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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년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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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0-12 15:22 조회5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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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동지께서는 승용차의 뒤자리에 곽운필을 태우고 그와 나란히 앉아서 곧 건설장을 떠나시였다. 오늘은 시안의 여러 살림집건설장들을 돌아보시면서 가까운 시일내에 완공할수 있는 아빠트들까지 포함하여 륜환선거리 철거세대를 들일만 한 주택예비를 최대한으로 탐구해볼 생각이시였다.

《참모장동무, 우선 동평양에 새로 건설한 아빠트로 가봅시다. 운전사동무에게 길을 가리켜주시오.》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차창밖을 묵묵히 바라보시였다.

시행정위원회 일군들이 철거민들을 각 구역에 떼맡겨 동거시킬 궁리를 하고있다지만 그건 인민을 위한 관점이 바로 선 대책안이라고 할수 없었다. 그래서 시안의 주택건설형편을 손금보듯 잘 알고있는 곽운필을 데리고 떠나셨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가 옆에 구부정히 앉은채 안절부절을 못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동평양의 새로 건설한 아빠트로는 가보시나마나 합니다. 두채의 건물에 철거세대를 넣어야 백세대도 풀수 없고 게다가… 그건 중앙당에서 건설한 주택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김정일동지께서는 곽운필의 말에 놀라며 물으시였다.

《그럼 인민들에겐 동거살이를 시키면서 중앙당직원들의 주택이라고 해서 새 집을 그대로 둔단 말입니까?》

그이의 음성은 자못 준절하게 울렸다. 곽운필은 머리를 떨구었다. 별치않게 여기고 한 이야기가 그이의 노여움을 사게 될줄은 몰랐던것이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드리지 못하고 속이 한줌만 해서 수굿이 앉아있었다.

《시행정위원회에서 제기를 했는데 거절을 당했답니까? 그렇지 않으면 제기도 해보지 못했답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곽운필은 바빠맞아서 자기가 한 말을 어떻게 수습할지 몰라했다.

《제가 괜한 소릴… 실언했습니다. 저 혼자 생각입니다.》

《동무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였다 해도 그건 아주 잘못된 견해입니다. 락은 인민이 누리게 하고 고생은 자기 스스로 도맡는것이 우리 당일군들의 품성이 아닙니까… 》

순간 김정일동지께서는 말씀을 뚝 그치시였다. 일군들은 중앙당에서 건설한 주택이라고 해서 범접하려 하지 않지만 그와 반대로 바로 그 당중앙위원회 직원들이 륜환선거리 철거자들을 대신하여 철거기간 동거생활을 한다고 가상해보자. 혹시 이것이 무리한 요구로 될것인가? 아니,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건 일군들의 응당한 본분인데 누구도 그것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상싶지 않으시였다.

그렇다면… 걸상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신 그이께서는 잠시 혼자 속으로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더듬어보시다가 다시금 차창밖에 시선을 주시였다. 지금 형편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해결방도가 있을것 같지 않으시였다. 사실은 이런 때 중앙당만이 아니라 정무원, 중앙과 시급기관 일군들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륜환선거리건설에 한몫 하며 자진하여 동거생활에 나서는것이 옳은 처사일것이였다.

승용차는 어느덧 옥류교를 넘어서고있었다.

《운전사동무, 차를 돌려세우시오. 참모장동무의 말이 옳은것 같소.… 돌아갑시다.》

승용차는 김일성고급당학교앞 도로에서 인차 방향을 돌리였다.

금방 옥류교를 건너온 차가 다시금 되돌아서기 시작하자 곽운필이 괴로운 낯빛으로 그이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큰 건설을 벌려놨는데 철거자들때문에 너무 상심마십시오.》

《결국은 그들을 동거시키자는거지?》

《다른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그이께서는 구태여 곽운필의 말을 부정하고싶지 않으시였다.

《참모장동무, 내 오늘중으로 철거세대에 대한 결론을 주겠으니 돌아가서 마음놓고 일하시오.》

《예?!》

곽운필의 해볕에 탄 갱핏한 얼굴에 한가득 기쁨이 어리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차창밖의 맑고푸른 하늘을 이윽토록 바라보시였다. 걱정하시던 철거자문제를 해결할 결심이 서자 륜환선거리건설을 한절반 제낀듯 마음이 후련하시였다.

곽운필을 건설장에 떨궈놓고 당중앙위원회청사로 들어서신 그이께서는 근 20여일간이나 함경북도와 량강도를 현지지도하시던 수령님의 도착소식까지 받고 기쁨을 금치 못하시였다. 그이를 따라 집무실안에 들어선 책임서기는 그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나서 다시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수령님께서는 벌써 두번씩이나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그래 무슨 일때문에 찾으셨는지 모르겠습니까?》

《예, 그건… 》

《먼길을 다녀오셨는데 건강이랑 어떠하신지…》

《제 생각엔 대단히 좋으신것 같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마음을 놓으시고 지체없이 집무실을 나서시였다.

얼마후 그이께서 금수산의사당에 당도하여 급히 승용차에서 내리시였을 때였다. 의사당의 넓은 앞마당을 조용히 거니시던 수령님께서는 어느새 그이를 알아보시고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마주 걸어오시였다.

《왔구만.》

수령님께서는 희색이 만면해서 그이의 손을 뜨겁게 맞잡으시였다.

《수령님, 이번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보다싶이 이렇소. 량강도까지 갔다가 그냥 올수있더라구. 쾌청한 날에 백두산바람도 실컷 쐤소.》

수령님께서는 가볍게 뒤짐을 지시고 헌헌히 웃으시였다. 년세에 어울리게 품이 넓은 양복차림을 하고 중앙현관으로 앞서가시는 수령님의 걸음은 여간 헌걸스럽지 않으시였다. 뒤따르던 김정일동지께서 요즘 날씨가 찬데 밖에 나오실 때 덧옷을 입으셔야겠다고 나직이 귀뜀해드리자 수령님께서는 크게 웃으시였다.

《그래, 이젠 그래야 할가보오. 사실이야 나도 늙었지. 작년이 다르고 금년이 또 다르니말이요. 오늘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는게 어떻소?》

수령님께서는 채광이 좋은 응접실문을 열고들어서시였다. 량쪽 벽밑에 개인쏘파들과 앞차대가 놓여있는 검소한 방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쏘파에 앉으시면서 그이께 옆자리를 권하시였다. 방바닥의 푸른 주단이며 형광등, 반쯤 걸려있는 수수한 창문휘장마저도 수령님께서 얼마나 검박하게 생활하시는분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듯 싶었다.

앞차대에 간단히 차려져있는 다과접시들과 술잔만이 여느 때같지 않은 방안의 류다른 분위기를 강조해주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무슨 일로 수령님께서 이런 오붓한 좌석을 마련하셨는지 알수 없으시였다. 늘쌍 국사에 바쁜 몸이다보니 수령님께서도 그렇고 김정일동지께서도 언제한번 가정적인 단란한 기분에 잠겨 마주앉을 사이가 없으시였다. 호상 그런 사정을 아시면서도 아무런 내색없이 지내시는것이 예나 지금이나 두분이 꼭같이 체험하는 심정이기도 하시였다.

《수령님,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조용히 물으시였다.

《무슨 날인가?》

수령님께서는 잠시 말씀을 멈추고 손수 잔에 술까지 부으시였다.

《내 오늘 평양으로 들어오다보니 이사짐을 실은 차들이 여러대 눈에 띄길래 총리한데 전화를 걸어 알아봤댔소. 총리가 하는 말이 륜환선거리를 허물고 새로 건설한다나. 거기서 나오는 철거자들이라구 해. 총리동무는 내가 현지지도를 떠난 사이에 있은 당중앙위원회 협의회내용도 들려주더구만. 듣던중 정신이 버쩍 드는 소식이였소. 난 오늘도 현지지도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당대회를 계기로 우리 인민에게 무엇을 더 마련해주면 좋겠는가 내내 그 생각이였는데 륜환선거리를 다시 일떠세운다니 그이상 큰 선물이 어데 있겠소. 내 그말을 듣구 너무 기뻐서 오늘은 이야기나 좀 하자구 이렇게 불렀소.》

수령님께서는 두손을 쏘파의 팔걸이에 얹으시고 편안히 몸을 뒤로 젖히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륜환선거리를 개조한다는것이 그리도 기쁘신지 잠시 정겹게 김정일동지를 바라보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지금처럼 기뻐하시는 수령님을 처음 뵈옵는듯싶으시여 조용히 미소를 지으시였다. 하기야 종파의 잔재인 그 륜환선거리가 우리 인민에게 어떤 불편을 주고 또 수령님의 마음을 얼마나 괴롭혔던가. 그런데 오늘은 수령님께서 만시름을 놓고 환히 웃고계신다. 그 인자하신 모습을 바라보느라니 지금껏 오랜세월수령님께서 우리 인민을 위해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시던 생각이 갈마들며 가슴한구석이 쓰려나시였다.

《그러지 않아도 수령님께서 돌아오시면 중요대상건설과 관련한 구체적인 보고를 올리려고했습니다.》

《나도 그럴줄 알았소. 저 륜환선거리라는데가 광복전에도 왜색으로 얼룩진곳이였지. 금좌통으로 불리운 중성지구의 버금가는 거리에 일본놈 22사단 77련대 병영이 틀고앉았으니 알만하지 않소.》

그 시기 왜놈의 병영주변에 널려있는 건물이라는것도 대체로 장교들과 관리들이 쓰고살던 관가들이였다. 장교들이 거들먹거리며 타고다닌 군마의 뚜걱거리는 말발굽소리, 병졸들의 군가소리로 소란스런 거리에 제나라를 본따서 지은 빨간 벽돌집과 2,3층의 목조가옥들… 조선사람들중에선 괜찮게 산다는 소시민, 장사군들이 평양역쪽에 점포들, 음식점들, 려인숙을 차려놓고 돈벌이에 기세를 올리던 곳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열두살에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 팔도구에서 만경대로 오셨을 때 외삼촌과 함께 성안의 중국료리집에 들려 호떡을 잡수시던 일도 감회깊이 회상하시였다. 역전가까이에도 중국사람이 운영하는 호떡집이 있었다. 조선식기와집, 왜놈들의 목조건물, 중국료리점들이 형형색색으로 들어앉아있었으나 평백성이 거처하는 집은 단 한채도 없었다. 어깨에 떡살이 배기도록 나무를 지고 거리로 오가는 지게군들과 인력거군들, 인부들은 토성랑 움막집에서 살았다.

세월이 망하면 녀자부터 구겨진다는데 조선녀성들도 그때 갖은 수모를 다 받으며 종살이를 했다. 숫저운 꽃나이녀성들이 밤마다 평양역에 나가 화장냄새를 풍기며 손님들을 청해가는걸 보면 태반이 역전앞의 려인숙, 술집들에서 초들초들 시들어가는 녀성들이였다. 바람끝이 차거운 초겨울 이른 새벽 누데기홑옷을 걸치고 새우젓을 파는 늙은이의 싸구려소리는 또 얼마나 구슬펐는지 모른다.
이지러진 쪼각달이 어스름한 빛을 뿌리는 밤에 들으면 훨씬 더 가슴속이 쓸쓸해졌다. 역전앞거리에서 《새- 우젓 사시오.》 하고 처량하게 목청을 뽑으면 그 석쉼한 소리가 멀리 서창장마당아근에까지 울려가군 하였다.

왜놈들이 망해서야 평양바닥의 인력거군과 지게군, 술집기생, 새우젓장사군들이 말끔히 없어져버리였다. 단지 륜환선거리만이 옛 모습 그대로 볼품없이 얼룩덜룩 그냥 남아있었다. 그마저 전쟁때 다 마사지고 륜환선거리에는 깨여진 벽돌장들만이 나딩굴었다.

《난 광복후 새 조선 건설을 할 때두 토성랑사람들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소. 해마다 큰물피해가 보통 심하지 않았거든. 뉘집이나 부엌에 감탕이 밀려들어와 쌓이기가 례상사구 아이기저귈 털면 개구리가 튀여나온다고들 했으니까. 장여름 물구뎅이처럼 습한방에서 살다보니 무슨일인들 없었겠소. 그래 46년 봄 첫 건국사업으로 보통강개수공사를 벌리고 그후 장마철전에 완공해놨지. 토성랑사람들이 김장군덕분에 물란리를 모르고 산다며 눈물을 흘리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하오. 그렇게 좀 살만하니 전쟁이 터져 거기 움막집들도 다 마사졌거든. 난 차라리 잘되였다고 생각했소.》

언제나 고사를 섞어 생활적으로 구수하게 이야기하시는 수령님께서는 오늘도 한마디한마디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시며 평양의 근대사를 세세히 펼쳐보이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 사연많은 력사의 한 갈피에 새겨져있는 못잊을 추억, 어린시절 어머님을 따라 보통강개수공사기공식장으로 나가셨던 일이 되살아오르면서 가슴속이 뜨겁게 젖어드는것을 느끼시였다. 그날 평양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속에 착공의 첫 삽을 뜨시던 수령님의 모습도 다시금 떠오르시였다.

《그 어디엔들 성한 집 한채 있었나… 》

방안에는 수령님의 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금 울리였다.

금방 전쟁을 겪고 반토굴집에서 사는 인민들의 정상이 가슴아파 륜환선거리를 잘 건설해보자고 했던 때를 회억하시며 흘러간 세월의 갈피를 다시금 서서히 번지시였다. 미국놈들이 100년이 걸려도 평양을 다시 일떠세우지 못한다고 헛나발을 불어댔지만 수령님께서는 놈들을 때려부신 강철의 의지로 우리 인민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집을 보란듯이 지어주자고 결심하시였다.

하긴 그놈들이 떠벌인 소리가 정 근거없는 말은 아니였다. 수령님께서는 광복후 대동강에 나가셨다가 매생이를 부리는 한 사공령감과 만난 일이 있으시였다. 그 늙은이는 우리 조상들이 배타고 시재나 겨루면서 대동강에 다리 하나 놓은게 없다고 개탄해마지 않았다. 왜놈들의 강점시기 철다리를 건설했지만 순전히 우리의 재부를 옭아내기 위한 략취수단에 불과했다. 그렇게 일본놈한테 뜯기우다가 광복을 맞이한 청소한 나라가 폭탄세례까지 받고 완전히 재더미로 되였으니 놈들이 우리를 깔볼수밖에 있는가? 하지만 수령님의 전후복구구상대로 빈터우에서 현대적인 살림집들이 일떠서고 1958년 한해동안 평양에 2만세대의 살림집이 건설되자 세상사람들은 이제 조선이 무서운 나라로 된다고들 했다.

《수령님, 그 가슴아픈 이야기를 어찌 다 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은 래년도에 우선 륜환선거리부터 다시 건설하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그래… 내 그 거리의 집을 잘 지어보자고 했는데 망태기가 됐소. 건설부문에 들어앉은 놈들이 그런짓을 할줄이야 알았나? 조선사람이 살게 될 거리에 뻬치까식집이 뭐요. 전쟁직후에 평양시민들이 반토굴집에서 살긴 했어. 그러나 그게 다 온돌집이였지. 조상전래로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살아온 민족의 풍습이야 전쟁을 겪었다고 해서 달라지겠소. 하지만 이미 다 지어놓은 집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최근년간에 어제날의 토성랑자리에 현대적인 고층주택들과 인민문화궁전, 체육관이 솟고 창광원이 생겨나도 륜환선거리 낡은 집들은 그래서 여직껏 그 모양 그 꼴로 남아있었는데 당에서 큰맘먹고 와닥닥 달라붙어 새로 일떠세울 결심을 했다니 내 오늘은 평생소원이 다 풀리는것 같소.》

한손으로 가볍게 안경을 밀어 올리시는 수령님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함뿍 피여났다. 순간김정일동지께서는 오늘도 륜환선거리 철거세대처리문제때문에 마음을 쓰며 무척 고심하던 일이 문득 떠오르시였다. 무려 8천여세대에 달하는 철거자들의 방대한 이동… 그 하나만으로도 그이께서는사람들이 살고있는 큰 거리를 통채로 허물어버리고 다시 건설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난공사인가를 현실적으로 절감하시지 않았던가? 하지만 수령님께서 여느 때없이 뜻깊은 좌석까지 마련하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바라보시느라니 자신의 시름겹던 일은 어느새 말끔히 가셔지고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인민을 위해 한생을 바치시는 수령님, 수령님의 아픔이 비껴있는 거리를 보란듯이 일떠세울 결심이 더욱 확고해지는것을 느끼시였다.

《하나의 도시와 맞먹는 거리를 완전히 허물고 새로 건설한다는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 거기서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됩니까?》

무슨 일에서나 인민의 리익을 먼저 생각하시는 수령님이시였다.

《사실은 그 일때문에 좀 애를 먹었습니다. 갑자기 8천여세대를 단꺼번에 들이밀만 한 주택도 없고 아래일군들의 방안대로 시안의 이집저집들에 동거를 시킬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림시로 취하는 조치라고 해도 조금이나마 인민들의 편의를 침해하는건 허용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앞뒤가 다 막힌셈이 아니요?》

수령님께서는 난감하신듯 두팔을 벌려보이시였다.

《아무튼 대담한 조치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건설기간 중앙당과 시당, 정무원을 비롯한 중앙과 시급기관 간부들과 직원들에게 사상사업을 하여 집을 륜환선거리 철거자들에게 내주고 대신 동거생활을 하는것이 어떨가 합니다. 구태여 다른데로 이사해가느라고 하지말구 아래방과 부엌을 철거자들이 쓰게 하고 일군들이 곁방살이를 해도 좋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면 일군들이 동거생활을 통하여 우리 인민도 더 존중하게 되고 인민들의 생활을 더 잘 알게 될겁니다. 륜환선거리건설의 걸린 문제도 풀고 일군들을 교양하는데도 아주 좋은 기회로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민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주지 않고 일군들도 수양하게 된다? 륜환선거리 철거자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했더니… 인민을 위해 애쓰면 뚫고나갈 길이 생기누만. 눈이 번쩍 뜨이는것 같소. 그럴듯 해. 정말 통쾌하게 풀렸소.》

김정일동지께서는 륜환선거리를 새로 건설하게 되는데 그에 따라 이름도 고쳐야 할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음 그렇지…》 하시며 머리를 끄덕이신 수령님께서는 잠시 말씀이 없으시였다.

이윽고 우렁우렁하신 음성으로

《창광이 어떻소?》라고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곳에 솟아있는 창광산에서 딴 이름이지만 창광거리에는 고집 창(倉)자가 아니라 푸를 창(蒼)자를 달아주는게 좋을것 같다고 하시였다. 푸를 창에 빛 광자, 얼마나 뜻이 깊고 부르기도 쉬운 이름인가! 김정일동지께서 선뜻 동의하시자 수령님께서는《창광》이라는 영원히 빛을 뿌린다는 이름에 어울리게 창광거리를 먼 후날에도 길이 남을 으뜸가는 거리로 잘 건설해보자고 말씀하시면서 다시금 환히 웃으시였다.

《오늘은 정말 기쁜날이요. 력대로 유명한 정치가들은 모두 건축을 잘 아는 사람들이였소. 저 완고한 제정로씨야를 개명하여 뻬쩨르부르그를 건설한 뾰뜨르대제도, 빠리에 베르샤이유궁전을 지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그런 사람이였지. 한데 내 오늘 정말 여기 조선에서 젊은 영걸을 발견한 심정이요. 세계 그 어느 나라 력사를 들춰봐도 사람이 사는 거리를 통채로 허물고 다시 건설하였다는 기록은 없소. 인류력사에 없는 일을 김정일동지가 한다니 난 그 담력에 놀랄뿐이요. 뻬쩨르부르그도 빈 감탕판우에 새로 세웠지.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도시와 맞먹는 큰 거리를 허물고 다시 일떠세우는것과는 다른것이였소.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도 륜환선거리에다 손을 못댔는데… 내가 평양에 개선해나와 일하면서 못한 일이 바로 그것이였소. 그런데 거기를 사회주의리상거리로 전변시킨단말이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그런 건축물을 일떠세워야 합니다. 그들이 로동당시대에서 큰것을 물려받았다고 말할수 있게 되여야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쏘파의 팔걸이를 짚었던 오른손을 쳐드셨다가 힘있게 내리그으시였다.

《한데 그게 몇해나 걸릴가?》

《래년도 당대회전으로 꼭 완공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이미 결심하신대로 사소한 드팀도 없이 침착히 대답하시였다.

《1년동안에?》

수령님께서 그만 크게 놀라시였다.

《예, 1년이면 넉근합니다.》

《그러니 내가 들은 말이 정말이였군. 대단하오, 대단해.》

수령님께서 드디여 온 방안이 찌렁쩌렁 울리게 말씀하시고 쏘파에서 움쭉 일어나시였다. 이어김정일동지를 향해 두팔을 벌리신채 거연한 자세로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난 오늘 대만족이요!》

김정일동지께서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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