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의 목소리 - 학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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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림원섭 작성일16-05-20 04:10 조회4,113회 댓글6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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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장 박승춘은 머저리놈인가?
친일, 친미 사대 매국 역적놈인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북에서 부르니까 남에서 불어서는 않된다고 한다.
그러면 북조선에서 아리랑, 황성예터, 두만강 등등 많은 명곡들을 부르는데
남쪽에서도 불러서는 않되는가?
또 한글을 북에서 사용하는데
남에서는 한글도 쓰지말고
왜놈 말이나
양키말을 사용해야 하는가고
머저리놈
사대 매국노놈 보훈처장 박승춘에게 묻는다.
청와대에 묻는다.
국정원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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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님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4]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후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 소리치는 끝 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님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이 없어져도 불어질 노래다.
묘향산님의 댓글
묘향산 작성일
올해 5·18 기념식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 한 곡으로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5·18 관련 단체에서 이 노래를 5·18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고,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전례가 없다”며 거부했다. 대신 보훈처는 5·18 기념식에서 기존대로 이 노래를 합창(合唱)하되, 전체가 따라 부르게 하는 제창(齊唱)은 안 된다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
이번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을 보면서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태도다. 야당은 그렇다고 쳐도 집권당이 이 문제에 대해 전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심지어 야당의 주장에 동조하는 하고 나선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단순히 노래 한 곡의 문제가 아니라 김진태 의원이 말했듯이 국체(國體)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왜 국체와 관련된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5·18 단체에서는 이 노래는 5·18 민주화운동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며,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역사를 담은 상징적인 노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안보전문가인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이 노래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 진정한 민주화 운동가를 기리는 노래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유 원장은 한 언론 기고문에서 “이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반하는 가요이므로 합창이나, 제창 및 기념곡 지정도 부적합하다”고 말했다.
노래의 주인공 윤상원은 어떤 인물인가?
그 이유에 대해 유 원장은 첫째 이 노래가 기리고 있는 윤상원이라는 인물에 대해 지적했다. 유 원장에 따르면 노동운동가인 윤상원은 혁명적 노동운동단체인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당국은 ‘이 단체는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집단으로서의 노동자 집단을 조직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라고 밝혔다.
5·18 당시 윤상원은 무장봉기를 촉구하는 선동물을 제작하여 살포하고,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한 1980년 5월 22일 오전부터 도청의 시민군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도청 안에 있는 시민군 지휘부인 시민·학생수습위원회는 다수의 구성원들이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윤상원은 무장투쟁을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연일 개최하는 동시에 1980년 5월 25일 윤상원과 그의 동지들은 도청 접수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들은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학생수습위원회 회의의 다수 의견을 무산시키고, 김창길 위원장에게 압력을 행사해 위원장직을 사퇴하게 만들었다. 김창길은 위원장직 사퇴의사를 밝힌 후 그의 말에 동조하는 다수의 시민군들과 함께 도청에서 철수했다. 윤상원 일행이 일종의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도청에 진입한 윤상원은 무장투쟁 지속을 주장해온 소수파 지도자들과 합세해 청년학생투쟁위원회라는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구성했다. 이때부터 광주항쟁의 지도부는 전문 운동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5월 26일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새 항쟁지도부는 투쟁방침을 결의하고, 진압군이 진격해 오면 가능한 많은 시민들을 무장시켜 저지하고, 저지에 실패하면 게릴라 전으로 대항하며, 최후의 순간이 오면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전원 자폭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도청 지하실에는 8톤 트럭 1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뇌관까지 설치돼 있었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이리역 폭발사고의 10배의 위력을 가진 분량으로, 만약 윤상원 등이 계획대로 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켰더라면 수만 명의 광주 시민이 떼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온건파들이 군(軍)의 폭약전문가와 협조하여 뇌관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끝까지 무장투쟁을 고수하다 사망한 윤상원은 도청사수 전 시위 과정에서 직접 공수부대원을 살해(돌로 머리를 내리침)하기도 했다(당시 고등학생이던 김효석의 증언, 아래 박스 내용 참조). 이상은 유동렬 원장의 기고문에서 요약한 5·18 당시의 윤상원의 행적이다(유동열 원장은 양동안 교수의 자료집을 인용함).
“20일 날인가 내가 녹두서점에 점심인가를 먹을라고 와서 쉬고 있었던가 그랬는디 상원이 형이 용용하게 옵디다. 철모하고 단검을 하나 들고 오드라고.
내가 ‘뭔 일이요?’ 물어보니까 ‘내가 한 놈 죽여불고 왔다’ 하더라고. 상원이 형 이야기가 태평극장과 현대극장 사이에서 공수부대와 시위대가 밀고 당기고 했다는 거여.
천변로에서 계속 밀고 쫓기면서 돌멩이를 띵기고 했다는데, 시민들이 도망가면 계속 다들 일정 정도 좇아오다가 다시 대열로 돌아가는데 어떤 놈이 계속 끄트머리까지 좇아오더라 이거여. 근디 상원이 형이 그놈 보니까 비틀비틀하니 술 취한 놈처럼 그러더라 이거여.
그래서 ‘아 저놈을 봐 버려야겠구나’ 생각하고 도망가면서도 시민들한테 ‘저 놈 봐불자’ 그랬다는 거여. 도망가던 군중들도 돌아서서 보니까 혼자 좇아오고 있거든.
그래서 ‘와!’ 하니 좇아갔다는 것이여. 그러니까 그놈이 놀래서 하천으로 뛰어내려 분 거여. 시민들이 하천으로 뛰어 내려가 가지고 그놈을 밟아 부렀지. 그 때 상원이 형이 거기서 큰 돌팍을 들어가지고 대그빡을 찍어 부렀다는 것이여.
그 기념으로 철모랑 단검을 뺏어왔다는 것이여. 아마 그 공수부대원은 죽었을 거라는 거여. 그래가지고 녹두서점으로 철모하고 단검을 들고 왔어.”
- 김효석, 「나는 역사의 새벽을 보았다」, 김양현·강현정 엮음, 『5·18항쟁 증언자료집 Ⅳ』(5·18연구소 자료총서 4)(전남대학교 출판부, 2005), 106-107쪽.
작사가인 백기완과 황석영의 경우
유동열 원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항쟁에서 끝까지 투쟁한 윤상원의 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고, 넓게는 이른바 그들이 지향하는 혁명을 위해 윤상원과 같이 최후까지 투쟁하다 사망한 자들을 기리는 노래”라며 따라서 “이러한 노래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것은 진정한 광주민주운동 정신을 훼손하고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 원장은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이란 당시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정신이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운동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 외에도 유 연구원은 “이 노래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운동권 세력들에 의해 애국가를 대신하여 불려지는 대표적 운동권 가요이며, 북한에 의해 남조선 혁명을 선동하는 이른바 혁명가요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등이 이 노래가 가진 반(反)헌법성”이라고 밝혔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쓴 사람들의 경력과 이력을 들어 이 노래를 국가기념식에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알려졌다시피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중운동가로 알려진 백기완의 ‘묏비나리’라는 시를 모태로 소설가 황석영이 작사한 것이다.
양동안 교수는 한 언론 기고문에서 “황석영은 백기완의 혁명시 ‘묏비나리’ 중에서 죽은 투사들이 살아있는 투사들에게 ‘새날이 올 때까지 목숨 걸고 싸우라’고 호소하는 단락을 발췌하여 약간 수정하여 가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묏비나리’의 분석 후 ‘새날’은 “민중혁명을 통해 反자본주의, 반미(反美)가 실현된 노동자가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양 교수는 1차 작사가인 백기완은 1980년대 이후 반체제·반국가 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고, 반대한민국-반미(反美)-반자본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2차 작사가인 황석영은 반대한민국 및 친북활동을 강도 높게 전개해온 소설가라고 평가했다. 특히 황석영의 경우 “1989년부터 1993년까지는 북한의 앞잡이로서 무거운 죄질의 반대한민국 활동을 펼친 인물”이라는 것이다.
황석영은 1989년부터 해외에 체류하면서 5차례 북한을 왕래하면서 7차례 김일성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 회고록 집필에 참여했고, 1991년 북한에서 개봉된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양 교수는 “황석영이 자기가 저지른 반대한민국 죄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진지한 반성을 했다는 기록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며 “이처럼 반국가인사들이 만든 이 노래는 그것이 설사 반체제 혁명가요가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적 기념식에서 제창한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양 교수는 “회계하지 않은 반국가 활동 전력자나 반국가적 언동을 계속하는 인사들이 작사한 가요에게 정부가 주관하는 국가적 기념식에서 제창되는 명예를 부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노래를 국가적 기념식에서 제창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반국가 활동을 용인 내지 긍정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곧 국가를 부정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처럼 안보 전문가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이미 ‘혁명가요로 자리를 잡았다’거나 ‘헌법정신을 훼손한 노래’이기 때문에 국가 기념식에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식 제창 문제는 논란이 있는 부분에 대한 5·18 단체의 공정한 조사와 작사 당사자의 해명, 그리고 국민적 합의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백번을 양보하더라도 김일성을 일곱 번 만나고 친북활동을 한 전력이 있는 황석영이 작사에 참여한 노래라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이 노래가 국가 공식행사에 불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하지만, 이번의 5·18 기념곡 논란을 통해 대다수의 언론과 지식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의 정체성 수호의 책임이 있는 집권 여당 국회의원들까지 국체와 관련된 문제에 사실상 무관심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국사 교과서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이어, 국가가 집단 정신분열증 상태로 접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 논란을 통해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의 자기 방어 내부 면역체계가 마비되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광주님의 댓글
광주 작성일
이놈아 그럼 우리 광주의 민주봉기자들이 네놈같은이에게 밝은 세상주려다
순국햇는데 땅에 묻혀 조용히 썩으란 소리냐 니눔이 광주땅만 밟으면
무사치못할게다. 일목일초에 그들의 혼이 있으니까
뻘때같은게 뭘안다구 짖어대
cc님의 댓글
cc 작성일
광주의 민중 봉기는 눈에 보이고
북한에서의 민중 봉기는 눈에 안 보이고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국가 이기 때문에
남한의 민중 봉기만 눈에 보이는 반 통일 세력인가 ?
쯔르쯔쯔르님의 댓글
쯔르쯔쯔르 작성일
모르는소리.조선은 민주주의중앙집권제야 .
체제가 판이하다.군대가 서민깐 일은 전혀 없엇고
앞으로도 없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