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고-3] 미제국주의의 위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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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3-07 17:13 조회4,034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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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혜 민족통신 영문판 편집위원은 카나다 학자 미셸 초스도프스키의 글 "US Imprial Conquest: The World at the Crossroads of the Most Serious Crisis"(중국 제4언론 2014년 2월2일자보도)를 번역하여 해내외 독자들에게 소개중에 있다. 그 글중 세번째부분의 글을 번역해 여기에 게재한다. 김미혜편집위원은 1.5세로서 1980년대 재미한청 시카고지역에서 활약하다가 그만두고 미국동부지역에서 한의사로 일해왔다. 2014년 2월22일부터 민족통신 영문편집위원으로 활약하게 되었다.[민족통신 편집실]
전쟁범죄의 역사
미국의 군사전략에는 대량살상을 유도하는 계략이 현재까지도 만연하고 있다.
시리아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전쟁을 일으킨 침략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살상피해가 공격을 당한 피해자의 잘못으로 인한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코리아 전쟁으로부터 현재까지 분쟁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전쟁은 미국이 지원하여 발생한 것이다 (코리아, 베트남, 캄보디아,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유고슬라비아). 저강도 충돌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군사개입에도 미국은 역시 지원하였다.“내전”의 형태 (콩고, 앙골라, 소말리아, 이디오피아, 르완다, 수단). 군사 쿠데타, 미국지원의 살인조직과 대량학살의 형태(칠레, 구아테말라, 온두라스,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미국정보기관에 의해 비밀리에 주도된 전쟁을 거쳐 미국-나토가 합작 지원하여 리비아에 군사개입 (서방정보기관의 지원을 받은 알카에다 반군이 총알받이 노릇을 하였다).
시리아에서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비밀리에 주도된 공격으로, 서방 군사동맹군과 아랍 걸프협력회의 (GCC- Gulf Cooperation Council) 회원국(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에미레이트 연합국, 카타르, 오만)의 지원을 받은 테러분자들이 일으킨 내란이다.전쟁의 목표는 시리아를 와해시켜 국가를 전복하는 것이다.
이런 전쟁에서 꼭 승리를 거두어야했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를 와해전복시키거나, 서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리정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1945년 8월 이후, 발전도상에 있던 나라중에서 44개국을 웃도는 나라들의 여러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공격하였다. 다수의 어떤 지역은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였다.
“이러한 군사개입의 목적이 ‘정권교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인권” 이라든가 “민주화”라는 외피가 어김없이 등장하였다. (Eric Waddell, 2003)
국제주의 파괴: 트루먼 독트린
제2차 세계대전의 뒤를 이어 냉전이 시작되는 1940년대 말부터, 제국주의화 과제를 뒷받침하는 범지구적 군사력 우세를 획득하기위한 더욱 광범위한 계획이 트루먼 정부에 의해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미국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1990년도 미의회 상원 합동회의 당시 했던 그 유명한 연설에서 재확인되었다. 부시는 그 연설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동맹국이 해체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질서가 출현하였다고 선포하였다.
이 행동강령의 이념적 토대가 소위 “트루먼 독트린”에서 발견되는데, 외교정책고문인 조지 케난에 의해 1948년 미 국무부 업무지침서에서 처음으로 공식화되었다.
조지 케난 (George f. Kennan)
냉전시대의 “봉쇄”정책에서부터 그후의 “선제공격”식 전쟁이나 “테러와의 전쟁”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에는일맥상통하는점이 있다는 사실을 1948년의 이 문건을 통해 알수있다.
고상한 용어로 씌여있긴하지만 그 내용인즉 미국은 무력을 통해 경제적 전략적 우위를 담보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전세계 부의 50 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지만, 인구는 고작 6.3 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러한 격차는 특히 아시아의 인민들과 비교하였을 때 더욱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선망과 원망의 대상이 안될수가 없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우리가 달성해야할 진정한 과제는, 국가안보에 사실상의 손상을 입히지않는 한도내에서 이러한 격차를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는 관계의 양식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 모든 감상적인 기분과 백일몽은 떨쳐버려야 한다; 이 즉각적인 국가적 목표를 향해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온갖 노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이제는 이타주의니 세계를 위한 자비심이니 하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다고 자신을 속이는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극동 아시아지역에 대하여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였던 몇가지 사항에 대한 개념정리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다. “환영을 받는다”거나 또는 고상한 품위를 지닌 국제적 박애주의자로 받들어지는 것에 대한 열망을 집어치워야한다. 아우를 지켜주는 형이 되기를 자처하는 행위를 그만 두어야하며, 도덕적이나 이념적 조언을 제공하는 행위도 자제하여야한다. – 극동 아시아를 위하여 – 라는 명목으로 하던, 애매모호하고 비현실적이었던,인권운동, 생활조건향상, 민주화 등등의 과제에 대해 그만 입을 다물어야한다. 단도직입적으로 권력이 무엇인가라는 개념파악에 돌입한 날이 멀지않았다. 관념적인 구호를 떠들어댐으로써 시간을 지체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유리한 것이다. (조지 케난, 1948 국무부 업무지침서)
독립적이고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인 유엔을 분열시키려는 계획은 유엔이 창립되던 1946년에 이미 미국의 외교정책 청사진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계획된 유엔의 종말은 1948년에 윤곽을 갖춘 트루만 독트린의 필수사항중 하나이었다. 워싱톤은 유엔이 구상 창립되는 최초의 순간부터, 한편으로는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유엔을 조종하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엔을 약화시키고 언젠가는 결국 파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 케난의 입을 빌려 들어보자:
“때때로, 유엔은 유용한 쓰임새가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더많이 만들어내었고, 결국 우리의 외교적 노력를 상당할 정도로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유엔의 다수결을 이용하여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는 언젠가 우리에게 총구가 돌아오게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측의 몹시 주의깊은 연구와 선견지명을 요구하는 상황인 것이다. “ (조지 케난, 1948)
공식적으로는 “국제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워싱톤은 대체로 유엔에게 입에 발린 말만 하였다. 현재 유엔은 여러 측면에서 미국 정부기관 부속물의 하나이다. 하나의 기구로서의 유엔을 약화시킨다기보다는, 미국과 그 우방들은 유엔 사무국과 주요 유엔 기구들에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제1차 걸프 전쟁이후, 유엔은 대부분의 경우에 고무도장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전쟁범죄에 눈을 감고있고, 앵글로 아메리칸 침략자들을 대신하여 소위 일컫는 평화유지활동을 시행하였다. 이것은 유엔헌장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유엔 사무총장이 사실상의 “해고” 를 당한뒤에 선출된 코피아난과 반기문은 미 외교정책을 대변하는 도구가 되어, 워싱톤으로부터 곧장 명령을 받고 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세력권 구축하기
위에서 언급한 트루만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시기,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시작된 미 군사전략의 최정점이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전쟁이 끝난후 일본을 점령하였고, 남한 등과 같은 일본의 옛식민지국가들을 인수하여 점령하였다.
2차대전후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에 뒤이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미국의 지배권은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패권은,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 관할구역에 있던 나라들에 기반하여 주로 형성된 것이다.아시아에서 약 20 여 년의 기간에 걸쳐 형성된 미국의 지배권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 (2차대전 당시 일본에 점령되어 있었으나 미국 소유였다). 남한 (1910년에 일본에 합병됨). 태국 (2차대전 당시 일본의 보호령).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식민지. 2차대전 동안 일본에 점령됨. 1965년 수하르토의 군부 쿠데타로 사실상의 미국의 앞잡이 정권이 됨).
아시아지역의 미국의 지배권은 인도차이나의 옛 프랑스 식민지 소유국으로 확장되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으로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점령하에 있었다.
오바마 정권이 주창하여, 공공연히 중국을 위협하고 있는 “아시아로의 회귀 (Pivot to Asia)” 정책은 이러한 역사적 변화과정의 마지막 단계이다.
코리아 전쟁(1950-1953)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에 의해 주도된 첫번째 주요 군사작전이었다. 완곡하게 표현되였던 “냉전”이 바로 태동하는 단계에 들어선 때였다. 여러가지 면에서 코리아 전쟁은 2차대전의 연속 선상에 있었다. 어느날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가, 다음 날 새로운 식민강대국인 아메리카연방국의 손아귀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3주가 지난 1945년 9월 8일의 남한에 있던 일본의 관료들은 과도기 업무를 보장하기위해,하지가 이끌던 미군정(US Army Military Government (USAMG) (1945-48)을 도왔다. 서울에 있던 일본 식민관료들과 남한의 경찰관료들은 새로 온 식민수괴들과 결탁하게 된 것이었다.
일본은 패배한 제국으로 대접을 받았고, 남한은 미군의 규율과 군점령군의 관리를 받아야하는 하나의 식민지로서 파악되었다. 미국이 지목한 리승만이 더글라스 맥아더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1945년 10월 서울로 날아들었다.
2차대전 끝무렵에 일본과 독일의 민간인에 가해진 폭격과, 코리아를 상대한 전쟁때의 민간인 폭격은 대량살상을 유발하는 이벤트를 실행하는 기초 단계를 다진 것이었다: 대규모 범죄가 미군의 무력에 의해 자행되었다. 미군 소장 윌리암 딘은 그가 “목격한 북한의 도시와 마을은 대부분 모조리 돌무더기 폐허가 되었거나, 흰눈에 덮인듯 희뿌연 황무지가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북한 폭격을 지휘하였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뻔뻔스럽게 인정하였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우리는 – 뭐 – 20 퍼센트에 달하는 인구를 죽였다. … 북한에 있는 모든 마을을 불태워버렸고, 남한에 있는 것도 다 태워버렸다.”
브라이언 윌슨에 따르면:
지금 믿을 수 있는 사실은, 1950년 부터 1953년 동안의 38개월에 걸친 “치열한” 전쟁통에, 38도선 이북에 살던 8 백만 내지 9백만 명 중 3분의 1에 달하는 인구가 죽임을 당하였다. 적대적 호전성을 가진 어떤 나라때문에 한 나라가 역사상 유례 없는 학살의 고통을 겪어야했다.
북한은 60년 이상, 미국으로부터 핵무기 공격의 위협을 받고있다. (다음에 계속...)
[원문보기] US IMPERIAL CONQUEST-By Michel Chossudovsky
***[번역기고] 미 제국주의의 세계제패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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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 Sup Lim님의 댓글
Won Sup Lim 작성일
트루먼 독트린 – 외교 정책고문 – 조지 케난(George F Kennan)의 말. 미제주의의 위기 3, 김미혜 글에서 퍼옴
북한 폭격을 지휘하였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뻔뻔스럽게 인정하였다:“3년이라는 기간 동안 우리는 – 뭐 – 20 퍼센트에 달하는 인구를 죽였다. … 북한에 있는 모든 마을을 불태워버렸고, 남한에 있는 것도 다 태워버렸다.
” 브라이언 윌슨에 따르면:지금 믿을 수 있는 사실은, 1950년 부터 1953년 동안의 38개월에 걸친 “치열한” 전쟁통에, 38도선 이북에 살던 8 백만 내지 9백만 명 중 3분의 1에 달하는 인구가 죽임을 당하였다. 적대적 호전성을 가진 어떤 나라때문에 한 나라가 역사상 유례 없는 학살의 고통을 겪어야했다. 북한은 60년 이상, 미국으로부터 핵무기 공격의 위협을 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