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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년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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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0-05 20:01 조회5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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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영은 오후 첫 시간에 일찌감치 중앙도서관으로 찾아갔다. 인민대학습당 설계집단은 도서관건물의 3층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설계책임자라고 해서 남정기가 혼자 사용한다는 좁은 방은 긴 복도의 맨끝에 있었다. 남정기는 무슨 일에 그리도 몰두했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미영이 문을 조심스럽게 여닫고 들어서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방안에 들어선 미영이가 《남선생님!》하고 불러서야 그는 비로소 얼굴을 들고 미영이를 돌아보았다.

《아니, 네가 어떻게?》

그는 무척 놀라와 했다.

《그새 안녕하셨어요?》

《나야 잘 있다마다. 보다싶이 언제나 혈기왕성하지. 허허?》 남정기가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미영이의 마음도 한결 밝아졌다. 중키에 량어깨가 쩍 버그러진 남정기의 몸에서는 력기선수다운 건강미가 풍기였다.

그는 미영이아버지 심운호와 여라문살의 나이차이가 있었으나 남달리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었다. 심운호를 몹시 따른 남정기는 명절이나 휴일이 아닌 날에도 미영이네 집에 곧잘 찾아오군 하였으며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까지도 그가 찾아오면 무척 반갑게 맞이하군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남정기사이에는 어째서인지 격렬한 론쟁이 빈번히 벌어지군 했다. 일단 론쟁이 시작되면 버릇이 없다고 할만큼 제 주장만을 내대는 젊은 설계가에 대한 미영의 감정은 그리 좋은편이 아니였다.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늘쌍 조용하던 아버지의 서재는 곰이라도 잡으려는것처럼 짙은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들어차고 집안이 소란스러워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러던 남정기의 발길이 무엇때문인지 뚝 끊어져버렸을 때에는 뜻밖에도 마음이 허전해지는 자신의 심정을 스스로도 리해하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륜환선거리에 이국의 궁벽한 구역소재지에서나 볼수 있는 볼꼴 없는 살림집을 설계한탓으로, 보다는 반당종파분자들의 지시에 추종한 그 정치사상적과오를 씻기 위해 자진하다싶이 혁명화하려 가족과 함께 황주로 내려가게 되였을 때 여러명의 후비설계가들이 찾아와서 이사짐도 싸주고 위로주 겸 작별주를 나누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가장집물들을 회물역에 내다 부친 다음 식구들에게 작은 손짐만 몇개 들려가지고 기차에 올랐다. 배웅하러 나온 몇명 안되는 사람들가운데 처음에는 남정기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렬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을 때에야 미영이네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역구내에 우산도 없이 바삐 다가오는 그를 발견하였다. 심운호의 마음속에 감쳐있는 괴로움을 자기도 느끼며 보슬비를 맞으면서 그날 바쁜 일이 있음에도 역에 나온것이였다.

확실히 남정기는 속이 깊고 진실한 사람이였다.

식구들과 헤여져 미영이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대학공부를 하게 되였을 때 제일 쓸쓸해지는것은 명절날이였다. 고향인 평양에 제 식구들이 없고 제 집이 없다보니 다들 즐거워하는 명절이 닥쳐와도 가고싶은 집이 별로 없었다. 9. 9절, 당창건기념일과 같은 명절들을 식구없이 홀로 보낸 미영은 제집없이 평양에서 처음 맞이하게 된 설이 닥쳐왔을 때에도 우울한 기분에 잠겼다. 그런데 섣달 그믐날 밤 뜻밖에 대학기숙사로 남정기가 찾아왔다. 그는 무작정 미영의 손을 잡아끌면서 설을 자기 집에 가서 쇠여야 한다고했다. 알고보니 남정기는 몇달동안 외국출장을 나가 있은탓에 9. 9절에도 당창건기념일에도 미영을 데리러 오지 못했다고했다. 그때부터 미영은 그를 친오빠처럼 여기며 따랐다.

물론 미영은 그의 가정에 실없이 자주 다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도움을 받거나 조언을 받을 일이 있으면 의례히 그를 찾아가군 하였다.

《어서 여기 와 앉아라. 동생들은 잘 있니?》

남정기는 벽밑의 걸상을 끌어다 미영이앞에 놓으며 따뜻이 물었다.

《네, 건강해요.》

《전보다 퍽 수척해진것 같구나. 직장일도 할래 집과 동생들도 돌볼래 고생이 많을거다.》

《아니, 괜찮아요. 집일은 동생들이 돌봐주는걸요.》

남정기는 미영이네 생활형편을 이것저것 알아보고나서 출입문앞에 놓인 트렁크를 넌지시 바라보며 의미있게 물었다.

《이젠 저안에 들어있는 호텔설계나 내놓지.》

《아이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왜 모르겠니. 사리원에 내려간후 얼굴 한번 비치지 않던 미영이가 일부러 날 찾아왔으면 그밖에 다른 일이 있을라구.》

미영은 가슴이 뭉클했다. 사리원도시설계사업소에 내려가서 처음으로 설계과제를 받아안았을 때 그는 일을 제대로 해내겠는지 걱정스러워 남정기에게 편지를 날린적이 있었다.

남정기는 지체없이 자신심을 가지고 달라붙어야 한다고, 첫 발자욱을 잘 떼라고 간곡히 고무적인 말을 적어 보냈다. 미영이 찾아온 목적을 그가 대뜸 알아맞힌것을 보면 그자신도 미영의 처녀작에 몹시 마음 써온것이 틀림없었다.

미영의 첫 설계는 어쩌면 남정기의 고무를 받아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그가 트렁크를 열고 설계도면을 꺼내려는데 문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두명의 애젊은 설계가들이 들어왔다. 설계과정에 걸린 문제를 들고 의논하러 오는 사람, 사업상문제를 결론 받으려고 오는 사람… 그들이 채 물러가기도전에 또 다른 사람이 찾아들어왔다.

《남선생, 시당비서동지가 나와서 다들 회의실에 모이랍니다.》

《시당비서동지가?》

《지난밤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륜환선거리를 돌아보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을 전달하려는것 같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륜환선거리를 돌아보셨다오?… 알겠소.》

남정기가 갑자기 낯빛이 달라지는 미영을 훔쳐보면서 부산스럽게 량해를 구했다.

《이거 안되겠군. 미영의 력작을 보자구 했더니 여기선 시간을 내기 어렵겠어. 우리 집에 먼저 가있으라구. 우리 집에서 자야 해. 려관에 들 생각을 하지말구.》

남정기는 옷걸개에 걸려 있는 외출복에서 자기 집 열쇠까지 꺼내주었다.

《선생님두… 됐어요.》

미영은 한사코 열쇠를 받지 않았다.

《우리 집이 뭐 남의 집인가?》

《저녁에 가겠어요. 그사이에 다른 일도 좀 보구요.》

《그렇다면 할수 없군. 나도 될수록 일찌기 들어갈테니 너무 기다리지 않게 하라구.》

《네.》

중앙도서관을 나선 미영은 가까이에 있는 뒤골목으로 달려가 아빠트벽체에 등을 기대였다.

(그이께서 륜환선거리를 돌아보셨다니… 무슨 말씀을 하셨을가?)

그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그의 가슴은 불안으로 설레였다. 륜환선거리에 유럽식 초라한 살림집을 설계하고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서 한숨 짓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집안식구들과 말 한마디없이 지내면서도 아바지는 겉으로 자기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괴로운 심정으로 뭔가 결심하는것 같은 표정이였다. 미영은 아버지가 병상에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서 설계도면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그 몇번이나 남몰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조금만 더 살았어도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면 자기의 불명예스러운 루명을 벗을수도 있었던 아버지였으나 운명이란 피치 못하는것이였던지… 아버지는 여기 수도의 한복판에 우리 식이 아닌 볼꼴 사나운 거리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이런 불행한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죄를 씻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 아버지, 죄많은 아버지… 아, 륜환선거리에 나가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셨을것인가? 미영은 가슴속에 차오르는 설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자기의 호텔설계며 남정기와 만나기로 한 약속까지 다 집어던지고 당장 황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미영은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도 어차피 남정기를 만나야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백화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후 그는 남정기네 아이들에게 들고 갈 당과와 놀이감 몇가지를 사느라 백화점에 들렸다가 나왔다. 그러나 아직 퇴근시간까지는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미영은 만나보고 싶은 대학시절의 동무들이 많았으나 오늘은 그들에게로 찾아갈 정신적여유가 없었다. 나머지시간을 어떻게 보낼가 하고 잠시 망설이다 대동강변으로 힘없이 발길을 옮기였다. 거리는 쉬임없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그 많은 사람들가운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걸어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결같이 밝고 활기에 찬 모습으로 걷고있다. 오직 자기만이 즐거운 생활의 변두리에 밀려나 떠돌고 있는듯 한 생각이 들었다. 미영이는 그 어디에도 하소할 길 없는 울적한 심정에 잠겨 장시간 강변의 걸상에 홀로 쓸쓸하게 앉았다가 해질녘 트렁크를 들고 남정기네 집으로 향하였다. 그의 집은 아직 륜환선거리에 있었다. 어느새 집에 들어와 저녁차비를 하고있던 주부가 행주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미영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만나본지 퍼그나 오랬지만 그전과 조금도 다름 없을뿐더러 젊어보이기까지 하였다. 력기선수같은 남편에 비하면 어방없이 몸집이 작고 웃을 때면 량볼에 볼우물이 옴폭 패이군 하는 이 작달막하고 해말쑥한 녀인이 구역병원 외과의사라는것이 도무지 믿어 지지 않았다.

《여보, 미영이가 왔어요.》

미영의 두손을 감싸쥔 녀인은 방문을 열며 나직한 맑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알리였다. 웃방의 책상앞에 마주앉아 무슨 책인지 보고있던 남정기는 나들문쪽을 기웃이 내다보며 소리쳤다.

《미영이, 어서 올라오라구.》

뜬김이 서린 부엌칸에서 구수한 고기국냄새가 풍기였다. 벙싯한 문틈으로 늄소랭이에 담긴 찰떡이며 쟁반에 빚어놓은 송편이며 또 무엇인가 빚으려고 준비해놓은 밀가루반죽 같은것이 눈에 띄였다. 무슨 가정대사라도 있는지 주부는 미영을 방안으로 올려보내고 나서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래 볼 일을 좀 봤나?》

남정기는 장판바닥에 내려앉았다.

《네.》

《그럼 먼저 신진설계가 심미영의 처녀작부터 봐야지.》

그는 낮에 설계실에서 들볶이던 사람같지 않게 스프링바람으로 여유작작하게 부채질을 하였다. 미영은 말없이 트텅크를 열고 설계도면을 꺼내놓았다. 구태여 청을 드리지 않아도 어떤 립장에서 어떤 눈으로 봐주기를 바라는지 남정기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남정기 역시 아무 말없이 설계도면들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림으로 된 호텔전경도를 보고 이어 총계획도의 정면도, 측면도, 후면도, 층별부분도들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미영은 가슴을 조이며 조용히 앉아있었다. 도면을 마지막장까지 다 보고 난 남정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 되여서…》

입안이 말라 드는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면서 앉아있던 미영이가 실망기어린 어조로 말을 해도 남정기는 아무 대꾸없이 또다시 도면을 첫장부터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의 입이 열려지기만 하면 사형선고와 같은 무서운 말이 튀여 나올것만 같았다. 마침내 마지막장까지 재삼 깐깐히 훑어보고 난 남정기가 깊은 생각에 잠긴채 얼굴을 들었다.

《어쩐지 나는 지금 너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는구나.》

무슨 말이 나올지 초조하게 지키고있던 미영은 그의 왕청같은 말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너의 어머니를 처음 만난것이 모란봉이였는데 그때 너의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와 함께 을밀대에서 최승대쪽으로 내려오구 있었구 우리는 최승대에서 을밀대쪽으로 올라가는 걸음이였다. 그런 자리에서 본 인상때문인지 너의 어머니는 나에게 언제나 을밀대처럼 위엄있고 키가 늘씬하고 표정이 풍부한 미인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내 그래서 너의 아버지는 녀성도 건축학적으로 고찰하고 선택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드랬다.

너의 아버지는 설계를 할 때 언제나 선을 크고 시원하게 뽑군 했다. 그건 혹시 너의 어머니의 용모와 자태가 너의 아버지에게 그런 개성을 형성시켜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참말로 신통한 결합이였는데 난 방금 너의 설계도면에서 또 하나의 다른 예술적일치를 발견한 심정이다. 내 단언하는데 너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아마 그것은 너의 량친에게서 물려받은것이라고 보는게 옳을거다. 너는 당당히 축하를 받을만 하다. 설계는 그대로 제출해도 손색이 없겠다.》

미영은 한순간 현훈증이 일었다. 방안의 모든것이 흔들리며 빙글빙글 도는것만 같았다.

그는 한참만에야 마음을 수습하고 남정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생님, 그게 진심에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남정기는 눈을 끔벅이였다.

《너는 내가 너의 아버지의 창조물에 대해서도 도끼입질을 하던 사람이란걸 모르지 않겠지?》

《그래도 전 믿기가 어려워서…》

《그건 그럴수도 있지.》

남정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첫 설계에다 단발명중이니까.… 지금까지 미영인 대극장설계가의 딸로 통했지. 그런데 이제는 네자신이 우리 건축계라고 하는 은하계에서 사라진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 건축계에 하나의 새로운 별로 떠오른 새 세대 설계가이다. 나는 그것이 기쁘다. 내 보기엔 너의 처녀작은 완전히 성공이다.》

남정기는 진정에 넘쳐 말했다. 미영은 얼굴을 붉히며 몸둘바를 몰라했다. 자기의 첫 설계가 이렇게 그를 흥분시킬줄은 몰랐었다. 그는 한두가지 크지 않은 의견을 미영에게 이야기했을뿐이였다. 그가 자신의 설계와 남의 설계에 좀체로 만족해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고있는 미영의 마음은 흥분으로 설레였다. 오늘같이 기쁜 날에 마음껏 웃지 못하는 자기의 처지때문에 눈앞이 흐려지기도 했다.

《정말 뜻밖이예요. 저 그런데… 한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요. 지난 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여기 륜환선거리에 나오시여 무슨 말씀이 계셨어요? 제가 알아도 괜찮은 말씀이면 이야기해주어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선 이 거리에 나오니 자꾸 마음이 무거워지신다고 심려의 말씀을 하셨어.》

미영은 저도 모르게 두손을 가슴우에 모두어잡았다.

《그 다음은요?》

《설계가에 대해서도 말씀이 계셨는데 사람이 신념이 없으면 안된다고 하셨어.》

남정기는 고개를 젖히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미영은 마음을 도저히 다잡을수 없어 얼굴을 숙이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여도 아버지의 죄과는 그대로 남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까지 심려를 드렸다고 생각하니 미영은 방바닥에 쓰러져 울고라도 싶었다.

누가 찾아왔는지 부엌에서 주부의 떠들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넌 왜 이제야 오니? 눈이 새까매서 기다리던참이야.》

《아저씨가 좋아 하는 문어가 생겼길래 아예 집에서 회쳐 오느라고 늦어졌어요.》

《넌 또 아저씨한테서 점수를 따게 됐구나. 넌 만날 그런 명물만 들고 오니까 우리 처제가 제일이라는 소릴 듣지. 너 때문에 난 또 점수를 떼우게 됐다.》

남정기의 안해는 깔깔거리며 웃고나서 《에그, 오늘은 우리 명철이가 곱게 차렸구나! 어서 큰 아버지한테 들어가거라.》하고 방문을 열어주었다.

(명철이라니?)

미영은 얼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낮에 대극장앞의 지하건늠길에서 만났던 어린아이 유민호의 아들애가 장난감 따발총을 메고 들어서는것이 아닌가. 미영은 너무도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했다.

《아지미!》

명철이는 대뜸 미영이를 알아보고 그에게 달려와 덥석 안겨들며 목을 그러안았다. 미영이는 무의식중에 명철의 엉치를 다독이면서 어떻게 처신을 하면 좋을지 몰라했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며 울고싶을 때 도망쳐 나온 그 집의 아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미영의 옹색한 립장을 알리 없는 어린것은 부엌쪽으로 씽 달려가며 소리를 쳤다.

《엄마! 그 아지미 여기 있어!》

《아지미라니?》

《우리 집에 왔던 아지미.》

《뭐라구?!…》

유민호의 안해가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피할래야 피할길 없는 자리였다. 미영은 웃음을 지으려고 애썼으나 얼굴에 웃음이 나타났는지 알수 없었다.

《명철 어머니, 아깐 미안하게 됐어요.》

《글쎄 어쩌면 그럴수 있어요.…》

혜영은 곱게 눈을 할기며 그를 나무랐다.

《뭘 좀 차려 가지고 들어가니 없지 않겠어요.》

《괜히 페만 끼치는것 같아서…》

미영은 이런 말로 난처한 대목을 적당히 굼땠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남의 성의도 좀 생각해줘야지.… 아무튼 아저씨네 집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니 됐어요. 여기서라도 신세갚음을 하게 됐으니까요.》

혜영은 무슨 일인지 놀라 어안이 벙벙해 앉아있는 남정기를 돌아다보았다.

《아저씨 아무것도 모르나요?》

《나는 통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겠다. 너희들은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니?》

《그런건 아닌데 저애때문에 글쎄…》

혜영은 낮에 있었던 일을 남정기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미영은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 같은 심정이였다. 유민호의 안해가 남정기의 처제라면 이제 곧 유민호가 이집에 올수도 있었다. 유민호의 안해와 처형 그리고 동서되는 남정기까지 다 둘러앉은 자리에서 불쑥 유민호와 맞다든다면 쌍방이 다 난처한 처지에 놓일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뛰여들고 싶었다. 미영은 남정기한테 찾아온 목적도 달성한만큼 이제는 여기서 한초라도 빨리 떠나버리는것이 상책일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미영이가 몹시 시장하겠는데 그냥 말추념만 하고있을 작정이예요?》

안해가 두리반을 들여보내며 남편과 제 동생을 나무랐다.

《이제야 경우에 맞는 말을 하는군.》

상우에는 팥에 묻힌 찰떡이며 곱게 빚은 송편, 도라지, 삶은 소고기전, 문어회 등 갖가지 음식이 올랐다.

주부는 미영의 손에 수저를 쥐여주며 말을 건넸다.

《미영이, 별로 차린건 없지만 많이 들어요.》

미영은 미안쩍어 얼른 수저를 놀리지 못했다.

《명철이 아버지도 왔으면 좋았을걸. 그 사람이 역긴 한데 먹을 복은 없거든.》

남정기가 흥심없이 한마디했다.

《엄선생의 환갑이라니 할수 없죠. 뭐 실장이라는 사람이 로설계가의 환갑을 축하하는 일에 빠지면 안된다질 안겠어요? 늦더라도 오긴 꼭 올거예요.》

혜영이 대꾸하는 말이였다. 미영은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좀 진정되는것 같았다. 유민호와의 반갑지 않은 상봉을 피할수 있을것 같았다.

《미영이, 뭘하구 있어? 어서 들라구. 좋은 설계를 했는데…》

《아니… 미영동무도 건축가인가요?》

남정기가 심드렁히 처제를 돌아보았다.

《넌 그걸 몰랐을테지. 미영인 우리 건축계에 새로 등장한 설계가야. 말하자면 나나 너의 남편 같은 족속이지. 건축이라는 응고된 음악을 창조하는 예술가팀의 한 성원이야, 알겠니? 》

《아이참.》

미영은 다소곳이 얼굴을 숙이며 숟갈을 들었다.

《저야 뭘… 선생님의 인민대학습당설계가 잘 되기만 바래요. 보다 세계적인 명작으로 성공시키세요.》

《고무해주어 고맙다만 너무나 아름찬 대상이 돼서 힘에 부쳐. 내 일생에 두번다시 인민대학습당과 같은 건물은 차례지지 않을거야. 이거야말로 최상의 수준을 요구하는 세계적인 건물이지. 난 그 건물에 운명을 걸고 달라붙었지만 아직까지 자신이 생기지 않아. 어제까지는 어떤 대상앞에서도 력량이 딸린다는것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인민대학습당과 맞다들고보니 얼마나 내라는 존재가 미력한가를 자인하게 돼. 》

역시 남정기는 량심적인 설계가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어느덧 여덟시가 넘었다. 미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집 주부와 혜영이, 아이들까지도 그를 붙잡고 자고가라고 만류하였다.

《저도 여기서 하루밤 자면서 놀고싶지만 가야겠어요.》

《아니, 이제 어디루 간다구 그래요. 려관으로 가겠다는거예요?》

《볼일을 다 봤으니 황주로 돌아가야 해요.》

《그럼 평양에 왔다가 하루밤도 묵지 않구?》

《제가 없으면 동생들이 몹시 외로워해요. 한시간이면 가닿습니다.》

《이제 나가면 탈차가 있을가?》

《그건 걱정마세요. 차는 많습니다.》

미영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며 트렁크안의 술병을 꺼내 남정기옆에 놓았다. 사리원의 명주로 일러주는 경암술이였다.

《선생님, 변변찮은건데 뒀다가 피곤하실 때에 드세요》

미영의 눈에 뭐라고 딱히 말할수 없는 물기가 어렸다.

《명철어머니, 전 가요.》

남정기는 미영이가 눈물을 쏟을듯 한 얼굴로 얼른 방에서 나가자 묵묵히 옷걸개의 상의를 벗겨 입었다. 주부는 급히 옷장문을 열고 무엇인가를 꺼냈다.

《미영이, 덤비지 말구 좀 서라구. 바람도 쏘일겸 같이 나가자구.》

남정기는 목갈린 소리로 말하며 미영이를 따라나섰다. 그를 바래우려 복도로 나온 유민호의 안해는 퍼그나 섭섭해하는 기색이였다.

《미영동무, 혹시 평양에 오면 우리 집에도 꼭 들려요, 기다리겠어요.》

미영의 신세를 갚지 못한 혜영은 진정으로 서운해하며 간청하였다.

《알겠어요.》

미영은 마음에 없는 대답을 했다. 신발을 끌며 뒤미처 나온 남정기의 안해가 손에 들고 나온것을 미영에게 안겨주었다.

《아무것도 보낼게 없는데 이걸루 미옥의 옷이나 한벌 해입혀요.》

미영은 황황히 손을 내저었다.

《영철어머니, 관두세요. 이러지 않아도 전 남선생님 도움을 많이 받는데요.》

《그럼 못써. 별로 큰 성의도 아닌걸 가지구.》

남정기의 안해는 막무가내로 미영의 손에 들려있는 트렁크를 빼앗아 그안에 옷감을 밀어넣었다.

남정기부부는 대통로까지 따라나와 그를 바래워주었다.

《남선생님, 림성욱소장선생님한테는 뵙지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소장동지한테 들리지 않았어?》

《뭐 특별히 만날 일도 없고 해서.》

미영은 남정기에게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정기는 한동안 제나름의 생각에 잠겨 걷다가 한숨섞인 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알겠어.… 내가 소장동지한테 말하지.》

미영은 남정기부부와 헤여져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로등밑에 서있던 그들이 이미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걸음발을 늦추었다. 그는 정거장에서 차표를 산 다음에도 사람들을 피해 어스레한 역전공원에 나와서 홀로 앉아있었다. 어느쪽에서 온 렬차인지 방금 도착한 렬차에서 내린 려객들이 역사 밖으로 우르르 밀려나왔다. 사리원까지 가는 렬차의 개표시간이 림박하여 역사안으로 들어가던 미영은 밀려나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틔워주려고 문옆에 잠간 비켜섰다. 손님들이 얼마간 뜸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수선한 생각에 사로잡혀 지하대합실로 내려가는 그를 누군가 《미영이, 미영이!》하고 소리를 치며 불렀다. 미영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대학시절의 상급생인 강문혁이가 불룩한 가방을 들고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에참, 그렇게 부르는데두 듣지를 못하오?》

《아이, 문혁동무였군요.》

오래간만에 만난 학우사이의 상면이였다.

《미영동무가 사리원에 배치되였다는 말을 들었소.》

문혁은 남달리 공부에만 열중하던 대학때처럼 총이 센 머리칼이 뻣뻣하게 일어서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텁텁한 인상을 주었다. 어쩌다 일껏 롱담을 한다는것이 미지근한 소리를 한마디하고 어질게 얼굴을 붉히는 문혁이였다.

《출장 왔댔소?》

《네. 아침차로 올라 왔다가 남정기선생님을 만나고 내려가는 길이예요. 첫 설계를 했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찾아왔댔어요, 문혁동문 어디엘?》

《평성과학원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부랴부랴 돌아오는 길이요. 오늘이 아버지의 생일이더구만.》

《문혁동문 정말 효자로군요.》

《말두 마오. 우리 아버진 나에 대한 불만이 룡악산 같소. 이렇게 늦게야 도착하여 술부어드릴 일이 아뜩하오. 재작년의 생일도 편의봉사에서 차려주었다오.》

《편의봉사라니요?》

《난 구조설계가이지만 아버진 구두수리공이요.》

문혁은 히죽이 미소를 지으며 어줍게 말했다.

《미영동문 얼굴빛이 좋지 않구만. 혹시 평가를 잘못 받은게 아니요?》

미영은 한동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수없어 망설이며 서있었다. 문혁의 성실한 모습에 차츰 가슴이 뭉클해지는것을 느꼈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가 자기 생활의 령역에 들어서며 위안해주는 일이 눈물겹게 고마왔다. 아버지의 죄많은 인생에 대해서는 문혁이도 모르지 않는데 구태여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게 아니예요. 어제 밤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륜환선거리를 돌아보시고 심려의 말씀을 하셨대요.》

미영은 가까스로 이런 말을 하고 눈길을 떨구었다. 잠시 말없이 있던 문혁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만.》

문혁은 미영의 손에서 트렁크를 빼앗아 들었다.

《안됐소. 동무의 마음을 괴롭혀서… 하지만 미영동무, 이미 지나간 일인데 아버지때문에 너무 상심하지 마오.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먹고 당앞에 훌륭한 설계를 내놔야 하오. 난 그것만이 동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오.》

말을 마치고 자기와 함께 발길을 옮기는 문혁을 미영은 이윽히 바라보았다. 생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고 남달리 의지가 강한 사나이로 돋보이였다. 문혁의 인간됨이 어째선지 이 순간 미영의 마음속에 새로이 비쳐들었지만 내색을 않고 흔연히 말을 건넸다.

《이젠 트렁크를 주세요.》

《아직 얼마간 시간이 있소. 동무의 어머닌 무고하시오?》

《어머니도 지난해에…》

미영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없이 미영을 바라보는 문혁의 눈에 깊은 동정의 빛이 더욱 짙어갔다. 확성기에서 잠시후 떠나게 될 렬차손님들에게 차표를 찍어드린다고 알려주었다.

《어서 집에 가보세요. 아버님이 기다리실텐데.》

《나야 평양사람인데 급할게 있소. 개찰구로 갑시다.》

문혁은 지하도의 개찰구까지 미영의 트렁크를 들어다주었다. 그는 미영이가 지하도의 층계우로 사라질 때까지 개찰구옆에 붙어서서 그윽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았다. 미영은 어쩐지 그의 눈에 엷은 물기가 어려있는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렬차는 어둠을 뚫고 기적소리를 높이 울리며 달렸다. 2년전 평양을 떠날 때의 그밤처럼.

미영은 황주역에 도착하여 렬차에서 내리자 나들문을 향해 가면서 습관적으로 자기 집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역에서 초간히 떨어진 야산밑에 한채의 자그마한 집이 외따로 서있었다. 량부모를 잃고 미영이네 세남매가 의좋게 살고있는 집이였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집주변을 둘러친 수수울바자와 밤바람에 일렁이는 강냉이숲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쳐주고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변함없는 자기 집의 아늑한 모습이 눈에 비껴든 순간 미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걸음을 다우쳤다.

《누나!》

개찰구밖에서 갑자기 귀에 밴 어린 동생 철남이의 웨침소리가 들렸다. 지난해부터 인민학교를 다니며 미영이가 통근차를 타고 사리원도시설계사업소에서 돌아올 때면 거의 매일저녁 역시 마중나오는 막내였다. 철남은 미영이 개찰구밖으로 빠져나오자 제꺽 트렁크를 낚아챘다.

《이 밤중에 네가 어떻게 역에 나왔니?》

《누난 하루밤 잔댔지만 난 올줄 알았어. 아이구, 무겁네. 뭘 이렇게 많이 사왔나?》

《백화점에 들려 미옥이의 신발이랑 철남의 스케트랑 샀지. 인줘. 넌 못들어.》

《일없대두.》

고집스레 트렁크를 들고 뒤뚝거리며 걸음을 옮겨놓는 철남의 옆에서는 북슬개가 두발을 들고 미영의 옷자락에 껑충껑충 뛰여올랐다. 그 북슬개도 미영에게는 제법 의지가 되고 위안이 되는 식구나 다름없다. 어머니가 살아계실때 애지중지 기르던 강아지였는데 이제는 중개로 자라고 무척 령리해서 웬간한 말도 알아듣는듯 싶다.

《미옥인 뭘하니?》

《누난 밥을 데워놓구 온댔어. 저봐, 오잖니? 작은 누나야.》

달빛이 깔린 농장벌로 미옥이가 마구 달려오더니 미영의 앞에 와서 반갑게 팔을 잡으며 휘감겨 돌았다.

《언니, 글쎄 금방 밥가마에 밥을 들여놓는데 차소리가 나잖겠어. 아이 숨차, 우린 언니가 안오면 어쩌나 했어.》

《애두. 철남이가 힘들겠는데 어서 트텅크나 들어줘라.》

미옥이가 얼른 철남이와 트렁크를 맞들자 세남매는 뜨락또르의 고무바퀴에 볼품없이 패운 울퉁불퉁한 길로 나란히 걸어갔다. 미영은 동생들이 대견하여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부모없는 아이들이 일찌기 철든다더니 어머니의 생전에야 열살도 채 차지못한 철남이가 밤중에 역으로 마중나오고 미옥이가 부엌일에 손을 붙이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할수 있었던가! 이 밤도 언니, 누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주려는 동생들의 갸륵한 소행에 접하자 미영은 마음속이 후더워졌다. 매번 눈물없이는 목격할수 없는 그러한 가슴 뜨거운 일들로 하여 미영은 부모를 잃은 설음과 그에 뒤따른 갖은 난관속에서도 자기가 맡은 처녀작설계를 남들에게 뒤지지 않고 짧은 기간에 완성할수 있었다. 바로 그때문에 미영은 설계를 마감지은 오늘 동생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소중한 모든것이 아버지가 씻지 못하고 가버린 그 과오로 하여 죄다 하찮은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밤도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던 미영은 동생들 몰래 눈굽을 훔쳤다. 자기 집뒤의 밋밋한 야산, 거기 달빛속에 고요히 누워있는 부모들의 묘소가 눈에 보이는듯 했다. 첫 설계의 완성을 두고 뭐라고 부모들께 말하면 좋을지 알수없다. 남정기앞에서는 가슴 벅찬 환희에 휩싸였지만 지금은 웬일인지 서러움이 북받쳐올라 길바닥에 주저앉아 실컷 울고라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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