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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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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2-19 18:16 조회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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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엄한정박사는 일요일인 오늘에도 가슴에 묵직한 시름을 안은채 책상에 마주앉아있었다. 그것은 100년사상사총화를 시작해서 얼마 안되였지만 날이 갈수록 심각한 리론문제들이 앞을 막아서기때문이였다. 거기에 겹쳐서 《사회주의경제건설에서 당의 령도적역할》 이라는 자기의 론문집필사업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것이다. 그는 정치경제학전문가로서 한 20년동안 괄목할만한 론문을 여러편 써내놓았다. 그때마다 반영이 좋았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다작다성》의 학자라고 평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좀 달라졌다. 편수를 늘이는것보다 한생을 총화하는 묵직한 글을 하나 써내겠다는 욕심이 생긴것이다. 그리하여 자료작업을 충분히 하고 착수한것이 이번 글인데 《속필가》로 이름이 났던 그가 완전히 달팽이걸음을 하게 된것이다. 무엇때문인가? 자료부족인가, 아니면 정열의 고갈인가.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붓끝에 매달려 나가지 못하는가? 무릇 모든 저술가들에게는 누구나 두가지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하나는 문제를 발견포착하는 재능이요, 다른 하나는 포착한 문제를 지면에 옮겨놓는 재능이다. 하다면 나는 어느것의 결여인가, 문제의 포착?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바 없었다. 제목이 말해주는것처럼 로동계급의 당이 경제건설에 달라붙은 이 시기에 그것을 어떻게 령도하여 제국주의의 봉쇄를 터쳐버리고 승리의 상상봉에 도달하게 하겠는가 하는것인데 왜 주목할만한것이 아니란 말인가? 더구나 대안의 사업체계가 나온직후부터 더더욱 그것이 중요시되여야 하는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면에 옮기는 재능의 결핍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에 대해서도 전혀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술사업도 역시 다른생활에서 흔히 보는것처럼 마루가 있으면 의례히 골짜기가 있는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것인지, 참을성을 가지고 떠밀고나가야 하였다. 하여 지지부진한대로 얼마간 나가던것이 김정일동지께서 발기하신 100년사상총화를 하면서부터 그것이 차차 심화되면서 어째선지 론문집필이 제자리걸음이 되고말았다.

맑스-레닌주의고전을 연구한다는것이 론문집필에 도움이 되면 되였지 장애가 된다고야 할수 없지 않는가?

엄한정의 고민은 이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찾을수 없는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되여 그는 최근에 이르러 완전히 딴사람이 된것처럼 생활양상이 달라지고말았다.

《여보! 요새 왜 그렇게 우울해졌나요. 그런다고 뭐가 풀린대요. 가끔 오금도 놀리고 말도 해야 기분이 맑아질게 아니나요.》

벌써 머리가 반백이 된 안해 정순녀가 방을 닦아내겠다고 들어온다. 《이따금씩 음악감상도 하세요. 그렇게도 좋아하던 음악은 왜 집어치웠나요. 이것 보세요.》

정순녀가 탁자우에 놓여있던 딸랑종을 집어들고 한번 흔들어보이였다. 《딸라당!》 어린애 주먹만한 구리종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였다.

《아, 아.》

엄한정은 낯을 찡그리며 손을 흔들었다. 《난 그 소리 딱 질색이요.》

《왜요. 얼마나 아름답게요. 모두 행복의 종소리라고 하던데요.》

아침저녁 아빠트골목을 누비면서 국도 팔고 반찬도 팔 때 모두들 좋아하는 그 광경을 그려보는것이다. 정순녀는 중성밥공장에서 이동판매원으로 있다가 얼마전에 고질병인 천식이 도져서 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았던것이다.

《행복의 종소리? 모르겠소.》

엄한정은 펜을 놓으며 고개를 돌리였다. 하긴 세상만물은 모두 제각기 생각하기탓이라고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 딸랑종은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것이였다. 열여덟살때 공부에 미쳐버린 그는 자기와 나이 비슷한 친구와 함께 무작정 관부련락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의지가지 없던 그는 며칠후부터 오사까거리바닥에서 거지생활을 해야 하였다. 오물통을 뒤져야 했고 집집으로 찾아다니며 변소청소를 하지 않겠는가고 묻게 되였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출세》 하여 신문배달자리를 얻게 되였다. 그때부터 특간호가 나오면 허리에 딸랑종을 차고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달리였던것이다. 《딸랑딸랑》 하는 종소리는 그의 등에 사정없이 내려지는 채찍소리와 같았고 그의 가련한 신세를 조롱하는 불길한 징조로도 되였다.

꼬박 이틀을 굶은 어느날이였다. 궂은 비 내리는 저녁 부두가에 앉아 울다가 분연히 허리에 찼던 종을 떼서 바다물에 집어던지고 훌쩍 일어났다.

며칠후 그는 희천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말았던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에는 《행복의 종소리》라고 하지 않는가.

《달라졌지, 달라졌어!》

남편의 느닷없는 소리에 정순녀는 창턱을 닦으며 말을 받았다.

《달라져도 무척 달라졌지요. 그렇게도 명랑하던 사람이 이렇게 우울해지다니요. 몇달어간에…》

안해는 행주치마끈을 허리에 찌르며 상냥하게 말하고있다.

《여보! 내가 분명 우울해보이오?》

《그러찮구요.》

《사실이 그렇다면 그건 큰 행운인데, 천재는 모두 우울형이였단말이요.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도 다 우울형이였고 현대에 와서도 명인이라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는거요.》

《그러니 재능을 손금에 쥐고 나왔군요. 잘됐수다. 어서 일어나 베란다에라도 나가 팔다리를 좀 놀리세요. 방을 좀 거둡시다.》

이런 식으로 안해는 남편의 우울을 얼마간이라도 덜어보려고 애를 쓰는것이다.

초인종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인 리기찬이 나타났다.

훌렁 벗어진 대머리가 번들거리고 왜서인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싱글벙글하고있다.

주인의 안내로 방안에 들어온 리기찬은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시비조로 나왔다.

《요새 소문을 들으니 엄선생이 밤낮 고전에 파묻혀서 숨돌릴새조차 없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선생이라고 불러주지만 사실은 나이가 동갑이고 또 학위학직도 같으며 전공도 또한 같은 정치경제학이기때문에 계칭을 조심스럽게 가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리기찬은 용무와 기분에 따라서 선생이요, 교수님이요 또는 당신, 자네같은 호칭을 적절하게 잘 쓸줄 알아서 누구에게나 기분을 거슬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말이 많을뿐아니라 어데서 주어모았는지 명언, 명구가 아무때나 슬슬 나와 사람들을 놀래우는 수가 많았다.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어떤 일에서나 남한테 지지 않겠다는 완강성과 검질긴 성격이였다.

《한당대 가야 우리 집에 이렇게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요새는 사흘이 멀다하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요?》

엄한정이 솔직하게 물었다. 그러나 리기찬은 《손님은 두가지가 있다지 않습니까. 하나는 올 때 반가운 손님과 다른 하나는 떠나갈 때 반가운 사람이라는데 그럼 나는 전자인가, 후자인가?》 하고 손바닥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문대며 웃는다.

《물론 후자지.》 하고 엄한정은 능청스러운 상대편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이걸로 한번 겨루어볼가요.》 하고 두번째손가락을 꼿꼿이 펴보인다. 빈대 잡으러 가는 손가락같다는 말도 있듯이 그것은 장기졸을 내밀 때의 동작인것이다. 그가 엄지손가락과 두번째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입으로 가져가면 술대접을 하라는것이고 다섯손가락을 한데 오그려 무엇을 푸는 시늉을 해보이면 한턱 잘 먹자는 신호로 되는것이다. 언제 한번 장기에서 판을 져본적이 없는 그였지만 이렇게 도전하는데서는 능수인것이다.

케를 보던 정순녀는 재빨리 벽장안에서 장기판을 내놓았다. 제말로 《무미무취의 인간》이라고 하는 정도인 엄한정이지만 오락기구나 그 《리론》을 갖추는데서는 빈틈이 없었다. 벽장안에는 장기, 바득, 각종 낚시대, 정구채 등이 들어있었고 그와 관련한 출판물도 여러종이 있었다. 그래놓고는 도락에 대한 이야기가 벌어지면 자기는 뭐니뭐니해도 도락에서 《리론》을 우선시한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땐가 리기찬이 《신도락에서도 리론뿐이라면 그건 정말 위의 부담이 없어 좋겠는걸.》 하여 골탕을 먹은적이 있었다. 장기판은 전문기관에서 제정한 규격품인데 쪽을 옮겨놓을적마다 판밑에서 주릉주릉 피아노소리가 났다.

붉은쪽과 푸른쪽을 놓고 서로 미닥질을 하다가 《주인이 양보해야지.》 해서 엄한정이 푸른색을 가지기로 하였다. 《약자선수라!》 하며 그가 먼저 말을 내밀었다. 량쪽이 다 흔히 하는대로 말이 나가고 포가 넘어가고 마지막선에 놓인 졸을 쓰고 하였다. 약간 시간이 흐르자 붉은쪽은 면포요, 푸른쪽은 면상이라는것이 알리였다.

리기찬은 늘 서너수쯤 헐하게 내다본다고 장담하였고 엄한정은 상대방보다 겨우 한수 더 내다볼뿐이라고 하였다. 세상만사는 모두 선전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것이 옳은것인지 실력이 어슷비슷한데도 입심이 좋은 리기찬이 항상 강자로 인정되고있었다. 그러나 이때 이들은 서로 장기수에는 관심이 없고 입씨름이 위주로 되였다.

리기찬이 먼저 도전하였다.

《면에 상을 놓는것을 보니 속심이 뻔합니다. 그러니 벌써 내가 적을 알았은즉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요 나도 모르고 적도 모르면 백전백패라.》

이렇게 하면서 말로 이편의 졸을 때렸다. 《손자는 그렇게 말하기에 앞서 백전백승이 훌륭한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적을 투항케하는것이 상수라고 하였소이다.》 하고나서 엄한정은 옆에 놓인 졸로 말을 먹어치웠다.

경제전문이였지만 세계의 유명한 고전들은 다 읽었기때문에 어떤것이 나와도 말이 궁해지는 법이 없었다. 한쪽에서 《령을 넘을 때는 항상 깊은 골짜기를 타야 한다.》 하면 이쪽에서는 《깊은 골짜기가 언제나 제일 유한 경사지이고 인마가 먹을수 있는 물이 있느니라.》라고 대꾸하였다. 《성동격서》 인가 하면 그 대답으로서는 《적이 집중하면 우리는 분산하고 적이 분산하면 우리는 집중한다.》라고 하였다. 《적을 추격하되 너무 바투 따르지 말라.》 하면 《빠질 구멍을 내놓고 추격하라.》 량쪽에서는 이렇게 입씨름을 하면서도 서로 자기 용무를 잊지 않고있었다.

담배를 붙여문 리기찬은 힐끔힐끔 안방쪽을 훔쳐보다가 끝내 자기 의도를 로출시키고야말았다.

《여보! 따님을 시켜서 커피라도 한잔 끓여오구려. 이거야 목이 말라 견디겠소.》

《그렇소? 아직 유생력량이 괜찮게 남았는데 그렇게까지 목이 탈수는 없겠는데.》 이렇게 하여 상대편에서 따님이라는데 방점을 찍기때문에 엄한정은 제꺽 왼새끼를 꼬기 시작하였다.

《커피정도야 누굴 시킬거나 있소. 내가 손수 해야 례의상…》 이런 식으로 엄한정은 상대편 의도를 왕청같은데로 돌려놓고만다.

이들은 지금 눈을 뜨고 숨박곡질을 하고있는셈인데 번연히 알면서 서로 모르는체하고있었다.

리기찬은 이 집 외동딸 영심이를 자기 아들과 견주고있으면서 중매요 소개요 하는 거치장스러운 절차를 거칠것 없이 자기가 직접 엄한정에게 들이댈 작정이였다. 흔해빠진 통속극의 얽음새에는 대체로 아버지끼리는 등이 져있고 자식들은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그것과 딴판으로 되였다.

리기찬이 중앙도서관 출입을 하다가 모란봉구역의 어느 중학교 문학교원처녀에게 며느리감으로 마음이 끌리였는데 알고보니 그처녀가 바로 엄한정의 딸이라는것이다.

리기찬이 방금전에 커피를 핑게댄것도 이번에는 가정에 있는 처녀의 용모를 보고싶었고 또 그것을 핑게로 혼담을 자연스럽게 끌어내자는데 있었다.

부엌쪽에서 아낙네들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나더니 나들문이 방싯이 열리면서 《아무것도 내놓을것이 없어서요.》 하면서 생신한 기운이 확 풍기는 아릿다운 처녀가 나타났다.

얼굴이 달덩이같고 희고 포동포동한 팔을 내놓았는데 처녀가 조심스럽게 받쳐든 쟁반에는 두개의 유리잔이 놓여있었다.

《어머니가 감주를 담근건데 아직 덜익은것 같습니다.》

처녀의 모습이 얼마나 황홀했던지 리기찬의 손은 쟁반쪽으로 뻗어가는데 그의 눈만은 며느리감으로 점찍은 당사자의 얼굴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리지적인 눈매, 타원이 진 얼굴, 어느 하나 흠잡을데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리기찬에게 비쳐진 하나의 환각이였다. 사실에 있어서는 길거리 어디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처녀였던것이다. 한데 말이 났으니말이지 리기찬에게 환상을 야기시킬만한 근거는 충분하였다.

작년 어느땐가 라지오에서 만 3년동안 소아마비에 걸려 걷지 못하는 아이를 매일 업어 등교시켰고 병원치료를 해서 이제는 대지를 활보하는 중학생이 되게 했다는 교원이 소개된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기특한 처녀도 있구나 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엄한정의 딸이라는것을 요 얼마전에야 알게 되였다.

그때부터 리기찬은 처녀에게 거의 맹목적으로 대하게 되였다. 세상사람이 다알게 된 그 하나의 미거, 부모도 친척도 대신할수 없었던 일을 한 그것이면 모든것을 압도해버릴수도 있다고 보았다. 각각 잔을 들어 한모금씩 마시고나니 이제는 더이상 할말이 없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애꿎은 장기판하고만 해보게 되였다. 일승일패가 거듭되였다. 그러나 기세는 리기찬이 더 등등하였다.

그는 의식적으로 심리공세를 취하고있기때문에 그 효과가 대단하였다. 그는 장기에서 이기기만 하면 팔을 들어올리며 만세를 불러 야료를 먹이였다. 그럴만치 승리에 대한 효과를 최대한으로 보는것이였다. 언젠가 그는 한담을 하다가 이런 말까지 한적이 있었다. 《무엇을 하든 인간은 승리하고 봐야겠습니다. 내가 어느한 책을 보니까 전승자의 상처는 전패자의 상처보다 그 치유기간이 절반밖에 안된다는 실험자료가 나있었습니다. 승리! 참 좋은거지요. 그런데 이게 심리학입니까 아니면 철학입니까.》 이에 대해 엄한정은 즉석에서 대답하였다.

《그것참 좋은 인생관이군요. 그러니 덮어놓고 승리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본 유엔의 어느 한기구의 헌장에는 전쟁도 사람의 머리속에서 나온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구축도 사람의 머리속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지금당장은 리기찬이 상장을 받으라고 으르렁대고있다. 장기쪽을 들고 이쪽의 궁을 때리겠다고 들먹들먹한다. 이렇게 끝이 나는가 했는데 엄한정이 따져보니 상길이 아니고 멱이 막혀있었다. 이것은 완전히 허위공세였던것이다. 그래 그는 빙긋이 웃으며 천천히 귀사를 돌려놓고 어서 쓰라고 턱을 들었다.

《야! 이거야 어디 숨이 가빠 견디겠나. 더이상 가면을 쓰고는 숨을 못쉬겠구만.》 하더니 리기찬이 장기판을 드윽 밀어놓았다.

그 바람에 엄한정도 숨을 가볍게 내쉬게 되였다.

리기찬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정색해서 말을 떼였다.

《내 솔직하게 하나 말할게 있수다. 사실은 이 집 딸을 우리 며느리로 삼고싶어 그러는데 그 절차와 단계가 이렇게 헐치 않군요. 이것이 내가 자주 찾아온 용무고 오늘은…》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담배갑을 집어간다. 이쯤 해두고 눈치를 보자는 속심인것 같다. 이윽해서 엄한정은 탁자우에 놓은 책을 집어들고 천천히 말을 받았다.

《그런데 여보시오, 난 그 집의 자제분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있는데 그렇게 되면 등가교환이 성립될수 없지 않소. 허허, 이거 표현이 좀 야박하지만…》

《아차 이것 보지.》 리기찬은 무릎을 탁 치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렇게 덜퉁하다니까. 그럼 좀 늦기는 했지만 이제 간단히.》

리기찬은 아직 다 타지 않은 담배를 재털이에 던지고나서 손을 맞비비며 말을 떼였다.

《지금 세는 나이 28이고 연극영화대학을 나와 연극극장에 있습니다. 남자로서는 인물이나 성품이 모두 쑬쑬한 축입니다. 이 애비를 닮다보니 사람이 좀 어수룩한 편이지요, 그게 장점인지 결점인지 모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한데 요새 그애한테 한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니 연극계에서는 요새 <일편단심>이라는 작품에 대해 론의가 분분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애녀석이 합평회에서 토론을 한번 했는데 그것으로 해서 인기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며칠전에 우리 옆집사람이 말해줘서 알았지요. 어쨌거나 애는 똑똑한것 같긴 한데 그 똑똑한게 이제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알수 없는 일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그만하면 우리 아이와는 짝이 엄청나게 기울것 같은데요.》

《아 아니 그건 우리가 할 말이고요.》

《하하, 겸손이 지나치면 역효과가 납니다.》

《이 집 부모들이 반대없다면 절반은 성사된것으로 볼수 있고 그다음에는 당사자들의 열도가 어느 정도인가에 달려있겠지요.》

《가만, 그러니 당사자들은 이미 의사가 통했다 그건가요?》

엄한정은 놀라운 시선으로 쳐다보고있다.

《박사선생! 왜 그렇게 능청스럽소, 벌써 다 알고있겠는데.》

《그거 정말 놀라운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엄한정은 《야 영심아!》 하고 아래방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왜 이러오?》

리기찬이 엄한정의 팔을 잡아 자리에 앉히면서 《우리끼리 하던 이야기를 아퀴짓고 봐야지. 이렇게 번개불에 콩닦는식으로 하면…》 하고 머리를 저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엄한정은 딸애를 불러들여다 세워놓고 직방 들이대였다.

《너 이분을, 리기찬선생 잘 알지? 그리고 이 집 아들도 이미 안다는거구. 너를 며느리로 데려갔음 좋겠다는 의사다.》

《아유 정말!》

영심은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더니 아래방으로 달아나버린다.

리기찬은 놀라운 눈길로 정색해진 엄한정의 얼굴과 처녀가 자취없이 사라진 아래방쪽을 번갈아보면서 《이렇게 조급해서야 뭐가 되겠소. 정말.》 하고 난처해한다.

아래방에서는 이집 안주인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딸이 어머니에게 기습을 당한 이야기를 한것 같았다.

《에잇 참 사람두.》

하고 리기찬은 혀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가겠소. 그러나 또 오겠소.》

《아니 왜? 결과를 알고 가야지.》

엄한정은 질질 끌 필요가 없다는 속심이였다. 이렇게 되고보니 문간으로 나서는 리기찬은 엄한정의 립장을 전혀 알수 없게 되였다. 성사되기를 바라는것인지 아니면 이런식으로 거절해버리는것인지 아리숭하였다.

리기찬이 사라진후에 엄한정은 다시 책상에 마주앉았다. 어느새 밤 10시가 넘었다. 이제부터 서둘러도 전날에 있은 《정치경제학비판 서문》에 대한 론의를 정리하는데 새벽까지 끝날가말가 하였다.

정작 시작하고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 전날들에 있었던것을 뒤돌아보는데로 사색이 쏠리였다.

그는 자기자신이 적어놓은 《일기》를 생전 처음 보기나 하는것처럼 신기한 눈길로 더듬어나갔다.

《일기》

붉은 가위인데 두툼한 수첩이였다.

첫머리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부터 일기를 적기로 하였다. 나의 지나온 생애에서 처음 있게 되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몇십년동안 적은것을 가지고있어서 그것만 해도 한짐에 지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그것이 무엇에 필요한가 하는것은 각자 생각하기탓이다. 어떤 사람은 하루생활을 반성하는것이 다음날을 위한 디딤돌로 된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의 습관에 불과한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가 오늘부터 적게 되는 일기의 필요성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다만 여직껏 있어보지 못한 심리적충격때문에 저절로 이렇게 되여진것이다. 하기에 글재주가 어떻고 꾸밈이 어떻고 할것 없이 그저 사실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어두면 되는것이지.》

4월 2일 흐린날 오후는 개이다.

급히 올라오라는 련락을 받고 함흥출장지에서 돌아와 연구소에 출근하였다.

낮 11시경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전화를 걸어오시였다.

올라왔는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는가 물으며 웃으시였다.

《이제 내가 사업내용을 말해주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주시오.》

매우 충격적이였다. 여러개의 의문부호가 단꺼번에 떠올랐다. 어쨌든 좋은 일일것이라는 기대가 가슴을 꽉 채웠다.

5월 ×일 개인날.

출근하자 인차 전화를 받고 나는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계시는 중앙당본부청사로 갔다. 방문을 열자 그이께서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를 맞아주시였다. 우연하다고 해야 할지 3년인가 4년전에 당기관지 《근로자》에 《우리 나라 사회주의공업화에서 전례없는 속도》라는 론문을 발표한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흥미있게 읽었다면서 고무의 말씀을 주시더니 그때부터 만날적마다 정답게 대해주군하시는것이다.

그이께서는 나의 손을 잡으신채로 방안쪽에 놓인 의자에까지 끌고가 앉히시였다. 그러나 자신께서는 서신채 말씀하시였다.

《건강이 어떻습니까?》

《별일 없습니다.》

《얼마전에 수술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감추자던것은 아니고 무심결이였는데 어쩐지 쑥스러웠다. 가까이 지내는 동료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런 세부까지 어떻게 알고계실가?

《충수염이다보니 별일없이…》 하고 우물쭈물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젊은 나이도 아닌데 조심하셔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후 이미부터 잘 알고있던 원시준과 리종화가 나타났다. 원시준은 50년대에 쏘련에 가서 세계정치학을 공부하였고 리종화는 동방철학전문가였다.

둘다 수재급이라고 할만치 머리가 좋은 학자들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전문이 다르고 성격 또한 판이한 이 세사람이 한데 모여앉게 되였는지 알수 없었다.

얼마간 한담이 있었다. 날씨에 대한 이야기, 보도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 윁남전쟁이야기 등을 한참 나누었다. 그런후 김정일동지께서는 앞탁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함께 의논할 문제가 있어서 불렀습니다.》

수첩을 펼치고 잠간 들여다보시고나서 계속하시였는데 이때 그이의 몸동작과 억양이 어떻게 활달하였던지 나는 앉은 자리에서 한 십년은 젊어지는것만 같았다.

《제가 들은데 의하면 지금 사회과학자들속에서 과도기와 프로레타리아독재문제 그리고 현대수정주의 근원에 대해서 론의가 분분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럴것이 지금 국제공산주의운동안에서 현대수정주의가 주되는 위험으로 되고있습니다. 아다싶이 공산주의운동은 시작한지 벌써100년이 넘었습니다.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때로부터 계산하여도 옹근 한세기 이상입니다. 저는 이 100년간의 국제공산주의운동사를 이 기회에 총화해볼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그 방법은 맑스, 엥겔스, 레닌의 중요저서들을 한번 꼼꼼히 훑어보면서 재평가하자는것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목록을 잘 짜야 하겠습니다. 그 많은것을 다 취급할수는 없기때문에 중요저작들을 선택해서 짜되 시간에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읽고 사색하는 시간을 길게 잡고 의견을 나누는것은 1주일에 한 이틀정도로 하는것이 어떤가 하는것입니다. 한 2∼3년 걸릴것으로 보고 꾸준히 내밀어봅시다. 문제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자체로 할것은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제가 거기에 나가겠습니다.

궁극의 목표는 주체사상이 얼마나 혁명의 진리를 반영하고있는가, 시대와 인류의 념원을 얼마나 폭넓고 깊이있게 반영하고있는것인가 하는것을 똑똑히 알기 위한데 있습니다.

제가 보건데 현재 맑스-레닌주의리론분야에서는 혼란을 겪고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큰 혼란입니다.》

저희들은 일제히 고개를 번쩍 들고 정열적으로 말씀을 이어나가시는 그이를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혼란기》, 그 누구도 아직 현시대의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이렇게까지 평가해본적이 없었고 그 누구도 그런 론단을 내릴 엄두를 내지 못한것이였다. 잔잔하던 호수에 한줄기 폭풍이 불어닥친것처럼 그렇게 심리적파동이 일어났다. 맑스-레닌주의에 의해 《머리》가 형성되였고 그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아온 나로서는 지구가 깨여지고 인력을 잃어버려 온 우주가 뒤죽박죽이 되였다는 소식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이때 김정일동지의 시선은 세계지도가 걸린 한쪽벽에 쏠리였는데 어떻게나 강렬한 빛을 뿌렸던지 마치 번개불이 지나가는것 같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중낮이 되였다. 창문으로 바야흐로 신록이 무르익기 시작한 정원수의 기름진 푸른 가지들이 내다보이였다.

그이께서는 12시가 거의 되도록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나의 머리에는 어렴풋이 륜곽이 잡히였다.

100년사상사총화에 대한 표상이 차츰 뚜렷이 부각되였다.

그런데 문제의 난점은 우리 세사람의 판이한 견해와 성격에 있었다. 이제 바야흐로 출범한 항행은 얼마나 많은 암초를 지나 세찬 파도를 타고 넘게 될는지, 또 얼마나 많은 《희망봉》을 에돌게 될지 알수 없었다.

《자! 현재의 초보적인 구상은 이렇습니다. 이것은 벅찬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실로 아름찬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맑스가 즐겨 인용하군하던 단떼의 명제를 하나 상기할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책갈피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 읽으시였다.

《맑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앞에 서면서 과학으로서의 입구에는 지옥으로서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요구가 걸려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마음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여기서는 조금도 겁을 먹어서는 안된다.> 이렇습니다.》

그이께서는 종이장을 들어 흔들면서 통쾌하게 웃으시였다.

그바람에 우리도 곁따라 웃게 되였다. 이렇게 우리는 아름찬 과업이지만 그것을 통쾌하게 대할수 있었다.

나는 오늘 하루동안에, 후날에 가서 참으로 감회깊게 추억하게 될 이 하루동안에 김정일동지에게서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 되였는가? 그것은 우선 다른 그 누구와도 비교할수 없는 뛰여난 시대감각의 예민성이며 다음은 과학탐구와 정치적판단에서 특출한 대담성이다.

어느 나라 어느 정치가, 사상가가 이런 방식으로 사고하고 이런 방식으로 사회주의리념앞에서 거대한 방파제가 되여 나선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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