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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논문]문명이 전환으로 본 Corea 되찾기 운동의 의의[200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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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3-08-02 00:00 조회12,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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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국호 "Corea"쓰기 운동이 미주에서 최초로 시작됐다. 1일 오후6시30분 로스엔젤레스 소재 로욜라 법대 강당에서 미주의 통일맞이나성포럼과 한국의 통일연대 학술위원회가 공동주관한 "Corea 를 되찾자 학술세미나"에서 한국의 학자, 김상일 교수와 서굉일 교수, 그리고 미주에서 오인동 박사 가 각각 자신들의 논문을 발표해 참석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김상일 교수의 발표논문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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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전환으로 본 Corea 되찾기 운동의 의의

김상일 (한신대학교 철학과)



1. 문명 전환에 편승한 일제의 음모

3대 문명의 전환

kimsangil.jpg 서양 문명사는 바다를 중심 하여 3번 크게 전환을 하였다. 그 첫 번째 전환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전환이다. 인간이 배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주로 육로를 이용하였다. 산과 강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육로의 경우는 속도가 느려 수천 년의 시간이 걸려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때문에 문명의 전환을 말하기란 육로의 경우 매우 어렵다. 그러나 배를 사용하면서 해로를 통한 이동은 급속하게 문명과 문명간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문명의 전환을 가능케 했다.

그 첫 번째 전환을 지중해라고 하는 이유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역의 슈메르 문명이 지중해를 통과 그리스와 팔레스타인에 도달하면서 헬리니즘과 헤브라임즘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두 문명은 중세기를 통해 구라파를 지배했던 양대 물줄기와 같았다. 우리의 국호가 이런 지중해 문명권에 알려진 것은 고려 시대 때이다. 그 당시는 라틴어가 통용어였으며 라틴어로 국호가 표기 될 수밖에 없어 자연히 "Corea"로 된 것이다. 지중해 문명권에 우리 나라에 대한 기록이 구라파에 알려져 기록은 13세기 중엽 류브류크 여행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로 1253년 몽골에 파견되었다가 1255년 귀국하여 여행기를 기록했는데 거기서 최초 "Corea"가 등장한다. 그 이후 19세기 말 까지 거의 700여 년 동안 기록이나 지도 등에 예외 없이 이 국호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바다를 통한 문명 전환은 19세기말에 대 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지중해 문명권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기 시작하면서 부터 이다. 이때에 구라파는 산업혁명 이후 민족 국가의 등장과 함께 아프리카-아시아 지역을 무력으로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에 편승한 일본은 1860년 대 서구화에 발 빠르게 동조하여 탈아론을 주창하며 같은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한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1866년 신미양요 승리에 도취하여 개항을 거부한다. "개항 開港" 이라는 말 그대로 이 때는 대형 상선과 군함을 동원한 바다를 통한 문명 이동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명의 대 전환과 함께 국호 "Corea"는 영미 대서양 문명권에 의해 위협받게 된다. 다시 말해 이 때부터 Corea가 Korea로 혼성되어 사용되면서 후자가 선호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20세기로 넘어 와 일본 강점이 본격화되면서 Corea는 사라지고 만다. 여기에 미국인 선교사들까지 가세하여 Corea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버젓이 Korea가 들어앉는다. 다시 말해 Corea에서 Korea에로의 전환은 지중해 문명의 구라파 문명이 미국 중심의 대서양 문명권으로 전화되면서 이 때에 일본이 편승하여 국호를 바꿔치기 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이 국호를 의도적으로 바꾸었느냐 아니냐는 사실상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문명 전환과 함께 미일이 합세한 음모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질곡의 대서양 문명권은 미국과 일본에 의해 우리에게 이루 말 할 수 없는 자존심의 파괴와 반만년 유구한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적인 수난과 모멸감을 안겨다 주었다. 무엇보다 대서양 문명은 민족 분단이라는 최대의 비극을 선물하였다. 그 모든 형용사가 바로 Korea라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문명권이 바뀌고 있다. 더 이상 우리는 일본과 미국의 질곡에 시달릴 수 도,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국호 Corea를 되찾는 것은 단순한 반작용적인 효과만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Corea는 우리의 원래 국호였기 때문에 그 동안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에 불과하다. 새로 열리는 태평양 시대에 걸맞는 당연한 우리의 할 의무라 할 수 있다. 오욕과 분단의 이름인 Korea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진작 시키기 위해서도 Corea 되찾기 운동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 일제는 이렇게 국호를 바꾸었다.

Korea는 가고 Corea는 오라!
일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4단계에 걸쳐 말했다. 그 1 단계는 1910년 합방 직후 우리민족 사서들을 모아 불태워 버리고 1915년에는 "조선반도사편찬"을 만들어 이병도 등을 동원하여 역사를 말살 내지 왜곡하기 시작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는 문화 말살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2 단계는 천도교 등 민족 종교를 말살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3 단계는 우리말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일어 사용을 강요한다. 4 단계는 각 개인의 성명까지 바꾸는 소위 창씨개명을 단행하면서 식민통치를 완성시킨다.

이 사실을 알진데 우리 역사학자들은 해방이 되자 말자 누가 어떻게 우리 역사와 문화를 파괴했는가를 고찰하고 거기서부터 연구하는 방법론을 세워 나갔어야 하는 데 그렇기는커녕 이병도 등 식민사학자들은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가 되면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는 교육을 그대로 해왔다. 그 결과로 국민학교 명칭도 1995년에야 겨우 바꾸게 되었고, 드디어 국호 Corea 되찾기도 지금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늦어도 많이 늦었다. 지금이라도 너나 앞장서 대 문명의 전환과 함께 미일 대서양 문명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국호를 다시 찾아야 한다.

일제가 강요한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뀐 지 10여 년이 되었다. 1941년 2월 8일 일본 천황의 칙령으로 "황국신민 皇國臣民"이 되라고 "국민학교"로 명칭이 바꾼 줄도 모르고 해방후 50여 년 동안 그대로 사용해 왔다. 그 동안 일본이 우리를 어떻게 보았을까? 심지어는 일본 마저 1945년 이후 "소학교"로 바꾼 마당에 말이다. 중국과 북한도 함께 모두 "소학교"와 "인민학교"로 바꾸었는데 우리만이 그 동안 그대로 사용해 왔다. 그것도 친일파들의 철저한 보호 속에서. 1908년 제 4차 런던 올림픽대회 때에 나라별 입장 순서에서 당시만 하더라도 C를 첫 자로 하는 국가가 없던 상황에서 일본은 Corea가 눈에 가시 같이 여겨 영미계 학자들이나 선교사들을 동원하여 Korea로 바꾸기에 광분한다. 우리는 이 사실도 모르고 지금까지 지내 왔다.

그러면 명칭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공자는 논어에서 만사는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명예"에 살고 죽는다. 이름에 인간다운 운명을 건다는 뜻이다. 지금 미국을 보라 이라크를 점령하자 말자 공항과 거리 등 이름부터 바꾸기 시작하지 않는가? 일제는 강점을 하자 말자 국호를 비롯해 지명과 나중에는 성씨등 명칭부터 바꾸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그들 식민지 통치의 최대의 관제로 삼은 예를 기억하고 있다. 일제하면 창씨개명을 바로 연관시킬 정도이다. 그래서 이름과 명칭을 한갓 글자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무시하여서는 안 되며 더욱이 다음에 말하려고 하는 국호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먼저 우리나라 영문 국호는 1255년부터 1905년까지 거의 700년 동안 Korea가 아니고 Corea로 사용되었음을 지적해 둔다. "고려"에서 유래된 국호는 1255년 프랑스 선교사 류브류크가 몽골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하여 그의 여행기에서 중국 동쪽에 "까울레 Caule"라는 나라가 있다고 기록한 데서 외국어 국호가 알려졌다. 이러한 국호를 일제는 1870년대부터 친일적인 외국인들을 선동하여 Corea를 Korea로 바꾸기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Corea와 Korea가 공문서 속에 혼용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가 소위 C와 K 혼용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유럽 권에서 영미 권으로 대외 관계가 바뀌면서 생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국호 변경은 일제의 계획된 책략에 의한 것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700년간 우리나라 국호는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영어, 화란어 등 어종에 상관없이 모두가 Corea로 표기되었다. 물론 Cores, Coray, Corie, Corey, Coeree로 표기상에 차이는 있었지만 첫 자가 C로 시작하는 데는 그 어디에도 차이가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Korea라고 한 곳은 없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하멜 표루기》에도 Coeree로 표기돼 있다. 심지어는 영어자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 지리학자 리챠드 해클류트도 그의 항해서 「Principle Navigation」에서 우리 국호를 Coray라고 했다. 그는 이 책에서 포르투갈인 들이 Coria라고적고 있다고 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어권으로 넘어 오면서 Corea가 Korea로 자연스럽게 변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앞으로 Corea 국호 변경 반대에 가장 앞장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말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뀌었는 데도 외국어 표기는 그대로 "Corea"이었음은 이미 이 명칭이 대외적으로 고정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1897년 문서에는 "조선: Corea"라고 표기할 정도이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 참가 시에도 Corea란 명칭을 사용했었다.

1905년 일제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말자 대외관계문서는 물론 대내외공개 문서인 <관보>에 이르기까지 "Korea"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명칭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가는 을사조약 그 다음 날부터 "대한제국"이란 명칭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는 "한"자가 들어가는 모든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예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1909년 10월 이또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피살당하자 Corea를 완전히 말살하고 만다. 드디어 1910년 한일합방 조약이후부터는 우리나라 국호를 완전히 무시하여 초대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는 국호문제에 관하여 이완용 등에게 "병합하는 마당에 국호는 무슨 국호인가"라고 폭언까지 했다. 드디어 8월 29일 합방이 선언되기 전 8월 21일에 칙령 318을 통해 세계 열강들에게 국호를 Korea로 표기하도록 알린다. 이렇게 철저하게 바꾸어 버린 우리의 국호를 그렇게 된 사실 마저 모르고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들이 모멸스럽지 않는가? 실로 "국호표기날조"는 "민족어 말살 참극" "창씨개명책동"과 함께 언어학 부분에서 감행한 역사적인 3대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선교사들도 국호 변경에 일제를 도왔다.
우리는 여기서 일제의 국호 변경이 의도적이었음을 친일적인 서양 저술가들과 선교사들에 대한 집중 공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864년부터 일본에서 근무하였고 1880년에는 요꼬하마 영사, 그리고 1884년부터는 조선의 영국 총영사를 지낸 바 있는 윌리엄 아스톤의 행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일제의 조선 침략에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던 인물이다. 1878년부터 그가 기고한 글에서는 모두 "Korea"를 사용하고 있다. 4건의 그의 저작 속에서 우리는 Corea를 발견할 수 없다. 그가 1884년 일본에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서도 그가 일본의 책동에 동조하여 Korea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19세기 말 일제는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가 약화되는 것을 틈타기 시작한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프랑스어를 배제하려는 운동의 낌새를 알고는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을 아는 영국과 미국인들에게 Korea를 사용하도록 음모를 꾸몄음은 자명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스톤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과 영국이 동맹하여 이라크를 침공한 데 대하여 독일과 프랑스가 이를 반대한 것과 국제 정세는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며, 그런 의미에서 Corea 찾기 운동은 절체 절명의 과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1870년에 아스톤의 글을 비롯하여 영미 계통의 맥을 닿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Korea를 선호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1889), 힐버트(1892), 게일(1897), 아펜셀라(1895-1897)등 미국계 선교사들은 모두 혼용 혹은 Korea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Korea를 선호하는 것은 90% 이상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쯤 되면 국호 변경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과 영미가 합작하는 정치적 음모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실로 이렇게 진행된 Corea 파괴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1950년 한국 전쟁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Korea는 분단국가, 빈곤국가, 비도덕적인 국가 등으로 알려지게 되어 지금은 불명예와 상처 투성인 것이 사실이다.

우표 변경으로 본 국호

우리 나라 우표는 1884년 11월 18일에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개화파 홍영식을 중심으로 한 신진 개혁 세력들의 노력으로 1884년 4월 22일 국왕의 칙령으로 우정총국이 설치되고 그해 11월 18일에 역사적인 우정 총국 업무가 개시되면서 우리 나라 최초 문위 우표가 탄생되었다. 그런데 그 때에 발행될 예정인 우표는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의 다섯 종류였다. 그러나 5문과 10문만 발행되고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 나머지 세 종류는 발행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25문, 50문, 100문의 세 종류는 우정총국 개국 기념 피로연을 계기로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이 폐쇄될 때까지 도착되지 않아 미발행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다섯 종류의 한국 최초의 우표에는 모두 국호가 Corean(5문과 10문) 그리고 Corean Post(25문, 50문, 100문)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위 우표"란 그 당시 화폐 단위가 "문 文"이였기 때문이다. 이 최초의 문위 우표 2종은 발행된 지 21일 만에 판매가 중단되었다. 중단되기까지 사용된 우표는 17개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된 봉투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난 1895년 7월 22일에 우정 사업이 재개되었으며 태극 우표 4종이 발행되었다. 그런데 다시 발행된 우표에는 국호가 모두 Korea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1884년에 장로교와 감리교 같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들어오고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간섭과 침략은 노골화되어 국력은 그 운을 다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우리는 이 간단한 우표의 역사를 통해 구한말 우리 비운의 역사의 한 단면을 엿 볼 수 있다. 1895년 재 발행된 우표에 국호가 Korea가 된 이후 한번도 그것이 바뀌어 진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1884년에서 1894년 사이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우리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여기서 재론한 필요가 없다. 1904년 데쯔라-카프트 조약이 이루어지기까지 미일의 조선 침략 음모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던 때이다. 그 사이에 처음 국호였던 Corea는 가고 Korea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국호 문제와 함께 이 10년간의 역사를 다시 재조명함으로써만이 국호 변경의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일본이 의도적으로 국호를 변경한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무의미할 수 도 있다. 왜냐하면 크게 보아 문명 전환이라는 큰 틀에서 국호 변경을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큰 틀의 전환에서 한국은 과거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대서양 문명권에 휘말리게 되었고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해 발빠르게 이 신 문명권에 편승한다. 그리고 이 땅에는 유교 대신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오면서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 종교는 물론 정치적인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미일의 압권적인 영향하에 국호도 바뀌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한 단면의 역사가 우표에 나타난 국호 변경에서 선명하게 확인된다.

3. 국호 변경의 과정으로 본 "Corea"

먼저 아래 도표를 통해 Corea의 유래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선택해야 될 국호가 무엇일지에 관하여 한번 생각해 보자. Corea가 중세의 "고려"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고려"는 "고구려"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아는 사실이다. 고려 왕건이 "고구려"의 영광과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고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는 어디서 유래 하였느냐이다. 이 사실을 알려면 고구려의 건국정신을 알면 되는데 그것은 "다물 多勿"이다. "되물린다"는 뜻이다. 다름이 아닌 고구려 이전 고조선 그리고 그 이전의 영토와 영광을 되물린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고조선 이전의 역사와 영토가 고구려의 건국 시조 동명의 가슴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구리 九黎 Curee"라는 실체가 있어 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구"란 단순한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만방을 의미하는 온 천하라는 뜻이다. "리"는 "여"라고 읽으며 이른 새벽의 의미한다. 역사가 동트는 새벽을 의미한다.

바로 고구려 정신이 신라에 의해 말살 당하고 말았다. 신라 다음의 고려는 다시 고구려의 영광과 영토를 되물리겠다는 기상으로 고려국을 세운다. 다시 이러한 고려는 조선에 의해 잠식당한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적어도 고구려 이후부터 우리 역사 속에서 "구리→고조선→고구려→신라→고려→조선"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왕조 건너 한 번 씩 "고려"가 번갈아 국호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매우 흥미 있는 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5000년 이상의 역사를 두고 줄기차게 우리 역사를 이어오는 맥락이 바로 구리-고구려-고려 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건너 띄기 현상으로 보면 다음 우리의 국호는 분명해 진다. 고구려-고려의 정신의 계송하고 그에 걸 맞는 국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북의 "조선" 그리고 남의 "대한민국"을 져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북측이 선호하는 "고려연방공화국"을 살리면서 "대한"도 살려내어 "한연방고려공화국"이라고 함도 어떨지 제안해 보게 된다. 그리고 대외적인 외래어 국호는 Corea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단순히 일제의 유산이라는 차원을 떠나서 문명의 대전환의 차원에서 그리고 옛 우리역사의 영광과 영토를 되물리는 차원에서 통일 조국의 국화 문제와 함께 Corea 되찾기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결론: Korea로 분단된 조국 Corea로 통일하자!

국호 Corea 되찾기 운동은 한 갓 국호 명칭 회복 차원의 문제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Korea는 일제의 식미지화와 미국에 의한 분단의 상징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독재 정권에 의해 "Korea Gate" 등 온갖 흉물스런 오명의 상징이 Korea이다. 작년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국호가 붉은 악마에 의해 Corea임을 다시 확인했다. 붉은 악마는 바로 "구리"의 첫 시조인 "치우 蚩尤"의 화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던가? 작년 후반기에 북측에서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공동 연구할 것을 제의해 왔고, 2003년 3월 1일에는 북측 학자들 10명이 소위 CK 문제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여 우리에게 그 원고를 넘겨주었다. 북측의 연구는 지금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남측에서도 이미 말 한 대로 붉은 악마들이 앞장서 Corea 되찾기 운동에 전자신문 등을 통해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학생 단체로는 한총련, 그리고 한국 청년 단체 협의회가 연구와 운동 차원을 겸한 활동을 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금년에 총학생회 회장 출마 후보가 학교 이름을 Corea로 바꾸기를 선거 공약으로 제시할 정도이다.

남측 학술 단체로는 통일연대 학술위원회(공동회장 조영건, 김상일, 강정구)가 교수들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중, 2004년 4월 25일(금) 오후 2시부터 국가 인권 회관(무교동 소재)에서 서굉일(한신대 국사학과교수)교수의 발표회를 가졌다. 앞으로 6.15 그리고 8.15 행사들에서 국호 되찾기 문제로 남북이 힘을 모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호 되찾기 문제는 일제의 문화재 강탈과 강제 징용과 함께 민족의 공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인 만큼 그냥 두고 넘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지가 아닌가 한다.

앞으로 국민여론 확산, 공청회, 여론조사, 국회 통과 등 어려운 일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각계 각층의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청된다. 한편 초등학교 명칭 변경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친일 친미 수구, 그리고 반통일 세력들이 만만치 않게 저항할 것이 예상된다. 그러나 문명사적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민족 통일이라는 민족 지상의 과제와 맛 물려있는 국호 되찾기는 시간 문제일 것으로 낙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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