요.》

《사람을 어떻게 보구 그래. 그것두 애정이야? 그렇게 하는건 애정이 아니구 동정이야! 동정은 약자에게 베푸는 선심이지. 나는 떳떳하게 살고싶소. 그렇기때문에 나는 누구의 동정이 요구되지 않아.》

이때 한창수는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용광로앞에까지 찾아오시여 고무의 말씀을 주신 그것을 다 말하려 하였지만 그렇게 하지않았다. 그렇게도 숭고하고 영광넘친 이야기를 보잘것 없는, 지어 시시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런 자리에서 그것을 펼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런 정도 해놓아도 졸고있는 처녀 하나쯤 능히 흔들어놓았다고 볼수 있기때문에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을밀대에 이르렀다. 사위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갈구랑달이 저쪽하늘에 걸려있을뿐 날짐승 한마리 날지 않았다. 언제보나 고색이 창연한 정각이였다.

아무때고 여기에 이르기만 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온갖 잡념이 자취없이 사라지는것이다. 자주 찾아올수 없는곳이였지만 평양에 오면 꼭 찾아오게 되는곳이다.

이제는 흥분이 어지간이 가라앉고 웬일인지 가슴에는 랭랭한 기운이 차올랐다. 모든것이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알아볼수 없는데 다만 흰저고리 하나만이 달빛을 받아 하들하들 떨고있다는것이 알리였다.

실망과 기대가 엇갈린 속에서 처녀와의 사이에 놓인 간격을 처음으로 느껴보는 창수의 마음은 몹시 허전하였다.

《자! 명옥동무, 오늘은 이만하기요.》

《아, 정말.》 처녀는 탄식을 하면서 옆으로 돌아서는 한창수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 어디 가요?》

《갈데야 많지. 밤이 더 깊어지기전에… 아까 역대합실에서 전화했었지. 중앙당 전상환부부장네 집에…》

《네?! 전상환부부장이요?》

《왜? 아는 사이요?》

《아니 저…》

명옥이는 이때 중앙당의 전상환이라고 하면서 한 스무날전에 전화를 걸어왔던 일을 상기하였다. 무슨 일인가고 물었지만 자세한 말은 없고 한창수라는 제대군인 용해공을 아는가고 물었었다. 그러면서 전화로는 말할수 없고 한번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 부부장동진 친척인가요?》

《아니요. 전쟁때 아버지의 전우요.》

《그래요?… 아, 그런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지요?》

《나한테 물을게 있소?… 난 아직 배반이라는걸 모르오. 상대가 변하지 않았다면…》

한창수는 처녀를 한번 쳐다보고나서 걸음을 내짚었다. 무어라고 소리쳐부르는것 같기도 하고 또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욱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았지만 그는 숫제 뒤돌아보지 않고 칠성문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겨갔다.

그는 그길로 전상환의 집으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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