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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짧은 이야기] 금의환향(錦衣還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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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광선 작성일2014-03-22 05:00 조회1,3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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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쨍강쨍강 요란스럽게 울리는 괭가리 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사람들을 번갈아 붙잡고 얼싸덜싸 엉덩춤을 추어댔다.
산밭에 갔다 늦게 온다는 병남이 할머니가 흥을 한결 돋운다.

“그랑께 그것이 멋이라등가?
올채 마저마저 그랑께 그것이 그미하냥(錦衣還鄕)한 것이제!
올씨구나 조아라 졸씨구나 조아라
세상 사람들아 다 들어보소잉
우리 인산아그가 그랑께 그미하냥 했다네!”

아버지는 한 패거리의 젊은 또래들에 들리워 공기돌처럼 붕붕 떠오르고 있었고 어머니는 앵두같이 달구어진 얼굴을 행주에 감추며 열심히 아궁이에 솔가지를 밀어 넣고 계셨다.

“물 다 끓어 가는가?
멱 따네잉.”

마당 저켠에서 꽥꽥 돼지 멱따는 소리가 징 소리와 함께 아직도 오지 않은 나머지 마을 사람들의 발길을 독촉한다.

“인자 그미하냥 했응께 높은 베슬도 살것지라우?”

“말이라고 한당가.
장군되야 왔응께 나라를 다스리것제.”

“그라고 보먼 왜놈들이 허리를 잘르고 지이랄발광을 했쌌어도 호랭이는 못 쥑인 것이어.”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아는채를 하며 떠들어댔다.
누가 때를 알고 담궜는지 막걸리 동이가 여기저기 놓였다.
끓는 물에 튀겨 털이 뽑힌 돼지는 금방 수육이 되고 국물이 되어 어머니는 그것을 여기저기 퍼 나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젊은이들이 동이에서 막걸리를 사발로 퍼 마신 다음 고깃점을 된장에 푹 찍어 질근질근 씹으며 괭가리와 북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어깨춤을 추던 사람들도 여기저기 몰려선 아이들도 모두 그랬다.
예고되지 않은 잔치는 그렇게 흥겹게 무르익었다.

“아따 인자 그만들 묵고 우리 장군님 한 말씸 들어보시더라고잉.”

초동아저씨가 아버지를 마당 가운데로 끌어내었다.

“먼놈의 장군이라요.
나 기냥 도망댕기다가 왔구마니라.”

“아따 장군님은 겜손허시기도 혀잉.
만주까정 가각고 왜놈 몰아내고 왔응께 장군된 것이제.
안 그러요?”

“그라고 말고!”

마을 사람들은 또 왁자지껄 아는체다.

“인자 나라를 찾았응께 어찌께 다스릴 것인지 한 말씀 안 해야 쓰것능가?”

영남이 아버지도 독촉이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킨 후 연설을 시작했다.

“인자 나라를 찾았응께 새 나라를 맹글어야 하지라우.
새 나라라 함은 전에처럼 임금님이 주인이고 백성이 모다 종인 그런 나라가 아니고 백성이 모두 주인인 나라를 말하지라우.”

“어찌께 하늘같은 임금님을 몰아내고 백성이 모두 나라의 주인이 된당가?
할만한 소리를 해사제.”

누군가 딴지를 걸기도 하고

“아따 가만히좀 들어보소.”

누군가 제재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나라를 찾았다는, 새 나라를 세운다는 부품 꿈에 들떠 아버지의 입술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이란 것이 뭣이요?
자기 것을 갖는다는 것 아니것소?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은 나라 땅을 빼앗겼다는 것이고, 나라를 찾았다는 것은 나라 땅을 찾았다는 것잉께, 우리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야그는 백성들이 모다 땅 주인이 된다는 말씸이제라우.
인자 우리가 새 나라를 세우면 여러분이 농사짓는 땅뙤기가 모다 여러분의 땅뙤기가 되고 거기서 지은 곡식은 모다 여러분 맘대로 먹고 쓸 여러분의 것이 된다는 말씀이지라.”

“임금님이 읖스먼 어찌케 나라를 다스리고 김첨지 논을 소작하는디 그것을 내것이라고 소작 안 바치먼 김첨지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인디.”

누군가가 걱정스러운 의문을 터뜨려 웅성거리게 만들었고

“그랑께 고것을 어찌케 해결하느냐... 요것을 시방 장군님이 말씀허시것다 이 말씀 아니것어?”

누군가가 또 웅성거리는 군중을 잠재워 아버지의 입술을 처다보게 만든다.

“그렇지라우.
지금까정은 온 나라가 임금님 것이었다가 왜놈들이 그것을 뺏어서 이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을 왜놈들이 맘대로 뺏어갔는디 인자는 이 땅을 백성들에게 다 나눠주고 여기서 나는 모든 것을 우리 맘대로 쓰게 하것다 이 말씀이지라우.
그라먼 김첨지는 어찌케 되느냐, 내 놔야지라우.
그라고 우리와 똑 같은 사람, 우리가 겁나게 땅을 파먼 김첨지도 같이 이마에 땀방울이 떨어지게 땅을 파고 우리가 이러코롬 춤추고 노는 자리에 김첨지도 어울려서 탁배기 마시며 함께 노는 그런 시상을 맹근다 이 말씀이지라우.
김첨지가 마을 땅 다 가지고 있다고 혼자 농사 다 짓는 것 아니지라우.
김첨지는 김첨지가 지을맴큼만 가지고 나머지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 지을맴큼썩 나누어 가지게 한다 이 말씀이지라우.
이것을 어찌케 하냐, 임금님이 이 나라 주인일적에는 임금님이 김첨지에게 우리 마을 땅을 다 줬드시 인자는 백성들이 주인이 되어서 백성이 뽑은 대표가 나라를 다스를 것이니께는 우리의 대표되는 사람이 이 땅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이 말씀이지라우. 알아 듣것능가요?”

그렇다.
나라의 독립,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땅을 찾은 것이라는 말보다 더 확실한 설명이 무엇이겠는가?
새 나라, 그것은 나에게 붙이고 살 땅을 떼어주고 그 땅을 내 것으로 지켜주는 나라라는 것, 이것보다 더 확실한 설명이 무엇이겠는가.
새 나라의 건설,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다스릴 사람을 뽑아 나의 땅을 지켜주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보다 더 확실한 설명이 무엇이겠는가.
대청마루 높이 다리 꼬고 앉아서 흙바닥에 꿇려놓은 일꾼들을 내려다보며 호령하던 김첨지가 함께 이마에 땀흘려 일하고 함께 어울려 어깨춤을 추게 되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이 이들의 가슴을 더 벅차게 할 수 있는가.

“그라먼 우리는 인산성님을 대표로 뽑읍시다!”

“암은, 그라고 말고. 장군님이 대표가 되야서 새 나라를 세우고 다스려야제!”

내가 나의 땅을 갖게 되고 내가 나를 다스리고 지켜줄 사람을 뽑는다는 벅찬 희망에 부풀어 사람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얼씨구절씨구 목이 터지게 부르고 또 불렀다.

8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는데도 사람들의 흥은 식을 줄을 몰랐다.

“나는 아그 델고 아부지 산소에 댕겨와야 쓰것응께 모도들 놀고 있으시오.”

“아따, 오늘은 먼 길 오니라고 고상도 했것구마는 산소에는 낼 가지 그라요?”

“이러코롬 탈없이 지켜준 것이 뉘 은덕이것소?
젤 몬차 아부지 산소부터 댕겨왔어야 쓴디....
아가, 주전자에 탁배기잔 담고 안주하게 괴기 맷점 싸그라잉.”

할아버지의 지시대로 어머니가 싸준 작은 보따리를 들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자울재를 향해 해와 시합하느라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잿마루 바위에 할아버지가 걸터앉아 한 숨 쉬는 동안 아버지는 능선 옆에 있는 작은 동굴이 보고 싶어졌다.
마을을 빠져나와 도망하던 날 그곳에 숨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던 곳이다.
크지 않은 바위 밑에 두어길 들어가는 작은 굴이어서 별로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데에 누가 숨어 지내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곳이어서 한 이틀 숨어있기에는 좋은 곳이다.
동굴을 들여다보던 아버지는 기겁을 했다.
누가 그 안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숨긴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때 여기 숨을 사람이란 뻔하다.
순사보조 아니면 면사무소 관리들 같은 일제 앞잡이들이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다자고자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굴 밖으로 끌어냈다.

“아니, 이 새끼봐라. 전순사 이놈의 새끼 너 잘 걸렸다.”

면 지서에는 일본인 순사가 주임이었고 그 밑에 조선인 순사보조 세 명이 있었다.
당연히 나서서 일처리를 하는 것은 이 세 명의 조선 순사보조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왜놈 순사보다 동족인 조선인 순사보들이 훨씬 더 악독하게 못살게 구는 놈들로 인식되게 되었다.
전순사는 그 중 한명이다.
아버지는 커다란 돌맹이를 집어 부들부들 떨며 엎드려 있는 전순사를 내려치려고 했다.
할아버지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 광경을 본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아버지를 말리신 것이다.
전순사는 엎드려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살려달라는 소리만 연거푸 중얼거렸다.
그가 그렇게 약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대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두 사람, 합쳐도 힘으로 당해 낼 수 없는 몸집 좋은 전순사가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혀 질질 끌려나오고 또 부들부들 떨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분명히 상황 때문인게다.
그러고 보면 누구를 강하게 만드는 것도 약하게 만드는 것도, 악하게 만드는 것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어쩌면 상황인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신 것 같다.

“시절을 쥑에야제 그런 놈 쥑에밨자 뭔 소용이라냐!”

그 지적이 아버지의 손에 들린 돌덩이를 멈추게 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허리춤에서 쌈지를 꺼내 마른 담배닢을 뜯어내어 손바닥에 놓고 부볐다.
몇 겹으로 접은 종이 한 겹을 찢어서는 뭉그러진 담배를 놓고 둘둘 말아 침을 발라 봉했다.
다시 쌈지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탁 쳤다.
섬득 불똥이 가는 솜으로 튀어 파르르 연기를 피운다.
할아버지는 뻐금뻐금 담배를 빨고만 있었다.
죽여야 한다는 시절이 연기가 되어 하늘하늘 흔적을 지우려는 것만 같았다.

전순사는 눈이 뒤집혀서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할아버지가 나동그라지자 달려든 할머니와 어머니까지 전순사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딩굴딩굴 구르다가 울타리에 걸려 너부러졌다.

“어따가 숨켰냐고?
얼릉 대지 못해!
집구석 다 작살내기 전에 불어!”

사실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순순히 다녀오라고 하셨다.
하늘에 달린 목숨, 전쟁터라고 살 목숨이면 죽기야 하겠느냐고, 죽을 목숨 같으면 접시물에 코 박혀 죽기도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아버지는 골목을 나서자마자 도망을 쳐 자울잿마루 동굴에 숨어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까지 타들어간 시절이 너울너울 달빛 속에서 춤을 춘다.
아버지는 허리끈을 풀어 전순사의 팔을 뒤로 묶어 끌고 할아버지를 따라 재를 넘었다.
돌무덤 사이사이 쭈삣쭈삣 솟아나온 풀을 뽑고 사발에 넘실거리도록 술을 부어 올렸다.

“풀어줘라.”

성묘가 끝난 후 무덤가에 주저앉은 할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부지!”

“내일 쥑이드라도 멕여는 놓고 봐야제.
죙일 암것도 못 묵었을텡께 자네가 음복하소.
자네는 배고푼 설음도 모를 것이네마는.
그보다 더 큰 설음이 어딧것능가.”

묶인 줄이 풀리자 전순사는 두 손과 머리를 땅바닥에 박는다.
할아버지에게 절을 하는지 증조할아버지 묘에 성묘를 하는 것인지 아버지의 발바닥에 경배를 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아까는 어찌케 해서든지 살라고, 도망칠라고 빌었지마는 지금은 참말로 잘 못 산 지난날의 죄를 용서받을라고 빕니다.”

전순사는 연거푸 이마를 땅에 찧으며 울먹였다.

“어찌께 용서 받는당가?”

“벌을 받어사지라우.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가것습니다.”

“쥑이고잡픈 사람들이 많을 것인디?”

“당해도 싸지요.”

“시장할 것인디 음복하랑께.”

아버지가 들이미는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전순사는 다시 아버지의 발목을 붙잡고 끄억끄억 흐느낀다.

“자네가 울 아부지 제사 음복했네잉.
음복은 후손들이 허는 것이여. 잊어불지 마소.”

할아버지가 일어서서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털어내고는 고개마루를 향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전순사는 두 주먹을 모아 아버지 앞으로 내밀었지만 아버지는 허리끈을 다시 바지에 메고 그냥 할아버지를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잿마루까지 따라오는 전순사를 돌아보며 아버지가 입을 땠다.

“그냥 가.
니가 저지른 죄는 어디서든 살면서 열심히 갚어.
감옥이 니 죄를 갚어주는 것은 아니니께.”

9

읍내에 군 인민위원회가 꾸려졌다.
아버지는 면 대표로 군 인민위원회에 나다녔다.
그리고 면에도 인민위원회가 꾸려질 것이고 치안대를 만들면 마을 청년들도 거기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인물 하나 나니깐 여러 사람 출세하고 인제 구박받고 천대받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트럭에서 뛰어 내린 군인들은 다짜고짜 몽둥이로 인민위원회 간판을 때려부셨다.
사무실로 뛰어든 그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고 있는 위원들을 군화발로 걷어차고 사정없이 밟아댔다.
모든 업무와 치안은 미군정에서 관할할 것이며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은 인민위원회와 치안대는 불법단체기 때문에 업무를 인계하고 즉시 해산하라고 을러댔다.
그렇게 법령이 발표되었단다.
미군이 일제를 몰아냈으니까 미군이 법령을 만들어 선포하는 것이고 미국은 일본도 무찌른 제일 힘이 센 나라니까 모든 것을 미국에 맡기고 의지해야 하며 미군은 해방의 은인이니까 미군 말이면 무조건 복종하고 숭배해야 한다고 했다.
혈기 넘치던 아버지가 항의하다가 반죽음이 되어 업혀왔다.
할아버지는 피떡이 된 아버지의 저고리며 바지를 찢어 벗기고 푹 썩은 합수 한 바가지를 퍼왔다.

“얼릉 입 벌려라잉.”

할머니가 검지와 엄지로 아버지의 코를 쥐어주고 아버지는 합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왜놈보고 악독한 놈이라고 했는디 그놈들은 사람새끼도 아니여!”

사람들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버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저마다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순사보조원 전씨는 경장계급장을 번쩍이며 지서주임이 되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숨어있던 면장도 면서기들도 모두 제 자리로 돌아와 책상을 닦고 간판칠을 다시 했다.
춤을 추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김첨지도 면장이나 순사들 못지않게 어깨춤사위에 날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위대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세워지는 내내 아버지는 구둘장을 짊어지고 보내셨다.
아버지가 서서히 바깥출입을 할만큼 몸을 추스르셨을 적에 지서주임 전경장이 찾아왔다.

“꼭 등록하셔야 합니다.
인자 새 나라도 섯것다 옛 일은 잊어버리고 성님도 나서서 나라 일을 거들어야 안 쓰것습니까?
그러니께 꼭 등록하셔서 깨끗하게 혐의를 지워버리고 출사길도 여셔야지라.”

아버지와 함께 인민위원회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순조롭게 등록을 마치고 몸도 회복되어 가끔 홀가분하게 면소재지에 나다니실 적이면 지서에 들려 전경장에게 막걸리를 얻어 마시기도 했다.
등록한 모든 사람을 경찰서에서 무슨 교육인가를 해야 한다고 불렀다.
면별로 등록된 사람들이 지서에 모여 경찰서에서 나온 트럭을 타고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등록된 사람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도 몇 몇 불렀다.
영남이 아버지는 등록한 사람이 아닌데 이참에 그 교육을 받으면 순사보조원 같은 벼슬을 살 것이라는 바람에 아버지를 따라 지서에 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다 모이자 경찰서에서 나온 인솔관이 지서주임에게 사람들의 손을 묶으라고 지시했다.
전경장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교육 받으러 가는 사람들을 묶어갈 리가 없다.
전경장은 다른 사람들을 묶는 것처럼 아버지의 양 팔을 뒤로 젖혀 포개어 질긴 삼끈으로 묶은 다음 좀 길게 처지는 끈 끝을 아버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묶인 사람들을 모조리 트럭에 밀어 넣은 후 지서주임도 경찰서에서 나온 인솔순경과 함께 인솔관으로 따라나섰다.
트럭이 인암 산모퉁이를 돌 때 전경장은 오줌을 누고 싶다고 차를 세웠다.
인솔하던 경찰서소속 순경도 지서주임을 따라 차에서 내려 산그늘에서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손가락 틈에 끼인 줄을 힘껏 당겼다.
줄이 풀리자 트럭난간을 짚고 뛰어내린 아버지는 숲을 향하여 전력을 다해 달음질쳤다.

“어어, 저놈새끼 봐라, 거기 서, 거기 스라니까!”

전경장과 인솔 순사가 오줌을 누다말고 바지 앞자락을 추스르며 급하게 트럭으로 돌아와 칼빈을 꺼내어 아버지가 도망가는 숲을 향하여 펑펑 총알을 날렸다.

“이런 빌어먹을!”

칼빈을 땅바닥에 쿵쿵 내려치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지서주임에게 인솔순경이 귀띔했다.

“염려 마쇼.
이런 불상사가 있을 것을 예견하여 위에서 지시한 할당보다 지서마다 한 둘씩 더 모아오도록 했답디다.
너무 늦기 전에 서에 들어가게 어서 출발합시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면 지서마다 파견나간 인솔자들이 등록자들을 싣고 경찰서 연병장에 모여들었다.
모두 모이자 등록자들을 가마니를 씌워서 다시 트럭에 차곡차곡 싣고 또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렇게 교육 받으러 떠난 사람들은 그날 이후 소식을 모른다.
등록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영남이 아버지 같은 사람들까지도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영영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도 교육받으러 떠난 사람들에게서 기별이 없자 가족들은 지서로 모여들어 소식을 물었지만 주임도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냥 기다려보자고 했다.
아마도 도청으로 가서 나라 일에 필요한 무슨 아주 중요한 교육을 받고 벼슬을 살게 될런지 모른다고 사람들은 위안을 했다.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려면 독립된 새 나라가 섰는데 아버지같은 분들이 일제앞잡이이던 면장이나 지서주임보다 못하겠느냐고 수군거리며 마을로 돌아왔다.
초조하고 불안하게 또 며칠이 지난 후 달도 뜨지 않은 어느 캄캄한 밤중에 지서주임이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성님은 무사할 것이구먼요.
소식이 없어 월매나 걱정되실까나 싶어서 절대로 발설은 마시고 아버님만 알고 계시라고 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전쟁 전 행불로 기록되었다.
먼 훗날 그 등록이란 것이 보도연맹이라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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