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년대 23 > 조선문학예술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4월 26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조선문학예술

전환의 년대 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0-24 11:10 조회601회 댓글0건

본문

20201018225421_5f3c8938218bdca683729de3ac58c991_ems7.jpg

3

미영은 자기가 맡은 창광거리 30층주택설계도면을 말아들고 림성욱소장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동안 얼마나 고심하면서 완성한 설계였던가. 처음에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감당해낼것 같지 못했는데 성욱소장과 설계집단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런대로 완성해놓고나니 아찔해보이던 령마루에 올라선것처럼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소장방에 들어선 미영은 로설계가의 피로가 어린 얼굴을 보자 대뜸 가슴이 옥죄여들었다.

이미 여러차례 방조를 준바 있는 림성욱은 설계를 보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연필을 들고 몇군데 수정을 가한 소장은 토론한대로 집구조는 괜찮게 되였는데 방안의 면적에 비해 천정을 너무 낮게 설계했다며 엄하게 나무랐다.

《이건 30층주택의 층고와도 관련되는 큰 착오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제일 관심하시는 고층건물인데 주변의 창광산이며 천리마거리주택들과 어떤 조화를 이루겠는지 세심히 타산해봐야지. 덤비지 말구… 나도 한번 현장에 나가보긴 하겠는데 잘 가늠해보라구.》

미영은 얼굴을 쳐들지 못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바라시는 설계가로 훌륭히 키워주려고 자주 눈물이 나게 책망하는 소장의 마음은 알면서도 어쩐지 부끄럽고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떻게 소장의 방에서 나왔는지 몰랐다.

설계실로 돌아와서도 그냥 가슴속이 두근거리여 두볼을 꼭 싸쥐고 앉아있던 미영은 닁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층고에 대해 관심을 적게 돌렸을가? 이러구 있을새가 없어. 소장동지도 건설장에 나가보겠다고 하셨는데…

미영은 설계도면을 서류함안에 넣자 급히 가방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얼마후 건설장에 당도한 미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에나 건설부재들과 모래자갈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각종 륜전기재들이 한벌 깔려 불개미떼처럼 분주스럽게 오갔다.

미영은 갑자기 막막한 생각이 들어 호 한숨을 내쉬였다. 공중에 기구를 띄워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가 설계한 30층주택의 높이를 다른것과 대비해볼수 있겠는가? 미영은 근 한시간동안이나 어느한 세멘트창고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별의별 궁리를 다 굴려보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평양시건설련대 작업장에 우뚝 솟아있는 진옥의 탑식기중기에 눈길이 미친 미영은 (저 기중기의 쇠바가지를 타고 올라가보면 어떨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한데 어떻게 쇠바가지를 탈수 있겠는가?우선 안정규정 위반이고 진옥이가 그 말을 들으면 펄쩍 뛸것이다.《언니, 누굴 혼내우자고 그래요?》 하고 기겁해서 거절해버릴 진옥의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미영은 안타까왔다. 진옥은 얼굴이 동실하게 생긴 처녀인데 보통 괄랭이가 아니다. 미영은 설계과정에 속상한 일이 생기면 자주 진옥의 오빠 강철준을 찾아다니다보니 자연히 진옥이와도 가까와져 이젠 거의 자매간이나 다름없이 돼버렸다.

그러나 설사 진옥이가 마지 못해 응해나선다 해도 사람이 기중기쇠바가지에 탄 사실이 들장나면 야단이다. 성미가 사나운 강두찬지배인이 당장 딸을 탑식기중기에서 뚝 떼여버릴런지로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때에 가서 볼 일이였다. 사전에 소동을 전제로 하고 이것저것 오물쪼물 타산하다간 아무 일도 할수 없다.

그저 진옥이하고만 잘 짜고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이 다시금 미영이를 세차게 충동질했다. 밑져야 본전인데 진옥이와 조용히 만나서 통사정을 해보자.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인정도 많은 진옥의 마음이 동할수 있지 않을가? 미영은 처녀가 앉아있는 탑식기중기운전실을 목이 부러지게 올려다보다가 건설장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자 이때라고 기중기사다리를 타고 재빨리 톺아올라갔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일을 단행하려면 돌격대원들이 모두 식당으로 간 이때처럼 안성맞춤한 때가 없을것이였다. 그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운전실에 나타나자 진옥은 눈이 둥그래서 쳐다보다가 너무 좋아서 손벽까지 쳤다.

《언니가 어떻게 여기로?… 호호…》

《진옥이, 난 진옥이와 조용히 할 말이 있어 왔어.》

《뭔데요?》

진옥이가 새별같은 눈을 깜박이였다.

《이건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알아선 안되는 비밀이야. 또 진옥이가 꼭 도와줘야 할 일이구.》

《좋아요. 언니, 잠간만 기다려요. 내 얼른 오빠한테 점심밥을 갖다주고 올게요. 오늘이 우리 오빠의 생일이예요. 우리 어머닌 그저 오빠밖에 몰라요. 호호…》

진옥이 점심보자기를 들고 운전실에서 나가며 생긋 웃었다.

미영은 자기 일이라면 무작정 도와나서려는 진옥이가 무척 고마왔다.

하지만 그런 진옥이여도 이 일만은 안된다고 딱 잡아떼면 어쩔가?… 미영은 한동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진옥이를 기다리다가 (아니야. 차라리 이게 낫겠어.) 하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운전대우에 손바닥만 한 종이장을 펴놓고 이렇게 짤막히 썼다.

진옥이, 놀라지 말어. 난 지금 기중기쇠바가지를 타고 올라가서 건설장전경을 살펴봐야겠어. 진옥인 알거야. 30층주택은 유능한 설계가들이나 할수 있는 우리 나라 최초의 초고층건물이야. 그런데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나같은 풋내기설계가한테 대담하게 맡겨주셨어. 난 어떤 일이 있어도 꼭 해내야 해.

진옥이도 내가 맡은 30층주택이 잘되길 바라겠지? 진옥의 그 마음을 믿고 부탁해. 딱 한번만 들어줘! 미영 씀

미영은 쪽지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운전실을 나서다가 되돌아서 그 쪽지우에 사탕 한알을 댕그랗게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편지의 여백에다 《진옥아,이 달콤한 사탕이 입안에서 녹아버릴사이면 돼.》라고 한줄 더 쓴 다음 부랴부랴 기중기에서 내려왔다.

미영은 잠시후 세멘트창고옆에서 기중기운전실로 새처럼 가볍게 올라가는 진옥이를 보고 감쪽같이 쇠바가지안에 들어가 숨었다.

진옥이가 어떻게 결심을 하겠는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옥죄여 들었다.

1분… 2분… 3분이 지났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한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상해하는 진옥의 얼굴이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그러다가 드디여 기중기의 동음이 고르롭게 울리였다. 그와 함께 미영은 비로소 자기 몸이 공중에 뜨는것을 느꼈다. 진옥이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왔다.

(진옥이, 고맙다. 정말 고마워!…)

미영은 이젠 됐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러나 기중기바가지가 10m가량 올라갔다고 생각될 때였다. 살며시 머리를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미영은 《어마나!》 하고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꼭 아찔히 치솟은 벼랑우에 올라선것처럼 머리속이 핑핑 내둘리였다. 이걸 어쩌나?… 겁이 난 미영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허둥거리다가 바가지턱을 그러쥐고 저도 모르게 두눈을 꼭 감았다.

미영은 기중기바가지가 조금만 흔들려도 팔다리를 와들와들 떨었다. 어쩐지 자기 몸이 허공에 뜬 가랑잎처럼 여겨졌다. 너무도 기겁한 그는 진옥이한데 당장 내려놔달라고 소리라도 치고싶었다. 순간 운전실 뙤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진옥이가 《언… 니!》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가만히 불렀다. 발깃하던 처녀의 얼굴은 긴장과 불안으로 창백하였는데 그런속에서도 연신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는것을 잊지 않았다.

이젠 그만하고 내려가지 않겠는가 하는 신호이다. 미영은 그제야 얼마간 제정신이 들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쪽! 저쪽두!…》 하고 창광원과 천리마거리쪽을 손짓했다. 진옥이는 몇번이나 고개를 흔들다가 미영이 듣지 않으니 결심한듯 머리를 한번 까딱거리고 나서 얼른 운전실안으로 숨어버리였다. 진옥은 구태여 미영이가 더 신호하지 않아도 여기저기를 다 볼수 있게 기중기팔을 좌우상하로 천천히 움직여주었다. 몇번씩 레루우로 오가며 기중기위치를 옮기기도 하였다. 여간 눈썰미가 빠르고 똑똑한 처녀가 아니였다.

미영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진옥을 꽉 포옹하고 볼이라도 비벼주고싶었다. 얼마후 공중관찰을 마치고 땅엔 내린 미영은 저도 모르게 호… 하고 숨을 길게 내쉬였다. 온몸이 땀에 홈빡 젖고 얼마나 긴장해있었는지 다리가 뻣뻣해 걸음을 제대로 옮길수 없었다.

잠시후 기중기실에 올라간 그는 깜짝 놀랐다. 진옥이가 운전대우에 엎드려 흐느끼고있었던것이다.

《진옥아, 왜 이래?》

《언니!》

진옥은 일어나 미영의 목을 와락 그러안았다.

《다시는 이런 부탁을 하지 말아줘요. 난 못하겠어요.… 더는 못하겠어요.》

미영이도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진옥이가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기중기를 몰았는가를 알게 된것이였다. 진옥의 동실한 얼굴도 온통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래, 약속해. 내가 딱 한번이라구 하잖았어?》

《아이참… 언닌 무섭지도 않던가요. 난 언니처럼 도담한 녀잔 보다 처음이예요.》

《나도 무서웠어. 무척! 난생 처음이야.》

진옥이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미영의 어깨에 문대면서 마침내 귀엽게 웃었다. 한순간에 울기도하고 웃기도 하는 사랑스런 처녀…

미영은 그를 꽉 껴안아주었다.

《진옥아, 이젠 내려가자. 식사를 해야지. 배고프겠구나.》

《언닌?》

《나두 같이 먹을래. 오늘 아침 우리 미옥이가 도라지찬을 싸주더구나. 진옥이도 좋아해?》

《도라지? 아이참, 어서 가요.》

미영은 그처럼 기뻐하는 진옥이와 함께 돌격대원들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도 건설장으로 나갔다. 진옥이가 고마왔다. 원만하지는 못해도 진옥의 도움으로 그 정도로나마 건설장을 부감한 일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미영은 현장에 좀 더 남아있고싶었지만 식량을 공급받는 날이여서 이날은 일찌감치 퇴근길에 나섰다.

그는 자기네 아빠트 뒤마당에 이르자 맞은켠의 식량공급소에 얼핏 눈길을 던졌다. 이제 식량공급소와 식료상점에 다녀오자면 좀 부지런히 움직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서둘러 계단을 밟으며 웃층으로 올라가던 그는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웃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을 피하여 구석쪽으로 비켜서며 눈길을 쳐들어보니 뜻밖에도 문혁이였다.

《어마나!…》

미영은 외마디 놀란 소리를 나직이 내질렀다.

첫눈에 문혁이가 얼마나 고뇌와 우울속에 있는가 하는것은 그의 꺼칠해진 얼굴과 눈확만 보고도 알수 있었다. 문혁이는 오래간만에 만난 미영이에게 마지 못해 억지웃음을 지어보이였다.

《어떻게 여기에 왔어요?》

미영은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며 겨우 이렇게 물었다.

《나도 여기서 살고있소.》

문혁의 느릿한 대답에 미영은 또 한번 놀랐다.

《네? 정말이예요?》

《미영동무가 황주에서 올라와서 우리 아빠트에 들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미처 찾아보지 못해서 안됐소. 미영동무, 집에 찾아갈 시간두 없었구. 4층 6호라지. 내 이제 찾아가지. 우리 집은 6층이요. 동생들이 기다리겠는데 어서 올라가보우.》

문혁은 량해를 구하듯 머리를 가볍게 끄덕거리고는 그의 옆을 스쳐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미영은 어깨가 삐죽 솟은 그의 뒤모습을 쓰린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과연 저 사람이 문혁이가 옳은가싶었다.

(문혁동무의 설계가 보류되였다지?)

미영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설계사업소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하여 문혁이를 더 깊이 파악하게 되였다. 문혁은 사업소의 대부분 설계가들이 호감을 가지고 대하는 신진설계가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재래식침강정기초안을 제기한 설계가들까지도 문혁이가 통판기초안을 내놓자 남다른 탐구심과 성실성 그리고 과학적량심을 지닌 젊은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미처 다 알지 못했던 문혁의 사람됨과 제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느라면 미영은 이상스럽게 마음이 설레이는 자신을 느끼군했다.

미영은 요즘에야 문혁이와 유민호가 한때 가까운 사이였다는것도 비로소 알게 되였다. 일부 설계가들은 통판기초안이 제기되기전까지는 문혁이와 가깝던 유민호가 통판기초안을 완강하게 반대해나서다 못해 문혁이를 인신공격까지 하였다니 유민호란 도무지 리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문혁동무가 얼마나 괴로우면 저럴가? 미영은 자기 집으로 올라가서도 문혁의 무거운 발자욱소리가 그냥 귀전에 울려오는것 같아 꼼짝않고 서있었다.

미영은 한참후에야 겨우 마음을 다잡고 우선 식량공급소부터 가려고 층계를 내려갔다. 그러나 공급소문턱을 넘어선 그는 또다시 예상치 못했던 광경을 목격하고 온 몸이 굳어졌다. 문혁이가 빈 쌀자루를 쥐고 아낙네들가운데 끼워서서 공급소천정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식량공급소란 대체로 녀인들만 출입하는 장소이며 남정들은 거의나 그런것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사는곳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문혁동문 여기 와서 아낙네들속에 줄을 섰는지, 자기 번민속에 깊이 빠져버린 문혁은 부끄러움이나 쑥스러움도 느끼는것 같지 않았다. 미영은 가슴이 옥죄여들었다. 어째서인지 강문혁을 처음 알게 되였던 그날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다.

여러해전 4월의 봄명절이였다. 그날밤 모란봉청년공원 야외극장에서는 평양시예술인들의 경축공연이 있었다. 낮에 대성산유원지에서 명절을 즐긴 미영은 돌아오던 길에 경축공연을 보고싶어 동무들과 같이 청년공원에 들렸다. 야외극장은 시내의 많은 청년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흥성거리였다.

일찌기 서두른 덕분에 무대정면의 제일 좋은 관람석에 자리를 잡았다.그런데 잠간 동무를 만나고 온 사이에 웬 낯모를 청년이 미영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미영이 그곁에 다가가 오도카니 서서 자리를 내주기를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청년은 독서에 정신이 팔린채 자리를 내줄념을 하지 않았다. 아니꼬운대로 자리를 양보해주고싶었지만 그 자리에 놓고 나간 소묘수첩때문에 그냥 물러날수 없었다.

그 속사첩에는 낮에 대성산에 가서 연필로 소묘한 몇장의 그림이 들어있었다. 옆사람들의 일깨움을 받고서야 열독가청년은 그 자리의 임자가 왔다는것을 알았지만 일어나지 않고 조여앉자고 하였다.

《아이참, 거기에 깔아놓은게 있어서 그래요.》

미영이가 속상해하는것을 보고서야 청년은 비로소 엉뎅이밑을 손더듬해보았다.

《아, 마분지 말입니까?》

청년은 이러며 소묘첩을 손에 들었는데 하치 않은 마분지접이인줄로 여긴 거기에서 그림장들이 떨어져내리자 몹시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소묘첩인줄 모르고 깔고 앉았군요. 이거 안됐습니다.》

청년은 미영에게 자리를 내주며 굽벅 허리굽혀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말았다. 수집음을 타는 그의 너무나 어수룩해보이는 거동은 미영의 머리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일이 있은후 미영은 대학창립기념일을 맞으며 진행한 학부별 체육경기장에서도 여전히 책을 들고나와앉은 그를 보았으며 수학경연이나 모범작설계창작에 출품된 그의 작품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여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였다.

미영은 자기를 보면 문혁이가 창피해할것 같아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아낙네들한테서 수모를 받는것 같은 문혁을 보기가 민망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저한테 자루를 맡기고 집으로 올라가세요.》

《음?》

문혁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마주보기만 했다.

《어서요.》

그것은 거의 요구에 가까운 재촉이였다. 문혁은 순순히 미영의 말에 응했다. 얼마후 미영이가 문혁이네 집을 찾아올라갔을 때 문혁이네 집 출입문은 굳게 잠겨져있었다. 어디로 갔을가? 집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잠간 바람쏘이려 밖에 나간게 아닐가? 혹은 건설장에? 미영은 일찌기 저녁을 지어먹고 창광거리설계실로 나가려던 생각을 고쳐하고 우선 강문혁이부터 만나보리라 작정했다. 재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리원에 내려갈 때 문혁이가 따뜻이 바래주던 일이 떠올랐다. 미영은 그날 밤 역전에서 여러가지로 고무적인 말을 많이 해준 문혁을 지금껏 고맙게 여기며 잊지않고있었다. 오늘은 자기도 그때처럼 문혁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될수 있는 무슨 말이든 꼭 해주고싶었다. 문혁이네 쌀자루를 자기 집에 두고 급히 밖으로 나간 미영은 주체사상탑건설장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다우쳤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강우에는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미영은 잠간씩 바람을 등지고 멈춰섰다간 또다시 대동교를 반달음쳐 건너갔다. 강바람이 새로 지은 돌격대숙소의 처마에 매달려 앵앵 울부짖고있었다. 지붕마다에 연통이 삐죽이 꽂힌 토벽집들사이의 좁은 길로 때마침 누군가 바삐 걸어왔다.

박광운이였다. 그는 미영이를 알아보고 반가와하며 소리를 쳤다.

《미영동무! 이 추운날에 어떻게 왔소?》

《문혁동무를 보지 못했어요?》

《문혁이말이요?》

광운이 바람소리때문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안됐구만. 아까 그 친구 식량공급날이라면서 일찍 퇴근했소. 아마 집에 있을거요.》

《그래요?》

미영은 강문혁을 식량공급소에서 만났다는 말을 비치지 않고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문혁동무가 왜 식량공급소에 다녀요?》

《말두 마오. 그 친구 고생이 막심하오. 재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간후 벌써 1년나마 제 손으로 밥까지 지어먹고 다니오. 늙은 아버지를 모시구 홀아버지처럼 말이요. 제길, 이놈의 바람 미쳤군.》

광운은 강바람에 날아날번 한 모자를 눌러잡으며 투덜거리다가 눈을 크게 떴다.

《가만, 저 친구가 아직두 저기 강변에 있구만. 집에 간줄 알았더니…》

아닌게 아니라 강변에서 혼자 서성거리는 사람의 형체가 눈에 띄였다.

《문혁동무의 기초안이 어떻게 됐어요?》

《무슨놈의 판인지 나도 모르겠소.》

광운은 억울한 일을 당한 당사자인양 한숨을 내쉬였다. 그리고는 인차 이렇게 말했다.

《미영동무, 걱정마오. 동무도 문혁이를 만나면 힘을 주오.》

박광운은 명색이 부문당비서이지 사실은 별로 도와주는게 없다고 했다. 이윽고 박광운이 돌격대숙소쪽으로 사라졌다. 미영은 가슴이 뭉클했다. 우선 문혁의 일에 그를 지지하고 동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것을 알게되여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박광운의 말을 듣고나니 정말 문혁이를 도와주지 않으면 그가 당장 쓰러지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이 앞서는 미영이였다.

미영은 용기를 내여 문혁의 등뒤로 다가갔다. 무슨 인기척을 느꼈던지 문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문혁은 미영이가 건설장에 찾아온것을 별로 놀라와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왔소?》

《집에 가니 문이 잠겼더군요.》

《미안하게 됐소. 여기 좀 앉소. 이런줄 알았으면 열쇠를 맡기고 왔을걸 미처 생각질 못했소.》

문혁은 강변의 긴 걸상에 앉으며 비로소 당황해하는 빛을 띠웠다.

《요즘 내 일은 엉망진창이라니까.》

문혁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고 어둑컴컴한 강쪽에 시선을 돌렸다.

《문혁동무, 무슨 말을 그렇게… 나도 동무의 괴로운 마음을 알고있어요.》

미영은 그와 나란히 앉으며 자기의 심정을 조용히 내비쳤다.

《…》

문혁은 말없이 미영을 마주 보았다. 처녀의 맑고 그윽한 눈빛에서 자기에 대한 깊은 동정과 련민의 정을 느낀 문혁이 나직이 말했다.

《고맙소.》

그러자 미영은 더욱 용기를 내여 말했다.

《문혁동무, 너무 락심하지 마세요. 동무의 기초안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대담하고 탐구적인 설계라고 말예요. 지지자들이 있고 문혁동무의 기초안에 과학적인 진실이 담겨있는데 무엇때문에 신심을 잃겠어요?》

문혁은 눈길을 떨어뜨리며 긴 숨을 내쉬였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지금까지 백번 쓰러지면 백번 일어날만 한 인내력과 견인불발성을 가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외워왔지. 그러나 막상 당해보니 그렇게 한다는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구만. 가끔 내가 괜히 허장성세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까지 드오.》

《문혁동무.》

미영의 목소리는 애끓게 울렸다. 그는 한밤중에 홀로 평양을 떠나는 자기를 동정해 렬차가 떠나는 순간까지 역에 남아 손저어주던 문혁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않고있었다.

그렇게 따뜻한 심장을 지닌 재능있는 사나이가 일시적난관앞에서 주저앉을수 있겠는가.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할수 있는 사람도 마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우리 아버지처럼… 망치구 말아요. 우리 아버지가 바로 그런 나약성때문에 인생의 패배자로 됐어요.》

미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나 인차 두손을 가슴앞에 모아쥐며 머리를 쳐들었다. 지금은 자기의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문혁동무, 자기가 제기한 안이 옳다고 확신하면 절대로 굴복하지 마세요. 굴복하면 꼭 후회하게 될 때가 있다는걸 알아야 해요.》

미영은 흠칫 놀랐다. 중병을 앓고난 사람마냥 훌쭉해진 얼굴에 얼핏 눈길이 미친것이였다.

얼마나 마음속의 고민이 크면 저렇게 얼굴이 상했을가? 그런 문혁이한데 아픈 말을 하는 자신이 무정한 녀자처럼 생각되여 미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미영이, 날 괴롭히지 마오. 나는 자기의 설계를 철회한 일이 없소. 시당비서동지앞에서도 나는 나의 설계를 포기할수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했소. 그렇지만 나로서는 그 이상 더 어떻게 할수 없소.》

《그럼 문혁동문 그들을 위해 탐구하고 그들을 위해 설계를 했다는거예요?… 그런것이 아닐테지요?… 우리 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위대한 주체사상의 불멸의 상징인 주체사상탑을 하루빨리 일떠세우려는 전체 인민의 념원… 바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구상을 한시바삐 실현하자구 고심을 하겠지요? 그렇다면 당을 믿고 당의 결론을 받아야지 않아요?… 당은 우리들의 어머니예요. 난 리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이 말의 참뜻을 알았어요. 어머니란 말의 참뜻을 말이예요. 그이께선 내가 절망에 빠진 그때에도 날 보호해주고 계시였어요. 우리 집안의 일을 두고 근심하셨구 가슴아파하셨어요. 문혁동문 당을 믿고 제발… 힘을 잃지 마세요! 쓰러지면 일생을 버리게 되요.》

미영은 아무리 가슴아파도 할 말은 해야겠기에 다시금 애절하게 속삭였다.

《문혁동문 지금은 괴롭겠지만 우리 아버지가 당한 괴로움에는 비길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의 외람된 말을 나무랍게 생각마세요. 과학자로서 당앞에 떳떳이 산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저는 아버지의 인생행로를 통해 제딴의 해답을 찾았어요. 그건 불의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것이예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운명을 의탁하는것이예요. 이것을 일생의 신조로 삼아야 해요.》

문혁은 미영을 새삼스럽게 마주보았다. 담차고 결곡한 성미인 미영의 참모습에 감동한듯 이윽토록 그를 바라보던 문혁은 도리여 위안조로 이렇게 말했다.

《내 미영동무의 그 마음을 잊지 않겠으니 너무 걱정마오. 미영이, 이게 뭐같소?》

문혁은 얄팍한 종이장을 꺼내여 미영에게 내밀면서 물었다.

《아니, 이게 시가 아니예요?》

《글쎄 성욱소장동지도 그렇게 말하긴 하던데…》

미영은 놀란 눈길로 문혁을 쳐다보았다. 문혁이가 시를 쓰다니… 미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시를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는

하나의 물방울인지도 몰라

저 강변의 작은 모래알인지도 몰라

하지만 저 거룩한 탑이

대동강물결우에 아름답게 비껴

영원히 빛을 뿌린다면

내 탓하지 않으리

하나의 물방울로 사라진대도

하나의 모래알로 묻힌대도

억만년 솟아있을 탑과 더불어

빛나게 살리, 나의 참된 삶이여

시를 읽고난 미영은 한손으로 자기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였다. 저도 모르게 량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것을 느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들 하는데 문혁의 시가 바로 그러했다.

문혁은 시를 통해 만년대계의 기념비로 주체사상탑을 훌륭히 일떠세우기 위해 모대기고있는 자기의 마음을 자그마한 가식도 없이 진실하게 보여주고있었다. 그것은 시이기전에 문혁이였으며 그의 깨끗하고 순결한 량심의 웨침이였다. 미영은 이런 문혁인줄을 모르고 금방 그의 앞에 안타까운 심정을 쏟아놓으며 눈물까지 보였던 일이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되였다. 그럴것이 문혁의 시에는 그가 한많은 말에 비길수 없이 깊고도 깊은 뜻이 담겨 보석처럼 빛을 뿌리고있었다. 미영은 조용하면서도 뜨겁고 이를데없이 순박한 반면에 굳세기도 한 문혁의 새로운 모습에 끌리여 두번, 세번씩이나 시를 곱씹어 읽었다. 그러느라 어느새 문혁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강변을 거니는줄도 알지 못하고있다가 다우쳐 걸상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져가며 지평선우에는 붉은 노을이 서서히 피여오르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노을처럼 불타는 강물을 이윽토록 바라보던 문혁은 미영을 향해 돌아섰다.

《미영이, 좀 걷지 않겠소?》

《그러자요.》

미영은 어쩐지 자기의 목소리가 작아진것처럼 생각되였다. 예상치 않게 문혁이한테서 받아안은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것이다.

그러나 그들사이에는 시에 대한 이야기가 더 오가지 않았다. 미영은 브라우스의 옷깃을 매만지며 한동안 말없이 문혁을 따라걸었다. 문혁이도 한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구부정한 자세로 묵묵히 걷기만 하였다. 이따금 그의 어깨가 자기 몸에 와닿는 감촉만을 미영은 행복하게 느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