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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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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물흙 작성일2015-09-12 18:03 조회1,24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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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74.
내가 45년 옥살이를 하고 대전교도소를 나서는 날 문밖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성의를 다해 우리의 옥바라지를 해주고 석방투쟁을 벌여온 《민가협》성원들, 운동권의 청년학생들과 각계인사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남쪽태생으로서 친인척인 많은 나에게는 일점 혈육도 빛을 보이지 않았다. 형언할수 없는 착잡한 심경을 안고 일단 집으로 가기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먼저 출소한 동지들이 살고 있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락성대 《만남의 집》을 찾아 갔다.  《민가협》성원들을 통해서 비로소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수 있었다.

천만뜻밖에도 형제들이 나와 만나기를 거부해서 마중도 안 나왔으며 내가 그들의 집에 가는것도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이 아들을 기다려 죽지 못한다는 94살의 어머니도 만날 수 없다는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동생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형과의 의절을 선포했던것이다. 벌써 내가 출소하기 20년전인 1976년에 동생 선일이는 내가 1950년 8월 2일에 죽은것으로 사망신고서를 내고 나를 호적에서 지워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지 석달후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조차도 통지가 없었고 묘를 어디에 썼는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선희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가자고 했으나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선일이가 형이 장례식에 오면 자기는 거기에 안 가겠다는 최후통첩을 해왔기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억이 막히는 일이였다. 출소 며칠후 극적으로 만났던 어머니의 주름 패인 얼굴이 떠올랐다. 로환으로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저녁밥술을 놓은 다음 대문까지 걸어 나가서는 생급스럽게 《선명이 왔다 갔지?》라고 큰소리로 물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신상이 심상치 않아서 림종이 박두했다는 예감이 든 동생내외는 급기야 《민가협》에 알려 나와 만나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건강을 핑계대면서 상봉시간을 재촉하는 제수때문에 45년만에 처음이자 일생에 마지막이였던 어머니와의 만남은 고작 25분으로 끝났다.  나라가 독립되지 못하고 국민이 미국이란 주인을 섬기는 노비신세로 전락하였으니 어찌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친일친미 매국노의 폭력이 가해질까봐 형을 형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아들이라도 마음 편히 만나지도 못하니 이런 기막힌 망국노의 한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야속하면서도 정겨운 시선으로 이 아들을 바라보는 물기어린 어머니의 눈빛에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시는 그 작고도 따뜻한 손길에서 변함없이 뜨거운 어머니의 사랑이 나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세상에 기막힌 일도 다 있구나. 선명아, 네가 이렇게 나왔는데 너와 동생들, 제수들과 조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밥이라도 한 끼 나누는 걸 내가 보았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어머니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구나. 용서해라, 아들아… 이것이 어머니모습에서, 그 선한 눈빛에서 내가 읽은 모성애의 서정시였고 내가 들은 그 옛날과 다름없는 어머니의 자장가였다.

 제수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며 부축해 일으키려고 하자 어머니는 그를 마다하며 나에게 안기겠다고 하였다. 내가 어머니를 안아 자동차에 앉혀 드리는데 어머니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장손아, 집은 네가 갈 곳이 못 되는 것 같구나.》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귀로 눈물이 주르르 굴러 내렸다.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어머니손등에 점점이 떨어 졌다.

(나라의 남쪽반쪽이 미 식민지로 되어 노예처럼 상전의 눈초리가 무서워 김선명의 가족은 부모자식도 흩어져야 했습니다.)  어머니손등을 적신 나의 눈물은 핏줄을 나눈 혈육들의 집은 비록 갈 데가 못 되어도 나에게는 한생을 맡아 주는 웅심 깊고 뜨겁고 영원한 어버이 품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위로의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지옥에서 45년간 삶을 지탱해 온 아들을 만난 기쁨보다는 한배에 품어 키운 자식들 사이의 의리가 상하는 가슴 저미는 통한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나는 결코 동생들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생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죄도 아니고 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죄를 따진다면 미제와 남조선사회제도에 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혈육의 가슴에도 서슴없이 칼을 박고 인정과 의리도 도덕도 무참히 짓밟는 남조선사회가 그들로 하여금 40여년 만에 사지에서 풀려 나온 형에게도 등을 돌려 대게 했던 것이다.

내가 죽음을 각오했기에 신념을 지켜 냈다면 그들은 혈연을 단절하는 것으로 자기를 살리려 했다. 나는 믿는 데가 있어야 죽을 각오도 하고 육체적으로는 죽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영생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면 나의 동생들은 이것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피보다 더 진한 것이 수령과 전사와의 관계이고 수령의 품에서만 혈연의 피도 물보다 진할 수 있다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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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정말 가슴아픈 이야기네요? 다물흙선생님, 앞으로도 6.25란 도대체 무엇인가? 다음칼럼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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