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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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작성일15-09-20 02:40 조회1,090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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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77.
임인자(당시 15세)씨의 작은 아버지는 사촌 여동생을 오른팔로 안고, 할머니를 왼손으로 잡고 나왔는데, 몇 발의 총탄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폭격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어떤 이는 머리가 깨지고, 어떤 이는 복부에 구멍이 났다. 한인덕(65)씨는 “머리가 터져 하얀 것이 흘러내리던 한 청년이 그것도 모르고 살기 위해 달려가다 얼마 못 가 푹 쓰러졌다”며 몸서리쳤다.
미군의 폭격 당시 간조 때여서 물이 빠진 상태였다. 폭격을 피해 도망 나온 주민들은 갯벌로 몸을 숨겼다. 가파른 언덕 위, 작은 숲속에 몸을 숨긴 사람들도 탄환이 계속 날아오자 갯벌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갯벌에 닿기도 전에 마을길에서, 다리 인근에서 미군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갯벌에 도착한 주민들은 개흙을 서로 몸에 발라주고 몸을 바짝 엎드렸다. 카멜레온이 천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색을 바꾸듯이 벌거벗은 몸에 개흙을 발랐다. 그러나 이곳에도 전폭기의 기총소사는 계속됐다. 갯벌을 뒤덮은 소금 거품이 이내 피로 뒤범벅이 됐다.
곧이어 2차, 3차 폭격이 이어졌다. 이 폭격으로 1차 폭격에서 폭파되지 않은 건물 서너 채까지 차례로 무너졌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왕국처럼 그렇게 월미도 원주민 마을은 땅속으로 완전하게 꺼져버렸다. 마을 가장자리에 살고 있던 전천봉(75)씨는 아버지와 함께 갯벌에 숨어 살아 남았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기자의 취재 수첩에 비행기와 네이팜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그려주기도 했다.
“비행기 한 대에 네이팜탄 2발이 실려 있었는데, 비행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다 선회하더니 마을 한가운데에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빠져 나올 수 없었지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거든요. 마을 가장자리에 살던 주민들이 놀라 도망치자 비행기가 기관총을 쐈어요. 진짜 참혹했죠. 민간인인줄 알면서도 총을 갈긴 거예요. 적군도 아니고 민간인인데.
저는 아버지와 함께 갯벌에 몸을 숨겼어요. 거기에서 비행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있었지요. 오후가 되니까 폭격이 멈췄어요. 아버지는 작은 배로 고기를 잡고 살았는데, 물이 들어오자마자 그 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란을 갔어요.”
나룻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란을 간 주민들은 황금빛 맑은 가을하늘을 보면서 피눈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당시 22살이었던 윤정여씨는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기관총에 맞은 많은 주민들이 물위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한다.
다른 주민들은 갯벌에 물이 불어나자 뭍으로 올라와 나무 그늘에 숨었고, 어스름 녘이 돼서야 마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날 종일 굶었던 주민들은 먹을거리가 폭격으로 다 타서 텃밭의 감자를 캐 먹었으며, 언제 또 폭격이 들이 닥칠지 몰라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청했다.
송도에 있는 외갓집에 머물던 정용구씨의 아내는 폭격 소리를 듣고 남편을 찾아 월미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생지옥이 따로 없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 정용구씨를 잃은 정지은(65)씨의 말이다.
“어머니께서는 비행기가 월미도를 폭격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찾아 달려갔어요. 도착하니까 집은 다 타버리고, 여기 저기 널린 시신들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죠. 어머니는 여러 시신의 입을 열어보고 나서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치아가 안 좋아서 금이빨을 하나 했는데, 거기에 별표가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불로 말아서 가묘를 하고 월미도에서 빠져 나왔어요.”
9월 11일. 최초 폭격이 벌어진 다음날 월미도는 잠잠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슬프고도 슬픈 하루를 눈물로 보내야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은 허물어진 건물에서 불에 탄 시신을 찾아 땅에 묻었고, 길에 쓰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도 수습해 가묘를 만들었다.
심장이 터질지는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는 것도 잠시, 12일과 13일 다시 폭격이 시작됐다. 전투기 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흩어져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이팜탄이 떨어진 곳의 사람들은 사지가 잘려나갔고, 몸뚱이에는 살덩이만 남았다. 어떤 이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렇게 모두 죽어갔다.
9월 10일. 미군의 전폭기 14대가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월미도 원주민들을 향해 로켓포와 기관포를 발사했다. 11일에는 태풍 때문에 미 항공모함이 일본 사세보로 귀항해 폭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일과 13일 다시 출격해 10일과 유사한 폭격으로 원주민 마을을 지도에서 없애 버렸다.
9월 15일 드디어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다. 당시 월미도에는 차마 고향을 떠나지 못했거나 폭격으로 부상당했던 원주민, 인민군의 부역을 했던 인천지역 민간인, 인민군들이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월미도를 한 시간 만에 점령했다. 이 사실은 10일 미군의 폭격을 피해 도망 나온 원주민들의 증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원주민들은 하인천 쪽 다리 끝(당시 원양냉동)에 판잣집을 짓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미군이 월미도 접근을 막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유청시(69)씨는 “월미도에서 도망 나온 뒤 주민들은 다시 그곳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미군들은 바닥에 총을 갈기면서 위협해 들어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날 이후부터 원주민들은 섬에서 나오거나 들어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12일과 13일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한인덕씨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등 특별한 관계의 사람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77.
임인자(당시 15세)씨의 작은 아버지는 사촌 여동생을 오른팔로 안고, 할머니를 왼손으로 잡고 나왔는데, 몇 발의 총탄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폭격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어떤 이는 머리가 깨지고, 어떤 이는 복부에 구멍이 났다. 한인덕(65)씨는 “머리가 터져 하얀 것이 흘러내리던 한 청년이 그것도 모르고 살기 위해 달려가다 얼마 못 가 푹 쓰러졌다”며 몸서리쳤다.
미군의 폭격 당시 간조 때여서 물이 빠진 상태였다. 폭격을 피해 도망 나온 주민들은 갯벌로 몸을 숨겼다. 가파른 언덕 위, 작은 숲속에 몸을 숨긴 사람들도 탄환이 계속 날아오자 갯벌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갯벌에 닿기도 전에 마을길에서, 다리 인근에서 미군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갯벌에 도착한 주민들은 개흙을 서로 몸에 발라주고 몸을 바짝 엎드렸다. 카멜레온이 천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색을 바꾸듯이 벌거벗은 몸에 개흙을 발랐다. 그러나 이곳에도 전폭기의 기총소사는 계속됐다. 갯벌을 뒤덮은 소금 거품이 이내 피로 뒤범벅이 됐다.
곧이어 2차, 3차 폭격이 이어졌다. 이 폭격으로 1차 폭격에서 폭파되지 않은 건물 서너 채까지 차례로 무너졌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왕국처럼 그렇게 월미도 원주민 마을은 땅속으로 완전하게 꺼져버렸다. 마을 가장자리에 살고 있던 전천봉(75)씨는 아버지와 함께 갯벌에 숨어 살아 남았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기자의 취재 수첩에 비행기와 네이팜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그려주기도 했다.
“비행기 한 대에 네이팜탄 2발이 실려 있었는데, 비행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다 선회하더니 마을 한가운데에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빠져 나올 수 없었지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거든요. 마을 가장자리에 살던 주민들이 놀라 도망치자 비행기가 기관총을 쐈어요. 진짜 참혹했죠. 민간인인줄 알면서도 총을 갈긴 거예요. 적군도 아니고 민간인인데.
저는 아버지와 함께 갯벌에 몸을 숨겼어요. 거기에서 비행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있었지요. 오후가 되니까 폭격이 멈췄어요. 아버지는 작은 배로 고기를 잡고 살았는데, 물이 들어오자마자 그 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란을 갔어요.”
나룻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란을 간 주민들은 황금빛 맑은 가을하늘을 보면서 피눈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당시 22살이었던 윤정여씨는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기관총에 맞은 많은 주민들이 물위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한다.
다른 주민들은 갯벌에 물이 불어나자 뭍으로 올라와 나무 그늘에 숨었고, 어스름 녘이 돼서야 마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날 종일 굶었던 주민들은 먹을거리가 폭격으로 다 타서 텃밭의 감자를 캐 먹었으며, 언제 또 폭격이 들이 닥칠지 몰라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청했다.
송도에 있는 외갓집에 머물던 정용구씨의 아내는 폭격 소리를 듣고 남편을 찾아 월미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생지옥이 따로 없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 정용구씨를 잃은 정지은(65)씨의 말이다.
“어머니께서는 비행기가 월미도를 폭격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찾아 달려갔어요. 도착하니까 집은 다 타버리고, 여기 저기 널린 시신들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죠. 어머니는 여러 시신의 입을 열어보고 나서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치아가 안 좋아서 금이빨을 하나 했는데, 거기에 별표가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불로 말아서 가묘를 하고 월미도에서 빠져 나왔어요.”
9월 11일. 최초 폭격이 벌어진 다음날 월미도는 잠잠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슬프고도 슬픈 하루를 눈물로 보내야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은 허물어진 건물에서 불에 탄 시신을 찾아 땅에 묻었고, 길에 쓰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도 수습해 가묘를 만들었다.
심장이 터질지는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는 것도 잠시, 12일과 13일 다시 폭격이 시작됐다. 전투기 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흩어져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이팜탄이 떨어진 곳의 사람들은 사지가 잘려나갔고, 몸뚱이에는 살덩이만 남았다. 어떤 이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렇게 모두 죽어갔다.
9월 10일. 미군의 전폭기 14대가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월미도 원주민들을 향해 로켓포와 기관포를 발사했다. 11일에는 태풍 때문에 미 항공모함이 일본 사세보로 귀항해 폭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일과 13일 다시 출격해 10일과 유사한 폭격으로 원주민 마을을 지도에서 없애 버렸다.
9월 15일 드디어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다. 당시 월미도에는 차마 고향을 떠나지 못했거나 폭격으로 부상당했던 원주민, 인민군의 부역을 했던 인천지역 민간인, 인민군들이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월미도를 한 시간 만에 점령했다. 이 사실은 10일 미군의 폭격을 피해 도망 나온 원주민들의 증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원주민들은 하인천 쪽 다리 끝(당시 원양냉동)에 판잣집을 짓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미군이 월미도 접근을 막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유청시(69)씨는 “월미도에서 도망 나온 뒤 주민들은 다시 그곳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미군들은 바닥에 총을 갈기면서 위협해 들어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날 이후부터 원주민들은 섬에서 나오거나 들어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12일과 13일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한인덕씨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등 특별한 관계의 사람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그래서 당시 얼굴이 곱고 아름다웠던 남녘여성들은 결혼유무를 막론하고 주한미군놈들에게 강간당해 혼혈아를 낳자 시집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다고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미국으로 떠나 불량한 백인이나 혹은 사회적으로도 모범적이지못한 흑인들의 아내로 다시 시집가는경우가 많았죠~!!!! 물론 강간당해 낳은 혼혈자식은 다른집에 입양보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서구국가로 입양보내는경우가 허다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