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태권도는 정말로 우리 민족 것이냐,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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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작성일2015-05-06 05:30 조회1,981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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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권도는 정말로 우리 민족 것이냐, 아니냐?
글쓴이: 다물흙, 림원섭
남. 북 태권도의 역사들을 알아본다.
5. 왜, 태권도는 우리 민족것이 아닌가!
북조선에서 소속된 국제 태권도 연맹, 일명 ITF 태권도는 1955..4.11일 고 최홍희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태권도라는 것을 창시를 했다고한다. 그러나 1966년7월1일에 출판된 태권도 첫번째 출판된 책과 1972년5월 10일 출판된 책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자세히 보면 기본 동작들이나 형(틀)들이나 각종 용어들을 보면 일본 소토깐 당수도 (공수도/가라데)와 똑 같다. 그것이 최홍희는 동경 중앙대학교 법과에 잠깐 다닐때 잠시 배운 실력이였다고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씨가 만든 급, 단 제도까지 똑 같다.
그래서 최홍희는 태권도 창시자가 아니고 창립자(표절자)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당수도와 태권도 이름만 다르지 내용은 똑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ITF 태권도 24틀 – 천지, 단군, 도산, 원효, 율곡, 중근, 퇴계, 화랑, 충무, 광계, 포은, 계백, 의암, 충장, 고당(조만식)틀에서 1984년도에 ’주체틀’로 바꿨다.
그 이유는 고 김일 부주석과 서기국장 고 허정숙 여사를 모시고 제2기생 졸업 시범을 평양체육관에서 할 때 고당틀을 본인이 시범을 보이게 되였을때 ’고당’이라는 소리를 들은 허서기국장의 항의로 ’주체틀’ 로 바꾸게 된 동기다.
계속 - 삼일, 유신, 최영, 연개, 을지, 문무, 서산, 세종, 통일 - 이렇게 명칭들은 동경 와세대 사학과 출신인 고 이선근이라는 자가 지였다고 최홍희씨는 나에게 말을 했었다. 이선근 사학 박사님은 동경 중앙대학교 내 선배님이 지어주셨다고 자랑 삼아 말을 했었다. 그래서 알게 되였다. 이 일본 식민사관으로된 명칭들 을 최홍희는 왜놈 당수도(가라데) 동작들을 그대로 표절하여 만들었다.
특히 중시해야할 것은 24개 ’틀’들 중 중근(안중근)틀, 충무(이순신)틀, 삼일(3.1)틀, 세종(세종대왕)틀, 주체 (김일성)틀, 통일틀들이 있는데 이 ’틀’들의 동작들이 최홍희가 스스로 연구하여 만들어진 동작들이 아니고 왜놈 당수도(空手道/가라데)들에 있는 동작들을 그대로 표절(도용)하여 길만 다르게 해서 만들었다. 즉 왜놈들의 정서인 그 동작들로 우리의 항일 투쟁 정신을 또 다시 쪽발이들에 예속시켰다는데 있다. 여기에서 사대 매국의 본질이 나왔다는 것을 필자는 단호하게 말 한다.
그리고 태권도 창시자라면 창시자 자신의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중국 의 ’공자, 순자’ 철학뿐이고. 방식은 미양키들의 ’각개전투식’이라고 최홍희는 미국의 용병 출신답게 살아 생전에 늘 말했었다. 그래서 ITF 태권도 역사는 1955년부터 시작한 무술이 철학은 중국의 공자, 순자것 이고, 동작은 일본 소토깐(가라데) 것이고, 방법은 미국(미제) 것이다.
또 한국에서 하고 있는 태권도는 1973년에 김운용, 이종우씨에 의해서 창립된 후 세계 태권도 연맹, 일명 WTF 태권도와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국기원이다. 1973년 3월2일에 기록되여 1997년11월14일자 출판된 태권도 교과서 품새(형)들의 동작들을 보면 일본 소토깐 가라데와 똑 같다. 물론 급, 단 제도도 똑 같다. 철학은 중국의 주역에서 나오는 음양이다. 품새는 이종우 지도관(당수도/공수도) 관장께서 만들었 다.
6. 코리아의 전통 무술은 무엇인가?
월래 고구려, 2천년 전부터 유래되어온 우리민족의 고유 무술인 ’택견’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1910-1945년도까지 왜놈 식민지 시절엔 금지되던 것이 8.15 민족이 해방이된후부터 계속 조금씩 발전되여 오늘엔 인간문화재 고 신한승 선생에 의한 중요 무형 문화재 제76호로 한국 택견 협회(The Korea Tack gyeon Association)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목록 지정 전승 단체가 있다.
우리민족 고유의 무술이 태권도가 아니고 이 택견이 바로 우리 민족 코리아의 고유의 무술이다.
그러나 오늘에 태권도의 손발 격파 즉 서서 발차기와 뛰어차기들의 기술들은 이 지구에서 으뜸이다.
7. 국제 태권도연맹(ITF) 창립자는 누구?
술을 만들어 파는 양조장을 경영하던 아버지를 둔 최홍희(崔泓熙, 1918년 11월 9일 ~ 2002년 6월 12 일)는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으로, 국제 태권도 연맹이 주장하는 태권도의 창시자라고 하는자다. 또 일본 중앙 대학교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한다.
이 왜놈들의 식민지 사절에 동경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 처럼 어렵다는 것은 철저한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던 때다. 그런데 24-28살 젊은 청년이 써준 몇 폭 붓글씨들의 뜻이 어떤 것이였는지는 몰라도 그 왜놈 순사가 동경 유학을 허락를 해주었다고 말하는 최홍희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만약 거짓말 대회가 있다면 이자는 일등을 할 것이다.
해방 후
1946년 국방 경비대에 입대
1953년 제주도 제 29사단장.(제주도 양민 대 학살 사건 1948.4.3.-1954.9.21까지)
1955년 청도관에서 손덕성 관장 명의로 명예 4단증을 받았다.
1955년부터 3군관구 사령관
1959년에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1960년부터 제2훈련소장, 육군본부 정보 참모부장 혹은 전투병과 교육기지 사령관
1961년부터 6 군단장을 역임 중 박정희 5.16에 충실히 편입
1962년에 육군 단장 및 예비역 편입하고 주 말레이시아 대사
1966년 3월 22일에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창립하고 총재
2002년 6월 12일 평양에서 위암으로 사망한 뒤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위키백과사전과 태권도 교과서, 청구사 발행, 1972.5.10일 참고’
본인은 1965년에 ITF 단증으로 바꾸기 위해서 첫 만남으로 부터 알게 되여 1967베트남 쾅나이와 다낭 지역을 개척할 때와 1975년 스웨덴, 1976년 노르웨이 태권도 개척 사범으로 있으면서 태권도가 우리 민족 것이라고 하여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몇년씩 가르쳐서 ITF 단증과 도복과 책을 돈주고 사야하였기 때문에 이 최홍희라는 사람과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날때 마다 언제나 실망을 가지게 했었다.
왜, 첫째는 거짓말이였다. 정당화와 말 돌려 붙히는데는 당할 자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최홍희는 무도가 뜻이 너무 깊어서 답을 할 수가 없다는 자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이자는 기본 철학인 무도란!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느낌은 이분은 무도인이 아니라고 서서히 나 스스로 깨우치기 시작을 했다.
그리고 한국인 사법들에게는 세미나 같은 것도 해주지 아니하면서 만나면 공자, 순자 이야기만 했었다.
그래서 본인은 이분을 보고 공자 전도사라고까지 했었다. 그러면서 외국인 검정띠들에게는 세미나를 해주면서 한국인 사법들에게는 해주지 않고 일부려 피했다. 태권도 개척 사범들은 모두 책을 보고 스스로 태권도 ’틀’들을 터듯했다. 그래서 인가 이 최홍희는 무급에서 초단까지 단 한사람도 가르쳐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자다.
이 지구 각나라에서 김치도 없이 밥 굶어 배 골아가며 태권도가 코리아 것이라고 - 사기인 줄도 모르고 개척 사범님들이 모두 다 순진하게 열심히 보급 개척했다. 그와 반면 뻔뻔스런 최홍희는 오직 급증, 단증, 도복, 책 장사만 하는 장사꾼에 불과 했다. 그렇게 해서 공산당을 때려 잡자고 만든 태권도가 이 좁은 지구에 두루 두루 다 보급되였다.
그리고 특히 제주도에서 29사단장 시절에 상납 받은 한석봉 글씨를 카나다까지 가지고 가서 일본에 팔아 거액을 주고 팔은 돈으로 여러 나라에서 고생하는 사범들에게 도장을 차려 주겠다고 철석 같이 약속을 해놓고는 몫돈이 생기니 약속을 헌 신짝처럼 버리듯이하고 자기 집을 사며 사리사욕에 썼다. 그리고 사범들간에 부끄러움도 없이 이간질을 교묘히 지능적으로 잘 했다.
또 최홍희씨는 1972년 캐나다로 망명했는데,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상당수 남측 태권도 인들은 최씨가 말레이시아 대사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공금유용 혐의를 받고 귀국조치를 당했으 며, 김운용씨가 태권도계에 들어오자 위기를 느끼고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 이종우 말씀 -
그리고 ’태권도와 나’라는 책에 최홍희는 중국인들을 만나면 태권도는 공자, 순자 사상으로 만들었 으니 당신들 것이라 고까지 말을 했다고 책에 쓰여 있고 특히 많은 태권도 개척사범님들을 모두 다 비정상적인 사범들로 부풀려 거짓으로 매도하며 쎴다. 그러면 태권도를 개척한 위대한 개척 사범님 들이 모두 비정상적이라면 태권도도 최홍희도 비정상적일 것이다. 더더욱 또 그책을 영문으로 번역 하여 이 지구에 팔았다.
그러면 그 책을 읽은자들은 아마 모두가 태권도와 그 개척 큰사범님(스승)들을 존경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최홍희는 손바닥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고 또 자기 스스로 얼굴에 가래침을 밷은 자가 바로 최홍희이란 인간이다. 이게 바로 최홍희의 의식수준이다. 어디 그것뿐이라 --- –
그러나 본질이 친일, 친미자 최홍희는 북조선에 가 다 늙어서 부끄러움과 창피를 깨우쳤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 북조선에서 심사숙고해서 열사능에 묻히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다물흙, 림원섭
남. 북 태권도의 역사들을 알아본다.
5. 왜, 태권도는 우리 민족것이 아닌가!
북조선에서 소속된 국제 태권도 연맹, 일명 ITF 태권도는 1955..4.11일 고 최홍희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태권도라는 것을 창시를 했다고한다. 그러나 1966년7월1일에 출판된 태권도 첫번째 출판된 책과 1972년5월 10일 출판된 책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자세히 보면 기본 동작들이나 형(틀)들이나 각종 용어들을 보면 일본 소토깐 당수도 (공수도/가라데)와 똑 같다. 그것이 최홍희는 동경 중앙대학교 법과에 잠깐 다닐때 잠시 배운 실력이였다고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씨가 만든 급, 단 제도까지 똑 같다.
그래서 최홍희는 태권도 창시자가 아니고 창립자(표절자)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당수도와 태권도 이름만 다르지 내용은 똑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ITF 태권도 24틀 – 천지, 단군, 도산, 원효, 율곡, 중근, 퇴계, 화랑, 충무, 광계, 포은, 계백, 의암, 충장, 고당(조만식)틀에서 1984년도에 ’주체틀’로 바꿨다.
그 이유는 고 김일 부주석과 서기국장 고 허정숙 여사를 모시고 제2기생 졸업 시범을 평양체육관에서 할 때 고당틀을 본인이 시범을 보이게 되였을때 ’고당’이라는 소리를 들은 허서기국장의 항의로 ’주체틀’ 로 바꾸게 된 동기다.
계속 - 삼일, 유신, 최영, 연개, 을지, 문무, 서산, 세종, 통일 - 이렇게 명칭들은 동경 와세대 사학과 출신인 고 이선근이라는 자가 지였다고 최홍희씨는 나에게 말을 했었다. 이선근 사학 박사님은 동경 중앙대학교 내 선배님이 지어주셨다고 자랑 삼아 말을 했었다. 그래서 알게 되였다. 이 일본 식민사관으로된 명칭들 을 최홍희는 왜놈 당수도(가라데) 동작들을 그대로 표절하여 만들었다.
특히 중시해야할 것은 24개 ’틀’들 중 중근(안중근)틀, 충무(이순신)틀, 삼일(3.1)틀, 세종(세종대왕)틀, 주체 (김일성)틀, 통일틀들이 있는데 이 ’틀’들의 동작들이 최홍희가 스스로 연구하여 만들어진 동작들이 아니고 왜놈 당수도(空手道/가라데)들에 있는 동작들을 그대로 표절(도용)하여 길만 다르게 해서 만들었다. 즉 왜놈들의 정서인 그 동작들로 우리의 항일 투쟁 정신을 또 다시 쪽발이들에 예속시켰다는데 있다. 여기에서 사대 매국의 본질이 나왔다는 것을 필자는 단호하게 말 한다.
그리고 태권도 창시자라면 창시자 자신의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중국 의 ’공자, 순자’ 철학뿐이고. 방식은 미양키들의 ’각개전투식’이라고 최홍희는 미국의 용병 출신답게 살아 생전에 늘 말했었다. 그래서 ITF 태권도 역사는 1955년부터 시작한 무술이 철학은 중국의 공자, 순자것 이고, 동작은 일본 소토깐(가라데) 것이고, 방법은 미국(미제) 것이다.
또 한국에서 하고 있는 태권도는 1973년에 김운용, 이종우씨에 의해서 창립된 후 세계 태권도 연맹, 일명 WTF 태권도와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국기원이다. 1973년 3월2일에 기록되여 1997년11월14일자 출판된 태권도 교과서 품새(형)들의 동작들을 보면 일본 소토깐 가라데와 똑 같다. 물론 급, 단 제도도 똑 같다. 철학은 중국의 주역에서 나오는 음양이다. 품새는 이종우 지도관(당수도/공수도) 관장께서 만들었 다.
6. 코리아의 전통 무술은 무엇인가?
월래 고구려, 2천년 전부터 유래되어온 우리민족의 고유 무술인 ’택견’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1910-1945년도까지 왜놈 식민지 시절엔 금지되던 것이 8.15 민족이 해방이된후부터 계속 조금씩 발전되여 오늘엔 인간문화재 고 신한승 선생에 의한 중요 무형 문화재 제76호로 한국 택견 협회(The Korea Tack gyeon Association)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목록 지정 전승 단체가 있다.
우리민족 고유의 무술이 태권도가 아니고 이 택견이 바로 우리 민족 코리아의 고유의 무술이다.
그러나 오늘에 태권도의 손발 격파 즉 서서 발차기와 뛰어차기들의 기술들은 이 지구에서 으뜸이다.
7. 국제 태권도연맹(ITF) 창립자는 누구?
술을 만들어 파는 양조장을 경영하던 아버지를 둔 최홍희(崔泓熙, 1918년 11월 9일 ~ 2002년 6월 12 일)는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으로, 국제 태권도 연맹이 주장하는 태권도의 창시자라고 하는자다. 또 일본 중앙 대학교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한다.
이 왜놈들의 식민지 사절에 동경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 처럼 어렵다는 것은 철저한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던 때다. 그런데 24-28살 젊은 청년이 써준 몇 폭 붓글씨들의 뜻이 어떤 것이였는지는 몰라도 그 왜놈 순사가 동경 유학을 허락를 해주었다고 말하는 최홍희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만약 거짓말 대회가 있다면 이자는 일등을 할 것이다.
해방 후
1946년 국방 경비대에 입대
1953년 제주도 제 29사단장.(제주도 양민 대 학살 사건 1948.4.3.-1954.9.21까지)
1955년 청도관에서 손덕성 관장 명의로 명예 4단증을 받았다.
1955년부터 3군관구 사령관
1959년에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1960년부터 제2훈련소장, 육군본부 정보 참모부장 혹은 전투병과 교육기지 사령관
1961년부터 6 군단장을 역임 중 박정희 5.16에 충실히 편입
1962년에 육군 단장 및 예비역 편입하고 주 말레이시아 대사
1966년 3월 22일에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창립하고 총재
2002년 6월 12일 평양에서 위암으로 사망한 뒤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위키백과사전과 태권도 교과서, 청구사 발행, 1972.5.10일 참고’
본인은 1965년에 ITF 단증으로 바꾸기 위해서 첫 만남으로 부터 알게 되여 1967베트남 쾅나이와 다낭 지역을 개척할 때와 1975년 스웨덴, 1976년 노르웨이 태권도 개척 사범으로 있으면서 태권도가 우리 민족 것이라고 하여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몇년씩 가르쳐서 ITF 단증과 도복과 책을 돈주고 사야하였기 때문에 이 최홍희라는 사람과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날때 마다 언제나 실망을 가지게 했었다.
왜, 첫째는 거짓말이였다. 정당화와 말 돌려 붙히는데는 당할 자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최홍희는 무도가 뜻이 너무 깊어서 답을 할 수가 없다는 자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이자는 기본 철학인 무도란!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느낌은 이분은 무도인이 아니라고 서서히 나 스스로 깨우치기 시작을 했다.
그리고 한국인 사법들에게는 세미나 같은 것도 해주지 아니하면서 만나면 공자, 순자 이야기만 했었다.
그래서 본인은 이분을 보고 공자 전도사라고까지 했었다. 그러면서 외국인 검정띠들에게는 세미나를 해주면서 한국인 사법들에게는 해주지 않고 일부려 피했다. 태권도 개척 사범들은 모두 책을 보고 스스로 태권도 ’틀’들을 터듯했다. 그래서 인가 이 최홍희는 무급에서 초단까지 단 한사람도 가르쳐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자다.
이 지구 각나라에서 김치도 없이 밥 굶어 배 골아가며 태권도가 코리아 것이라고 - 사기인 줄도 모르고 개척 사범님들이 모두 다 순진하게 열심히 보급 개척했다. 그와 반면 뻔뻔스런 최홍희는 오직 급증, 단증, 도복, 책 장사만 하는 장사꾼에 불과 했다. 그렇게 해서 공산당을 때려 잡자고 만든 태권도가 이 좁은 지구에 두루 두루 다 보급되였다.
그리고 특히 제주도에서 29사단장 시절에 상납 받은 한석봉 글씨를 카나다까지 가지고 가서 일본에 팔아 거액을 주고 팔은 돈으로 여러 나라에서 고생하는 사범들에게 도장을 차려 주겠다고 철석 같이 약속을 해놓고는 몫돈이 생기니 약속을 헌 신짝처럼 버리듯이하고 자기 집을 사며 사리사욕에 썼다. 그리고 사범들간에 부끄러움도 없이 이간질을 교묘히 지능적으로 잘 했다.
또 최홍희씨는 1972년 캐나다로 망명했는데,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상당수 남측 태권도 인들은 최씨가 말레이시아 대사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공금유용 혐의를 받고 귀국조치를 당했으 며, 김운용씨가 태권도계에 들어오자 위기를 느끼고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 이종우 말씀 -
그리고 ’태권도와 나’라는 책에 최홍희는 중국인들을 만나면 태권도는 공자, 순자 사상으로 만들었 으니 당신들 것이라 고까지 말을 했다고 책에 쓰여 있고 특히 많은 태권도 개척사범님들을 모두 다 비정상적인 사범들로 부풀려 거짓으로 매도하며 쎴다. 그러면 태권도를 개척한 위대한 개척 사범님 들이 모두 비정상적이라면 태권도도 최홍희도 비정상적일 것이다. 더더욱 또 그책을 영문으로 번역 하여 이 지구에 팔았다.
그러면 그 책을 읽은자들은 아마 모두가 태권도와 그 개척 큰사범님(스승)들을 존경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최홍희는 손바닥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고 또 자기 스스로 얼굴에 가래침을 밷은 자가 바로 최홍희이란 인간이다. 이게 바로 최홍희의 의식수준이다. 어디 그것뿐이라 --- –
그러나 본질이 친일, 친미자 최홍희는 북조선에 가 다 늙어서 부끄러움과 창피를 깨우쳤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 북조선에서 심사숙고해서 열사능에 묻히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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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흙 작성일저 사진이 숭미, 종미, 친미 주의자였던 최홍희 소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