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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강자 7,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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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1-14 19:32 조회4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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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리대철은 풍선처럼 들뜬 흥을 깨뜨리는 전화기를 불만스럽게 흘기며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받습니다.》

상대방의 환성에 가까운 목소리가 수화기의 진동판을 흔들었다.

《안녕한가, 벽창호!》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리대철은 골살을 찡그렸다.

대체 어떤 작자이길래 첫마디부터 익살이야?

《동문 누구요?》

거칠게 내쏘는 리대철의 언짢은 소리에 상대방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귀구멍을 쑤셔댔다.

《하하하! 나야 나, 명남이.》

명남이라는 소리에 리대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저도 모르게 의자를 차고 벌떡 몸을 솟구쳤다.

《명남이라구? 자네 정말 명남이가 분명한가?》

웨치듯 성급하게 따져묻는 리대철은 반가움과 기쁨으로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이 친구야, 이게 얼마만인가, 엉? 왜 그새 소식 한장 없었나? 내가 자넬 얼마나 찾은줄 알아? 제길, 누굴 탓할것두 못되지. 자네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나?》

《영덕기계련합기업소에서 기사장으로 일하네.》

《저런, 대단하구만.》

《대단하지. 어제날의 패배주의자가 룡이 되였다고 생각되지 않나?》

《패배주의자라니? 왕청같이 그건 무슨 소린가?》

《그거야 대학때 자네가 나에게 씌워준 감투가 아닌가. 생각 안 나나? 대학때 농촌지원 나갔다가 고장난 뽐프를 놓고 싱갱이질을 하던 일…

그때 자네가 날보고 이렇게 말했지, 사람이 패배주의에 빠지면 아무리 육신이 펄펄해도 앉은뱅이만 못하다고. 난 지금도 그 말을 잊지 않고있어.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이 제기될 때마다 그 말을 새겨보군 하지.》

《그래, 자네가 보고싶구만. 한번 시간을 내서 오라구.》

《가겠네. 자네가 그새 배짱이 얼마나 더 커졌는가 보기 위해서라도 꼭 가겠네.》

《에- 그런 말은 그만두고… 우리 만나서 그간 묵어두었던 회포를 나누자구.》

《좋네.》

전화를 끊은 리대철의 눈앞에 잊지 못할 대학시절의 한토막이 영화화면처럼 펼쳐졌다.

리대철과 명남은 대학입학시험을 나란히 한책상에서 치르었고 대학에 입학하여서도 한책상에서 공부하였다.

대학 1학년때 농촌지원을 나간 그들은 한숙소에 들었다.

어느날 저녁 누군가가 그들의 숙소문을 두드렸다.

농장양수기운전공이라며 자기소개를 한 그는 뽐프가 비정상인데 봐줄수 없는가고 하는것이였다.

양수기운전공은 리대철이네가 기계대학 학생이여서 기계물계는 환하게 꿰고있는줄 안 모양이였다.

허나 그것은 오산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지 한달도 되나마나한 그들이 기계물계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고작해서 몇시간의 강의를 받았을뿐이였다. 더구나 뽐프에 대하여서는 교과서뚜껑을 열다만 상태였다.

난감하였다. 시원한 대답을 못하고 주밋거리는 두 대학생을 본 뽐프운전공은 실망한듯 쓴웃음을 지었다.

《에에, 공연히 헛걸음을 했군.》

마당을 벗어나며 하는 운전공의 불평에 리대철은 모욕을 느낀듯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이 울뚝거렸다.

대학생의 자존심이 무시당한것만 같아 참을수가 없었다.

운전공이 사라진 어둠속을 쏘아보는 리대철의 입에서 울분이 터졌다.

《에익, 이거야 어디 참을수가 있나.》

그때 곁에서 멍청해있던 명남이가 빈정거렸다.

《참지 않으면 어쩔테야, 약자 함구무언이라는데.…》

울분을 키질하는 그 소리에 리대철이 홱 돌아서며 명남을 흘겼다.

《뭐라구? 그것두 말이라구 해? 동문 자존심두 없어?》

《헤헤헤. 공연히 성격살리지 말구 자중하라구. 우리야 말이 대학생이지 아직은 중학생이나 같단 말이야. 자기 처지를 알아야지.》

헤실부실하는 명남을 보기가 민망해난 리대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말이라고 해? 대학생이 됐으면 도가 있어야지.》

했건만 명남은 그냥 벙글거렸다.

《그건 좀 지나친 평가지만 할말은 없어. 그런데 동무도 그 양수기운전공한테 코를 떼우지 않았니?》

《좋다, 내 어떻게든 그 뽐프를 살려놓고 대학생의 본때를 보여줄테다.》

윽벼른 리대철은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배낭아구리를 헤치고 책들을 와락와락 꺼냈다.

농촌지원을 나오면서 짬짬이 공부를 하려고 가져온 책들이였다.

그 책무지속에서 《류체기계》책을 찾아낸 리대철은 벌컥벌컥 책장을 번지였다.

두눈이 떼꾼해진 명남이가 기겁한 소리를 하였다.

《어쩌자는거야?》

《어쩌긴, 사람이 마음먹어 못할 일이 있어? 이 책에 뽐프의 원리가 밝혀져있는데 그까짓 고장원인을 못 찾겠어? 동무도 좀 와서 보라.》

《여여여, 올라가지 못할 나문 바라보지두 말랬어. 아, 우리같은 생둥이가 어쩐다는거야? 어, 졸린다. 제발 그만두구 자자꾸나.》

리대철은 못 들은듯 책에 눈길을 박고 움직일줄 몰랐다.

한참이나 책장을 뒤적이던 리대철은 움쭉 몸을 일으키더니 명남에게 간다온다 말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언제 주저앉았는지 끄덕끄덕 턱방아를 찧던 명남은 문소리에 정신을 가다듬고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리대철을 보며 게두덜거렸다.

《에익, 고집쟁이. 제가 뭘 어쩐다구 왕해서 그래? 아무래도 제풀에 주저앉을걸…》

명남은 입이 째지게 하품을 하며 이불을 폈다.

리대철이 뽐프장으로 들어서니 주인은 보이지 않고 해체해놓은 뽐프 부분품들이 뽐프장이 좁다하게 널려져있었다.

그앞에 쭈그리고앉은 리대철은 부분품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며 무엇때문에 뽐프가 비정상일가 하고 생각을 더듬었다.

허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뽐프를 조립해놓고 가동시켜보리라 마음먹은 리대철은 손에 들고온 책을 내려놓고 부분품들을 하나하나 맞추기 시작하였다.

한참동안 씨근덕거리며 조립을 끝내고 전원을 련결한 후 스위치를 넣었다.

윙- 하는 둔중한 동음이 울리는 순간 등뒤에서 《거 누구요?》하는 고함소리가 났다.

그 서슬에 와뜰 놀란 리대철이 얼른 스위치를 껐다.

돌아보니 양수기운전공의 시펄뚝한 얼굴이 리대철을 쏘아보고있었다.

리대철을 알아본 운전공이 방금전 서슬이 딩딩했던 기색을 지우며 기대를 안고 물었다.

《아, 대학생이였구만. 무엇이 잘못된것 같나?》

리대철은 어줍은 웃음을 지으며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행여나 했던 기대가 일그러진 운전공이 밸풀이를 하듯 두덜댔다.

《쳇, 그것도 모르면서 조립은 왜 했어? 래일 새벽에 군에 가서 전문가를 데려오려고 했는데…》

리대철은 운전공의 거친 언행이 불쾌했으나 꾹 참고 싱긋 웃어보였다.

《힘들게 먼길을 갈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침에 논에 물을 대지 못해 모내기에 지장을 주겠는데… 우리 손으로 고치면 되는거지요.》

《누가, 동무가? 아까는 자신이 없어하더니 어떻게 된거요?》

도대체 믿음이 안 가는듯 고개를 기웃거리는 운전공을 보며 리대철은 자신있게 말하였다.

《배짱이 부족해서였지요. 내 무조건 원인을 찾을테니 두고보십시오. 참, 뽐프상태가 어떻다고 했던가요?》

확신있게 하는 리대철의 말에 공감이 된듯 한 운전공이 의미있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허, 학생 이제 보니 나이는 어려도 여간 담차지 않구만. 차돌 한가지야. 좋네, 함께 마음을 합쳐보세. 무엇이 비정상인가 하니 뽐프가 돌아가긴 하지만 흡입과 배출에서 차이가 나서 그러지 않나. 그러니 전기는 전기대로 잡아먹고 퍼올리는 물량은 보잘것 없지. 그러니 야단 아닌가. …》

《흡입과 배출의 차이라…》

혼자소리로 중얼거린 리대철은 그 원인을 찾을듯 책장을 번지였다.

운전공이 눈이 퀭해서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 책에 뭐가 있나?》

《예, 뽐프가 비정상일 때 그 원인이 뭔가 하는게 구체적으로 써있습니다. 사실 전 아직 뽐프에 대하여 생소하지만 앞으로 배우느라면 책을 보지 않고도 웬만한 고장에 대해서 척척 알아맞추겠지요.》

《허, 대단해. 난 학생이 꼭 뽐프박사가 될것 같애.》

《다시 스위치를 넣어볼가요?》

《그러자구.》

마음이 즐거워진 운전공이 스위치를 넣었다.

뽐프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리대철은 귀를 강구고 뽐프의 동음에 주의를 모았다.

한참 지켜보느라니 뽐프의 동음이 고르롭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책에는 현재의 현상에 대하여 베아링이 마모되여 축의 회전이 자기 속도를 보장하지 못하는데로부터 압력조성에 지장을 주어 흡입과 배출에서 차이가 난다고 씌여져있었다.

그게 사실일가? 제발 사실이였으면…

《전원을 끄십시오.》

전원을 차단한 운전공이 미련을 안고 물었다.

《찾았나?》

《예, 베아링이 마모된것 같습니다.》

《베아링이? 책에 그렇게 써있나?》

《예. 뜯어봅시다.》

《좋네.》

공구를 든 운전공이 뽐프를 해체하였다.

리대철이 그의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해체한 뽐프축의 베아링을 보니 아닐세라 마모되여 공간이 생긴것이 헨둥하게 알리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축에서 베아링을 뽑아 흔들어보이는 리대철을 보며 운전공이 혀를 찼다.

《옳구만.》

새 베아링을 교체하고 뽐프를 돌리니 물이 콸콸 쏟아져나왔다.

너무 기뻐 입이 귀밑까지 째진 운전공이 리대철의 손을 잡아 흔들며 목메인 소리를 하였다.

《학생, 고맙네, 고마워. 내 오늘 학생한테 느끼는바가 많아.》

그때는 이미 새날이 밝았을 때였다.

새아침을 불러온 하늘은 부지런한 누군가가 말끔히 물청소를 한듯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간밤을 꼬바기 지새운 리대철은 비록 큰일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자기의 힘, 자기의 손으로 무엇인가를 해놓았다는 자긍심으로 가슴이 뿌듯해났다.

한편 실컷 잠을 자고 깨여난 명남은 리대철의 잠자리가 비여있는것을 보고 눈이 떼꾼해서 허둥지둥 뽐프장으로 달려나왔다.

새벽대기를 흔들며 기세좋게 돌아가는 뽐프를 보는 명남은 생각되는 바가 있는듯 주밋주밋 리대철의 곁으로 다가섰다.

《대철이, 밤새 수고했구나. 난 동무가 기권하고 돌아올줄 알고 꿈나라에 갔었는데… 정말 미안해.》

그러는 명남을 보며 대철은 싱긋이 웃어보였다.

《그걸 보면 난 미련둥이야. 이제부터 동무를 거울로 삼겠다.》

《큰일날 소리 말라구, 거울은 무슨 거울.》

두 친구는 마주보며 즐겁게 웃었다.

추억의 돛을 내린 리대철은 친구가 금시 문을 열고 들어설것만 같아 점도록 문가쪽을 지켜보았다.



8

 

해빛을 받아 기름처럼 번들거리며 흐르는 청천강 물줄기가 한눈에 보이는 제방뚝의 버드나무아래에서 두 처녀가 누군가를 기다리고있었다.

송화와 정향이였다.

공장에 온 첫날 통성을 한 두 처녀는 인차 자매처럼 친숙해졌다.

아침에 송화는 창근으로부터 정향을 데리고 낮 12시까지 여기에 와있으라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가고 물으니 만나면 알게 될거라며 전화를 끊었다.

싱겁기 짝이 없는 전화였지만 어쩔수없이 창근이 하라는대로 하는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때문일가 하는 의문을 풀어보려고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도저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녀인의 머리타래처럼 실실이 가지를 드리운 아름드리 버드나무그늘밑에는 버섯모양으로 땅속에 뿌리박은 두개의 돌이 의자처럼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뒤늦게야 그것을 본 정향이가 신기해서 입을 열었다.

《언니, 이 돌은 원래부터 있던걸가요? 아니면 누가 길가던 사람들이 쉬고가라고 일부러 박아놓은걸가요?》

《글쎄…》

말끝을 여물구지 못하는 송화의 얼굴은 달아오르고 마음이 야릇해졌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돌이여서 정향이에게 솔직히 터놓기가 쑥스러웠다.

인민학교(당시)와 중학교시절 송화와 창근은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멀지 않은 여기 방천에 나와 공부를 하였다.

수학공식과 외국어단어도 함께 외웠고 새로 나온 책들을 읽은 독후감도 나누었다.

그래서인지 여기는 그들에게 정이 들대로 든 곳이였다.

군대에서 제대되여 왔을 때에도 송화는 창근이와 여기에서 감격적인 회포를 나누었다.

《어디 앉을 자리가 없어요?》

무심히 던진 그 말에 앉을 자리를 찾듯 주위를 두릿거리던 창근은 그만 당황해하였다.

철없던 시절에는 아무데라도 퍼더버리고앉았지만 지금은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해하는 창근을 보는 송화는 공연한 소리를 했다는 후회를 하였다.

며칠후 이 장소에서 창근을 만났을 때 송화는 깜짝 놀랐다.

새로 생긴 두개의 돌의자를 본것이다.

웬간한 힘장사도 다루기 힘든 큰돌을 땅속에 박아넣은것이 자연미가 나면서도 보기에도 멋스러웠다.

《어마나! 이건 뭐예요?》

《하늘에서 떨어졌나?》

하늘의 조화이기라도 한듯 능청을 부리는 창근을 보는 송화는 며칠전의 일을 잊지 않고 이렇게 자기를 위해 품을 들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찌르르해났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요?》

《송화를 기쁘게 해주려고…》하는 창근의 얼굴에 어줍은 웃음이 어려있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어느것이 내 자리예요?》

《송화마음에 드는것을 골라잡으라구.》

《아니, 동무가 정해주세요.》

이돌 저돌 살피던 창근은 웃면이 반듯한것을 짚었다.

《이게 좋겠구만.》

창근이가 정해준 돌우에 앉은 송화가 상긋이 웃었다.

《이 자린 영원히 내 자리예요. 동무도 앉으라요.》

그런데 웬일인지 창근은 선뜻 앉지 못하고 주밋거렸다.

《아니, 왜 그래요?》

《응, 그저…》

주저주저하다가 송화의 곁에 앉은 창근의 얼굴이 붉어졌다.

《좋구만!》

창근과 수년만에 어깨를 나란히 한 송화의 마음은 이상하게 두근거리였다.

철없던 시절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송화는 세월의 흐름이 자기들이 그전처럼 허물없이 대할수 없는 나이에 이르게 했음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부자연스러워졌다.

불쑥 오늘부터 생활을 새롭게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그 생활은 소꿉시절 각시놀이를 하던것도 아니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교정을 나설 때 무지개같은 희망을 론하던것도 아니였다.

그것은 목전에 부닥친 사랑과 결혼, 가정이라는 일생문제로서 쥐여짜면 앞날의 행복에 대한 중대사였다.

하다면 창근과 일생을 함께 하면 행복할수 있을가.

본인을 앞에 놓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것은 좀 미안스러운 일이지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닌 송화로서는 그 신성한 권리를 누구에게도 빼앗길수 없기에 어차피 창근을 사랑과 결혼이라는 저울우에 올려놓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어릴 때 아버지들이 송화와 창근의 앞날에 대하여 길을 그어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들의 의사를 무시한것이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전면부정할수 없었고 또 어째서인지 창근이가 싫지도 않았다. 자식이 부모의 뜻을 따르는것은 인륜이 아닌가.

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를수는 없는것이다.

그사이 뼈대가 굵어지고 미남자로 번져진 창근이가 그전처럼 열정적이고 순진한 인간이라면 구태여 앞날에 대하여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허나 알겠는가. 인간이란 성장과정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한다는데…

《송화, 난 오늘 송화와 중요한 문제를 토론하고싶어.》하는 창근의 조심스러운 소리에 상념에서 깨여난 송화가 얼굴을 쳐들었다.

《뭘 토론한단 말이예요?》

《응, 그건…》

다음말을 떼기가 두려운듯 주춤거리며 송화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창근의 두눈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리였다.

창근의 거친 숨소리에 송화의 몸이 부서질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가늠한 송화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겁질린 소리를 하였다.

《저, 꼭 오늘 그 소릴 해야 해요? 갑자기…》

그 순간 창근의 두손이 송화의 손을 와락 덮쳤다.

《나하구 일생을 함께 하지?》

창근에게 두손을 맡긴 송화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기습》이여서 숨이 꺽 막히였다.

《대답해, 찬성한다고.…》

얼굴이 활딱 붉어진 송화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아이, 새빠지게 그건 무슨 소리예요?》

《오, 그러니 찬성한다는거지? 글쎄 송화가 누구라구.》

슬며시 송화의 손을 놓는 창근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어리였다.

《저기 창근동지가 나타났어요.》

정향의 탄성에 생각에서 깨여난 송화가 휘우듬히 뻗어간 제방뚝쪽으로 눈길을 던지였다.

멀리서 량손에 무거운것을 든 창근이가 강가로 나가는 오리마냥 몸을 뛰뚝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향이가 급히 마주 걸어갔다.

그 자리에 그냥 서있기가 멋해진 송화도 어쩔수없이 정향의 뒤를 쫓았다. 두 처녀와 마주선 창근이가 땀투성이가 된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

정향이가 눈치있게 창근의 량손에서 구럭지를 받아쥐며 놀란 소리를 했다.

《어마나, 이건 뭐예요?》

《응. 그건…》

송화가 제꺽 정향의 손에서 구럭지 한개를 넘겨받았다.

《도대체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아침부터 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거예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이며 목덜미에 즐펀한 땀을 씻어낸 창근이가 버드나무그늘로 향하며 벌씬거렸다.

《응, 오늘이 정향이 생일이야.》

《정향이 생일?》

어마지두 놀란 송화가 묻는듯 한 눈길로 정향을 쳐다보았다.

그보다 더 놀란것은 정향이였다.

《예? 내 생일?…》하던 정향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내 생일은…》

《알아, 래일이라는걸… 하지만 난 오늘 정향이 생일을 쇠주고싶었어. 음… 그건 래일은 공장에서 생일을 쇠줄테니까.… 안 그래?》

시뜻해서 자기 주견을 세우는 창근을 놀란 눈길로 쳐다보던 송화가 감심해서 물었다.

《어떻게 정향이 생일을 다 알았어요?》

《응, 그건… 정향이가 공장에 오던 날 경비원에게 내보이는 시민증을 슬쩍 훔쳐보았지.》

창근의 진정에 정향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사한 마음에 목소리가 떨리였다.

《창근동지, 고마워요.》

《고맙긴, 자, 모두 출출하겠는데 상을 차리자구.》

송화가 구럭지에서 접혀져있는 흰종이를 꺼내 땅바닥에 펼쳐놓고 음식들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과일이며 빵이며 떡, 당과류, 단물 등 없는것이 없었다.

《송화와 정향인 의자에 앉으라구, 난 여기에 앉구…》

두 처녀를 돌의자에 앉힌 창근은 이번에는 구럭지에서 큼직한 《봄향기》 화장품곽을 꺼내 정향의 앞으로 내밀었다.

《자, 받아. 이건 송화가 마련한건데… 처녀들의 생일기념품은 화장품이 제일이라나.》

그 소리에 송화는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어마, 그건…

자기는 오늘의 이 자리가 정향을 위해 마련된걸 알지도 못하였는데 생일기념품을 마련했다는건 무슨 엉터리없는 소리인가.

아닌게아니라 처음 정향의 생일소리가 나왔을 때 그것을 알려주지 않은 창근이가 원망스럽고 빈손으로 정향이앞에 나선게 미안스러웠는데 이렇게 엉큼한 수로 내세워주니 다행스럽기도 하였다.

창근은 밉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는 송화에게 한쪽눈을 끔뻑해보이며 땅바닥에 퍼더버리고앉았다.

화장품을 받아쥔 정향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송화동지, 고마워요.》

공치사를 받은 송화가 급한 소리를 하였다.

《아니, 그러지 말아. 사실 그건…》

그때 창근이가 얼른 흰목을 뽑으며 송화를 추어올렸다.

《정향이, 송화가 괜찮지?》

《예.》

《그렇다는 의미에서 우리 축배잔을 들자구.》

날쌔게 마개를 딴 단물병을 고뿌마다 기울여 쏟은 창근이가 두 처녀에게 하나씩 쥐여주며 자기 고뿌를 높이 쳐들었다.

연분홍빛액체가 담긴 세개의 고뿌가 동시에 부딪쳤다.

《야, 정말 모두들 고마워요. 난 이제부터 친언니와 친오빠로 믿고 따를래요. 일없지요?》

정향은 고운 두눈에 눈물을 가득 채워가지고 울먹이였다.

《그럼, 내 진짜 친오빠가 되여줄게.》

저도 별스레 코허리가 매여난듯 창근이가 눈길을 떨구면서 돋구는 목청이였다.

송화가 분위기를 가셔내려는듯 우정 눈을 흘기며 한마디 했다.

《친오빠가 차려준 생일음식앞에서 우는 울보동생이 어디에 있니?》

그 소리에 창근이가 긍정을 했다.

《그러게 말이야, 친동생이라면 응당 기뻐해야지.》

모두가 즐겁게 단물고뿌를 비우고 음식들을 들었다.

정향은 오늘을 영원히 잊을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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