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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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리에스 작성일12-05-29 02:05 조회2,3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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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열사릉, 그 상징과 폭력
: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
차문석
“묘지는 도시의 이면이자 살아 있는 자들의 연대감의 표시이
며, 애국심의 고결한 장소이다”(필립 아리에스).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특히 전쟁 등과 같은 국가적인 사태들로 희생된 망자들을 국가적으로 추모하는 추모 시설들(여기서는 국립묘지의 다양한 형태들에 한정한다)을 만들어 놓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국립 묘지는 근대 민족국가가 성립한 이후에야 생겨났다. 민족 국가간의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그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국립묘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B.Anderson)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무명용사의 기념비나 군인무덤이 그 효시가 된다. 물론 그것은 양날의 칼인데, 이미 생명을 잃은 자를 기리는 성격도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앞으로 반드시 발생할 전쟁에 더 많은 인민들을 ‘정당하게’ 동원하려는 기제이다. 특히 제1차대전 이후 각국에서는 국립묘지의 생산이 가속화되었으며, 결국 국립묘지는 강력한 흡인력을 갖는 민족주의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사실 옛날에는(거칠게 말하면 근대국가 이전에는) 어느 사회에서나 오늘날 우리가 거의 무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죽은 자들과 산자들이 친밀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묘지는 하나의 성스런 장소로서, 망자와 산자 모두를 위한 초자연적인 생활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망각하는 것을 이전에는 종교가, 근대에 들어와서는 국가가 허락하지 않았다.
망자와 그들을 매장한 국립묘지들이 국가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는 목적과 양태는 각국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일 텐데) 체제의 속성에 따라 매우 상이하다. 중국(각종 열사릉원)과 소련, 일본(국립묘지)1) , 미국(알링턴 국립묘지)2) , 한국(현충원), 그리고 북한(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에서 국립묘지가 각각 사회적으로 소비되는 목적과 양태는 다른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20세기에 혹독한 독립전쟁이나 해방전쟁, 혹은 참담한 내전을 경험했던 국가에서는 그러한 추모 시설들의 생산, 유통, 소비는 대단히 스펙타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오로지 그 집단만이 겪어야만 했던 어떤 ‘문화적 예외주의’를 창출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망자와 산자의 ‘절대적’인 연대의식 그리고 개인의 목숨과 바꿀 애국심의 고양이 한층 강화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그 망자들이 일종의 ‘과거로서’ 매장되며, 망자들은 산 자들에 대해서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하지는 않았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상황이 다소 다른 듯 하다. 크고 작은 전쟁(항일무투, 한국전쟁, 대남사업 등)에서 ‘열사’라는 칭호를 받은 망자들은 오히려 ‘영원한 현재로서’ 매장되어 북한 인민들이 삶을 영위하는 세속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이다.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어야 함에도, 특히 전쟁과 같은 사활의 현장에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다간 그 ‘망자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영면지(永眠地)여야 함에도, 북한의 열사들은 열사릉으로부터 항상 현실로 불려 나와 현실의 권력에 이바지 한다. 이 망자들은 영원한 오늘을 살고 있다. 이는 20세기 사회주의 일반의 현상일까, 아니면 북한의 체제가 갖는 특수성에 기인하는 현상일까.
오늘의 이야기는 북한의 국립묘지인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에 관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북한에는 크게 두 개의 국립 묘지(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와 김일성 주석묘(금수산궁전)가 있다. 북한의 매장 관행(특히 열사들의)을 정확히 상상하고 그 의미를 통찰하는 것은 한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북한에서의 열사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역사적으로 누적시켜왔던 감성과 정신 속에서의 그것들의 위치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북한에서의 영웅적 망자들
산자는 항상 망자 앞에서 경건해진다(이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본능뿐 아니라 삶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의 확실한 증거). 망자에 대한 예의와 그로부터 구성된 의례적 총체들, 그것은 커다란 문화적 상징의 일부를 구성하며 면면히 흘러온 전통을 지속시키며, 크게 보면 사회의 재생산에 대대적으로 기여한다. 한편, ‘국가’라는 견지에서 볼 때 망자가 살다간 삶이 극적이고 영웅적일수록 이 망자는 특정한 속성의 사회의 재생산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동원된다(오중흡(7연대 정신)을 본 받아야 하고, 박영순(연길폭탄 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근대국가이든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때 망자의 속세로의 등장은 특정한 체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고 또한 그 이상으로 신비화된다.
북한에서는 특이하게 이들 영웅적 망자들은 북한의 과거를 독점적으로 설명하고 현재를 특정한 국면으로 규정하면서 현세의 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북한에서 현세의 권력은 이들 영웅적 죽음에 의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 영웅적 망자들은 일종의 예수(Jesus)처럼 숭상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무덤이 없음으로써(영생했다는 증거) 그 신성함과 초월성을 인정받지만, 이들 북한의 영웅적 망자들은 무덤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신성화된다. 성경에 금박(金箔)을 입힘으로써 예수는 세속의 정치적 권력과는 무관한 신앙의 존재가 되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열사릉에 묻힌 예수들은 무덤에 금박을 입힘으로써 세속의 정치 지형에 더욱 환상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수령과 관료들은 이들 영웅적 망자들을 현실로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써, 이들의 영생을 사회에 강제함으로써 더욱 더 자신의 권력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체제유지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북한의 국립묘지가 갖는 특수한 기능 중 하나이다.
산자도 법 앞에서 평등한 법, 망자는 더더욱 속세에서의 서열과 무관할 터이다. 그러나 북한의 열사릉에서는 망자도 속세의 서열로 영생하고 있다. 혁명열사릉의 경우, 묘지가 김일성 前주석의 첫 번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生母)였던 김정숙으로부터 가까울수록 더욱 더 ‘강력한’ 열사로서 대우받는다. 최소한 열사릉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도 이들이 영생하는데에 매우 중요하다. 열사릉 자체가 권력의 요람이며, 현세의 권력은 자신의 정통성을 많은 부분 이곳에서 생산한다. 북한에서 영웅적 망자들은 교회의 성인(聖人)을 대체했다. 수령과 똑같은 목적으로 행동을 하다, 혹은 수령을 따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들은 영원히 수령의 분신이 되었으며, 수령의 ‘베드로’가 되었다.
그렇다면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과 소련에서는 어떠했을까. 당연지사 중국에도 추모 시설들이 있다. 국립묘지로는 북경에 위치한 ‘팔보산 혁명공묘’3) 가 있다. 그 밖에 다양한 열사릉원이 있다. 가락산 열사릉원(충칭시)4) , 항미원조(抗米援朝) 열사릉원(단동시)5) , 홍군 열사릉원(광동성 해풍현), 진뉴령 열사릉원(해남성), 용화열사릉원(상해), 광주기의 열사릉원6) , 화북군 열사릉원(화북성) 등 각지에 많은 열사릉이 있다. 이들 열사릉원들은 중국 근대의 역사적 사건과 장소에 따라 단순히 그 열사들과 희생자들을 ‘기리는’ 성격이 강하다.
소련의 경우,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의 묘와 그 뒤쪽에 옛 소련의 지도자들(관료기구의 수장을 포함)과 세계적인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무덤이 있고, 그 주변에는 10월 혁명때 숨진 노동자, 병사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참새의 언덕’(구 레닌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는 무명용사들의 묘가 있다. 하지만 두 나라에서 개혁 개방 혹은 체제전환 이후에 구 사회주의 시절의 열사와 혁명가들에 대한 참배 혹은 참관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에도 지속되는 특히 북한에서의 영웅적 망자 숭배는 20세기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갖는 속성(계획경제에서 수령을 정점으로 관료정)을 통해서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겠으며, 유일체제와 수령제, 주체이데올로기라는 다양한 ‘북한적 기제’를 통해서 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겠다. 물론 90년대의 경제위기와 대기근 이후에 북한의 사회는 영웅적 망자에 대한 스펙타클을 총체적으로 거부하고 있다(평양은 북한 권력의 ‘극장도시’이기에 오히려 사회와는 정반대의 20세기적 스펙타클을 여전히 보여주려고 애쓴다).
혁명열사릉: 영웅적 망자들의 무덤, 산자의 순례지
평양의 대성리(대성산) 주작봉 마루에는 북한 최고의 성지(聖地)인 ‘혁명열사릉’이 있다. 이 열사릉은 1975년 10월에 조성되었다. 대체로 이 열사릉에는 북한 정권의 핵심 1세대가 안치되어 있는데, 1990년에 100명이었다가 현재에는 140여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1954년에 김일성의 발기에 의하여 풍치 좋은 대성산 기슭의 미천호 옆에 ‘혁명열사묘역’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1975년 조선로동당 창건 30돌을 맞으며 대성리 주작봉으로 위치를 옮겨 혁명열사릉으로 새로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김정일이 1985년 10월 조선노동당창건 40돌을 맞이하여 평묘 형태를 매 개인의 동상을 세운 지금의 모습으로 크고 현대적으로 개건 확장시켰다.
열사릉의 전체적인 조감은 다음의 문장으로 잘 설명된다. “조선식 건축양식으로 된 능대문에 들어서서 화강석 돌계단으로 200미터쯤 올라 기념문주를 통과하여 다시 돌계단으로 더 오르면 항일혁명투쟁시기의 무장투쟁과 지하투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부주제군상들이 있는 군상군이 펼쳐진다. 혁명의 붉은기를 숭엄하게 드리우고 희생된 전우들을 경건히 추모하는 두 편의 추모 군상이 고결한 자태를 드러내고 종합화환진정대, 김일성주석의 친필비와 항일혁명투사들의 불멸의 업적과 위훈을 후세에 길이 새기는 헌시비가 거연히 서 있는 교양마당을 거쳐 항일혁명렬사들의 동상이 열지어 선 반신상 구역이 드넓은 부지에 전개되어 있다. 능의 정상에는 조형적으로 우아하게 형상된 햇살을 배경으로 세차게 휘날리는 붉은 깃발이 부각되어 혁명렬사들의 반신상들을 숙연히 감싸안고 있다”(『주체의 혁명전통을 빛내이시려』)
혁명열사릉 입구의 헌시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떠나간 나이와 고장은 저마다 달랐어도 돌아와 안긴 품은 하나인 대성산 혁명렬사릉. 항일전에서 쓰러진 렬사들 여기 고이 잠들고 있나니 사람들이여 삼가 옷 깃을 여미라”.
바로 이 혁명열사릉에는 항일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안장되어 있다. 북한이 혁명열사릉은 조성한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은 “항일혁명선렬들을 영생의 모습으로 내세우며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계승 발전시켜 나가려는 로동당과 인민의 확고한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른바 ‘혁명열사들’은 과거로서 매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영생하여 현세의 권력이 원하는 혁명전통을 이어가게 하려는 의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열사릉은 수령님께서 혁명전사들에게 돌려주신 크나큰 신임의 표시이고 선물이며 그들의 투쟁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의 상징이다”(『주체의 혁명전통을 빛내이시려』, 246쪽)
혁명열사릉을 구성하는 각각의 묘는 대리석 기단 위에 ‘혁명열사’라 불리는 망자들의 흉상이 있고 그 아래 비문이 있다. 오중흡 등 항일무투 시기에 죽은 ‘유격대 5형제’(오중화, 오중흡, 오중기, 오중철, 오중석)와 같이 당시에는 지금처럼 망자들의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생존자들의 기억에 따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혁명열사릉의 제일 높은 곳에는 김정숙(1919-1949년 9월 22일), 김일성의 삼촌들인 김철주와 김형권 등 김일성 일가의 묘가 조성(김정숙 묘는 왕릉을 능가할 정도로 대규모로 축조)되어 있다. 그 좌우로는 혁명1세대 그룹(북한정권의 창출에 참여했던 인물들)들이 안장되어 있다. 오른쪽 옆에는 김책(1903-1951년 1월 31일 심장마비, 당비서 김국태의 부친)7) , 안길(1907-1947년 12월 13일, 前보안간부 훈련대대부 총참모장), 류경수, 김경석, 최용건, 최현(1907-1982년 4월 10일, 前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 최용해의 부친), 림춘추가 안장되어 있다. 왼쪽 옆에는 강건(1918-1950년 9월 8일 전사. 강창주의 부친이며 한국전쟁 시 총참모장), 최춘국, 오중흡(빨치산 부대원 ‘오중흡 7연대 따라배우기’의 주인공이며, 前총참모장 오극렬의 부친), 최희숙(항일빨치산 여대원)8) , 김일(1910-1984년 3월 9일 병사, 항일빨치산, 前내각 부수상), 오백룡, 오진우(1995년 사망. 前인민무력부장 겸 군총정치국장)가 안장되어 있다.
그밖에 이 혁명열사릉에 안장된 망자들의 면면을 보면, 김혁(항일빨치산, 김환 前부총리의 부친), 차광수, 1994년에 사망한 조명선(항일빨치산, 前강건군관학교장)과 주도일 등이 있다. 최근에는 1997년에 사망한 태병렬(前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장)과 최광(前인민무력부장), 1998년에 사망한 전문섭(前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등이 있다. 이들 중 특이하게도 애초에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가 혁명열사릉으로 이장된 사람들은 지병학, 림춘추, 전문섭이다.
또한 이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학살을 당한 혁명열사도 있어서 권력의 변덕스러움을 실감케 한다. 그가 바로 김만금(前당중앙위 전 농업부장)이다. 김만금은 1984년에 사망하여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는데, 1997년의 용성간첩사건(이른바 서관히 사건의 2막)으로 인해 안장된 시신을 다시 파헤쳐 공개재판을 한 후 유골에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이현상에 대해서는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의 안장 사실이 다소간 헷갈리고 있는 것 같다. 이태(1922-1997. 본명 이우태)에 따르면, 이현상은 51년에 국기훈장 제1급, 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 53년 2월에는 영웅칭호를 각각 받았다. 이현상이 죽은 후인 68년에 북한은 ‘혁명애국열사’로 정식으로 선정하였으며, 열사증 000001번으로 첫 열사증을 추서받아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다고 한다(현재 혁명열사릉 1호 묘역).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1972년 이현상의 부인 최문기가 사망하자 김일성은 혁명열사릉의 이현상의 가묘에 합장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을 다녀온 한국측 방문객들은 이현상의 묘를 애국열사릉에서 보았다는 진술이 대부분이다.
△ 북한 혁명열사릉 ⓒ 프로메테우스 자료사진
이 혁명열사릉의 역사에서 두 개의 붉은 깃발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도 나름대로 밝히고 있다. “대성산 혁명렬사릉 위부분의 형상을 의의 있고 특색있게 잘 살리자면 세차게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형상하여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혁명열사들이 소나무밭 속에 있다는 것보다 붉은 기폭에 싸여 있다고 하면 혁명렬사들을 추모하는 의의도 크고 대성산 혁명렬사릉이 한층더 숭엄해 질 것이다”. 그리고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이 동으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도 밝힌다. “내(김정일. 필자주) 생각에는 혁명렬사들의 반신상을....동으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다. 혁명렬사들의 반신상은 동으로 만들어 세워야 무게도 있고 보기도 좋다. 혁명렬사들의 반신상을 동으로 하면 만들기도 헐하고 오래 보관하는 견지에서 보아도 좋지만 중요하게는 우리의 정성이 깃들게 되고 그 품위와 정중성도 더욱 높아지게 되어 좋다”(이상『주체의 혁명전통을 빛내이시려』, 242쪽, 244쪽).
그렇다면 김일성 前주석은 이 혁명열사릉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일까. “김정일동지가 나와 함께 투쟁하여 온 혁명가들을 존경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마련한 혁명전통을 계승하여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 나가려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혁명하는 사람은 언제나 혁명의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하며 혁명전통을 순결하게 계승해 나가야 한다....혁명위업을 개척한 혁명선배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사상과 업적을 고수하고 빛내어 나간다면 그것이 곧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혁명선배들을 어떻게 대하며 그들이 이룩한 혁명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는가 안하는가하는 것은 혁명의 참다운 후계자와 배신자를 가르는 시금석으로 된다”(『김일성저작집 44권』, 118쪽)
애국열사릉: 다양한 망자의 무덤
평양의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열사릉은 혁명열사릉보다 한 급 낮은 열사릉이다. 이 열사릉에는 1990년 당시에는 224명이, 현재는 약 500여명이 안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애국열사릉을 대표하는 문구를 보면 이 열사릉에 어떤 망자들이 안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애국열사릉의 입구에 설치된 대형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져 있다.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평양 신미동에 있는 애국열사릉의 묘비에는 망자들의 특이하게 돌사진이 새겨져 있는데, 북한에서는 “열사들의 돌사진에 깃든 사연 또한 영도자님의 숭고한 의리심을 길이 전하고 있다”고 있다고 한다.
“1998년 4월 어느날 중앙의 어느 한 단위를 현지지도하시던 영도자님(김정일. 필자주)께서는 새로운 기술로 만든 돌사진을 보시고 대단히 만족해 하시면서 변하지 않는 돌사진을 보니 애국렬사릉이 생각난다고, 글만 새긴 렬사들의 묘비들을 볼 때마다 늘 마음이 허전했는 데 이제는 됐다고 하시며 애국렬사릉의 묘비에 당장 돌사진을 새겨붙이자고 하시었다” .
“이렇게 되어 공화국 창건 50돌전으로 렬사릉에 렬사들의 돌사진을 다 새겨붙이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하신 영도자님께서는 몸소 렬사릉을 돌아보시고 와서 렬사들의 돌사진을 새겨붙이니 능의 면모가 달라졌다고 못내 만족해 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일꾼들에게 모두 렬사릉에 가보았는가고 물으시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하여 짬을 낼 수 없어 아직 가보지 못한 몇몇 일꾼들이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자 그분께서는 매우 섭섭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애국렬사릉에 돌사진을 새겨붙인 것을 알면서도 아직 가보지 않은 것을 보니 동무들에게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가 부족한 것 같다. 우리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이상『21세기태양찬가』)
이 애국열사릉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부류의 망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최동오, 조소앙, 김규식(김규식의 묘는 1970년대 말에 애국열사릉으로 이장했다고 함), 조완규, 윤기섭, 엄항섭 등의 임정요인들(이들에게는 애국지사라는 호칭을 사용한다)이 안장되어 있으며, 특이하게는 조봉암(前진보당 당수. 1958년 ‘진보당사건’으로 1959년에 사형)도 안장되어 있다.
또한 항일빨치산 출신(이들은 대부분 혁명열사릉에 안장)이 아닌 북한의 주요인사들도 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소설『임꺽정』으로 잘 알려진 홍명희(前내각 부수상), 남한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천재 무용가 최승희(최승희는 남편인 안막(前문화선전부 부부장, 1959년에 숙청 사망)과 함께 숙청되었으나 복권되어 애국열사릉에 안장), 김광진, 림춘추(1912-1988년 4월 27일, 前국가부주석, 이후 혁명열사릉으로 이장), 강양욱, 이면상 등이 그들이다.
한편 남한 빨치산 출신들도 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현준혁, 남로당 지하당 총책을 지냈던 김상룡 등이다. 또한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대를 이끈 두 주역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이덕구, 해방직후 서울에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라는 소책자를 써서 훗날 북한이 "타도제국주의동맹" 신화를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최일천의 묘도 있다. 그리고 통혁당 출신의 김종태(묘비에는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으로 표기), 최영도 등 남한에서는 간첩으로 알려진 사람들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하지만 북한의 각 시기의 국면에서 좌파로 언급될 수 있는 사람들인 김두봉, 이동휘, 박헌영, 이주하, 박금철, 박달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복권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이면서 초대 교육상을 역임한 백남운, 이준 열사의 아들로 도시경영상을 역임했던 이용, 이만규 등도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으며, 초대 내각 무임소상을 지낸 국어학자 이극로, 변호사 출신으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내다 대령강에서 익사한 허헌 등 월북지식인들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1948년 연석회의 개회사를 한 김월송, 월북과학자인 도상록도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1920년대와 30년대 초 김좌진과 홍범도 등과 남만주일대에서 활동했던 양세봉((梁世鳳, 일명 梁瑞鳳(1896~1934년))9) 도 북한이 만주에 있던 그의 유해를 1961년에 발굴하여 1986년 9월에 애국열사릉에 안장하였다. 일제 때 카프의 일원이었고 해방후 60년대까지 북한 문학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하였으며 각각 소설『두만강』과 『모자』를 썼던 이기영과 한설야, 수령형상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김일성장군의 노래" 노랫말을 써 혁명시인의 칭호를 들었던 조기천과 이찬도 여기에 안장되어 있다. 그 밖에 여운형의 딸로 한국에 잘 알려진 여연구와 성시백(1905-1950년 6월 27일. 조선사민당 중앙위 참사였던 성세창의 부친)10) 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11)
한편, 1997년에 평양에서 공개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前농업담당 비서였던 서관히가 재평가를 받고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린다(연합뉴스, 2001.4.29). 그리고 한국전쟁 와중에 숙청되었던 연안파의 거두였던 무정(본명 김무정. 前인민군 2군단장)도 애국열사릉에 묻힌 것으로 확인되었다(중앙일보, 2001.3.13).
최근에는 2005년에 사망한 연형묵(前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2001년에 사망한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홍동근 목사도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숙청이 되어도 열사릉에 안장되는 경우도 많은데 김원봉(前국가검열상)은 없다고 한다. 물론 가묘로 되어 있는 망자들의 묘로는 앞에서 언급했던 조봉암, 최백근(사회당 서울시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 5·16군사쿠데타 직후 사형당함), 김종태12), 최영도 등이 되겠다.
한편 혁명열사릉에 안장된 망자들에게는 모두 동지라는 호칭(초기 혁명전사자들은 전사(戰士. 가령, 김혁 전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애국열사릉에는 동지 이외에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즉 혁명열사들은 동지 혹은 전사이며 그들의 죽음은 서거로써 표현하고 있다. 애국열사들은 동지 혹은 선생이며 사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좀더 간략하게 말한다면,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북한측 망자들에게는 동지를, 남한측 망자들에게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다.
수령의 묘, 금수산기념궁전과 이방인의 묘, <특설묘지>
김일성 前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 있다. 바로 평양 대성구역 미암동 금수산(모란봉을 달리 칭하는 말)에 위치한 ‘금수산기념궁전’이다. 이 궁전은 1973년 3월에 금수산 의사당으로 착공되어 1977년 4월에 김일성 탄생 65돌에 준공되었다. 사실 살아생전 김일성은 혁명열사들과 함께 혁명열사릉에 묻히길 원했으나 김정일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1995년 금수산의사당(주석궁)을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전환하여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했다. 여기에는 김일성 초상화와 거대한 입상이 설치되었는데, 궁전 앞의 광장은 넓이가 415m(김일성 생일을 은유), 길이가 216m(김정일 생일을 은유)에 이른다.
한편 평양에는 또 다른 묘지가 존재한다. 바로 <특설묘지>라는 곳이다. 재북(납북)인사들의 특설묘지도 따로 조성한 것이다. 북한 당국은 2003년부터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북인사’들의 유해를 수습해 따라 안장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춘원 이광수, 안재홍 前미군정 민정장관, 송호성 전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현상윤 前고려대 초대 총장, 정인보 前초대 감찰위원장 등이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뼈에는 이념이 없다” 그래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북한대표단의 한국 현충원의 참배, 한국 노동단체대표단의 북한 혁명열사릉의 참관 등 각국에서 묘지를 둘러싸고 많은 문제들이 노정되고 있다. 일본 수상과 우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반대여론과 저항에 직면해 있지만, 역대 한국정부도 북한의 두 개의 열사릉(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과 금수산기념궁전을 ‘참관’의 장소가 아니라 ‘참배’의 장소로 규정하고 한국측 방문객들의 이곳 출입을 금지해 왔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북한 열사릉의 참관을 애써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이는 역으로 그만큼 북한의 열사릉이 가진 역사적 무게를 인정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는 그렇게 여전히 냉전적인 잣대를 휘두르고 그렇게 작은 일에도 화들짝 놀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냉전의 잔재이며, 여운인데, 냉전의 여운임에도 너무나 강력하여, 어떤 시기에는 남북관계의 경색과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냉전은 한국내에서 이른바 ‘남남갈등’이라는 형태로 내연되기도 한다.
스페인에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된 데 대하여 1936년 7월에 프랑코의 군부 파쇼가 내란을 일으켜 성공하자 독재자 프랑코는 우파들을 위하여 내란 희생자들의 묘지 ‘망자의 계곡’을 조성하였다. 이후 독재자 프랑코는 ‘뼈에 무슨 이념이 있겠는가’라는 이유에서 좌우파의 합동 제례를 명했다. 정말이지 뼈에는 이념이 없다. 뼈에는 이념이 없다는 것이 정당하다면, 그래서 이러한 합동 제례가 정당한 것이라면, 이들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가늠하기 어렵지만, 언젠가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북의 열사릉과 남의 현충원이 합해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곳에 묻힌 망자들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망자에 대한 불평등한 구조(대통령 80평, 장군 8평, 일반사병 1평)를 가진 한국의 현충원이나 정치적으로 고도로 불평등한 구조를 지닌 북한의 열사릉이나 모두 한반도의 냉전이 초래한 대단히 ‘기형적인’ 건축물이다. 이 국립묘지들은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고, 상흔을 재생산하며, 그 위에서 또 다른 갈등과 전쟁을 기획하는 구조물이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립 묘지’는 근대국가가 발명한 커다란 비극이다.
1) 일본의 우파들은 국립묘지보다는 야스쿠니 신사를 더욱 소중하게 기억하고 참배하려고 한다.
2)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케네디가 일반 병사들과 같은 크기와 모양의 묘지로 안장되어 있다. 이 ‘묘지 평등’은 병사들의 전투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한다.
3) 팔보산 혁명공묘에는 군인, 애국인사, 과학자, 문학가, 예술가, 고급기술자, 체육인 등 3천여 명이 안장되어 있다.
4) 가락산열사릉원은 1949년 11월 27일 국공내전 말기 공산당이 충칭을 점령하기 전날, 국민당정권이 충칭 각지 감옥소에 있던 공산당원과 좌파인사 2만여 명을 학살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공원식 묘지이다. 중국은 이른바 "11·27대학살"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서 1959년 혁명성지로 조성하였다. 현재 중국의 1급 혁명성지이다.
5) 1951년도에 건설한 이릉원은 1971년과 1984년에 단동시 군중들과 단동 주둔 해방군장병들이 자진하여 릉원을 복구하고 미화함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6) 1927년 공산당 주도의 무장봉기가 실패하고 약 5,000여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되었는데, 그들의 처형장소를 열사릉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7) 북한정권은 함경북도 학성군과 성진시를 각각 김책군과 김책시로 개명하였으며, 기존의 대학과 공장을 김책공대, 김책제철소로 개명하여 그를 기렸다.
8) 항일빨치산 여대원으로서 적들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적들은 모진 고문 끝에 그의 두눈을 빼내고 가슴까지 도려냈다. 그래도 그는 굴복하지 않고 “나에게는 지금 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삼천만 인민이 만세를 부르며 해방을 알리는 그날이 보인다”(『김정일장군 어떤 분이신가』)고 소리높이 외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9) 1919년부터 철산등지에서 무장독립투쟁에 투신하여 1920년 광복군 총영, 1923년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삼부통합과정에서 국민부에 가담하여 국민부 군사조직인 조선혁명당 군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중국군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과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홍경성전투, 노구대전투, 쾌대모자전투에 참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1934년 일본밀정 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마적 두목 이동양 등 주구세력에게 살해당하였다.
10) 남한에서 활동한 사람으로는 첫 통일혁명열사가 되었다. 1950년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950년 6월 27일 새벽 5시에 사형당했다. 이 애국열사릉에 성시백의 가묘가 있다.
11) 1970년대 중반 세계선수권대회를 2연패했던 탁구선수 체육영웅 박영순, 북한 아나운서의 대명사인 인민방송원 이상벽, 바이얼린 연주로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인민배우 백고산과 연극배우 황철, 잠학분야 개척자로 박사1호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계응상 등도 안장되어 있다.
12) 김종태는 통혁당 사건으로 1969년 7월 12일 사형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종태의 이름을 사용하여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구 평양기관차전기공장), 김종태사범대학(구 해주사범대학), 김종태거리(평양시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냉전이 이를 허락한 셈이다.
* 출처 ; 프로메테우스
: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
차문석
“묘지는 도시의 이면이자 살아 있는 자들의 연대감의 표시이
며, 애국심의 고결한 장소이다”(필립 아리에스).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특히 전쟁 등과 같은 국가적인 사태들로 희생된 망자들을 국가적으로 추모하는 추모 시설들(여기서는 국립묘지의 다양한 형태들에 한정한다)을 만들어 놓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국립 묘지는 근대 민족국가가 성립한 이후에야 생겨났다. 민족 국가간의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그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국립묘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B.Anderson)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무명용사의 기념비나 군인무덤이 그 효시가 된다. 물론 그것은 양날의 칼인데, 이미 생명을 잃은 자를 기리는 성격도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앞으로 반드시 발생할 전쟁에 더 많은 인민들을 ‘정당하게’ 동원하려는 기제이다. 특히 제1차대전 이후 각국에서는 국립묘지의 생산이 가속화되었으며, 결국 국립묘지는 강력한 흡인력을 갖는 민족주의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사실 옛날에는(거칠게 말하면 근대국가 이전에는) 어느 사회에서나 오늘날 우리가 거의 무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죽은 자들과 산자들이 친밀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묘지는 하나의 성스런 장소로서, 망자와 산자 모두를 위한 초자연적인 생활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망각하는 것을 이전에는 종교가, 근대에 들어와서는 국가가 허락하지 않았다.
망자와 그들을 매장한 국립묘지들이 국가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는 목적과 양태는 각국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일 텐데) 체제의 속성에 따라 매우 상이하다. 중국(각종 열사릉원)과 소련, 일본(국립묘지)1) , 미국(알링턴 국립묘지)2) , 한국(현충원), 그리고 북한(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에서 국립묘지가 각각 사회적으로 소비되는 목적과 양태는 다른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20세기에 혹독한 독립전쟁이나 해방전쟁, 혹은 참담한 내전을 경험했던 국가에서는 그러한 추모 시설들의 생산, 유통, 소비는 대단히 스펙타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오로지 그 집단만이 겪어야만 했던 어떤 ‘문화적 예외주의’를 창출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망자와 산자의 ‘절대적’인 연대의식 그리고 개인의 목숨과 바꿀 애국심의 고양이 한층 강화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그 망자들이 일종의 ‘과거로서’ 매장되며, 망자들은 산 자들에 대해서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하지는 않았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상황이 다소 다른 듯 하다. 크고 작은 전쟁(항일무투, 한국전쟁, 대남사업 등)에서 ‘열사’라는 칭호를 받은 망자들은 오히려 ‘영원한 현재로서’ 매장되어 북한 인민들이 삶을 영위하는 세속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이다.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어야 함에도, 특히 전쟁과 같은 사활의 현장에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다간 그 ‘망자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영면지(永眠地)여야 함에도, 북한의 열사들은 열사릉으로부터 항상 현실로 불려 나와 현실의 권력에 이바지 한다. 이 망자들은 영원한 오늘을 살고 있다. 이는 20세기 사회주의 일반의 현상일까, 아니면 북한의 체제가 갖는 특수성에 기인하는 현상일까.
오늘의 이야기는 북한의 국립묘지인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에 관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북한에는 크게 두 개의 국립 묘지(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와 김일성 주석묘(금수산궁전)가 있다. 북한의 매장 관행(특히 열사들의)을 정확히 상상하고 그 의미를 통찰하는 것은 한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북한에서의 열사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역사적으로 누적시켜왔던 감성과 정신 속에서의 그것들의 위치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북한에서의 영웅적 망자들
산자는 항상 망자 앞에서 경건해진다(이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본능뿐 아니라 삶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의 확실한 증거). 망자에 대한 예의와 그로부터 구성된 의례적 총체들, 그것은 커다란 문화적 상징의 일부를 구성하며 면면히 흘러온 전통을 지속시키며, 크게 보면 사회의 재생산에 대대적으로 기여한다. 한편, ‘국가’라는 견지에서 볼 때 망자가 살다간 삶이 극적이고 영웅적일수록 이 망자는 특정한 속성의 사회의 재생산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동원된다(오중흡(7연대 정신)을 본 받아야 하고, 박영순(연길폭탄 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근대국가이든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때 망자의 속세로의 등장은 특정한 체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고 또한 그 이상으로 신비화된다.
북한에서는 특이하게 이들 영웅적 망자들은 북한의 과거를 독점적으로 설명하고 현재를 특정한 국면으로 규정하면서 현세의 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북한에서 현세의 권력은 이들 영웅적 죽음에 의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 영웅적 망자들은 일종의 예수(Jesus)처럼 숭상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무덤이 없음으로써(영생했다는 증거) 그 신성함과 초월성을 인정받지만, 이들 북한의 영웅적 망자들은 무덤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신성화된다. 성경에 금박(金箔)을 입힘으로써 예수는 세속의 정치적 권력과는 무관한 신앙의 존재가 되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열사릉에 묻힌 예수들은 무덤에 금박을 입힘으로써 세속의 정치 지형에 더욱 환상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수령과 관료들은 이들 영웅적 망자들을 현실로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써, 이들의 영생을 사회에 강제함으로써 더욱 더 자신의 권력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체제유지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북한의 국립묘지가 갖는 특수한 기능 중 하나이다.
산자도 법 앞에서 평등한 법, 망자는 더더욱 속세에서의 서열과 무관할 터이다. 그러나 북한의 열사릉에서는 망자도 속세의 서열로 영생하고 있다. 혁명열사릉의 경우, 묘지가 김일성 前주석의 첫 번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生母)였던 김정숙으로부터 가까울수록 더욱 더 ‘강력한’ 열사로서 대우받는다. 최소한 열사릉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도 이들이 영생하는데에 매우 중요하다. 열사릉 자체가 권력의 요람이며, 현세의 권력은 자신의 정통성을 많은 부분 이곳에서 생산한다. 북한에서 영웅적 망자들은 교회의 성인(聖人)을 대체했다. 수령과 똑같은 목적으로 행동을 하다, 혹은 수령을 따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들은 영원히 수령의 분신이 되었으며, 수령의 ‘베드로’가 되었다.
그렇다면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과 소련에서는 어떠했을까. 당연지사 중국에도 추모 시설들이 있다. 국립묘지로는 북경에 위치한 ‘팔보산 혁명공묘’3) 가 있다. 그 밖에 다양한 열사릉원이 있다. 가락산 열사릉원(충칭시)4) , 항미원조(抗米援朝) 열사릉원(단동시)5) , 홍군 열사릉원(광동성 해풍현), 진뉴령 열사릉원(해남성), 용화열사릉원(상해), 광주기의 열사릉원6) , 화북군 열사릉원(화북성) 등 각지에 많은 열사릉이 있다. 이들 열사릉원들은 중국 근대의 역사적 사건과 장소에 따라 단순히 그 열사들과 희생자들을 ‘기리는’ 성격이 강하다.
소련의 경우,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의 묘와 그 뒤쪽에 옛 소련의 지도자들(관료기구의 수장을 포함)과 세계적인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무덤이 있고, 그 주변에는 10월 혁명때 숨진 노동자, 병사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참새의 언덕’(구 레닌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는 무명용사들의 묘가 있다. 하지만 두 나라에서 개혁 개방 혹은 체제전환 이후에 구 사회주의 시절의 열사와 혁명가들에 대한 참배 혹은 참관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에도 지속되는 특히 북한에서의 영웅적 망자 숭배는 20세기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갖는 속성(계획경제에서 수령을 정점으로 관료정)을 통해서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겠으며, 유일체제와 수령제, 주체이데올로기라는 다양한 ‘북한적 기제’를 통해서 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겠다. 물론 90년대의 경제위기와 대기근 이후에 북한의 사회는 영웅적 망자에 대한 스펙타클을 총체적으로 거부하고 있다(평양은 북한 권력의 ‘극장도시’이기에 오히려 사회와는 정반대의 20세기적 스펙타클을 여전히 보여주려고 애쓴다).
혁명열사릉: 영웅적 망자들의 무덤, 산자의 순례지
평양의 대성리(대성산) 주작봉 마루에는 북한 최고의 성지(聖地)인 ‘혁명열사릉’이 있다. 이 열사릉은 1975년 10월에 조성되었다. 대체로 이 열사릉에는 북한 정권의 핵심 1세대가 안치되어 있는데, 1990년에 100명이었다가 현재에는 140여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1954년에 김일성의 발기에 의하여 풍치 좋은 대성산 기슭의 미천호 옆에 ‘혁명열사묘역’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1975년 조선로동당 창건 30돌을 맞으며 대성리 주작봉으로 위치를 옮겨 혁명열사릉으로 새로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김정일이 1985년 10월 조선노동당창건 40돌을 맞이하여 평묘 형태를 매 개인의 동상을 세운 지금의 모습으로 크고 현대적으로 개건 확장시켰다.
열사릉의 전체적인 조감은 다음의 문장으로 잘 설명된다. “조선식 건축양식으로 된 능대문에 들어서서 화강석 돌계단으로 200미터쯤 올라 기념문주를 통과하여 다시 돌계단으로 더 오르면 항일혁명투쟁시기의 무장투쟁과 지하투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부주제군상들이 있는 군상군이 펼쳐진다. 혁명의 붉은기를 숭엄하게 드리우고 희생된 전우들을 경건히 추모하는 두 편의 추모 군상이 고결한 자태를 드러내고 종합화환진정대, 김일성주석의 친필비와 항일혁명투사들의 불멸의 업적과 위훈을 후세에 길이 새기는 헌시비가 거연히 서 있는 교양마당을 거쳐 항일혁명렬사들의 동상이 열지어 선 반신상 구역이 드넓은 부지에 전개되어 있다. 능의 정상에는 조형적으로 우아하게 형상된 햇살을 배경으로 세차게 휘날리는 붉은 깃발이 부각되어 혁명렬사들의 반신상들을 숙연히 감싸안고 있다”(『주체의 혁명전통을 빛내이시려』)
혁명열사릉 입구의 헌시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떠나간 나이와 고장은 저마다 달랐어도 돌아와 안긴 품은 하나인 대성산 혁명렬사릉. 항일전에서 쓰러진 렬사들 여기 고이 잠들고 있나니 사람들이여 삼가 옷 깃을 여미라”.
바로 이 혁명열사릉에는 항일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안장되어 있다. 북한이 혁명열사릉은 조성한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은 “항일혁명선렬들을 영생의 모습으로 내세우며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계승 발전시켜 나가려는 로동당과 인민의 확고한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른바 ‘혁명열사들’은 과거로서 매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영생하여 현세의 권력이 원하는 혁명전통을 이어가게 하려는 의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열사릉은 수령님께서 혁명전사들에게 돌려주신 크나큰 신임의 표시이고 선물이며 그들의 투쟁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의 상징이다”(『주체의 혁명전통을 빛내이시려』, 246쪽)
혁명열사릉을 구성하는 각각의 묘는 대리석 기단 위에 ‘혁명열사’라 불리는 망자들의 흉상이 있고 그 아래 비문이 있다. 오중흡 등 항일무투 시기에 죽은 ‘유격대 5형제’(오중화, 오중흡, 오중기, 오중철, 오중석)와 같이 당시에는 지금처럼 망자들의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생존자들의 기억에 따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혁명열사릉의 제일 높은 곳에는 김정숙(1919-1949년 9월 22일), 김일성의 삼촌들인 김철주와 김형권 등 김일성 일가의 묘가 조성(김정숙 묘는 왕릉을 능가할 정도로 대규모로 축조)되어 있다. 그 좌우로는 혁명1세대 그룹(북한정권의 창출에 참여했던 인물들)들이 안장되어 있다. 오른쪽 옆에는 김책(1903-1951년 1월 31일 심장마비, 당비서 김국태의 부친)7) , 안길(1907-1947년 12월 13일, 前보안간부 훈련대대부 총참모장), 류경수, 김경석, 최용건, 최현(1907-1982년 4월 10일, 前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 최용해의 부친), 림춘추가 안장되어 있다. 왼쪽 옆에는 강건(1918-1950년 9월 8일 전사. 강창주의 부친이며 한국전쟁 시 총참모장), 최춘국, 오중흡(빨치산 부대원 ‘오중흡 7연대 따라배우기’의 주인공이며, 前총참모장 오극렬의 부친), 최희숙(항일빨치산 여대원)8) , 김일(1910-1984년 3월 9일 병사, 항일빨치산, 前내각 부수상), 오백룡, 오진우(1995년 사망. 前인민무력부장 겸 군총정치국장)가 안장되어 있다.
그밖에 이 혁명열사릉에 안장된 망자들의 면면을 보면, 김혁(항일빨치산, 김환 前부총리의 부친), 차광수, 1994년에 사망한 조명선(항일빨치산, 前강건군관학교장)과 주도일 등이 있다. 최근에는 1997년에 사망한 태병렬(前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장)과 최광(前인민무력부장), 1998년에 사망한 전문섭(前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등이 있다. 이들 중 특이하게도 애초에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가 혁명열사릉으로 이장된 사람들은 지병학, 림춘추, 전문섭이다.
또한 이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학살을 당한 혁명열사도 있어서 권력의 변덕스러움을 실감케 한다. 그가 바로 김만금(前당중앙위 전 농업부장)이다. 김만금은 1984년에 사망하여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는데, 1997년의 용성간첩사건(이른바 서관히 사건의 2막)으로 인해 안장된 시신을 다시 파헤쳐 공개재판을 한 후 유골에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이현상에 대해서는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의 안장 사실이 다소간 헷갈리고 있는 것 같다. 이태(1922-1997. 본명 이우태)에 따르면, 이현상은 51년에 국기훈장 제1급, 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 53년 2월에는 영웅칭호를 각각 받았다. 이현상이 죽은 후인 68년에 북한은 ‘혁명애국열사’로 정식으로 선정하였으며, 열사증 000001번으로 첫 열사증을 추서받아 혁명열사릉에 안장되었다고 한다(현재 혁명열사릉 1호 묘역).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1972년 이현상의 부인 최문기가 사망하자 김일성은 혁명열사릉의 이현상의 가묘에 합장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을 다녀온 한국측 방문객들은 이현상의 묘를 애국열사릉에서 보았다는 진술이 대부분이다.
△ 북한 혁명열사릉 ⓒ 프로메테우스 자료사진
이 혁명열사릉의 역사에서 두 개의 붉은 깃발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도 나름대로 밝히고 있다. “대성산 혁명렬사릉 위부분의 형상을 의의 있고 특색있게 잘 살리자면 세차게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형상하여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혁명열사들이 소나무밭 속에 있다는 것보다 붉은 기폭에 싸여 있다고 하면 혁명렬사들을 추모하는 의의도 크고 대성산 혁명렬사릉이 한층더 숭엄해 질 것이다”. 그리고 혁명열사들의 반신상이 동으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도 밝힌다. “내(김정일. 필자주) 생각에는 혁명렬사들의 반신상을....동으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다. 혁명렬사들의 반신상은 동으로 만들어 세워야 무게도 있고 보기도 좋다. 혁명렬사들의 반신상을 동으로 하면 만들기도 헐하고 오래 보관하는 견지에서 보아도 좋지만 중요하게는 우리의 정성이 깃들게 되고 그 품위와 정중성도 더욱 높아지게 되어 좋다”(이상『주체의 혁명전통을 빛내이시려』, 242쪽, 244쪽).
그렇다면 김일성 前주석은 이 혁명열사릉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일까. “김정일동지가 나와 함께 투쟁하여 온 혁명가들을 존경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마련한 혁명전통을 계승하여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 나가려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혁명하는 사람은 언제나 혁명의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하며 혁명전통을 순결하게 계승해 나가야 한다....혁명위업을 개척한 혁명선배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사상과 업적을 고수하고 빛내어 나간다면 그것이 곧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혁명선배들을 어떻게 대하며 그들이 이룩한 혁명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는가 안하는가하는 것은 혁명의 참다운 후계자와 배신자를 가르는 시금석으로 된다”(『김일성저작집 44권』, 118쪽)
애국열사릉: 다양한 망자의 무덤
평양의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열사릉은 혁명열사릉보다 한 급 낮은 열사릉이다. 이 열사릉에는 1990년 당시에는 224명이, 현재는 약 500여명이 안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애국열사릉을 대표하는 문구를 보면 이 열사릉에 어떤 망자들이 안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애국열사릉의 입구에 설치된 대형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져 있다.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평양 신미동에 있는 애국열사릉의 묘비에는 망자들의 특이하게 돌사진이 새겨져 있는데, 북한에서는 “열사들의 돌사진에 깃든 사연 또한 영도자님의 숭고한 의리심을 길이 전하고 있다”고 있다고 한다.
“1998년 4월 어느날 중앙의 어느 한 단위를 현지지도하시던 영도자님(김정일. 필자주)께서는 새로운 기술로 만든 돌사진을 보시고 대단히 만족해 하시면서 변하지 않는 돌사진을 보니 애국렬사릉이 생각난다고, 글만 새긴 렬사들의 묘비들을 볼 때마다 늘 마음이 허전했는 데 이제는 됐다고 하시며 애국렬사릉의 묘비에 당장 돌사진을 새겨붙이자고 하시었다” .
“이렇게 되어 공화국 창건 50돌전으로 렬사릉에 렬사들의 돌사진을 다 새겨붙이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하신 영도자님께서는 몸소 렬사릉을 돌아보시고 와서 렬사들의 돌사진을 새겨붙이니 능의 면모가 달라졌다고 못내 만족해 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일꾼들에게 모두 렬사릉에 가보았는가고 물으시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하여 짬을 낼 수 없어 아직 가보지 못한 몇몇 일꾼들이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자 그분께서는 매우 섭섭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애국렬사릉에 돌사진을 새겨붙인 것을 알면서도 아직 가보지 않은 것을 보니 동무들에게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가 부족한 것 같다. 우리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이상『21세기태양찬가』)
이 애국열사릉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부류의 망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최동오, 조소앙, 김규식(김규식의 묘는 1970년대 말에 애국열사릉으로 이장했다고 함), 조완규, 윤기섭, 엄항섭 등의 임정요인들(이들에게는 애국지사라는 호칭을 사용한다)이 안장되어 있으며, 특이하게는 조봉암(前진보당 당수. 1958년 ‘진보당사건’으로 1959년에 사형)도 안장되어 있다.
또한 항일빨치산 출신(이들은 대부분 혁명열사릉에 안장)이 아닌 북한의 주요인사들도 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소설『임꺽정』으로 잘 알려진 홍명희(前내각 부수상), 남한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천재 무용가 최승희(최승희는 남편인 안막(前문화선전부 부부장, 1959년에 숙청 사망)과 함께 숙청되었으나 복권되어 애국열사릉에 안장), 김광진, 림춘추(1912-1988년 4월 27일, 前국가부주석, 이후 혁명열사릉으로 이장), 강양욱, 이면상 등이 그들이다.
한편 남한 빨치산 출신들도 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현준혁, 남로당 지하당 총책을 지냈던 김상룡 등이다. 또한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대를 이끈 두 주역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이덕구, 해방직후 서울에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라는 소책자를 써서 훗날 북한이 "타도제국주의동맹" 신화를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최일천의 묘도 있다. 그리고 통혁당 출신의 김종태(묘비에는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으로 표기), 최영도 등 남한에서는 간첩으로 알려진 사람들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하지만 북한의 각 시기의 국면에서 좌파로 언급될 수 있는 사람들인 김두봉, 이동휘, 박헌영, 이주하, 박금철, 박달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복권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이면서 초대 교육상을 역임한 백남운, 이준 열사의 아들로 도시경영상을 역임했던 이용, 이만규 등도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으며, 초대 내각 무임소상을 지낸 국어학자 이극로, 변호사 출신으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내다 대령강에서 익사한 허헌 등 월북지식인들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1948년 연석회의 개회사를 한 김월송, 월북과학자인 도상록도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1920년대와 30년대 초 김좌진과 홍범도 등과 남만주일대에서 활동했던 양세봉((梁世鳳, 일명 梁瑞鳳(1896~1934년))9) 도 북한이 만주에 있던 그의 유해를 1961년에 발굴하여 1986년 9월에 애국열사릉에 안장하였다. 일제 때 카프의 일원이었고 해방후 60년대까지 북한 문학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하였으며 각각 소설『두만강』과 『모자』를 썼던 이기영과 한설야, 수령형상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김일성장군의 노래" 노랫말을 써 혁명시인의 칭호를 들었던 조기천과 이찬도 여기에 안장되어 있다. 그 밖에 여운형의 딸로 한국에 잘 알려진 여연구와 성시백(1905-1950년 6월 27일. 조선사민당 중앙위 참사였던 성세창의 부친)10) 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11)
한편, 1997년에 평양에서 공개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前농업담당 비서였던 서관히가 재평가를 받고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린다(연합뉴스, 2001.4.29). 그리고 한국전쟁 와중에 숙청되었던 연안파의 거두였던 무정(본명 김무정. 前인민군 2군단장)도 애국열사릉에 묻힌 것으로 확인되었다(중앙일보, 2001.3.13).
최근에는 2005년에 사망한 연형묵(前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2001년에 사망한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홍동근 목사도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숙청이 되어도 열사릉에 안장되는 경우도 많은데 김원봉(前국가검열상)은 없다고 한다. 물론 가묘로 되어 있는 망자들의 묘로는 앞에서 언급했던 조봉암, 최백근(사회당 서울시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 5·16군사쿠데타 직후 사형당함), 김종태12), 최영도 등이 되겠다.
한편 혁명열사릉에 안장된 망자들에게는 모두 동지라는 호칭(초기 혁명전사자들은 전사(戰士. 가령, 김혁 전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애국열사릉에는 동지 이외에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즉 혁명열사들은 동지 혹은 전사이며 그들의 죽음은 서거로써 표현하고 있다. 애국열사들은 동지 혹은 선생이며 사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좀더 간략하게 말한다면,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북한측 망자들에게는 동지를, 남한측 망자들에게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다.
수령의 묘, 금수산기념궁전과 이방인의 묘, <특설묘지>
김일성 前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 있다. 바로 평양 대성구역 미암동 금수산(모란봉을 달리 칭하는 말)에 위치한 ‘금수산기념궁전’이다. 이 궁전은 1973년 3월에 금수산 의사당으로 착공되어 1977년 4월에 김일성 탄생 65돌에 준공되었다. 사실 살아생전 김일성은 혁명열사들과 함께 혁명열사릉에 묻히길 원했으나 김정일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1995년 금수산의사당(주석궁)을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전환하여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했다. 여기에는 김일성 초상화와 거대한 입상이 설치되었는데, 궁전 앞의 광장은 넓이가 415m(김일성 생일을 은유), 길이가 216m(김정일 생일을 은유)에 이른다.
한편 평양에는 또 다른 묘지가 존재한다. 바로 <특설묘지>라는 곳이다. 재북(납북)인사들의 특설묘지도 따로 조성한 것이다. 북한 당국은 2003년부터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북인사’들의 유해를 수습해 따라 안장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춘원 이광수, 안재홍 前미군정 민정장관, 송호성 전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현상윤 前고려대 초대 총장, 정인보 前초대 감찰위원장 등이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뼈에는 이념이 없다” 그래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북한대표단의 한국 현충원의 참배, 한국 노동단체대표단의 북한 혁명열사릉의 참관 등 각국에서 묘지를 둘러싸고 많은 문제들이 노정되고 있다. 일본 수상과 우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반대여론과 저항에 직면해 있지만, 역대 한국정부도 북한의 두 개의 열사릉(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과 금수산기념궁전을 ‘참관’의 장소가 아니라 ‘참배’의 장소로 규정하고 한국측 방문객들의 이곳 출입을 금지해 왔다.
한국의 역대 정부는 북한 열사릉의 참관을 애써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이는 역으로 그만큼 북한의 열사릉이 가진 역사적 무게를 인정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는 그렇게 여전히 냉전적인 잣대를 휘두르고 그렇게 작은 일에도 화들짝 놀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냉전의 잔재이며, 여운인데, 냉전의 여운임에도 너무나 강력하여, 어떤 시기에는 남북관계의 경색과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냉전은 한국내에서 이른바 ‘남남갈등’이라는 형태로 내연되기도 한다.
스페인에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된 데 대하여 1936년 7월에 프랑코의 군부 파쇼가 내란을 일으켜 성공하자 독재자 프랑코는 우파들을 위하여 내란 희생자들의 묘지 ‘망자의 계곡’을 조성하였다. 이후 독재자 프랑코는 ‘뼈에 무슨 이념이 있겠는가’라는 이유에서 좌우파의 합동 제례를 명했다. 정말이지 뼈에는 이념이 없다. 뼈에는 이념이 없다는 것이 정당하다면, 그래서 이러한 합동 제례가 정당한 것이라면, 이들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가늠하기 어렵지만, 언젠가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북의 열사릉과 남의 현충원이 합해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곳에 묻힌 망자들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망자에 대한 불평등한 구조(대통령 80평, 장군 8평, 일반사병 1평)를 가진 한국의 현충원이나 정치적으로 고도로 불평등한 구조를 지닌 북한의 열사릉이나 모두 한반도의 냉전이 초래한 대단히 ‘기형적인’ 건축물이다. 이 국립묘지들은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고, 상흔을 재생산하며, 그 위에서 또 다른 갈등과 전쟁을 기획하는 구조물이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립 묘지’는 근대국가가 발명한 커다란 비극이다.
1) 일본의 우파들은 국립묘지보다는 야스쿠니 신사를 더욱 소중하게 기억하고 참배하려고 한다.
2)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케네디가 일반 병사들과 같은 크기와 모양의 묘지로 안장되어 있다. 이 ‘묘지 평등’은 병사들의 전투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한다.
3) 팔보산 혁명공묘에는 군인, 애국인사, 과학자, 문학가, 예술가, 고급기술자, 체육인 등 3천여 명이 안장되어 있다.
4) 가락산열사릉원은 1949년 11월 27일 국공내전 말기 공산당이 충칭을 점령하기 전날, 국민당정권이 충칭 각지 감옥소에 있던 공산당원과 좌파인사 2만여 명을 학살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공원식 묘지이다. 중국은 이른바 "11·27대학살"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서 1959년 혁명성지로 조성하였다. 현재 중국의 1급 혁명성지이다.
5) 1951년도에 건설한 이릉원은 1971년과 1984년에 단동시 군중들과 단동 주둔 해방군장병들이 자진하여 릉원을 복구하고 미화함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6) 1927년 공산당 주도의 무장봉기가 실패하고 약 5,000여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되었는데, 그들의 처형장소를 열사릉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7) 북한정권은 함경북도 학성군과 성진시를 각각 김책군과 김책시로 개명하였으며, 기존의 대학과 공장을 김책공대, 김책제철소로 개명하여 그를 기렸다.
8) 항일빨치산 여대원으로서 적들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적들은 모진 고문 끝에 그의 두눈을 빼내고 가슴까지 도려냈다. 그래도 그는 굴복하지 않고 “나에게는 지금 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삼천만 인민이 만세를 부르며 해방을 알리는 그날이 보인다”(『김정일장군 어떤 분이신가』)고 소리높이 외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9) 1919년부터 철산등지에서 무장독립투쟁에 투신하여 1920년 광복군 총영, 1923년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삼부통합과정에서 국민부에 가담하여 국민부 군사조직인 조선혁명당 군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중국군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과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홍경성전투, 노구대전투, 쾌대모자전투에 참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1934년 일본밀정 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마적 두목 이동양 등 주구세력에게 살해당하였다.
10) 남한에서 활동한 사람으로는 첫 통일혁명열사가 되었다. 1950년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950년 6월 27일 새벽 5시에 사형당했다. 이 애국열사릉에 성시백의 가묘가 있다.
11) 1970년대 중반 세계선수권대회를 2연패했던 탁구선수 체육영웅 박영순, 북한 아나운서의 대명사인 인민방송원 이상벽, 바이얼린 연주로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인민배우 백고산과 연극배우 황철, 잠학분야 개척자로 박사1호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계응상 등도 안장되어 있다.
12) 김종태는 통혁당 사건으로 1969년 7월 12일 사형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종태의 이름을 사용하여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구 평양기관차전기공장), 김종태사범대학(구 해주사범대학), 김종태거리(평양시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냉전이 이를 허락한 셈이다.
* 출처 ;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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