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이명박정권 공안정국을<br><br> 애국세력의 단결로 분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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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9-05-12 00:00 조회1,8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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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은 전국적으로 민족민주세력에 대한 일대 탄압소동을 벌리고 있다. 반통일 반북 대결노선으로 정국을 주도해 이끌어 가려고 하고있다. 위기에 처한 자의 초조감 불안감의 자기노출이다. 국정원을 비롯한 기무사, 공안경찰 무력이 총 동원되고 있다. 그들은 정권의 시녀 사법부가 남발하는 압수수색 영장을 갖고 통일 애국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체포 연행, 법 절차 없는 수감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만행까지 서슴없이 자행하고있다.
국정원 요원들과 공안경찰은 지난 5월7일 새벽 6시 30분에 범민련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 소재 범민련 중앙사무실의 경우 수십명의 경찰들이 건물 밖에서 경호를 서고 30-40여명의 국정원 수사과 직원과 보안수사대가 사무실 압수수색을 펼치고 이재규 의장 등 6명을 연행 해 갔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도와 전두환 살인정권도 이러지는 않았다. 오늘 이명박 정권의 범민련 탄압은 또 한번 민족 민주 통일세력을 말살하려는 발악적인 탄압공세이다.
왜 이명박 정권은 탄압의 과녁을 통일 애국세력과 조직에 집중시키고 있는가? 작년에는 실천연대 인사들을 체포투옥 했으며 특히, 5월 1일 노동절과 5월 2일 촛불 1주년 행사에 대한 광란적인 공안탄압이 자행되는 가운데 터져 나온 이번 사건은 지난해 사노련과 실천연대 사건과 마찬가지로 촛불에 <색깔론>까지 덧씌운 기획된 조작사건이다.
지금까지 범민련 남측본부는 북측과의 팩스교환을 통한 회의 자료를 모두 공개해왔으며, 심지어 남북관계가 교착되었을 때 정부의 요청으로 대북 창구 역할까지 해온 바 있다. 그리고 기관지 <민족의 진로>역시 수년간 아무 문제없이 발행해왔다. 그런데 국정원을 비롯한 공안당국이 6.15공동선언 이후 무려 9년간 문제삼지 않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촛불이 타오르자 이와 같은 활동을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과 <이적표현물> 제작반포로 몰아가는 것은 진보진영에 대한 공안탄압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지금의 국정원장의 임기는 길어야 1~2년이다. 영원한 이명박의 서울 부시장으로 남기위한 과잉충성이 아닌가.? 아니면 개성공단 현대아산 직원으로 위장 침투해 북측의 여성근로자를 성추행하고 북을 염탐한 국정원 요원(유모씨)가 장기 억류되고 있는데 대한 분노인가? 그래서 뿔이 난 것인가… ?
이명박 집권 1년 동안 구속 투옥 체포된 국민들이 무려 2,800여명이나 된다. 오늘의 이명박 정권의 범민련 탄압은 또 한번 민족 민주 통일세력을 말살하려는 발악적 탄압공세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1% 부자정책에 저항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이행을 거부하고 남북교류와 협력에 찬물을 끼얹고 오늘의 남북관계를 극도로 대결국면으로 만든 자기의 실정과 폭정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민족민주 애국세력들이여 이명박을 타도하라! 국정원을 해체하라! 국가보안법의 철폐하라! 는 투쟁구호를 들고 모두가 떨처나서라….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통일대화의 역사와 .범민련 조직의 태동에 대해서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누구와 대화를 해야 하는가? 우리민족의 통일은 남과 북이 합치는 것이지만 통일의 대화상대는 북조선이고 통일운동의 주체는 남과 북, 해외의 우리민족 구성원이다. 우리민족끼리의 통일이 북조선과 대화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으며 우리민족끼리의 통일을 달성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본격적인 북조선과 직접 대화는 해외 동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해외는 그만큼 북과 대화를 선도해 나가는데 자유롭고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북조선과의 대화는 1980년 유럽에서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대화>가 최초이다. 대화의 시작은 미약 했으나 오늘의 그 결과는 창대했음을 본다. 해외 동포들의 북과 대화는 통일대화로 발전 해 왔으며 드디어 1983년의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대화>가 필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열렸을 때는 해외동포 100여명이 참가 했다. 남쪽의 당신들도 잘 기억하는 당시 북조선의 대표단에는 허정숙, 려연구, 양형섭, 전금철, 안경호 등 50여명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 했다. 미주에서만 선우학원, 홍동근, 김운하 등 50여명의 교포가 참석 했다. 1980년대 북조선과 접촉하고 대화를 시도한 것은 남한이 아니라 해외동포들이었으며 북조선과의 대화는 통일대화로 발전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북조선과의 통일대화는 국내의 민족 민주운동권의 투쟁 방향과 노선을 통일운동으로 강화 발전 촉진시키는데 기여했다. 그 여파는 국내 통일운동에 불을 붙였고 영향력을 파급시켰다. 남쪽은 그 분위기와 영향하에 여세를 몰아 1988년 각계 인사 1,014명이 모여 서명하고 합의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인대회>갖게 된다. 당시 남한의 통일운동의 수준은 산발적이며 자연발생적이며 개별적으로 해 왔다.
남한의 조국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고 연대조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은 90년부터이다. 우리가 알던 모르던 간에 북조선과 남한 해외의 애국동포들은 통일투쟁 속에 있었고 국내통일운동권은 남과 북 해외 대표들이 참가하는<범민족대회>를 개최 하기로 하고 남과 북, 해외 동포들이 다 함께 참여해서 <조국통일방안>과 <통일실천과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1989년에는 서울에서 범민족대회 개최하기로 하고 남, 북, 해외 예비실무회담을 판문점에서 갖기도 했다. 3자 접촉은 당국의 원천봉쇄로 무산되고 남측 대표들 전원은 연행연행 당하는 탄압을 받기도 했다. 모든 현상이 자태를 드러낼 때는 연막이 걷힐 때이다. 3자연대를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이며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다. 1989년 3월을 기억하라! 문익환목사가 평양을 방문한다. 그는 김일성 주석을 접견했다. 그 해 6월에는 전대협 임수경 대표가 청년학생들의 대표로 방북 해 <범청학련>을 결성하게 된다. 미주에서도 청년대학생들이 판문점 접촉에 참석했다.
1990년 4월 베를린에서 남과 북, 해외동포 3자 대표들이 참가해 통일운동의 3자연대의 조직적 틀을 갖추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이다. 범민련은 첫 행사로 여름에 서울에서 <제1회 조국통일범민족대회>를 갖기로 했지만 <※ 남측본부는 91년 35개 사회단체와 정당이 함께한 가운데 준비위를 발족하고 준비위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정부의 집중 탄압으로 (재경 실행위원 전원 탈퇴 협박, 실행위원장 연행 등)남측본부 본 조직 결성이 지체되다가 95년 2월 25일 남측본부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의 이종린 수석의장의 헌신적인 활동과 노력은 남한 통일운동사에 크게 기록되어 질 것이다.> 노태우 정권이 북측대표단의 <서울 행사참가 불허>로 남과 해외대표단만 참석하게 된다.
대신 황석영씨가 남측대표로 판문점 북측지역에서 참가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을 정식으로 선포할 수 있었다.< 범민족연합결성에 참여했던 황석영이 지금은 범민련과 통일애국인사들을 탄압하는 이명박정부에 붙어 있다니…우리는 이“아니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는가..>
* 1990년 9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유럽지역본부 결성되고
* 1990년10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일본지역본부가 결성된다.
* 1990년 12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미주지역본부가 결성되었다.
* 1991년 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결성 함으로써. (초대의장 윤기복) <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은 명실공히 남과 북, 해외동포들이 참가하는 통일운동의 3자연대체로써 정식으로 출범한 것이다. <조국통일범민련> 조직은 지금도 의연히 자기의 조직을 갖고 있으며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굿굿하게 서 있음을 본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통일조국을 위해 헌시적으로 싸워온 조직과 역량은 지금도 펄펄 살아 있는 것이다.
지금 남한사회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매국세력>과 <애국역량>간의 싸움의 전쟁터이다. 투쟁은 힘의 역량간의 대결이다. 투쟁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이명박의 공안공세는 개별적이며 방어적 수세로써는 막을 수 없다. 무기력은 우리에게 패배만 더 안기게 된다. 이 공안정국을 분쇄하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애국역량의 대동단결에 있다.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모든세력이 대동단결 하는데 달려있다. 분열은 자멸이고 대동단결은 승리 한다. 민족민주 애국세력이여 단결하자! 통일을 열망하는 모든 세력은 조국통일 범민련의 깃발아래 단결하라! 그리고 투쟁하자! <끝)
2009년 5월 12일
민족통신 논설위원
국정원 요원들과 공안경찰은 지난 5월7일 새벽 6시 30분에 범민련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 소재 범민련 중앙사무실의 경우 수십명의 경찰들이 건물 밖에서 경호를 서고 30-40여명의 국정원 수사과 직원과 보안수사대가 사무실 압수수색을 펼치고 이재규 의장 등 6명을 연행 해 갔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도와 전두환 살인정권도 이러지는 않았다. 오늘 이명박 정권의 범민련 탄압은 또 한번 민족 민주 통일세력을 말살하려는 발악적인 탄압공세이다.
왜 이명박 정권은 탄압의 과녁을 통일 애국세력과 조직에 집중시키고 있는가? 작년에는 실천연대 인사들을 체포투옥 했으며 특히, 5월 1일 노동절과 5월 2일 촛불 1주년 행사에 대한 광란적인 공안탄압이 자행되는 가운데 터져 나온 이번 사건은 지난해 사노련과 실천연대 사건과 마찬가지로 촛불에 <색깔론>까지 덧씌운 기획된 조작사건이다.
지금까지 범민련 남측본부는 북측과의 팩스교환을 통한 회의 자료를 모두 공개해왔으며, 심지어 남북관계가 교착되었을 때 정부의 요청으로 대북 창구 역할까지 해온 바 있다. 그리고 기관지 <민족의 진로>역시 수년간 아무 문제없이 발행해왔다. 그런데 국정원을 비롯한 공안당국이 6.15공동선언 이후 무려 9년간 문제삼지 않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촛불이 타오르자 이와 같은 활동을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과 <이적표현물> 제작반포로 몰아가는 것은 진보진영에 대한 공안탄압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지금의 국정원장의 임기는 길어야 1~2년이다. 영원한 이명박의 서울 부시장으로 남기위한 과잉충성이 아닌가.? 아니면 개성공단 현대아산 직원으로 위장 침투해 북측의 여성근로자를 성추행하고 북을 염탐한 국정원 요원(유모씨)가 장기 억류되고 있는데 대한 분노인가? 그래서 뿔이 난 것인가… ?
이명박 집권 1년 동안 구속 투옥 체포된 국민들이 무려 2,800여명이나 된다. 오늘의 이명박 정권의 범민련 탄압은 또 한번 민족 민주 통일세력을 말살하려는 발악적 탄압공세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1% 부자정책에 저항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이행을 거부하고 남북교류와 협력에 찬물을 끼얹고 오늘의 남북관계를 극도로 대결국면으로 만든 자기의 실정과 폭정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민족민주 애국세력들이여 이명박을 타도하라! 국정원을 해체하라! 국가보안법의 철폐하라! 는 투쟁구호를 들고 모두가 떨처나서라….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통일대화의 역사와 .범민련 조직의 태동에 대해서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누구와 대화를 해야 하는가? 우리민족의 통일은 남과 북이 합치는 것이지만 통일의 대화상대는 북조선이고 통일운동의 주체는 남과 북, 해외의 우리민족 구성원이다. 우리민족끼리의 통일이 북조선과 대화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으며 우리민족끼리의 통일을 달성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본격적인 북조선과 직접 대화는 해외 동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해외는 그만큼 북과 대화를 선도해 나가는데 자유롭고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북조선과의 대화는 1980년 유럽에서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대화>가 최초이다. 대화의 시작은 미약 했으나 오늘의 그 결과는 창대했음을 본다. 해외 동포들의 북과 대화는 통일대화로 발전 해 왔으며 드디어 1983년의 <북과 해외기독자간의 대화>가 필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열렸을 때는 해외동포 100여명이 참가 했다. 남쪽의 당신들도 잘 기억하는 당시 북조선의 대표단에는 허정숙, 려연구, 양형섭, 전금철, 안경호 등 50여명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 했다. 미주에서만 선우학원, 홍동근, 김운하 등 50여명의 교포가 참석 했다. 1980년대 북조선과 접촉하고 대화를 시도한 것은 남한이 아니라 해외동포들이었으며 북조선과의 대화는 통일대화로 발전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북조선과의 통일대화는 국내의 민족 민주운동권의 투쟁 방향과 노선을 통일운동으로 강화 발전 촉진시키는데 기여했다. 그 여파는 국내 통일운동에 불을 붙였고 영향력을 파급시켰다. 남쪽은 그 분위기와 영향하에 여세를 몰아 1988년 각계 인사 1,014명이 모여 서명하고 합의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인대회>갖게 된다. 당시 남한의 통일운동의 수준은 산발적이며 자연발생적이며 개별적으로 해 왔다.
남한의 조국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고 연대조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은 90년부터이다. 우리가 알던 모르던 간에 북조선과 남한 해외의 애국동포들은 통일투쟁 속에 있었고 국내통일운동권은 남과 북 해외 대표들이 참가하는<범민족대회>를 개최 하기로 하고 남과 북, 해외 동포들이 다 함께 참여해서 <조국통일방안>과 <통일실천과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1989년에는 서울에서 범민족대회 개최하기로 하고 남, 북, 해외 예비실무회담을 판문점에서 갖기도 했다. 3자 접촉은 당국의 원천봉쇄로 무산되고 남측 대표들 전원은 연행연행 당하는 탄압을 받기도 했다. 모든 현상이 자태를 드러낼 때는 연막이 걷힐 때이다. 3자연대를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이며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다. 1989년 3월을 기억하라! 문익환목사가 평양을 방문한다. 그는 김일성 주석을 접견했다. 그 해 6월에는 전대협 임수경 대표가 청년학생들의 대표로 방북 해 <범청학련>을 결성하게 된다. 미주에서도 청년대학생들이 판문점 접촉에 참석했다.
1990년 4월 베를린에서 남과 북, 해외동포 3자 대표들이 참가해 통일운동의 3자연대의 조직적 틀을 갖추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이다. 범민련은 첫 행사로 여름에 서울에서 <제1회 조국통일범민족대회>를 갖기로 했지만 <※ 남측본부는 91년 35개 사회단체와 정당이 함께한 가운데 준비위를 발족하고 준비위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정부의 집중 탄압으로 (재경 실행위원 전원 탈퇴 협박, 실행위원장 연행 등)남측본부 본 조직 결성이 지체되다가 95년 2월 25일 남측본부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의 이종린 수석의장의 헌신적인 활동과 노력은 남한 통일운동사에 크게 기록되어 질 것이다.> 노태우 정권이 북측대표단의 <서울 행사참가 불허>로 남과 해외대표단만 참석하게 된다.
대신 황석영씨가 남측대표로 판문점 북측지역에서 참가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을 정식으로 선포할 수 있었다.< 범민족연합결성에 참여했던 황석영이 지금은 범민련과 통일애국인사들을 탄압하는 이명박정부에 붙어 있다니…우리는 이“아니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는가..>
* 1990년 9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유럽지역본부 결성되고
* 1990년10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일본지역본부가 결성된다.
* 1990년 12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미주지역본부가 결성되었다.
* 1991년 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결성 함으로써. (초대의장 윤기복) <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은 명실공히 남과 북, 해외동포들이 참가하는 통일운동의 3자연대체로써 정식으로 출범한 것이다. <조국통일범민련> 조직은 지금도 의연히 자기의 조직을 갖고 있으며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굿굿하게 서 있음을 본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통일조국을 위해 헌시적으로 싸워온 조직과 역량은 지금도 펄펄 살아 있는 것이다.
지금 남한사회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매국세력>과 <애국역량>간의 싸움의 전쟁터이다. 투쟁은 힘의 역량간의 대결이다. 투쟁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이명박의 공안공세는 개별적이며 방어적 수세로써는 막을 수 없다. 무기력은 우리에게 패배만 더 안기게 된다. 이 공안정국을 분쇄하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애국역량의 대동단결에 있다.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모든세력이 대동단결 하는데 달려있다. 분열은 자멸이고 대동단결은 승리 한다. 민족민주 애국세력이여 단결하자! 통일을 열망하는 모든 세력은 조국통일 범민련의 깃발아래 단결하라! 그리고 투쟁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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