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기1 - 20세기 위대한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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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옮김 작성일2015-04-11 16:02 조회1,871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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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4월 11일 《우리 민족끼리》
김일성주석은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 (1)
로동신문 2012년 4월에 실렸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친선 및 문화협조 로씨야협회 전 위원장이였던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의 글을 소개한다.
글은 다음과 같다.
파란곡절로 가득찬 두 세기의 증견자인 나에게는 할 이야기도 적지 않고 추억에 남은것도 많다.
그중에서도 나의 기억속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는것은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그이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것, 조선의 사회주의를 지지하여 수십년동안 진행한 나의 활동에 대한것이다.
나는 2010년 단마르크의 수도 쾨뻰하븐에서 진행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탄생 100돐경축 국제준비위원회 결성모임에 나의 명의로 축하편지를 보냈다.
나는 김일성동지와 특별히 연고관계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 모임에 참가하여야 했으나 병으로 하여 길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편지에 김일성동지는 20세기가 낳은 특출한 정치가이시였으며 그이께서 사회주의혁명과 세계의 자주화위업에 쌓아올리신 거대한 업적으로 하여 세계인민들은 그이의 영생을 충심으로 기원하고있다고 썼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탄생 100돐경축 국제준비위원회 결성모임에 축하편지를 보내고나서 나는 김일성동지와 나와의 특별한 관계와 우리들사이에 있었던 잊을수 없는 사실들에 대하여 무한한 행복감을 안고 회상하였다.
추억이란 결코 지나간 세월들에 대한 회상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생활의 추억은 옛시절에 대한 회상인 동시에 앞날에 대한 보다 랑만적인 지향이라고 나는 말하고싶다.
김일성동지를 알게 되고 과분하게도 그분의 몸가까이에서 수년간 사업한 그 나날들에 대한 나의 추억은 90로인인 나에게도 꺼지지 않는 삶의 활력을 부어주는 샘줄기와도 같은것이였다.
하여 나는 이러한 글들을 지난 기간 우리 로씨야와 조선의 출판물들에 여러편 실은바 있지만 근 한세기를 헤아리는 나의 짧지 않은 인생에 대한 긍지스러운 총화를 다름아닌 20세기의 위인이신 김일성동지에 대한 추억으로 짓고싶은 마음에서 늙어 무디여진 어설픈 필설이나마 다시 든것이다.
이것이 애석하게도 먼저 우리곁을 떠나가신 김일성동지를 위해, 그이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조선인민을 위해 그리고 아직도 그분과 조선인민에 대한 우애와 사랑의 감정을 잃지 않고있는 우리 로씨야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할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혹
누군가 말했던가, 매혹은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아마 사랑이라는 전통적이고 고상한 감정이 없다면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얼어붙은 동토대와 다름이 없을것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베풀수 있는 가장 크나큰 배려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감정의 정화인 사랑, 그것은 다름아닌 매혹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진실로 매혹되기는 결코 쉬운것이 아니다.
나의 90평생을 줄곧 관통하여온것도 오늘의 이 자부심으로 넘치는 추억도 역시 내가 젊으나 젊었던 그 시절에 느낀 한 인간에 대한 매혹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참으로 그것은 잊을수 없는 나날들이였다.
인류를 무자비한 살륙과 파괴의 대동란속에 휘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멎고 유미렬강들의 세력권쟁탈의 각축전이 끊임이 없던 20세기 중엽에 기슭을 둔 나의 추억속에 제일먼저 흘러드는 위인적모습은 현대력사의 거장이신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거룩하고도 빛나는 영상이다.
나는 김일성동지와 수십년세월 특별한 친분관계를 맺고 살아왔다.
내가 김일성동지께 매혹된것은 그분의 인간적풍모 즉 시종 사랑에 넘치시고 또 끝없이 겸허하신 그 인민적인 모습에서였다.
그분과 나는 공식석상과 개별적접촉 등 각이한 정황과 각이한 장소에서 자주 만나군 하였다.
김일성동지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조화로운 몸매에 다정하시고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으며 빛나는 안광에는 언제나 매혹적인 웃음을 담고계시는 보기 드문 미남형의 인간이시였다.
세인이 인정하는바와 같이 김일성동지는 20세기의 특출한 위인이고 천재이시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아주 소박하고 평범하며 대단히 친절하고 호의적인분이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노라면 천재적수령의 끝없는 지혜와 혁명적경험이 대단히 풍부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군 하였다.
그이께서는 항상 근로인민들의 생활과 그들의 애로에 대한 심려를 자신의 모든 활동의 첫자리에 놓군 하시였다.
나는 김일성동지께서 계률처럼 자주 외우시는 그이의 좌우명 이민위천을 우리가 첫 상봉을 이룩한 그 시기에 벌써 머리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조선에서 6. 25전쟁시기와 전후시기에 나는 자주 그분을 만나뵈웠다.
나의 기억속에 지금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것은 신생조선의 운명이 가혹한 처지에 빠졌던 전쟁시기에도 늘 인민들의 생활을 두고 마음쓰시는 그분의 뜨거운 애민정신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인민들의 물질문화적복리를 부단히 증진시키는것을 조선로동당의 최고원칙으로 내세우시였다.
1951년 1월이면 조선전쟁이 가장 가렬한 국면을 겪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소집하시고 전시인민생활안정을 위한 중요한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사실 한 민족, 한 나라에 있어서 가장 큰 재난이라고 할수 있는 전쟁시기에 모든 사람들의 사고가 전선의 운명과 직결되는 것은 상례이다.
그 동란의 와중속에서 개인의 운명이나 한가정의 불행은 소외되기가 쉽다.
그러나 조선의 김일성동지께서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그 정치위원회에서 지금 일부 당 및 국가, 경제기관 일군들은 전선의 물질적수요만 보장하려고 해도 어려운데 어떻게 인민들의 생활까지 돌보겠는가고 하면서 령락된 인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고있다고 하시면서 이것은 대단히 옳지 않은 현상이라고 엄하게 지적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 인민은 당과 국가와 함께 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용감히 이겨나가고있으며 자기의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우리 당과 국가에 의탁하고있습니다. 우리 일군들이 전시조건이라고 하여 인민들의 생활에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인민이 있어야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고 또 전쟁이 끝난 다음 우리 조국을 부강한 나라로 건설할수 있습니다.》라고 모든 회의참가자들에게 전시인민생활안정문제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하여 거듭 강조하시였다.
물방울은 작아도 우주를 담는다고 하였다.
이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김일성동지의 남다른 인민사랑의 세계를 잘 알수 있다고 본다.
조선에는 그이께서 다녀가지 않으신 기업소와 마을들이 거의나 없다.
그이께서는 수많은 평범한 근로자들과 직접 친교를 맺고계시였으며 그들과 자주 만나 사업을 토의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민위천의 좌우명에 언제나 충실하시였으며 인민대중을 세상에서 제일 전지전능한 존재로, 스승으로 떠받드시였다.
인민들도 그이께 충성을 다하며 끝없이 존경하였다.
그이께서는 나와 같은 평범한 외국특파기자도 언제나 따뜻이 대해주시고 오랜 세월 자신의 친구로까지 여겨주시였다.
《푸에블로》호나포와 관련하여 정세가 긴장되였던 1968년 2월초에 우리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베. 엔. 뽀노마료브와 함께 김일성동지를 만나뵈려고 평양으로 떠났다.
뽀노마료브가 나를 김일성동지께 소개하려고 하자 그이께서는《우리는 구면입니다.》라고 하시며 웃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날 거의 온종일 우리와 함께 보내시였다. 그날 뽀노마료브는 우리가 평양을 방문한 기본동기인 쏘련공산당대표단과 일본공산당대표단사이의 도꾜회담에 대하여 김일성동지께 통보해드리였다.
그다음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만찬을 마련하시였다.
만찬석상에서 우리는 지난 기간 우리들사이의 형제적관계에 대하여 회상하였으며 당면한 사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의 현실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조선에서도 사회주의가 힘차게, 급속히 전진하고있으며 난관도 적지 않지만 성과적으로 타파해나가고있다고 교시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바로 그래서 남조선괴뢰들과 대양건너에 있는 그들의 상전들이 발악하고있으며 우리를 못살게 굴고있다고 강조하시였다.
참으로 정세판단에도 예리하시고 이야기도 구수하게 하는분이시라는것을 나는 다시금 새삼스럽게 느끼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서거하신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 그분의 교시와 사업, 그분의 업적, 그 모든것에 대하여 회상하노라면 《세월이 흘러가니 위인이 알린다》는 로씨야의 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김일성동지와 관련된 모든것이 나에게는 대단히 흥미있고 귀중하다.
나는 여러 기회에 김일성동지를 가까이 그리고 오래동안 모시고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또한 조선에서 사업할 때도 그렇고 그후에도 나는 그이께서 사업하고 생활하시던 여러곳을 수차에 걸쳐 다녀보았다.
1945년에 당이 창건된 초시기에 그이께서 계시던 당참모부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청사에도, 건지리에 있는 최고사령부에도, 평양에 위치하고있는 전쟁시기 지하집무실에도 가보았다.
가는 곳마다에서 매번 놀랍게 느끼게 되는것은 모든 가구비품들과 생활필수품들이 대단히 검소하고 사업하는데 편리하게 되여있는것이다.
사치한것이란 하나도 없고 불필요한것과 장식용이 하나도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상 평범한 옷을 입고계시며 식사에도 절대로 특별한 요구를 제기하지 않으실뿐아니라 부관의 말을 그대로 빌면 대단히 검소하게 하시였다.
이렇게 외적으로는 대단치 않은 세부로 보이는것이지만 바로 그 소박성과 검박성에 김일성동지의 웅심깊은 내면세계, 원만한 성격, 사업에 대한 강한 목적지향성, 근로인민의 위업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이 그대로 반영되여있었다.
내가 김일성동지께 매혹되게 된것은 또한 그분의 천재적인 예지와 지략, 탁월한 선견지명 다시말하여 정치적수령으로서의 비범특출한 위인상에서였다고 말할수 있다.
김일성동지는 실로 다방면적으로 위대한분이시였다.
세월이 감에 따라 나는 위인으로서의 김일성동지의 풍모, 그이의 사색과 실천의 출중함을 더욱 깊이 그리고 폭넓게 감수하게 된다.
혁명하는 나라 인민들속에서는 위대한 수령들이 나오며 그들에 의하여 시대의 변혁들이 이룩되였다.
지난 시기 조선에도 인민들의 해방투쟁에 흔적을 남겨놓은 유명무명의 혁명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모두는 위인중의 위인으로서, 령장으로서, 리론가로서, 광범한 대중을 민족적해방과 사회주의 새 생활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로 떠밀어준 조직자로서의 력사적인 역할면에서는 그 누구도 김일성동지와 비유조차도 할수 없다.
김일성동지는 영생하는 세계적인 수령들의 전렬에 당당히 서계신다.
나는 여기에서 김일성동지께서 참으로 독특한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지니신 정치가이시라는것을 말해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력사적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련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난 세기 80년대 중엽부터 고르바쵸브가 벌린 개편의 파국성과 그의 치명적후과에 대하여까지 내다보신 많지 않은 세계정치가들중의 한분이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쏘련공산당의 고르바쵸브지도부에 2차에 걸쳐 이에 대하여 경고하시였다.
그러나 이미 사회주의를 말아먹을것을 작정한 배신자들이 김일성동지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는 좌절되고말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세계사회주의와 우리 나라의 운명이 념려되시여 건강상태가 나쁜 고령의 몸으로 쏘련을 두번이나 방문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당시 쏘련공산당 지도부와의 상봉과 담화과정에 고르바쵸브와 그의 측근들이 벌려놓은 파멸적인 정책이 앞으로 가져올 엄청난 재난에 대하여 경고하시였다.
만일 그때 고르바쵸브의 지도부가 김일성동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리성적으로 사고하였다면 그후 그 무수한 재난과 전쟁들을 아마 세계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김일성동지께서는 모든 면에서 현명하고 기민하신 정치가이시였다.
가슴아픈 그 시절의 추억속에 잠겨있을 때면 나의 뇌리에는 내가 조선전쟁터에 몸담고있던 나날에 체험한 하나의 사실이 떠오르군 한다.
패배자이며 모험주의자인 맥아더의 뒤를 이어 미국의 장성들은 조선전선에서의 패배를 만회할 목적으로 1952년 여름 이제는 더 파괴할것도 불태울것도 없는 조선에 순수 《위협》을 목적으로 원자탄사용문제를 다시금 들고나왔다.
이에 대하여 조선의 전선과 후방에서도 별의별 말들이 다 나돌았다.
그러한 때 조선의 어느 한 신문에는 원자탄의 특성과 그로부터의 피해를 방지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기사가 게재되였다.
기사의 내용인즉 원자탄이 터질 때에 흰 모포를 뒤집어써야 한다는것이 골자로 되여있었다.
가뜩이나 일부 패배주의자들속에서 원자탄에 대한 공포심이 나돌던 때에 이 한편의 기사가 사람들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굳이 설명안해도 알것이다.
이런 환경속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은 김일성동지의 제의에 따라 나라의 도시들을 록화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전국적으로 록화문제가 광범하게 상정되여 지난 시기의 큰 거리들과 광장들, 유원지들과 공지들을 록화하는 록화근위대들이 조직되였다.
모범적인 록화근위대원들에게는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고 신문 1면에 그들의 사진을 실었으며 회의들에서는 자주 어떻게 하면 록화를 잘할것인가 하는 의제들이 토의되였다.
소년단원들과 사람들은 성수가 나서 거리와 마을들을 록화해나갔다.
록화는 말그대로 전인민적운동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조치는 사람들의 의식에 대단히 큰 작용을 하였다.
사람들은 록화문제가 상정된것을 보니 아무런 원자탄위험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결과 인민들은 인차 안정되고 점차 원자탄에 대하여서는 감감 잊어버리게 되였다.
김일성주석은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 (1)
로동신문 2012년 4월에 실렸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친선 및 문화협조 로씨야협회 전 위원장이였던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의 글을 소개한다.
글은 다음과 같다.
파란곡절로 가득찬 두 세기의 증견자인 나에게는 할 이야기도 적지 않고 추억에 남은것도 많다.
그중에서도 나의 기억속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는것은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그이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것, 조선의 사회주의를 지지하여 수십년동안 진행한 나의 활동에 대한것이다.
나는 2010년 단마르크의 수도 쾨뻰하븐에서 진행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탄생 100돐경축 국제준비위원회 결성모임에 나의 명의로 축하편지를 보냈다.
나는 김일성동지와 특별히 연고관계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 모임에 참가하여야 했으나 병으로 하여 길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편지에 김일성동지는 20세기가 낳은 특출한 정치가이시였으며 그이께서 사회주의혁명과 세계의 자주화위업에 쌓아올리신 거대한 업적으로 하여 세계인민들은 그이의 영생을 충심으로 기원하고있다고 썼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탄생 100돐경축 국제준비위원회 결성모임에 축하편지를 보내고나서 나는 김일성동지와 나와의 특별한 관계와 우리들사이에 있었던 잊을수 없는 사실들에 대하여 무한한 행복감을 안고 회상하였다.
추억이란 결코 지나간 세월들에 대한 회상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생활의 추억은 옛시절에 대한 회상인 동시에 앞날에 대한 보다 랑만적인 지향이라고 나는 말하고싶다.
김일성동지를 알게 되고 과분하게도 그분의 몸가까이에서 수년간 사업한 그 나날들에 대한 나의 추억은 90로인인 나에게도 꺼지지 않는 삶의 활력을 부어주는 샘줄기와도 같은것이였다.
하여 나는 이러한 글들을 지난 기간 우리 로씨야와 조선의 출판물들에 여러편 실은바 있지만 근 한세기를 헤아리는 나의 짧지 않은 인생에 대한 긍지스러운 총화를 다름아닌 20세기의 위인이신 김일성동지에 대한 추억으로 짓고싶은 마음에서 늙어 무디여진 어설픈 필설이나마 다시 든것이다.
이것이 애석하게도 먼저 우리곁을 떠나가신 김일성동지를 위해, 그이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조선인민을 위해 그리고 아직도 그분과 조선인민에 대한 우애와 사랑의 감정을 잃지 않고있는 우리 로씨야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할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혹
누군가 말했던가, 매혹은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아마 사랑이라는 전통적이고 고상한 감정이 없다면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얼어붙은 동토대와 다름이 없을것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베풀수 있는 가장 크나큰 배려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감정의 정화인 사랑, 그것은 다름아닌 매혹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진실로 매혹되기는 결코 쉬운것이 아니다.
나의 90평생을 줄곧 관통하여온것도 오늘의 이 자부심으로 넘치는 추억도 역시 내가 젊으나 젊었던 그 시절에 느낀 한 인간에 대한 매혹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참으로 그것은 잊을수 없는 나날들이였다.
인류를 무자비한 살륙과 파괴의 대동란속에 휘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멎고 유미렬강들의 세력권쟁탈의 각축전이 끊임이 없던 20세기 중엽에 기슭을 둔 나의 추억속에 제일먼저 흘러드는 위인적모습은 현대력사의 거장이신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거룩하고도 빛나는 영상이다.
나는 김일성동지와 수십년세월 특별한 친분관계를 맺고 살아왔다.
내가 김일성동지께 매혹된것은 그분의 인간적풍모 즉 시종 사랑에 넘치시고 또 끝없이 겸허하신 그 인민적인 모습에서였다.
그분과 나는 공식석상과 개별적접촉 등 각이한 정황과 각이한 장소에서 자주 만나군 하였다.
김일성동지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조화로운 몸매에 다정하시고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으며 빛나는 안광에는 언제나 매혹적인 웃음을 담고계시는 보기 드문 미남형의 인간이시였다.
세인이 인정하는바와 같이 김일성동지는 20세기의 특출한 위인이고 천재이시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아주 소박하고 평범하며 대단히 친절하고 호의적인분이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노라면 천재적수령의 끝없는 지혜와 혁명적경험이 대단히 풍부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군 하였다.
그이께서는 항상 근로인민들의 생활과 그들의 애로에 대한 심려를 자신의 모든 활동의 첫자리에 놓군 하시였다.
나는 김일성동지께서 계률처럼 자주 외우시는 그이의 좌우명 이민위천을 우리가 첫 상봉을 이룩한 그 시기에 벌써 머리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조선에서 6. 25전쟁시기와 전후시기에 나는 자주 그분을 만나뵈웠다.
나의 기억속에 지금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것은 신생조선의 운명이 가혹한 처지에 빠졌던 전쟁시기에도 늘 인민들의 생활을 두고 마음쓰시는 그분의 뜨거운 애민정신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인민들의 물질문화적복리를 부단히 증진시키는것을 조선로동당의 최고원칙으로 내세우시였다.
1951년 1월이면 조선전쟁이 가장 가렬한 국면을 겪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소집하시고 전시인민생활안정을 위한 중요한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사실 한 민족, 한 나라에 있어서 가장 큰 재난이라고 할수 있는 전쟁시기에 모든 사람들의 사고가 전선의 운명과 직결되는 것은 상례이다.
그 동란의 와중속에서 개인의 운명이나 한가정의 불행은 소외되기가 쉽다.
그러나 조선의 김일성동지께서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그 정치위원회에서 지금 일부 당 및 국가, 경제기관 일군들은 전선의 물질적수요만 보장하려고 해도 어려운데 어떻게 인민들의 생활까지 돌보겠는가고 하면서 령락된 인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고있다고 하시면서 이것은 대단히 옳지 않은 현상이라고 엄하게 지적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 인민은 당과 국가와 함께 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용감히 이겨나가고있으며 자기의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우리 당과 국가에 의탁하고있습니다. 우리 일군들이 전시조건이라고 하여 인민들의 생활에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인민이 있어야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고 또 전쟁이 끝난 다음 우리 조국을 부강한 나라로 건설할수 있습니다.》라고 모든 회의참가자들에게 전시인민생활안정문제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하여 거듭 강조하시였다.
물방울은 작아도 우주를 담는다고 하였다.
이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김일성동지의 남다른 인민사랑의 세계를 잘 알수 있다고 본다.
조선에는 그이께서 다녀가지 않으신 기업소와 마을들이 거의나 없다.
그이께서는 수많은 평범한 근로자들과 직접 친교를 맺고계시였으며 그들과 자주 만나 사업을 토의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민위천의 좌우명에 언제나 충실하시였으며 인민대중을 세상에서 제일 전지전능한 존재로, 스승으로 떠받드시였다.
인민들도 그이께 충성을 다하며 끝없이 존경하였다.
그이께서는 나와 같은 평범한 외국특파기자도 언제나 따뜻이 대해주시고 오랜 세월 자신의 친구로까지 여겨주시였다.
《푸에블로》호나포와 관련하여 정세가 긴장되였던 1968년 2월초에 우리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베. 엔. 뽀노마료브와 함께 김일성동지를 만나뵈려고 평양으로 떠났다.
뽀노마료브가 나를 김일성동지께 소개하려고 하자 그이께서는《우리는 구면입니다.》라고 하시며 웃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날 거의 온종일 우리와 함께 보내시였다. 그날 뽀노마료브는 우리가 평양을 방문한 기본동기인 쏘련공산당대표단과 일본공산당대표단사이의 도꾜회담에 대하여 김일성동지께 통보해드리였다.
그다음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만찬을 마련하시였다.
만찬석상에서 우리는 지난 기간 우리들사이의 형제적관계에 대하여 회상하였으며 당면한 사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의 현실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조선에서도 사회주의가 힘차게, 급속히 전진하고있으며 난관도 적지 않지만 성과적으로 타파해나가고있다고 교시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바로 그래서 남조선괴뢰들과 대양건너에 있는 그들의 상전들이 발악하고있으며 우리를 못살게 굴고있다고 강조하시였다.
참으로 정세판단에도 예리하시고 이야기도 구수하게 하는분이시라는것을 나는 다시금 새삼스럽게 느끼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서거하신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 그분의 교시와 사업, 그분의 업적, 그 모든것에 대하여 회상하노라면 《세월이 흘러가니 위인이 알린다》는 로씨야의 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김일성동지와 관련된 모든것이 나에게는 대단히 흥미있고 귀중하다.
나는 여러 기회에 김일성동지를 가까이 그리고 오래동안 모시고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또한 조선에서 사업할 때도 그렇고 그후에도 나는 그이께서 사업하고 생활하시던 여러곳을 수차에 걸쳐 다녀보았다.
1945년에 당이 창건된 초시기에 그이께서 계시던 당참모부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청사에도, 건지리에 있는 최고사령부에도, 평양에 위치하고있는 전쟁시기 지하집무실에도 가보았다.
가는 곳마다에서 매번 놀랍게 느끼게 되는것은 모든 가구비품들과 생활필수품들이 대단히 검소하고 사업하는데 편리하게 되여있는것이다.
사치한것이란 하나도 없고 불필요한것과 장식용이 하나도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상 평범한 옷을 입고계시며 식사에도 절대로 특별한 요구를 제기하지 않으실뿐아니라 부관의 말을 그대로 빌면 대단히 검소하게 하시였다.
이렇게 외적으로는 대단치 않은 세부로 보이는것이지만 바로 그 소박성과 검박성에 김일성동지의 웅심깊은 내면세계, 원만한 성격, 사업에 대한 강한 목적지향성, 근로인민의 위업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이 그대로 반영되여있었다.
내가 김일성동지께 매혹되게 된것은 또한 그분의 천재적인 예지와 지략, 탁월한 선견지명 다시말하여 정치적수령으로서의 비범특출한 위인상에서였다고 말할수 있다.
김일성동지는 실로 다방면적으로 위대한분이시였다.
세월이 감에 따라 나는 위인으로서의 김일성동지의 풍모, 그이의 사색과 실천의 출중함을 더욱 깊이 그리고 폭넓게 감수하게 된다.
혁명하는 나라 인민들속에서는 위대한 수령들이 나오며 그들에 의하여 시대의 변혁들이 이룩되였다.
지난 시기 조선에도 인민들의 해방투쟁에 흔적을 남겨놓은 유명무명의 혁명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모두는 위인중의 위인으로서, 령장으로서, 리론가로서, 광범한 대중을 민족적해방과 사회주의 새 생활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로 떠밀어준 조직자로서의 력사적인 역할면에서는 그 누구도 김일성동지와 비유조차도 할수 없다.
김일성동지는 영생하는 세계적인 수령들의 전렬에 당당히 서계신다.
나는 여기에서 김일성동지께서 참으로 독특한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지니신 정치가이시라는것을 말해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력사적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련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난 세기 80년대 중엽부터 고르바쵸브가 벌린 개편의 파국성과 그의 치명적후과에 대하여까지 내다보신 많지 않은 세계정치가들중의 한분이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쏘련공산당의 고르바쵸브지도부에 2차에 걸쳐 이에 대하여 경고하시였다.
그러나 이미 사회주의를 말아먹을것을 작정한 배신자들이 김일성동지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는 좌절되고말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세계사회주의와 우리 나라의 운명이 념려되시여 건강상태가 나쁜 고령의 몸으로 쏘련을 두번이나 방문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당시 쏘련공산당 지도부와의 상봉과 담화과정에 고르바쵸브와 그의 측근들이 벌려놓은 파멸적인 정책이 앞으로 가져올 엄청난 재난에 대하여 경고하시였다.
만일 그때 고르바쵸브의 지도부가 김일성동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리성적으로 사고하였다면 그후 그 무수한 재난과 전쟁들을 아마 세계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김일성동지께서는 모든 면에서 현명하고 기민하신 정치가이시였다.
가슴아픈 그 시절의 추억속에 잠겨있을 때면 나의 뇌리에는 내가 조선전쟁터에 몸담고있던 나날에 체험한 하나의 사실이 떠오르군 한다.
패배자이며 모험주의자인 맥아더의 뒤를 이어 미국의 장성들은 조선전선에서의 패배를 만회할 목적으로 1952년 여름 이제는 더 파괴할것도 불태울것도 없는 조선에 순수 《위협》을 목적으로 원자탄사용문제를 다시금 들고나왔다.
이에 대하여 조선의 전선과 후방에서도 별의별 말들이 다 나돌았다.
그러한 때 조선의 어느 한 신문에는 원자탄의 특성과 그로부터의 피해를 방지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기사가 게재되였다.
기사의 내용인즉 원자탄이 터질 때에 흰 모포를 뒤집어써야 한다는것이 골자로 되여있었다.
가뜩이나 일부 패배주의자들속에서 원자탄에 대한 공포심이 나돌던 때에 이 한편의 기사가 사람들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굳이 설명안해도 알것이다.
이런 환경속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은 김일성동지의 제의에 따라 나라의 도시들을 록화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전국적으로 록화문제가 광범하게 상정되여 지난 시기의 큰 거리들과 광장들, 유원지들과 공지들을 록화하는 록화근위대들이 조직되였다.
모범적인 록화근위대원들에게는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고 신문 1면에 그들의 사진을 실었으며 회의들에서는 자주 어떻게 하면 록화를 잘할것인가 하는 의제들이 토의되였다.
소년단원들과 사람들은 성수가 나서 거리와 마을들을 록화해나갔다.
록화는 말그대로 전인민적운동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조치는 사람들의 의식에 대단히 큰 작용을 하였다.
사람들은 록화문제가 상정된것을 보니 아무런 원자탄위험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결과 인민들은 인차 안정되고 점차 원자탄에 대하여서는 감감 잊어버리게 되였다.
댓글목록
황진우님의 댓글
황진우 작성일
20세기 뿐 아니라 전 세기를 통틀어 예수 석가 다 제쳐놓고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이고 영웅입니다.
예수나 석가가 의, 식, 주, 교육, 의료, 국방까지 해결 해 줬던가요?
조선민족님의 댓글
조선민족 작성일
황진우분의 의견에 대찬성입니다.
김일성주석은 희세출의 위인중의 위인이십니다.
그의 위대한 주체사상을 기치로 한 조선은 세계의 등대로 길이 빛날것입니다.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김일성주석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재미탈북인 교수인 김현식 전 김형직사범대학 교수님도 인정했을정도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