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알 데이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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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승배 작성일2013-05-28 22:48 조회2,0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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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집에서 보냈다. 걷기도 하고. 범민련 노수희 부의장과 원진욱 사무처장의 2 심 판결을 보고 답답한 마음이다. 빈깡통, 빈병, 빈푸라스틱 물병을 주으며 생각한다. 쓰레기를 줍는 그 분을.... 개조하는 그 분의 사랑과 기도를.
오랫만에 고교 동창 박순철의 글을 읽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는 61년 서울대 수석입학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천재다. 고3때는 공부를 안하고 담배를 피며 다방을 드나들어 학교에서 퇴학까지 고려하다 그 천재성이 아까워 졸업을 시켰다는데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졸업후 동아일보에서 일하다 자유언론운동에 참여 퇴직을 당하고 문화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일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오늘 그의 글을 처음으로 접하고 여기 옮긴다.
"남의 글만 공짜로 읽기가 미안해 두세 달전 '내일신문'에 보냈던 글을 옮긴다. 이 글을 본 후배가 "박선배, 이드라섬에 갈 때 무슨 책을 가져갈 거에요?"하고 묻길래, "아, '도마복음'하고 '금강경'하고..." 우물우물했었다.
《주말을 여는 책》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드는 법’
책은 한 폭의 정겨운 풍경부터 보여준다. “그는 지금 식당 테라스 가장자리에 놓인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있다. 이 식당은 그리스의 이드라 섬, 카미니 마을에서 디미트리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아담한 식당이다. 그의 오른쪽 귀에는 야생 라벤더 꽃 한 송이가 꽂혀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무대다. 아테네에서 판사로 일하다 은퇴한 ‘그’와 젊은 날 어부, 교사, 웨이터로 일했던 그의 친구들은 바다 건너 펠로폰네소스 반도 뒤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떠들썩하게 이야기판을 벌이면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대서양을 건너 이곳을 찾아온 또 한 명의 노인 ‘나’는 그 옆, 식당 차양 아래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철학자처럼’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여행서 같은 경쾌한 즐거움이 흐른다. ‘에피쿠로스와 함께 떠난 여행’(‘Travels with Epicurus’)이라는 원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렇다. 청년 시절 이드라 섬을 찾은 적이 있었던 지은이는 일흔다섯 살의 노인이 돼 한 보따리의 철학 책들을 들고 이 섬을 다시 찾았다. 노년의 인생을 가장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다.
책 보따리의 주인공은 그리스의 철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에피쿠로스였다. 이것은 에피쿠로스=쾌락주의자 식의 통념으로는 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선정이었다. 물론 이런 세상의 인식은 오해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흔히 스토아학파와 대비되지만 이 고대 철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쾌락이 결코 아니었다. 정신적 평정, 아타락시아(ataraxia)였다.
이렇게 볼 때 노년이 인생의 절정이자 최상의 단계라는 에피쿠로스의 생각도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라 일생을 잘 살아온 늙은이”라고 믿었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는 신념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방황하지만, 늙은이는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행복을 즐긴다.”
바다, 배, 섬, 정박, 느긋한 행복··· 노인은 식당의 차양 아래 앉아 사색을 계속한다. 에피쿠로스의 진단이 옳다면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노년을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교양 철학 저술가로 소개된 지은이 대니얼 클라인은 그것이 수시로 흔들리는, 그리고 괴롭히는 갖가지 믿음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있다고 정리한다.
그런 믿음, 특히 요즘 세상의 인기 있는 믿음 가운데 하나가 ‘영원한 청춘’이라는 신화다. 그건 단순한 장수만이 아니다. 자신의 발전을 위한다는 구실로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야망을 채우려 애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놓고 막판 스퍼트의 기세로 달려가기도 한다.
여기에서 여전히 신선한 에피쿠로스의 충고가 들린다. 그는 단순한 즐거움을 찾으라고 말한다. 상투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행복은 결국 자유의 이야기가 된다. 클라인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본질을 철저한 실존주의적 자유에서 찾으면서 행복하게 살려면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드라 섬에서 노인들은 욕망이나 일로부터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간 그 자체로부터도 자유롭다. 가령 디미트리 식당의 어느 오후 풍경. 한쪽 창가에서 주인장의 아버지, 여든 살의 노인 이아노스가 묵주 비슷한 모습의 콤볼로이 구슬들을 손가락으로 굴리면서 어제 날짜 아테네 신문을 읽고 있다. 디미트리는 철학을 밥벌이로 하는 지은이에게 시간에 관한 강의를 한다.
“콤볼로이는 시간과 관련이 있지요. 그건 시간의 간격을 띄어주어 시간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해준답니다.” 젊은 시절을 뱃사람으로 보냈던 평범한 식당 주인의 입에서 시간에 관한 형이상학적 강의가 쏟아져 나와도 지은이는 놀라지 않는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스 말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가지 다른 개념의 단어가 있다. 시간의 양을 따지는 ‘크로노스’와 그 질을 말하는 ‘카이로스’가 그것이다. 부연하면 한 사람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시간, 즉 보편적 차원의 시간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시간이 카이로스다. 이드라 섬을 지배하는 시간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인 것이다.
지은이는 시간이 자동차의 속도가 아니라 나귀의 속도로 흐르는 이 섬에서 무엇보다 ‘음미’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는 지금 식당에 앉아 양고기 덩어리를 천천히 씹는 이유가 자신의 입속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틀니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천천히 씹어야 고기 한 조각 한 조각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법이다. “느림이라는 소스를 고기에 끼얹은 것”이다. 그것은 순간순간 인생의 맛을 최대한 음미하라는 에피쿠로스의 충고 그대로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디미트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내면에서 울리는 리듬에 따라 콤볼로이의 구슬을 한 알씩 굴린다오”라고 설명한다. “아버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인생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서양 건너의 바쁜 시간에 쫓겨 온 클라인은 시간을 붙잡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 “시간을 가지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문득 지난 달 찾았던 남해의 어느 섬이 생각난다. 아침상에 올랐던 도다리쑥국의 향긋한 식감. 사실 이드라 섬은 우리의 바다 위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섬이 결국 우리 마음의 섬이라면 그것은 내가 사는 변두리의 아파트 옆을 흐르는, 청계천의 초라한 복사판으로 개조된 개울 옆길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전쟁 공포의 피로감 속에서 에피쿠로스의 지혜가 모처럼 느긋한 위안을 준다.
이 글을 끝내면서 노년의 나도 느림과 음미가 온전히 우리 것이었던 역사의 옛 지점, 그 때의 정서가 유장하게 흐르는 시 한 수를 읊으며 여유를 부리고 싶어진다. 고려조 곽여라는 분의 시다. “평안한 모습이네, 소 탄 저 노인,/안개비 부연 속에/들길을 가네./저 물가 어디쯤에 집이 있는가./흐르는 냇물 위에/석양이 지네.”(정진권 역해, ‘한시를 읽는 즐거움’)
오랫만에 고교 동창 박순철의 글을 읽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는 61년 서울대 수석입학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천재다. 고3때는 공부를 안하고 담배를 피며 다방을 드나들어 학교에서 퇴학까지 고려하다 그 천재성이 아까워 졸업을 시켰다는데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졸업후 동아일보에서 일하다 자유언론운동에 참여 퇴직을 당하고 문화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일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오늘 그의 글을 처음으로 접하고 여기 옮긴다.
"남의 글만 공짜로 읽기가 미안해 두세 달전 '내일신문'에 보냈던 글을 옮긴다. 이 글을 본 후배가 "박선배, 이드라섬에 갈 때 무슨 책을 가져갈 거에요?"하고 묻길래, "아, '도마복음'하고 '금강경'하고..." 우물우물했었다.
《주말을 여는 책》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드는 법’
책은 한 폭의 정겨운 풍경부터 보여준다. “그는 지금 식당 테라스 가장자리에 놓인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있다. 이 식당은 그리스의 이드라 섬, 카미니 마을에서 디미트리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아담한 식당이다. 그의 오른쪽 귀에는 야생 라벤더 꽃 한 송이가 꽂혀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무대다. 아테네에서 판사로 일하다 은퇴한 ‘그’와 젊은 날 어부, 교사, 웨이터로 일했던 그의 친구들은 바다 건너 펠로폰네소스 반도 뒤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떠들썩하게 이야기판을 벌이면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대서양을 건너 이곳을 찾아온 또 한 명의 노인 ‘나’는 그 옆, 식당 차양 아래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철학자처럼’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여행서 같은 경쾌한 즐거움이 흐른다. ‘에피쿠로스와 함께 떠난 여행’(‘Travels with Epicurus’)이라는 원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렇다. 청년 시절 이드라 섬을 찾은 적이 있었던 지은이는 일흔다섯 살의 노인이 돼 한 보따리의 철학 책들을 들고 이 섬을 다시 찾았다. 노년의 인생을 가장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다.
책 보따리의 주인공은 그리스의 철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에피쿠로스였다. 이것은 에피쿠로스=쾌락주의자 식의 통념으로는 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선정이었다. 물론 이런 세상의 인식은 오해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흔히 스토아학파와 대비되지만 이 고대 철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쾌락이 결코 아니었다. 정신적 평정, 아타락시아(ataraxia)였다.
이렇게 볼 때 노년이 인생의 절정이자 최상의 단계라는 에피쿠로스의 생각도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라 일생을 잘 살아온 늙은이”라고 믿었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는 신념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방황하지만, 늙은이는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행복을 즐긴다.”
바다, 배, 섬, 정박, 느긋한 행복··· 노인은 식당의 차양 아래 앉아 사색을 계속한다. 에피쿠로스의 진단이 옳다면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노년을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교양 철학 저술가로 소개된 지은이 대니얼 클라인은 그것이 수시로 흔들리는, 그리고 괴롭히는 갖가지 믿음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있다고 정리한다.
그런 믿음, 특히 요즘 세상의 인기 있는 믿음 가운데 하나가 ‘영원한 청춘’이라는 신화다. 그건 단순한 장수만이 아니다. 자신의 발전을 위한다는 구실로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야망을 채우려 애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놓고 막판 스퍼트의 기세로 달려가기도 한다.
여기에서 여전히 신선한 에피쿠로스의 충고가 들린다. 그는 단순한 즐거움을 찾으라고 말한다. 상투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행복은 결국 자유의 이야기가 된다. 클라인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본질을 철저한 실존주의적 자유에서 찾으면서 행복하게 살려면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드라 섬에서 노인들은 욕망이나 일로부터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간 그 자체로부터도 자유롭다. 가령 디미트리 식당의 어느 오후 풍경. 한쪽 창가에서 주인장의 아버지, 여든 살의 노인 이아노스가 묵주 비슷한 모습의 콤볼로이 구슬들을 손가락으로 굴리면서 어제 날짜 아테네 신문을 읽고 있다. 디미트리는 철학을 밥벌이로 하는 지은이에게 시간에 관한 강의를 한다.
“콤볼로이는 시간과 관련이 있지요. 그건 시간의 간격을 띄어주어 시간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해준답니다.” 젊은 시절을 뱃사람으로 보냈던 평범한 식당 주인의 입에서 시간에 관한 형이상학적 강의가 쏟아져 나와도 지은이는 놀라지 않는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스 말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가지 다른 개념의 단어가 있다. 시간의 양을 따지는 ‘크로노스’와 그 질을 말하는 ‘카이로스’가 그것이다. 부연하면 한 사람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시간, 즉 보편적 차원의 시간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시간이 카이로스다. 이드라 섬을 지배하는 시간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인 것이다.
지은이는 시간이 자동차의 속도가 아니라 나귀의 속도로 흐르는 이 섬에서 무엇보다 ‘음미’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는 지금 식당에 앉아 양고기 덩어리를 천천히 씹는 이유가 자신의 입속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틀니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천천히 씹어야 고기 한 조각 한 조각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법이다. “느림이라는 소스를 고기에 끼얹은 것”이다. 그것은 순간순간 인생의 맛을 최대한 음미하라는 에피쿠로스의 충고 그대로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디미트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내면에서 울리는 리듬에 따라 콤볼로이의 구슬을 한 알씩 굴린다오”라고 설명한다. “아버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인생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서양 건너의 바쁜 시간에 쫓겨 온 클라인은 시간을 붙잡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 “시간을 가지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문득 지난 달 찾았던 남해의 어느 섬이 생각난다. 아침상에 올랐던 도다리쑥국의 향긋한 식감. 사실 이드라 섬은 우리의 바다 위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섬이 결국 우리 마음의 섬이라면 그것은 내가 사는 변두리의 아파트 옆을 흐르는, 청계천의 초라한 복사판으로 개조된 개울 옆길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전쟁 공포의 피로감 속에서 에피쿠로스의 지혜가 모처럼 느긋한 위안을 준다.
이 글을 끝내면서 노년의 나도 느림과 음미가 온전히 우리 것이었던 역사의 옛 지점, 그 때의 정서가 유장하게 흐르는 시 한 수를 읊으며 여유를 부리고 싶어진다. 고려조 곽여라는 분의 시다. “평안한 모습이네, 소 탄 저 노인,/안개비 부연 속에/들길을 가네./저 물가 어디쯤에 집이 있는가./흐르는 냇물 위에/석양이 지네.”(정진권 역해, ‘한시를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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