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5권 23. 왕소년을 아동단에 인입하기까지 - 최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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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정 작성일2012-07-08 07:07 조회1,7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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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년을 아동단에 인입하기까지
최 광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아동단은 공청에서 지도하였다. 아동단지도사업은 공청이 혁명조직으로부터 위임받은 가장 영예롭고도 책임적인 과업의 하나였다.
공청에서는 혁명조직의 지도밑에 유격근거지에서는 물론 적통치구역에도 도처에 아동단을 조직하고 광범한 조중소년들을 앞날의 공청원으로 교양육성하였다.
1933년 3월, 왕청현 요영구의 소왕청 마촌에서 진행된 공청일군회의에서 청년들에게 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말씀이 계신 후 나는 공청조직의 위임을 받고 적통치구역인 라자구에 들어가 아동단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때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더우기 일제놈들의 경계가 심한 적통치구역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있어서 이 일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공청조직의 구체적인 지도와 동지들의 따뜻한 방조가 있음으로 하여 자신심을 가지고 이 사업을 수행할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그때 왕동무라는 한 중국소년을 아동단에 인입하던 한가지 이야기만을 하려고 한다.
적통치구역에서의 아동단사업은 유격근거지에서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맡은 라자구에서는 지역별로 분대가 조직되여있었는데 나는 분대장과만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현아동국에서나 구공청에서 과업이 제시되면 나는 분대장들을 모이게 하는것이 아니라 각 지역을돌아다니면서 분대장들에게 개별적으로 과업을 주었다. 회의도 분대별로만 소집하였고 입단문제도 아동국장의 참가밑에 분대들에서 취급하였다.
사업체계가 이렇게 되여있는데다 우리 구역은 라자구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있었기때문에 나는 참으로 바빴다. 나는 집에 붙어있을 사이가 없이 계속 분대들을 돌보면서 사업분공을 하고 회의를 지도하면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내가 라자구로 간지 수개월후인 1934년초 현아동국에서와 구공청에서는 중국아동들을 광범히 입단시키라는 과업을 제시하였다. 그때까지는 라자구아동단에도 중국소년이 없었다. 그것은 조선소년들이 중국소년들속에 들어가 공작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당시의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이 과업을 수행하자면 우선 중국소년 한두명을 잘 교양하여 입단시킨 후 그들과 함께 광범한 중국소년들과의 사업을 진행하여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중국소년이라면 한사람도 놓치지 않고 세심히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때 사도하자에 있는 구공청위원회로 자주 다녔는데 사도하자를 고개 하나 사이에 둔 길가에 허줄한 중국농가가 한채 있었다.
이 집곁을 자주 지나다니면서 보니 열네댓살가량 되여보이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근면한 그의 모습과 옷은 비록 람루하지만 어딘가 령리해보이는 그의 얼굴이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어느날 나는 소년의 집에 일부러 들려서 물 한그릇을 청하였다. 소년이 물을 떠가지고 나왔다. 나는 소년과 인사를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한참동안 나누다가 헤여졌다.
이런 일이 몇번 거듭되는 가운데 나는 소년과 친하게 되였으며 그의 아버지와도 어지간히 낯을 익히게 되였다. 그의 성은 왕가였다.
어느날 나는 왕동무를 통해서 자기네가 이웃에 살고있는 지주의 소작살이를 하면서 해마다 모진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것을 몹시 한탄하는것이였다.
불행한 왕동무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빼앗긴 조국땅에서 허덕이고있을 수많은 소년들의 모습이 눈앞에 방불하여 가슴이 쓰려옴을 금할수 없었다. 이날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왕동무를 훌륭한 아동단원으로, 참된 혁명의 전사로 이끌어주리라 굳게 결심하였다.
나는 그후부터 더욱 자주 왕동무한테 들리면서 우리가 왜 가난하게 사는가 하는 생활에서 가까운 문제로부터 깨우쳐주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왕동무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차츰 우리가 가난한것이 《팔자》때문이 아니라 일제와 지주, 자본가놈들때문이라는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내가 왕동무와 알게 된지 며칠이 못되여 라자구시내와 그 주변일대의 빈곤한 집소년들은 거의 모두 중국인자본가가 경영하는 양주공장에 들어가 계절로동을 하게 되였다. 양주공장주인은 많은 누룩을 만들어두었다가 이듬해 겨울에 쓰기 위해 해마다 이맘때면 계절로동으로 값싼 소년로동자들을 채용하는것이였다.
왕동무도 이 공장의 소년로동자가 되였다. 수많은 소년들이 공장으로 들어간것만큼 우리도 공장으로 들어가 공작해야만 했다.
공장에 들어간 후에도 나는 일부러 왕동무와 같은 작업장소에서 일하면서 계속 그를 교양하였다.
우리들의 로동은 고되였다. 환기장치도 없는 무덥고 어두운 방안에서 온종일 매돌을 돌리고나면 집으로 돌아갈 기운조차 없었다.
게다가 감독놈은 제꺽하면 주먹으로,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감독놈이 연약한 소년들의 따귀와 잔등을 후려갈기기를 례사로 할 때 우리의 눈에서는 불이 일어났다. 그놈을 당장 때려눕히고싶었으나 참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 위로해주는 한편 그들에게 고르롭지 못한 사회제도의 모순에 대하여 이야기해주기를 잊지 않았다.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의 공동의 원쑤인 일제놈들과 싸워 도처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듭하고계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대한 이야기며 유격근거지에서의 인민들의 생활과 특히는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자유롭게 공부하고있는 사실에 대하여 가만가만 이야기하여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장주놈은 하루에 30전씩 주던 임금을 앞으로는 술로 내주겠다고 광고하였다.
이때부터 소년들은 저녁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거리로 흩어져나와 술을 돈과 바꿔서 쌀을 사야만 했다. 그런데 더우기 술을 제값에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소년들은 첫 하루이틀은 제값이 아니고는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벌어 그날 사는 형편이라 3일째부터는 절반값을 받고라도 팔아야만 했다.
공장주놈의 이 부당한 처사로 말미암아 생활에 치명적타격을 받게 된 소년로동자들속에서는 불안의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갔다. 바로 이런 때 동맹파업을 조직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은 우리들은 그 준비사업을 추진시켰다.
파업을 계기로 왕동무를 비롯한 소년로동자들은 더욱 각성할것이며 단결하여 끝까지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되리라 생각하니 새로운 힘이 용솟음쳤다.
(이번에 왕동무가 훌륭히 싸워주었으면 참 좋으련만.)
나는 왕동무를 만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에게 파업에 대한 계획을 알려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어느날 저녁, 그날도 나는 동맹파업이며 왕동무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집을 향하여 거리를 걷고있었다.
《술 안 사겠어요? 술이요.》
문득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동무였다. 나는 그한테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병에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테냐? 어서 돌아가자.》
내 말에 왕동무는 서글퍼 대답하였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당장 래일 먹을 쌀을 사야 하겠어.》
《그럼 이것을 먼저 써라.》
나는 방금 술값으로 받아넣었던 돈을 왕동무의 손에 쥐여주면서 재삼 돌아가자고 권고하였다.
《돈으로 내줄게지 왜 술로 내주어가지고 이 고생이람.》
왕동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왕동무와 같이 걸으면서 공장주놈이 술을 내주는 리면에 숨어있는 악랄한 착취의 본질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왕동무, 지주나 자본가들이란 바로 이렇게 우리의 피를 빨고 기름을 짜서 배를 불리는 짐승같은 놈들이란다. 우리들은 놈들이 임금을 올려주고 더는 임금을 술로 내주지 못하도록 들고일어나 싸워야 해. 알겠니?》
《들고일어나면 임금을 올려줄가?》
왕동무는 희망과 의심으로 뒤엉킨 눈빛으로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미 우리가 준비하고있는 동맹파업에 대한 자세한 계획을 알려주면서 우리들이 끝까지 싸우기만 하면 꼭 승리할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나도 싸울테야.》
왕동무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나는 그의 손을 꼭 쥐여주었다.
드디여 우리의 파업은 단행되였다. 300여명에 가까운 소년로동자들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게 되자 공장은 멎고말았다.
하루이틀 긴장한 투쟁의 나날이 흘러갔다. 급해맞은 공장주놈은 경찰놈들을 끌어들여 당장 출근하지 않으면 해고시킨다고 위협공갈하는 한편 앞잡이들을 내세워가지고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감언리설로 의지가 약한 소년들을 꾀여내려고 미친듯이 날뛰였다.
이때 나는 만일을 념려하여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고 공장가까이에 있는 동무들의 집으로 숙소를 옮겨가며 낮에는 몇몇 동무들과 함께 으슥한 길목에서 망을 보았다. 혹시 공장으로 나오는 소년이 있으면 설복하여 돌려보내려는것이였다.
파업을 시작한지 3일째되는 아침이였다.
공장주놈의 꾀임에 넘어가 공장으로 나오는 몇몇 중국소년들을 잘 설복하여 방금 돌려보낸 때였다.
멀리서 공장을 향해 맥없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또 한 소년이 있었다.
(누구일가?)
우리는 긴장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뜻밖에도 왕동무가 아닌가, 나는 눈앞이 아뜩하였다. 그를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해온 지난날의 모든것이 한꺼번에 눈앞에서 산산쪼각이 나서 허물어지는것 같았다.
《왕동무, 어떻게 된 일이요?》
그를 불러세우는 나의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참을수 없는 노여움이 깃들어있었다.
나를 보자 흠칫 놀라며 말을 못하고 못박힌듯 서있던 왕동무는 황황히 달려와 내 가슴에 얼굴을 콱 파묻으며 《아버지가》하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되뇌이는 순간 나는 큰 방망이로 골을 얻어맞는것 같은감을 느꼈다. 더 묻지 않고도 모든것을 짐작할수 없었다.
한평생을 부지런히 일하는것밖에 모르고 늙어온 왕동무의 아버지는 파업이라는것을 도저히 리해할수 없었다. 오직 하나 기둥처럼 믿고 살아가는 아들이 나가다니는 사이에 그만 나쁜 물이 들어 일을 싫어하게 된줄로만 생각한 늙은 아버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하여 왕동무더러 게으르면 못쓴다고 타이르기 시작한 아버지는 아들이 3일씩이나 공장에 안나가게 되자 나중에는 된욕을 해가면서 억다짐으로 쫓아보내다싶이 했던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자신을 책망하였다. 간고한 투쟁의 시각에 왕동무를 도와주지 못한 나를 탓하였다.
나는 그달음으로 왕동무와 함께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왕동무의 아버지에게 공장주놈의 악독한 착취상을 폭로하고 우리의 투쟁의 정당성을 열심히 해설하면서 며칠만 더 참으면 꼭 승리할수 있다고 설복하였다.
그러나 왕동무의 아버지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왔다.
이때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왕동무의 웃옷을 벗기였다. 그의 등에는 감독놈에게 얻어맞은 자리가 이곳저곳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아버지, 이 왕동무의 등을 좀 보십시오. 감독놈에게 매를 맞아 이렇게 되였습니다. 그놈들은 우리를 이렇게 때리며 일을 시키고도 또 임금을 터무니없이 잘라먹으려 드는데 우리는 참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
아들의 등에 엉킨 상처를 보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와락 아들을 껴안았다.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의 북두갈구리같은 거친 손은 와들와들 떨리고있었다.
《어느 놈이 내 아들에게 이런 짓을 했느냐. 이 짐승만도 못한놈들.》
이렇게 부르짖는 늙은 아버지의 두눈은 분노로 하여 이글거렸다.
《내 아들아, 이 늙은 애비가 마음아파할가봐 이런 말을 안했었구나. 이 녀석아, 다시는 나가지 말아. 내가 굶어도 너를 절대로 그놈들한테 안보낼테다.》
다시금 아들을 힘껏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의 주름잡힌 얼굴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흘리는 눈물이였다. 왕동무도 울었다.
이윽고 진정한 아버지는 나의 손목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임자 말이 옳았네. 아무것도 모르는 이 늙은것이 한짓을 탓하지 말아주게.》
나는 우리의 투쟁을 리해해준 가난하고 소박한 중국로인인 왕동무의 아버지가 너무나 고마와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파업을 일으킨지 4일째 되던 날, 소년로동자들의 단결된 위력앞에 공장주놈은 드디여 임금을 5전 올리고 술로 주던 임금을 돈으로 준다는 광고를 내붙이고야말았다.
우리는 서로 붙안고 우리의 첫 승리를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첫 시련을 통하여 훌륭히 각성하고 단련된 왕동무는 드디여 라자구에서 첫 중국인아동단원으로 되였다. 그리고 그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수많은 중국인소년들이 조직에 들어왔다.
그후 왕동무는 라자구아동단구위원으로 선거되여 훌륭히 활동하였으며 공청원으로, 혁명투사로 씩씩하게 자라났다.
최 광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아동단은 공청에서 지도하였다. 아동단지도사업은 공청이 혁명조직으로부터 위임받은 가장 영예롭고도 책임적인 과업의 하나였다.
공청에서는 혁명조직의 지도밑에 유격근거지에서는 물론 적통치구역에도 도처에 아동단을 조직하고 광범한 조중소년들을 앞날의 공청원으로 교양육성하였다.
1933년 3월, 왕청현 요영구의 소왕청 마촌에서 진행된 공청일군회의에서 청년들에게 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말씀이 계신 후 나는 공청조직의 위임을 받고 적통치구역인 라자구에 들어가 아동단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때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더우기 일제놈들의 경계가 심한 적통치구역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있어서 이 일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공청조직의 구체적인 지도와 동지들의 따뜻한 방조가 있음으로 하여 자신심을 가지고 이 사업을 수행할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그때 왕동무라는 한 중국소년을 아동단에 인입하던 한가지 이야기만을 하려고 한다.
적통치구역에서의 아동단사업은 유격근거지에서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맡은 라자구에서는 지역별로 분대가 조직되여있었는데 나는 분대장과만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현아동국에서나 구공청에서 과업이 제시되면 나는 분대장들을 모이게 하는것이 아니라 각 지역을돌아다니면서 분대장들에게 개별적으로 과업을 주었다. 회의도 분대별로만 소집하였고 입단문제도 아동국장의 참가밑에 분대들에서 취급하였다.
사업체계가 이렇게 되여있는데다 우리 구역은 라자구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있었기때문에 나는 참으로 바빴다. 나는 집에 붙어있을 사이가 없이 계속 분대들을 돌보면서 사업분공을 하고 회의를 지도하면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내가 라자구로 간지 수개월후인 1934년초 현아동국에서와 구공청에서는 중국아동들을 광범히 입단시키라는 과업을 제시하였다. 그때까지는 라자구아동단에도 중국소년이 없었다. 그것은 조선소년들이 중국소년들속에 들어가 공작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당시의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이 과업을 수행하자면 우선 중국소년 한두명을 잘 교양하여 입단시킨 후 그들과 함께 광범한 중국소년들과의 사업을 진행하여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중국소년이라면 한사람도 놓치지 않고 세심히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때 사도하자에 있는 구공청위원회로 자주 다녔는데 사도하자를 고개 하나 사이에 둔 길가에 허줄한 중국농가가 한채 있었다.
이 집곁을 자주 지나다니면서 보니 열네댓살가량 되여보이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근면한 그의 모습과 옷은 비록 람루하지만 어딘가 령리해보이는 그의 얼굴이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어느날 나는 소년의 집에 일부러 들려서 물 한그릇을 청하였다. 소년이 물을 떠가지고 나왔다. 나는 소년과 인사를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한참동안 나누다가 헤여졌다.
이런 일이 몇번 거듭되는 가운데 나는 소년과 친하게 되였으며 그의 아버지와도 어지간히 낯을 익히게 되였다. 그의 성은 왕가였다.
어느날 나는 왕동무를 통해서 자기네가 이웃에 살고있는 지주의 소작살이를 하면서 해마다 모진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것을 몹시 한탄하는것이였다.
불행한 왕동무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빼앗긴 조국땅에서 허덕이고있을 수많은 소년들의 모습이 눈앞에 방불하여 가슴이 쓰려옴을 금할수 없었다. 이날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왕동무를 훌륭한 아동단원으로, 참된 혁명의 전사로 이끌어주리라 굳게 결심하였다.
나는 그후부터 더욱 자주 왕동무한테 들리면서 우리가 왜 가난하게 사는가 하는 생활에서 가까운 문제로부터 깨우쳐주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왕동무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차츰 우리가 가난한것이 《팔자》때문이 아니라 일제와 지주, 자본가놈들때문이라는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내가 왕동무와 알게 된지 며칠이 못되여 라자구시내와 그 주변일대의 빈곤한 집소년들은 거의 모두 중국인자본가가 경영하는 양주공장에 들어가 계절로동을 하게 되였다. 양주공장주인은 많은 누룩을 만들어두었다가 이듬해 겨울에 쓰기 위해 해마다 이맘때면 계절로동으로 값싼 소년로동자들을 채용하는것이였다.
왕동무도 이 공장의 소년로동자가 되였다. 수많은 소년들이 공장으로 들어간것만큼 우리도 공장으로 들어가 공작해야만 했다.
공장에 들어간 후에도 나는 일부러 왕동무와 같은 작업장소에서 일하면서 계속 그를 교양하였다.
우리들의 로동은 고되였다. 환기장치도 없는 무덥고 어두운 방안에서 온종일 매돌을 돌리고나면 집으로 돌아갈 기운조차 없었다.
게다가 감독놈은 제꺽하면 주먹으로,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감독놈이 연약한 소년들의 따귀와 잔등을 후려갈기기를 례사로 할 때 우리의 눈에서는 불이 일어났다. 그놈을 당장 때려눕히고싶었으나 참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 위로해주는 한편 그들에게 고르롭지 못한 사회제도의 모순에 대하여 이야기해주기를 잊지 않았다.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의 공동의 원쑤인 일제놈들과 싸워 도처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듭하고계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대한 이야기며 유격근거지에서의 인민들의 생활과 특히는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자유롭게 공부하고있는 사실에 대하여 가만가만 이야기하여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장주놈은 하루에 30전씩 주던 임금을 앞으로는 술로 내주겠다고 광고하였다.
이때부터 소년들은 저녁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거리로 흩어져나와 술을 돈과 바꿔서 쌀을 사야만 했다. 그런데 더우기 술을 제값에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소년들은 첫 하루이틀은 제값이 아니고는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벌어 그날 사는 형편이라 3일째부터는 절반값을 받고라도 팔아야만 했다.
공장주놈의 이 부당한 처사로 말미암아 생활에 치명적타격을 받게 된 소년로동자들속에서는 불안의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갔다. 바로 이런 때 동맹파업을 조직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은 우리들은 그 준비사업을 추진시켰다.
파업을 계기로 왕동무를 비롯한 소년로동자들은 더욱 각성할것이며 단결하여 끝까지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되리라 생각하니 새로운 힘이 용솟음쳤다.
(이번에 왕동무가 훌륭히 싸워주었으면 참 좋으련만.)
나는 왕동무를 만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에게 파업에 대한 계획을 알려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어느날 저녁, 그날도 나는 동맹파업이며 왕동무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집을 향하여 거리를 걷고있었다.
《술 안 사겠어요? 술이요.》
문득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동무였다. 나는 그한테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병에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테냐? 어서 돌아가자.》
내 말에 왕동무는 서글퍼 대답하였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당장 래일 먹을 쌀을 사야 하겠어.》
《그럼 이것을 먼저 써라.》
나는 방금 술값으로 받아넣었던 돈을 왕동무의 손에 쥐여주면서 재삼 돌아가자고 권고하였다.
《돈으로 내줄게지 왜 술로 내주어가지고 이 고생이람.》
왕동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왕동무와 같이 걸으면서 공장주놈이 술을 내주는 리면에 숨어있는 악랄한 착취의 본질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왕동무, 지주나 자본가들이란 바로 이렇게 우리의 피를 빨고 기름을 짜서 배를 불리는 짐승같은 놈들이란다. 우리들은 놈들이 임금을 올려주고 더는 임금을 술로 내주지 못하도록 들고일어나 싸워야 해. 알겠니?》
《들고일어나면 임금을 올려줄가?》
왕동무는 희망과 의심으로 뒤엉킨 눈빛으로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미 우리가 준비하고있는 동맹파업에 대한 자세한 계획을 알려주면서 우리들이 끝까지 싸우기만 하면 꼭 승리할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나도 싸울테야.》
왕동무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나는 그의 손을 꼭 쥐여주었다.
드디여 우리의 파업은 단행되였다. 300여명에 가까운 소년로동자들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게 되자 공장은 멎고말았다.
하루이틀 긴장한 투쟁의 나날이 흘러갔다. 급해맞은 공장주놈은 경찰놈들을 끌어들여 당장 출근하지 않으면 해고시킨다고 위협공갈하는 한편 앞잡이들을 내세워가지고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감언리설로 의지가 약한 소년들을 꾀여내려고 미친듯이 날뛰였다.
이때 나는 만일을 념려하여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고 공장가까이에 있는 동무들의 집으로 숙소를 옮겨가며 낮에는 몇몇 동무들과 함께 으슥한 길목에서 망을 보았다. 혹시 공장으로 나오는 소년이 있으면 설복하여 돌려보내려는것이였다.
파업을 시작한지 3일째되는 아침이였다.
공장주놈의 꾀임에 넘어가 공장으로 나오는 몇몇 중국소년들을 잘 설복하여 방금 돌려보낸 때였다.
멀리서 공장을 향해 맥없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또 한 소년이 있었다.
(누구일가?)
우리는 긴장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뜻밖에도 왕동무가 아닌가, 나는 눈앞이 아뜩하였다. 그를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해온 지난날의 모든것이 한꺼번에 눈앞에서 산산쪼각이 나서 허물어지는것 같았다.
《왕동무, 어떻게 된 일이요?》
그를 불러세우는 나의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참을수 없는 노여움이 깃들어있었다.
나를 보자 흠칫 놀라며 말을 못하고 못박힌듯 서있던 왕동무는 황황히 달려와 내 가슴에 얼굴을 콱 파묻으며 《아버지가》하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되뇌이는 순간 나는 큰 방망이로 골을 얻어맞는것 같은감을 느꼈다. 더 묻지 않고도 모든것을 짐작할수 없었다.
한평생을 부지런히 일하는것밖에 모르고 늙어온 왕동무의 아버지는 파업이라는것을 도저히 리해할수 없었다. 오직 하나 기둥처럼 믿고 살아가는 아들이 나가다니는 사이에 그만 나쁜 물이 들어 일을 싫어하게 된줄로만 생각한 늙은 아버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하여 왕동무더러 게으르면 못쓴다고 타이르기 시작한 아버지는 아들이 3일씩이나 공장에 안나가게 되자 나중에는 된욕을 해가면서 억다짐으로 쫓아보내다싶이 했던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자신을 책망하였다. 간고한 투쟁의 시각에 왕동무를 도와주지 못한 나를 탓하였다.
나는 그달음으로 왕동무와 함께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왕동무의 아버지에게 공장주놈의 악독한 착취상을 폭로하고 우리의 투쟁의 정당성을 열심히 해설하면서 며칠만 더 참으면 꼭 승리할수 있다고 설복하였다.
그러나 왕동무의 아버지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왔다.
이때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왕동무의 웃옷을 벗기였다. 그의 등에는 감독놈에게 얻어맞은 자리가 이곳저곳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아버지, 이 왕동무의 등을 좀 보십시오. 감독놈에게 매를 맞아 이렇게 되였습니다. 그놈들은 우리를 이렇게 때리며 일을 시키고도 또 임금을 터무니없이 잘라먹으려 드는데 우리는 참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
아들의 등에 엉킨 상처를 보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와락 아들을 껴안았다.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의 북두갈구리같은 거친 손은 와들와들 떨리고있었다.
《어느 놈이 내 아들에게 이런 짓을 했느냐. 이 짐승만도 못한놈들.》
이렇게 부르짖는 늙은 아버지의 두눈은 분노로 하여 이글거렸다.
《내 아들아, 이 늙은 애비가 마음아파할가봐 이런 말을 안했었구나. 이 녀석아, 다시는 나가지 말아. 내가 굶어도 너를 절대로 그놈들한테 안보낼테다.》
다시금 아들을 힘껏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의 주름잡힌 얼굴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흘리는 눈물이였다. 왕동무도 울었다.
이윽고 진정한 아버지는 나의 손목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임자 말이 옳았네. 아무것도 모르는 이 늙은것이 한짓을 탓하지 말아주게.》
나는 우리의 투쟁을 리해해준 가난하고 소박한 중국로인인 왕동무의 아버지가 너무나 고마와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파업을 일으킨지 4일째 되던 날, 소년로동자들의 단결된 위력앞에 공장주놈은 드디여 임금을 5전 올리고 술로 주던 임금을 돈으로 준다는 광고를 내붙이고야말았다.
우리는 서로 붙안고 우리의 첫 승리를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첫 시련을 통하여 훌륭히 각성하고 단련된 왕동무는 드디여 라자구에서 첫 중국인아동단원으로 되였다. 그리고 그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수많은 중국인소년들이 조직에 들어왔다.
그후 왕동무는 라자구아동단구위원으로 선거되여 훌륭히 활동하였으며 공청원으로, 혁명투사로 씩씩하게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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