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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이집트 무바락 대통령 사임과 미국의 또다른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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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2-11 08:58 조회2,7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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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유태영 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이미 2009년 1월5일 제3세계 연재기고를 통해
오늘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한바 있다. 유태영 박사는 당시 이집트에 대해 "이집트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이 나라도 3000년의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 로마, 그리스, 아랍, 터키,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
열강들의 지배를 오래 동안 받았다. 그 후 부상한 새로운 제국주의 나라 미국에 의해 또 다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집트가 겪은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 민족의 비운과 유사하였던 과거사들도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 연구
또한 우리 민족민주운동사에서 참고할 영역들로 생각된다."고 설명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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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이집트 무바락 대통령 사임과 미국의 또다른 개입 우려

유태영 박사:"향후 미국의 또다른 개입에 주목할 필요있다"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유태영 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이미 2009년 1월5일 제3세계 연재기고를 통해 오늘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한바 있다. 유태영 박사는 당시 이집트에 대해 "이집트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이 나라도 3000년의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 로마, 그리스, 아랍, 터키,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 열강들의 지배를 오래 동안 받았다. 그 후 부상한 새로운 제국주의 나라 미국에 의해 또 다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집트가 겪은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 민족의 비운과 유사하였던 과거사들도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 연구 또한 우리 민족민주운동사에서 참고할 영역들로 생각된다."고 설명한바 있다.

<##IMAGE##> 유태영 박사는 11일 이집트 부통령 오마 설리맨의 발표문을 통해 호스니 무바락 대통령이 사임했다는 것을 공식발표하는 한편 이집트 정치권력을 이집트 군사최고위원회에서 운영하기로 했다고 천명했다는 소식을 언급하고 향후 이집트 군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Vice President Omar Suleiman announced the resignation on state television and said he was transferring authority to the Supreme Council of the Armed Forces to "run the affairs of the country.")

유 박사는 이어 이집트 사태가 마치도 박정희 군부독재자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 한국민중들이 민주화의 봄이 온 것을 환호하고 기뻐했던 그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것 같다고 비유하면서도 향후 이집트의 사태가 "한국의 군사쿠테타"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비극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최근 사태에서 보듯이 이집트 내에는 무바락 지지세력과 함께 반대세력의 갈등도 만만치 않은 변수가 될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무바락을 지원해 왔지만 지금로서는 친무바락과 반무바락 세력 모두에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 보기도 했다.

그는 또 "그러나 1980년 광주항쟁으로 반미바람이 기세를 부렸던 교훈에 대해 외세들도 모르는게 아니기 때문에 미국도 이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접근을 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집트 군부는 한국군부처럼 그렇게 엉망이 아닌 점으로 볼 때 한국꼴이 될 가능성은 적다"고 조심스럽게 예상하는 한편 "지금의 이집트 민중들의 열기가 미국의 꼼수에 유린당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항쟁이 제2의 광주민중항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언급했다.

유태영 박사는 마지막으로 "제국주의자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고 간섭하면서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단순하게 전망하기도 어렵다."고 덧붙이면서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자세는 한국의 자주화 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교훈이 된다는 것이 유태영 박사의 견해이다.

다음은 이집트의 최근세를 이해하기 위해 유태영 박사가 2009년 1월5일에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한 글 (원문보기--여기를 짤각하세요)중에 하반부만을 다시 올려 이집트의 현대사를 되새겨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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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가 나세르 대통령 이후 발자취



3.이집트의 혁명가로 등장한 나세르 대통령


<##IMAGE##> 부당한 조약을 맺고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그 조약의 폐지를 요구하는 국민운동과 대지주 외국자본에 항거하여 싸우는 농민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집트에서 점점 격화되고 있었다.

1956년 1월에 나세르는 일당정치체제 하에서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삼는 사회주의 이랍 국가를 표방한 이집트 헌법을 선포 했다. 그리고 6월에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9%의 득표를 얻어 헌법이 승인하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1958년에 아랍세계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시리아와 이집트 두 나라의 합병에 성공하여 <아랍연합공화국> 을 창건하여 새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1961년에 시리아 내부에서 발생한 쿠테타로 <아랍연합공화국> 에 대한 나세르 대통령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 혁명의 최고 기수가 되여 옛 헌법의 폐지와 농지개혁 등을 통하여 친영국적 지배세력을 배제하고 이집트의 민족적자립과 민주주의 국가 창건을 위하여 사회개혁사업을 전개하여 완수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영국의 지배세력의 완전한 철수목표를 달성했으며 또 유럽과 미국의 군사적 압력을 대항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과 긴밀한 연대를 맺고 <비동맹국창설> 을 추진 했다.

1956년 7월에 나세르 대통령은 외국자본의 최대의 소유인 수에즈운하의 운영권을 취하하고 이집트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의 완전한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아랍 세계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향하여 명확히 선포 했다.

이와 같은 나세르 대통령의 혁명운동으로 인하여 아랍세계에서 민족운동이 점점 격화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세 나라는 1956년 10월에 이집트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감행 했다. 이것이 <제2차 중동전쟁> 이었다.

하지만 이집트 국민의 굳게 결속된 저항과 온 아랍과 아프리카-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이집트에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이로 인하여 3국의 침공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의 침략의도 부상>



그 후 곧장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1957년 미국은 아랍세계에 대한 침략의 속심을 숨김 없이 드러내 보였다.미국은 이른바 <아이젠하워 독트린> 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 미국의 아랍세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노골적으로 제시 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아랍 나라들의 반응은 대단 했다. 1958년에 이집트와 시리아 합병은 실태했지만 유사시 동조와 결합의 의지는 튼튼 했다. 이라크에서 혁명이 발생 했다.

요르단-레바논 민중들의 반영반미봉기가 발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멘에서 혁명운동이 잇따라 일어 났으며 온 아랍 나라들의 자주화 민족동맹 운동이 서로 결부되여 광범이하게 확산되기 시작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계 구성원들의 일체성을 중요시 하여 <아랍민족주의> 를 꿈꾸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의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온 아랍민족을 향해 해방운동의 중요성을 상기시킴으로서 앞으로의 혁명을 구상하고 있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 남부시골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아나 8살 때 어머니가 운명했다. 어린 나세르는 카이로 삼촌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음으로 어머니가 죽은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자랐다. 어린 나세르는 영국 정부 감옥에서 막 풀려난 삼촌 집에서 유대인 9가구가 사는 건물에서 삼촌과 함께 방을 얻고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중학시절부터 민족운동에 참가 하면서 언제나 <반영국 가두시위> 에 동참했다. 그러던 중 어느 시위에서 일격을 맞아 이마에 흉터가 생겼다. 그 때 생긴 그 흉터는 일생동안 나세르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나세르는 사관학교 졸업 후에 수단에서 근무했으며 사관학교 교관이 되기도 했다.1948년의 <제1차중동전쟁>을 계기로하여 나세르 청년장교는 사명감을 깨닫고 <장교단비밀조직> 을 결성 하는데 가담 했다. 1952년에 쿠테타에 성공하여 이집트의 낡은 왕조의 봉건주의 친영국적 잔재를 제거 했으며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세르 대통령의 업적은 실로 대단 했다. 소련의 원조로 건설한 아스완 댐이 1968년에 가동되여 20세기의 현대적 생활방식을 도입했고 산업화도 촉진했다. 토지개혁, 부패척결, 여성들에게 권리부여 정책 주장, 외국 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정치 경제적 이권을 모두 되돌려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을 국외로 추방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첫째, 이집트혁명을 주도하여 독립을 쟁취 했다. 둘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설립했다. 셋째, 세계적인 비동맹국 기구를 설립 했다. 네째, 반식민동맹과 범아랍주의를 평생동안 제창했다. 다섯째, 비록 시리아의 쿠테타로 실패 하기는 했지만 <이집트-시리아 공화국>을 창건하여 놀라운 역사를 남겼다.

나세르 대통령을 괴롭히는 반대세력도 역시 대단 했다. 기독교 콥트교도들, 유대인, 기존 기득권 세력, 군부의 파벌, 땅을 빼앗긴 지주들 그리고 끊임없는 영국의 분렬공작과 미국의 정치적 압력등이 평생 나세르 대통령을 괴롭히고 협박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세르 대통령은 18년동안 이집트의 자주화를 생명으로 하는 혁명적 지도력을 발휘 했다. 이집트에서 뿐만 아니라 아랍세계 전역에서 나세르 대통령은 카리스마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나세르 대통령의 마지막 활동>



1967년 10월29일에 돌발한 <제3차 중동 6일전쟁> 은 전아랍세계에 분노를 일으켰으며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나세르 대통령이 29일 밤 한 자녀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있을 때 나세르 대통령은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틀 뒤 프랑스와 영국군의 비행기가 이집트 비행장을 일제히 공격 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군은 선제 기습공격을 강화하여 시나이 반도의 샤름앗사이호까지 점령하여 이집트 공군은 사실상 전멸을 당하는 위급한 처지에 놓여 졌다.

정세는 급격히 악화되여 이집트 육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퇴각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비밀로 미리 준비한 기습작전에 의하여 개전 6일만에 이집트군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허무히게 패전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패전의 운명에 처한 나세르 대통령은 책임을 통감하여 국회에 사표를 제출 했다.하지만 나사르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중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국회는 투표에서 대통령의 사표에 반대하여 대통령직을 계속하게 했다.

한편 소련은 파괴된 이집트의 모든 전쟁장비들을 즉각 교체하기 시작했고 이집트군의 포대를 엄호하여 수에즈운하를 따라 지대공 미사일을 설치하도록 지원 했다.1970년에 미국은 자신의 본질을 또 다시 나타내는 정치적 쑈를 연출 하면서 이집트에게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상> 을 하도록 제안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 문제 뿐 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도 동시에 군사적 으로가 아니라 정치적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팔레스타인 게릴라간의 총돌사건을 우선 수습하려고 심혈을 기우려 동분서주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갑자기 심장 마비를 일으켜서 1970년 9월에 사망 했다.

니세르 대통령은 아랍인들의 영웅이었다. 그는 이집트와 아랍 <자주권> 의 상징적 의미를 한몸에 지니고 아랍인들의 가슴속에 <아랍의 꿈> 을 심어 놓고 떠나 갔다. 나세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민중들 속에서 그의 죽움의 뒤를 이어 자살자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과연 아랍인들의 영웅적 지도자이었으며 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아랍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세르는 이집트 민중이 수 천년 동안 외세에 짓밟혔던 민족의 비운을 끝장내고 민족의 존엄성을 되찾아 준 이집트 역사에 처음 나타난 지도자였다.


4. 친미 굴종의 변절자 <사다트>



나세르 대통령이 사망한 후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1950년대에 청년장교들이 혁명운동을 일으킬 때 나세르와 함께 가담하여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였다. 하지만 혈맹의 동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된 사다트는 동지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민족과 민중을 배반하는 친미 추종자로 변절했다.

사다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미국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변질되다가 끝내는 매국적 어용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1970년 10월에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전임 동지 나세르 대통령이 창건한 <아랍사회주의연합>을 전격 불법화 하고, 소련군사고문단을 추방하여 사다트는
민족보다 자기자신의 지도체제를 강화하고 우파지도자로 변신하여 권력자로서 행세 했다.

친미추종자 사다트는 1973년에 사실상 미국의 묵인하에 이른바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에게 배앗긴 시나이반도의 아주 적은 일부분을 되 찾는 연극을 연출하여 잠시 영웅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다트 대통령은 1977년에 11월에 아랍세계의 원수의 나라 이스라엘을 친선 방문하여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책을 위한 비밀 토의를 하고 있었다.

1978년 9월에 사다트 대통령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통령의 휴양지인 캠프데이비드에 가서 이스라엘 의 총리 베긴과 만나 굴욕적인 평화협정인 <캠프데이비트 조약> 을 맺었다.

사다트 대통령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대하여 전체 아랍세계는 물론 소련등 동구권 나라들의 반대와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트는 자기의 친미 행각을 계속 했다. 그 결과 사다트는 1978년에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과 함께 <노벨 평화상> 을 받았다. 사다트는 1979년 3월 26일에 아랍역사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 을 맺었다.

미국을 추종하는 서방세계에서는 사다트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 높이 떠 올랐지만 이집트와 아랍세계에서는 굴욕적 이며 매국적인 평화협정을 반대하면서 사다트 대통령을 규탄하는 분노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대조적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국내의 경제위기와 민심의 악화등으로 인하여 사다트 대통령의 인기는 급격히 땅에 떨어져 이집트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드디어 사다트 대통령의 최후의 운명의 날은 도래 했다. 1981년 10월 6일에 <이집트-이스라엘 전쟁> 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가하여 사다트 대통령은 의장대의 사열을 하던중 회교극단주의자에 의해 피살 당해 현장에서 쓸어졌다.

사다트 대통령을 향하여 이슬람이 총탄을 던진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1978년에 켐프데이비드에서 맺은 협정 때문 이었다.<이집트가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대신에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의 땅으로 인정 한다>

사다트는 팟죽 한 그릇에 <팔레스타인 민족> 을 미국과 이스라엘 에게 팔아 넘기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아랍 국가들의 공분에 의하여 죄값을 치루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5.우유부단한 <무바라크>대통령의 30년 집권



사다트 정권에서 부통령 이었던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암살 당한 후 즉시 무임승차로 대통령이 되었다. 무바라크는 5선 대통령으로 2011년까지 30년 동안 집권하게 될 것이다. 그는 친미독재 정권을 유지해 온 인물로 임기가 끝나면 그의 아들 <가말 부바라크(Gamal Mubarak)> 에게 정권을 인계할 것이라는 여론이 정론처럼 전해 지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장기집권의 비결이 무엇인가?

중동 뉴스를 종합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 공격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뉴스. 둘째, 이집트는 정치적 안전을 위하여 이스라엘과 좋은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뉴스. 셋째, 부쉬와 무바라크의 관계는 중동평화 정책에 있어서 항상 서로 믿을만한 협력자의 관계라는 뉴스. 네째, 미국은 이집트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인권탄압 문제에 대하여 언제나 무통사통으로 눈감고 있다는 뉴스등 이다.

부쉬가 만나는 세계의 많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높은 존대어 < Yes, Sir> 를 사용하여 대접을 받는 대통령은 오직 무바라크 대통령 이다. 부쉬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골프장에서 기껏해야 < My friend> 라는 농담적 낮은 말을 사용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말의 뜻도 모르고 <친구>라는 말에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1981년에 무바라크 대통령이 취임한 후 무바라크에 의하여 이집트의 감옥에 수감된 반정부 수감자는 1,850명 이었다. 하지만 2003년 현재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범으로 수감된 사랍의 수는 1만 8천명으로 발표 되었다. 그 때 감옥은 11개 이었는데 지금은 44개로 증가 했다.

오늘 이집트에서 높아지고 있는 것은 실업자의 수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 인구의 수뿐이다.

지난번 대선 때 대통령 후보로 출마 했다 낙선된 야당 지도자 아이만 누르는 5년형으로 감옥에 같혀 있다. 워싱톤 포스트 등 미국의 언론들은 누르의 석방을 주장했고 백악관도 우려를 표명해 석방을 촉구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독재를 지원하고 묵인으로 일관해 온 미국이 지금에 와서 다음과 같이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

<무바락을 대체할 수 있는 마땅힌 세력이 아직은 없다> 라는 핑게로 무바라크를 두둔해 주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집트가 중동의 대표적 친미국가로써 아랍권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 왔다는 이유대문에 미국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하지만 눈치작전에도 한계가 있다. 미국은 무바라크의 독선과 무법적 통치형태에 대하여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쩍 한다던가? 무바락 대통령은 자신의 30년 장기집권에 대하여 미국이 간섭 하는데 대하여 몹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그래서인지 무바라크 대통령은 세계경제포럼 회의에 참가하여 지금까지 들어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발언을 했다.

<나는 미국이 핵 정책에 있어서 이중기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봤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핵 보유를 묵인하면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문제 삼는것은 옳치 않다고 생각 한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국이 듣기 거북한 발언을 계속 서슴 없이했다.

<미국은 앞으로 다자주의와 국제법을 존중하여 일방주의를 끝내는 세계를 만들
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후 얼마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집트를 방문한 라이스 국무장관과 만난 장소에서 이집트는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한다라고 말 했다.무바라크 대통령의 갈지자 외교는 이스라엘의 샤론 총리를 카이로를 방문하도록 초청한데서 양국 역사상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와같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발언과 행동의 변화는 이집트 내부의 정치상황의 변동에 따라서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비판의 소라가 있다. 하지만 2008년 1월26일에 보도한 미디어에 따르면 미국 의회가 가자지구 쪽 국경 통제를 이집트가 제대로 완전히 개선할 때까지 미국이 약속한 1억 달러 군사원조를 보류한다 라고 발표 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즉각 다음과 같이 미국을 비난 했다.


<이집트의 존엄성은 이 세상의 모든 재화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하다. 원조를 미끼로 하여 이집트의 내정에 간섭을 하는것은 용납할 수 없다> 무바라크 대통령 은 미국을 향하여 전에 볼 수 없었던 완곡한 비난을 했다.

그런데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간 통치에 있어서 줄곧 계엄령 상태와 고질적 반정부 데모로 길거리의 골목마다 경찰과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는 모양들이 계속 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또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문제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민주화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민주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필자가 찾아낸 대답은 극히 간단하며 극히 실질적 대답이다. 이집트의 민중들 원하는 민주화는 이런 것이다.

첫째, 미국이 이락을 점령하고 지배하는것을 반대 한다. 둘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탄압하고 공격하는것 반대한다. 셋째, 미국이 아프칸에서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는것을 반대 한다. 끝으로 무바라크 대통령이 미국에 무조건 동조하고 추종하는 정책을 반대 하다.

이것이 이집트의 민중들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민주화의 요구 조건들이다.만일 무바라크 대통령이 미국에 동조하는 정책을 오늘 끝내고 손을 뗀다면 이집트의 민주화는 성취되고 민중들은 곧 무바라크 대통령의 지지세력으로 돌변 할 것이다. 나는 이와같은 이집트 민중들의 요구에 동조하고 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글을 쓰면서 이집트의 민중들이 승리하는 날을 기대하게 된다.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이집트의 이모저모를 살펴 보면 희망적인 부분들도 엿보인다. 그 징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카이로-연합뉴스에 의하면 무바라크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조만간 추진할것을 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또 동시에 지역 비핵화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의 핵무기 해체를 요구 했다.그리고 후계자로 부상하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아들도 이집트의 핵 발전을 적극 주장하고 있다고 미국의 언론은 보도 했다.

둘째, 부쉬를 향한 <신발투척>으로 아랍의 영웅이 된 문탄다르 알자이디는 이집트 카이로에 본사를 두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사의 기자이다. 이 사건은 이집트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아랍인들의 자랑스러은 사건이 되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에게도 향후 큰 전향과 변화가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들도 나오고 있다. 신발을 던진 행동은 개를 향한 <ㄱ새끼> 를 뜻한다. 그런데 <ㄱ새끼> 에게 머리 숙이고 따라 다니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은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 그의 국민들이 바라는 지도자가 될것이다. 신발 투석 사건이 발생하기 바로 몇 일전에 이집트 민중들은 반미 데모를 하면서 <부시 오지마> 라는 구호를 목청 높이 웨쳤다. 그러니 앞으로 부시는 영영 이집트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세째,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과 이집트와의 관계는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평양 시외에 상원에 있는 시멘트 생산공장에 이집트가 기술과 자본을 투자 하여 기존의 공장을 비약적으로 개선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

최근에 유경호텔 재건사업에 이집트의 투자가 활발하게 진행되여 완공을 향하여 80%의 진전이 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그리고 조선과 이집트의 합작으로 <고려링크> 3세대이동통신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싸워리쓰 총장은 인사말에서 조선과 이집트는 오래 전부터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집트가 어려울 때 조선이 협조 해준데 대하여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 했다. 이말은 1973년 중동전쟁 때 조선의 비행 조종사들이 참전하여 이집트를 도와 준 옛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싸워리쓰 총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을 드리었다.얼마전 감영남 위원장 일행은 이집트를 방문하여 무바라크 대통령과 만찬을 가지면서 상원 시멘트에 1억1천5백만 달러의 투자에대하여 감사의 말을 전했다.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리고 역사의 절망적 종착점에 이르게 된것을 뼈저리게 느끼게된 이집트의 지도자들은 어두운 곤경에서 출구를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산 복합체가 핵과 미사일을 독점하고 횡포하고 있는 아랍세계의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멀고 먼 동방의 샛별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끝)


*유태영 박사 2009년 1월5일 특별기고 전문 보기---여기를 짤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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