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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논문]영문국호 Corea-Korea 문제의 현단계 연구 내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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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3-08-02 00:00 조회39,038회 댓글0건

본문

영문 국호 "Corea"쓰기 운동이 미주에서 최초로 시작됐다. 1일 오후6시30분 로스엔젤레스 소재 로욜라 법대 강당에서 미주의 통일맞이나성포럼과 한국의 통일연대 학술위원회가 공동주관한 "Corea 를 되찾자 학술세미나"에서 한국의 학자, 김상일 교수와 서굉일 교수, 그리고 미주에서 오인동 박사 가 각각 자신들의 논문을 발표해 참석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서굉일 교수의 발표논문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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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굉일 (학술연구위원,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시작하는 말

suhkwingil-1.jpg지난 몇 년 간, 일제에 의해 왜곡되어 온 우리 고유 언어들에 대한 되찾기 움직임과 함께 민족의 주체성과 자존심 회복이라는 대 명제(命題)하에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찾아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월드컵을 치르면서 국호 영문명칭을 되돌리자는 즉, 일제의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당초 Corea였던 영문국호를 일본의 영문표기 Japan보다 그 알파벳 순서를 뒤로 미루고자 Korea로 우리 나라의 영문명칭을 바꾼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자는 움직임이 사회 각 부분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최근 북쪽의 이와 관련하여 학자들이 이와 유사한 주제를 가지고 영문명칭변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럼 현재 화두(話頭)가 되고 있는 한국의 영문명칭의 유래와 함께 어떻게 해서 그 명칭이 변경되어 왔는지, 제한된 자료들을 가지고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영문국호의 변경이 과연 민족사적 관점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또한 북쪽과의 민족 동질성 측면에서 북쪽 학자들의 최근의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를 여러 참석자들과 함께 토론해 보고자합니다.
첫째,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남쪽에서 신문 방송 인터넷을 통하여 제기된 상황을 살펴 본다.
둘째 북쪽학자들이 연구한 10편의 논문을, 5가지 주제로 고찰한다.
일제의 영문 국호표기 날조 : 〈Corea〉와〈Korea〉
1. 우리의 국호표기사용과 일제의 책동에 대한 역사적 경위
1)〈C〉만으로 표기된 단계
2)〈C〉와〈K〉의 혼용 단계
3)〈K〉의 표기가 전용된 단계
2. 조약문 체결을 통해본 영문표기
3. 지도와 백과사전을 통해본 국호표기의 변형
4. 영어 표기名을 날조하기 시작한 일본의 책동
5. 국호표기 날조행위는 국가적 범죄행위

셋째 식민잔재의 청산운동
1. 일제의 한민족문화말살정책
2.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명칭 개칭된 사례
넷째 연구의 방향과 과제 및 의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한다.
본고는 그간 남쪽에서 진행된 이와 관련된 연구자들의 논문을 모두 검토하고 작성된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연구는 남쪽에서도 영문표기 국호변경의 문제로 제기되어 그 연구가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한 결과물도 있다. 오늘의 문제와 함께 다음기회에 계속 논의되기를 희망한다.


Ⅰ. 최근 남쪽에서 제기된 내용

C.K문제는 북쪽에서 제기하여 남쪽으로 온 것이 아니라, 남쪽에서도 학자들간에 또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이 문제가 신문 방송을 통해 북쪽까지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2002년 6월 월드컵 행사를 통해 북쪽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후 북쪽에서는 학자들이 이 문제로 본격적인 토론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진전되어 2002년 12월 학술토론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在日本 조선통신 인터넷 뉴스 또는 「조선신보」를 통해 전파되었다.
금년 3ㆍ1절 민족대회에서는 조선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 문영호 소장의 발제로 남쪽에 전달되었다.
그후 통일연대 학술연구 특별위원회에서는 2003년 4월 17일 "(가칭) Corea 되찾기 모임"이란 이름의 첫 회의를 개최하였다.

1. 왜 英文名이 Korea가 아니고 Corea이어야 하는가?

(국회관련회의 자료, 1996, 7.)
1895년 7월 15일자 뉴욕헤럴드지 : "조선(Corea)의 여왕"이란 설명과 함께 고종, 명성 황후 초상화가 소개된 바 있다.
1895년, 호주학술진흥학회가 발간한 COREA라는 소책자에는 조선의 풍습 등이 소개되었다.
1) 위의 예에서 보듯 1800년대 말 무렵에도 英文名은 COREA였다.
2) Corea가 Korea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하여,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시기에 그때까지 Corea였던 대한제국의 이름을 Korea로 바꿔서 alptabet 글자 순서로 보아 J로 시작되는 자기에 국명보다 앞에 대한제국이 오는 일이 없게 했다는 설명이 信憑性있게 제기되고 있다. (자료확인 중). 그러므로 원래의 영문표기 국호를 되찾아야 한다.
3) 이태리, 프랑스 등 라틴계 나라에서는 한국을 Corea, 그리고 Coree라고 C자를 갖고 시작한다. 그것은 지금도 사실이고 그 당시 해양의 강대국인 멕시코는 물론, 지금의 미국남부에서 서부까지 독식했던 스페인도 우리를 Corea라고 불렀는데, 무역어로 아직 영향력이 큰 것이 스페인 말이 Corea이고 보니 무척 많은 나라에 Corea라고 알려져 있었을 것도 사실이다.
4) 국제관계에서, 그리고 아시아권에서 많은 것에 관여한 영국은 영국대사관 건물의 초석의 글귀에 "Corea"를 새긴(1890.7.19) 例에서 보듯 영문표기를 Corea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상의 주장은 1996년 7월 23일, 국회통일외무위원회 회의록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다음은 李信範 委員의 발언이다.

「한 일 공동개최와 직접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마는 우리 나라와 일본이 나란히 國號를 표기하는 일이 잦아지기 때문에 하나의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제안에 대해서는 답변하셔도 좋고 안 하셔도 좋은데 우리 나라 영문국호가 로마문자로서는 다른 나라에서 다 C로 시작되는 국호를 쓰는데 오직 영어나 독일어에서만 K로 시작되는 KOREA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 위원이 조사한 바로는 1910년 日本의 韓國 强占 이전에는 C로 시작되는 코리아와 K로 시작되는 코리아가 혼용되다가 1910년 일본의 한국강점이후에 K로 통일된 경향을 보인 것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영문국호문제를 우리 국력도 신장되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도 바뀌었기 때문에 C로 사용하는 문제를 한 번 연구 검토해 보실 필요가 있지 않은지, 이런 문제를 가지고 북한과도 영문국호문제에 대해서 실무자회담 같은 것을 제안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지 그래서 제안을 드립니다.」
이상과 같은 이신범위원의 제안에 외무부차관 이기주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外務部次官 李祺周

「 KOREA라는 영문호칭 이것은 대단히 좋은 질의라고 저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國際會議에 많이 나갑니다마는 언제든지 日本 뒤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COREA "C"가 되면 일본 앞쪽에 앉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혹시 옛날 명칭을 되찾을 수 없을까 하는 이런 것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K"로 시작되는 KOREA 이것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 정착이 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검토해볼 필요는 있지 않느냐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 앞으로 이것은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위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1996년 7월 23일 국회통일 외무위원회에서도 이문제가 제기되었고 정부측의 답변이 있었다.

2. 인터넷 개인홈페지에 나타난 영문국호유래와 대한민국국호유래

영문국호유래
우리나라의 국호 "大韓民國"을 영문으로는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 것일까? 여러 나라의 대표가 참석하는 국제 회의나 스포츠 행사 등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영문 표기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The Republic of Korea"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한 이를 줄여서 간략히 "Korea" 또는 "ROK"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문으로는 "Daehanminguk"(대한민국), 그도 아니면 더욱 가까이 있던 시대인 "Chosun"이라고 하지 않고 왜 500년 이상 지속된 "조선"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건너 뛰어 굳이 "Korea"라고 하였을까하는 의문이 들 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같이 멀고도 광활한 중앙아시아 대륙으로 강제 이주 당하여 살고 있는 많은 우리 동포도 지금 "조선인(朝鮮人)" 또는 "한국인(韓國人)"이 아닌 "고려인(高麗人)"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후반에 조선의 국기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한 종류의 태극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이름도 역시 "朝鮮國旗(조선국기)"가 아닌 "高麗國旗(고려국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추측컨대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막강한 나라였던 고구려(高句麗)가 사해(四海)에 그 위엄을 떨치게 됨에 따라 그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고려시대에 고려(高麗)의 교역 상대가 멀리 아라비아 半島까지 미치게 되고 또 그곳을 통하여 우리의 존재가 서양에도 알려지게 됨으로써 조선시대가 500여 년간이나 지속된 데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고려"(Korea)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는 앞으로 계속하여 추적해 볼만한 일이라 생각되는 과제로 생각되며, 이와 관련하여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쓴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의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서양 각 국에서 "코리아"와 또 그 비슷하게 부르는 이름들은 어떤 내력의 것입니까? 우리 조선을 영어로는 "코리아(Corea, Korea)"라고 하고, 프랑스어로는 "코레(Coree)"라 하며, 독일어로는 "코레아(Korea)"라 하고, 러시아어로는 "코레야"라고 하는 것은 대개 조선 역사상에 있어 가장 강대한 나라인 "고구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체로 고구려는 동방에서 일어난 여러 나라 가운데 세력이 가장 강하고 문화가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이 가장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인상이 이웃 나라에 깊이 박히고 더욱 중국사람들이 동방의 나라를 통틀어 "거우리"라고 부르게 되니 "거우리"는 고구려와 또 그것을 간단히 부르는 "고려(高麗)" 혹은 "구려(句麗)"의 음을 쓴 것이요, 먼 서방 나라들은 중국사람에게 "거우리" 이름을 들여다가 다시 "코레" 또 "코리"라고 변하여 일컫게 되어서 뒤에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문헌으로는 지금부터 7백년쯤 전에 프랑스 루이 왕의 심부름으로 몽고의 조정에 왔던 「루브룩」이라는 사람이 돌아가서 동방의 사정을 전한 가운데 중국의 동쪽에 "카울레(Caule)"라는 나라가 있더라고 한 것이 가장 오랜 것이며, 그 뒤 20년이 넘어서 元나라에 와서 벼슬을 살다가 돌아가서 자세한 견문록을 저술하여 유명한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폴로」의 책에서는 "카울리(Cauly)"라는 이름으로 기록되니 대개 이 두 말이 오늘날 서양 각 국에서 우리를 부르는 이름의 시초라 할 것입니다. 그네들은 元나라 서울에 많이 가 있던 고려 사람과 물건을 보기도 하고 또 거기서 "거우리"라는 이름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명칭이 오늘날 "K"로 시작하는 영문표기인 "Korea"로 공식화되었지만, 일찍이 16세기 전후부터 서양에서는 영국·미국·네덜란드 및 라틴어권 등 절대 대다수의 국가들이 "C"로 시작되는 "Coea" 혹은 "Corea"로 명기하였다. 초기에는 高麗가 중국식인 "Caoli", 아랍식인 "Cory", 일본식인 "Corai"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기도 하였으나 "Corea", "Coree" 등으로 통일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프랑스어권 등에서는 여전히 "C"를 서두로 쓰고 있다.
실제로 영미권에서도 영국인 로버트 콕스(Robert Cocks)라는 사람이 1617년 그의 일기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Corea"로 쓴 것을 근대 영문 명칭의 효시(嚆矢)로 보고 있다. 특히 주목할 사항은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도 영미권의 출판물들은 거의 "C"로 명기하고 있으며, 1882년부터 미국을 선두로 체결된 서구 열강들의 외교 협약 속에서도 독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국의 어두를 "K"가 아닌 "C"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19세기 후반 이래로 일본은 우리나라를 영문으로 표기할 경우에 일관성있게 "K"로 사용하고 있었다.
국회나 정부관련 도서관에서 찾아보면 우리나라가 영어권 국가인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한 수호통상조약 원문을 볼 수가 있는데, 한미수호통상조약(1882), 한영수호통상조약(1883) 모두 COREA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1890년대 전후부터 미국 국무성과 영국의 왕립지리학회 등이 주도하여 지속적으로 "K"를 사용함에 따라 한동안 대다수의 서양인들이 "K"와 "C"를 혼용하게 되었으며, 이후 역사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명칭도 "동해(東海)의 일본해(日本海) 표기"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Korea"로 공식화되어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원인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채 미완의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1705년, 프랑스 기욤 드릴이 제작한 지도를 보면 조선은 "R. de Coree", 동해는 "동양해 또는 한국해"로 표기되어 있고 1811년 프랑스 들라마르쉬가 제작한 지도에는 동해가 "한국해" 단독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때를 전후하여 "일본해"로 바뀌게 된다.
한편,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국제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 등 국제적인 결사체와 미국 등 여러 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나 김규식(金奎植) 등 공식 대표단을 파견할 때에는 영문 국호를 일관되게 "The Republic of Korea"로 사용하였다.(우리나라의 국제적 명칭인 "The Republic of Korea"가 처음으로 외국에 보낸 공문에서 사용된 것은 1919년 6월 14일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것을 통보한 공문이었다. ) 따라서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영문 국호도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大韓民國: The Republic of Korea)국호 유래(2002.7)
코리아(Corea) 어원은 교황 인노켄티우스(인노센트) 4세(1241-1254)와 프랑스 루이 9세의 친서를 휴대하고 몽골을 다녀간 프랑스인 G. 뤼브뤼키(루르부크)가 교황청에 보고한 내용 중에 중국의 동쪽에" 카울레(Caule)"라는 나라가 있다고 보고하였고 그의 저서 "동방여행기"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것이 Corea의 어원으로 여긴다. 카울레(Caule)는 고려(Koryo)의 중국음인 "까우리"를 표기한 것으로 여기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카울리(Cauly)"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1606년에 임진왜란에 잡혀가 일본 나가사키의 노예 시장에서 피렌체의 상인 카르레티가 한 명의 한국소년을 데려왔는데 그의 이름이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Corea)"이란 기록도 있다. 코리아(Korea)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접어들면서 미국의 보고서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 Corea로 표기하면 Japan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싫어 Korea로 표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Korea의 뒤의 "a"는 영어에서 지명을 표시하는 접미사로 국명을 보면 끝에 "아"자가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국호인 대한민국은 "The Republic of Korea"보다는 "Daehanminguk"으로 표기하던지 아니면 대한민국(The Republic of Great Han)으로 표기하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3. "붉은악마, 일제잔재 청산 의미로 "K"대신 "C"사용

(주간한국 2002. 6.21일자)
전세계를 놀라게 한 붉은 악마의 월드컵 응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Corea’ 라는 플래카드를 자주 접하게 된다. 붉은 악마들이 우리 나라의 공식 영어 명칭인 ‘Korea’ 대신 ‘Corea’를 쓰는 데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차별화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유행일까, 아니면 어떤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붉은 악마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Corea’를 쓰는 이유에 대해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19세기말까지도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가 ‘Corea’로 알려졌는데 일제에 의해 Korea로 바뀌게 됐다는 설에 따른 것이다.
고려 시절 인도와의 교역에서도 우리 나라는 ‘Corea’로 불려졌다. 지금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같은 유럽에서는 아직도 ‘Korea’보다 ‘Coree’라는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된다. 1890년 영국은 영국대사관을 지으면서 초석 글귀에 우리나라 국명을 ‘Corea’로 새겼다.
1895년 7월 15일자 뉴욕 헤럴드에도 ‘조선(Corea)의 여왕’이란 설명과 함께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소개돼 있다. 같은 해 호주 학술진흥학회도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소책자에 "Corea’를 사용했다.
하지만 ‘Corea’의 이니셜인 ‘C’자가 언제 어떤 이유로 ‘K’로 바뀌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김태식 홍익대 교수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자신의 국명인 Japan 보다 대한제국이 앞서 나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영문 표기를 Corea로 바꿨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도 “해방 직후 최남선 선생이 쓴 ‘조선 상식 문답’이란 책에는 ‘Corea’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나오나 C자가 K로 바뀐 이유는 찾아 볼 수 없다”고 전했다.
학계에 따르면 19세기부터 우리나라를 표시하는 국명으로 ‘Corea’와 ‘Korea’가 혼용돼 사용돼 왔다는 것이다. 박 연구원은 “일제 시기에 독립 운동 단체들 중에 대한제국을 Korea로 표기한 단체가 있었다”며 “Korea란 표기를 일제 잔재로 정의 내리긴 힘들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Corea’ 표기 운동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붉은 악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ALLEZ COREE(힘내라 한국)’이란 플래카드를 사용한 바 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주최국 미국의 편파 판정 시비가 불거졌을 때 네티즌 사이에서 ‘Corea’ 표기 운동이 확산됐었다.
이외에도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한자 표기를 미국(美國)이 아닌 미국(米國)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미국(美國)이라는 표현은 중국이 ‘America’를 음차해 ‘메이리지안(美利堅)’으로 표기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미국을 ‘베이고꾸(米國)’로 음차해 사용하고 있다. 이 운동은 올 4월 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 주도로 시작됐다. 이들은 지금도 ‘미국이름 바로잡기 운동본부(www.ricemi.com)’라는 사이트를 통해 공감대를 확산해 가고 있다.

4.〈COREA〉표기와 곤련한 북, 남, 해외 공동토론회 개최를 호소

(在日本 조선통신 인터넷 뉴스(2002.12.27))
양력12월27일발 조선중앙통신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호의 영문표기와 관련한 언어학학회와 력사학학회 련합학술토론회가 26일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토론회에서는 일제에 의해 외곡날조된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를 바로 잡는데 해내외의 모든 동포학자들과 온 겨레가 적극적으로 호응해 나서리라는것을 기대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이 문제를 가지고 북과 남,해외 학자들의 공동토론회를 평양 또는 제3국에서 개최할 것을 호소하였다.
 토론회에서 토론자들은 13세기 중엽부터 써왔고 우리 나라와 서양의 모든 나라가 꼭 같이 표기하여 온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 <COREA>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20세기 초엽에 교활하고 비렬한 방법으로 날조하여 <KOREA>로 바꾸어 치우는 천추에 용납못할 대범죄를 저지른 데 대하여 말하였다. 들은 지금까지 발굴 고증된 자료에만 의하더라도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는 1250년대부터 시작하여 1800년대말까지 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어느 어종에나 관계없이 <COREA>로 공인하여 써왔으며 우리 나라 봉건정부도 국호를 다른 나라들과의 外交文件 들과 條約文들에 <COREA>로 표기하여 왔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 나라가 저들의 식민지이므로 국제무대에서 일본보다 항상 뒤에 있어야 한다는 고약한 심보밑에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 <COREA>의 첫글자 <C>를 <K>로 바꿔치웠다고 그들은 폭로하였다.
 토론회에서는 북과 남,해외의 학자들과 겨레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채택되였다.
 호소문은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를 바로 잡는 것은 일제에게 짓밟히고 억눌려 온 우리 민족의 력사를 되찾고 일제의 식민지잔재를 청산하며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하였다.호소문은 세계의 여러 나라 정부,사회계와 국제기구들이 이 정당한 호소를 적극 지지하고 련대를 표시해 주리라는 기대를 표명하였다.

5. Corea, Korea의 어원 및 Corea가 Korea가 된 연원

(在日本 북한 소식지인 조선신보 인터넷 뉴스 2003년 1월 20일자 기사)
인터뷰기사
안경상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조선말력사연구실 실장-국호의 영문표기 《Korea》가 아니라 《Corea》, 《민족적자존심에 관한 문제다》
평양발 김지영기자 국제무대에서는 나라들의 국호를 명기할 때 영어자모의 순서에 따라 나라별 국호를 배렬하는것이 관례로 되고 있다. 원래 조선국호의 영문표기는 첫 글자가 《C》로서 자모순서가 3번째에 놓이지만 일본국호의 영문표기 《Japan》은 10번째에 놓이게 된다.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조선말력사연구실 안경상실장(40살)은 《일본은 조선강점과 때를 같이하여 침략대상인 조선이 일본보다 국호배렬이 앞순위에 놓일수 없다는데로부터 〈C〉를 〈K〉로 바꾸는 위조행위를 일삼았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이 연구를 깊이하고 있다.
작년 말에는 학술토론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여 앞으로 북,남,해외학자들의 공동토론회를 가진데 대한 제안을 내놓았다.

90년대부터 연구 본격화
-조선에서는 국호의 영문표기문제와 관련한 론의가 언제부터 제기되였는가.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론의되여 왔다. 해외에 나가 다른 나라 학자들과 이야기하면 이 문제가 화제에 오르군 하였다.
그런데 국호표기문제는 단순히 학술문제가 아니라 정치성을 띠는 문제인것만큼 심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우선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사실이 론증되여야 한다. 그래서 1990년대이후 이와 관련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여왔다.
90년대초에 나왔던 론문들을 보면 지난 시기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가 《Corea》였다는 력사적사실을 확인하는데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의 위조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시기 남측에서도 이와 관련한 론의가 부상하고 있으며 우리도 위조된 표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관점을 세우게 되였다. 지금은 그 방향에서 연구를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작년말에 있었던 학술토론회는 국내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가.
지난해 가을 부산에서 열린 제14차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Corea》란 표기의 간판을 든 남측응원단이 눈길을 끌었다.
토론회는 학자들이 모여서 진행하였지만 그것은 사회적인 관심 속에 조직된 토론회였고 이에 대한 인민들의 반향도 대단히 컸다.
국호의 영문표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지금 연구실에 앉아서 가만히 글이나 쓸 형편이 못된다. 여러 부문에서 문의의 전화가 계속 들어온다.
외무성이나 외국문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일군들은 우리 나라 국호의 영어표기가 《Corea》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에 의하여 자기 나라의 국호가 위조되였다면 응당 사람들이 격분해 하는 문제이다. 내가 정부의 의사를 대변할 립장은 아니지만 민심이 천심이라 하지 않는가. 앞으로 우리는 국호의 영문표기를 꼭 바로 잡게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단순히 학자들의 학술연구의 대상으로 머물러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국내에서 국호의 영문표기를 바로 잡자는 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사회적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작년에 조일평양선언이 채택되였다. 일본의 과거청산이 이루어지고 이그러진 력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과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오늘까지도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일삼고 있다. 우리 인민들속에 반일감정이 남아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최근에도 일본에서는 조선학생들에 대한 폭행사건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대일감정은 국호의 표기문제에서도 표출되고 우리 인민들은 오늘의 조선민족이 나라를 빼앗긴 지난날의 약소민족과 다르다는 것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국호표기문제를 훼손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
빠른 시일내에 공동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면 한다.
-토론회에서는 북, 남, 해외학자들의 공동토론회개최를 제안했는데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한 공동행동을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가.
작년 우리 선수단과 응원단이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남측 응원단이 《Corea》란 표기를 쓰면서 선수들을 응원했다고 한다. 남측에서도 학자를 비롯한 지식층 뿐아니라 광범위한 계층에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를 바로 잡자는 기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민족자주의식의 고조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 민족끼리》라는 6.15공동선언의 정신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을 이룩해 나가자고 하는데 민족의 공동보조로 국호의 영문표기를 바로 잡는 일은 바로 그러한 거족적인 운동의 일환으로 될수 있다고 북측 학자들은 보고 있다.
-공동토론회는 언제쯤 개최될 것으로 보는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지금 이 문제를 여론화하는데 유리한 대내외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본다.
북측 학계에서는 이와 관련한 연구를 보다 심화시켜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물론 국호의 영문표기를 바로 잡는 것은 학자들만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외무성을 비롯한 대외관계부문에서 맡아 밀고 나가야 할 사업이다. 학계에서는 여기에 과학적인 근거를 안받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건 북에서만이 아니라 남에서도 동시에 추진되여야 할 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북측이 《D.P.R.Corea》를 표방한다면 남측에서도 《Corea》를 표방해야 하지 않는가. 물론 나라가 통일되고 국호가 하나로 되는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인데 여하튼 국호의 표기를 바로 잡자면 민족의 공동보조가 전제로 되여야 한다.
북,남, 해외의 공동토론회가 그를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사회적인 여론을 크게 환기시켜 나가는 계기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6. 일제의 교활한 국호위조범죄

-조선강점과 때를 같이 하여(조선신보(2003.1.20日字))
18세기 서방에서 출판된 지도에는 《Corea》라고 표기되여 있다.
조선의 학자들은 작년말에 있은 학술토론회에서 국호의 영문표기와 관련한 일본의 위조행위를 구체적인 력사적사실을 가지고 론증하였다.
안경상실장에 의하면 현재 학자들이 발굴한 자료들을 보면 1200년대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나라들에서 《Corea》란 표기가 쓰이기 시작하여 그것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여 나갔음을 알수 있다고 한다. 유럽의 어느 어종에나 관계없이 《C》로 시작되는 표기를 썼고 영어권에서도 그러했다.
그런데 1800년대 후반부터 일본이 《Korea》로 바꾸기 위하여 교활하게 책동한것이다. 안경상실장은 처음에는 은페된 방법으로 즉 외국인들을 내세워 학술적근거를 그럴듯하게 꾸며내면서 《Korea》란 표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을사조약》이 맺어 진 1905년이후는 그것이 점차 로골화되다가 1910년부터는 《Corea》를 완전히 《Korea》로 바꿔 치웠다고 설명한다.
자료에 의하면 1255년 루브류크란 프랑스의 선교사가 중국에 갔다가 거기서 동방쪽에 고려라는 나라가 있다는것을 알게 된다. 그가 중국에서 들은 고려의 발음이 《까울레》인데 그것을 받아 쓴것이 《Corea》란 표기의 시원이다.
조선국호의 외국어표기와 관련한 력사적자료들 가운데서 이것이 가장 오래다. 그후 1296년에는 이딸리아에서 그 표기를 받아 쓰고 1513년에는 뽀르뚜갈에서 우리 나라를 《고레스(Cores)》라고 썼다는 자료가 있다. 1500년대 유럽나라들에서는 우리 나라를 《고레아》, 《고레이》, 《고레스》 등으로 표기했는데 첫 글자는 모두 《C》였다. 1800년대에 들어 서면서 다른 유럽나라들보다 뒤늦게 미국, 영국이 조선과 관계를 가지게 되였는데 당시의 영문표기에서도 첫 글자는 《C》를 썼다. 1882년의 《조미조약》이나 1883년의 《조영조약》에서도 그렇게 표기되였다. 그런데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유럽나라들의 정치권이 약해 지고 미국이나 영국의 정치권이 강화되면서 세계적으로 영문표기법 추세의 바람이 불자 일본은 이를 리용하였다. 조선음 《 》를 영문으로 표기할 때 《C》를 쓰게 되면 《 》와 혼돈된다는 구실로 조선국호의 첫 글자를 《K》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것이다.
1870년대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영국공사 아스톤이 《Korea》란 표기를 썼다는 자료가 있다. 일본은 1902년 저들자신이 제1차 영일동맹조약에서 《Corea》로 하였던 우리 나라 국호의 영문표기를 조선강점직전인 1905년 《가쯔라-타프트협정》에서부터 《Korea》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고 1911년 제3차 영일동맹조약에서도 《Korea》를 썼다.

7. 유구ㆍ존엄 높은 "Corea" 국호표기 역사 갈피 속에 묻혀 둘 수 없어 (3ㆍ1민족대회 중 문영호 조선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장 발제 내용)
세번째 발제를 맡은 문영호 조선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장은 "우리나라 국호의 영문표기에 대한 력사언어학적 고찰"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문영호 소장은 "지난 세기 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한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감행한 온갖 형태의 범죄와 만행 력사왜곡책 등은 류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가혹하고 비열한 타민족 말살과 국권침해 행위로서 반드시 끝까지 계산돼야 할 력사적 과제"라고 주제발표에 앞서 밝혔다.
이어 문 소장은 "국어학자로서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버리고 조선사람의 이름과 성씨마저 빼앗으려고 치졸하며 악랄하게 감행된 일제의 민족말살책동이 궁극에는 우리의 국호표기마저 날조해 버리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문 소장은 800여년 간 사용하던 "C" 코리아라는 우리나라 국호를 서양말로 표기해 온 역사적인 경위와 "Corea"가 국제적으로 공인된 사실과 근거를 설명했다. 우리나라 국호의 서양글 최초 표기는 프랑스인 선교사 "류브큐크"가 1253∼1295년 8월까지 몽골에 파견됐다가 귀국한 후 쓴 여행기와 이탈리아인 "마르꼬 뽈로"가 1270∼1295년까지 서아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원나라에 가서 있다가 귀국 후 쓴 <동방견문록>을 예로 들었다.
또한 네덜란드인 하멜의 표류기의 초판부터 1800년대까지 모든 명칭이 "C"코리아로 사용된 점과 유럽, 미국 열강들과 맺은 모든 조약문의 영어원문판들에서 우리 국호를 "C"로 표기한 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처음을 맺은 조약은 "국서거절사건"으로 결렬된 조미교섭이 청나라와 일본의 공작으로 다시 추진돼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맺은 "조미통상조약". 여기서 조선정부의 인정을 얻은 표기는 "Corea"였다.
하지만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영문 공식 국호를 "C"코리아에서 "K"코리아로 날조됐다는 것. 통감부가 설치된 1906년 관보부터 총독부 관보까지 대외적으로 모든 문서들이 "K"로 바뀌어 인용됐다.
문영호 소장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한일합병 이후 "C"가 사라지고 "K"로 바뀌게 된 것은 인위적인 날조이며, 비과학적인 것을 보여준다"며 "일제가 국제 체육뿐만 아니라 모든 국제 서지에 "Japan" 뒤에 "Korea"로 두게 하려는 일본 고유의 속성의 책동이다"고 주장했다.
또 문 소장은 "이 모든 사실을 봤을 때 국제사회에서 인정되는 것은 "Corea"이며 신성불가침한 상징으로 일본사람들에 의해 유구하고 존엄 높은 국호표기가 역사의 갈피 속에 묻혀 버린데 대해 더 이상 묻어 둘 수 없다"면서 "관련된 역사자료를 북과 남, 해외 학자들이 공동으로 토론과 연구사업을 힘있게 벌려나가 우리 민족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발제를 마쳤다.
한편, 북측의 국호표기문제에 대한 안병욱 카톨릭대 교수는 "북측의 제안은 매우 의미가 있고 이후 남에서도 국호표기 문제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함께 연구해 나가야 할 과제라 생각한다. 그간 남측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학문적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한 현실이므로 국호표기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를 찾아서 남과 북이 서로 비교하면서 맞추어 나갈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북쪽학자 10명의 연구논문을 주제별로 다섯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Ⅱ. 북쪽학자들의 연구
―일제의 영문표기 날조


한 국가의 국호표기는 일반적인 단어표기처럼 누대를 걸쳐오면서 하나의 독립적인 부호가 된다. 그러나 조금 차별된 점이 있다면 역사적 의미와 언어적 의미, 그리고 국제관계적인 의미를 포함하며 고착화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고려시대 이후 대외무역을 활발히 하며 <고려>라는 국명을 이국 상인을 통해서 로 불려져 왔다. 그러한 국호표기는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변용되게 된다. 이 변용은 지극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어서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수백 년간 로 표기되었던 우리 국호가 국제사회에서 로 바뀌게 된 이유는 왜일까? 그리고 그렇게 고착화된 과정은 어떻게 이뤄졌나? 이 글은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로 일제가 어떻게 자 표기에서 자 표기로 바꾸어 갔는지를 세 단계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구한말 조약문 체결 과정에서 표기되는 영문표기에 대해서 알아보고, 세 번째로 일제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 날조하는지, 네 번째로 그 국호의 날조행위가 어떤 범죄적인 성격을 갖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우리의 국호표기사용과 일제의 책동에 대한 역사적 경위
일제의 국호표기 날조행위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를 토대로 일제의 날조정책에 대한 역사적 경위를 개괄하면 다음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우리 국호표기가 자 중심의 표기로 일관된 시기이고, 둘째 단계는 와 의 혼용시기, 셋째 단계는 만 쓰인 단계이다. 그것에 대해서 역사적 근거와 과정을 통해 세부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겠다.

1) 만으로 표기된 단계

13세기 중엽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로 일관되게 표기되었다. 현재 밝혀진 자료로는 1253년 프랑스인 선교사 류브류크가 루이 9세와 로마교황 인노첸시우스 4세의 명령으로 몽골에 파견榮鳴 1255년 귀국한 후 여행기를 발표하면서 중국 동쪽에 있는 나라인 조선을 ‘까올레(caule)’라고 표기한 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늦은 자료로는 아탈리아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까울리(cauly)’라고 표기하였다. 또한 1513년 포루투갈의 ‘Cores’라는 표기기록을 거쳐 유럽 여러 나라들이 자를 첫글자로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후 영어권 나라들에 전승되었다. 1700년대 일부 자료들에 가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개별적인 언어관점에서 쓴 것일 뿐으로 대부분 자로 일관되게 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좀더 유럽의 각 국가들이 자로 시작되는 조선의 국호를 어떻게 표기하는지를 살펴보면, 이러한 표기가 프랑스어나 포루투갈어, 영어 네델란드어 등 어종에 관계없이 유럽 각지에서 첫글자가 로 표기됨을 알 수 있다. 우선 동방침략의 선두주자였던 포루투갈은 16~17세기 자료에서 라고 표기한 것이 발견되었고, 네덜란드 역사자료에서도 로 되어있다. 영어자료에서는 영국 지리학자 리차드 해클류트가 <영국민족의 주요항해. 항해일지 및 발견>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국호를 로 표기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국호표기는 어종에 관계없이 로 표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로 <하멜표류기> 1672년판 독일어번역본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어판을 번역한 것인데 와 가 혼용되었다. 원래 프랑스어의 는 독일어로 전사될 때 로 넘어가는게 보편적이지만 프랑스어에서도 로 표기한 것이 주목된다.

2) 와 의 혼용 단계
이렇듯 1200년대에서 1800년대에 이르는 근 700년간에 걸쳐 고착된 는 1800년대 말 알제의 책동에 의해 를 첫 글자로하는 와 혼용되기 사작했다. 일제는 가 일본의 영어 포기인 보다 영문자모순배열에서 앞선다는 이유로 비과학적인 학술적 근거를 꾸며내어 의 불합리성과 의 합리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친일적인 사양인들에게 표기를 책동하였는데 이것은 1870년대 후반에서 일제에게 강점되는 1910년까지 대외관계의 조약문을 작성하는 시기까지 두 표기를 혼용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조선정부가 처음으로 공식인정한 영문표기가 였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조선정부가 서방과 첫 외교조약을 맺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저약에서 국호의 영어표기를 로 씀으로서 가 국호표기로 정식 인정되었던 것이다.

3) 의 표기가 전용된 단계

우리의 표기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1910년부터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일제는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할 때도 공식적 대외문서에서 로 표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국제적으로 가 아닌 로 시작하는 표기가 전용되었고 이후 일제의 날조 속에 아무런 정치적?학술적 문제제기 없이 국제사회에서 고착되어왔다.
일제의 국호표기 날조는 먼저 외국인들을 내세워 시작해서 영어권의 영향력 확대의 시대적 추세를 이용하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1905년을 전후로 그동안의 절충식 날조에서 벗어나 대외문서뿐만이 아닌 <관보>에서까지 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날조행위는 일제감점 치하의 <민족어말살정책>, <창씨개명>과 함께 언어학분야에서 감행한 역사적 3대범죄라고 할 수 있다.

2. 조약문 체결을 통해본 영문표기

조선은 한말 구미열강과 통상교섭을 하면서 영문국호표기로 당시 일반화되었던 를 택했다. 1880년 5월 미국정부가 통산회담의 전권대표로 미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를 보냈을 때, 그 서한에 한자로 조선의 국호를 <大高麗國>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당시 구미에서 조선을 라고 불렀기 때문에 국호를 한자음역에 충실하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은 그 국서를 접수하지 않았다. 이후 재차 추진되어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때 이후로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과 <조도수호통상 및 항해조약>이 체결되고, 1884년 <조이수호통상조약>,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및 항해조약>이 체결되었으며, 1892년에는 <조오수호통상조약>등이 연이어 체결되면서 공식 국호표기로 를 명기하였다.
이에 따라 의 조선어 역어는 고려가 아닌 조선이라는 것이 규정되었고 조선과 는 1:1의 대응관계에 있고 조선의 공식 명칭을 <대조선국>, 그 영어표기명은 라고 확정하였다. 이러한 조선정부의 국호표기는 칭제건원을 단행한 이후에도 영어대역명을 새로 정하지 않고 <대한제국>을 그대로 라고 표기하였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조선대표단은 라는 국호를 가지고 참가하고 주최측에서도 인정했다는 것은 당시 국제사회가 를 공식국호로 간주한 실례이다.
이러한 표기는 일본의 책동속에 와 로 병행되다가 한일합병조약을 기점으로 로 본격적으로 위조되기 시작했다.

3. 지도와 백과사전을 통해본 국호표기의 변형

역사상 우리나라가 세계지도에 등장한 것은 네델란드인 빼뜨로 프란치오의 <세계지도>(1594)였다. 이후 1595년 포루투갈인 아놀드 랑글렌과 헨리 랑글렌이 작성한 <동인도지도>, 1635년 네델란드인 윌리암 브라우가 작성한 <아시아지도>, 또 그의 아들 얀 블라우가 1655년에 작성한 <일본지도>, 1720년대 독일인 요한 호만이 간행한 <세계지도>, 1748년 프랑스인 파르 벨린이 작성한 <중국제국지도>, 1778년과 1779년에 프랑스인 보문이 간행한 <중국·조선·일본지도>와 <중국지도>, 1806년 독일 와이마르지리학연구소에서 간행한 <아시아지도>, 1840년 프랑스인 모린이 작성한 <중국·일본지도>, 1894년 미국에서 간행된 <은둔국 조선>에 첨부된 조선지도를 비롯하여 16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간행된 지도중 거의 대부분은 우리의 국호를 로 표기하였다.
물론 1734년 러시아인 요한 끼릴로브가 작성한 <러시아지도>와 1840년 필피프 프란츠 폰 시볼트가 작성한 <일본지도> 등에 가 표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러시아인이 작성한 지도에 러시아자모에서 <?>음을 나타내는 것이 밖에 없는 것과 관련된다.
이렇듯 19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간행된 지도에서 로 표기된 우리 국호는 이후 일제가 조선침략을 노골화하면서 대외적 출판물에 공공연히 라고 표기하면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백과사전의 내용을 통해서 가 로 변용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 교체과정도 <영국백과사전>(The Encyclopedia Britannica)의 판형에 따라 살펴보면 앞서의 전용, 와 의 혼용, 그리고 의 전용의 세단계로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1875년판 <영국백과사전> 2권 올림말 에 대한 주석에서 우리나라를 로 표기하고 있고 1876년 같은 사전 5권 에 대한 서술에서도 우리를 라고 기록하였다. 1877뇬 같은 사전 6권에서는 우리 지도를 싣고서 주석에서 ‘조선(Corea)해협’이라고 칭하였다. 1880년판 같은 사전 13권 에 대한 주석에서도 우리를 로 표기하였고 1882년판 18권 올림말 에 대한 주석에서 ‘조선(Corea)해협’이라는 단어와 ‘Corea반도’라고 사용하였다. 이렇듯 이때까지는 엄연히 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19세가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혼용되다가 1890년대 후반부터 라는 표기사용이 많아졌다. 1902년판 <영국백과사전> 27권 올림말 에서는 를 보라는 주석이 주어졌고 그 내용도 부분에서 서술되었다. 이때부터 전의 판과는 달리 가 로 바뀌어 올라진다. 1902년판의 이 사전은 마찬가지로 라는 단어로 우리 나라를 표기하였고, 뉴욕에서 간행된 <새 표준백과사전>(The New Standard Encyclopedia, 전12권) 1906년판 3권 올림말에서도 라는 올림말을 에서 보라고 하고, 6권 올림말 에서는 이라고하며 주석을 주었다. <영국백과사전> 1902년판 28권 올림말 주석에서는 1893년 미국-시카고국제박람회 참가국을 영문자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우리나라를 일본 뒤에 로 표기하였으며, 1900년 프링스-파리국제박람회 때에는 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혼용의 시기를 거쳐 1910년대부터는 완전히 로 사용되었다. <미국백과사전>(The Encyclopedia Americana) 1918년 7권 올림말 주석에서 ‘를 보라’고 되어 있고 내용에는 ‘1910년 8월 29일부터 일본제국의 완전한 속국’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렇듯 이후 국제적인 사전 간행에서 우리나라의 국호표기는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점령하면서 표기로 굳어지게 되었다.

4. 영어 표기명을 날조하기 시작한 일본의 책동

19세기말 일본은 <코리아>의 표기를 날조하면서 친일적 서양인들을 내세우는 방법을 감행했다. 일본은 우선 <코리아>를 로 써야하는 학술적 근거를 유포하였는데, 당시 미국선교사 아펜젤러가 간행했던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 1897년 12월호에는 C보다 K를 쓰는 것이 좋은 이유로, 조선어  의 영어등가물로 C와 K 모두 간주되지만 읽을 때 <기억(ki-ok)>으로 발음하는데 문자 C는 <시억(ci-oc)>으로 옮겨져 혼돈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언어학적 원리에 맞지 않는 표기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코리아> 표기날조의 논거를 친일적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와 외교관들을 내세워 유포하고 합리화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윌리암 조지 아스톤이다. 아스톤은 친일적인 외교관리로서 일본의 조선침략에 정신적 지지를 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1878년 이후 줄곧 를 사용하며 일제의 날조정책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5. 국호표기 날조행위는 국가적 범죄행위

한나라의 국호표기를 일방적으로 날조하는 행위는 그 나라의 자주성을 무참히 유린하는 대 범죄행위이다. 일제는 한일합방을 계기로 우리의 국호표기를 로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는 우리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감행한 국가적인 문서위조행위이다.
국가간 조약문은 조약 체결국 간의 완전합의에 기초하여 내외에 공포하는 것이 초보적인 국제법인데 일제는 제3국의 언어로 공포할 때 일방적으로 번역하는 문서위조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일제는 병합에 앞서 병합 후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하고 실천에 옮기기 위해 설치한 <병합준비위원회>를 통해 구황실대우, 조선인민의 통치방법 등 21개조에 달하는 조항을 검토했다. 이때의 결정이 내각을 통해 <병합실행방법세목>으로 승인을 받았는데 이 <병합실행방법세목>에 합병조약안, 선언문 등을 일제는 영문본에서 우리 국호를 로 써놓았다.
일제는 통감부와 총독부를 통해서 관보를 발행했다. 조선통감부시정년감(1907-1909), 조선총독부시정년감(1910-1941)등의 관보와, 조선의 재정개혁(1906), 조선에서의 새로운 진보(1910), 조선정부년보(1924, 1927, 1931) 등과 같은 도서 등은 당시 우리 상황을 서술한 것들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들의 영문판에서 국호를 로 날조 표기하였다.
또한 이런 날조표기는 내용서술만이 아닌 사료인용문에서도 나타나는데 통감부년감 1908년판에는 <한일의정서>(1904년 2월), <한일협정>(1904년 8월), <한일협약>(1905년 11월), <한국통신기관 위탁에 관한 협정>(1905년 4월)등의 조약문을 인용하면서 조약 체결당시의 원문인 대신 로 날조하여 표기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통계조사보고서나 지도들에서도 우리 국호를 로 표기하여 일본의 국호 Japan다음에 놓고 있다.
이러한 모든 진행은 일본정부의 의사와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직접 지시하여 집행한 것들로 일제의 의도적인 책동이었음이 명백하다. 이후 일제는 관보에서뿐만 아닌 일반도서에서도 날조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그에 대한 통제를 사법, 검찰, 경찰, 헌병대까지 동원하며 강력히 진행하였다.


Ⅲ.식민잔재의 청산운동

1. 일제의 한민족말살정책

광복 60주년을 향해 가는 이때에 우리는 민족 통일을 위한 미래 지표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바른 인식 없이 미래를 조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인식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과업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잔혹한 식민지 통치였던 사실은 이제 많은 분들이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일제의 한국식민통치가 잔혹했다는 논거는 바로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에 근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통치에 있어 군사적ㆍ정치적 탄압, 경제적 약탈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민족을 일본인으로 "同化"하여 지구상에서 영원히 消滅하려고 획책하였다. 일제의 한국 식민지 통치가 세계 역사상 유래를 볼 수 없는 잔혹한 통치라고 비판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 식민통치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민족발전을 위한 올바른 좌표를 설정해야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차지한 수 식민지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을 지구상에서 소멸시키기 위하여 치밀하게 민족문화말살정책을 폈다.
세계 제국주의의 약소민족 침략사에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파괴하고, "同化"라는 명분아래 한국과 한국인의 존재를 역사무대에서 완전히 소멸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은 다양한 형태로 추진되었으나 대체로 식민주의 교육정책, 역사왜곡(식민주의 사학), 神道를 비롯한 일본 종교의 침투, 한국어 말살ㆍ성명 말살(창씨개명), 皇民化 노예정책, 문화재파괴와 약탈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은 초기에는 주로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되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침략전쟁수행을 위한 경제 수탈에 더 비중이 두어졌다. 따라서 민족말살정책의 심도는 더욱 강화되어,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사용하게 하고, 일본식이름으로 개명하도록 강요하는 등 극단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우리민족은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져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1)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은 이미 1906년 통감부 설치시기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일제는 침략의도를 감추면서 "일본은 문명국이고 한국은 미개국"이라는 차별성을 앞세워 한국을 문명화시킨다는 명분아래 "同化政策"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 중 교육정책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는데 요지는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충량"한 노예로 양성할 것, 일본어를 시급히 교육하여 일본인으로 "동화"시킬 것, 단순한 기능인을 양성하는 실업교육에 중점을 둘 것 등이었다.
일제는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사립학교를 탄압하면서 그들이 세운 관ㆍ공립학교를 중심으로 강압적인 식민지 노예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사들은 칼을 차고 제복을 입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교단에 섰다.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은 "一視同仁""內鮮一體"라는 기만적 이론을 앞세워 한국인의 愚民化ㆍ노예화ㆍ親日化를 획책한 것이었다.

2) 한국 역사의 왜곡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은 그들의 한국 침략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고, 한국인의 열등감을 조성하여 독립정신을 근저에서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식민주의 사학은 대체로 他律性論ㆍ停滯性論ㆍ日鮮同祖論의세 가지 논리로 정리된다. 타율성론은 한국사회는 고대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출발했으며 그후의 역사도 계속 식민지적 상황으로 전개되었다는 허황 된 논리이다. 정체성론은 한국역사에서는 발전적역사성을 찾아 볼 수 없으며, 1900년대 한국상황은 일본의 10세기역사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논리이다. 일선 동조론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본래 같은 민족이란 논리로서,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희석시키기 휘한 이론이다.
이와 같은 허황 된 식민주의 사학이론들은 역사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비 학문적 내용이지만, 한국인에게는 민족 열등감을, 일본인에게는 근거 없는 우월감을 조성하였다.

3) 성명말살(창씨개명), 한국어 말살

일제는 1939년 11월 제령(制令) 제 19호로써 조선민사령을 개정하고 1940년 8월 10일까지 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이 성명을 변경하지 않을 경우 사회활동을 할 수 없도록 갖가지 제약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등록 기한 내에 약 322만호(80%)의 한국인이 일본식 성명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철저한 탄압정책에 항거하여 일부한국인은 자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 대신 일본어를 상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민족을 말살하려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1943년 일제는 일본어 보급정책을 더욱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국민학교 부설 일어강습소 개설, 각종 강습회 개최, 『국어교본』(일어)의 배포, 잡지에 의한 강습, 1일 1語운동 등을 추진하였다.

4) 일본 종교의 침투

일제는 1919년 7월 일본의 "天照大神" "明治天皇"을 祭神으로 하는 조선신사를 건립하고, 1935년에는 "조선신궁"이라고 개칭하여 한국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는 그들의 국수 종교인 신도를 앞세워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1933년 神社중심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정신운동이 강화되었는데 이후 신사는 급격히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1,141개의 신사가 건립되었다. 1938년에 이르러 일제의신사 보급정책을 더욱 강화되었다.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조선신궁외 지방의 각 신사에 애국반 단위로 한국인을 동원하여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황국신민 서사제창, 근로 봉사 등의 월례 행사를 강요했다.
기독교 등 종교단체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거부한 인사를 투옥하였고, 거부하는 학교와 교회는 폐쇄하였다. 일제는 신도 외에도 일본 불교ㆍ일본 기독교ㆍ천리교를 앞세워 종교적 침략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삼았다.

5) 일제의 황민화 정책

일제는 1910년 이래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더욱 가혹하게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내선일체" 구호를 내세우며 한국인을 일본 "국왕"의 노예로 만들고자하였다. 황민화 정책 가운데 "황민화 교육"은 중점사업이었다. 황민화 교육은 일본어 상용, 사상통제의 강화, 전쟁에의 동원, 황국신민의 단련 등의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교육 정책은 "황민화정책 월중 행사계획"에 따라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신사참배, 동방요배, 군사교육, 황국신문서사의 암송, 정오묵도 등을 강요하였다. 일에 불응하는 학교는 폐교되었을 정도로 황민화 정책은 폭압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식민지 지배의 일반적 상황 위에 전시체제의 특수 상황이 중첩되어 추진된 식민지 惡政이었으므로 한국인에게는 이중의 큰 고통이 되었다.

6) 문화재파괴와 약탈

일제는 1910년 한국을 병탄하고 조선총독부 내무부 산하에 "고적조사반"을 설치하고 서울ㆍ개성ㆍ평양ㆍ부여ㆍ공주ㆍ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산성 고적을 파괴하고 출토문화재들을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가 우리의 전통 문화재를 파괴, 약탈했던 목적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와 민족사를 은폐하려는데 있었다. 결국일제의 문화재 파괴와 약탈은 한국사의 왜곡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일제가 약탈해간 문화재는 도자기ㆍ불화ㆍ회화ㆍ서적ㆍ불상ㆍ석조물 등 모든 종류에 걸쳐있었다. 일제가 파손한 문화재는 주로 한일관계사에서 일본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제는 1943년 치안유지를 명분 삼아 20개 비석을 파손 철거하였던 것이다. 현재 일본내에서 한국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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