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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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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작성일2015-04-10 18:09 조회1,25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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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로 너무도 훌륭하여 퍼왔다.

20
1950년 6월 11일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일 0시 갑자기 해제됐다. 더구나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

이런 해이된 사건들이 워싱턴과 이승만과 한국군이 완벽히 삼위일체를 이루어 일어났다. 이와 같이지금 까지 인내하던 북한의 반격이 있자 미국은 기다리던 것이 왔다. 드디어 미국이 간절히 바라던 대대적인 전쟁이 주어져 미국의 능력을 또 한 번 펼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은 박헌영 등을 간첩으로 들여보내서 북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이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을 때 미국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북한은 자신이나 소련이 발송하지 않은 이상한 전파가 어디론가 발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풀 수 없는 암호 전신문은 김일성과 함께 간 일행이 발송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 준비 상황이었으므로 색출 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덮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게 분열상을 보이면 믿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신자도 자신을 색출하여 전열을 흩뜨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암호발신을 감행한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전쟁 때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리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년 여름에 리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련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 건물 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그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때 리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을설은 최고사령부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 니다. 1952년 8월 3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박헌영도 그들이 체포당하면서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당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3월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3월 3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정보를 미국에 빼돌렸으며 한국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박헌영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서 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라고 증언하였다.

박헌영은 6.25 당시 자기 집 변소에서 미군부대에 무전을 치다가 주세죽(前妻)에게 들켜 체포되었습니다.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은 1953년 박헌영과 리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거물 북조선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의자 13명 가운데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다. 박헌영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년 후인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어 12월 15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피의자들은 간첩 혐의와 반혁명적 모략, 무장 폭동 기도 혐의 등을 법정에서 전부 시인했다. 예를 들어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자신을 매국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 죄악을 더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리승엽은 생명이 둘이 있어 둘다 바친다 하더라도 사죄에는 모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박헌영 공판 마지막 날, 판사가 박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일제 때 변절했던 것에 관해서 솔직히 밝히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헌영은 "일제 때 변절한 것을 밝히면 날 총비서 시켜주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박현영이 변절한 것은 '고문'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고,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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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항일과 반미는 양심을 가진 자라면 의무로 생각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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