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쉐핑(1880~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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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궁금이 작성일2015-09-08 10:06 조회1,328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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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한 여인이 말을 타고 전라도 일대를 한 달여간
순회한 뒤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소똥 어멈 등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발을 내디딘
엘리자베스 쉐핑(1880~1934)의 기록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염병으로 병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눈과 마음을 뗄 수 없었던 그는
서양식 삶을 고수하던 여러 선교사와 달리
조선말을 익혀 '서서평'이라 이름 짓고,
한복을 입고 된장국을 먹으며
헐벗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선교사에게 주어진 하루 식비는 3원.
그러나 서서평은 10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걸인들을 데려와 씻기고 옷을 사 입히는가 하면,
나환자가 버린 아이를 수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데려다 키운 아이가 14명,
아이 낳지 못해 쫓겨나거나 오갈 데 없는 여인
38명도 거두어 보살폈습니다.
한번은 병원 앞에 버려진 아기를 어느 집에 맡겼는데
잘 키우겠다는 약속과 달리
술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보고
그동안의 양육비를 주고 데려 오기도 했습니다.
서서평이 이일학교와 조선 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를
세운 것도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에서 이렇게 헌신하다 휴가를 받아
잠시 미국에 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는 고된 생활에 찌든 딸을 보고
"몰골이 부끄러우니 돌아가라!" 하며 차갑게 외면했습니다.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짜리 담요...
서서평이 22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전부였습니다.
거적떼기를 덮고 자는 사람에게
그의 담요 반쪽을 찢어주고 남은 반쪽으로
가냘픈 몸을 가린 채...
이승의 삶을 그렇게 마쳤습니다.
그의 장례 행렬을 뒤따르던 천여 명은
통곡하며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흐른 오늘까지도
서서평이 묻힌 광주시 양림동
뒷동산에는 그의 참사랑과 헌신을 추억하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합니다
한 여인이 말을 타고 전라도 일대를 한 달여간
순회한 뒤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소똥 어멈 등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발을 내디딘
엘리자베스 쉐핑(1880~1934)의 기록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염병으로 병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눈과 마음을 뗄 수 없었던 그는
서양식 삶을 고수하던 여러 선교사와 달리
조선말을 익혀 '서서평'이라 이름 짓고,
한복을 입고 된장국을 먹으며
헐벗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선교사에게 주어진 하루 식비는 3원.
그러나 서서평은 10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걸인들을 데려와 씻기고 옷을 사 입히는가 하면,
나환자가 버린 아이를 수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데려다 키운 아이가 14명,
아이 낳지 못해 쫓겨나거나 오갈 데 없는 여인
38명도 거두어 보살폈습니다.
한번은 병원 앞에 버려진 아기를 어느 집에 맡겼는데
잘 키우겠다는 약속과 달리
술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보고
그동안의 양육비를 주고 데려 오기도 했습니다.
서서평이 이일학교와 조선 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를
세운 것도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에서 이렇게 헌신하다 휴가를 받아
잠시 미국에 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는 고된 생활에 찌든 딸을 보고
"몰골이 부끄러우니 돌아가라!" 하며 차갑게 외면했습니다.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짜리 담요...
서서평이 22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전부였습니다.
거적떼기를 덮고 자는 사람에게
그의 담요 반쪽을 찢어주고 남은 반쪽으로
가냘픈 몸을 가린 채...
이승의 삶을 그렇게 마쳤습니다.
그의 장례 행렬을 뒤따르던 천여 명은
통곡하며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흐른 오늘까지도
서서평이 묻힌 광주시 양림동
뒷동산에는 그의 참사랑과 헌신을 추억하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합니다
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저거 서서평 선교사의 이야기네요? 비록 서양인이지만 오히려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여성다운삶을 살아온 여성으로 모든 약자들의 어머니로 살아왔던 여자였죠~!!!! ㅠㅠㅠㅠㅠㅠ 저기 올려진 글도 중요한거니까 내리지마셔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