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기2 - 20세기 위대한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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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옮김 작성일2015-04-13 13:38 조회1,3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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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4월 12일 《우리 민족끼리》
김일성주석은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 (2)
로동신문 2012년 4월에 실렸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친선 및 문화협조 로씨야협회 전 위원장이였던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의 글을 소개한다.
글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동지의 정치적영민성과 통찰력은 자신의 후계자를 선택하는데서 전면적으로 발현되였다.
조선인민은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령도밑에 거대한 사회경제적 및 정치적변혁을 이룩하였다.
두분의 걸출한 위인들의 령도밑에 이룩된 성과로 하여 조선인민의 민족적자부심과 긍지는 비상히 높아졌으며 온 세계가 조선인민을 지난날의 연약한 나라와 민족이 아니라 힘있고 재능있는 나라와 민족으로 선망하게 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혁명을 진두에서 령도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로숙한 세계정치의 원로로서 제2차 세계대전시기부터 지난 세기 마감까지 사회주의혁명을 령도하신 불세출의 수령이시였다.
조선에서는 김일성동지의 생애와 활동력사를 놓고 태양민족부흥의 력사라고 당당하게 말하고있다.
이 모든 귀중한 유산이 김일성동지의 충실한 전사이시며 그이의 위업의 계승자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에 의해 고스란히 이어진데 대하여 대단히 만족스레 생각한다.
김일성동지의 생전의 뜻에 따라 김정일동지는 당과 군대와 국가를 령도하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대로 나라를 사회주의길로 성과적으로 인도해오시였다.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 로씨야인민들의 심장속에 살아계신다!
김정일동지는 곧 김일성동지이시다!
추억
나의 기나긴 생애의 절반나마 내가 사랑하는 영웅적조선인민과 밀접히 련결되여있다.
1945년 8월에 나는 쏘련태평양함대에 소속되여 조선해방작전에 참가하였다.
조선에 있는 나의 벗들은 모란봉에 있는 해방탑부각작품에 해병복을 입은 군인이 나를 형상한것이라고 말하고있다.
한때 조각가가 나를 놓고 해병을 형상한 일은 있지만 그 해병이 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1952년부터는 쏘베트보도국 대표로 그리고 《쁘라우다》 기자로 평양에 주재하였다.
3년반동안 평양에 있으면서 나는 조선인민에게 그들에 대한 이전 쏘련과 국제사회계의 련대성과 지지를 전해주었고 국제사회계에는 조선인민의 전투적 및 로력적위훈에 대하여 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조선인민을 적극 고무하도록 하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엽까지 나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면서 조선인민과의 각이한 련대성행사들을 진행하는데 각방으로 도움을 주었다.
1988년에 김일성동지께서는 나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친선훈장 제1급을 수여해주시였다.
1991년 8월사변후 나는 년로보장으로 넘어갔다.
반혁명적인 보도수단들이 조선을 반대하여 발광증을 한창 일으키던 1993년에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의 위대한 령도자들인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를 그리고 전통적인 두 나라 사이의 친선을 옹호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친선 및 문화협조협회를 재건할것을 발기하였다.
재건회의에서 나는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1997년에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동유럽지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친선협회 책임자들의 대표자회에서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지 및 련대성동유럽쎈터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기간에 나는 10여차에 걸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였으며 세차례나 김일성동지의 공식접견을 받았고 조선인민의 민족적명절과 내가 초청되였던 국가적인 행사장들에서 그이를 여러번 만나뵙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내가 조선에서 느낀 수많은 체험들 특히 20세기의 위인이신 김일성동지를 몸가까이 뵈옵던 나날들의 력사적추억과 감동깊던 인상들을 이 크지 않은 한편의 글에 다 담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선을 알게 되면서 나는 조선인민이 김일성동지의 세련된 령도에 의하여서만 가장 파렴치한 강적을 반대하는 력사에 류례없는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고 전후복구건설과 여러 단계의 사회주의혁명에서 커다란 성과를 달성할수 있었다는것을 깊이 확신하게 되였다.
나는 이것을 강조하고싶다.
부언컨대 김일성동지는 대단한 락천가이시였다.
나는 그이께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한두번만 듣지 않았다.
1952년초에 내가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 조선에서는 전선이 기본적으로 고착되고 전쟁은 장기성을 띠게 되였다.
무장과 기술장비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강적을 반대하는 장기전을 견디여낼수 있는 인적 및 군사적잠재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지 하는것이 걱정되였다.
그러나 전선에서의 사태발전은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한다는것을 보여주었고 나의 우려는 점차 감탄으로 바뀌였다.
나는 불타는 고지들을 돌아보고 그 방위자들인 인민군용사들을 만나보면서 그들이 미군장성들이 요란하게 선전하던 침략적인 대공세를 어떻게 물리쳤으며 전투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국야만들이 조선땅에서 어떤 강도행위를 하는가 하는것도 목격하게 되였다.
계산에 의하면 출격한 미국비행기의 6분의 1만이 자기 군대를 엄호하기 위한것이였고 그 나머지는 평화적주민들과 전쟁과는 인연이 없는 공장과 농촌들을 야수적으로 초토화하기 위한것이였다.
37개월간의 전쟁기간에 대양건너에서 온 이 야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공으로 80만회의 전투출격을 하였다.
실지적으로 청소한 인민공화국의 모든 살림집들과 문화보건시설들, 공장들이 재더미로 되였다.
폭탄과 포탄이 비발치는 속에서도 후방인민들은 무기와 탄약생산을 계속하고 각방으로 전선을 원호하였으며 전후복구발전계획을 세워나가며 높은 창조적열의를 발휘하였다.
방송을 통하여 자주 전해지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의 힘있는 연설들과 그분의 락관주의와 최후승리에 대한 굳은 확신은 전체 조선인민과 함께 나자신에게도 신심을 안겨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느날 나와 담화를 하시면서 미국놈들은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정신력을 알지 못하고 우리 나라에 달려들었다, 이제 력사는 작은 나라가 대국을 쳐부시는 전례없는 승리를 기록하게 될것이다라고 확신에 넘쳐 교시하시는것이였다.
물론 승리의 날은 아직 멀리에 있었다.
그날까지 조선인민은 수다한 난관과 시련의 고비를 넘겨야 하였다.
사회주의조선을 반대하는 미제의 침략은 제2차 세계대전후 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의 첫 대결이였고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국제반동이 사회주의견고성을 타진해보고 그것을 말살하며 자기의 세계제패확립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한 위험천만하고 음험한 모험전쟁이였다.
때문에 조선인민의 승리는 자기 조국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새 생활을 건설할 권리를 지켜내는것으로 될뿐아니라 세계사회주의와 그의 존엄을 지켜내는것으로도 되였다.
하여 그때도 지금도 리성있는 사람들은 조선인민의 승리가 세계사적의의를 가진다고 말하는것이다.
미국놈들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전쟁은 72시간만에 끝날것이다.》라고 지껄이였다.
많은 자본주의나라 정치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조선반도에서는 이런 예언을 뒤집어엎는 기적들이 일어났다.
결과 미국은 전쟁에서 패하였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조선인민에게 어디서 이런 힘이 생겼으며 어떻게 이런 놀라운 승리가 이룩되였는가. 누가 이런 기적을 창조하였는가.
전체 조선인민과 조선인민군은 위대한 수령이시고 최고사령관이신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가렬한 격전마다에서 무비의 대중적영웅주의를 발휘하여 미제의 강대성의 신화를 산산쪼각낸것이다.
나는 전쟁시기 김일성동지께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총포성이 울부짖는 최전방에 나가시여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시면서 동서고금의 군사교범들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독창적인 전법들을 창조하시여 싸움마다에서 통쾌한 승리를 안아오던 사실들에 특별히 감동되였다.
전쟁의 매 단계마다에서 그이께서는 실로 예측불가능한 독창적인 전술적방안들을 내놓으시여 적들에게 련전련패의 쓴맛을 톡톡히 보여주시였다.
조국해방전쟁에서 조선인민의 승리는 철두철미 김일성동지의 두리에 군대와 인민의 굳게 단결된 힘이 낳은 세기적기적이였으며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군사사상과 령군술의 승리였다.
이 불멸의 승리는 대를 이어가며 길이 전해질것이다.
나와 나의 처 따마라는 내가 50여년전에 찍은 조선정전협정문에 수표하시는 천재적령장이신 김일성동지의 사진을 가보로 고이 보관하고있다.
그이께서는 흰 원수례복을 입고계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참가자들과 악수를 나누신 다음 천천히 책상에 앉아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부터 협정문이 들어있는 문서철을 받으시였다.
협정비준이 끝나자 장내에서는 기쁨과 감격의 파도가 굽이쳤다.
모두가 김일성동지를 열렬히 축하하였다.
나도 그이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내가 그날 영광스럽게도 력사에 남긴 김일성동지의 모습은 이른바 《세계적인 강대국》과 맞서 청소한 사회주의의 전초선을 굳건히 지켜내신 20세기의 영웅, 위대한 정의의 수호자의 모습이였다.
그 거룩한 모습을 심장에 새기고 나는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을 떠나게 되였다.
내가 잊을수 없는 령장의 모습을 다시 뵈옵게 된것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후인 1968년 2월초였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나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뽀노마료브와 함께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다.
바로 그 시기에는 《푸에블로》호사건으로 하여 조선에 다시금 전쟁발발의 긴장한 정세가 조성되여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서 미해군의 《보이지 않는 왕》으로 자처하던 무장간첩선이 나포되자 미국놈들은 악에 받쳐 조선반도주변에 저들의 해군무력을 대대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미국놈들은 조선이 사죄할것과 《푸에블로》호를 즉시 돌려줄것을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원자탄사용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를 접견하신 석상에서 《푸에블로》호사건 전후사태발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신 다음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절대로 배를 놓아주지 않을것이며 1953년 패배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미국놈들에게 다시한번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미국의 계속되는 위협에 대처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며칠후에 진행된 조선인민군이 정규무력으로 개편된 기념행사에서 하신 연설에서 미제의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것이라는것을 온 세계의 면전에서 선언하시였다.
나는 그이의 유명한 연설문을 읽어보고 김일성동지께서 자기 군대와 인민의 힘을 얼마나 굳게 믿고계시며 또한 얼마나 굳센 의지와 담력을 지니고계시는가에 대하여 조선전쟁후 다시금 느끼게 되였다.
《푸에블로》호사건에 이어 그후에 계속된 미국간첩비행기 《EC-121》호사건이나 판문점사건도 미국이 저들이 꾸민 도발인것으로 하여 매번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서야 해결되였다.
세계는 또다시 20세기의 위인-정의의 수호자의 당당한 모습을 보게 되였다.
그후 쏘련과 세계출판물들은 조선인민군의 위력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그 전신인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1930년대초부터 15성상이나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힘겨운 영웅적투쟁을 벌려온데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당시 일제놈들도 조선의 새로운 무장투쟁이 큰 규모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고있다는데 대하여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본총독부의 공식자료에 의하면 1930년대 상반기에만도 조선유격대가 약 2만 4천여회나 일제기관과 군사대상들을 습격하였다고 밝히였다.
1939년 한해동안에 항일유격대는 일제를 반대하여 4천여차의 전투작전들을 진행하였다.
그 시기 쏘련출판물은 김일성동지께서 이끄시는 유격부대들이 《아시아제패일본전략에 큰 돌파구를 내고있다.》고 썼다.
김일성동지께서는 1940년대 상반기 국내외의 정세를 통찰력있게 분석하시고 쏘련, 중국과 조선의 국제련합군창설구상실현에도 적극 참가하시였다.
그러면서도 그이께서는 국제련합군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국동북항일련군의 독자성을 철저히 보장하도록 하시였다.
국제련합군이 조직되자 원동에서의 정세는 국제혁명에 리롭게 발전하였으며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국제련합군을 조직하고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기울이신 크나큰 로고는 혁명투쟁에서 매 나라의 독자성과 국제적인 련대와 협조의 원칙을 옳바로 배합하는 빛나는 모범으로 되였다.
나는 어느 한 기록영화의 화면을 통하여 조선의 항일유격대원들이 참가한 국제련합군의 의식장면을 볼수 있었다.
이것으로 하여 나는 각이한 시기에 진행된 조선의 혁명무력의 열병식을 3번이나 볼수 있는 행운을 지닌바 있다.
첫번째가 앞서 말한 1942년 여름 하바롭스크부근의 기지에서 본 국제련합군의 창설을 기념하는 분렬행진이였다.
그때 김일성동지께서 쏘련원동군 사령관 아빠나쎈꼬를 비롯한 군사지휘관들과 함께 분렬행진을 사열하시였는데 조선유격대원들의 부대가 맨 앞장에서 붉은기를 높이 들고 행진해나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김일성동지께서 나라를 통채로 빼앗긴 엄혹한 조건에서 이런 훌륭한 인민혁명무력을 키우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로고를 바치시였을가하고 생각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이끄신 영웅적인 유격투쟁은 조선주둔 일본군을 격멸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화로 보기도 하고 내가 직접 목격한 두번째 조선혁명무력의 열병식은 1953년 7월 28일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경축하여 진행된 열병식이였다.
나는 대단히 흥분하여 그 엄숙하고 장엄한 장면들을 사진기렌즈에 담아나가던 일을 잊을수 없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흰 원수례복을 입고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주석단에 서시여 열병식참가자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내시였는데 그이의 존함으로 명명된 광장으로는 바로 며칠전까지도 가렬한 전투들에서 영웅적위훈을 세운 인민군용사들이 승리자의 높은 긍지를 안고 만세의 환호를 올리며 보무당당히 행진해나갔다.
그때 김일성최고사령관께서 서계시는 주석단을 배경으로 찍은 나의 사진이 지금도 우리 집에 보관되여있다.
세번째로 내가 본 열병식은 1998년 9월에 진행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50돐경축 열병식이였다.
지난번 열병식에서도 그러했지만 나는 이 열병광장에서 조선혁명무력의 정치사상적면모와 불굴의 의지에 실로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열병식참가자들은 주석단에 계시는 김정일령도자께 충성의 맹세를 다지였다.
우렁찬 만세소리와 수령을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함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초대석에 있는 외국인들도 《조선의 군대는 수령의 군대》라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세상에 다시 없을 이 수령결사옹위의 열병대오를 바라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런 군대를 이길 힘은 없다.
조선의 군대가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자기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조선을 가만두지 않았을것이다.》 그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훌륭한 열병식은 김일성동지께서 혁명과 건설에서 군사에 첫째가는 힘을 넣을데 대한 구호를 제시하시고 혁명무력강화에 얼마나 많은 로고를 바치시였는가를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로씨야에는 《곰을 잡으려면 도끼를 단단히 잡고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맨손으로는 달려드는 사나운 짐승을 어쩌지 못한다.
사회주의나라 령도자가 군사사업을 걸써 대하면서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압살하려고 무력을 증강하고 압력을 강화하는데도 일방적으로 양보하면서 나라의 방위력을 약화시킨다면 그보다 더한 심중한 오유는 없다.
자기 손에 무장을 든든히 잡고 사생결단의 의지로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지킬 준비를 갖추지 못한 인민은 파멸후 그 누구에게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사태가 이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조선은 복잡한 국제정세속에서도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을 믿음직하게 지켜나가고있으며 세계무대에서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표명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앞날을 내다보면서 혁명활동의 첫 시기부터 혁명무력을 강화하시고 그에 의거하여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시였으며 조선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굳건히 지켜주시였다.
김일성동지는 끝없이 륭성번영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래와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계실것이다.
나는 나의 반생나마 위대한 수령이시고 탁월한 령장이시며 천재적위인이신 경애하는 김일성동지와 사연깊은 친분관계를 맺고있은데 대하여 더없는 긍지로 생각한다.
지금도 나의 귀전에는 《똘스찌꼬브는 나의 오랜 벗이요.》라고 하시던 김일성동지의 친근한 음성이 쟁쟁히 들려온다.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이신 김일성동지의 밝은 영상은 나의 심장속에, 인류의 심장속에 영원히 살아 빛날것이다.
김일성주석은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 (2)
로동신문 2012년 4월에 실렸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친선 및 문화협조 로씨야협회 전 위원장이였던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의 글을 소개한다.
글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동지의 정치적영민성과 통찰력은 자신의 후계자를 선택하는데서 전면적으로 발현되였다.
조선인민은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령도밑에 거대한 사회경제적 및 정치적변혁을 이룩하였다.
두분의 걸출한 위인들의 령도밑에 이룩된 성과로 하여 조선인민의 민족적자부심과 긍지는 비상히 높아졌으며 온 세계가 조선인민을 지난날의 연약한 나라와 민족이 아니라 힘있고 재능있는 나라와 민족으로 선망하게 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혁명을 진두에서 령도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로숙한 세계정치의 원로로서 제2차 세계대전시기부터 지난 세기 마감까지 사회주의혁명을 령도하신 불세출의 수령이시였다.
조선에서는 김일성동지의 생애와 활동력사를 놓고 태양민족부흥의 력사라고 당당하게 말하고있다.
이 모든 귀중한 유산이 김일성동지의 충실한 전사이시며 그이의 위업의 계승자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에 의해 고스란히 이어진데 대하여 대단히 만족스레 생각한다.
김일성동지의 생전의 뜻에 따라 김정일동지는 당과 군대와 국가를 령도하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대로 나라를 사회주의길로 성과적으로 인도해오시였다.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 로씨야인민들의 심장속에 살아계신다!
김정일동지는 곧 김일성동지이시다!
추억
나의 기나긴 생애의 절반나마 내가 사랑하는 영웅적조선인민과 밀접히 련결되여있다.
1945년 8월에 나는 쏘련태평양함대에 소속되여 조선해방작전에 참가하였다.
조선에 있는 나의 벗들은 모란봉에 있는 해방탑부각작품에 해병복을 입은 군인이 나를 형상한것이라고 말하고있다.
한때 조각가가 나를 놓고 해병을 형상한 일은 있지만 그 해병이 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1952년부터는 쏘베트보도국 대표로 그리고 《쁘라우다》 기자로 평양에 주재하였다.
3년반동안 평양에 있으면서 나는 조선인민에게 그들에 대한 이전 쏘련과 국제사회계의 련대성과 지지를 전해주었고 국제사회계에는 조선인민의 전투적 및 로력적위훈에 대하여 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조선인민을 적극 고무하도록 하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엽까지 나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면서 조선인민과의 각이한 련대성행사들을 진행하는데 각방으로 도움을 주었다.
1988년에 김일성동지께서는 나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친선훈장 제1급을 수여해주시였다.
1991년 8월사변후 나는 년로보장으로 넘어갔다.
반혁명적인 보도수단들이 조선을 반대하여 발광증을 한창 일으키던 1993년에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의 위대한 령도자들인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를 그리고 전통적인 두 나라 사이의 친선을 옹호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친선 및 문화협조협회를 재건할것을 발기하였다.
재건회의에서 나는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1997년에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동유럽지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친선협회 책임자들의 대표자회에서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지 및 련대성동유럽쎈터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기간에 나는 10여차에 걸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였으며 세차례나 김일성동지의 공식접견을 받았고 조선인민의 민족적명절과 내가 초청되였던 국가적인 행사장들에서 그이를 여러번 만나뵙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내가 조선에서 느낀 수많은 체험들 특히 20세기의 위인이신 김일성동지를 몸가까이 뵈옵던 나날들의 력사적추억과 감동깊던 인상들을 이 크지 않은 한편의 글에 다 담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선을 알게 되면서 나는 조선인민이 김일성동지의 세련된 령도에 의하여서만 가장 파렴치한 강적을 반대하는 력사에 류례없는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고 전후복구건설과 여러 단계의 사회주의혁명에서 커다란 성과를 달성할수 있었다는것을 깊이 확신하게 되였다.
나는 이것을 강조하고싶다.
부언컨대 김일성동지는 대단한 락천가이시였다.
나는 그이께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한두번만 듣지 않았다.
1952년초에 내가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 조선에서는 전선이 기본적으로 고착되고 전쟁은 장기성을 띠게 되였다.
무장과 기술장비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강적을 반대하는 장기전을 견디여낼수 있는 인적 및 군사적잠재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지 하는것이 걱정되였다.
그러나 전선에서의 사태발전은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한다는것을 보여주었고 나의 우려는 점차 감탄으로 바뀌였다.
나는 불타는 고지들을 돌아보고 그 방위자들인 인민군용사들을 만나보면서 그들이 미군장성들이 요란하게 선전하던 침략적인 대공세를 어떻게 물리쳤으며 전투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국야만들이 조선땅에서 어떤 강도행위를 하는가 하는것도 목격하게 되였다.
계산에 의하면 출격한 미국비행기의 6분의 1만이 자기 군대를 엄호하기 위한것이였고 그 나머지는 평화적주민들과 전쟁과는 인연이 없는 공장과 농촌들을 야수적으로 초토화하기 위한것이였다.
37개월간의 전쟁기간에 대양건너에서 온 이 야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공으로 80만회의 전투출격을 하였다.
실지적으로 청소한 인민공화국의 모든 살림집들과 문화보건시설들, 공장들이 재더미로 되였다.
폭탄과 포탄이 비발치는 속에서도 후방인민들은 무기와 탄약생산을 계속하고 각방으로 전선을 원호하였으며 전후복구발전계획을 세워나가며 높은 창조적열의를 발휘하였다.
방송을 통하여 자주 전해지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의 힘있는 연설들과 그분의 락관주의와 최후승리에 대한 굳은 확신은 전체 조선인민과 함께 나자신에게도 신심을 안겨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느날 나와 담화를 하시면서 미국놈들은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정신력을 알지 못하고 우리 나라에 달려들었다, 이제 력사는 작은 나라가 대국을 쳐부시는 전례없는 승리를 기록하게 될것이다라고 확신에 넘쳐 교시하시는것이였다.
물론 승리의 날은 아직 멀리에 있었다.
그날까지 조선인민은 수다한 난관과 시련의 고비를 넘겨야 하였다.
사회주의조선을 반대하는 미제의 침략은 제2차 세계대전후 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의 첫 대결이였고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국제반동이 사회주의견고성을 타진해보고 그것을 말살하며 자기의 세계제패확립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한 위험천만하고 음험한 모험전쟁이였다.
때문에 조선인민의 승리는 자기 조국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새 생활을 건설할 권리를 지켜내는것으로 될뿐아니라 세계사회주의와 그의 존엄을 지켜내는것으로도 되였다.
하여 그때도 지금도 리성있는 사람들은 조선인민의 승리가 세계사적의의를 가진다고 말하는것이다.
미국놈들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전쟁은 72시간만에 끝날것이다.》라고 지껄이였다.
많은 자본주의나라 정치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조선반도에서는 이런 예언을 뒤집어엎는 기적들이 일어났다.
결과 미국은 전쟁에서 패하였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조선인민에게 어디서 이런 힘이 생겼으며 어떻게 이런 놀라운 승리가 이룩되였는가. 누가 이런 기적을 창조하였는가.
전체 조선인민과 조선인민군은 위대한 수령이시고 최고사령관이신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가렬한 격전마다에서 무비의 대중적영웅주의를 발휘하여 미제의 강대성의 신화를 산산쪼각낸것이다.
나는 전쟁시기 김일성동지께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총포성이 울부짖는 최전방에 나가시여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시면서 동서고금의 군사교범들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독창적인 전법들을 창조하시여 싸움마다에서 통쾌한 승리를 안아오던 사실들에 특별히 감동되였다.
전쟁의 매 단계마다에서 그이께서는 실로 예측불가능한 독창적인 전술적방안들을 내놓으시여 적들에게 련전련패의 쓴맛을 톡톡히 보여주시였다.
조국해방전쟁에서 조선인민의 승리는 철두철미 김일성동지의 두리에 군대와 인민의 굳게 단결된 힘이 낳은 세기적기적이였으며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군사사상과 령군술의 승리였다.
이 불멸의 승리는 대를 이어가며 길이 전해질것이다.
나와 나의 처 따마라는 내가 50여년전에 찍은 조선정전협정문에 수표하시는 천재적령장이신 김일성동지의 사진을 가보로 고이 보관하고있다.
그이께서는 흰 원수례복을 입고계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참가자들과 악수를 나누신 다음 천천히 책상에 앉아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부터 협정문이 들어있는 문서철을 받으시였다.
협정비준이 끝나자 장내에서는 기쁨과 감격의 파도가 굽이쳤다.
모두가 김일성동지를 열렬히 축하하였다.
나도 그이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내가 그날 영광스럽게도 력사에 남긴 김일성동지의 모습은 이른바 《세계적인 강대국》과 맞서 청소한 사회주의의 전초선을 굳건히 지켜내신 20세기의 영웅, 위대한 정의의 수호자의 모습이였다.
그 거룩한 모습을 심장에 새기고 나는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을 떠나게 되였다.
내가 잊을수 없는 령장의 모습을 다시 뵈옵게 된것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후인 1968년 2월초였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나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뽀노마료브와 함께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다.
바로 그 시기에는 《푸에블로》호사건으로 하여 조선에 다시금 전쟁발발의 긴장한 정세가 조성되여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서 미해군의 《보이지 않는 왕》으로 자처하던 무장간첩선이 나포되자 미국놈들은 악에 받쳐 조선반도주변에 저들의 해군무력을 대대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미국놈들은 조선이 사죄할것과 《푸에블로》호를 즉시 돌려줄것을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원자탄사용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를 접견하신 석상에서 《푸에블로》호사건 전후사태발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신 다음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절대로 배를 놓아주지 않을것이며 1953년 패배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미국놈들에게 다시한번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미국의 계속되는 위협에 대처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며칠후에 진행된 조선인민군이 정규무력으로 개편된 기념행사에서 하신 연설에서 미제의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것이라는것을 온 세계의 면전에서 선언하시였다.
나는 그이의 유명한 연설문을 읽어보고 김일성동지께서 자기 군대와 인민의 힘을 얼마나 굳게 믿고계시며 또한 얼마나 굳센 의지와 담력을 지니고계시는가에 대하여 조선전쟁후 다시금 느끼게 되였다.
《푸에블로》호사건에 이어 그후에 계속된 미국간첩비행기 《EC-121》호사건이나 판문점사건도 미국이 저들이 꾸민 도발인것으로 하여 매번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서야 해결되였다.
세계는 또다시 20세기의 위인-정의의 수호자의 당당한 모습을 보게 되였다.
그후 쏘련과 세계출판물들은 조선인민군의 위력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그 전신인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1930년대초부터 15성상이나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힘겨운 영웅적투쟁을 벌려온데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당시 일제놈들도 조선의 새로운 무장투쟁이 큰 규모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고있다는데 대하여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본총독부의 공식자료에 의하면 1930년대 상반기에만도 조선유격대가 약 2만 4천여회나 일제기관과 군사대상들을 습격하였다고 밝히였다.
1939년 한해동안에 항일유격대는 일제를 반대하여 4천여차의 전투작전들을 진행하였다.
그 시기 쏘련출판물은 김일성동지께서 이끄시는 유격부대들이 《아시아제패일본전략에 큰 돌파구를 내고있다.》고 썼다.
김일성동지께서는 1940년대 상반기 국내외의 정세를 통찰력있게 분석하시고 쏘련, 중국과 조선의 국제련합군창설구상실현에도 적극 참가하시였다.
그러면서도 그이께서는 국제련합군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국동북항일련군의 독자성을 철저히 보장하도록 하시였다.
국제련합군이 조직되자 원동에서의 정세는 국제혁명에 리롭게 발전하였으며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국제련합군을 조직하고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기울이신 크나큰 로고는 혁명투쟁에서 매 나라의 독자성과 국제적인 련대와 협조의 원칙을 옳바로 배합하는 빛나는 모범으로 되였다.
나는 어느 한 기록영화의 화면을 통하여 조선의 항일유격대원들이 참가한 국제련합군의 의식장면을 볼수 있었다.
이것으로 하여 나는 각이한 시기에 진행된 조선의 혁명무력의 열병식을 3번이나 볼수 있는 행운을 지닌바 있다.
첫번째가 앞서 말한 1942년 여름 하바롭스크부근의 기지에서 본 국제련합군의 창설을 기념하는 분렬행진이였다.
그때 김일성동지께서 쏘련원동군 사령관 아빠나쎈꼬를 비롯한 군사지휘관들과 함께 분렬행진을 사열하시였는데 조선유격대원들의 부대가 맨 앞장에서 붉은기를 높이 들고 행진해나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김일성동지께서 나라를 통채로 빼앗긴 엄혹한 조건에서 이런 훌륭한 인민혁명무력을 키우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로고를 바치시였을가하고 생각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이끄신 영웅적인 유격투쟁은 조선주둔 일본군을 격멸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화로 보기도 하고 내가 직접 목격한 두번째 조선혁명무력의 열병식은 1953년 7월 28일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경축하여 진행된 열병식이였다.
나는 대단히 흥분하여 그 엄숙하고 장엄한 장면들을 사진기렌즈에 담아나가던 일을 잊을수 없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흰 원수례복을 입고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주석단에 서시여 열병식참가자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내시였는데 그이의 존함으로 명명된 광장으로는 바로 며칠전까지도 가렬한 전투들에서 영웅적위훈을 세운 인민군용사들이 승리자의 높은 긍지를 안고 만세의 환호를 올리며 보무당당히 행진해나갔다.
그때 김일성최고사령관께서 서계시는 주석단을 배경으로 찍은 나의 사진이 지금도 우리 집에 보관되여있다.
세번째로 내가 본 열병식은 1998년 9월에 진행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50돐경축 열병식이였다.
지난번 열병식에서도 그러했지만 나는 이 열병광장에서 조선혁명무력의 정치사상적면모와 불굴의 의지에 실로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열병식참가자들은 주석단에 계시는 김정일령도자께 충성의 맹세를 다지였다.
우렁찬 만세소리와 수령을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함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초대석에 있는 외국인들도 《조선의 군대는 수령의 군대》라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세상에 다시 없을 이 수령결사옹위의 열병대오를 바라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런 군대를 이길 힘은 없다.
조선의 군대가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자기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조선을 가만두지 않았을것이다.》 그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훌륭한 열병식은 김일성동지께서 혁명과 건설에서 군사에 첫째가는 힘을 넣을데 대한 구호를 제시하시고 혁명무력강화에 얼마나 많은 로고를 바치시였는가를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로씨야에는 《곰을 잡으려면 도끼를 단단히 잡고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맨손으로는 달려드는 사나운 짐승을 어쩌지 못한다.
사회주의나라 령도자가 군사사업을 걸써 대하면서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압살하려고 무력을 증강하고 압력을 강화하는데도 일방적으로 양보하면서 나라의 방위력을 약화시킨다면 그보다 더한 심중한 오유는 없다.
자기 손에 무장을 든든히 잡고 사생결단의 의지로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지킬 준비를 갖추지 못한 인민은 파멸후 그 누구에게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사태가 이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조선은 복잡한 국제정세속에서도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을 믿음직하게 지켜나가고있으며 세계무대에서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표명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앞날을 내다보면서 혁명활동의 첫 시기부터 혁명무력을 강화하시고 그에 의거하여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시였으며 조선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굳건히 지켜주시였다.
김일성동지는 끝없이 륭성번영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래와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계실것이다.
나는 나의 반생나마 위대한 수령이시고 탁월한 령장이시며 천재적위인이신 경애하는 김일성동지와 사연깊은 친분관계를 맺고있은데 대하여 더없는 긍지로 생각한다.
지금도 나의 귀전에는 《똘스찌꼬브는 나의 오랜 벗이요.》라고 하시던 김일성동지의 친근한 음성이 쟁쟁히 들려온다.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이신 김일성동지의 밝은 영상은 나의 심장속에, 인류의 심장속에 영원히 살아 빛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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