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짧은 이야기] 금의환향(錦衣還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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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광선 작성일2014-03-20 03:16 조회1,5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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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아저씨 동화 아저씨이이
재밋는 이야기 하여 주세요
오 오냐 그러마 이야기 하마
옛날에 간날에 어느 산골에에에
실없는 연기가 자꾸 나기에
웬 일인가 하고 찾아 갔더니
다람쥐 두마리 소풍을 와서
도토리 궈먹느라 그리 했더라 ]
금의환향(錦衣還鄕)
1
"생애 이놈의 새끼가 마중 나왔으면 월매나 좋아."
장흥읍에서 마을로 가는 버스를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하자 생희는 마중 나오지 않은 동생에게 짜증이 뻗어간다.
"40년 만에 만나는 성님은 월요일 봐도 되고 화요일 봐도 되는디 주일 예배는 빠져서는 안 된다니 그것이 말이나 됑가?
망할놈의 새끼.
해마다 보는 것도 아니고 사십년 만이네 사십년.
한 주 설교 빠지면 벼락 떨어진당가?
부목사도 있고 전도사도 많어.
번지르한 차도 있으니께 마중 좀 나왔으면 공항에서부텀 집에까지 서너시간이면 쪼르륵 갈것인디 생전에 한번 고향 찾아오는 늙은이들 버스타고 시달리고, 기달리다 지쳐 빠지라고 그놈 새끼가 그냥..."
혼자서 열이 받친 생희가 손을 휘휘 저어가며 소리소리 지른다.
"꼭 공항에 마중나와야 하것냐?
너도 그냥 집에서 기다리지 우리가 어린 아이들이냐?
어련히 찾아가려고.
그리고 번지르르한 차타고 쪼르르 오는게 대수냐?
간만에 고국방문하는 것잉께 버스 타고 사람들 부딪치며 몸 냄새 맡으며 여기저기 도로변에 스치는 사는 모습 보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나는 버스도 별로고 삼등야간열차 타고 올락했다.
옛날에 참 서울 한번 갔다 오려면 목포에서 벌써 자리 다 차버리고 영산포서 타면 언제나 자리가 없어서 밤새 열 서너시간을 서서 흔들리며 땀 냄새 부데끼며 다니던 추억이 많은 삼등열차인디."
"하이고, 그리울 것도 쌔고 쌨소.
야간삼등열차가 다 그립게.
그나저나 시시간이나 어찌께 기다릴까라잉.
성님도 겁나게 피곤할건디."
“금매 그라요.
차 타고 올 때까정은 좋았는디 시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당께는 겁나게 고단해뿌네.”
선애도 늙은 티를 내느라고 더수기를 주물렀다 허벅지를 주물렀다 해가며 푸념을 시작한다.
“세 시간이면 걸어가고도 남을 시간 아니냐?
기다리는 것이 훨씬 피곤한 법이니라.
날씨도 좋고 산천도 좋고, 걸어가자꾸나.”
읍에서 서쪽으로 뻣은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탐진강을 건너 자울재를 넘으면 고향마을이다.
어렸을 적에는 간혹 종종걸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장에 오기도 한 십여리 길이다.
“오빠가 이팔청춘이요?”
“그러고 보니 자울재 밑에 증조할아버지 산소가 있잖냐?
따로 성묘 오고 하느니 아조 이참에 성묘하고 갈 겸 걸어가자.”
“거기 더 이상 질도 없고 못 찾아.
오빠 떠난 뒤로 증조할아버지 묘에는 우리도 한 번도 성묘를 못했구마는.
그래서 어디가 묏둥인지 알도 못하지만 산에 샛길이 없어저가지고 찾아가지도 못한당께.”
“니들은 안 다녀봤응께 모를 것이다마는 나는 찾을 수 있어야.
슬슬 걸어감시로 동네 구경도 하고 성묘도 하고 그랑것이 낫제 여기서 세 시간이나 허둥거리며 보내야 쓰것냐?”
“나는 기다릴라요.
평지 걷기도 힘든데 산고개를 어찌 걸으라고.”
선애가 어깃장을 놓자 생희가 힘을 얻은 듯 큰 소리로 오라비를 나무란다.
“거 보씨요. 성님도 힘들어하는디 오빠 혼자 우기먼 쓰것소?
잔말 말고 쩌그 시장통이나 구경함시로 버스 오기 기다립시다.”
“그럼 너는 니 올캐하고 버스 타고 오고 나는 걸어가마.
가다가 성묘도 하고 그래도 집에는 내가 더 먼저 가 있을 것이다.”
“아따 그놈의 쇠고집 누가 말려!
그라먼 오빠나 걸어가씨오. 우리는 여그서 기다렸다가 차타고 갈라우.
그란디 걸어갈라면 지팽이는 있어야제?”
대충 이렇게 의견이 합의되어 셋은 정류장 옆에 있는 작은 잡화가게에 들어가 지팡이를 찾았다.
생희가 팔뚝만큼 굵직한 몽둥이 하나를 집어든다.
“이놈이 좋네. 서산대사 지팽이만키로.”
“그거 너무 무겁지 않냐?”
“한나도 안 무거.
한번 들어봐요.
보기만 퉁퉁해각고 무겁게 보이제 아조 가풋하니 잡고 짚기도 좋고 이거 사각고 짚고 가.”
들어보니 생희 말마따나 두툼한 것이 손잡이 쥐기도 편했고 생각보다 아주 가벼웠다.
장삼만 걸쳤다면 그래, 사명대사 품 나겠구나.
어느덧 재 하나 넘자고 지팡이 신세를 저야 하다니.
“오빠는 그라먼 얼릉 가씨오.
나는 성님하고 읍내 구경이나 하다가 차 타고 갈라우.”
이 지경이 쇠전머리였겠는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언제 들어섰는지 벌써 고물티가 흐르는 상가를 지나자 금방 잡초 우거진 강둑을 만났다.
어린 시절 아득하던 길이 이렇게 엎드러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것이 도저히 실감 나질 않는다.
순지로 넘어가는 탐진강을 뛰어넘던 노두 자리에 어엿한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었다.
선거 때만 되면 이곳에 다리를 놔주겠다는 애국애향 지사들의 스피커 소리가 이 마을 저 마을을 거처 산자락을 휘감아 쩌렁쩌렁 울려퍼지곤 했었지.
그놈의 공약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어 드디어 이렇게 다리가 됐을까?
비만 오면 노두는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버렸지.
그래서 비온 후에 읍에 나갈 일이라도 생기면 집 떠나기 전에 우선 노두가 보이던가부터 알아보곤 했었지.
예나 지금이나 이쪽은 그래도 밝아 보이는 삶의 아귀다툼으로 저쪽은 산 그림자처럼 무거운 고요함으로 마을은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담그면 금방 쪽빛으로 멍들 것만 같이 시리고 시린 물은 자잘한 강바닥의 돌맹이를 씻어내며 그렇게 이쪽과 저쪽을 딴 세상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2
초가지붕은 보이지 않았고 허름한 스레트를 얹은 작은 집들이 꼬막껍질을 엎어놓은 듯 산자락 밑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마을 앞에서 만난 주막은 이제는 늙은 태가 완연하게 쭈그러진 모습으로 퇴색된 ‘덕재구판장’간판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한 쪽 벽면에는 “이웃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 신고하여 상금타고 간첩 잡아 애국하자!”는 구호가 지워지지 못하고 마른 이끼와 흙투성이 누더기를 걸치고 들어박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지워지지 않은 문신이며 떼어낼 수 없는 혹이며 자손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우리네 유산인 것처럼.
생왕이 칙칙한 유리문을 어렵사리 밀고 가게 안에 들어서자 안쪽으로 나 있는 찌그러진 방문을 열고 노파가 고개를 내민다.
“멋 찾으시오?
그란디 첨보는 양반이네? 어서 왔소?
빠스가 온 것도 아닌디 언제 누 집에 왔을까?”
“아, 네, 지금 지나가는 중이외다.
소주나 한 병 살까 해서요.
안주할 만한 과자 부스러기 하고요.”
“쩌그서 집어 보시오.
그란디 요새도 걸어댕기는 사람 있네잉.
어디서 와각고 어디로 가요?”
“아, 네. 읍내에서 왔는디 자울재 넘어갈라고 그라요.
전에 요 옆으로 샛길이 나 있었는디 안 보이능구만요.”
“자울재를 넘어 가라우?
요새 누가 재 넘어댕긴다요?
그라고 샛길 없어진지가 원제적 야근디 샛길을 찾는당가?
있어도 거리는 인자 못 올라가요.
까시댕이가 꽉 어울려각고 땅도 안보여라.
쬐간 기다리면 빠스 올탱께 타고 가씨오.
우리 소시적에야 산 너머갈라먼 그 길밖에 없었응께 애리나 쓰리나 그 길로 댕겠지만 요새는 저렇게 삥 돌려서 큰길 내각고 하래도 맷차래썩 차가 댕기는디 누가 걸어서 산 넘것소.”
애리나 쓰리나 그 길로 다녔다는 말에 문득 생왕은 소학교 스승이 떠오른다.
덕재에서 매일 자울재를 넘어다니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마치고 처음 부임지가 생왕이 다니던 면소재지 소학교였다.
생왕은 날마다 아침이면 동구에서 선생님을 기다렸고 방가 후에는 교문에서 얼쩡거리가다 선생님이 나오시면 꽁무니에 붙어 종종걸음을 처 함께 마을까지 왔다가 터벅터벅 자울재를 오르시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선생님이셨다.
어느 날 산밭에 다녀오시던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아이고 선상님.
이러코롬 맨날 재를 넘어댕길라면 겁나게 심들 것인디 핵교 옆에 방을 얻든지 정 멋하면 우리 말에 살먼 훨썩 쉬울 것인디.”
“아닙니다, 할아버지.
애리나 쓰리나 재넘어 댕겨야제 쪼깐 펜하자고 산 너머 부모 계시는 집 놔두고 또 방 얻어 지내것습니까?”
이름이 김일성이어서 못된 아이들은 선생님이 지나가면 늘 “때려잡자-”해 놓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도망하곤 했다.
그럴라치면 선생님은 의미를 읽을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그냥 씨긋 웃곤 하셨다.
“그런데 아짐씨, 덕재에서 오래 사셨지라우? 그라먼 김일성선생님 기억하시오?”
“그쪽이 김일성선상님을 어찌께 아시오?
김일성선상님 돌아가신지가 언젠디.”
한 청년이 가게에 들어서려다 말고 까무라치게 놀라 벽 뒤로 몸을 움추려 숨기며 귀를 종근다.
“그랑께 시방 김일성선상님 찾아 왔어라우?
그 선상님 돌아가신지가 언젠디.”
“알지요. 살아계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문득 생각나는 분이어서요.”
“참말로 훌륭한 선상님이셨지라.
이런 산골 말에서 인물났다 했는디 국해이원도 못해보고 기냥 돌아가셨어라.”
대통령이 제일 훌륭하고 높은 사람이다.
그리고는 다음으로 국회의원님이시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는 거야 애들한테나 해보는 소리지만 그 다음으로 국회의원은 늘 뽑는 것이고 또 군마다 한 명씩 뽑는 것이니 마을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국회의원이 될 인물이라고 말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김일성선생님같은 분이 나라를 다스렸다면 얼마나 살기 좋아졌겠습니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착실하게 따랐다면 나라꼴이 이렇게 험하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선생님같은 분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품은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애석하게 세상을 뜨시니....”
“그란디 차도 안타고 멋땜시 자울재는 혼자 너머 가시오?”
“일행이 있지만 내가 먼저 가는 길이오.
산에서 볼 일도 있고 해서.”
벽 뒤에서 안쪽에 뒷바퀴를 꽂고 있던 청년의 귀에는 이렇게 전해졌는 모양이다.
“수령님이 그렇게 바라시던 통일도 이루시지 못하고 애석하게 세상을 뜨셨으니.....”
그는 담장 밑에 움츠려 은밀하게 몸을 숨기면서 손전화를 꺼냈다.
“여보세요, 보안과죠?
무장간첩 신고하려고요.
....
나요?
재대말년휴가와서 할머니 보러 덕재에 온 김병장인데 술 한 잔 마시려고 공판장에 왔다가 무장간첩을 발견한 겁니다.
....
아 글쎄 나이는 쾌 처먹은 것 같아 보이는데 옆에 아카보자동소총을 끼고 공판장 할머니를 위협하고 있어요.
김일성수령님을 존경해야 한다면서 수령이 다스려야 나라가 잘 된다고도 하고,
....
그 쥐새끼같은 놈이 글쎄 벌써 구판장할망구를 포섭했다니까요.
큰일이죠.
....
혼자가 아니고 산 속에 숨어있는 일당에게 지금 간다네요.
....
전경 일개중대 가지고 될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놈들 일당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군부대에 지원병공수라도 요청해야
....
예 예, 제가 놓치지 않도록 바짝 따라붙겠으니 속히 출동해주세요.
...”
청년은 전화기에 대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가게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산길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연신 걱정하는 노파를 뒤에 남기고 생왕은 소주병과 과자를 담은 종이봉지를 흔들며 지팡이로 우거진 엉걸퀴를 젖히고 산길을 올랐다.
벌써 무슨 지팡이를 짚고 다니느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두툼한 지팡이를 사서 손에 쥐어준 생희가 고마웠다.
잔목이며 찔레며 가시엉겅퀴가 뒤엉켜 몽둥이처럼 두툼한 지팡이가 없었다면 발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한 발 앞을 내다볼 수 없이 칙칙하게 뒤엉킨 잡초가 발목에 휘감긴다.
어렸을 적 다니던 이 길, 이 산은 잡초도 크게 자라지 못하던 헐벗어 보이던 그런 황무지 같았었다.
여기 저기 폭격에 패인 벌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앙상한 소나무가 몇 구루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고개마루까지 휑하니 뚫려 사람들이 오르내리던 개미처럼 꼬물거리는 모습이 환히 보였다.
산림보호하자고 엄청 심하게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촌가의 아궁이를 보살피는 것은 역시 이 산밖에 없었기에 구둘장의 얼음을 걷어내 주는 것은 여기 얽히고설키던 엉겅퀴였다.
어디 그 뿐이던가?
농민의 피땀을 쥐어 짤줄만 알았지 땀방울이 쌀과 보리로 엉그는 것을 누가 보살폈는가?
봄마다 한 생을 멋지게 장식해보자고 쭈삣쭈삣 언 땅 비집고 기어오르던 저 잡초들 아니던가?
안다.
알면서도 너들의 그 애절한 삶을 잘라내어 논밭에 깔아야만 하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애린 가슴도 이해해주렴.
그렇게 피로 땀으로 손바닥만한 땅뙤기를 일구고 지키던 그 마음들이 무엇에 홀렸는지 꼬임을 당했는지 모두 떠나버린 후 초목은 춤을 춘다.
산은 싱싱한 푸름을 한창 뽐내고 있었고 뜨겁지 않은 날씨에 바람도 살랑였지만 금새 이마에 구슬땀이 맺혀 흘러 내렸다.
여기서 깨꼬리가 깨르르륵 끼욱 하고 부른다.
바로 저기서 깍꿍하며 뻐꾸기가 화답한다.
초여름 숲은 풀과 나무에게만 싱싱한 게 아닌가보다.
덤불 속에서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 뛰어나간다.
산토끼였다.
여기 저기 다람쥐들도 초비상사태를 알린다.
찌르레기도 노래를 멈추고 가슴을 떤다.
연록의 푸르름에 물들고자 하던 참새들도 뱁새들도 화들짝 놀라 푸들푸들 도망간다.
손님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고요한 일상의 평화를 깨는 불청객인게지.
3
증조할아버지는 동학농민봉기 때 남지대 최후의 잔류부대에 남아 있다가 이곳에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산이 온통 바위덩어리인 것처럼 아니 거대한 황토무덤인 것처럼 헐벗어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피가 썪고 그 혼들이 편히 잠들지 못해서 풀도 나무도 슬피 울며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을 품으면 총알도 칼날도 파고 들 수 없다던 부적과 꺾인 죽창 그리고 벌겋게 물든 낡은 적삼이 하늘하늘 날리고 있는 산등성과 골짜기를 아무도 들어가 자기의 자식, 자기의 부형, 자기의 남편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람들은 서럽게 장독대에 엎드려 흐느끼기만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더러는 캄캄한 밤중에 몰래 산에 올라가서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 집에 남은 식구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거나 어린아이 아니면 해 떨어지면 사립도 못 나서는 겁쟁이 아낙네들뿐이었기 때문에 산에 널부러진 시신은 나부끼는 부적, 그래도 놓지 못하고 꼭 움켜쥔 부러진 죽창과 함께 서서히 썩어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완전한 평정'이 선포되고 나서도 달이 두어 번 바뀐 후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산으로 기어 올랐다.
어린 아이던 할아버지도 사람들의 틈에 끼어 산등성을 더듬고 골짜기를 흝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소년은 그냥 흩어져 있는 돌덩이를 주어다 무덤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해마다 참꽃 필 무렵 생왕을 데리고 와서 돌무덤 앞에 성묘했다.
분명히 여기 어딘데...
생왕은 기를 쓰고 기억을 더듬어 증조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았지만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꼭 묘소를 찾아야 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애초에 돌아가신 분의 시신이 묻힌 곳도 아니다.
하기야 무덤이란 게 무엇인가?
살과 피와 뼈가 썩은 흙, 돌, 풀과 나무가 아니던가?
이 골짜기 어느 돌덩이 하나, 어느 풀과 나뭇잎 하나에도 증조할아버지의 핏방울이 튀어박히지 않은 것이 무엇이던가?
생왕은 조금 넓적한 바위 위에 손수건을 털어 깔아놓고 그 위에 과자 몇 개와 종이컵에 소주를 부어 올려놓고는 성묘했다.
생왕의 기억 맨 밑바닥은 바로 이 증조할아버지의 묘소다.
아버지는 그 때에도 집에 계시지 않았고 떡과 나물, 몇 가지의 과일 그리고 막걸리 한 병을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성묘하러 온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생왕은 멀고도 먼 산길을 등성이를 몇 개나 넘어 여기 왔던 것이다.
사실 다리가 아파서 그냥 꼬꾸라질 것만 같았지만 만약에 칭얼거리기라도 한다면 어머니는 분명히 생왕을 산길에 팽개치고 가실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씩씩거리며 따라온 길이었다.
그렇게 끙끙거리고 줄달음치듯 넘고 넘은 산고개였기에 길섶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하얀 보자기를 바위 위에 펴고 그 위에 능금, 배, 밤과 대추 같은 과일들을 몇 개씩 올려놓고 잔에 막걸리를 채운 후 성묘하자고 할 때까지 생왕은 그곳이 온통 예쁜 참꽃으로 뒤덮여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몇 차롄지 할아버지를 따라 땅에 손바닥을 붙이고 고개를 숙인 후 할아버지가 손에 쥐어준 능금 한 조각과 어머니가 입에 떼어 넣어준 떡을 삼키고 난 후에야 생왕은 '참꽃! 참꽃!'을 연거푸 외치며 깡쭝깡쭝 뛰었다.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꽃가지를 꺾어 어머니의 치마폭에 던지고 또 뛰어 다니며 꽃가지를 꺾느라고 정신을 잃었다.
"이제 그만 가자구나."
바위에 걸터 앉아계시던 할아버지가 일어서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털어내셨고 어머니는 보자기에 과일이며 떡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긁어모아 쌌다.
생왕에게는 아직도 꺾어야 할 꽃이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잿마루를 향하여 산길을 오르셨지만 생왕은 정신없이 꽃을 흔들며 뛰고 있었다.
"꽃 그만 꺾고 이제 그만 가자."
어머니의 독촉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손목을 잡아 끄셨을 때는 울상이 되어서 털썩 주저앉았다.
"집에 가야지.
저게 무슨 소리냐?
아부 오네, 아부가 잡으러 오네.
저 봐라, 윙윙하며 아부가 잡으러 오네.
아우 무서워라. 얼릉 가자. 아부가 잡으러 온다."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피시며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시늉을 하신다.
커다란 소나무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윙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부가 오는 소리에 놀라 소나무도 부들부들 떤다고 한다.
생왕은 갑자기 겁이 왈칵 쏟아져서 어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는 생왕을 들쳐 엎고 저만큼 앞서 가시는 할아버지를 따라잡기 위해 달음박질을 하셨고 생왕은 공포에 질려 어머니의 등에 얼굴을 깊이 묻은 채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왕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아부'다.
바람이 솔가지를 흔들면서 윙윙 울었다.
생왕은 소름이 쫙 끼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아부가 오는가보다.
생왕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가누고 일어서서 죽을힘을 다하여 재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저만큼 앞서 산길을 오르시는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잡아야 한다.
아부가 덮치기 전에!
김병장은 전화기를 틀어 다급하게 속삭였다.
"전경사님!
저놈이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목이 탔던지 잠시 앉아서 쐬주병을 까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움츠리고 경계를 살피고는 이내 뛰기 시작하네요.
아니, 저놈의 영감탱이가 왜 저렇게 산을 잘 타지?
빨치산이었나봐요.
....
아, 네 네 물론 놓치지 않게 잘 따라붙겠습니다.
전경이나 빨리 출동해주세요.
...
아무리 산을 잘 타는 빨치산이라 해도 늙다린데 놓칠 리야 있겠습니까?
빨리 출동이나 하세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해가 지고나면 수색도 어려워질 테니까요."
===============
[여기서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짧은 역사 한 토막 새겨봅니다]
1894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김개남 등 지도부가 체포되고, 논산, 태인 등지에서도 잇달아 패해 남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농민군들은 전라도의 남쪽 끝 장흥(서울에서 정남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재기를 다지는 대반격을 도모하게 된다.
장흥의 이방언 장군이 이끄는 3만여 농민군은 석대들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지만 화승총과 대창, 몽둥이로 무장한 농민군은 일본군의 신식무기 앞에서 수 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하고 만다. 이때 최후의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던 이방언도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고 만다.
장흥 농민전쟁은 동학군 최후의 항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장흥군은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최후의 혈전지였던 '석대들'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세우고, 매년 이날의 원혼들을 달래는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재밋는 이야기 하여 주세요
오 오냐 그러마 이야기 하마
옛날에 간날에 어느 산골에에에
실없는 연기가 자꾸 나기에
웬 일인가 하고 찾아 갔더니
다람쥐 두마리 소풍을 와서
도토리 궈먹느라 그리 했더라 ]
금의환향(錦衣還鄕)
1
"생애 이놈의 새끼가 마중 나왔으면 월매나 좋아."
장흥읍에서 마을로 가는 버스를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하자 생희는 마중 나오지 않은 동생에게 짜증이 뻗어간다.
"40년 만에 만나는 성님은 월요일 봐도 되고 화요일 봐도 되는디 주일 예배는 빠져서는 안 된다니 그것이 말이나 됑가?
망할놈의 새끼.
해마다 보는 것도 아니고 사십년 만이네 사십년.
한 주 설교 빠지면 벼락 떨어진당가?
부목사도 있고 전도사도 많어.
번지르한 차도 있으니께 마중 좀 나왔으면 공항에서부텀 집에까지 서너시간이면 쪼르륵 갈것인디 생전에 한번 고향 찾아오는 늙은이들 버스타고 시달리고, 기달리다 지쳐 빠지라고 그놈 새끼가 그냥..."
혼자서 열이 받친 생희가 손을 휘휘 저어가며 소리소리 지른다.
"꼭 공항에 마중나와야 하것냐?
너도 그냥 집에서 기다리지 우리가 어린 아이들이냐?
어련히 찾아가려고.
그리고 번지르르한 차타고 쪼르르 오는게 대수냐?
간만에 고국방문하는 것잉께 버스 타고 사람들 부딪치며 몸 냄새 맡으며 여기저기 도로변에 스치는 사는 모습 보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나는 버스도 별로고 삼등야간열차 타고 올락했다.
옛날에 참 서울 한번 갔다 오려면 목포에서 벌써 자리 다 차버리고 영산포서 타면 언제나 자리가 없어서 밤새 열 서너시간을 서서 흔들리며 땀 냄새 부데끼며 다니던 추억이 많은 삼등열차인디."
"하이고, 그리울 것도 쌔고 쌨소.
야간삼등열차가 다 그립게.
그나저나 시시간이나 어찌께 기다릴까라잉.
성님도 겁나게 피곤할건디."
“금매 그라요.
차 타고 올 때까정은 좋았는디 시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당께는 겁나게 고단해뿌네.”
선애도 늙은 티를 내느라고 더수기를 주물렀다 허벅지를 주물렀다 해가며 푸념을 시작한다.
“세 시간이면 걸어가고도 남을 시간 아니냐?
기다리는 것이 훨씬 피곤한 법이니라.
날씨도 좋고 산천도 좋고, 걸어가자꾸나.”
읍에서 서쪽으로 뻣은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탐진강을 건너 자울재를 넘으면 고향마을이다.
어렸을 적에는 간혹 종종걸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장에 오기도 한 십여리 길이다.
“오빠가 이팔청춘이요?”
“그러고 보니 자울재 밑에 증조할아버지 산소가 있잖냐?
따로 성묘 오고 하느니 아조 이참에 성묘하고 갈 겸 걸어가자.”
“거기 더 이상 질도 없고 못 찾아.
오빠 떠난 뒤로 증조할아버지 묘에는 우리도 한 번도 성묘를 못했구마는.
그래서 어디가 묏둥인지 알도 못하지만 산에 샛길이 없어저가지고 찾아가지도 못한당께.”
“니들은 안 다녀봤응께 모를 것이다마는 나는 찾을 수 있어야.
슬슬 걸어감시로 동네 구경도 하고 성묘도 하고 그랑것이 낫제 여기서 세 시간이나 허둥거리며 보내야 쓰것냐?”
“나는 기다릴라요.
평지 걷기도 힘든데 산고개를 어찌 걸으라고.”
선애가 어깃장을 놓자 생희가 힘을 얻은 듯 큰 소리로 오라비를 나무란다.
“거 보씨요. 성님도 힘들어하는디 오빠 혼자 우기먼 쓰것소?
잔말 말고 쩌그 시장통이나 구경함시로 버스 오기 기다립시다.”
“그럼 너는 니 올캐하고 버스 타고 오고 나는 걸어가마.
가다가 성묘도 하고 그래도 집에는 내가 더 먼저 가 있을 것이다.”
“아따 그놈의 쇠고집 누가 말려!
그라먼 오빠나 걸어가씨오. 우리는 여그서 기다렸다가 차타고 갈라우.
그란디 걸어갈라면 지팽이는 있어야제?”
대충 이렇게 의견이 합의되어 셋은 정류장 옆에 있는 작은 잡화가게에 들어가 지팡이를 찾았다.
생희가 팔뚝만큼 굵직한 몽둥이 하나를 집어든다.
“이놈이 좋네. 서산대사 지팽이만키로.”
“그거 너무 무겁지 않냐?”
“한나도 안 무거.
한번 들어봐요.
보기만 퉁퉁해각고 무겁게 보이제 아조 가풋하니 잡고 짚기도 좋고 이거 사각고 짚고 가.”
들어보니 생희 말마따나 두툼한 것이 손잡이 쥐기도 편했고 생각보다 아주 가벼웠다.
장삼만 걸쳤다면 그래, 사명대사 품 나겠구나.
어느덧 재 하나 넘자고 지팡이 신세를 저야 하다니.
“오빠는 그라먼 얼릉 가씨오.
나는 성님하고 읍내 구경이나 하다가 차 타고 갈라우.”
이 지경이 쇠전머리였겠는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언제 들어섰는지 벌써 고물티가 흐르는 상가를 지나자 금방 잡초 우거진 강둑을 만났다.
어린 시절 아득하던 길이 이렇게 엎드러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것이 도저히 실감 나질 않는다.
순지로 넘어가는 탐진강을 뛰어넘던 노두 자리에 어엿한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었다.
선거 때만 되면 이곳에 다리를 놔주겠다는 애국애향 지사들의 스피커 소리가 이 마을 저 마을을 거처 산자락을 휘감아 쩌렁쩌렁 울려퍼지곤 했었지.
그놈의 공약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어 드디어 이렇게 다리가 됐을까?
비만 오면 노두는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버렸지.
그래서 비온 후에 읍에 나갈 일이라도 생기면 집 떠나기 전에 우선 노두가 보이던가부터 알아보곤 했었지.
예나 지금이나 이쪽은 그래도 밝아 보이는 삶의 아귀다툼으로 저쪽은 산 그림자처럼 무거운 고요함으로 마을은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담그면 금방 쪽빛으로 멍들 것만 같이 시리고 시린 물은 자잘한 강바닥의 돌맹이를 씻어내며 그렇게 이쪽과 저쪽을 딴 세상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2
초가지붕은 보이지 않았고 허름한 스레트를 얹은 작은 집들이 꼬막껍질을 엎어놓은 듯 산자락 밑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마을 앞에서 만난 주막은 이제는 늙은 태가 완연하게 쭈그러진 모습으로 퇴색된 ‘덕재구판장’간판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한 쪽 벽면에는 “이웃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 신고하여 상금타고 간첩 잡아 애국하자!”는 구호가 지워지지 못하고 마른 이끼와 흙투성이 누더기를 걸치고 들어박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지워지지 않은 문신이며 떼어낼 수 없는 혹이며 자손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우리네 유산인 것처럼.
생왕이 칙칙한 유리문을 어렵사리 밀고 가게 안에 들어서자 안쪽으로 나 있는 찌그러진 방문을 열고 노파가 고개를 내민다.
“멋 찾으시오?
그란디 첨보는 양반이네? 어서 왔소?
빠스가 온 것도 아닌디 언제 누 집에 왔을까?”
“아, 네, 지금 지나가는 중이외다.
소주나 한 병 살까 해서요.
안주할 만한 과자 부스러기 하고요.”
“쩌그서 집어 보시오.
그란디 요새도 걸어댕기는 사람 있네잉.
어디서 와각고 어디로 가요?”
“아, 네. 읍내에서 왔는디 자울재 넘어갈라고 그라요.
전에 요 옆으로 샛길이 나 있었는디 안 보이능구만요.”
“자울재를 넘어 가라우?
요새 누가 재 넘어댕긴다요?
그라고 샛길 없어진지가 원제적 야근디 샛길을 찾는당가?
있어도 거리는 인자 못 올라가요.
까시댕이가 꽉 어울려각고 땅도 안보여라.
쬐간 기다리면 빠스 올탱께 타고 가씨오.
우리 소시적에야 산 너머갈라먼 그 길밖에 없었응께 애리나 쓰리나 그 길로 댕겠지만 요새는 저렇게 삥 돌려서 큰길 내각고 하래도 맷차래썩 차가 댕기는디 누가 걸어서 산 넘것소.”
애리나 쓰리나 그 길로 다녔다는 말에 문득 생왕은 소학교 스승이 떠오른다.
덕재에서 매일 자울재를 넘어다니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마치고 처음 부임지가 생왕이 다니던 면소재지 소학교였다.
생왕은 날마다 아침이면 동구에서 선생님을 기다렸고 방가 후에는 교문에서 얼쩡거리가다 선생님이 나오시면 꽁무니에 붙어 종종걸음을 처 함께 마을까지 왔다가 터벅터벅 자울재를 오르시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선생님이셨다.
어느 날 산밭에 다녀오시던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아이고 선상님.
이러코롬 맨날 재를 넘어댕길라면 겁나게 심들 것인디 핵교 옆에 방을 얻든지 정 멋하면 우리 말에 살먼 훨썩 쉬울 것인디.”
“아닙니다, 할아버지.
애리나 쓰리나 재넘어 댕겨야제 쪼깐 펜하자고 산 너머 부모 계시는 집 놔두고 또 방 얻어 지내것습니까?”
이름이 김일성이어서 못된 아이들은 선생님이 지나가면 늘 “때려잡자-”해 놓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도망하곤 했다.
그럴라치면 선생님은 의미를 읽을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그냥 씨긋 웃곤 하셨다.
“그런데 아짐씨, 덕재에서 오래 사셨지라우? 그라먼 김일성선생님 기억하시오?”
“그쪽이 김일성선상님을 어찌께 아시오?
김일성선상님 돌아가신지가 언젠디.”
한 청년이 가게에 들어서려다 말고 까무라치게 놀라 벽 뒤로 몸을 움추려 숨기며 귀를 종근다.
“그랑께 시방 김일성선상님 찾아 왔어라우?
그 선상님 돌아가신지가 언젠디.”
“알지요. 살아계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문득 생각나는 분이어서요.”
“참말로 훌륭한 선상님이셨지라.
이런 산골 말에서 인물났다 했는디 국해이원도 못해보고 기냥 돌아가셨어라.”
대통령이 제일 훌륭하고 높은 사람이다.
그리고는 다음으로 국회의원님이시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는 거야 애들한테나 해보는 소리지만 그 다음으로 국회의원은 늘 뽑는 것이고 또 군마다 한 명씩 뽑는 것이니 마을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국회의원이 될 인물이라고 말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김일성선생님같은 분이 나라를 다스렸다면 얼마나 살기 좋아졌겠습니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착실하게 따랐다면 나라꼴이 이렇게 험하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선생님같은 분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품은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애석하게 세상을 뜨시니....”
“그란디 차도 안타고 멋땜시 자울재는 혼자 너머 가시오?”
“일행이 있지만 내가 먼저 가는 길이오.
산에서 볼 일도 있고 해서.”
벽 뒤에서 안쪽에 뒷바퀴를 꽂고 있던 청년의 귀에는 이렇게 전해졌는 모양이다.
“수령님이 그렇게 바라시던 통일도 이루시지 못하고 애석하게 세상을 뜨셨으니.....”
그는 담장 밑에 움츠려 은밀하게 몸을 숨기면서 손전화를 꺼냈다.
“여보세요, 보안과죠?
무장간첩 신고하려고요.
....
나요?
재대말년휴가와서 할머니 보러 덕재에 온 김병장인데 술 한 잔 마시려고 공판장에 왔다가 무장간첩을 발견한 겁니다.
....
아 글쎄 나이는 쾌 처먹은 것 같아 보이는데 옆에 아카보자동소총을 끼고 공판장 할머니를 위협하고 있어요.
김일성수령님을 존경해야 한다면서 수령이 다스려야 나라가 잘 된다고도 하고,
....
그 쥐새끼같은 놈이 글쎄 벌써 구판장할망구를 포섭했다니까요.
큰일이죠.
....
혼자가 아니고 산 속에 숨어있는 일당에게 지금 간다네요.
....
전경 일개중대 가지고 될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놈들 일당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군부대에 지원병공수라도 요청해야
....
예 예, 제가 놓치지 않도록 바짝 따라붙겠으니 속히 출동해주세요.
...”
청년은 전화기에 대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가게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산길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연신 걱정하는 노파를 뒤에 남기고 생왕은 소주병과 과자를 담은 종이봉지를 흔들며 지팡이로 우거진 엉걸퀴를 젖히고 산길을 올랐다.
벌써 무슨 지팡이를 짚고 다니느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두툼한 지팡이를 사서 손에 쥐어준 생희가 고마웠다.
잔목이며 찔레며 가시엉겅퀴가 뒤엉켜 몽둥이처럼 두툼한 지팡이가 없었다면 발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한 발 앞을 내다볼 수 없이 칙칙하게 뒤엉킨 잡초가 발목에 휘감긴다.
어렸을 적 다니던 이 길, 이 산은 잡초도 크게 자라지 못하던 헐벗어 보이던 그런 황무지 같았었다.
여기 저기 폭격에 패인 벌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앙상한 소나무가 몇 구루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고개마루까지 휑하니 뚫려 사람들이 오르내리던 개미처럼 꼬물거리는 모습이 환히 보였다.
산림보호하자고 엄청 심하게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촌가의 아궁이를 보살피는 것은 역시 이 산밖에 없었기에 구둘장의 얼음을 걷어내 주는 것은 여기 얽히고설키던 엉겅퀴였다.
어디 그 뿐이던가?
농민의 피땀을 쥐어 짤줄만 알았지 땀방울이 쌀과 보리로 엉그는 것을 누가 보살폈는가?
봄마다 한 생을 멋지게 장식해보자고 쭈삣쭈삣 언 땅 비집고 기어오르던 저 잡초들 아니던가?
안다.
알면서도 너들의 그 애절한 삶을 잘라내어 논밭에 깔아야만 하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애린 가슴도 이해해주렴.
그렇게 피로 땀으로 손바닥만한 땅뙤기를 일구고 지키던 그 마음들이 무엇에 홀렸는지 꼬임을 당했는지 모두 떠나버린 후 초목은 춤을 춘다.
산은 싱싱한 푸름을 한창 뽐내고 있었고 뜨겁지 않은 날씨에 바람도 살랑였지만 금새 이마에 구슬땀이 맺혀 흘러 내렸다.
여기서 깨꼬리가 깨르르륵 끼욱 하고 부른다.
바로 저기서 깍꿍하며 뻐꾸기가 화답한다.
초여름 숲은 풀과 나무에게만 싱싱한 게 아닌가보다.
덤불 속에서 누군가가 화들짝 놀라 뛰어나간다.
산토끼였다.
여기 저기 다람쥐들도 초비상사태를 알린다.
찌르레기도 노래를 멈추고 가슴을 떤다.
연록의 푸르름에 물들고자 하던 참새들도 뱁새들도 화들짝 놀라 푸들푸들 도망간다.
손님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고요한 일상의 평화를 깨는 불청객인게지.
3
증조할아버지는 동학농민봉기 때 남지대 최후의 잔류부대에 남아 있다가 이곳에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산이 온통 바위덩어리인 것처럼 아니 거대한 황토무덤인 것처럼 헐벗어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피가 썪고 그 혼들이 편히 잠들지 못해서 풀도 나무도 슬피 울며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을 품으면 총알도 칼날도 파고 들 수 없다던 부적과 꺾인 죽창 그리고 벌겋게 물든 낡은 적삼이 하늘하늘 날리고 있는 산등성과 골짜기를 아무도 들어가 자기의 자식, 자기의 부형, 자기의 남편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람들은 서럽게 장독대에 엎드려 흐느끼기만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더러는 캄캄한 밤중에 몰래 산에 올라가서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 집에 남은 식구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거나 어린아이 아니면 해 떨어지면 사립도 못 나서는 겁쟁이 아낙네들뿐이었기 때문에 산에 널부러진 시신은 나부끼는 부적, 그래도 놓지 못하고 꼭 움켜쥔 부러진 죽창과 함께 서서히 썩어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완전한 평정'이 선포되고 나서도 달이 두어 번 바뀐 후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산으로 기어 올랐다.
어린 아이던 할아버지도 사람들의 틈에 끼어 산등성을 더듬고 골짜기를 흝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소년은 그냥 흩어져 있는 돌덩이를 주어다 무덤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해마다 참꽃 필 무렵 생왕을 데리고 와서 돌무덤 앞에 성묘했다.
분명히 여기 어딘데...
생왕은 기를 쓰고 기억을 더듬어 증조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았지만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꼭 묘소를 찾아야 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애초에 돌아가신 분의 시신이 묻힌 곳도 아니다.
하기야 무덤이란 게 무엇인가?
살과 피와 뼈가 썩은 흙, 돌, 풀과 나무가 아니던가?
이 골짜기 어느 돌덩이 하나, 어느 풀과 나뭇잎 하나에도 증조할아버지의 핏방울이 튀어박히지 않은 것이 무엇이던가?
생왕은 조금 넓적한 바위 위에 손수건을 털어 깔아놓고 그 위에 과자 몇 개와 종이컵에 소주를 부어 올려놓고는 성묘했다.
생왕의 기억 맨 밑바닥은 바로 이 증조할아버지의 묘소다.
아버지는 그 때에도 집에 계시지 않았고 떡과 나물, 몇 가지의 과일 그리고 막걸리 한 병을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성묘하러 온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생왕은 멀고도 먼 산길을 등성이를 몇 개나 넘어 여기 왔던 것이다.
사실 다리가 아파서 그냥 꼬꾸라질 것만 같았지만 만약에 칭얼거리기라도 한다면 어머니는 분명히 생왕을 산길에 팽개치고 가실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씩씩거리며 따라온 길이었다.
그렇게 끙끙거리고 줄달음치듯 넘고 넘은 산고개였기에 길섶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하얀 보자기를 바위 위에 펴고 그 위에 능금, 배, 밤과 대추 같은 과일들을 몇 개씩 올려놓고 잔에 막걸리를 채운 후 성묘하자고 할 때까지 생왕은 그곳이 온통 예쁜 참꽃으로 뒤덮여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몇 차롄지 할아버지를 따라 땅에 손바닥을 붙이고 고개를 숙인 후 할아버지가 손에 쥐어준 능금 한 조각과 어머니가 입에 떼어 넣어준 떡을 삼키고 난 후에야 생왕은 '참꽃! 참꽃!'을 연거푸 외치며 깡쭝깡쭝 뛰었다.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꽃가지를 꺾어 어머니의 치마폭에 던지고 또 뛰어 다니며 꽃가지를 꺾느라고 정신을 잃었다.
"이제 그만 가자구나."
바위에 걸터 앉아계시던 할아버지가 일어서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털어내셨고 어머니는 보자기에 과일이며 떡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긁어모아 쌌다.
생왕에게는 아직도 꺾어야 할 꽃이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잿마루를 향하여 산길을 오르셨지만 생왕은 정신없이 꽃을 흔들며 뛰고 있었다.
"꽃 그만 꺾고 이제 그만 가자."
어머니의 독촉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손목을 잡아 끄셨을 때는 울상이 되어서 털썩 주저앉았다.
"집에 가야지.
저게 무슨 소리냐?
아부 오네, 아부가 잡으러 오네.
저 봐라, 윙윙하며 아부가 잡으러 오네.
아우 무서워라. 얼릉 가자. 아부가 잡으러 온다."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피시며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시늉을 하신다.
커다란 소나무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윙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부가 오는 소리에 놀라 소나무도 부들부들 떤다고 한다.
생왕은 갑자기 겁이 왈칵 쏟아져서 어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는 생왕을 들쳐 엎고 저만큼 앞서 가시는 할아버지를 따라잡기 위해 달음박질을 하셨고 생왕은 공포에 질려 어머니의 등에 얼굴을 깊이 묻은 채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왕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아부'다.
바람이 솔가지를 흔들면서 윙윙 울었다.
생왕은 소름이 쫙 끼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아부가 오는가보다.
생왕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가누고 일어서서 죽을힘을 다하여 재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저만큼 앞서 산길을 오르시는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잡아야 한다.
아부가 덮치기 전에!
김병장은 전화기를 틀어 다급하게 속삭였다.
"전경사님!
저놈이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목이 탔던지 잠시 앉아서 쐬주병을 까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움츠리고 경계를 살피고는 이내 뛰기 시작하네요.
아니, 저놈의 영감탱이가 왜 저렇게 산을 잘 타지?
빨치산이었나봐요.
....
아, 네 네 물론 놓치지 않게 잘 따라붙겠습니다.
전경이나 빨리 출동해주세요.
...
아무리 산을 잘 타는 빨치산이라 해도 늙다린데 놓칠 리야 있겠습니까?
빨리 출동이나 하세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해가 지고나면 수색도 어려워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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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짧은 역사 한 토막 새겨봅니다]
1894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김개남 등 지도부가 체포되고, 논산, 태인 등지에서도 잇달아 패해 남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농민군들은 전라도의 남쪽 끝 장흥(서울에서 정남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재기를 다지는 대반격을 도모하게 된다.
장흥의 이방언 장군이 이끄는 3만여 농민군은 석대들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지만 화승총과 대창, 몽둥이로 무장한 농민군은 일본군의 신식무기 앞에서 수 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하고 만다. 이때 최후의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던 이방언도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고 만다.
장흥 농민전쟁은 동학군 최후의 항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장흥군은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최후의 혈전지였던 '석대들'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세우고, 매년 이날의 원혼들을 달래는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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