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민족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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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효탄 작성일2013-06-27 23:32 조회2,110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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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에 관한 글들이 많이 실린다. 나도 625에 관한 나의 옛 글을 다시 올려본다.
625의 민족사적 의의
625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연속이다!
1. 들어 가는 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이는 부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란다.
그런 마음으로 나도 내가 듣고, 보고, 읽고, 경험한 것을 두서없이 써 본다.
벌써 625가 있은 지 60년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 각 언론사, 특히 ‘연합뉴스”에서 특집으로 올리는 “625전쟁 60주년”이란 글을 보면서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여기 적어본다.
마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처럼 “천암함 46용사”라는 신문지상의 표현이 625 전해에 있었던 “육탄 10용사”를 연상시켜 고약한 마음이 든다. 참고[1949년 5월 21일 동아일보]
얼어붙었던 얼음도 녹아 물이 되어 흐르고, 삭막했던 나뭇가지들도 서로 다투며 싹을 틔우는 이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남북으로 흐르던 조그마한 시냇물이 마르고, 그나마 있던 물이 얼어 붇는 이상한 남북기류를 보면서 걱정되는 마음은 나만의 느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2. 역사를 가늠하는 잣대: 민족사관
사람이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데 눈과 귀는 아주 큰 일을 한다.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분석하여 정리하는 일은 머리가 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100년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듣고, 읽고, 보고, 경험하며 평가할 때 어떤 입장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다르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그런 까닭에 625라는 역사적 사실을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과 현존하는 [대한민국]史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史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그 설명에서 큰 차이가 있게 마련일 것 같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100년을 줄잡아 볼 때 나라와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한 세력과 외세의 힘을 업은 외세 앞잡이와의 싸움의 역사이었다.
3. 625를 잉태한 지난 100년: 민중의 나라를 향한 고난의 여정
3.1. 이조 말: 갑오동학농민전쟁시기
19세기 말 우리나라 사회상황은 혁명적 분위기였다. 수없이 일어나고 있던 이른바 “민란”이란 그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잘 이야기 해주고도 남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민중운동” 차원에서 볼 때오늘의 625와 관련해서 우리의 시선과 주의를 잡고 놓지 않는 사건은 1894년에 있었던 “갑오동학농민전쟁”이다.
백성이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역사를 만들고자 했던 우리민중의 염원이 발로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갑오동학농민전쟁이 외세의존적인 이조 관군과 외세(일제)의 개입이 없었다면 우리 민중의 힘으로 우리 근대사를 주체적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동방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이고 경제적으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된다.
3.2.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두 노선: 민족해방운동에 침전된 계급투쟁
이조 말기 폭발하고 있던 우리 사회 안의 계급적 갈등이 일제가 나라를 강점한 이후 무엇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큰 틀에서 전개되어야 하는 객관적 여건을 받아 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관계로 모든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들에는 계급모순이 민족모순안에 침전되어 있다. 이 모순이 항일운동기간 항일운동세력간에도 숨어 있었으며, 그러한 잠복된 모순이 세계 미소 양대 세력의 큰 영향을 받으며 진전되었다. 이처럼 항일운동 전 과정동안 계급적 갈등은 있어도 “민족자주독립”이라는 큰 기치아래 전 민족의 염원인 자주독립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은 경제적으로도 그렇지만 이론적인 면에서 더욱 어렵게 전개되어 왔다.
만주일대를 무대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과 상해를 비롯한 중국영역에서 있었던 외교를 통한 청원적 항일운동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그 두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운동은 이조 말 우리 사회의 계급적 갈등이 그대로 옮겨져 반영된 면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상해임정의 정통성을 이었 다는 “대한민국” 교과서에는 만주일대에서 전개된 피나는 무장항일투쟁은 짧막한 “청산리 전투”로 역사에 간략하게 서술되고 있다.
3.3. 1945년 8월 15일 이후: 잠복기를 벗어난 사회계급갈등의 폭발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을 계기로 상해와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세력들이 세계 양대 세력의 영향권이 미치는 남과 북지역으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국내에서 활동하던 세력들이 합세하여 두 지역에서 친일청산작업을 하게 되었다. 남과 북으로 들어 온 미국과 소련의 세력은 두 곳의 자치적 단체들을 대하는 입장이 상이했다. 남에서는 미군정이 모든 것을 좌우했지만 북에서 소련군의 입장은 우리 자치단체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행정을 했다 한다. 백범 김구선생께서 방북기간에 평양에서 만났던 소련군 대표는 “외국사람은 우리 민족문제 의논하는데 필요없으니 나가라”고 하자 아무말 없이 뒷문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는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참고: KBS 동영상 김구 평양을 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진단된 분단 원인은 외세라는 말이 일리 있는 것처럼 들리나 부족한 점 없지않아 있다.
외세가 분단의 원인이라면 이 땅의 역사 주체인 우리는 당시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이제 내적 요인도 찾아봐야 한다.
먼저 내적 요인으로 “민족독립운동”이 통일된 조직이 없었던 이유를 꼽을 수 있다. 다음은 강대국들의 본성을 과학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들의 “민족자결권”이라는 얄팍한 약속을 너무 쉽게 믿었던 우리 나라 지식인들의 능력 또한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우리 독립운동단체들의 힘이 분산되어 있는 객관적 요인들을 알고있던 강대국들은 아예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자기들 이익에 합당한 세계 전략에 따라 우리나라를 분단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말을 간추리면 먼저 우리 항일독립투쟁을 통일적으로 이끌어 오지 못한 여러 갈래의 운동세력들에게 일차적인 분단의 중요한 책임이 있다. 여기에 그간 침전되고 억눌렸던 계급갈등이 큰 작용을 했다고 본다.
그 다음은 외부 요인으로 자기나라 이익만을 차리는 강대국들, 특히 미국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4. 미군정과 한민당: 친일잔재 집결
“한민당”은 재빨리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반대하고 상해 임정을 지지하는 척 하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내 걸고 민중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종국에는 상해임정마저 적으로 몰며 미군정에 복무했다. 살아 남을 길이 없던 “일제잔재”들은 “민족자주진영”이 통일된 우리정치철학으로 민중의 힘을 묶어 세우지 못한 상황에서 미군정의 힘을 얻게 되자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구나!’하고 온 힘을 다해 죽기살기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한 통속으로 묶어 “빨갱이”라 몰아붙이며 살인과 암살을 식은 죽 먹듯 했다. 그 가운데 전민족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백범과 몽양의 암살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의 미군정하에서 찬탁반탁문제가 논의되게 되었다. 이에 “민족자주진영”의 의견이 일치되기 어려운 점을 파악한 “한민당”과 일제잔재들은 재빨리 동아일보를 통해 의도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전도된 내용을 전하므로 써 독립을 염원하던 민중들의 의견을 둘로 분열시키는 데서 힘을 얻었다. 이로써 친일잔재세력은 살아 남을 이론적 바탕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때부터 좌든 우든 민족자주세력과 일제잔재세력과의 무력충돌, 그리고 애국정치인 암살이 전국적으로 줄을 이어 발생했다. 이렇게 되자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싸워 온 많은 애국열사들과 지식인들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투쟁을 하거나 북으로 가는 현상이 일어 났다. 그래서 당시 사회에는 “똑똑한 놈들은 다 산으로 가든 북으로 가든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 돌고 있었다. 반대로 북쪽에 살아 남았던 친일파들은 앞을 다투어 남쪽으로 도망 오게 되었다.
3.5. 분단: 주체적 민족사관이 테로 당하는 시기
이처럼 815이후 민족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며 분단이 현실적 땅에서 만이 아니라 정신적 역사의식 속에서도 고정화 되어갔다. 항일투쟁기간 “민족문제” 속에 침전되어 있던 사회계급적 모순은 이제 판이한 남과 북의 현실안에서 그 모습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즉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계급모순은 자본주의 세력이 판치는 남과 사회주의 영향이 컸던 북이라는 지역적 모습을 띄우게 되었다.
당시 농업이 주를 이루던 우리 나라에서 농민문제는 계급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였으며 또 친일청산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였다. 이를 다루는 방법 또한 남과 북은 다르게 진전되었다.
그렇게 굳어진 남과 북의 사회체제는 늘 38선이라는 인위적 경계선에서 무력분쟁이 쉴 날이 없었다. 1949년 당시 남쪽에서 자랑으로 만들어 상영한 “육탄 십 용사”란 영화는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오늘날 “천안함 46용사”는 60년전 상황을 되돌아 보고 미래를 점처보는데 큰 암시를 주고 있다.
3.6. “625 전쟁” 혹은 “한국전쟁”: “전쟁”의 외투를 입은 변형된 “사회계급투쟁”
이런 객관적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분단되어 있던 남과 북 두 지역에서 민족문제 속에 침전되어 있던 사회적 계급갈등이 1950년 6월 25일 폭발하게 되었다.
동서 양대 진영이 경쟁하던 세계정세와 얽히고 설킨 우리 형 사회계급모순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이 개입되면서 두 국가간에나 있을 수 있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확대 전개되며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을 하여서라도 분단을 고정시켜야 자기들이 살아 남을 길이 있다는 것을 안 친일세력들은 상해임정에서 훔친 국호 “대한민국”을 앞세우고 작전권마저 미국에 넘겨주며 전쟁을 계속하여 민족 전체가 큰 희생을 당하게 한다.
3.7. 516군사 쿠테다: 새로운 민족자주운동의 좌절
미군정과 친일파를 업고 정계에 자리를 굳힌 이승만 정권이 부정선거를 하자 민족양심과 인간존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던 젊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419혁명을 일으킨다.
419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정치상황에서 집권을 하게 된 “민주당”은 “민족문제”에 대하여 이승만 정권과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민주당” 역시 “상해임정”을 반대한 친일잔재세력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이에 새로 싹트기 시작한 민족자주운동에 겁을 먹은 친일잔재들과 그 앞잡이들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다.
만주에서 귀국한 골수 친일파 박정희를 수반으로 친일파군사독재시기가 시작된다. 수많은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사형을 당하고 그 가족들까지 생활의 밑바탕을 헤매며 살아가야 했다. 친일파들이 “민족중흥”이라는 정신문화적 마취제로 국민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키며 현대판 친일시대가 시작 된 것이다.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돌아가신 애국열사들(김구, 안중근 등)은 친일파들이 도용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민족자주국가”라는 성형수술을 하는데 이용물이 된다. 친일파의 “대한민국”이 수여하는 “건국공훈훈장”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이 분들을 두 번 모욕하는 일이다.
3.8. 1980 광주민중항쟁: 미국의 가면을 벗기다!
오랜 기간 동안 친일군사파쇼정권을 반대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외치며 투쟁의 길로 나선 일반민중들을 향해 “빨갱이”라며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총탄을 쏘아 살상하는 사건이 일어 났다. 1980년 광주의 민중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그간 우리의 은인으로만 알았던 미국이 군사파쇼의 지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우리 민중 삶에 은인이 아니라는 인식이 일반 국민들 의식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사회적 큰 금기(터부) 하나가 깨진 것이다.
1980년대 수 많은 민중들의 투쟁으로 우리나라에서 사회과학이 한단계 높이 발전하게 되고, 그간 사회에 범람했던 권위주의적 질서의 많은 금기(터부)가 하나 둘씩 사라져 갔지만 65년간 “반공사상”으로 자기도 모르게 길 들여진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사인식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3.9. 10년간의 민주정권: 소시민적 민주주의기간
김대중 대통령의 5년, 노무현 대통령의 5년, 모두 10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면서 국민들이 올바로 역사를 인식 할 수 있는 사업을 소홀히 해 왔던 것이다. 그 이유는 서로 눈앞의 자그마한 이익문제로 도토리 키 재기 싸움에 바빠 친일세력들의 치밀한 계획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추구하던 ‘민주주의’가 소시민적 민주주의, 그러니까 식민지를 착취하면서 자본을 키운 서구적 민주주의의 틀을 베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은 국민들과 약속한 “국보법”도 없애지 못했다.
우리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역사와 객관적 상황이 다른 데 그들의 모양새를 베낀다는 것은 배울 점도 있긴 하겠지만 많은 점에서 시대에 어긋나고, 비과학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이었음을 알아야 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오늘날 “선진자본주의”의 서구나라들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자본주의에서 자란 중산층이 스러져 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바탕으로 정계에 군림해 오던 사민당들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민당의 모태는 자본주의인 것이다.
3.10. 615 선언: 말에서 행동으로 가는 “통일”
2000년 김대중 전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남과 북 정부차원에서 615선언이 발표되었다. 통일을 열망하는 우리 국민이 실감하는 새로운 정치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말의 “통일”에서 행동으로 가는 “통일”의 시대가 열린 것이라 믿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민족의 염원인 “민족통일”에 관해서 남과 북은 서로 다르게 입장을 취해 왔다.
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이래 정부차원에서 꾸준히 민족통일을 정책적으로 인민들에게 교육시켜왔다. 남쪽 “대한민국”에서는 북의 그러한 통일교육을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쇠뇌교육으로 폄하하며, 통일교육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보다 더 한심스런 것은 강제던 자유롭게 던 “대한민국”에서는 “통일”이란 개념을 입에 올리면 잡혀가고 심지어는 “형장의 이슬”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되었다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의 눈치를 보지 않고 “통일”이나 “민족화해”로 입을 열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되어있다.
다만 “국가보안법” 틀 안에서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인 것이다.
4. 구호 “우리민족끼리”의 실과 득
일반국민이 친일적 “대한민국”을 올바로 인식하기도 부담스러운데다 615선언이 발표된 이후 혜성같이 언론을 도배한 개념이 있다. “우리민족끼리”다.
“우리민족끼리”라는 표현은 얼듯 보면 따듯하고 정답고 흐뭇한 우리 민족정서를 느끼게 하는 개념이다. 이는 긍정적인 요소라 하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한 정서만으로 썩은 정치현실을 바꿔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완용도, 송병준도, 이승만도, 박정희도 우리 민족이었고, 이름마저 일본정신을 따라 바꾼 오늘의 이명박도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역사를 인식하는 데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득보다 실이 큰 경우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새로 조성된 민족통일의 정치분위기를 계속 유지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가 이러한 “우리민족끼리”란 훌륭한 구호아래 민중을 통일의 주체세력으로 자랄 수 있는 객관적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만들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 먹이는 식의 정책의 후과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친일적 “대한민국” 안에서 “통일정책”이나 “통일운동”에선 더욱 그러한 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남과 북의 상황에 대해 국민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현 정부의 반민족적 정책과 반북적 언론보도의 영향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른바 좌우의 지식인들의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자세라던지 “민족”이란 개념에 거리감을 두는 역사인식수준에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1. 뉴라이트들의 “대한민국”: 새로운 일본식민지
일제잔재들은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 3년간의 “전쟁”아닌 “전쟁” 625를 60년이 넘도록 “민족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혹독하고 참담한 전쟁”으로 색칠하며 대대로 어린이들에게 교육한다. 다른 한편 남북 전체 민족이 수모를 당하며 겪었던 36년간의 일제의 우리민족말살정책은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이루는 선한 정치였다고 전국적으로 홍보한다.
그 동안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뭉친 새 친일세력은 “뉴라이트”라는 21세기형 “일진회”를 만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앞장세워 “경제발전”이란 표어로 국민들을 현혹해 이명박정권의 탄생을 이끌어 냈다.
친일잔재세력들과 새로 자란 친일세력인 “뉴라이트”들은 “대한민국” 65년 동안 “대한민국”의 친일적 바닥을 더욱 튼튼히 이론적으로 다져 왔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자기들의 세력이 침체 되었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명명하며 국민을 선동하고 “반북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간 해빙기에 들어 섰던 남북관계를 전쟁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늙은 친일잔재던 새로운 친일파던 그들은 통일을 원치 않는다. 그들에게 “민족통일”은 자살을 의미한다. “친일파”는 젊었건 늙었건 통일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과 통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치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맡기고 먹지 말기를 바라는 것처럼 시간과 힘의 낭비며, 이것 또한 국민과 민족을 우롱하는 처사다.
4.2. 이명박정권의 친일성
이명박 그는 이상정(李相定)이라는 자기의 본 이름마저 명박(明博:明은 明治維新에서, 博은 伊藤博文에서)이라고 고친 자신만만한 “새형의 친일파”다. 그런 사람을 국민들은 오늘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았다.
“신식민주의”란 식민지구조는 그대로 갖고 있되 식민지를 지배하는 사람은 현지인을 쓰는 식민지 경영 방법이다. 이의 모범생이 바로 상해임정의 이름을 도용한 오늘의 친일적 “대한민국”인 것이다. 그런 관계로 국민들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친일파들이 이어 온 “대한민국”을 상해임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민족자주적인 “대한민국”으로 알고 있다. 이 점이 민족문제 해결에서 아주 큰 걸림돌이다.
덧붙여 이명박 정부의 친일적 특징 몇 개를 들어 본다. 1) 삼면이 바다인 국토를 일본의 모양새를 따라 섬으로 개조하려는 구상(4대강 사업), 2) 독도를 아직은 이르니 좀 시간이 흐른 후에 논의하자는 언질, 3) “천안함”사건을 유엔에 상장하며 반북분위기를 조성하는 일, 4) 천안함 사건의 원인조사가 확실하지도 않은데 일본정부에 “북”이 원인자라고 보고한 일, 5) 나아가 북을 동양에서 가장 악랄한 적으로 보는 일본 우익정치인들과 손잡고 “북”을 “대한민국”의 주적으로 다시 만들고자 하는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5. “민족통일”은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완성이다.
이상에서 밝혀 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이 친일적 성격을 갖고 있는 이상 전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민족통일은 어렵고 어찌 보면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앞에서 살펴 봤듯이 우리의 “민족통일”은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함께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오늘의 상황이 이러하건대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와 더불어 “해방”, “광복” 등의 개념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좀 더 근본적으로 아래로부터 연구해 “친일파”와 “외세”를 청산하려는 온 백성의 정서를 담아 새롭게 정의 내릴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와 사회를 올바로 만들려는 지식인의 사명감이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보더라도 아래로부터 자체의 힘이 솟구쳐 역사를 바꿔 본 과정에는 늘 지식인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도 그렇고, 또 20세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던 사회주의 혁명도 그렇고, 오늘날 이른바 ‘진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주는 남미의 여러 정권들의 노력도 그 사회의 지식인들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우리 근현대사 100년간을 돌아보면 배우고 고쳐야 할 점이 한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조 말의 지식인들이 “개화”냐 “위정척사”냐, 항일투쟁시기 “상해 임정”냐 “만주 무장투쟁”이냐, 815이후 “찬탁”이냐 “반탁”이냐 하고 지식인들이 방황한 까닭에 일반민중들은 갈 길을 모르고 갈팡질팡 헤매며 고통을 받았다, 그 고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살다 보면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유식불교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있다.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또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것이 있다.”
갑오동학농민전쟁시기의 사회적 갈등, 즉 계급적 대립은 100년이 지난 오늘도 나타나는 양상은 많이 다르지만 계급적 갈등으로서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변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동안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계급적으로 아래 있는 사람들의 사회의식이 이조 말기와는 다른 데 있다. 먼저 자신들은 사회변혁을 추진 해 오던 사회하층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 일반인들의 가정내력을 물으면 대부분 양반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조 말기 그 많던 일반 백성들이 바람처럼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혹은 3년간 벌어진 ‘전쟁’아닌 ‘전쟁’을 통해 사회의 하층을 이루고 있던 백성들은 다 없어지고 양반집안 – 의식적으로 서구적 중산층 -들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북에는 양반출신집안을 이야기 하는 풍조도 없고 또 그런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그간 알려진 문헌들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훑어보면 그것은 지난 봉건시기 안 좋은 전통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차츰 없어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성은 있어도 남쪽에서처럼 성의 본관을 따지거나 집안 내력을 묻지도 않는다.
이처럼 남과 북 두 나라가 같은 뿌리에서 생겼으면서도 그 살아가는 틀의 내용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815이후 65년간 두 나라를 이끌어 오는 지식인 집단 형성과 그들의 사회의식, 그리고 역사인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6. 맺는 말: 625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연속이며 민중의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가는 과정이었다.
그럼 625를 민족사적 입장에서 올바로 치유할 사람들은 누구여야 할까?
이는 다름아닌 100년의 세월을 억눌려 살아 온 갑오동학농민전쟁으로부터 항일독립투쟁기간, 그리고 815이후 친일파가 지배해 온 친일적 “대한민국”에서 불이익을 당한 모든 사람들과 그 후손들, 그리고 민족사의 올바른 발전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홍익인간세계”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백범”이니, “몽양”이니, “조소앙”이니 하며 훌륭한 개인을 내 세울 것이 아니라 상해임시정부가 좌우합작으로 내 놓은 “건국강령”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 통일된 조직(가상이지만 예를 든다면 ‘홍익민족당’)을 꾸리고 가지각색의 사대주의 뿌리를 뽑고 온 누리 만백성이 평화롭게 서로 돕고 살자는 “홍익사상”에 기초한 진정한 내용의 자주적 “대한민국”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이 길만이 625를 옳게 치유하는 것이며, 갑오동학농민전쟁을 완성하여 평화적 민족통일로 가는 첫 발자국이고 첩경이라고 할 수 있다.
단기 4343년 5월 20일
원효탄
추천 사이트: www.koreakjh.com
바램: 들은 대로, 본 대로, 읽은 대로, 경험한 대로 두서 없이 적어 본 글이다. 우리 겨레의 앞날과 인류평화를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이야깃거리로라도 보탬이 되었다면 마음 편할 것 같다.
625의 민족사적 의의
625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연속이다!
1. 들어 가는 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이는 부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란다.
그런 마음으로 나도 내가 듣고, 보고, 읽고, 경험한 것을 두서없이 써 본다.
벌써 625가 있은 지 60년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 각 언론사, 특히 ‘연합뉴스”에서 특집으로 올리는 “625전쟁 60주년”이란 글을 보면서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여기 적어본다.
마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처럼 “천암함 46용사”라는 신문지상의 표현이 625 전해에 있었던 “육탄 10용사”를 연상시켜 고약한 마음이 든다. 참고[1949년 5월 21일 동아일보]
얼어붙었던 얼음도 녹아 물이 되어 흐르고, 삭막했던 나뭇가지들도 서로 다투며 싹을 틔우는 이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남북으로 흐르던 조그마한 시냇물이 마르고, 그나마 있던 물이 얼어 붇는 이상한 남북기류를 보면서 걱정되는 마음은 나만의 느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2. 역사를 가늠하는 잣대: 민족사관
사람이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데 눈과 귀는 아주 큰 일을 한다.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분석하여 정리하는 일은 머리가 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100년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듣고, 읽고, 보고, 경험하며 평가할 때 어떤 입장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다르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그런 까닭에 625라는 역사적 사실을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과 현존하는 [대한민국]史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史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그 설명에서 큰 차이가 있게 마련일 것 같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100년을 줄잡아 볼 때 나라와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한 세력과 외세의 힘을 업은 외세 앞잡이와의 싸움의 역사이었다.
3. 625를 잉태한 지난 100년: 민중의 나라를 향한 고난의 여정
3.1. 이조 말: 갑오동학농민전쟁시기
19세기 말 우리나라 사회상황은 혁명적 분위기였다. 수없이 일어나고 있던 이른바 “민란”이란 그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잘 이야기 해주고도 남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민중운동” 차원에서 볼 때오늘의 625와 관련해서 우리의 시선과 주의를 잡고 놓지 않는 사건은 1894년에 있었던 “갑오동학농민전쟁”이다.
백성이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역사를 만들고자 했던 우리민중의 염원이 발로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갑오동학농민전쟁이 외세의존적인 이조 관군과 외세(일제)의 개입이 없었다면 우리 민중의 힘으로 우리 근대사를 주체적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동방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이고 경제적으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된다.
3.2.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두 노선: 민족해방운동에 침전된 계급투쟁
이조 말기 폭발하고 있던 우리 사회 안의 계급적 갈등이 일제가 나라를 강점한 이후 무엇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큰 틀에서 전개되어야 하는 객관적 여건을 받아 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관계로 모든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들에는 계급모순이 민족모순안에 침전되어 있다. 이 모순이 항일운동기간 항일운동세력간에도 숨어 있었으며, 그러한 잠복된 모순이 세계 미소 양대 세력의 큰 영향을 받으며 진전되었다. 이처럼 항일운동 전 과정동안 계급적 갈등은 있어도 “민족자주독립”이라는 큰 기치아래 전 민족의 염원인 자주독립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은 경제적으로도 그렇지만 이론적인 면에서 더욱 어렵게 전개되어 왔다.
만주일대를 무대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과 상해를 비롯한 중국영역에서 있었던 외교를 통한 청원적 항일운동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그 두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운동은 이조 말 우리 사회의 계급적 갈등이 그대로 옮겨져 반영된 면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상해임정의 정통성을 이었 다는 “대한민국” 교과서에는 만주일대에서 전개된 피나는 무장항일투쟁은 짧막한 “청산리 전투”로 역사에 간략하게 서술되고 있다.
3.3. 1945년 8월 15일 이후: 잠복기를 벗어난 사회계급갈등의 폭발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을 계기로 상해와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세력들이 세계 양대 세력의 영향권이 미치는 남과 북지역으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국내에서 활동하던 세력들이 합세하여 두 지역에서 친일청산작업을 하게 되었다. 남과 북으로 들어 온 미국과 소련의 세력은 두 곳의 자치적 단체들을 대하는 입장이 상이했다. 남에서는 미군정이 모든 것을 좌우했지만 북에서 소련군의 입장은 우리 자치단체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행정을 했다 한다. 백범 김구선생께서 방북기간에 평양에서 만났던 소련군 대표는 “외국사람은 우리 민족문제 의논하는데 필요없으니 나가라”고 하자 아무말 없이 뒷문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는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참고: KBS 동영상 김구 평양을 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진단된 분단 원인은 외세라는 말이 일리 있는 것처럼 들리나 부족한 점 없지않아 있다.
외세가 분단의 원인이라면 이 땅의 역사 주체인 우리는 당시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이제 내적 요인도 찾아봐야 한다.
먼저 내적 요인으로 “민족독립운동”이 통일된 조직이 없었던 이유를 꼽을 수 있다. 다음은 강대국들의 본성을 과학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들의 “민족자결권”이라는 얄팍한 약속을 너무 쉽게 믿었던 우리 나라 지식인들의 능력 또한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우리 독립운동단체들의 힘이 분산되어 있는 객관적 요인들을 알고있던 강대국들은 아예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자기들 이익에 합당한 세계 전략에 따라 우리나라를 분단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말을 간추리면 먼저 우리 항일독립투쟁을 통일적으로 이끌어 오지 못한 여러 갈래의 운동세력들에게 일차적인 분단의 중요한 책임이 있다. 여기에 그간 침전되고 억눌렸던 계급갈등이 큰 작용을 했다고 본다.
그 다음은 외부 요인으로 자기나라 이익만을 차리는 강대국들, 특히 미국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4. 미군정과 한민당: 친일잔재 집결
“한민당”은 재빨리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반대하고 상해 임정을 지지하는 척 하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내 걸고 민중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종국에는 상해임정마저 적으로 몰며 미군정에 복무했다. 살아 남을 길이 없던 “일제잔재”들은 “민족자주진영”이 통일된 우리정치철학으로 민중의 힘을 묶어 세우지 못한 상황에서 미군정의 힘을 얻게 되자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구나!’하고 온 힘을 다해 죽기살기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한 통속으로 묶어 “빨갱이”라 몰아붙이며 살인과 암살을 식은 죽 먹듯 했다. 그 가운데 전민족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백범과 몽양의 암살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의 미군정하에서 찬탁반탁문제가 논의되게 되었다. 이에 “민족자주진영”의 의견이 일치되기 어려운 점을 파악한 “한민당”과 일제잔재들은 재빨리 동아일보를 통해 의도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전도된 내용을 전하므로 써 독립을 염원하던 민중들의 의견을 둘로 분열시키는 데서 힘을 얻었다. 이로써 친일잔재세력은 살아 남을 이론적 바탕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때부터 좌든 우든 민족자주세력과 일제잔재세력과의 무력충돌, 그리고 애국정치인 암살이 전국적으로 줄을 이어 발생했다. 이렇게 되자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싸워 온 많은 애국열사들과 지식인들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투쟁을 하거나 북으로 가는 현상이 일어 났다. 그래서 당시 사회에는 “똑똑한 놈들은 다 산으로 가든 북으로 가든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 돌고 있었다. 반대로 북쪽에 살아 남았던 친일파들은 앞을 다투어 남쪽으로 도망 오게 되었다.
3.5. 분단: 주체적 민족사관이 테로 당하는 시기
이처럼 815이후 민족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며 분단이 현실적 땅에서 만이 아니라 정신적 역사의식 속에서도 고정화 되어갔다. 항일투쟁기간 “민족문제” 속에 침전되어 있던 사회계급적 모순은 이제 판이한 남과 북의 현실안에서 그 모습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즉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계급모순은 자본주의 세력이 판치는 남과 사회주의 영향이 컸던 북이라는 지역적 모습을 띄우게 되었다.
당시 농업이 주를 이루던 우리 나라에서 농민문제는 계급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였으며 또 친일청산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였다. 이를 다루는 방법 또한 남과 북은 다르게 진전되었다.
그렇게 굳어진 남과 북의 사회체제는 늘 38선이라는 인위적 경계선에서 무력분쟁이 쉴 날이 없었다. 1949년 당시 남쪽에서 자랑으로 만들어 상영한 “육탄 십 용사”란 영화는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오늘날 “천안함 46용사”는 60년전 상황을 되돌아 보고 미래를 점처보는데 큰 암시를 주고 있다.
3.6. “625 전쟁” 혹은 “한국전쟁”: “전쟁”의 외투를 입은 변형된 “사회계급투쟁”
이런 객관적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분단되어 있던 남과 북 두 지역에서 민족문제 속에 침전되어 있던 사회적 계급갈등이 1950년 6월 25일 폭발하게 되었다.
동서 양대 진영이 경쟁하던 세계정세와 얽히고 설킨 우리 형 사회계급모순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이 개입되면서 두 국가간에나 있을 수 있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확대 전개되며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을 하여서라도 분단을 고정시켜야 자기들이 살아 남을 길이 있다는 것을 안 친일세력들은 상해임정에서 훔친 국호 “대한민국”을 앞세우고 작전권마저 미국에 넘겨주며 전쟁을 계속하여 민족 전체가 큰 희생을 당하게 한다.
3.7. 516군사 쿠테다: 새로운 민족자주운동의 좌절
미군정과 친일파를 업고 정계에 자리를 굳힌 이승만 정권이 부정선거를 하자 민족양심과 인간존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던 젊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419혁명을 일으킨다.
419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정치상황에서 집권을 하게 된 “민주당”은 “민족문제”에 대하여 이승만 정권과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민주당” 역시 “상해임정”을 반대한 친일잔재세력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이에 새로 싹트기 시작한 민족자주운동에 겁을 먹은 친일잔재들과 그 앞잡이들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다.
만주에서 귀국한 골수 친일파 박정희를 수반으로 친일파군사독재시기가 시작된다. 수많은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사형을 당하고 그 가족들까지 생활의 밑바탕을 헤매며 살아가야 했다. 친일파들이 “민족중흥”이라는 정신문화적 마취제로 국민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키며 현대판 친일시대가 시작 된 것이다.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돌아가신 애국열사들(김구, 안중근 등)은 친일파들이 도용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민족자주국가”라는 성형수술을 하는데 이용물이 된다. 친일파의 “대한민국”이 수여하는 “건국공훈훈장”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이 분들을 두 번 모욕하는 일이다.
3.8. 1980 광주민중항쟁: 미국의 가면을 벗기다!
오랜 기간 동안 친일군사파쇼정권을 반대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외치며 투쟁의 길로 나선 일반민중들을 향해 “빨갱이”라며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총탄을 쏘아 살상하는 사건이 일어 났다. 1980년 광주의 민중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그간 우리의 은인으로만 알았던 미국이 군사파쇼의 지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우리 민중 삶에 은인이 아니라는 인식이 일반 국민들 의식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사회적 큰 금기(터부) 하나가 깨진 것이다.
1980년대 수 많은 민중들의 투쟁으로 우리나라에서 사회과학이 한단계 높이 발전하게 되고, 그간 사회에 범람했던 권위주의적 질서의 많은 금기(터부)가 하나 둘씩 사라져 갔지만 65년간 “반공사상”으로 자기도 모르게 길 들여진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사인식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3.9. 10년간의 민주정권: 소시민적 민주주의기간
김대중 대통령의 5년, 노무현 대통령의 5년, 모두 10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면서 국민들이 올바로 역사를 인식 할 수 있는 사업을 소홀히 해 왔던 것이다. 그 이유는 서로 눈앞의 자그마한 이익문제로 도토리 키 재기 싸움에 바빠 친일세력들의 치밀한 계획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추구하던 ‘민주주의’가 소시민적 민주주의, 그러니까 식민지를 착취하면서 자본을 키운 서구적 민주주의의 틀을 베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은 국민들과 약속한 “국보법”도 없애지 못했다.
우리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역사와 객관적 상황이 다른 데 그들의 모양새를 베낀다는 것은 배울 점도 있긴 하겠지만 많은 점에서 시대에 어긋나고, 비과학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이었음을 알아야 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오늘날 “선진자본주의”의 서구나라들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자본주의에서 자란 중산층이 스러져 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바탕으로 정계에 군림해 오던 사민당들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민당의 모태는 자본주의인 것이다.
3.10. 615 선언: 말에서 행동으로 가는 “통일”
2000년 김대중 전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남과 북 정부차원에서 615선언이 발표되었다. 통일을 열망하는 우리 국민이 실감하는 새로운 정치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말의 “통일”에서 행동으로 가는 “통일”의 시대가 열린 것이라 믿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민족의 염원인 “민족통일”에 관해서 남과 북은 서로 다르게 입장을 취해 왔다.
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이래 정부차원에서 꾸준히 민족통일을 정책적으로 인민들에게 교육시켜왔다. 남쪽 “대한민국”에서는 북의 그러한 통일교육을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쇠뇌교육으로 폄하하며, 통일교육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보다 더 한심스런 것은 강제던 자유롭게 던 “대한민국”에서는 “통일”이란 개념을 입에 올리면 잡혀가고 심지어는 “형장의 이슬”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되었다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의 눈치를 보지 않고 “통일”이나 “민족화해”로 입을 열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되어있다.
다만 “국가보안법” 틀 안에서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인 것이다.
4. 구호 “우리민족끼리”의 실과 득
일반국민이 친일적 “대한민국”을 올바로 인식하기도 부담스러운데다 615선언이 발표된 이후 혜성같이 언론을 도배한 개념이 있다. “우리민족끼리”다.
“우리민족끼리”라는 표현은 얼듯 보면 따듯하고 정답고 흐뭇한 우리 민족정서를 느끼게 하는 개념이다. 이는 긍정적인 요소라 하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한 정서만으로 썩은 정치현실을 바꿔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완용도, 송병준도, 이승만도, 박정희도 우리 민족이었고, 이름마저 일본정신을 따라 바꾼 오늘의 이명박도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역사를 인식하는 데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득보다 실이 큰 경우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새로 조성된 민족통일의 정치분위기를 계속 유지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가 이러한 “우리민족끼리”란 훌륭한 구호아래 민중을 통일의 주체세력으로 자랄 수 있는 객관적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만들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 먹이는 식의 정책의 후과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친일적 “대한민국” 안에서 “통일정책”이나 “통일운동”에선 더욱 그러한 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남과 북의 상황에 대해 국민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현 정부의 반민족적 정책과 반북적 언론보도의 영향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른바 좌우의 지식인들의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자세라던지 “민족”이란 개념에 거리감을 두는 역사인식수준에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1. 뉴라이트들의 “대한민국”: 새로운 일본식민지
일제잔재들은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 3년간의 “전쟁”아닌 “전쟁” 625를 60년이 넘도록 “민족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혹독하고 참담한 전쟁”으로 색칠하며 대대로 어린이들에게 교육한다. 다른 한편 남북 전체 민족이 수모를 당하며 겪었던 36년간의 일제의 우리민족말살정책은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이루는 선한 정치였다고 전국적으로 홍보한다.
그 동안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뭉친 새 친일세력은 “뉴라이트”라는 21세기형 “일진회”를 만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앞장세워 “경제발전”이란 표어로 국민들을 현혹해 이명박정권의 탄생을 이끌어 냈다.
친일잔재세력들과 새로 자란 친일세력인 “뉴라이트”들은 “대한민국” 65년 동안 “대한민국”의 친일적 바닥을 더욱 튼튼히 이론적으로 다져 왔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자기들의 세력이 침체 되었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명명하며 국민을 선동하고 “반북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간 해빙기에 들어 섰던 남북관계를 전쟁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늙은 친일잔재던 새로운 친일파던 그들은 통일을 원치 않는다. 그들에게 “민족통일”은 자살을 의미한다. “친일파”는 젊었건 늙었건 통일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과 통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치 고양이에게 물고기를 맡기고 먹지 말기를 바라는 것처럼 시간과 힘의 낭비며, 이것 또한 국민과 민족을 우롱하는 처사다.
4.2. 이명박정권의 친일성
이명박 그는 이상정(李相定)이라는 자기의 본 이름마저 명박(明博:明은 明治維新에서, 博은 伊藤博文에서)이라고 고친 자신만만한 “새형의 친일파”다. 그런 사람을 국민들은 오늘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았다.
“신식민주의”란 식민지구조는 그대로 갖고 있되 식민지를 지배하는 사람은 현지인을 쓰는 식민지 경영 방법이다. 이의 모범생이 바로 상해임정의 이름을 도용한 오늘의 친일적 “대한민국”인 것이다. 그런 관계로 국민들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친일파들이 이어 온 “대한민국”을 상해임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민족자주적인 “대한민국”으로 알고 있다. 이 점이 민족문제 해결에서 아주 큰 걸림돌이다.
덧붙여 이명박 정부의 친일적 특징 몇 개를 들어 본다. 1) 삼면이 바다인 국토를 일본의 모양새를 따라 섬으로 개조하려는 구상(4대강 사업), 2) 독도를 아직은 이르니 좀 시간이 흐른 후에 논의하자는 언질, 3) “천안함”사건을 유엔에 상장하며 반북분위기를 조성하는 일, 4) 천안함 사건의 원인조사가 확실하지도 않은데 일본정부에 “북”이 원인자라고 보고한 일, 5) 나아가 북을 동양에서 가장 악랄한 적으로 보는 일본 우익정치인들과 손잡고 “북”을 “대한민국”의 주적으로 다시 만들고자 하는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5. “민족통일”은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완성이다.
이상에서 밝혀 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이 친일적 성격을 갖고 있는 이상 전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민족통일은 어렵고 어찌 보면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앞에서 살펴 봤듯이 우리의 “민족통일”은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함께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오늘의 상황이 이러하건대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와 더불어 “해방”, “광복” 등의 개념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좀 더 근본적으로 아래로부터 연구해 “친일파”와 “외세”를 청산하려는 온 백성의 정서를 담아 새롭게 정의 내릴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와 사회를 올바로 만들려는 지식인의 사명감이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보더라도 아래로부터 자체의 힘이 솟구쳐 역사를 바꿔 본 과정에는 늘 지식인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도 그렇고, 또 20세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던 사회주의 혁명도 그렇고, 오늘날 이른바 ‘진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주는 남미의 여러 정권들의 노력도 그 사회의 지식인들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우리 근현대사 100년간을 돌아보면 배우고 고쳐야 할 점이 한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조 말의 지식인들이 “개화”냐 “위정척사”냐, 항일투쟁시기 “상해 임정”냐 “만주 무장투쟁”이냐, 815이후 “찬탁”이냐 “반탁”이냐 하고 지식인들이 방황한 까닭에 일반민중들은 갈 길을 모르고 갈팡질팡 헤매며 고통을 받았다, 그 고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살다 보면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유식불교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있다.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또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것이 있다.”
갑오동학농민전쟁시기의 사회적 갈등, 즉 계급적 대립은 100년이 지난 오늘도 나타나는 양상은 많이 다르지만 계급적 갈등으로서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변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동안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계급적으로 아래 있는 사람들의 사회의식이 이조 말기와는 다른 데 있다. 먼저 자신들은 사회변혁을 추진 해 오던 사회하층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 일반인들의 가정내력을 물으면 대부분 양반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조 말기 그 많던 일반 백성들이 바람처럼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혹은 3년간 벌어진 ‘전쟁’아닌 ‘전쟁’을 통해 사회의 하층을 이루고 있던 백성들은 다 없어지고 양반집안 – 의식적으로 서구적 중산층 -들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북에는 양반출신집안을 이야기 하는 풍조도 없고 또 그런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그간 알려진 문헌들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훑어보면 그것은 지난 봉건시기 안 좋은 전통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차츰 없어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성은 있어도 남쪽에서처럼 성의 본관을 따지거나 집안 내력을 묻지도 않는다.
이처럼 남과 북 두 나라가 같은 뿌리에서 생겼으면서도 그 살아가는 틀의 내용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815이후 65년간 두 나라를 이끌어 오는 지식인 집단 형성과 그들의 사회의식, 그리고 역사인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6. 맺는 말: 625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연속이며 민중의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가는 과정이었다.
그럼 625를 민족사적 입장에서 올바로 치유할 사람들은 누구여야 할까?
이는 다름아닌 100년의 세월을 억눌려 살아 온 갑오동학농민전쟁으로부터 항일독립투쟁기간, 그리고 815이후 친일파가 지배해 온 친일적 “대한민국”에서 불이익을 당한 모든 사람들과 그 후손들, 그리고 민족사의 올바른 발전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홍익인간세계”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백범”이니, “몽양”이니, “조소앙”이니 하며 훌륭한 개인을 내 세울 것이 아니라 상해임시정부가 좌우합작으로 내 놓은 “건국강령”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 통일된 조직(가상이지만 예를 든다면 ‘홍익민족당’)을 꾸리고 가지각색의 사대주의 뿌리를 뽑고 온 누리 만백성이 평화롭게 서로 돕고 살자는 “홍익사상”에 기초한 진정한 내용의 자주적 “대한민국”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이 길만이 625를 옳게 치유하는 것이며, 갑오동학농민전쟁을 완성하여 평화적 민족통일로 가는 첫 발자국이고 첩경이라고 할 수 있다.
단기 4343년 5월 20일
원효탄
추천 사이트: www.koreakjh.com
바램: 들은 대로, 본 대로, 읽은 대로, 경험한 대로 두서 없이 적어 본 글이다. 우리 겨레의 앞날과 인류평화를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이야깃거리로라도 보탬이 되었다면 마음 편할 것 같다.
댓글목록
라성청년님의 댓글
라성청년 작성일
원효탄 선생님
글이 참 좋아요,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