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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짧은 이야기] 금의환향(錦衣還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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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광선 작성일2014-03-26 05:34 조회1,453회 댓글0건

본문

12

전경사는 도저히 아버지를 이해해드릴 수가 없었다.
건국과정에서 치안유지의 공로가 지대한대다가 공비토벌 중에 부상을 입어 포상대상자였으니 얼마든지 출세하여 정년퇴직은 아마도 도경국장자리에서 맞이했을 거라고들 했다.
어머니는 늘 그놈의 술이 원수라고 투덜거리셨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면서무소에서 국기 게양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렸다.
갑자기 지서주임 전경장이 들고 있던 태극기를 이빨로 물어 북북 찢더니 땅바닥에 팽개치고 발로 질근질근 밟은 것이다.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은 다리를 이끌고 매복을 나갔다 밤샘하고 돌아오면서 공복에 한 잔 마신 것이 취한 모양이라고 했다.
그간의 공적과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다는 정작을 참작하여 중벌은 면했지만 얼마간의 유치장신세를 지는 것으로 옷이 벗기고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술로 인생을 망친 아버지를 자식들까지 모두 몹시 경멸했다.
아버지의 위를 야금야금 갉아먹던 술은 결국 암이라는 괴물덩어리가 되어 아버지를 지푸라기처럼 말려죽이고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모두들 치상 치를 일을 논의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펄펄 나는 듯이 일어나더니 아들을 불렀다.

“앞 서거라.”

“어딜 가시게요? 그 몸으로.”

“내가 워째서 이놈아.
성님한테 다녀올라고 그란다.
얼릉 앞서랑께 뭐하냐!”

“성님이라니요? 
큰아부지가 워딧다고 헛소리까지 하요?
정신좀 차리시라니께요.”

“이런 망할놈의 새끼가 애비가 성님 만나러 간다는디 헛소리한다고야?
어디서 배워묵지 못하게시리, 빌어묵을 새끼 같으니라고.
잔소리 말고 얼릉 앞서!”

그리고는 뚜벅뚜벅 밖으로 나가신다.

“워디 갈라고 그라시오?
멀리 갈라먼 차로 가요.”

반 어거지로 아버지를 차에 밀어넣고 시동을 걸었다.

“자울재 넘어가자.
가다가 점빵에서 술 한 병 사고.”

느닷없이 자울재를 넘자시니 영문을 알 수가 없고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의 마지막 길인가 싶어 시키는 대로 소주 한 병과 오징어포 한 봉지 그리고 사과 몇 알을 사서 들고 자울재를 넘었다.
바로 전경트럭을 세운 여기, 차가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차를 세우게 한 아버지는 쓸어질듯 말듯 어렵게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서 망연하게 산등성이를 바라보더니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성큼성큼 산을 오르시던 것이다.
돌보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 허물어진 묘 앞에서 아버지는 보자기를 펴 사과와 오징어 그리고 소주병을 올려놓고 엎드린다.

“누 묜디....”

묻는 말이 들리는지 마는지 아버지는 연거푸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절을 하는 것인지 이마를 찧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놀림만 하고 계셨다.
엉겁결에 전경사도 옆에 엎드려 성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성님, 성니임!”

아버지가 입을 떼셨지만 형님을 두어 차례 불렀을 뿐 이내 또 그 이상한 몸놀림을 되풀이한다.

“아부지. 말씀을 해 보시랑께요.
여가 누 묀디....”

“성님, 성니임!
성님은 지를 살릴라고 본대에도 못 따라가고.....
성님은 지를 살릴라고 총을 쥐고도 쏘지 않엇는디.....”

기어이 아버지는 주먹으로 입에 틀어막고 끄억끄억 흐느낀다.
한동안 그렇게 격정을 풀어낸 아버지는 소주병을 들어 무덤 여기 저기 뿌리고는 돌아앉았다.
저수지에 반사되는 햇빛이 찰랑찰랑 계곡을 넘실거리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며 아버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덜은 니 애비보고 얼빠진 놈이라고 하지야?
니 엄니도 그란디 놈 탓 하것냐?
그란디 말다, 지 얼 백힌 사람이면 어찌께 이 시상 살것냐?
얼 빠져야만 살 수 있는 시상에 얼빠진 놈 숭보는 것이 시상이여.”

언제 넣으셨는지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여 무덤 앞에 놓는다.

“그 때 성님은 권총을 쥐고 있었단 말다.
총알도 장전되야 있었고 손구락을 방아쇠에 걸고 있었단 말다.
그랑께 성님도 내가 총을 쏠 때 방아쇠를 댕길 수 있었을 것인디 성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것을 안 땡긴 것이란 말다.
성님은 나를 살릴라고.......”

아버지는 또 주먹을 입에 처박고 흐느낀다.

"그 때 나는 성님의 총을 여그다가 같이 묻었는디....”

그런 것은 전경사에겐 정말로 전설 속의 이야기다.
광주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찢겨 죽어나갔을 때도 외지 사람들은 그것을 전설 속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던 것처럼.
아버지를 평생 폐인으로 살아가게 한 사실이 어째서 자기에겐 전설이어야 한 것일까.
전경사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성님은 이 빌어먹을 시상을 뒤엎기 위해 올라가야 쓰것다고 하셨지라.
어찌께든 죽드라도 올라가야 쓴다고 하셨지라.
그란디 지는 성님의 말씀을 알아묵도 못하고 얼빠진 놈이 되어 빌어먹을 세상을 보내다가 인자는 갈랑가 보요.
성님. 내가 무신 낯짝으로 성님을 뵈것소.
그란디도 성님이 자꾸 지를 부르는디....”

아버지는 또 다시 주먹을 입에 문다.

“잘 들어라 잉.
성님한테 아그덜이 있었는디, 너한테는 성님 되실 것이고 누님 되실 것인디 오래 전 애릴 때 보고 못 봐서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디....
그래도 니가 꼭 찾아 주라 잉.
그 아그들한테라도 용서를 빌어사제.
안 그라먼 내가 어찌께 눈을 감것냐?
그란디 그 아그덜 이름도 기억이 영 안 낭께 참말로 환장하것다 잉.”

“묘가 여그 있응께 마을 사람덜한티 물어보먼 안 알것소?”

“모를 것잉께 그라제.
성님은 전쟁 전에 경찰서로 불려가서 없어진 것으로 알어야 쓰고 여그서 죽어서 묻힌 것은 나하고 돌아가신 성님 아부지 엄니 그라고 성수님 말고는 없어야.
그란디 진즉에 성수님하고 아그덜을 찾았어야 쓴디 내가 어디 사람새끼냐?
성님 묘가 이러코롬 허물어진 것을 보먼 암도 돌아본 사람이 없다는 것 아니것냐?
그래도 니가 찾아각고 사죄하거라 잉.
사람 새끼면 너라도 죽기 전에 사죄해야 써야.”

그날 저녁 아버지는 참으로 편안하게 잠드셨다.
그렇게 편안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울분과 절망이 뒤엉켜 엉망으로 찌그러진 주정뱅이, 그것이 전경사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또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전경사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아버지는 눈을 뜨셨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생왕이, 생왕이다.
생왕이를 꼭 찾아서 사죄해야 쓴다.
그라고 내 총도 묻어주라.
성님을 쏘아 쥑인 내 총도 꼭 묻어주라.”

또렷또렷하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아버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봇물이 터지듯 무거운 눈두덩을 밀고 쏟아진 눈물이 허연 아버지의 얼굴을 적시고 서서히 식어갔다.
아버지와 함께 총을 묻지는 않았다.
아버지에게 총이 어디 있다고, 정령 허투루 하는 말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머릿속을 몇 차례 맴돌던 생왕이라는 이름도 하얗게 지워지고 말았다.

13

얼핏 보니 수풀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무덤의 주인이라면 숨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공비라면 숨거나 도망하려 하겠지.
올라가 보면 안다.
만약에 천만뜻밖에 그 허물어진 무덤을 찾은 주인이라면 아버지가 지고 가신 그 무겁디무거운 짐을 벗겨드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리 굴려봐도 그럴 리는 없다.
뭣 때문에 성묘하러 오는 사람이 산등성을 몇 개씩 길도 없는 수풀 속을 헤매고 다니며 무엇 때문에 저렇게 꽁꽁 숨으려고만 하겠는가?
무엇보다도 설령 현역군경일지라도 장총을 가지고 성묘하러 다닐 리는 없다.
전경사는 대원을 이쪽저쪽 나누어 신중하게 포위해 가도록 배치했다.

“본거지를 찾아야 한다.
공비는 놓치지 말고 가능하면 사로잡아야 한다.
경계를 철저히 하고 포위를 좁혀가라!”

전경들이 목표점을 향하여 포위를 좁혀갔지만 목표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비임이 틀림없다.
민간인이라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하지 말라고 소리칠 것 아닌가?

“공비는 무기를 버리고 자수하라!
공비는 완전히 포위 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자수하라!”

전경사는 확성기에 입을 대고 외쳤다.

“공비는 자수하라!
공비는 무기를 버리고 자수하라!
공비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전경사는 거듭 경고했다.
장총 머리가 햇빛에 번쩍이는가 했더니 이어서 총성이 울린다.
순간 전경사는 몸을 움츠리며 명령을 내린다.

“발사!”

명령과 함께 전경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목표물은 분명히 사살됐을 것이다.

“철저하게 경계하고 수색하라!”

전경사는 전경들을 따라 목표물에 접근했다.
웅덩이에 꼬꾸라진 목표물이 꾸물거린다.
전경사는 꾸물거린다고 여겨지는 목표물을 겨냥하고 마지막 실탄을 날려 보냈다.

“총은 안 보이고 지팡이가 하나 있는데요?”

주변을 수색하던 전경 하나가 두툼한 지팡이를 집어올렸다.

“어메 벌집이 되야부렀네, 벌집이 되야부렀어.”

다른 전경이 눈살을 찌뿌리며 목표물을 뒤집어 수색을 시작한다.

“전경사님, 여권 같은디요.”

목표물을 수색하던 전경이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꺼낸 여권을 전경사에게 건넨다.
여권을 떠들던 전경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경사는 다시 여권에 박힌 이름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뚫어지게 확인한다.
아버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전경사의 가슴에 또박또박 못을 박는다.
생왕이다, 생왕이를 찾아라.

“그럼 이 분이..... 이 분이.....
아부지, 아부지이!”

여권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입이 찢어지게 고함을 지른다.
비에 젖은 흙벽돌처럼 전경사의 온 몸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무덤이 갈라지고 분노와 증오와 절망이 뒤엉켜 일그러진 얼빠진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묻었던 전설이 부활한다.
그것은 시퍼런 칼날이 되어 심장을 파헤치고 시뻘건 선지피를 철철 쏟아낸다.
그것은 전설이 아니다.
시뻘건 선지피를 철철 쏟아내는 현장이며 손바닥에 그려진 손금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체다.
버릴 수 없이 짊어져야 할 유산이며 청산해야 할 소명이며 책임으로 눈앞에 다가서 있다.
풀어내지 못한 매듭이 옭아매어 일그러진 모습으로 쉬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아버지의 애처로운 하소연이 선지피를 뿌리고 있는 상처 난 심장을 또 다시 후벼낸다.
어떻게 눈을 감겠느냐!

“안 돼! 안 돼! 죽어서는 안 돼!”

전경사는 와락 시체를 끓어 안고 벌떡 일어섰다.

“병원! 병원으로 후송해! 병원으로 후송해!”

“벌써 완전히 사망한 것 같은디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전경사는 시체를 부등켜안고 쏜살같이 산등선을 뛰어 내렸다.
그대로 트럭 호송자석에 뛰어든 전경사가 소리쳤다.

“몰아! 빨리 병원으로 몰아!”

전경들이 우루루 몰려 오르자 트럭은 전 속력으로 고갯길을 질주한다.
태극기가 몹시 요동치며 석양을 교란하고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이!”

분노와 절망이 범벅이 되어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을 가로막으며 고함을 지른다.
형님을 쏘아 죽인 내 총도 꼭 함께 묻어다오!
생왕이 생왕이를 찾아서 꼭 사죄해다오, 네가 사람 새끼면 꼭 그래야 한다!
일그러진 아버지의 절규가 거듭거듭 심장을 파고들어 후벼낸다.

“아부지, 아부지이! 묻으라던 총이 다시 성님을 사살했습니다.”

아버지의 그 초롱초롱 빛나던 눈동자가 화살처럼 전경사의 가슴에 박혀 깊숙이 깊숙이 파고든다.

“밟아! 밟으란 말이야!”

“최고 속력입니다. 오르막길이라.....”

“이 새끼가 밟으라는데! 밟으라먼 밟아 이 새끼야!”

전경사의 주먹이 운전수의 머리에 벼락을 때린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운전수의 온 몸의 중력이 가속판에 떨어진다.

14

“질이 영판 좋아졌지라우?
우리 애렸을적에도 이리 한길이 났었지마는 가깝게 댕긴다고 쩌그 저 골짜기로 난 질로 걸어댕겠는디 어찌께 가파르고 팍팍하든지 한 번썩 올라갈라먼 맷번을 쉬어야 써.
쩌그 어디에 징조하네 묏이 있는디 우리는 안 댕게봐서 몰르고 오빠만 하네 따라 댕겠는디 인자 다 허물어저부렀을 것인디 잘 찾았능가 몰것소야.
성님은 이 질이 처음이지라우?”

“자울재까정은 안 와보고 오빠한테 시집와서 산소에 한 번 따라갔지.
그 때에는 이 질로 차가 안 댕긴 것 같은디?”

“그랬지라우. 읍에서 회진가는 질이 안양으로 돌아 댕겠는디 수년 전에 여그를 넬펴각고 인자는 요 질로해서 자울재 넘어서 우리 마을 앞으로 댕긴다요.
인자는 읍에 댕기는 일이 일도 아니어라우.
읍에서 차에 올라서 댐배 한 대 피고나먼 동네앞에 똑 떨어져.
그런데를 전에는 머리에다 짐을 잔뜩 이고 두세 시간을 기냥 죽을 심을 다해서 걸어댕겠는디, 어찌께 그라고 댕겠는지 몰것어라우.
많이 발전하고 살기도 팬해졌는디 사람이 살어사제라우.
젊은 놈들은 암도 안 남고 늙은이들만 남아서 마을이 텡텡 비었다요.
작년에는 시상에 초동아짐이 돌아가셨는디 암도 모르고 방에서 썩었다요.“

“오메메 시상에 초동아짐이 그러코롬 돌아가셨어라우.
내가 시집온께는 곱다고 만져쌓등마는.....
시상에 어찌께 그러코롬 돌아가신지도 몰르고 방안에서 썩었다요?”

“자석덜도 우리 또래로 늙어각고 다 또 즈그 자석들 따라서 나가 사는디, 그래도 이 자석이 모셔가먼 도시에서 답답해서 못 살것다고 맷달 못있고 돌아오고 저 자석이 모셔가도 또 멧달 못있다 돌아오고 하시등마는 혼자 그라고 지내다가 그랬지라우.”

“유재도 몰랐다요?”

“한집 건너 한집이 비었는디 그런 유재도 모다 늙은이들이라 잘 나댕기도 안해라우.
내가 기중 젊은축인디 이 집 저 집 다 돌아댕김시로 살었능가 죽었능가 보러 댕길 수도 없고 그랑께 죽은 뒤로 메칠썩 몰르고 넘어간다요.”

“읍에서 재 하나 넘어온께 그러코롬 딴 시상이 돼요잉.”

“인자는 농사질 사람도 없응께 묵은 논도 쑤두룩하다요.
그래도 먼 에푸티에잉가 뭥가 해각고 쌔빠지게 농사 안 지어도 다 잘묵고 잘살게 해준다고 그래 쌉디다.
아그들이 없응께 마을이 다 죽은것같어.
우리 댕기든 핵교도 진작에 없어져부럿다요.”

차창 밖 우거진 수풀은 그래도 활기가 넘쳐났다.
차창을 열자 싱그러운 솔바람이 머리를 훤하게 맑힌다.
뻐꾸기 소리가 깍꿍깍꿍 산골을 돌아 메아리쳐온다.
이름 모를 들꽃이 깎아지른 절벽에 허연 페인트로 덧칠한 <반공 방첩>을 듬성듬성 뚫고 나와 더러는 붉게 더러는 파름하게 수놓고 있었고, 길섶에 늦게 벌어진 민들레의 노오란 속살이 수줍음을 감추듯 언듯언듯 지나친다.
아마도 이런 풍광을 텔레비전 속에 비춰준다면 매연에 시달리고 경쟁에 부대낀 사람들은 너나없이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틀림없이.
그럼에도 그 풍광 속에서 사람이 죽어 며칠이 지나도록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알 수 없는 서글픈 일이다.
고향에 나가서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던 남편의 푸념이 떠올라 선애는 씁쓸한 웃음을 내뱉었다.
먼저 간 사람은 그래도 남은 사람이 저승길을 챙겨줄 것이다.
뒤에 혼자 남게 되면 방안에서 썩으면서 하릴없이 황천을 헤매야 할 것이고.
자신이 되었건 남편이 되었건 그것은 참으로 소름 끼치게 무서운 외로움일 것 같다.

“애기씨도 고집 그만 부리고 초동아짐 꼴 나기 전에 아그들 따라가서 사씨오.
손자들도 키워주고, 나이 들수록 아그들이 있어야 좋습디다.
손자 손녀들이 안 보고잡픕디여?”

“하이고 걱정도 팔자요.
글 안해도 이참에도 박서방이 즈그덜하고 살자고 가자고 가자고 해 쌓는것을 마닥했소.
요세 아그덜은 전에 우리덜하고 틀려.
우리는 할머니가 월매나 좋았오잉.
그란디 요새 아그덜은 냄새난다고 옆에 올라고도 안 해.
그란디 뭣땀시로 그것들한테 가각고 보데낀다요.
혼자 살다 죽은 것이 펜하제.
혼자 살어본께 혼자 사는 것이 펜하고 좋습디다.”

“먼 그런 소릴 하요.
몸이 안 좋을 때도 애기들이라도 누가 옆에 있어사 쓰고 죽더라도 옆에 누가 있어사제 암도 몰래 죽어각고 썩으면 쓰것소?
외로와서 못써라우.”

“그라나 저라나 오빠는 집이 잘 들어갔능가 몰것소.
텡 빈 집이서 겁나게 심심할것인디.”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난 길은 포장이 낡아 딱지 떨어진 종기처럼 온통 아픈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거기 또 아물기를 방해하고 헤집으며 버스가 덜커덩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때마다 가벼운 엉덩춤을 추는 선애는 그 것이 더 정겨웠다.
어린 시절, 이런 덜커덩거리는 차를 타 보는 것이 얼마나 바라고 또 재미있는 일이던가?
버스가 마지막 구비를 돌아 잿마루를 넘으려는 지점에서 재를 넘어 맞받아 질주해오는 군경트럭을 피하다가 중심을 잃고 깎아지른 낭떠러지로 구르고 말았다.
지워지지 못하고 절벽에 추하게 엉겨 붙은 <반공 방첩>에 떨어져 깨지고 부서지면서 떼굴떼굴 굴렀다.
깨어진 차창 밖으로 튕겨나온 선애는 과자부스러기가 얹힌 하얀 손수건이 덮여있는 바위에 걸려 구르기를 멈췄다.
손수건 위에 떨어진, 손수건만큼 창백해진 선애의 이마에 범바위를 깔고 앉은 마지막 햇살이 노래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양성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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