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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민족지도자 이희세 선생, "반북하면 쌍방이 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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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12-03 00:00 조회2,7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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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북은 우리 민족 전체의 큰 손해입니다"
유럽민족민주운동의 지도자 이희세 선생 인터뷰


이주희기자

Lee-Hise.jpg1964년 파리에 그림공부로 유학갔다가 41년간 고국을 못가고 있는 이희세(73세). 고향산천이 그리워 고향과 비슷한 어느 프랑스 마을에 살고 있다. 파리의 ‘김치식당’의 주인으로 이름이 나있다. 재불화가 고암 이응로 화백의 친조카인 그는 왜 고행의 길인 민족민주운동에 뛰어들었을까?

이희세씨를 만나기 위해 필자는 이른 아침 베를린행 기차에 올랐다. 한민족유럽연대 정기총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선생을 만나기 위해 약속한 장소인 팔라스트 회관에 간 것은 지난 11월 5일이었다.

작년 5월부터 시작된 해외민주인사의 명예회복과 귀국추진에 대한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작년에 KBS방송이 저를 찾아왔어요. 하지만 우리 운동에 대한 기본생각을 소개하지 않고, 몇 사람을 들어가게 하는데 더 관심이 많은 듯해 저는 그런 식의 진행에 반대했습니다.”

이선생의 첫번째 요구는 “서울에서 해외운동이 정당한 운동이었다는 평가를 해달라”였다. “통일과 민주화운동이 정당한 운동이었다는 것을 천명해 주고, 인정해 주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선생은 한국이 민주화됐다는 사실에 문제제기를 했다. “어떻게 과거에 반민주적인 일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의 자식들이 오늘도 활개치고 다닐 수 있습니까?” 또 “제 나라 국민이 들어가는데 누구한테 사정을 하고,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질문은 선생이 왜 한국에 못 들어오는가로 옮겨갔다. 이 물음에 선생은 “서울의 안기부에 가서 물어보라”고 답했다. “나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민족적인 양심에서 움직였다”고 대답했다. 달리 이야기를 하면, 본인은 양심에 따라 민족민주운동을 했기 때문에 만일 이희세가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국정원에 가서 물어보란 뜻이다.

필자는 민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들어선 뒤, 선생님을 모셔가기 위한 노력이 있었는가고 물어보았다. 대답은 ‘아니올시다’였다. 아직 ‘좋은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단다. 그리고 두번째 요구를 했다. “우리가 싸웠던 대상(즉 정권이란 뜻)에 대한 사항을 분명히 밝히시오.” 즉 각 독재정권의 비리와 과오를 분명히 지적하란 뜻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씨를 석방한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고 꼬집었다. “광주에서 국민을 죽인 책임으로 사형까지 받은 사람을 국민통합이란 명목으로 대통령이 독단으로 내 놓은 것은 민주주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선생은 본인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내의 잘못된 정치를 청소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런 일에 언론인은 물론 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선생은 또 한국의 기자들이 이렇게 물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선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같은 군사독재가 한 잘못을 밝히는 과정에서 해외의 민족민주운동에 참가한 선생이 무슨 역할을 했는가를 묻는 역사적인 정리를 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말했다.

선생의 바람은 한국의 언론과 학계가 독재의 비리를 정리하고, 정치계는 그 잘못된 상태를 고치는데 앞장 선 다음, 모든 것이 깨끗이 청소가 되어 한국이 참된 민주주의 국가로 된 다음에 가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선생의 의중을 뚫어보았다. “국정원이 이선생의 비밀 파일을 공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달리 질문하면, 이희세 문서철을 공개하라고 요구하시겠습니까”고 묻자, “당연한 요구”라고 답하면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답했다. 선생의 논리로 보면, 민주정권이 들어섰으면, 당연히 그래야 했었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민주정권이 들어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을 잡았으면, 쓸어낼 것은 쓸어내야지요. 그리고 그간 안기부가 해외민주인사들에 대한 부당한 판단과 조치를 취한 것을 싹 청소한단 말입니다. 잘못됐다 인정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야 비로소 민주주의가 됩니다.”

한국에서 해외민주인사를 귀국시키려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을 언급했다. 즉 당사자들의 경제적인 사정도 고려해 주고, 30-40년 동안 고국을 방문해 보지 못한 분들의 심리적인 마음의 상태도 같이 고려해 주기를 바랬다. 어느날까지 오시란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귀국을 준비할 때, 당사자들과 일정정도 합의와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송두율 교수 사건을 지켜본 소감을 물었다. “지금 이야기하는 그 학자 하나를 잡아다가 기만적으로 한다면, ‘우리는 벌써 민주주의가 되가고 있다’는 말이 웃긴다‘는 겁니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대단히 분개스러운 것이다”고 말하면서 송 교수를 그렇게 만든 “그 잘못된 제도를 없애는데 노력하십시오”라고 주문했다.

이야기는 국가보안법의 역사와 여당의 자세로 옮겨갔다. “국민대다수가 열린우리당을 거대여당으로 만들어주었는데도 지금 딴소리를 하고 있는데 참 회의가 든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원칙적인 이야기지만 “국민의 절대다수가 다수당을 만들어 주었으면, 국민의 뜻에 대한 보답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할 것”을 상기시켰다.

이선생은 자기 이익을 위해 여야를 넘다드는 정치인을 “똥파리 정치인”라고 지칭했다. 이익이 있을 때는 와 몰렸다가 이익이 없으면, 금방 사라지는 똥파리에 비유한 것이다. 또 선생은 놀랍게도 한국정치에는 여야가 없다는 진단을 했다. 여야는 ‘사촌관계’정도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필자는 진짜 야당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자, “야당은 땅속에 들어가 있거나, 철창에 갇혀있는 사람이나, 우리처럼 해외에서 애국운동하는 사람들이 야당이다”고 말했다. 여야가 분명해 질려면, 당의 분명한 정책, 정강이 있어야 하며, 사상과 이론도 갖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자가 모두 보수입니까 물어보니까,“한국의 보수는 보수가 뭔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한국에는 자본주의자도 없고, 보수주의자도 없고, 진실한 사회주의자도 없다”고 답했다. “진실한 사회주의자가 어디 있습니까”고 묻자,“땅속에 있거나, 형무소에 앉아 있거나 밖에서 우리처럼 ‘빨갱이’ 딱지가 붙은 사람들”이라고 비슷한 대답을 했다.

필자는 외람된 질문을 했다. “선생은 빨갱이십니까?”고 묻자, 도인같은 답을 했다. “내가 찍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찍었지. 그것에 대해 노여워할 것도 없고, 너희는 네 마음대로 하거라”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있음”을 강조했다.

“나는 지금도 내가 하는 일이 빨갱이라고 한다면 도장을 찍으시라 이야깁니다. 나는 조금도 저항할 필요가 없고, 나는 내 뜻대로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사상의 자유가 아닌가”며 역설적인 질문을 해왔다. 한 한국 사람이 필자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도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한다. “당신의 눈이 빨갱이라고 한다면, 내가 아무리 빨갱이가 아니라고 소리쳐도 당신의 눈이 바뀌지 않는 이상, 당신 앞의 나는 빨갱이입니다”고 선문답같은 답을 했단다.

필자는 이선생이 삼촌인 이응로 화백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또 어떤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선생이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나선 계기는 이화백이 동백림 간첩단사건에 연류되었을 때 구명운동을 하면서부터라고 답을 했다. 만일 이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평범한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치란 음식과 같은 것이다”고 정의하면서, “일상 속에서 절대적으로 알아야 할 음식으로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 깨우침의 계기는 선생이 “불란서란 자유주의국가에 온 덕”이라고 말했고, 둘째는 “주위에 좋은 친구들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었다”고 했으며, 김지하 시인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내 시 귓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란 자괴의 말이었단다. “나라는 가난한데 나만 그림을 그리고 잘 산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국민들은 박정희 군사독재 밑에 허덕이는데, 나라는 분단되어 있는데 나만 안일하게 그림을 그려가며 사는 것이 과연 뜻이 있는가”란 회의가 들어단다.

이야기는 선생의 집안내력으로 옮아갔다. 선생의 작은 할아버지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의병을 일으키셨다가 실패하자, 당신 친구들과 한 약속을 지켜 자결을 하셨단다. 이 할아버지는 이근주(李根周)다. 당신의 공덕을 기린 비가 선생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락산리에 있다. 바로 이 분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이응로 화백으로부터 귀에 목이 박히도록 들었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한다. 민족이 자주성과 독립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꼴을 당했다”

선생은 본인이 민족주의자라고 불렀다.“지금도 나는 여하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나의 사상, 민족의 자주와 독립의 수호를 바꿀 수가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 했다. “우리가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이나 북이나 민족의 자주노선을 어느 정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달려있다고 저는 봅니다.” 또 하나의 당부가 있다. “반북을 하지 마시요. 반북을 하면 쌍방이 이득을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전체에게 손해만 가져올 뿐입니다.”

선생의 의식은 단호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세력은 친미파로 규정하면서, 바로 이들이 반공주의를 만들었고, 사상대립을 야기시켰다고 지적했다. 선생이 좋아하는 킹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흑인의 불행은 자신이 흑인인지 모를 때 왔어요.”즉 머슴사는 사람이 왜 머슴살이를 하는지 모를 때 머슴사는 사람의 불행이 시작된다는 뜻. 선생은 성조기를 흔들며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반대하는 기독신자들의 데모를 지켜보며, 민족이 뭔지 모르는 이들을, 양심도 없는 이들을 지금 꾸짓고 있는 것이다.

이선생이 고향을 볼 수 있느냐 마느냐는 어쩌면 우리의 몫일 것이다.


글/사진= 이주희 독일통신원 leejoohi@ngotimes.net

[출처:시민의 신문 2004.11.29]

<<평화통신 12/3/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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