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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년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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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0-07 16:18 조회4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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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제 2 장

1

매일 눈코뜰새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남정기는 자기방으로 돌아오자 흥분에 못이겨 잠시 서성거리다가 걸상에 앉았다. 드디여 120여명의 설계집단이 달라붙어 반년가까이 악전고투하며 추진해온 인민대학습당형성안제작이 끝난것이다. 그는 걸상팔걸이를 눌러잡고 한동안 고개를 젖힌채 시름없이 앉아있었다.

이 순간이 오면 기쁨에 차서 환성을 올리고싶었는데 이상하게 나른해지며 긴장감이 탁 풀렸다. 어제까지 뻔질나게 나들던 설계가들도 찾아오지 않고 설핏한 저녁해살만이 창공으로 흘러들었다.

(마침내 끝났구나! 끝났어…)

이제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인민대학습당형성안을 보여드릴 일만이 남아있을뿐이였다. 그 시각이 언제일가? 한주일이나 열흘쯤후에는 보아주실가… 대학습당이 아무리 중요한 건설대상이라고 해도 전당, 전국, 전군의 하많은 사업을 돌보시는 그이께서 그렇게 빨리 시간을 내시기는 어려울것 같았다. 남정기는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사소한 빈틈이라도 있을세라 자체검토를 깐깐히 해야겠다고생각했다.

조용하던 방안에 뜨르릉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그는 걸상등받이에서 녹작지근해진 몸을 일으켰다. 매일 이맘때면 림성욱소장과 시당비서가 자주 형성안제작정형을 문의하군 하여 오늘도 그런가부다 하고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인민대학습당 설계현장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안해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영철 아버지군요. 여보, 어떻게 됐어요. 하던 일을 다 끝냈어요?》

남정기는 그만 어이가 없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자 방금 끝냈소.》

《됐군요. 오늘저녁엔 일찍 집으로 들어오라요.》

《그건 왜? 어제부터 이사간다구 떠들더니 날보구 이사짐을 꾸리라는게 아니요?》

《당신두 참. 그건 내가 다해요. 오늘은 당신이 큰일을 했는데 한상 차리자구 해요. 잊지말고 가까운 동무 두세사람 데리구 오세요.》

《음, 그렇게 하지.》

언제보나 살뜰한 안해였다.

남정기는 안해의 따뜻한 마음이 전류를 타고 흘러오는듯 하여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집안에 기쁜 일이 생기면 언제나 제편에서 먼저 남편의 친지들을 초청하자고 하고 반갑게 맞아주군 하는 안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남정기 역시 오늘저녁엔 그동안 수고해준 설계가들한테 인사를 차리고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를 마치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사짐까지 꾸려놓은 어수선한 집으로 설계가들을 데리고 가는것이 마음에 걸려 그는 얼마간 망설였다. 그러던 그는 앞으로 어느때든지 그들과 조용히 마주앉을 기회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며 송수화기를 다시 들고 설계사업소의 강문혁을 찾았다. 문혁은 이전에 만경대천석식당을 건설할 때 토목설계를 담당하고 남정기를 적극 도와준 젊은이였다. 그때부터 남정기는 문혁이와 남달리 친숙하게 지내면서 자주 만나군 한다. 예나 지금이나 늘쌍 토목설계실에 두더지처럼 꾹 박혀 직심스레 일하는 젊은이에 대한 애착과 믿음이 그들을 허물없는 사이로 만들었던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된 판인지 세차례나 전화를 해서야 겨우 말이 이어졌다.

《이거 문혁이 만나려다 볼장 못보겠다.》

《남선생, 오늘은 그렇게 되였습니다. 글쎄 아침부터 소장실과 기사장실에 연방 불리워다니는 바람에 정신을 못차리겠군요.》

《여보, 우는 소릴 작작하라구. 토목설계실에서 주체사상탑 구조설계를 맡았다면서?》

《그건 언제 알았습니까?》

《난 뭐 귀먹쟁인줄 아나?》

남정기는 껄껄 웃었다.

《정말 잘됐어. 문혁이, 그 좋은 머리를 어디다 쓰겠나? 이번에 기발한 착상을 해서 주체사상탑건설에 한몫 단단히 하라구. 구조설계가로 명성을 날리든가 아니면 평범한 토목쟁이로 밑바닥에서 돌아다니다가 마는가 하는것이 이번에 결정된다는것을 알아야 해.》

《내가 무슨 큰 일을 하겠습니까? 실 전체 설계가들이 흥분해있습니다. 우리 실만 아니라 온 사업소가 벌둥지를 헤쳐놓은것처럼 술렁거립니다. 누구누구는 륜환선거리, 누구누구는 주체사상탑, 누구누구는 개선문설계 하면서… 소장동지는 설계인원이 모자라서 골머리를 앓고있습니다. 참 듣자니 학습당설계집단에서도 일부 력량을 소환할것 같다고들 하던데 알고있는가요?》

성미가 느긋하고 말이 적은 문혁이답지 않게 숨돌릴사이 없이 주어섬겼다. 그것만으로도 문혁의 흥분도를 가늠할수 있었다.

《대체로 짐작은 하고있어. 갑자기 협의회가 있다는걸 봐선…》

남정기는 둬시간전에 사업소 기사장이 전화로 래일아침 소장실에서 열리는 협의회에 참가하라는 련락을 받았었다.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퇴근후에 우리 집에 오게. 오늘 형성안을 끝냈어. 이야기나 나누자구.》

《그래요? 정말 수고했군요. 가지요.》

남정기는 이날 저녁 오래간만에 일찌기 퇴근하여 집에 당도하였다. 벌써 그의 아빠트에서는 새로운 변화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사를 간다고 뒤마당에 묻었던 김치독을 빼놓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옆집에 사는 늙수그레한 녀인은 바께쯔에 탄재를 되는대로 퍼담아들고 아빠트 뒤마당으로 뚱기적거리며 걸어나왔다.

녀인은 그를 알아보자 동네가 들썩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은 영철이네 아버지도 일찍 퇴근해 오는구만요. 어서 집으로 들어가보시우다. 영철 에미도 이사짐을 싸느라 뿌예서 돌아가우다.》

녀인은 왜가리청으로 고아대고나서 자기 집 온돌수리를 하려고 날라다 놓은 모래무지우에 탄재를 쏟아놓으며 혀를 끌끌 찼다.

《에그, 여기서 이사해갈줄 모르고 이 늙은게 왜 만날 아이들과 싸움질했겠수. 온 아빠트의 코흘리개들이 모여들어 실컷 모래를 파헤치면서 장난을 하게 내버려둘걸…》

아래웃방 창문들을 모조리 열어젖힌 그의 집에서는 안해가 장판을 닦느라 열심히 걸레질을 하고있었다. 방안의 구석구석에는 크고작은 이사짐들이 쌓여있어서 여간 어수선해보이지 않았다.

《허… 벌써 이렇게 됐소?》

안해가 부엌문앞에 우뚝 서있는 그를 얼른 돌아보았다.

《당신두 참, 통 깜깜이군요. 이제 인차 돌격대원들이 들이닥쳐서 이 거리의 집들을 헐어버린대요.》

남정기는 어처구니 없어 그저 안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남씨가문의 맏며느리가 언제 이런 이악쟁이가 됐소? 당신이 요즘 건설장으로 로력지원을 다닌다더니 보통 발전하지 않았구려. 혼자서 이사준비를 척척 해대구.》

그는 워낙 집안일에 무관심한 위인인지라 시큰둥한 말로 안해의 마음을 넌지시 중떠보았다.

《그래 이사짐을 싸들고 어데 갈데라도 있소?》

《별 걱정을 다하누만요. 동거면 동거, 아무데라도 옮겨앉지요 뭐.》

《그건 그렇구 곧 손님이 오겠는데 뭘 좀 준비했소?》

《걱정말아요. 그런데 어쩔가요? 집안이 어수선해서…》

《뭬라오, 그걸 탓할 사람은 아니니까.》

남편의 말에 안해는 곱살한 얼굴에 밝은 웃음을 그리며 웃방으로 올라가려는 남정기의 팔소매를 살그머니 붙잡고물었다.

《여보, 요전날 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여기 륜환선거리로 나오셨을 때 말예요. 설계사업소 소장도 함께 동행하셨다죠?》

《그래.》

《정말 소장동진 행복한분이예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의례히 소장동지가 찾아오시겠는데 왜 안왔을가요?》

《바쁘니까 못왔겠지.》

《당신은 그저 단마디 명창이군요.》

안해는 또 한번 상냥하게 웃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남정기는 도배지무늬가 희미하게 바랜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여기저기에 이사짐들이 쌓여있어 어수선하여도 부엌에서 들려오는 안해의 동자질소리로 하여 집안에는 여전히 아늑한 감이 떠돌았다. 잠시후에는 칼도마질소리가 잦게 들려왔다. 어째선지 장단을 치는듯 한 그 소리가 이해 초봄에 이 집안에서 있었던 만찬회광경을 새삼스럽게 련상시켰다.

그날저녁 그의 집에는 여러명의 설계가들이 모여들어 남정기가 제출한 인민대학습당 설계시안이 국가심의위원회에서 1등으로 가결된 경사를 축하해주었다. 남정기는 그때의 남달리 사랑스럽고 발랄하던 안해의 모습을 다시금 보는듯 싶었다.

그가 부엌에서 분주히 돌아가는 안해의 귀에다 대고 《여보, 나를 유명짜한 인물로 만든 공로의 절반은 당신거요. 한데 이밤도 당신은 손님치닥거리에 나한테서 인사받을 짬도 없구려.》하고 따뜻이 속삭여주자 안해는 《이봐요 열정가선생님, 남보기전에 얼른 올라가세요. 당신은 늘쌍 흥분을 걷잡지 못하는게 탈이예요.》라고 행복에 겨워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그 인상적인 밤에 림성욱소장이 맨 마감으로 찾아와 축하의 말을 하던 일도 기억에 생생했다.

《이번에 남동무가 굉장한 실력을 발휘하였소. 정말 기쁘오. 한뉘 건축밖에 모르고 살아온 이 완고한 소장의 진정을 받아주게. 난 동무같은 젊음과 혁신적인 사고가 부럽네.》

림성욱이 스스로 자기를 완고하다고 말한데는 그럴만 한 리유가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건축계의 1세를 대표하는 고전파의 로장이였다.

건축이 고전화되여야 항구성을 보장한다는 리론의 제창자였던 그는 지금도 자기 주장을 다 철회하지 않은 건축계의 원로로 알려져있었다. 한때는 고대그리스나 로마건축의 고전적인 미를 지나치게 숭상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당의 건축미학사상에서 탈선한적은 없었으며 따라서 건축가, 설계가들의 높은 존경을 받고있었다.

《소장동지, 무슨 그런 과분한 말씀을… 사실 이번에 제가 다소나마 성과를 거뒀다면 그건 소장동지의 지도와 방조가 있었기때문입니다.》

《그 말은 고맙네만… 과연 내가 이번에 남동무가 내놓은것과 같은 대작을 독자적으로 내놓을수 있겠는지 모르겠네. 기성의 틀을 깨뜨리며 용감하게 내닫는 자네의 용기와 정열이 부러워. 난 방금 여기로 오면서 우리 건축계에도 벌써 세대교체가 일어났다는 생각을 했네. 말하자면 2세의 놀라운 출현이지.》

소장은 뒤이어 남정기의 안해와도 허물없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머니, 우리 광훈이가 입당했다고 편지가 왔소. 난 그런걸 모르구 이 녀석 어디보자, 네가 당증을 품지 못하고 제대해 오면 집에 들어와내나 하구 벼르고있었구려. 허허… 그 녀석 제법 사람구실을 할것 같거든. 그러고보면 아주머니의 덕이 크지요. 그런데 마음뿐이고 아주머니한테 아무런 보답도 못하고 지냈으니…》

《무슨 말씀을… 전 광훈이가 효성스러운 아들이 되기만 바래요.》

소장은 감동하여 숱진 눈섭을 슴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남정기는 그날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후 안해를 바라보며 《여보, 소장동지가 우리 집에 찾아온건 당신때문이 아니요?》 하고 슬쩍 롱말을 던졌다. 그가 그런 말을 한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림성욱소장이 전후에 외국류학을 마치고 와서 벼락잔치를 한 뒤였다. 설계사업소에서는 누구나 천상배필이라면서 그들 신혼부부를 여간만 부러워하지 않았다.

성욱은 늦장가를 든 봉창이라도 하려는것처럼 휴식일에 안해와 동부인하여 극장이나 영화관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대동강반이나 모란봉으로 자주 산책을 다니기도 하였다. 단지 어린애가 없어 주위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냈으나 림성욱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친구들이 제 아들에게 안겨줄 놀이감을 사들고 다녀도 그는 애당초 놀이감상점이 어디에 붙어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그런걸 파는데도 있느냐고 물을정도로 덜퉁했다. 그러던중 태여난 아들이 광훈이였는데 구역병원 외과의사인 남정기 안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큰일날번 하였다. 광훈이가 여덟살 잡히던 해 급성맹장에 걸린줄 모르고 집에서 약을 먹인다 어쩐다하며 소동을 피우다가 때를 놓쳤던것이다. 림성욱의 가정과 남정기네는 동평양에 2만세대살림집을 건설할 때 두집세대주가 1년가까이 현장에서 함께 침식을 하고 그들의 안해들도 아침저녁 식사운반을 하며 친숙해졌는데 그것을 계기로 두집사이는 각별해졌다. 어린 광훈이의 몸에 병이 생긴때에도 남정기의 안해가 자진 집도를 담당했다. 근 3시간동안이나 수술을 하고 련이어 사흘밤을 꼬박 밝히며 환자를 간호하였다. 그바람에 남정기도 병원에 달려가서 림성욱의 내외와 함께 밤을 새웠다.

그들의 관계는 지금도 계속되여 명절날같은때는 자주 두집식구가 한자리에 어울려앉기도 한다.…

《여보, 시장하지 않아요?》

부엌에서 울리는 안해의 말을 들은 남정기는 비로소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왜? 출출하다구 나 먼저 먹으라나?》

《아이 참, 별난 말씀도 다하시네.》

안해는 어처구니 없는지 소리내여 웃는다.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기다리던 문혁이가 올줄 알았는데 뜻밖에 유민호의 삽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편안했수?》

《에그머니! 명철이 아버지구만요. 요즘은 왜 한번 얼씬 안했어요?》

《이렇게 드문드문 와야지 자주 오면 반갑나요. 형님은 계시우?》

《있어요. 어서 올라가요.》

《에- 더워. 오늘은 형님이 일찍 왔군요.》

민호는 얼굴에 웃음을 발린것 같이 말하며 방안에 들어섰다. 그는 가방을 바닥에 놓고 제집이나 다름없이 샤쯔를 벗어 옷걸개에 걸면서 이구석저구석의 보따리들을 살펴보았다.

《형님네는 벌써 이사준비를 다 했구만요.》

《난 알지도 못했어. 순전히 저 량반 혼자서 볶아댄 솜씨야.》

《그렇겠지요. 이 집은 처형만 없으면 한지라니까요.》

민호는 유쾌히 웃고 남정기와 마주앉으며 가방에서 인삼술을 한병 꺼내여놓았다.

《요전날 형님생일에 못와서 미안하게 됐수다.》

《사람두, 그게 무슨 큰일이라구. 오늘 저녁에 문혁이도 오기로 했는데 만나지 못했나?》

《전 외출을 했다가 사업소에 들리지못하고 곧장 오는 길입니다.… 가만, 저게 문혁이가 오는게 아닙니까?… 문혁이가 맞군요. 범이 제소릴 하면 온다더니 그른데 없군.》

문혁이가 들어서니 조용하던 집안이 일시에 소란스러워졌다.

《사모님, 무고하신지요?》

《아유, 문혁아저씨도 오구, 참 잘 오셨어요.》

유민호가 먼저 와있는것을 본 강문혁은 인사대신 싱그레 웃음을 지었다.

유민호는 문혁이네 설계실을 책임지고있는 실장이였다. 사업소의 신진들축에 속하는 민호였지만 사람이 여간 령리하지않다보니 도합 인원이 여섯명밖에 안되는 부서이긴 해도 중견설계가들까지 거느린 실장으로 되였다. 문혁이와는 같은 대학출신이였다. 서로 학년이 다른탓에 대학때는 별로 특별한 교제가 없었는데 한부서에서 일하면서부터 교우관계가 깊어진 사이였다.

《나도 방금전에 왔네. 앉으라구.》

민호는 문혁에게 앉을 자리를 내주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남정기의 안해가 마침 부엌에서 상을 차려들고 올라왔다.

《형님, 이번에 우리 실에서 주체사상탑 구조설계를 맡았습니다.

소장동지가 그러던데 다른데서 한두명의 전문가들이 보충된다나 봅니다.》

《그런가? 실장인 자네의 임무가 정말 중요하군. 주체사상탑이 어떤 탑인가.… 한번 솜씨를 보이게. 구조설계가로서 한생을 걸고 달라붙어볼만 한 중요대상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내가 먼저 붓지.》

남정기가 나이를 가리지 않고 겸손하게 말했다.

《아니, 오늘은 남선생이 학습당형성안제작을 끝냈는데 우리가 먼저…》

문혁이가 바삐 손을 내밀어 제가 술병을 잡으려고 했다.

《학습당형성안을 끝내다니?》

민호는 놀라움과 감동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남정기를 치떠보았다.

《난 형님네 집에 이런 경사로운 일이 있는줄도 모르고 왔군요. 우선 제가 한잔 부읍시다.》

민호는 인삼술병을 들고 남정기앞으로 내밀었다.

《술병을 이리 내게.》

술병을 당겨 쥔 남정기는 젊은이들의 잔에 먼저 붓고 자기 잔도 채웠다.

《자, 들자구. 자네들의 성공을 위해서!》

남정기는 술잔을 쳐들었다. 문혁이는 조심스럽게 잔을 찧었다.

《고맙습니다. 저같은 신병을 이렇게 고무해주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전 이 자리를 빌어 인민대학습당설계가 최상의 걸작으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문혁의 말이였다.

《명작이야 왜 인민대학습당만이겠나. 주체사상탑이야말로 세계의 탑건설력사상 일찌기 류례가 없는 우리 식의 독특한 대기념탑으로 건립되여야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들의 책임 역시 대단히 무겁고 영예로운건줄 알라구. 자, 들게.》

세사람은 다같이 첫 잔을 비웠다. 그렇지만 다음 순배부터는 자기의 주량에 맞게 조절하며 마셨다.

남정기는 유민호와 강문혁이 번갈아 부어주는 술을 연거퍼 너덧잔 마시고나서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말 행운아들이야. 얼마나 위대한 건설의 시대에 살고있나. 이런 시대에 이 나라의 건축가로 살며 일한다는건 아무에게나 쉽게 차례질수 없는 커다란 행운이네. 만일 우리 당에서 온 세상 건축가들이 부러워 할 대기념비적건축물들을 일떠세울 결심을 하지 않고 거창한 건설판을 벌려놓지 않았다면 자네들이나 나같은 건축계의 <송사리>들이 어떻게 세계적인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될 기념비적대작들을 맡아안을수 있었겠나. 열번 다시 태여난들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차례지지 않을거네. 드넓은 바다에 큰 고기가 있는것처럼 기념비적대건축이 진행되는 곳이라야 건축의 대가들도 생겨나기 마련이야. 건축가가 활개치자면 건설의 활무대가 있어야 하거든. 나는 그래서 우리 <송사리>들에게도 거창한 활무대를 펼쳐주어 우리를 <큰 고기>로 길러주는 우리의 어머니당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네.… 이거 정말 우리 집에 선풍기라는 물건짝이 하나 있은것 같은데 저 사람이 것두 벌써 보따리속에 꿍져넣었나?》

남정기는 안해를 찾아 이미 이사짐속에 걷어넣은 선풍기를 다시 꺼내놓게 하였다. 윙 소리를 내면서 바람을 풍겨주자 남정기는 머리를 둬번 흔들더니 약간 혀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들 내가 오늘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나? 건축혁명이 벌어지는 오늘의 장엄한 광경을 목격하지 못한 불우한 로설계가를 생각했네. 심운호선생말일세. 그 선생은 바로 이 륜환선거리때문에 설계가의 운명을 망친 사람이네. 심선생은 이 거리의 건축구조물들이 사반세기도 채 되지 않아서 흔적없이 사라지게 되리라는걸 상상도 못했을거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였지. 거리란 한번 생겨나면 보충할수는 있어도 없애기는 어려운거니까. 대도시복판에 자리잡은 거리 하나가 개조되자면 최소한 삼사십년은 품을 들여야 하는것이 통례거든.

그런데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단 1년동안에 륜환선거리를 통채로 날려보내고 새로 일떠세울 결심을 내리셨으니 천지개벽이면 이런 천지개벽이 어데 있겠나. 선생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무덤속에서도 놀라서 벌떡 일어날걸세. 자기가 저지른 과오의 응결체가 영영 없어져버리니 말일세.》

그의 말을 심각하게 듣고있던 강문혁이 얼른 련상되는것이 있었던지 넌지시 한마디 비쳤다.

《얼마전에 제가 평성쪽에 갔다오다가 평양역에서 바로 그 심운호선생님의 딸과 만났습니다. 남선생을 만나뵈러 왔다가 황주로 내려가는 걸음이라더군요.》

《음, 그런 일이 있었지. 한데 문혁이도 전부터 미영일 알고있었나?》

《대학때 청년공원야외극장에 구경가서 그 동무와 면식이 있게 되였습니다. 알고보니 심운호선생님의 딸이라더군요. 그담부터 만나면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와졌습니다. 이번에 평양역에서 만났는데 처음엔 웬일인지 제가 소리쳐 부르는데도 듣지 못하고 정신없이 지하홀을 향해 내려가질 않겠습니까…》

남정기는 알겠다는듯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며 잠시 말없이 앉아있었다. 미영이가 괴로운 마음을 안고 떠나갔다는것은 그도 짐작하는바이지만 그 외로운 처녀를 문혁이가 바래워준줄은 몰랐다.

《그런 일이 있었구만.》

남정기는 문혁을 깊은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나서 민호의 잔등을 건드렸다.

《이 사람 민호, 자넨 오늘 좀 이상하군. 어째 술에만 매달리나? 자네도 미영을 모르지 않을텐데… 그날 미영이가 엄마잃은 명철이를 찾아줬지. 자네 처가 무슨 말을 하지 않던가?》

《그 비슷한 말을 한것 같긴 한데…》

민호는 얼굴이 빨개서 두리뭉실하게 대답하였다.

《사람두 참, 그 비슷한 말이라니…》

《그만 흘려듣고 말았습니다.》

《여보, 그래도 제 아들 귀한줄은 알겠지? 원.》

남정기의 말은 푸접없이 들렸다. 문혁이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가시려는듯 말머리를 돌리였다.

《남선생… 미영동무도 이제 륜환선거리를 새로 일떠세운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겁니다.》

남정기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마 울거요.》

꿀먹은 벙어리처럼 한옆에 물러나 앉아있던 유민호는 머리를 수굿하고 담배질만 하다가 문혁에게 이젠 그만 돌아가자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정기는 민호를 더 붙잡지 않았다. 그가 무엇때문에 서둘러 떠나는지 알수 없었지만 그 까닭을 묻게 되지도 않았다. 남들은 어쩌면 형제보다 동서간의 정이 더 두텁다지만 그들만은 이래서 매번 어성버성하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남정기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강문혁까지 민호를 따라 방에서 나가자 한동안 창밖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 이튿날 아침 설계사업소 소장실에서는 기사장, 각 설계실장, 심사실, 업무부서의 책임자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설계력량을 조절하는 심중한 론의가 있었다.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륜환선거리, 대학습당, 빙상관설계를 동시에 그것도 아주 시급히 내밀어야 할 어려운 과업이 제기된 조건에서 설계력량의 재조절은 불가피한 일이였다.

다른 대상건설에 동원되여있는 설계가들을 소환하고 자체로 사업소주택을 건설하고있는 설계가들을 불러들일 대책까지 토의하고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승용차의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리였다.뒤이어 평양시행정경제위원회 안창화부위원장이 소장실로 들어오다가 출입문가에서 주춤거리였다.

《회의중인가요?》

《아니, 부위원장동무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왕림하셨소. 어서 들어오시구려.》

림성욱이 걸상에서 일어서며 안창화의 기색을 살폈다. 시행정위원회 일군들중에서 주택문제를 담당한 안창화만큼 들볶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잠간만 실례합시다.》

안창화는 소장이 걸상을 권하자 사양하면서 급히 물었다.

《소장동무, 여기서 한주일안에 륜환선거리설계안을 내놓는다는게 사실이요?》

《그렇게 계획하고있습니다.》

《그래 륜환선거리에서 몇세대나 철거해야 합니까?》

방안의 사람들은 안창화의 의혹이 실린 얼굴을 긴장해서 바라보았다. 륜환선거리건설은 하나의 도시를 일떠세우는것만치나 거창한 사업인것만큼 빈공지를 타고앉아서 일판을 벌리는 공사와는 완전히 다르다. 몇천세대 살림집들을 허물어버리고 낡은 건물들의 잔해를 실어내야 한다. 애당초 단단히 잡도리를 하지 않고서 달라붙었다간 크게 랑패볼수 있는데 안창화는 그대로 철거세대때문에 여간 걱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70∼80%세대는 이동한다고 봐야지요. 개중에 일부 건물들을 살리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뭐라구요?》

안창화의 두눈이 대뜸 뎅그래졌다.

《소장동무, 지금 륜환선거리에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살고있는지 압니까? 혹시 나한테 그 무슨 굉장한 예비주머니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게 아닙니까? 조금도 보태지 않고 말하는데 우린 지금 당장 그들을 이사시킬수 있는 단 열세대분의 집도 쥐고있지 못합니다. 이 몇해동안 천리마거리와 락원거리에 숱한 아빠트들을 일떠세웠지만 밑빠진 항아리에 물붓는 격이지요. 요즘도 매달 시적으로 몇쌍의 처녀총각들이 결혼식을 하는지 압니까?》

림성욱은 워낙 사람이 대틀인지라 상대방의 우는 소리를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하지만 낯빛은 심중했다.

《평균 200세대의 결혼식차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뜁니다. 수도의 풍치를 돋구는데는 기막힌 광경이지만 그 모든 신혼자들의 절반쯤은 새 집을 요구합니다. 매일 100여세대 아빠트 한채씩은 건설해야 한다는겁니다. 이게 어방이나 있는 일입니까. 거기에다 독신자합숙에 나가보면 가정을 뭇고 집이 차례질 때를 기다리면서 홀아비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정도 풀어주지 못해서 쩔쩔 매는판에 한꺼번에 그 많은 세대의 주민들을 어디에 다 옮겨놓는단 말입니까?》

《으흠…》

림성욱은 육중한 몸을 뒤로 젖히였다. 안락걸상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소장이 안고있는 착잡한 마음을 말해주는듯 하였다.

《소장동무, 평양시주택사정과 철거문제를 고려하면서 설계안을 세우는게 좋겠습니다. 당분간 놔둘 집들은 놔두면서 개조할 안을 만드는게 옳을것 같단말입니다.》

안창화는 당장 그 많은 철거민들을 들여놓을 집들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힘주어 강조하고 물러났다.

림성욱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후에야 그는 걸상의 팔걸이를 눌러잡은채 거센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합시다.》

협의회가 중단되자 방안에 둘러앉았던 사람들은 서서히 일어나 복도로 밀려나갔다. 남정기가 맨 마감으로 따라서다가 얼핏 소장을 돌아다보았다. 림성욱은 여전히 걸상우에 무표정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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