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위인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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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동산 작성일12-05-26 08:05 조회2,538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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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위인 상
북한을 강성한 나라로 올려놓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서거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핵 강국, 신산업혁명의 불길, 민족의 위대한 정신력, 자주와 진보의 억센 승리. 이런 위대한 유산을 남겼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더욱 그리워지며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국방위원장님을 생각해 볼 때마다 그 무한대한 사상의지의 원천과 위인 상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수없이 전해지는 일화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 하나의 물방울에 우주가 비낀다고 국방위원장님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일화들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 일화들에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사상이론적 깊이와 혁명적 영도, 민중을 감싸안은 덕성이 있기 때문이다.
1. 젊은 시절부터 뛰어났던 사상이론적 예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주체사상에 대하여",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를 비롯한 세기적인 사상이론 노작을 남겼으며, 종자론과 건축론, 음악론을 비롯한 수많은 이론을 정립하는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업적은 뛰어난 예지와 열정, 피타는 노력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뛰어난 예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한번은 교사가 유치원 어린이들이 잘 알고있는 직관물로 실례를 들어가며 하나에다 하나를 합치면 둘이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어리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교사가 가르쳐준 데로 하나에다 하나를 합치면 둘이 된다는 산수적 이해를 누구보다도 빨리 하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이께서는 차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였다.
공부시간이 끝나갈 무렵, 생각에서 깨여나듯 자리에서 불쑥 일어난 어리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하나에다 하나를 합해도 둘이 안되고 하나가 되는 때가 있다고 자신감에 넘친 어조로 주장하였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어 망설이던 교사가 어떤 때에 그렇게 되는지 물었더니 어리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나의 진흙덩이와 동생의 진흙덩이를 합치니까 큰 한 덩어리가 되였고 꽃밭에 물을 줄 때 보아도 꽃잎에 떨어진 물 한방울에 또 한방울이 합쳐지면 큰 한방울이 되고 여러 방울이 합쳐지면 더 큰 한방울이 되더라고 답변하였다.
이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어린 나이에도 하나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예지는 역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대학에서 공부하던 1960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이날 학급에서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토론이 있었다. 토론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이미 강의에서 배운 데로 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는 것을 일치하게 강조하고 거기에서 논 김유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다. 지도교원은 흡족하였다. 학과토론이란 배워준 내용을 공고화시키는 것 인만큼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교원은 학과토론을 끝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김유신에 대한 평가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는 것을 제기하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사실상 국토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우선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 발해국이 세워져 2백년동안 존속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세나라가 차지하고있던 영토에 발해와 신라라는 서로 다른 주권국가가 존립하였던 조건에서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우리나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지향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럴 만 한 힘도 없었다고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렇기 때문에 외적의 침략세력과 합세하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와 김유신을 응당 재평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제기는 당시 북한에서도 파격적인 주장이었으며 이 질문을 받았던 교원은 오랜기간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국방위원장님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논증하여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이런 철학적 기질과 예지를 지니고 민족과 민중의 운명개척에 이바지하는 사상론을 정립하는 대 업적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2. 정열적인 영도의 거장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또한 열렬한 정열가이자 영도의 거장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정력적인 활동은 줴기밥(주먹밥)과 쪽잠으로 대표되며, 수 십 년에 걸친 영도의 나날에 보여준 놀라운 업적은 더욱더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 쪽잠에 대해 전해지는 다음의 일화가 있다.
1977년 6월의 어느 날 이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어느 한 중요대상 건설사업을 현지에서 밤새워 지도하고 새벽녘에야 귀로에 올랐다. 현지 일군들의 배웅을 받으시며 차가 방금 건설 현장을 벗어났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좌석에 깊이 몸을 잠그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동승한 일군은 가슴 뜨거워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얼마나 피로가 쌓였으면 차에 오르자마자 이렇게 깊이 잠들겠는가. 사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 전날 밤에도 집무실에서 꼬박 지새운 데다가 낮에는 여러 단위의 사업을 보살피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였다. 게다가 간밤에는 초저녁부터 밤늦게까지 건설장 사업을 지도하였으니 피로가 중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군들이 새날이 밝을 때까지만이라도 쉬고 떠났으면 하는 의향을 말씀드렸는데 아침 첫 시간에 조직한 사업이 있다고 하시면서 기어이 차에 올랐던 것이다.
차가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새 잠들었댔군. 내가 얼마나 잔 것 같습니까?"
"10분도 되나마나 합니다."
"10분? 10분 잤으면 많이 잤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한잠 잤더니 정신이 든다고 하며 일군에게 권유하였다.
"동무도 피곤하겠는데 이제부터 눈을 붙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동무가 건설현장을 지도하느라고 잠이 많이 몰렸겠는데 승용차의자에 기대고 잠을 좀 자야 하겠습니다."
"저는 한번 잠들면 적어도 2∼3시간은 자야 잔 것 같습니다. 눈을 붙였다나면 차라리 안 잔 것만 못합니다."
"그것은 아직 쪽잠 맛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채 가셔지지 않은 피로를 죄다 실려보낸 듯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크게 소리 내여 웃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이어 자신도 이전에는 쪽잠 맛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몰랐다가 일감은 쌓이지, 시간은 없지, 할 수없이 정 졸음이 올 때면 걸상에 앉은 체로 잠간씩 눈을 붙였는데 그때부터 쪽잠 맛을 알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잠을 자지 않고 일한다고 하는데 나도 사람인 것만큼 잠을 전혀 자지 않고서는 견디기 곤란합니다. 내가 잠을 제대로 자지 않고 일하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남이 2∼3시간동안 자는 잠을 10∼15분 동안에 집중적으로 자는 습관을 붙인 것입니다. 쪽잠은 잠으로서는 불만족스럽지만 피로를 집중적으로 풀어주는 좋은 단잠입니다. 나는 쪽잠이 제일 답니다."
이때로부터 쪽잠이 제일 달다는 말은 격언처럼 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0시에서 0시까지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집무시간이 사람들의 화제를 모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정력적인 영도는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이루어 졌으며, 그 영도 과정 하나 하나가 만인의 경탄을 자아냈다. 군사 분야, 문학예술 분야에 대한 영도 과정에 있은 다음의 일화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1998년 5월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탄 야전승용차는 아침 일찍이 까치봉 마루에 올라섰다. 최전선의 높고 험한 영봉에서 최고사령관을 보게 된 군인들의 가슴은 몹시 설렜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따라 고지에 오른 부대장은 안타까웠다. 이른 새벽 멀고도 험한 길을 헤치시며 부대를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 전선형편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려야겠는데 주변이 온통 안개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부대장은 어서 안개가 걷혔으면 하는 심정을 금치 못하였다.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아군의 진지를 육안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윽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부대장으로부터 인접과 전선너비, 전선 정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부대장이 까치봉 뒤계선의 주요봉우리들에 대해 설명하여 드리려는데 뜻밖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직접 그 봉우리들을 가리키시며 먼저 이름들을 지적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동북쪽방향의 고지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쪽에 있는 것이 선조암이고 그 앞에 보이는 것이 351고지와 월비산입니다."
그것은 짙은 안개에 가리워 전혀 보이지 않는 대상물들이었다. 부대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잘 보이지 않았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가리키는 것이 대단히 정확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안개 속에서도 최전연의 지형지물들을 손금보듯이 죄다 알아보시는 것일가?"
그러한 심정은 부대장만이 아니었다. 동행한 일군들도 까치봉 전후방의 모든 지형지물들을 너무도 상세히 알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에게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일군들의 이러한 심정을 헤아려 보듯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나는 안경을 끼고 보니까 다 보입니다. 동무들도 안경을 끼면 다 보일 것입니다."라고 소탈하게 농담을 하였다.
부대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서 까치봉에 오기는 처음이어서 이곳 정황을 상세히 보고하려고 하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어찌나 잘 알고 있는지 자기가 미처 모르는 것이 있을 것 같아 말을 삼가하고 조심스러워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몇 해전 겨울 어느 날 인민군대의 해당 일군들과 한 무명고지에 대하여 말할 때도 그러하였다. 일군들은 해발고가 수십 미터밖에 안 되는 그 고지를 군사적 견지에서는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몇 해만 있으면 고지의 면모를 잃게 되는데도 그곳에 자리잡고있는 화강석 광산의 채광을 묵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 사실을 알고는 대뜸 그 고지를 없애면 4∼5km 더 들어와서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일군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곳을 현지에서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곳 지형조건을 손금보듯이 환히 꿰뚫고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도 위에서만은 절대로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없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 일군들은 그것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1996년 12월 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카프" 작가편 제4-7부를 보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치하하신 다음 일부 장면에 고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주인공이 간도에 갔다가 쪽배를 타고 러시아로 갈 때 노래 〈이부슈까〉의 선율이 나오는데 그것은 분위기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기성곡 선정을 잘못하였다고, 그때가 1930년대인데 당시의 소만국경에서는 "이부슈까"의 정서가 나올 수 없다고, 그 장면에 그런 노래를 넣은 것은 순전히 멋을 따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명철한 지적이었다.
의로운 창작의 뜻을 품은 주인공 이찬이 간도에 가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다시 소련으로 가는 길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마지막 한가닥 희망을 안고 정처없이 떠나는 울분의 길이였다.
이러한 주인공의 심리에 흐느적거리는 수양버들을 노래한 "이부슈까"의 선율이 맞을 리 없었다. 더욱이 당시로 말하면 일제의 소만국경 침입사건으로 하여 정세가 매우 긴장하였다. 이런 때 소만국경 지대에 있는 주인공의 심리를 "이부슈까(수양버들)" 노래선율로 돋구려고 했으니 잘못도 큰 잘못이었다. 그러나 연출가와 영화음악전문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창작가, 예술인들과 지도일군들이 영화를 창작 완성하면서 이 장면의 음악만도 수없이 들었지만 장면의 생활정서와 주인공의 심리에 음악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장면의 생활과 주인공의 심리, "이부슈까"의 노래선율이 풍기는 정서와 소만국경에 조성된 긴장한 정세까지 종합, 분석하고 음악이 장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순간에 포착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또한 영화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본 놈들이 식당에 가서 고전음악을 틀어놓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엇을 보여주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본 놈들이 그렇게 유식한 고전음악 감상자들은 아니다, 그런 장면에 음악을 넣으려면 썩어빠진 시대의 케케묵은 음악을 넣어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었다. 전쟁과 약탈, 살인을 일삼는 침략자들과 고상한 감정과 지성은 성격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가르치심이었다.
이렇게 되여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중국 동북지방에서 소만국경으로 쪽배를 타고 가는 장면의 노래는 "이부슈까"대신 러시아 원무곡 "쏘브까만주리"로 바뀌었고 식당에서 일제 놈들이 듣는 음악은 케케묵은 낡은 노래의 야생적인 선율로 바뀌었다.
세계 역사에는 위대한 철학자, 정치가, 군사가로 자칭하는 인물들은 많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처럼 모든 분야에 걸쳐서 박식하고 정력적인 영도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민중의 지도자는 없었다. 민중에 대한 뜨거운 헌신과 정력적인 영도로 일관된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혁명 영도야말로 북한을 강성국가 건설로 추동한 강력한 힘이자 원동력이었으며, 조국통일과 세계 자주화 운동의 새 지평을 얼어낸 위대한 추동력이었다.
3.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덕성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또한 민중에 대하여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헌신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평소에도 "인민들이 좋아하오?", "인민들이 뭐라고 하겠소?"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자신의 좌우명을 "나는 근로하는 인민의 심부름꾼이다. 인민들이 바란다면 돌 위에도 꽃을 피워야 한다"고 하였다.
1975년 7월 1일 마식령산맥에 있는 검덕광산에서 있은 일이다. 검덕광산은 북한의 대표적인 납, 아연 광산이다.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검덕광산을 찾아 현지지도를 하였는데 수백 미터 수직 깊이의 4.5갱에 직접 들어가 보자고 하였다. 현지 일군들은 정비도 잘 되지 않아 복잡하고 석수까지 흐르는 곳이라 반대를 하였다. 그러자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우리의 귀중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곳이라도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며 광부들이 쓰는 안전모를 쓰고 막장에 들어갔다. 광부들은 자신들을 보기 위해 5km에 달하는 긴 막장에 들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광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속보판을 보게 되었다. 속보판에는 집에도 나가지 않고 막장에서 침식을 하며 일하는 광부들의 모범 사례가 소개되어 있었다. 일부 열성적인 광부들이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막장에 아예 눌러 살고 있었고 이들을 위해 통풍장치에 식당, 영사실, 학습실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이런 내막을 듣더니 "갱 안에서 자면서 일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막장에서 전투를 벌리는 것도 바로 노동계급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광부들을 아껴야 합니다. 공기가 나쁜 막장에서 재우지 말고 꼭 밖에 나가서 휴식하도록 하시오."라고 이야기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막장 밖에 나와서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우리는 땅속의 보물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당과 혁명의 가장 귀중한 보배들인 우리 노동계급의 건강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무슨 일을 하나 하더라도 민중을 중심에 놓고 판단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검덕광산 광부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일을 하여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항상 책임지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1974년 1월에 있은 일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신인배우가 문제를 일으켜 건설현장에 나가 노동단련을 받고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담당 일꾼에게 전화를 걸어 그 배우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일꾼은 이제 자기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그 동무가 건설현장에 나가서 일한 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일년 반이 됩니다"고 답하였다.
며칠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담당 일꾼에게 또 전화를 걸어 그 배우의 생활을 물었다. 역시 대답은 조직생활을 성실히 하며 노동에서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그가 노동에 참가한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물으니 일년 반이 된다고 답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1년 반이 좀 넘은 것 같은데"라고 하였다. 정확히는 1년 반에서 며칠이 더 지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현지지도에서 돌아오는 밤늦은 길에 그 배우가 일하는 건설현장을 돌아보게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 배우를 불러 직접 만나보고 고무해 준 후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노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벌써 두 달 전부터 무용배우의 생활을 알아보았습니다. 모두 사실대로 일을 잘한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잘한다는 말뿐이지 그를 회복시켜주자고 제기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왜 이렇소? 인간성도 없고 인정미도 없단 말입니다. 친자식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 동무는 무대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은 했을 것입니다. 당 일꾼인 동무들이 그의 이런 마음을 알고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이름 없는 신인배우의 운명에 대해 얼마나 걱정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이 배우는 그 후 오래지않아 복귀하여 훌륭한 배우가 되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겸손하고 소박하며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틀과 격식을 차리지 않고 소탈하게 민중들과 허물없이 어울려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평소에 양복을 입지 않고 "인민복"을 즐겨 입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연설이나 논문에서도 딱딱한 문어체를 쓰지 않고 알기 쉬운 민중적인 표현들만 사용하였다. 자기 지식을 뽐내려는 지식인들이 온갖 현학적인 표현들을 늘어놓는 것과 대비된다.
예를 들어 "목에 칼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진짜 인간의 자존심이며 혁명가의 자존심입니다", "가식과 요술에 이골이 나면 인정까지도 말라버리는 것 같습니다. 표리부동하게 행동하는 그의 버릇을 고쳐주자면 여간 어렵지 않겠지만 혁명을 같이하자고 결심한 이상 끝까지 이끌어주어 그를 사람이 되게 만들어주어야 하겠습니다" 같은 표현들은 술술 읽히면서 한 번만 봐도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된다.
한편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지닌 겸손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67년 7월 어느 날 있은 일이다. 덕성군의 한 협동농장 책임 기사가 화물차를 외통길에 세우고 석탄을 내리고 있었다. 길이 좁아 차 한 대만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었지만 점심시간이라 차들이 다니지 않았기에 재빨리 일을 해치울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때 한 승용차가 길에 들어섰다. 외통길인지 몰랐는지 화물차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멈췄다. 차안의 젊은 간부는 문건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고 승용차 운전사만 내려서 중요한 일이 있어 가는데 길을 피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책임 기사는 흔쾌히 화물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이 때 승용차의 젊은 간부가 내려 무슨 일인지 물어보더니 아무리 바쁘다고 화물차에게 길을 비키라면 안 된다, 길을 비켜야 한다면 작은 차가 비켜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용차를 후진하려면 밭과 낭떠러지 사이의 좁은 길로 상당히 가야 하기에 위험했다. 책임 기사는 오르막길로 승용차를 후진하는 것은 위험하니 화물차가 후진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젊은 간부는 저렇게 큰 차가 짐을 가득 싣고 좁은 길에서 후진해서는 안 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 젊은 간부가 갑자기 길옆에 다가가 낭떠러지를 살펴보더니 길이 험한데 후진하지 말고 여기 길을 재빨리 내는 게 어떻겠냐고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주위에 큰돌들이 많으니 길옆 바위 사이에 돌을 채우면 그 위로 차가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운전사와 책임 기사도 좋다며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뙤약볕 아래에서 한참 시간이 흘러 드디어 차 한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 완성되었다. 젊은 간부는 승용차 운전사에게 차를 몰아보라고 하고는 차 앞에서 바퀴를 살피며 방향을 잡아주었다. 승용차가 화물차 옆을 지나가자 젊은 간부는 책임 기사의 손을 잡으며 시간이 없어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가니 널리 양해해달라고 하고 차에 올라탔다.
책임 기사는 승용차 운전사와 인사를 나누며 귓속말로 저분은 어디 있는 간부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운전사는 빙긋 웃으며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라고 말해주고는 떠나갔다. 책임 기사는 방금 까지 자신과 땀흘려 돌을 나른 사람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임을 알고 너무 놀라 멍하니 떠나가는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민중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며 소탈한 모습을 보여준 사례는 이 밖에도 많이 있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성품을 가져 자신의 동상이나 기념탑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서거하고 북한 주민들이 애도를 하고자 해도 동상 하나 없어서 김일성 주석 동상 앞에서 애도를 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2002년 10월 8일에 있은 일이다. 이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된 지 5돌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이른 새벽부터 진눈깨비가 날리는 북방의 대홍단군 홍남농장 현지지도를 하였다. 홍남농장 감자밭을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감자수확기를 살펴보며 감자농사 정형을 알아보고 농업 과학화에 대한 지도를 하였다.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자 일꾼들은 밭머리에 감자를 구워놓았으니 잠시 휴식시간을 보내자고 요청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감자 굽는 곳으로 가서는 한쪽에서 장작불 속에 감자를 묻고 다른 한쪽에서 불에 달군 돌 위에 감자를 올려놓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직접 감자를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날씨가 추운데 술이 있으면 한잔씩 부어주라고 일렀다.
술잔이 돌자 한 일꾼이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당 총비서로 추대된 5돌이 되는 날임에도 허물없이 자신들과 함께 감자를 구우며 현지지도를 하는 모습에 목이 메었다. 그는 구운 감자로 뜻깊은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건강을 축원하는 축배를 들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자신의 당 총비서 추대 5돌을 농민들과 감자 몇 개로 보내며 다시 현지지도를 떠나갔다.
이처럼 자신의 기념일 조차도 현지지도를 다니시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모습에서 겸손함과 헌신성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소개한 일화들만으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사상이론적 예지와 정력적인 영도,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덕성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최고영도자가 계셨기에 북한은 일심단결, 혼연일체의 대단결을 이룩하고 선군 혁명의 기치높이 자주위업의 새 승리를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강성한 나라로 올려놓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서거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핵 강국, 신산업혁명의 불길, 민족의 위대한 정신력, 자주와 진보의 억센 승리. 이런 위대한 유산을 남겼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더욱 그리워지며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국방위원장님을 생각해 볼 때마다 그 무한대한 사상의지의 원천과 위인 상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수없이 전해지는 일화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 하나의 물방울에 우주가 비낀다고 국방위원장님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일화들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 일화들에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사상이론적 깊이와 혁명적 영도, 민중을 감싸안은 덕성이 있기 때문이다.
1. 젊은 시절부터 뛰어났던 사상이론적 예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주체사상에 대하여",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를 비롯한 세기적인 사상이론 노작을 남겼으며, 종자론과 건축론, 음악론을 비롯한 수많은 이론을 정립하는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업적은 뛰어난 예지와 열정, 피타는 노력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뛰어난 예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한번은 교사가 유치원 어린이들이 잘 알고있는 직관물로 실례를 들어가며 하나에다 하나를 합치면 둘이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어리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교사가 가르쳐준 데로 하나에다 하나를 합치면 둘이 된다는 산수적 이해를 누구보다도 빨리 하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이께서는 차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였다.
공부시간이 끝나갈 무렵, 생각에서 깨여나듯 자리에서 불쑥 일어난 어리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하나에다 하나를 합해도 둘이 안되고 하나가 되는 때가 있다고 자신감에 넘친 어조로 주장하였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어 망설이던 교사가 어떤 때에 그렇게 되는지 물었더니 어리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나의 진흙덩이와 동생의 진흙덩이를 합치니까 큰 한 덩어리가 되였고 꽃밭에 물을 줄 때 보아도 꽃잎에 떨어진 물 한방울에 또 한방울이 합쳐지면 큰 한방울이 되고 여러 방울이 합쳐지면 더 큰 한방울이 되더라고 답변하였다.
이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어린 나이에도 하나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예지는 역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대학에서 공부하던 1960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이날 학급에서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토론이 있었다. 토론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이미 강의에서 배운 데로 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는 것을 일치하게 강조하고 거기에서 논 김유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다. 지도교원은 흡족하였다. 학과토론이란 배워준 내용을 공고화시키는 것 인만큼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교원은 학과토론을 끝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김유신에 대한 평가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는 것을 제기하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사실상 국토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우선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 발해국이 세워져 2백년동안 존속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세나라가 차지하고있던 영토에 발해와 신라라는 서로 다른 주권국가가 존립하였던 조건에서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우리나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지향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럴 만 한 힘도 없었다고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렇기 때문에 외적의 침략세력과 합세하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와 김유신을 응당 재평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제기는 당시 북한에서도 파격적인 주장이었으며 이 질문을 받았던 교원은 오랜기간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국방위원장님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논증하여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이런 철학적 기질과 예지를 지니고 민족과 민중의 운명개척에 이바지하는 사상론을 정립하는 대 업적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2. 정열적인 영도의 거장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또한 열렬한 정열가이자 영도의 거장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정력적인 활동은 줴기밥(주먹밥)과 쪽잠으로 대표되며, 수 십 년에 걸친 영도의 나날에 보여준 놀라운 업적은 더욱더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 쪽잠에 대해 전해지는 다음의 일화가 있다.
1977년 6월의 어느 날 이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어느 한 중요대상 건설사업을 현지에서 밤새워 지도하고 새벽녘에야 귀로에 올랐다. 현지 일군들의 배웅을 받으시며 차가 방금 건설 현장을 벗어났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좌석에 깊이 몸을 잠그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동승한 일군은 가슴 뜨거워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얼마나 피로가 쌓였으면 차에 오르자마자 이렇게 깊이 잠들겠는가. 사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 전날 밤에도 집무실에서 꼬박 지새운 데다가 낮에는 여러 단위의 사업을 보살피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였다. 게다가 간밤에는 초저녁부터 밤늦게까지 건설장 사업을 지도하였으니 피로가 중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군들이 새날이 밝을 때까지만이라도 쉬고 떠났으면 하는 의향을 말씀드렸는데 아침 첫 시간에 조직한 사업이 있다고 하시면서 기어이 차에 올랐던 것이다.
차가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새 잠들었댔군. 내가 얼마나 잔 것 같습니까?"
"10분도 되나마나 합니다."
"10분? 10분 잤으면 많이 잤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한잠 잤더니 정신이 든다고 하며 일군에게 권유하였다.
"동무도 피곤하겠는데 이제부터 눈을 붙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동무가 건설현장을 지도하느라고 잠이 많이 몰렸겠는데 승용차의자에 기대고 잠을 좀 자야 하겠습니다."
"저는 한번 잠들면 적어도 2∼3시간은 자야 잔 것 같습니다. 눈을 붙였다나면 차라리 안 잔 것만 못합니다."
"그것은 아직 쪽잠 맛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채 가셔지지 않은 피로를 죄다 실려보낸 듯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크게 소리 내여 웃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이어 자신도 이전에는 쪽잠 맛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몰랐다가 일감은 쌓이지, 시간은 없지, 할 수없이 정 졸음이 올 때면 걸상에 앉은 체로 잠간씩 눈을 붙였는데 그때부터 쪽잠 맛을 알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잠을 자지 않고 일한다고 하는데 나도 사람인 것만큼 잠을 전혀 자지 않고서는 견디기 곤란합니다. 내가 잠을 제대로 자지 않고 일하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남이 2∼3시간동안 자는 잠을 10∼15분 동안에 집중적으로 자는 습관을 붙인 것입니다. 쪽잠은 잠으로서는 불만족스럽지만 피로를 집중적으로 풀어주는 좋은 단잠입니다. 나는 쪽잠이 제일 답니다."
이때로부터 쪽잠이 제일 달다는 말은 격언처럼 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0시에서 0시까지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집무시간이 사람들의 화제를 모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이런 정력적인 영도는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이루어 졌으며, 그 영도 과정 하나 하나가 만인의 경탄을 자아냈다. 군사 분야, 문학예술 분야에 대한 영도 과정에 있은 다음의 일화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1998년 5월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탄 야전승용차는 아침 일찍이 까치봉 마루에 올라섰다. 최전선의 높고 험한 영봉에서 최고사령관을 보게 된 군인들의 가슴은 몹시 설렜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따라 고지에 오른 부대장은 안타까웠다. 이른 새벽 멀고도 험한 길을 헤치시며 부대를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 전선형편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려야겠는데 주변이 온통 안개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부대장은 어서 안개가 걷혔으면 하는 심정을 금치 못하였다.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아군의 진지를 육안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윽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부대장으로부터 인접과 전선너비, 전선 정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부대장이 까치봉 뒤계선의 주요봉우리들에 대해 설명하여 드리려는데 뜻밖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직접 그 봉우리들을 가리키시며 먼저 이름들을 지적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동북쪽방향의 고지들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쪽에 있는 것이 선조암이고 그 앞에 보이는 것이 351고지와 월비산입니다."
그것은 짙은 안개에 가리워 전혀 보이지 않는 대상물들이었다. 부대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잘 보이지 않았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가리키는 것이 대단히 정확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안개 속에서도 최전연의 지형지물들을 손금보듯이 죄다 알아보시는 것일가?"
그러한 심정은 부대장만이 아니었다. 동행한 일군들도 까치봉 전후방의 모든 지형지물들을 너무도 상세히 알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에게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일군들의 이러한 심정을 헤아려 보듯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나는 안경을 끼고 보니까 다 보입니다. 동무들도 안경을 끼면 다 보일 것입니다."라고 소탈하게 농담을 하였다.
부대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서 까치봉에 오기는 처음이어서 이곳 정황을 상세히 보고하려고 하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어찌나 잘 알고 있는지 자기가 미처 모르는 것이 있을 것 같아 말을 삼가하고 조심스러워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몇 해전 겨울 어느 날 인민군대의 해당 일군들과 한 무명고지에 대하여 말할 때도 그러하였다. 일군들은 해발고가 수십 미터밖에 안 되는 그 고지를 군사적 견지에서는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몇 해만 있으면 고지의 면모를 잃게 되는데도 그곳에 자리잡고있는 화강석 광산의 채광을 묵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 사실을 알고는 대뜸 그 고지를 없애면 4∼5km 더 들어와서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일군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곳을 현지에서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곳 지형조건을 손금보듯이 환히 꿰뚫고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도 위에서만은 절대로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없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 일군들은 그것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1996년 12월 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카프" 작가편 제4-7부를 보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치하하신 다음 일부 장면에 고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주인공이 간도에 갔다가 쪽배를 타고 러시아로 갈 때 노래 〈이부슈까〉의 선율이 나오는데 그것은 분위기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기성곡 선정을 잘못하였다고, 그때가 1930년대인데 당시의 소만국경에서는 "이부슈까"의 정서가 나올 수 없다고, 그 장면에 그런 노래를 넣은 것은 순전히 멋을 따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명철한 지적이었다.
의로운 창작의 뜻을 품은 주인공 이찬이 간도에 가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다시 소련으로 가는 길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마지막 한가닥 희망을 안고 정처없이 떠나는 울분의 길이였다.
이러한 주인공의 심리에 흐느적거리는 수양버들을 노래한 "이부슈까"의 선율이 맞을 리 없었다. 더욱이 당시로 말하면 일제의 소만국경 침입사건으로 하여 정세가 매우 긴장하였다. 이런 때 소만국경 지대에 있는 주인공의 심리를 "이부슈까(수양버들)" 노래선율로 돋구려고 했으니 잘못도 큰 잘못이었다. 그러나 연출가와 영화음악전문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창작가, 예술인들과 지도일군들이 영화를 창작 완성하면서 이 장면의 음악만도 수없이 들었지만 장면의 생활정서와 주인공의 심리에 음악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장면의 생활과 주인공의 심리, "이부슈까"의 노래선율이 풍기는 정서와 소만국경에 조성된 긴장한 정세까지 종합, 분석하고 음악이 장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순간에 포착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또한 영화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본 놈들이 식당에 가서 고전음악을 틀어놓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엇을 보여주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본 놈들이 그렇게 유식한 고전음악 감상자들은 아니다, 그런 장면에 음악을 넣으려면 썩어빠진 시대의 케케묵은 음악을 넣어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었다. 전쟁과 약탈, 살인을 일삼는 침략자들과 고상한 감정과 지성은 성격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가르치심이었다.
이렇게 되여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중국 동북지방에서 소만국경으로 쪽배를 타고 가는 장면의 노래는 "이부슈까"대신 러시아 원무곡 "쏘브까만주리"로 바뀌었고 식당에서 일제 놈들이 듣는 음악은 케케묵은 낡은 노래의 야생적인 선율로 바뀌었다.
세계 역사에는 위대한 철학자, 정치가, 군사가로 자칭하는 인물들은 많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처럼 모든 분야에 걸쳐서 박식하고 정력적인 영도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민중의 지도자는 없었다. 민중에 대한 뜨거운 헌신과 정력적인 영도로 일관된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혁명 영도야말로 북한을 강성국가 건설로 추동한 강력한 힘이자 원동력이었으며, 조국통일과 세계 자주화 운동의 새 지평을 얼어낸 위대한 추동력이었다.
3.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덕성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또한 민중에 대하여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헌신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평소에도 "인민들이 좋아하오?", "인민들이 뭐라고 하겠소?"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자신의 좌우명을 "나는 근로하는 인민의 심부름꾼이다. 인민들이 바란다면 돌 위에도 꽃을 피워야 한다"고 하였다.
1975년 7월 1일 마식령산맥에 있는 검덕광산에서 있은 일이다. 검덕광산은 북한의 대표적인 납, 아연 광산이다.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검덕광산을 찾아 현지지도를 하였는데 수백 미터 수직 깊이의 4.5갱에 직접 들어가 보자고 하였다. 현지 일군들은 정비도 잘 되지 않아 복잡하고 석수까지 흐르는 곳이라 반대를 하였다. 그러자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우리의 귀중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곳이라도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며 광부들이 쓰는 안전모를 쓰고 막장에 들어갔다. 광부들은 자신들을 보기 위해 5km에 달하는 긴 막장에 들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광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속보판을 보게 되었다. 속보판에는 집에도 나가지 않고 막장에서 침식을 하며 일하는 광부들의 모범 사례가 소개되어 있었다. 일부 열성적인 광부들이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막장에 아예 눌러 살고 있었고 이들을 위해 통풍장치에 식당, 영사실, 학습실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이런 내막을 듣더니 "갱 안에서 자면서 일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막장에서 전투를 벌리는 것도 바로 노동계급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광부들을 아껴야 합니다. 공기가 나쁜 막장에서 재우지 말고 꼭 밖에 나가서 휴식하도록 하시오."라고 이야기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막장 밖에 나와서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우리는 땅속의 보물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당과 혁명의 가장 귀중한 보배들인 우리 노동계급의 건강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무슨 일을 하나 하더라도 민중을 중심에 놓고 판단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검덕광산 광부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일을 하여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항상 책임지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1974년 1월에 있은 일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신인배우가 문제를 일으켜 건설현장에 나가 노동단련을 받고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담당 일꾼에게 전화를 걸어 그 배우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일꾼은 이제 자기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그 동무가 건설현장에 나가서 일한 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일년 반이 됩니다"고 답하였다.
며칠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담당 일꾼에게 또 전화를 걸어 그 배우의 생활을 물었다. 역시 대답은 조직생활을 성실히 하며 노동에서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그가 노동에 참가한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물으니 일년 반이 된다고 답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1년 반이 좀 넘은 것 같은데"라고 하였다. 정확히는 1년 반에서 며칠이 더 지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현지지도에서 돌아오는 밤늦은 길에 그 배우가 일하는 건설현장을 돌아보게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그 배우를 불러 직접 만나보고 고무해 준 후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노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벌써 두 달 전부터 무용배우의 생활을 알아보았습니다. 모두 사실대로 일을 잘한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잘한다는 말뿐이지 그를 회복시켜주자고 제기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왜 이렇소? 인간성도 없고 인정미도 없단 말입니다. 친자식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 동무는 무대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은 했을 것입니다. 당 일꾼인 동무들이 그의 이런 마음을 알고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이름 없는 신인배우의 운명에 대해 얼마나 걱정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이 배우는 그 후 오래지않아 복귀하여 훌륭한 배우가 되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겸손하고 소박하며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틀과 격식을 차리지 않고 소탈하게 민중들과 허물없이 어울려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평소에 양복을 입지 않고 "인민복"을 즐겨 입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연설이나 논문에서도 딱딱한 문어체를 쓰지 않고 알기 쉬운 민중적인 표현들만 사용하였다. 자기 지식을 뽐내려는 지식인들이 온갖 현학적인 표현들을 늘어놓는 것과 대비된다.
예를 들어 "목에 칼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진짜 인간의 자존심이며 혁명가의 자존심입니다", "가식과 요술에 이골이 나면 인정까지도 말라버리는 것 같습니다. 표리부동하게 행동하는 그의 버릇을 고쳐주자면 여간 어렵지 않겠지만 혁명을 같이하자고 결심한 이상 끝까지 이끌어주어 그를 사람이 되게 만들어주어야 하겠습니다" 같은 표현들은 술술 읽히면서 한 번만 봐도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된다.
한편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지닌 겸손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67년 7월 어느 날 있은 일이다. 덕성군의 한 협동농장 책임 기사가 화물차를 외통길에 세우고 석탄을 내리고 있었다. 길이 좁아 차 한 대만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었지만 점심시간이라 차들이 다니지 않았기에 재빨리 일을 해치울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때 한 승용차가 길에 들어섰다. 외통길인지 몰랐는지 화물차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멈췄다. 차안의 젊은 간부는 문건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고 승용차 운전사만 내려서 중요한 일이 있어 가는데 길을 피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책임 기사는 흔쾌히 화물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이 때 승용차의 젊은 간부가 내려 무슨 일인지 물어보더니 아무리 바쁘다고 화물차에게 길을 비키라면 안 된다, 길을 비켜야 한다면 작은 차가 비켜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용차를 후진하려면 밭과 낭떠러지 사이의 좁은 길로 상당히 가야 하기에 위험했다. 책임 기사는 오르막길로 승용차를 후진하는 것은 위험하니 화물차가 후진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젊은 간부는 저렇게 큰 차가 짐을 가득 싣고 좁은 길에서 후진해서는 안 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 젊은 간부가 갑자기 길옆에 다가가 낭떠러지를 살펴보더니 길이 험한데 후진하지 말고 여기 길을 재빨리 내는 게 어떻겠냐고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주위에 큰돌들이 많으니 길옆 바위 사이에 돌을 채우면 그 위로 차가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운전사와 책임 기사도 좋다며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뙤약볕 아래에서 한참 시간이 흘러 드디어 차 한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 완성되었다. 젊은 간부는 승용차 운전사에게 차를 몰아보라고 하고는 차 앞에서 바퀴를 살피며 방향을 잡아주었다. 승용차가 화물차 옆을 지나가자 젊은 간부는 책임 기사의 손을 잡으며 시간이 없어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가니 널리 양해해달라고 하고 차에 올라탔다.
책임 기사는 승용차 운전사와 인사를 나누며 귓속말로 저분은 어디 있는 간부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운전사는 빙긋 웃으며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라고 말해주고는 떠나갔다. 책임 기사는 방금 까지 자신과 땀흘려 돌을 나른 사람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임을 알고 너무 놀라 멍하니 떠나가는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민중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며 소탈한 모습을 보여준 사례는 이 밖에도 많이 있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성품을 가져 자신의 동상이나 기념탑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서거하고 북한 주민들이 애도를 하고자 해도 동상 하나 없어서 김일성 주석 동상 앞에서 애도를 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2002년 10월 8일에 있은 일이다. 이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된 지 5돌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이른 새벽부터 진눈깨비가 날리는 북방의 대홍단군 홍남농장 현지지도를 하였다. 홍남농장 감자밭을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감자수확기를 살펴보며 감자농사 정형을 알아보고 농업 과학화에 대한 지도를 하였다.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자 일꾼들은 밭머리에 감자를 구워놓았으니 잠시 휴식시간을 보내자고 요청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감자 굽는 곳으로 가서는 한쪽에서 장작불 속에 감자를 묻고 다른 한쪽에서 불에 달군 돌 위에 감자를 올려놓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직접 감자를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날씨가 추운데 술이 있으면 한잔씩 부어주라고 일렀다.
술잔이 돌자 한 일꾼이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당 총비서로 추대된 5돌이 되는 날임에도 허물없이 자신들과 함께 감자를 구우며 현지지도를 하는 모습에 목이 메었다. 그는 구운 감자로 뜻깊은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건강을 축원하는 축배를 들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은 자신의 당 총비서 추대 5돌을 농민들과 감자 몇 개로 보내며 다시 현지지도를 떠나갔다.
이처럼 자신의 기념일 조차도 현지지도를 다니시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모습에서 겸손함과 헌신성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소개한 일화들만으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사상이론적 예지와 정력적인 영도,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덕성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최고영도자가 계셨기에 북한은 일심단결, 혼연일체의 대단결을 이룩하고 선군 혁명의 기치높이 자주위업의 새 승리를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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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김정일의 요리사였던 일본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증언을 하는데 김정일국방위원장 알고보면 줴기밥이랑 쪽잠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여~!!! ㅡㅡ;;;;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김정일국방위원장의 별장사진들도 후지모토 겐지가 직접 사진으로 찍어서 공개되었는뎅~!!!! ㅡㅡ;;;;;; 무슨말을 하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